한나라당, 과연 미래가 있나?

만병통치약처럼 된 정치구호가 중도개혁이다. 이데올로기를 탈피한 실용 노선이다. 이런 건 있다. 중도개혁이 좌파적이냐 우파적이냐의 차별은 있다. 김대중 정권이 좌파적이라면 노무현 정권은 좌경화 정권이다. 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좌파 정권이 10년을 집권한다. 건국 후 60년 동안에 좌파 집권 10년이면 상대적으로 보아 긴 건 아니다. 그러나 이로인해 건국의 실체가 상처투성인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는 더 심하다. 중도 우파의 집권 차례라는 시각이 고개를 든다. 선택은 물론 국민이 한다. 그리고 선택 여부의 대상은 한나라당이다. 거대 우파 정치 세력으로는 유일하다. 그런데 이 한나라당이 자중지란이다. 서너 명의 당내 주자가 나서 일찌감치 대선 흥행을 벌인 것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흥행이 저질인 점이다. 관중은 재미가 있어야 구경한다. 재미없는 흥행은 관객이 떠난다. 중구난방의 뻥튀기공약 경쟁이나 비열한 인신 공격에 관중이 흥미를 갖는 시대가 아니다. 그토록 어수룩하지 않다. 한나라당 자체에 문제가 있다. 당이 대선 후보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고 당이 대선 후보에 끌려 간다. 당의 수권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태생이 5공인 것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전두환 정권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서 출발해 3당 합당 등 몇 차례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뿌리는 5공이다. 변화를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치명적인 취약점이다. 농경사회에선 변화가 거의 정체됐었다.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다. 발빠른 변화가 거듭된다. 한나라당 의식은 아직도 산업사회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꼴통’ 소릴 듣는 건 당이 시대적 감각을 소화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 본질을 파괴하는 진보는 다같이 있을 수 없다.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는 독선이며, 본질을 파괴하는 진보는 혁명이다. 한나라당이 독선에 안주하는 것은 자만이다. 지난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요인은 여러가지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만으로 집약된다. 한나라당은 만성적 자만증에서 지금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간의 재·보선 완승, 노 대통령의 여전한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 여론조사의 잇따른 우위, 열린우리당의 적전분열 등 겹치는 호재에 도취된 것 같다. 차기 정권을 벌써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기는지 모르지만 아니다. 올 대통령 선거까지는 아직도 10개월이 남았다. 상황의 가변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 두번도 아니고 몇 차례 거듭될 수 있다. 상대는 상황 창출의 승부사들이며 역전극 연출의 명수들이다. 한나라당이 비록 정권 교체에 실패해도 제1야당의 지위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걸로 여기겠다면 더 할 말이 없다. 이러지 않고 진정 정권 교체의 의지를 가졌다면 당의 자생력 배양에 사력을 다 해야 한다. 당 차원에서 국가 경영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 얼마전에 청와대서 가진 노무현 대통령,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양자 민생회담은 한나라당의 완전한 실패작이다. 강 대표가 이 정부의 민생을 촉구하면서 청와대 회담을 제의했으면 독자적인 민생 방안을 제시하고 관철시켰어야 한다. 한데,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원론적 소재에 원칙적 수준의 합의만 확인하는데 그쳤다. 결국은 청와대의 의도, ‘그래? 민생 문제에 별나고 뾰죽한 게 있으면 와서 한번 말해보라…’는 청와대측 ‘장계취계’의 역이용 계략에 말려든 꼴만 됐다. 당이 국가 경영의 비전을 지니지 못한 탓이다. 열린우리당 모양새를 보고 손가락질 할 때 하더라도 자기 당 돌아가는 것부터 먼저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당이 점입가경으로 돌아가는 판에 남의 허물만 말하는 것은 국민이 볼때 꼴불견이다. 겨 묻은 것은 보고 뭣 묻은 것은 못 보는 우매함과 같다. 한나라당은 중도 우파 개혁정당으로 가야하고 이 길로 가고자 한다면 개혁정당다운 정책적 면모를 국민사회에 각인해야 된다. 시대적 변화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민중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변화를 거부해서는 미래가 막히고, 변화를 수용할 땐 미래가 열린다. 대선 흥행 또한 이 연장 선상에 설 때 관중들이 잇따라 모이고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올 것이다. /임양은 주필

남과 북이 망해가는 데,

남쪽(대한민국)이 망해간다. 북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망해간다. 남쪽은 플러스(+)형에서 마이너스(-)형으로 망해가고, 북쪽은 -형에서 +형으로 망해간다. 남쪽에서 말하는 반란군·공비·빨치산·남부군 등은 남로당 세력의 지칭만 다를 뿐 동종이명의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의 무력 봉기를 토벌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건국될 수도 없었고, 건국이 된 뒤에도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다. 남로당은 1948년 5월 건국을 위한 제헌국회의원 총선을 총검과 죽창으로 일부 투표소를 급습, 양민을 살상해가며 방해 책동을 벌였다. 건국 후에도 경찰관서를 기습하는 등 무력 준동은 여전했다. 6·25전쟁 당시 내각수상이며 인민군최고사령관인 김일성이 남로당 지도자로 부수상겸 외무상이던 박헌영을 전후 미제 간첩으로 몰아 숙청한 것도 이와 연유한다. 인민군이 남침하면 남로당 세력의 무장 봉기가 들고 일어나 절로 적화통일된다는 것이 김일성 앞에서 다짐한 박헌영의 호언장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반란군 또는 공비로 불린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봉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토벌됐기 때문이다. 당시 반란군(공비)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공비 토벌의 최대 경찰조직인 ‘서남지구전투사령관’ 신상묵이 몇해 전 일본 헌병 출신인 게 구설수에 올라 낙마한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의 아버지다. ‘지리산에 드디어 평화의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동지(경찰관)들의 대가를 생각하면 혈루가 쏟아집니다’ 신상묵이 평소 교분을 가진 국군 장교였던 선친에게 보낸 엽서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한 대목이다. 지리산으로 말하면 실종된 내 작은 숙부도 공산주의자였던 터라 지리산 공비의 총사령이던 이현상의 휘하에 있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신 걸로 추정하는 입장이다. 지금 생각하면 반란군이든 공비든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이다. 그들을 이제 빨치산이니 남부군이니 하고 부른 것을 굳이 이해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영웅시하는 풍조는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국기를 위협한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행적을 미화하고, 사상적 그 후예들이 큰 소리치는 작금의 국가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6·25 당시 중학교 2학년생으로 남침 적화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에서 3개월을 살면서 ‘학생전위대’에 불려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적기가’ ‘빨치산의 노래’등을 열심히 불렀다. 한참 부르다 보면 후퇴한 선친 생각에 잠겼던 처음과는 달리 들뜬 곡조에 신명이 절로 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린 마음에도 반복교육의 세뇌공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끼곤 했다. 소년단에서 인민반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자아비판이다, 세포회의다 해가며 회의 투성이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요즘 들리는 북녘의 세태가 나의 체험으로는 이해가 좀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북녘도 달라졌을 것이다. 달라져도 통제사회의 바탕은 달라지지 않았을 터인데, 남쪽 대중문화가 북쪽 주민들 사이에 인기를 끈다고 한다. 중국을 통해 들어간 드라마·영화·가요를 담은 비디오며 CD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머리며, 옷 모양새가 한류풍을 따라 유행하는 것 같다. ‘부르주아 날라리풍을 경계하자’는 사상교양 강화에도 별 신통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언이 좀 과장된 면이 있다 하여도 망조의 조짐임엔 틀림이 없다. 소련의 붕괴는 그 계기가 미국풍의 청바지 유행이 이데올로기 와해의 단초였다. 탈북 입국자가 1만명에 이른다. 여성 가운덴 시내 음식점 같은데서 홀 서빙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홀로 탈북한 사람은 북녘에 두고온 가족과 전화 통화도 한다고 한다. 핸드폰 중계국이 중국에 있는 것은 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섬뜩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한 얘기지만, 이 또한 북의 망조다. 입국을 못하고 중국이며 러시아며 동남아 등지를 떠도는 탈북자가 수만 명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록 핵 무기를 만들어 위협이 되긴해도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남쪽은 -형으로, 북쪽은 +형으로 망해가는 망조에 어느 쪽이 안 망하는가는 어느 쪽이 먼저 망조에 제동을 빨리 거느냐에 달렸다. 생각컨대 북쪽의 제동이 더 어렵다고 보는 것은 인간생활의 본능을 영원히 억압할 순 없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다 같이 흥하는 길이 있다. 북은 +형으로 체제 전환하고, 남은 -형을 공식 자제하는 것이다. 남쪽은 물론이고 북쪽도 흥하기를 바라는 것은 장차 평화통일의 날이 올 때, 남쪽의 통일비 부담 절감으로 더 좋은 한반도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다. /임양은 주필

盧의 개헌 장막

(청와대는) 개헌의 불씨를 열심히 지핀다. 공무원까지 동원한다.(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상의 모든 권한 행사를 가능한한 극대화할 생각인 듯 싶다. 개헌 발의는 기정 사실로 굳었다. 그런데 정작 개헌안은 베일에 싸였다. 2월 임시국회 후 발의하겠다면서도 주물럭거리는 개헌안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알려진 것은 (원 포인트) 한 가지 뿐이다. 이도 그렇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한 번에 치르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두 선거를 일치시키면 엄청난 경제·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이도) 민생사안”이라는 청와대측 말은 찍어다 붙이는 구실에 불과하다. (현행) 국회의원 총선은 대통령의 중간평가이며, 대통령 선거는 국회의 중간평가다. 뭣보다 선거(투표)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수단이다. 선거를 거추장스럽게 여겨선 민주주의를 한다고 할 수 없다. 또 두 선거를 일치시키기 위해 대통령의 5년 단임제를 4년 연임제로 하는 것이 절대적 가치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임기 4년의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3년만 되면 벌써 다음 선거를 염두에 안둔다 할 수 없다.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다) 5년 단임과 4년 연임제는 비유의 상대적 가치성을 지녔을 뿐이다. 주요한 것은 연임과 중임의 용어 차이다. 현행 헌법의 대통령 임기조항은 ‘중임할 수 없다’고 돼있다. 연임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고, 중임은 전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 가령 중임의 제한이 없으면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임기를 건너뛰어) 다시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설 수가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개헌을 말하면서 연임만 입에 담고 중임엔 말이 없다. 청와대 구도의 개헌안에 ‘중임 제한’이 그대로 들어 있는지 뺏는지 모르겠다. 중임 제한이 살아있다 해도 알 수 없는 건 또 있다.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헌법에 고칠 게 많다’고 했다. 하지만 엊그제 가진 지역신문 편집국장·보도국장 청와대 초청 간담회서 나온 말로 미루어선 권력구조 개편은 개헌안에 포함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원 포인트 개헌안만 발의할 것으로도 믿기지 않는다. 다른 또 뭣을 손댈 것인지 궁금하다. 이래서 새삼 말해두는 건 정체성 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토지의 공개념 도입, 기업 문제 같은 게 검토되는 것으로 안다. 토지의 공개념 도입 자체가 부정적인 건 아니지만(난 땅 한 평 없어도) 재산권을 현저히 침해하거나, 시장주의에 반한 기업의 좌편향 규제는 경제질서의 기본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것은 영토 조항이다. (대북 관계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아) 만약에 이를 삭제한다면 건국 이념에 어긋난다. (노 대통령은) 개헌안 발의를 ‘꽃놀이 패’로 삼는 것 같다. 국회에서 빤히 예견되는 대로 부결이 되어도, 아니면 대역전극 통과의 반전이 있어도 다 좋다는 식의 계산이 깔린 게 분명하다. (그것은) 예의 승부사 기질이다. 한나라당은 대선 흥행이 한창인 판에 열린우리당은 지리멸렬하여 점방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대선정국을 개헌정국으로 돌려 발목 잡으면서, 열린우리당 (아니면 통합신당)의 전열을 가다듬는 신장개업 시일을 벌려는 것 같다. 이러면서 개헌안이 부결되면 덤터기를 씌울 수 있는 포퓰리즘적 구실을 작업 중인 걸로 관측된다. 개헌을 둔 민중사회의 얘길 들어봤다. “개헌이고 뭐고 일자리나 좀 주쇼” 환경미화원에 응모했다가 낙방했다는 대졸 실업자의 말이다. “장사가 안되지만 빚쟁이 달려들까봐 문도 못닫소” 한 상인의 코방귀다. “설은 다가오고 수금은 안되고 죽을 지경인데…. 개헌은 무슨…” 어느 중소기업인의 하소연이다. “개헌하면 살림 형편이 펴지나요?” 당장 아이들 학원비가 걱정이라는 주부의 비아냥이다. “몰라요…. 처 자식 먹여살리기도 바쁘니까요” 40대 직장인의 푸념이다. 형편이 나은 공무원은 어떤가 싶었다. “나하고는 관련없는 일이니까” (모르겠다는 것은) 6급 공무원의 반응이다. 한 부유층은 “그런 것 하면 뭣해…”하며 들을려고도 않는다. (대통령은) 개헌은 꼭 해야된다지만 헌법이 덧나 대통령노릇 제대로 못했느냐는 얘기가 세간에 파다하다. 이런 가운데도 (청와대는) 건곤일척의 각오로 개헌의 불씨를 열심히 지핀다. 이상한 것은 개헌의 토론을 거부한다며 불만을 갖는 그들이 개헌안의 정확한 내용은 베일속에 묻어 놓고 있는 사실이다. /임양은 주필

盧 ‘저 포도, 시다’는 건가

“경제가 좋다고 민생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엊그제 밤 10시,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신년 특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민생파탄이란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우겼다. 오늘의 민생문제는 김대중 정부의 가계위기, 김영삼 정부의 IMF 사태에서 물려받은 것이라며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궤변학파는 예컨대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과녁을 꿰뚫었는 데도 화살은 날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화살이 날아간 시간대를 무한대로 쪼개어 구분한 어느 한 순간은 날지 않는다는 것이다. 궤변을 변론의 능사로 삼은 곡론가(曲論家)들인 것이다. 양극화 해소를 민생문제 해결의 전제로 내세우면서 양극화는 미국이나 일본에도 있다고 예를 든 것은 무책임한 논리의 비약이다. 민생안정을 미국이나 일본 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저 큰 빚 안 지면서 노력의 대가가 보장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런데도 악성 가계빚은 가구당 평균 4천만원 대에 이르고 노력의 대가 적정성은 커녕 노력할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다. 민생문제는 경제가 좋아지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민생경제다. 이 정부 들어서서 개인파산자가 9배가 늘고도 잠재파산자가 넘쳐 신용사회가 위협 당한다. 민생파탄 과장론은 대통령 자신은 배부르다보니 민초는 곯는 줄 모르는 생뚱맞은 소리다. IMF 때보다 살기가 어렵다는 원성이 진동한다. 그의 말대로 물려 받았다고 해도 그렇다. 민생을 더욱 더 어렵게 심화시켜 놓고는 남의 탓만 하는 것은 정말 염치가 없다. 방송시간 60여 분 중 약 50 분을 경제분야에 할애한 것은 민생 실정(失政)을 내심 의식한 것 같긴 하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이 자칭 치적으로 밝힌 시중경기, 성장잠재력, 경제환경의 낙관론은 근거가 희박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는 건 그 가운데 들 수 있는 하나의 예다. 중첩 규제로 이리저리 옥죄어 갈수록 어렵다는 말, 그래서 중국 등지로 나간단 말은 들었어도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말은 처음 듣는 소리다. 과대포장이다. 알맹이는 실속없으면서 겉포장만 크게 치장한 과포장인 것이다. 통치자의 어휘와 어의는 듣기 쉽고 분명해야 한다. 말 한 마디 하는데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돌려대는 건 주술과 같다. 시간 할애를 잘못해 말을 다 못한다고 했지만 그보단 말을 지나치게 굴려 시간을 낭비했다. 실제로 대통령의 연설은 말에 최면을 걸려고 드는 심령사를 연상케 했다. 양극화의 깊은 골을 만든 게 양극화를 남의 탓처럼 얘기하는 바로 이 정부다. 중산층을 붕괴시켰다. 2만달러 시대의 국가 전략과 비전이 어떻고 하지만 민중은 2만달러 시대를 실감하지 못한다. 민중이 연설의 유혹에 유혹될 수 없었던 것은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가려운 곳은 발등인데, 신발위만 긁는 꼴인 것이다. 대통령의 언론관은 심히 위험하다. 정부 시책이 제대로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은 게 언론의 왜곡에 있다며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또 언론 탓으로 돌렸다. 정책 실패의 현실 보도를 “흔들어 무력화 시켰다”는 말 부터가 원인 관계의 선후가 바뀐 왜곡된 언론관이다. 비판적인 신문을 권력기관으로 빗대는 것도 당치 않다. 신문이 무슨 권력을 가졌다는 것인가, 다만 독자층을 가졌을 뿐이고 일반의 독자층은 신뢰의 반영임을 대통령은 성찰하여야 한다. 도대체가 신년 특별 연설 방송이 무엇 때문에 있었는지 종잡기가 어렵다. 국민에게 열 시간을 얘기하라고 하면 하고싶은 말을 다 하겠다지만 아니다. 이솝 우화(寓話)에 이런 여우 얘기가 있다. 잘 익은 포도를 따려는 데 너무 높아 아무리 뛰어 올라도 딸 수 가 없었다. 그만 포기하면서 주변에 체면치레로 한다는 말이 “저 포도는 시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은 물려받은 것이고, 잘 안 된 것은 언론 탓이고, 지지도가 추락한 것은 국민이 몰라보는 탓이고, 혼자만 잘했다는 것은 내탓이라는 연설이 되어선 열 시간이 아니라 스무 시간을 해도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임 양 은 주필

盧의 개헌 등 ‘꼼수’

국민을 너무 많이 고생시킨다. 국정 파행, 민생 파탄으로도 모자라 꼼수로 시달림을 주기가 일쑤다. 2003년이던가, 난데없이 ‘국민의 재신임을 묻겠다’는 꼼수를 비롯해서 ‘권력을 통째로 넘겨준다’ ‘대연정의 노래’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꼼수 재주를 부리다가 지난 해엔 ‘임기단축론’을 거론한 게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같은 꼼수가 헌정에 없는 발칙한 얘기로 외통수가 되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더니 엊그젠 난데없이 헌법상의 권리를 들어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이 역시 다만 정면의 모양새만 빌렸을 뿐 정수가 아닌 꼼수이긴 마찬가지여서 국민사회를 끝도 가도 없이 공깃돌 흔들어 대듯이 하여 정말 피곤하다. 그의 품격이 의심되는 꼼수가 아닌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면 설득력 있게 답변해야 할 한가지 주문이 있다. “개헌은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평지풍파를 안 만든다”고 한 취임 3주년의 북악산행 간담회 말과 이번의 개헌 제안의 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겠다. 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 차차 듣겠지만 도대체가 대통령이란 사람의 말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말처럼 헷갈리기만 한다. 원칙에서 벗어난 임기응변의 상황 논리적 주술이기 때문이다. 하긴, “국민의 평가는 완전히 포기해 신경을 안쓴다”는 대통령이 작심하면 무슨 사고인들 못칠까마는 ‘신경을 안쓰는 것’은 고사하고 국민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 피곤하기가 그지 없다. 이젠 3선 개헌으로 장기 집권할 구형(舊型) 독재자가 나올 계제가 못되므로 4년 연임제 검토의 시기가 된 것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5년 단임제가 절대적으로 나쁜 것만도 아니다. 어떻든 개헌은 해도 다음 정권에서 할 일이고, 임기가 불과 1년 남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개헌을 들먹이기 보단 지금부터라도 진정 돌봐야 할 건 절박한 민생 문제다. 그런데 민생을 돌보기는 커녕 마냥 정치 농간에만 신경을 쓰면서, 그래도 잘 한다며 “도대체 잘못한 게 뭣이냐”고 우기는 신형(新型) 독재가 실로 가공스럽다. 좌파 10년 집권에 이어 좌파 정권의 재창출을 지상과제로 삼는 것이 노 대통령이다. 그로썬 지상과제이긴 하지만 여당을 포함한 이 정권의 실정은 국민사회의 지지도가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충격 요법으로 터뜨린 것이 개헌이지만 당치않다. 고약한 속셈은 또 있다. 개헌이 되고 안되고는 둘째 치고 개헌정국으로 국정 파탄의 책임을 물타면서 정치권을 주도, 임기말의 권력 누수를 최대한 막을 요량의 속셈이 깔린 것이 개헌 제안이다. 이만이 아니다. 역시 이밖의 충격 요법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잘 아는 남북정상회담의 물밑 접촉이다. 이의 그림만 텔레비전 화면에 잘 그려내면 민심이 일시에 돌아설 것으로 계산하고 있지만 이도 당치않다. 노 대통령은 술수의 꼼수가 되레 외통수가 된 실패의 전철을 참고 삼아 누구도 감히 반대못할 정면 돌파의 카드로 새롭게 보는 게 개헌이고 남북정상회담인 것 같다. 하지만 개헌 카드는 이미 밝혔듯이 아니다. 다만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자체를 반대할 수 없는 것은 맞다. 그러나 노무현-김정일이 만나 함박웃음으로 악수하고, 믿거나 말거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해서 국민사회가 감동할 단계는 아니다. 그런 건 김대중-김정일 회동 그림으로, 그리고 이어 퍼준 대북지원으로 이미 식상한지가 오래다. 북의 핵무기 폐기 관련의 담보장치 없이 끝나는 남북정상회담은 오히려 부담이 되는 노무현 정권의 멍에로 되돌아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또 있다. 노 대통령이 충격 요법으로 점치는 또 하나의 전격 조치를 청와대는 준비하고 있다. 소식통에 의한 모종의 이 사고 치기는 극약 처방인 걸로 안다. 그러나 이 역시 결국은 꼼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있다. 상대의 꼼수 대응에 실착을 하면 꼼수가 정수로 둔갑된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황당한 대통령이다. 이래서 대통령의 끈질긴 꼼수 도전이 국민사회는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더욱 피곤하기만 하다. 경제점검회의에서 “대통령은 말 좀 아껴달라”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의 말에 “공개석상에서 모욕 주는거냐”며 발끈 받아쳤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그 자신은 막말을 쏟아내면서 선의의 충고는 거부한다. 대통령의 말이 많아서 국민이 슬픈 게 아니라, ‘평화의 바다’ 등, 대내외적으로 말 같지 않은 말이 많아 국민은 또 슬프고 피곤한 것이다. /임양은 주필

金 시장이 요즘?

신정을 앞둔 연휴 기간이었다. 고약한 인심 얘길 들었다. 선거사범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용서 수원시장 얘기다. 재판이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른다. 그에 관심을 두고 화두를 꺼내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는 얘기를 하고자 할 뿐이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다’라고 한다. 근래 유행된 몹쓸 말이다. 이렇게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기회를 넘보는 그런 사람 중엔 개인적으로 김 시장보다 친한 분도 있다. 김 시장이야 얼굴을 마주대고 앉아 얘기 한 번 나눈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공식석상에서 마주치면 스쳐가는 악수를 하는 정도다. 그런데 정말 못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무슨 연판장을 돌리는데, 그래선 안 될 사람들이 서명을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꽁무니 빼거나 아니면 생색 내듯이 하는 족속이 있다는 것이다. 평소엔 ‘(시장님)아니면 못산다’할 만큼 해댄 위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도 염량세태라 할까, 언건 슬쩍 안면 바꾸기의 눈치 놀음이 심한 모양이다. 누굴 탓하겠나, 김 시장 본인의 잘못이다. 세 가지 잘못으로 재판을 받는 걸로 안다. 무슨 기관지를 법정 한도 넘게 찍어돌리고, 서울의 어느 행사장에 자신의 이름을 애드벌룬으로 띄워올리고, 선거공약 가운데 몇 개를 덜 했는데 다 마친것처럼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설령 본인은 모른 과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당사자의 책임이 없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뒤집어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법이 그렇게 됐으니까 죄가 되는 것이고 죄가 되니까 심판을 받겠지만, 그게 무슨 죽을 죄냐는 것이다. 죽을 죄가 되려면 적어도 당락에 영향을 주었어야 할 것이다. 배포되는 기관지를 눈여겨 보는 독자는 사실상 거의 없다. 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받아든 이의 짜증속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이 태반이다. 이런 것을 두고 아둔하게 시정 선전을 한답시고 마구 남발, 예산을 낭비한 죄가 죄라면 더 크다. 또 서울의 행사장 공중에 띄워올린 아무개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수원시장 선거에서 표를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유권자가 과연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흔 가지가 넘는 선거공약 가운데 몇 개는 안 한 것을 다 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과장이기도 하다. 단 몇 개의 수치가 틀리는 것도 용인되지 않을만큼 공명선거의 엄정을 요구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단 이 정도의 과장을 허위로 보는 판단이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가혹함이 없는 보편화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김 시장은 이상하게도 전국의 기초단체장 가운데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선거공약 몇 개 덜한 것을 다 했다고 거짓말 한 것이 당선이나 최다 득표를 한 요인이라고 할 순 있을 것 같진 않다. 선거판에서 남을 비방한 것도 돈을 뿌린 것도 아니다. 이런데도 위기에 처했다고 하고, 이래서 또 인심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 인심의 지레짐작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여기서 걱정하는 것은 지역사회의 인심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아무개, 또 아무개 등 그 누구든 시장노릇 제대로 하기가 어려운데 문제가 있다. 인간사회는 지연 학연 혈연 등으로 갈라질 수 있다. 이를 무시하면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또 인간사회는 지연 학연 혈연 등을 초월해 뭉칠 수가 있다.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생각을 말하고 싸울 때 싸우더라도 뭉칠 땐 뭉칠 줄 알아야 다 같이 산다. 상대를 벼랑으로 내몰면 다음 차례는 자신인 게 세상사 이치다. 만약 내가 김 시장 입장일 것 같으면 법 앞엔 이렇든 저렇든 겸손할지라도 강단은 잃지 않을 것 같다. /임양은 주필

盧, 新사대주의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고, 했던 때가 있긴 있었다. 6·25 한국전쟁 때다. 국군은 구경도 못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38선을 넘어선지 3주만에 낙동강변 한 쪽을 남기고는 남쪽 전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이 됐다. 국군이 육탄으로 탱크에 뛰어들고, 군부대가 옥쇄를 해가며 막는 분전이 전선 도처에서 잇따랐으나 병력과 장비면에서 당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 전사자만도 3만여 명을 내가며 돕지 않았으면 한반도는 56년전에 벌써 적화통일됐다. 이 때 적화 안 된 것을 시비삼는 이상한 족속이 지금 있기도 하지만, 그땐 ‘미국한테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형님 백만 믿겠다”고 한 것도 맞지만 ‘미국 엉덩이 뒤’에 숨진 않았다. 국군은 미군보다 용감히 싸웠다. 국군주력부대가 동부전선이 아닌 서부전선을 맡았더라면 휴전선 철조망이 황해도 해주 이북으로 쳐졌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냐?”며 호통친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고…” 발언이 표현은 거칠어도 일리가 있다고 치자, 한·미동맹 관계를 ‘매달리는 것’으로 본 것은 어폐가 있긴해도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문젠 또 다른데 있다. 미국에 대해서는 공연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무한한 의타심을 인내해 보이는 그의 신사대주의다. 뼛조각 미국산 쇠고기를 못들어오게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중국산 농수산물은 별의별 것이 다 들어온다. 납덩이생선, 물감생선, 중금속미꾸라지 등 온갖 유해물질이 통관된다. 연평도 근해는 한국 영해인데도 중국 어장이 되다시피 했다. 떼거리로 몰려와 조기며 꽃게를 남획해가는 중국선단의 행패에 외교경로를 통해 경고를 촉구했다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했다.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 사회과학원은 정부 산하 기관이다. 이런데도 정부기관이 아니라며 대응기피로 일관한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영산이다. 한민족의 영산을 국제사회에 중국의 창바이산으로 공식화하려 들어도 입을 다물고만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는 남쪽도 북쪽도 다같이 맞대응한다. 일본의 독도 망언엔 남쪽도 북쪽도 다 같이 분노한다. 북쪽이 ‘미제’라고 하는 미국을 남쪽이 ‘미제’라고 까지는 안 해도, 대통령이란 사람이 “미국 엉덩이… 형님 백”으로 비하했다. 그런데 남과 북이 중국한테는 쪽을 못쓴다. 고구려며 발해 역사를 침탈해가도, 백두산을 빼앗아 가도 남북이 다 구린입 하나 뗄 생각을 않는다. ‘중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중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는 것인지 도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북은 중국 덕에 먹고 산다. 북녘 인민들이 그렇게 말한다. 예컨대 석유도 수요량의 70% 이상을 중국이 공급해준다. 북은 그렇다지만 남쪽은 왜 중국에 쪽을 못 펼까, 북녘 때문이다. 북에 그토록 퍼주고도 직접 대고 뭐 큰소리 치는 게 하나 없다. 중국을 통해 달래고 사정한다. 이러다보니 남북이 다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지경이 됐다. 주한중국대사관 직원이 옛 중국사신을 ‘모화관’에 영접했던 일행처럼 방자하게 굴어도 보기만 해야하는 똑같은 세태가 됐다. 북녘이 전쟁을 안 일으킨다는 대통령의 호언에 제시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중국 정부의 그같은 다짐을 믿는데 그친다. 지난 21일은 참 묘한 날이다. 평통자문회의에서 대통령의 작심 폭언이 있던 그 무렵이다. 13개월만에 열린 6자회담은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평양에서는 주먹만한 왕별들을 단 인민군 수뇌부와 주요 지휘관들이 핵보유국에 오른 선군정치 축제에 이어 밤엔 청년남녀학생들의 춤추기 행사가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만일 북의 핵무기를 인정하게 되면 남쪽은 설마 동족에겐 쏘지 않겠지하면서도, 언제 저들의 변덕이 또 달라질지 모르는 주눅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도 평화라고 우기는 족속이 있다면 그 저의가 의심된다. 오늘의 한·미동맹을 사대주의라 할 수는 없다. ‘사시나무 떨듯하고’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식의 동맹관계가 아니다. 위태로운 건 나라의 명운을 아무 담보장치 없이 중국에 거는 신사대주의다. 김정일 위원장은 아마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임양은 주필

盧 대통령의 착각?

도조 히데키는 제2차대전 당시 일본 군벌내각 총리다. 그가 미국의 원자폭탄에 대한 정보를 들은건 1944년 10월이다. 설마했다. 원폭 정보가 일본 첩보기관에 입수된 것도 미국이 고의로 흘린 일종의 심리적 협박일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의 오판은 이듬해 인류사상 초유의 핵 재앙을 일본 국민에게 안겼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이어 11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날벼락으로 그 자리에서 숨진 사람만도 40만 명이 넘었다. 비전투원인 무고한 시민을 이처럼 잔인하게 죽인 트루먼 미 행정부의 인도적 죄업이 크다. 무한한 살육이 자행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비극적 선택이었다고 트루먼은 후에 회고록에서 밝혔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북한이 핵 무기를 사용했을 때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지만 북한은 절대로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북한이 이길 수도 없고, 점령도 못하고, 지배도 못하는 전쟁을 왜 일으키겠느냐”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얼마전 뉴질랜드 순방길에 가진 동포간담회 자리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남북 군사력 균형론이다. 좋은 말이다. 말인즉슨 그렇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오판이 아니기 위해서는 제시돼야 할 몇가지 근거가 누락됐다. 우선 ‘북한은 절대로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대목이 한·미 공조인지, 남한 단독 능력인지가 분명치 않다. 한·미연합사 해체를 가져오는 전시작전통제권의 이양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한·미동맹을 무력화 시키면서 북측이 핵 전쟁을 일으켜도 이긴다는 건 객기다. 한국군 장비중 40%가 낡았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듣기좋게 말하면 구식이고 짓궂게 말하면 고물인 것이다. 북이 핵 전쟁을 일으켜도 한국군 단독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다면 허풍이다. 핵무기 한방이면 끝장이다. ‘대통령이 말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지만 …’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책임을 지는 게 대통령의 소임이다. 국민사회에 자신감을 주기 위한 다소 과장 섞인 말일 지라도 대통령의 말엔 신뢰가 담겨야 한다. 북이 핵을 행사해도 점령되지 않는다는 그의 균형론을 곧이 들을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6·25때 인민군이 서울 외곽에 쳐들어오는데도 “용맹 무쌍한 국군이 38선 일원에서 괴뢰군을 반격하고 있다”던 이승만 대통령의 말이 생각난다. 이런 건 있다. 동족에게, 그것도 줄만큼 주고 있는데 핵 무기를 차마 쓰겠느냐는 마음이다.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생존 수단의 대미 과시용으로 보고자하는 설마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강석주 부상은 “핵무기를 폐기하려면 아예 만들지를 않았다”고 말했다. 또 만들었으면 써야할 땐 쓰는 것이 저들의 계산 방법이다. 혁명과업 수행에서 수단을 가리는 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반혁명적 인식이라는 것이 이들의 혁명관이다. 노무현 정부는 유엔안보리 결의의 대북제재 이행에 거의 뒷짐 지고 있다. 한·미간 불신의 골이 북 핵실험 이후 더 깊어만 간다. 이런 시기에 나온 북이 핵무기를 가져도 위협이 안된다는 투의 균형론은 핵보유국 인정으로 가도 된다는 것으로 들릴 수가 있다. 김정일 정권에겐 듣기싫은 소리가 아니다. ‘북한이 이길 수 없다’는 건 수식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즘 남북정상회담 물밑 추진설이 끊임없이 나돈다.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은 ‘전혀 그런 조처도 구상도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작금의 정황으로 보면 그같은 부인이 되레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반증이 된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장관 시절 남북간에 구체적인 협의에 들어간 적이 있다”고 밝혔다. 정상회담 장소 문제까지 논의된 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정권의 북핵 유화정책은 결국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대북 추파로 비친다. 내년 예산에 대북사업용 남북교류협력기금으로 1조원을 편성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 회담을 위해 북에 보낸 5억달러의 약 곱절이 되는 협력기금 1조원은 노무현-김정일 회담을 위한 지참금인 셈이다. 물론 좋다. 한반도 비핵화로 남북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만나도 자주 만나는 게 좋다. 이런데도 의문을 갖는 것은 6·15 정상회담 결과에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의 선동선전 수단으로 이용된 가운데 대북 부담만 잔뜩 키웠다. 돌아온 것은 핵무기 개발이다. 내년 봄쯤에 두 정상이 회동을 갖는다 해도 역시 크게 기대될 게 없다. 좋은 말은 간곳없고 그림만 남을 것이다. 북측이 미끼로 삼는 것이 정상회담이다. 정상회담을 못 이긴척 수락하여 노 대통령이 만나러 가는 경우가 있게 되어도 알아둘 것이 있다. 국민사회의 관심은 전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정권의 지지도 추락을 일거에 회복하면서, 내년 대선 판도를 확 바꿀 수 있는 또 한번의 깜짝쇼가 남북정상회담이라고 여기면 큰 착각이다. 청와대는 도조 히데키 같은 오판속에 아무래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의도적인가? /임양은 주필

盧는 정말 NO, NO다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승부사다. 그를 한창 밀어붙이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등 당 지도부의 기세가 그만 한풀 꺾였다. 요즘의 열린우리당 형편은 친노세력이 득세한 것 같다. 당 지도부가 수세에 몰린 형국이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호주 국빈 방문 등으로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 떠나면서 남긴 ‘당원에게 드리는 편지’가 그만 친노 당원이 들고 일어서는 기폭제가 됐다. 그의 리모컨 작동으로 몸은 외유 중이지만 청와대에 있을 때보다 더 막강한 화력이 행사됐다. 친노세력은 당헌 당규에 없는 ‘당원대회’란 것을 내일로 잡아 놓기까지 했다. 예정대로 열리면 지도부 성토장이 될 것이다. ‘당원대회’에 참가할 당원은 친노그룹 일색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당파와 친노파가 어차피 한 지붕 식구가 아닌 것은 기정 사실이다. 이미 돌아설 수 없는 강을 건너도 한참 건넜다. 싸우는 것은 명분 챙기기다. 갈라서는 책임을 서로 상대방에게 떠안기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자유다. 그러나 자유스럽지 못한 두 가지가 노 대통령에게 있다. 그 하나는 신당파를 지역당 회귀로 매도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모순이다. 노 대통령의 당선은 97%의 호남 몰표가 안겨준 선물이다. 이런 몰표는 선거사상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당선을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다. DJ의 정치적 양자로 지역당의 몰표를 승계한 노 대통령이 이제는 ‘무호남 무국가’(無湖南 無國家)를 말하는 DJ와 양자 관계를 재확인하면서 지역당을 말하는 것은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다르다. 또 하나의 모순은 당정 분리의 위배다. 겉으로는 이를 내세우며 속으로는 평당원 대통령의 위세로 당 총재나 대표를 겸했던 것보다 더 영향력을 부리고자 했던 것은 과거지사로 친다. 이제 임기가 15개월도 안 남았으면서 정치 개입에 노골적으로 나선 것은 누가 봐도 당정 분리에 어긋난다. 대통령 직분에만 충실해주길 바라는 국민사회의 소망과도 거리가 멀다. 민생은 말로만 챙기고 속은 속빈 강정이다. 이념경제로 오히려 민중의 민생을 저해한다. 대북관게는 핵 무기를 포기케 하자는 것인지, 핵 보유국으로 인정케 하자는 것인지 진의가 아리송하다. 미군용산기지를 이전케 할 것인지, 철군케 할 것인지 정책 추진이 모호하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도 예외가 아니다. FTA를 하자는 것인지, 하는 체만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FTA 제5차 본협상이 영하 15도의 혹한이 몰아치는 미국 몬테나주 빅스카이리조트에서 열리고 있다. 회의 벽두부터 뼛조각 쇠고기 수출을 받아들여 달라는 미국측 요구를 우리대표단은 완강히 거부했다. 본협상은 여전히 난항이다. 그런데 선전 분투하는 대표단을 맥빠지게 하는 것은 미국측이 아니라 서울에서 날아드는 이상한 소식이라는 게 현지 소식통이다. ‘FTA 협상을 다음 정권에 넘길 것’이라는 말까지 들린다는 것이다. 대표단 가운데선 이 때문에 “나중에 청문회에 서는 것 아니냐?”는 자조가 나오는 지경이라고 한 언론은 전한다. 대통령직은 최고의 정상이다. 대통령을 하고나서 더 해야할 정치는 없다. 이런데도 노 대통령은 여전히 현실 정치에 집념을 버리지 못한다. 세상을 휘저어 한 번 확 바꾸려고 했던 흔적이 역연하다. 그런데 휘젓기는 했지만 작심한대로는 바꾸진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청와대 만찬의 감격속에 ‘님의 노래’를 부르며 뜻을 같이 했던 일부의 사람까지도 어쩌다가 등을 돌리게 된 것이 분당 상태다. 하지만 타고난 승부사다. 국민의 지지도가 10%를 밑돌고, 열린우리당이 깨지고, 이래서 한나라당이 다음엔 곧 집권할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게 아닌 다른 계산을 하는 게 분명하다. 지구 저 넘어를 날으는 비행기 안에서 친노 당원의 궐기 소식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세상을 이어갈 후계구도 확립의 밑그림을 구상할 것이다. 뭔가 또 한 번의 깜짝 쇼 연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 된다. 바둥거려도 살기가 고단하다. 살기가 고단한 것은 세상탓이 아니다. 노무현 탓이다. 이 정권이 가져온 양극화는 민중의 삶을 좌절시켰다. 그가 휘저은 세상은 불확실성의 불안, 총체적 불신 사회를 가져왔다. 민중은 그에게 인내하며 이끌려 가기엔 너무 지쳤다. 더 이상 이끈다면 도대체 가고자 하는데가 어딘지 의심스럽다. 민생을 돌볼 줄 모르고, 민심을 외면해가며 잘하는 정치는 없다. 이런데도 잘 한다고 우긴다. 좌파나 우파가 문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되든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자신이다. 달라질 위인이 아니다. 노무현 정치는 이제 이래서 안 된다. /임양은 주필

盧, 그럼 ‘그만 두시지요’

반어법이나 역설변증법은 일종의 자극제다. 그래서 이의 논리 구사엔 한계가 있다. 되풀이 되는 자극에 내성이 생기면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진다. 양치는 ‘늑대소년’의 우화처럼 믿음을 잃는다.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번 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늑대소년’을 방불케 한다. 들어도 신물나게 들었다.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 “국민에게 재신임 묻겠다” “대연정하면 권력 통째로 내놓겠다” “임기단축, 2선 후퇴도 고려한다”는 등등 모두가 비슷한 말들이다. 그 어느 말도 진실이 아니다. 엄살이다. 과장이다. 술수다. 협박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지위에 합당치 않은 수사다. 한 두번도 아니다. 무려 대 여섯 번 째다. 그 자신의 입방아로 자신을 희화화하여 품격을 떨어뜨린다. 이건 대통령의 소박한 이미지가 아니라 무책임한 말 농간이다. 심신 상태를 의심할 지경이다. 대통령의 권한인 인사마다 발목 잡는다고 했다. 더 말할 것 없다. 인사를 개떡같이 사물화하면 비판이 쏟아지는 건 당연하다. 국회의 협조가 잘 안 된다고 한다.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1당인 처지에 할 소리가 아니다. 협조가 잘 안 되는 것은 정권 내부의 문제다. 이를 이유삼아 국민사회에 대고 진담도 농담도 아닌 헛소릴 하는 것은 독선이다. 정기국회가 끝나면 열린우리당을 탈당할 모양이다. 예견된 일이다. 대통령은 이미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버렸고 열린우리당도 대통령을 버렸다. 더 이상 모양새 사나운 버림을 당하기 전에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 탈당 카드다. 중립내각이 구성될 것이라지만 의미가 없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노무현 정부의 칼자루는 어디까지나 노무현의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한자릿 수로 나타났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지지도가 땅바닥을 기는 무력감에 엉뚱한 화풀이를 해대는 것이 예의 ‘임기타령’이겠지만 레퍼터리가 유치하다. 걸핏하면 뭘 잘못했는 지를 구체적으로 대라고도 한다. 알고도 그런다면 궤변이고 모르고 그런다면 자질 문제다. 그간의 실정을 열거하자면 100大 죄상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나라꼴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남북 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다 깽판나도 된다”고 했다. 당선되고 나서 탈당한 민주당 당내 후보 시절에 했던 말이다. 이인제와 경합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청와대 주인인 김대중의 적자를 자임하기 위한 몸짓으로 새겨 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라안 꼴이 딱 들어 맞았다. 어디 성한 데가 없이 도처에 깽판난 투성이다. 그렇다고 남북 관계가 잘 된 것도 아니다. 북녘은 대통령이 안 할 것이라는 미사일을 쏘아댔고, 대통령이 안 할 것이라는 핵 실험도 강행했다. 핵 폐기는 커녕 평양거리는 축제분위기속에 기고만장하다. 포용정책이 되레 포용당했다. 햇볕정책이 불바다정책이 되어 되돌아올 판이다. 남북관계가 잘되고 다른 게 깽판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남북관계도 다 깽판난 꼴이 되고 말았다. 프로레슬링을 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코너에 몰려 상황이 불리하면 상대에게 죽는 시늉을 다 한다. 그러다가 상대의 공격이 느슨해지면 벼락같이 되몰아친다. ‘임기타령’을 늘어놓을 때마다 코너에 몰린 프로레슬러의 죽는 시늉을 연상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래도 강자다. 지지도가 땅바닥을 기는 ‘늑대소년’처럼 보여도 대통령의 권능은 막중 막강하다. 노 대통령이 이런 권능을 막강한쪽 보다는 막중한쪽으로 행사하면 좋겠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퇴임후에도 정치 언론투쟁을 하겠다는 분이다. 하물며 재임 중엔 더 말할 게 없다. 대통령이 한마디 던진 ‘임기타령’으로 정치권이 적잖게 술렁거린다. 열린우리당은 신당파의 결별설이 나오는 가운데 친노파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다. 한나라당은 내년 대선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 세운 채 예의 주시 중이다. 대통령은 자신의 말 한마디로 일어난 응수 타진의 파장을 감상하며 다음 포석을 구상할 것이다. 이래 저래 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민생이다. 대통령의 정치 신선놀음에 민중의 민생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정말 역겨운 게 임기를 빌미 삼는 대통령의 도박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즐겨 써먹는 것 같다. 누가 그만두라고 한 것도 아니다. 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니다. 이런 데도 우정 즐기는 ‘임기타령’에 그 자신이 즐기는 반어법으로 한 마디 하겠다. 정 그러시다면, 그럼 ‘그만 두시지요’ /임양은 주필

盧 대통령, 이게 뭡니까?

‘주인이 배부르다 보니 머슴 배곯은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머슴이 아닙니다. 서민층이 머슴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주인이고요. 말씀하는 것 보면 정말 속 터지는 물정모른 소리만 하잖습니까. 나랏 돈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청와대에 들어가면 그렇게 되는 건가요. 일찍이 진영 땅에서 고생했던 가난은 깡그리 잊고 남은 건 오기 뿐인것 같습니다. 머슴꼴이 된 민중의 원성이 이렇습니다. 하긴, 측근들은 주군의 인덕을 칭송하더군요. “예전에 함께 고생한 사람들과는 콩 한쪽도 나눠먹는 식으로 챙겨주는 의리있는 분”이라고요. 그렇습니까, 정부 산하의 자리라고는 자리마다 코드인사로 채우는 말이 나온 끝에 나온 얘깁니다. 이 정권 들어 새 판으로 잘사는 것은 신기득권층인 ‘노무현 사단’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이 사갈시하는 구기득권층도 여전히 잘 삽니다. 죽어나는 것은 중산층에서 몰락한 영세 서민층입니다. 절대 다수의 국민사회 계층이지요. 도대체 뭣 하러 대통령을 하십니까, 국민 잘 살게 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살기가 이토록 고단하기만 합니까. 전임 시절의 IMF 사태를 탓하지 마십시오. IMF 때도 이러진 않았습니다. 이미 실패한 정책 실험은 이제 그만 하시지요. 그 망할 정책 실험 때문에 민중은 초주검 맛입니다. 연못에 던지는 돌멩이에 노상 얻어맞는 개구리꼴입니다. 갈수록 벌어 먹기가 영 신통찮으니까요.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경제가 지금처럼 나빴던 적은 일찍이 없습니다. 길에 나가면 널린 가게가 잘되어 문을 연다고 생각하시면 착각입니다. 그나마 문 닫으면 빚쟁이들 한테 쫓기기 때문에 닫지못하는 가게가 태반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전 국토를 투기지역으로 만들다시피해가며 신도시 아파트값만 잔뜩 올린 부동산정책은 어차피 내집 마련을 체념한 돈없는 민중은 상관없다고 쳐도, 사람답게 벌어먹고는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나친 좌파적 실험정책이 빚은 병리현상이 아닌가요. 높은 재정 의존도에 기대는 분배는 혈세 낭비입니다. 성장속에 분배로 가는 균형이 참다운 복지사회라고 믿습니다. 이런데 유보율이 600%에 이른다고 합니다. 10대 재벌의 유보율은 710%라지요. 투자가 기피된 수십조의 돈이 겨울잠을 자는 것입니다. 생산자금으로 물꼬를 트지못한 수백조의 부동자금은 부동산 투기에 몰리고 있고요. 기업을 틀어 옥죄는 반기업정서의 조장 때문입니다. 투자가 없는데 어떻게 성장이 있고, 성장이 없는데 어떻게 민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국의 지방법원은 법원마다 파산신청 심리로 판사가 격무에 시달리고, 게시판마다 연일 면책공고와 경매공고로 도배질을 합니다. 역대 정권에서 볼 수 없었던 이런 파산 사태가 사태 나는데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실 겁니까. 수원지법에서만도 올들어 파산자가 지난해보다 3배나 늘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12만명의 파산자가 발생, 이들이 진 빚 10조원 중 상당부분이 금융기관의 손실부담으로 돌아갔습니다. 문제는 실제론 파산상태에 처했으면서 파산신청을 내지않은 잠재파산자가 약 8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의 심장인 투자가 멈추다시피 됐기 때문입니다. 국내 기업의 바탕은 시장주의가 토양입니다. 모든 것이 시장의 기능에 의해서 조율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도도 아닌 좌파적 관치로 기업을 과다규제하다 보니 생소한 토양에서 기업이 뿌리를 더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 특히 재벌기업의 못된 버릇을 고치는 덴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제의 체질을 고치는 것이라면 다릅니다. 시장주의의 본질적 정체성을 뭘로 고친다는 것입니까. 제발 민중의 고달픈 삶을 더 어렵게 만들지 마십시오. 살기가 어렵다 보니 부부싸움이 잦고 부부싸움이 잦다보니 어느 한쪽이 집나가고, 심지어는 부부가 각기 가출해버려 고아 아닌 고아가 생기는 가정이 수두룩합니다. 경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많은 자살자가 속출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닙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는 데 민중은 도대체 어디에 삶의 희망을 걸어야 합니까. 정치는 이념의 수단입니까, 아닙니다. 민생의 수단이 정치일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본다”는 말씀을 잘 하시지요. 그래서 크게 보아도, 더 크게 보아도 아무래도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지요. 루이 16세가 있었지요. 당신은 그런 분은 아니잖습니까. 그가 빵을 달라고 아우성 치며 시위하는 민중들에게 그랬다지요. “빵이 없으면 고길 먹으면 될 것을…. 바보 같은 것들.” /임양은 주필

‘수원계명고’에 마을버스를

삭풍이 매섭다. 삼삼오오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인들은 가슴을 웅크린다. 가슴은 움츠러 들어도 마음은 활짝 피어난다. 젊은이들이 뭐라고 재잘대며 무리지어 간다. 찬바람 속에 걷기가 짜증난다. 그래도 마음은 마냥 즐겁다.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104의4 계명고등학교 학생들의 등교 장면이다. 배움으로 노소동락하는 노소공학(老少共學)이다. 평생교육의 대안학교다. 젊은시절 배움의 기회를 놓친 노인들, 다른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 두게 된 학생들이 정규 고등학교 과정의 배움을 부활하는 학교다. 물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순탄하게 진학한 학생들도 많다. 학생수는 500여명이다. 이달순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평생교육이라니까, 대학에서 흔히 하는 비정규과정의 단기강좌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서 화가 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평생교육, 대안학교를 잘못 아는 그릇된 일부의 인식이 몹시 불쾌한 듯 했다. 노소공학은 공생의 관계다. 젊은 학생들은 어른들이 갖는 만학(晩學)의 열기에 배움의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된다. 노인들은 막내나 손주 같은 젊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삶의 재생으로 안다. 이러면서 노인들은 젊은이 사랑, 젊은 학생들은 어른 공경의 인간애를 형성한다. 이 학교엔 문제아가 없다. 더러 다른 학교에선 말썽을 피웠던 학생도 이 학교에서는 양처럼 순한 학생이 된다. 학교에서 인격을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교칙 같은 것도 학생들 입장에서 만들었다. 예컨대 두발은 어떻게 하든 자유다. 불필요한 규제는 최대한 풀어 편안하게 해주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규제는 자율적으로 실천케 한다. “어른들도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한다”는 게 학교 당국의 말이다. 특강교육은 인격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수성 전 총리 같은 저명인사의 초청 특강도 있었지만 농구선수인 허재씨 같은 주로 전문인들의 특강이 많다. 이같은 특강은 젊은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자랑이 되기도 한다. “야! 너희 학교는 허재가 왔다 갔다며!!” 다른 학교 학생들이 이처럼 부러워 하는 소릴 이 학교 학생들은 곧잘 듣곤 한다. 졸업하면 비교적 취직이 잘된다. 사회의 각종 기술분야와 제휴, 특활로 교육받은 분야엔 거의 취업을 한다. 일종의 산학협동이다.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진학 또한 많이 한다. 지난 번엔 20여명이 대학에 갔다. 그중엔 60대 할머니가 있었다. ‘그 나이에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고 한다면 뭘 모르는 소리다. 젊어선 가난으로 배우지 못했다. 결혼해서는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뒷바라지 해가며 때론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나니 자신은 이미 늙었다. 그 할머니는 배움의 성취욕으로 자신의 새 인생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고, 그리고 성공해보인 것이다. 오늘은 2007학년도 대입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이 학교에서도 30여명의 학생이 시험을 보았다. 아침엔 빙점의 날씨였다. 비록 추웠지만 마음은 푸근했을 것이다. 학교생활을 즐기며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달순 교장 선생님이 부임한지 꼬박 이태가 된다. 전엔 평생을 대학에 몸담았던 수원대 명예교수다. 올해 일흔세살이다. 계명고등학교에 부임한 걸 교육자로서 마지막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천혜의 기회로 알고 온갖 심혈을 기울인다. 학교 증축을 위해 도교육청이며 시청이며, 또는 대학 등 여기저기 안다닌 데가 없다. “선생님들이 일은 두 배나 한다…”면서 처우를 맘과 같이 못해주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긴다. 이러는 가운데 학생들을 위해 갖는 간절한 소망이 마을버스 연장 운행이다. 학교 앞까지의 시내버스 운행은 대로에서 한참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야 하므로 노선이 될 수 없다. 방안은 마을버스 연장 운행이다. 지금의 마을버스 종점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5~30분 거리이지만 버스로는 약 8분이면 된다. 그런데 이 연장운행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고 있다. 수원시청에 수차 진정을 했는데도 여전히 ‘불가’ 통보다. ‘민원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행정명령을 내려서라도 운행케 해야할 일에 무슨 ‘민원 야기’란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답답한 학교측은 마을버스측에 연장운행에 소요되는 연료를 대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도 아니다. 학교 부근에 500평 부지 규모의 차고를 만들면 운행하겠다는 것이나, 그럴 여력이 있으면 아예 자가용 버스를 사서 운행할 수 있는 것이 학교측 입장이다. 수원시청이나 마을버스측이나 다 사정이 있긴 하겠지만 경직된 행정이 너무 답답하다. 학생들은 오늘도 삭풍이 매서운 등굣길을 25~30분 걸어서 간다. 노인학생들도 걸어서 간다. /임양은 주필

吳越同舟, ‘南北同舟’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춘추시대 오·월 두 나라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고사다. 남쪽의 햇볕정책과 북쪽의 핵 실험이 새로운 고사로 전할 동상이몽의 ‘남북동주’(南北同舟)를 방불케 한다. 월왕 구천(句踐·?~BC 465)은 오왕 부차(夫差·?~BC 473)의 아버지 합려와 싸워 그를 죽인 사람이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위해 섶나무 위에서 잠자며 복수심을 불태운 끝에 마침내 BC 494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계산(중국 동남부 절강성의 명산) 싸움에서 구천에게 패배를 안겨 항복을 받는다. 부차의 노비가 된 구천은 부차가 마차에 오르내릴 때마다 땅에 엎드려 등받이 발판이 되고, 마차를 끄는 말앞에서 고삐를 매고 말과 함께 달리며 마차를 끌곤 했다. 노비생활 3년만에 오나라의 속국이 된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은 10여년동안 쓸개를 핥으면서 설욕을 위한 양병(養兵)을 부차 모르게 은밀히 힘쓴다. 양병설이 부차의 귀에 들어가 부차는 월나라로 직접 가보지만 그땐 구천이 이미 군대를 심산 깊이 숨긴 뒤다. 구천이 오나라에서 부차의 노비생활을 면하고 월나라로 돌아가 비교적 자유롭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나라 태재(太宰) 백비의 두둔이 크게 작용했다. 반면 상국(相國) 오자서는 회계산에서부터 투항한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부차에게 주청했다. 오자서는 이후에도 구천의 귀국을 반대하고 양병설 또한 사실로 보고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백비는 구천의 죽임을 그때마다 반대했다. 구천을 살려 월나라를 이용하는 것이 오나라의 부국강병에 도움을 가져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왕 부차는 항상 백비의 말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구천의 양병설로 월나라에 갔을 때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만약 구천이 군대를 길렀을지라도 용서하려고 했다”고 했다. 연유는 부차가 꿈꾼 중원(中原·황하지역) 원정에 구천의 군대가 도움이 될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움이 될 것으로 알았던 구천의 군대는 자신의 뒷덜미에 비수를 꽂았다. 부차가 원정을 나가 오나라를 비운 새에 구천은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기습한다. 황급히 회군한 부차는 연전연패 끝에 항복을 요구하는 구천 앞에서 “난 너와 다르다”며 투항을 거부했다. 이때가 BC 473년이다. ‘사기’(史記)는 이렇게 전한다. 사람됨이 요즘말로 부차는 단순했고 구천은 교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그렇지만 일깨움은 있다. 부차가 구천을 죽이지 않고 나중에 월나라로 되돌려 보내기까지 한 것은 지금말로 하면 포용정책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그토록 베푼 관용은 복수의 악순환을 그만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지 모른다. 그래서 기회있을 때마다 구천을 죽여야 한다는 오자서의 주청을 끝내 뿌리친 것은 햇볕정책이다. 월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땐 만섬의 구휼미를 보내기도 했다.(오자서는 자신의 주청을 고집하다가 부차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고, 오나라가 구천에게 망할 것을 알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무려 2천460여년 전의 일이다. 월왕 구천이 여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가 죽으면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던 때의 일이니 아득한 옛날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역사의 무대는 달라도 역사의 공식은 동일하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21세기형 현대판 오월동주다. 동포이기 때문에 남북간의 언어는 같아도 뜻은 판이하다. 가장 많이 쓰는 ‘민족’이란 말은 대표적인 예다. 이쪽에선 열린 뜻의 ‘민족’인데 비해 저쪽에선 닫힌 뜻의 ‘민족’을 말한다. 똑같은 말인데도 ‘개방형’과 ‘폐쇄형’의 정반대 의미를 지닌다. 같은 ‘통신’이란 말도 저쪽에선 방송을 포함한다. 혁명 수단화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만이 아니다. 핵 실험을 해놓고도 “비핵화 선언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어길 생각이 없다고 우긴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언행의 표리가 부동하다. 퍼주는 대북지원으로 평화가 정착된다면, 평화를 돈 주고 사야하는 건 맞다. 그러나 언젠간 평화는 깨지고 퍼준 돈으로 만든 비수가 이쪽 뒷덜미를 위협할 공산이 높다. 동상이몽의 ‘남북동주’인 것이다. 오나라 멸망을 앞두고 백비는 승승장구한 구천에게 신(臣)을 칭하면서 ‘오왕 부차를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나 구천은 자신을 죽이지않고 살도록 해준 은인을 조롱하며 거드럼을 피우자 그만 자결한다. “이 백비의 호의를 이렇게 악용할 줄 차마 몰랐다”는 절규가 마지막 터뜨린 분통이었다. 부차 역시 다를 바 없다. 구천이 ‘대왕’이라고 신칭(臣稱)했던 부차에게 ‘너’라며 “너의 아량과 인덕으로 오늘이 있게 됐다”고 했다. 부차는 “세상에 아량(포용정책)과 인덕(인도주의) 따윈 소용없다. 오직 음모만 있을 뿐이다”라며 자신의 칼을 가슴에 꽂았다. 일찍이 오자서의 주청을 듣지않은 걸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상호주의 포용이 아닌 추종주의 포용이 빚은 화근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아, ‘아리랑’!

응어리진 한(恨)의 딱딱한 고체를 흥(興)이 영롱한 오색빛 부드러운 기체로 승화시킨다. 생활의 혜지다. 우린 선세(先世) 적부터 이렇게 살았다. ‘아리랑’은 그같은 정서가 시대와 공간을 통틀어 함축된 겨레의 가락이다. ‘아리랑고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지방에 더러 있는 아리랑고개는 자작이지 원래의 기원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리랑고개’는 많다. 우리의 가슴마다에 자리잡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면 웬지 서럽다. 서럽다가도 신바람이 난다. ‘아리랑고개’는 한과 흥의 고비를 이루는 마음의 고개인 것이다. 무형의 정서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아리랑고개’다. 그리고 이를 받쳐주는 변이여음이 ‘아라리’며 ‘스리랑’ 등이다. 아리랑의 유래는 모른다. 국문학계가 추정하는 아랑설과 아이롱설은 조선시대가 배경이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의 전설이 곧 아랑설이다. 또 대원군 때 경복궁 공사를 벌이는 민초들이 원납전 강요를 듣기도 싫다며 불렀다는 것이 아이롱설(我耳聾說)이다. 알영설도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을 찬미한 데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아리랑’의 유래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조까지 광범위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신라의 처용무같은 향가(鄕歌)나 백제의 정읍사 같은 창사(唱詞) 그 어디에도 ‘아리랑’이란 구절은 한 마디도 안 보인다. 고려도 그렇고 조선의 가사(歌辭)나 별곡(別曲)에도 역시 단 한 마디가 없다. 그러나 ‘아리랑’ 가락은 꾸준히 번창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신민요아리랑의 효시인 ‘경기아리랑’이다.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있다. ‘아리랑 맘보’ 같은 가요 아리랑도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에서 부른 ‘독립군아리랑’이 있다. 중국 ‘연변아리랑’이나 카자흐스탄 2·3세들이 즐긴다는 ‘고려아리랑’같은 해외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이 또 있다. ‘아리랑’의 국문학적 구분은 문외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리랑은 민초들의 노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리랑’처럼 가락이 다양하고 가사가 다량인 노래는 참 드물다. 본조 아리랑 외에 별조 아리랑이 있고 사설(辭說) 또한 부지기수다. 그러나 음률의 기본이 있다. 장단의 기조가 세마치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세마치는 대장간의 소리다. 쇠를 불에 달궈 불릴 때에 세 사람이 큰 망치로 돌려가며 치는 장단이 세마치 장단이다. 대표적 전래의 민속 장단인 것이다. 보통 빠른 3박자로 나간다. 어쩌면 ‘아리랑’의 원류는 대장간에서 시작했을 지 모른다. 대장간은 수공업시대에 농기구를 만드는 본산이었다. 농경사회에서 더 할수 없는 귀중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장간의 장인(匠人)인 대장쟁이는 더 할수 없는 천민이었다. ‘아리랑’의 기본이 세마치 장단인 것은 결국 상놈사회의 가락이었을 공산이 높다. 양반사회의 시가(詩歌)가 상놈사회의 가락을 기록에 담지않은 것은 당연하다. 이런 가운데도 ‘아리랑’가락은 밑바닥 생활속에서 줄기차게 이어졌다. 비록 줄기차게 이어지긴 했지만 상놈사회는 글을 모른다. 이래서 구전(口傳)민요로 전해진 게 ‘아리랑’이다. 구전은 시대에 따라 첨가되기도 하고 개작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리랑’이 겨레의 가락으로 널리 발달된 것은 난세였던 조선조말에서 일제치하 때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란 말이 인사가 됐을만큼 밤 사이의 변고가 심하고, “진지 잡수셨습니까”가 인사말이 될 정도로 먹거리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당시 발달한 ‘아리랑’ 가락이나 사설은 이처럼 어려웠던 민생 가운데서 희망을 반추했던 것이다. 6·25 한국전쟁을 마지막으로 그같은 세월은 다 갔는가 싶더니 세월이 또 하수상하다. 시대가 다른 세월이다 보니 이 시대 민초의 상놈사회 걱정 또한 선대(先代) 때완 물론 다르다. 그러나 같은 것은 벼슬사는 높은 사람들은 민초사회의 근심 걱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오기로 막가는 노무현 대통령은 민초의 해일같은 원성을 사고 있는 장본인이다. 도대체 그가 누군지 궁금하다. 요즘 같아서는 하루 하루가 불안하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는가 싶어 분한 마음도 솟구친다. ‘아리랑’을 불러본다. 무슨 아리랑이든 상관이 없다. 가사를 다 모르면 흥얼거리면 된다. 속상한 맘을 삭인다. 한(恨)을 가슴에 묻어두고 흥(興)을 돋운다. 위기를 타개하는 ‘아리랑고개’의 고비가 언제쯤 어디인 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 의해 창건된 주체형의 혁명적 맑스(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조선로동당규약 전문의 첫머리 대목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주의를 마르크스 이론의 혁명적 실천가인 레닌을 통하여 발전한 것이 전문 첫머리가 밝힌 마르크스-레닌(ML)주의다. 그러나 평양정권은 1848년2월 마르크스가 발표한 사회주의 운동의 비조라 할 공산당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공산당선언 3장에서 경고한 사회주의적 유파의 반동성·보수성·공상성의 수정주의를 걷고있는 것이 평양정권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경계한 종파주의 집단이 또 평양정권인 것이다. 김일성주의는 공산당선언을 위배한 수정론이며, 혈통승계의 근간인 수령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배치된다. 그런데 조선로동당 규약 전문 첫대목에 나온 ‘주체형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 당이다’에서 ‘주체형’이란 말은 주목할 부분이다. 김일성주의 수정론과 혈통승계의 수령론 뿌리를 바로 여기에 두고 나온 것이 주체사상, 즉 우리식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하긴,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중국이나 베트남 등 역시 공산주의 원전과는 거리가 먼 현실을 가고 있다. 다같은 수정주의자인 것이다. 그렇긴 해도 중국이나 베트남 정권은 종파적 집단이 아닌 점에서 평양정권과 본질이 다르다. 동포끼리인 남북대화가 이민족인 중국 베트남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연유가 이 때문이다. 예컨대 베이징이나 하노이에 가서는 마음대로 다닌다. 많은 남쪽 사람들이 평양을 다녀왔지만 마음대로 다닌 적은 없다. 안내원이란 사람의 감시자를 따라야 한다. 우리식사회주의는 폐쇄사회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체제 유지를 해치는 외부의 물결, 특히 자유의 바람을 경계한다. 개혁 개방을 하면 중국처럼 생활이 나아질 것을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다. 개혁을 하면 정권 유지 수단인 종파집단이 깨지고, 개방을 하면 혈통승계가 불가해지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평양정권의 장구한 수명은 정치학의 세계적 학문 연구 과제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이래 58년을 장기집권 해왔다. 또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대를 이어 지배한다. 3대 승계까지 획책한다. 그 어디에도 이런 나라는 없다. 로동당 규약은 헌법보다 우위에 있다. 내각은 당의 하수인 구실에 불과하여 총리는 권력서열이 두자릿 수에 머문다. 선군정치란 군사정권이다. 이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입대 경험은 없어도 국방위원장 자격으로 “장군님”이다. 희한한 것은 이런 평양정권을 극구 찬양하는 남쪽 사람들이 엄존하는 사실이다. 박정희 18년 집권은 장기집권이라고 매도하면서, 대를 이어 충성을 요구하는 혈통승계 집권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전두환은 군사정권 수괴라면서도 평양 군사정권은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의 둔사를 일삼는 이들에게 북에 가서 살라면 정작 못살 위인들이 선전선동의 동조에 혈안이 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안잉(岸英)은 ‘조선전쟁’(6·25) 때 중국의용군으로 참전, 1950년 11월25일 아침 한 동굴에서 미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숨졌다. 당시 안잉은 28세로 신혼이었다. 다른 무명용사와 똑같이 처리하라는 아버지 마오쩌뚱의 지시에 따라 평남 회창군 ‘중국의용군혁명열사묘’에 묻혔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국부 호치민(胡志明)은 독신이기도 했지만 평생의 의식주 생활을 인민들과 똑같이 검소하게 했다. 베트콩의 물불을 가리지 않은 저항정신은 그같은 지도자에 대한 신뢰의 결집이었다. 마오쩌둥이나 호치민의 면모는 곧 혁명 지도자의 도덕성인 것이다. 배곯아 속속 대거 탈출한 인민들이 중국 러시아 태국 등을 방황, 국제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어도 평양정권은 도덕적 자책은 커녕 수치를 모른다. 되레 식량 원조를 당연한 것처럼 구걸한다. 잇따른 말썽으로 끌어온 국제사회의 관심을 생존 수단으로 삼는다. 점점 높아진 말썽의 수위는 이제 극에 달해 핵 무장으로까지 갔다. ‘미국놈에게 대항하기 위해 잘했다’는 남녘 사람들이 있다. 북녘 인민의 기아엔 침묵하면서 점심 굶는 이쪽 아이들 일엔 비방만 일삼는 족속들이다. 북핵의 ‘미국놈’은 구실일 뿐이다. 남반부 해방을 아직도 공식화한 남쪽 사람들 머리위가 위협의 대상이다. 능력에 의해 기여하고 수요에 의해 공급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 사회주의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우리식사회주의가 이런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지는 오래다.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했지만 해도 이상한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하필이면 동족이다. 중국의 친중(親中) 궁정 쿠데타 구상설 외신이 주목을 끈다. 신뢰성은 의문이지만 중국은 북녘 석유 소요량의 70%를 제공한다. 평양정권의 혈통승계가 붕괴되고 나서 들어서는 새로운 정권은 과도기적 내부 요동이 있어도 결국 중국식 개혁 개방의 문호를 열 것이다. 참다운 남북대화가 또한 가능해진다. /임양은 주필

김문수 ‘대권병’ 들었나?

경기도지사 김문수의 ‘대(大)수도론’, 그의 정치구호 1호다. 헛발질이다. 아니 자책골이다. 공허하고 공연한 정치구호로 비수도권의 대(對)수도권 견제의 화근을 키워 성장동력의 수도권 저해와 국익을 해친 이타(利他) 행위다. 수도권 광역자치단체의 연대행정이 본질이라면 정치색을 깐 ‘대수도론’보다는 형해화한 ‘수도권행정협의회’의 활성화를 모색했어야 한다. 이는 지방자치법상의 법정기구다. 처음 서울시와 경기도 인천시만으로 구성된 ‘수도권행정협의회’는 강원도와 충청북도까지 포함됐다. 그만 상호 협의 미숙으로 긴 잠에 빠졌지만 엄존하는 협의기구다. 사실은 김문수가 내건 팔당호 수질 1급수 개선 역시 상류 수계인 강원도와 충청북도도 협의 대상이므로 ‘수도권행정협의회’ 차원의 논의가 제격인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뜬금없는 ‘대수도론’을 들고 나온 덴 까닭이 있다. ‘수도권행정협의회’는 말 그대로 행정적이다. ‘대수도론’은 정치적이다. 이를 내세워 수도권에서 정치적 주도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 판단의 배경인 것이다. 실제로 ‘대수도론’은 누구보다 동반자여야하는 서울시나 인천시측에서 아주 냉담하다. 이유가 있다. “정치색에 왜 들러리 서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 들린다. 결국 ‘대수도론’은 딴 생각을 지닌 정치적 의도의 포석이었던 것이 시작부터 패착이 되고 말았다. 도지사 김문수를 평가하기는 1년도 안되어 아직 이르다. 언제부턴가 유행이 된 ‘취임 100일’이란 홍보가 있다. 갓난애 백일도 아니고 ‘취임 100일’의 ‘100’ 수치엔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덕담 수준일 뿐이다. 여기서 보는 김문수 도정의 싹수는 파랗치만은 않다. 노랗치도 않다. 더 지켜봐야 할 색깔이다. 예컨대 뻥뚫린 서울 중심의 방사형 순환교통망 도로를 만든다지만 수 조원, 아니면 두 자릿 수 조(兆) 단위가 들 재원이 궁금하다. 지방세 체납이 8천300억원에 이르는 등 경제 침체로 세수 확보가 어려운데다 경제 전망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올 지방채 발행이 1천억원으로 빚내어 예산편성을 하는 판이다. 또 그같은 도로 만들 돈이 있으면 물류를 포함하는 철도망을 건설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이견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상 행보의 발견이다. 프레스센터에서 자청한 외신기자 회견은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수도권 규제완화 문젤 굳이 외신에 밝힐 이유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집안 망신시키는 얘기가 된다. 주한 미군 고위 장성을 찾아가고 주한 미국대사를 굳이 방문하는 것도 상응한 경기도지사의 행보가 맞는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원어민 교사 확보를 위해서라지만 걸맞는 발길은 아니다. 이 또한 딴 정치적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프로야구 경기의 난데없는 시구는 생뚱맞다. 플레이오프전 개막 같으면 개최지의 시장이나 지사에게 시구를 의뢰한다 할 수 있다. 지난 14일 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가진 현대-한화의 플레이오프전은 2차전이다. 시구를 의뢰한 건지, 자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떻든 이 역시 딴 생각을 지닌 정치적 몸짓으로 보는 눈들이 많다. “서울은 시청앞 잔디밭을 꾸며도 언론에 보도가 되지만 경기도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했다. 얼마전 평화방송 라디오를 통해 터뜨린 중앙언론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면서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하다.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났는 지 알 수 없다. ‘금의야행’(錦衣夜行)에 비유할 만큼의 비단옷 같은 일이란 뭣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별 기사거리도 아닌 범사(凡事)에 특히 중앙언론 보도를 갈망하는 것 또한 딴 생각 때문이라는 게 지역사회의 눈총이다. 역대 도지사에겐 찾아볼 수 없는 공관 안방정치가 잦다. 시장·군수 부인, 당내 지역구위원장 부인 등을 한번에 30~40명씩 불러 들였다. 뭐가 불편했던지 도비 3천만원을 들여 음향장치를 했다. 안방정치는 더 계속될 모양이다. 이도 딴 생각과 무관하지 않은 걸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짐작된 차차기 딴 생각의 실체가 불거졌다. “김 지사 취임 이후 행보가 대권을 염두에 둔 것 같다”는 대권병 조짐이 지적됐다. 국회 건설교통위 경기도 국감에서 장경수 의원(열린우리당·안산 상록갑)이 이렇게 문제 삼았다. 도지사 김문수는 “(대권)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생각이 있어도 있다고 말할 단계가 아니다. 생각은 본인의 자유다. 걱정되는 것은 뿔난 대권병 징후군의 조로증(早老症)이 가져올 도정의 파행이다. /임양은 주필

북 ‘핵’ 위협의 실체

이런 심정이다. 죽이지도 살릴수도 없는 형제의 패륜을 겪는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든다. 초등학생 시절의 망나니가 연상된다. 행실이 개차반 같아 동무가 없는 외톨박이는 늘 훼방꾼 노릇을 했다. 그래서 어르고 달래면 그때 뿐 점점 도가 더 지나치곤 했다. 핵 실험에 이른 평양정권의 소행이 이와 같다. 핵 실험의 성공이니, 일부 실패니 하는 게 문제의 본질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분량이 많든 적든 핵 무기는 이미 지녔다. 핵이 작든 적든 남쪽에 한 방만 터뜨리면 치명적이다. 이에 미국이 맞서 북을 만약 핵으로 응징하면 북녘 또한 치명타를 입는다. 이게 무슨 꼴인가, 수 십만 수 백만 명이 죽고 다치고도 수 십년을 가는 것이 핵의 재앙이다. 한반도 또한 초토화 된다. 아무리 하기로서니 동포에게 핵을 쏘겠냐 하는 ‘설마’는 사람잡는 허점이다. 남조선 해방에 미국이 본격 개입할 틈을 주지않고 속전속결로 끝내면 결국 북쪽은 재앙없이 기정사실화한다는 것이 조선로동당 혁명 전략의 근간이다. 인민은 배곯리는 처지에 뭣 때문에 기를 쓰고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었겠는가, 미국을 상대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대미정책은 장삿속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흥정 가격을 높이고자 하는 것 뿐, 평양정권이 군사강대국이긴 해도 정규전에선 미국의 상대가 될 순 없다. 또 평양정권의 엄살처럼 미국이 북을 선제 공격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나 일본에 핵 무기를 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핵 무기 위협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남조선’이다. 설사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위협을 안고 사는 것은 계속 꿀리고 사는 게 된다. 우리도 덩달아 핵 무기를 만들자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하고 같이 죽는 꼴이 된다. 주검의 재를 아예 이 강토에서 추방하자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다. 사실은 지구촌에서 모두 추방해야 할 핵 무기를 강대국은 지니면서 후발국들에게 못 갖게하는 건 아니꼽다. 중국이나 인도며 파키스탄이 핵 보유국인 것도 못 마땅하지만 복잡한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란의 핵 무기 개발은 중동의 맹주 지위를 굳히기 위해서다. 그러나 스웨덴, 핀란드 같은 나라가 핵을 지녀서 강소국인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젠 앞으로의 일이다. 유엔 안보리가 대북 결의를 경제제재만 하든 군사제재가 포함되든 평양정권이 호락호락하게 핵을 포기할 사람들은 아니다. 되레 큰 소리쳐가며 콧대를 높일 것이다. 평양정권이 핵이 아닌 다른 폭약 더미를 터뜨려놓고 핵 실험 위장을 하는지 모른다는 의문은 좀 그렇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중국이나 러시아까지 상대해가며 국제 사기극을 연출했다고 보기엔 마뜩찮다. 중국, 러시아가 사기극에 공모 당했다고는 더욱 볼수 없다. 결국 안보리 제재와 함께 주변국의 어르고 달래는 외교적 노력이 또 불가피할 터인데 이게 지난 6자회담보다 더 지루해질 것이다. 새로운 처방으로 북·미 양자회담을 말하지만 이 역시 능사가 아니다. 탈도 많고 까닭도 많은 생트집으로 발목만 잡히는 또 하나의 함정이 되기 십상이다. 회담의 단가가 훨씬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또한 급랭된 지금의 단계에서 일단은 대북정책 재검토 등 더 악화돼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냉전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대화도 하고 교류도 갖긴 가져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핵 실험으로 돌아온 햇볕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달라는 대로 주고, 하자는 대로 해준 햇볕정책은 그러다 보면 염치도 차릴 줄 알고 은혜도 갚을 줄 알 것으로 알았지만, 끝간데 없이 버릇만 나쁘게 길들여졌다. 이쪽을 만만하게 보는 지경까지 됐다. 햇볕정책은 평양정권에 기회 진상의 구실만 했다. 1815년 영국의 웰링턴이 나폴레옹 군단을 워털루에서 완파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실기한 기회를 역기회로 포착하였기 때문이다. BC 638년 송나라 양공이 지금의 하남성 홍수를 가운데 두고 초나라 군사와 대치했다. 초군이 야간에 물을 건널 때 양공은 두 번이나 거듭된 주변의 공격 제의를 ‘비열한 짓’이라며 물리쳤다. 송나라 군사는 이윽고 물을 건너 전열을 정비한 초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쓸데없는 아량을 두고 경고하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다. 우리도 이제 퍼주면서 박대받아도 태연한 척 했던 ‘송양지인’의 어리석음은 그만두어야 한다. 초미의 대북 과제는 핵 폐기다. 방법은 전쟁의 참화를 막기위한 핵 폐기를 두고 전쟁을 수단화 할 수는 없다. 대화와 대북교류를 할 때 해도 단호한 상호주의로 나가야 한다. 무작정 퍼주고 무조건 끌려만 가는 것은 ‘병신정책’이지 포용정책이 아니다. 상호 실리위주의 대등한 상호주의만이 진정한 포용정책이고 참다운 동포애다. 더 이상 망나니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핵 폭풍을 막을 수 있다. /임양은 주필

손학규, 사회통합의 기수

“고행의 이상을 꼭 실현하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엉뚱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말보다 지금 내가 들어야 하고 들려주고 싶은 민생 얘기가 뭣인지요”하고 되레 묻더라는 것이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100일민심대장정’을 탐방받아 하루 해를 꼬박 보내며 땀흘려 함께 일했던 한 친지의 전갈이다. 정치권은 새 짝 짓기가 시작됐다. 정치권의 발정기다. 물밑 접촉이 심상치 않다. 열린우리당 전 의장급 원로들은 신당 창당의 정치권 재편을 시도한다. 정대철, 이부영, 김원기씨 등이다. 청와대 후원의 외딴 정자에서 며칠 전 밤에 이런 논의가 있었다. 이들은 신당 창당에 노무현 대통령의 불참을 주문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열린우리당 참여의 뜻을 밝혔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모임엔 포도주가 곁들여졌다. 다들 취한 가운데 대통령은 경호원의 부축을 받았을 만큼 대취했다고 한 신문보도는 전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팔방미인이다. 안 끼는 데가 없다. 한동안 한나라당과의 교감설이 있더니 열린우리당도 민주당도 기웃거리고 또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쪽에서도 속내를 떠보는 눈치다. 그렇다고 열린우리당이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근태 당 의장이 있고 정동영 전 의장도 외유 중인 독일에서 서둘러 곧 오는 모양이다. 천정배 전 법무도 명함을 내밀 요량인 것 같고 유시민 보건복지는 복병이다. 한나라당은 손 전 지사와 더불어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부동의 주자들이다. 박 전 대표가 독일가서 메르켈 여성총리를 만나고 이 전 시장은 카자흐스탄을 방문했던 그 시각에 손 전 지사는 남원에서 벼베기를 하고 있었다. 여당의 원로 그룹에선 범여권통합을 논의하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는 한쪽에서 합당 가능성을 제기하는가 하면 또 한 쪽에선 합당 불가의 선 긋기로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이 모두의 짝 짓기 모색은 야합이다. 서로의 정치적 편의에 따른 궁합 찾기다.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여기는 궁합찾기 과제는 지역감정 해소가 아닌 편승이다. 서로가 서로의 지역기반을 이용하면서 자기네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동상이몽을 꿈 꾼다. 그렇지만 아니다. 지역감정 편승으로는 평생가도 지역감정 해소가 요원하다. 이 사람들은 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사회계층간의 갈등을 간과하는 것은 염통 곪는 줄 모르는 처신이다. 차기의 절대적 과제가 지역감정 해소 그리고 계층간의 갈등 해소다. 손학규 전 지사는 이런 지리적 지역감정, 사회적 계층갈등을 해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적임자다. 그의 민심대장정은 13개 시·도를 육신의 피땀으로 누볐다. 각계 각층의 사회계층을 허심탄회하게 만나 심적 피부를 맞대는 접촉을 가졌다. 지금의 정치권 새 짝 찾기는 국민에 대해 결국 위에서 만드는 상층구조의 명분이 되겠지만 손 전 지사는 아니다. 아래서 폭발하는 민중적 하층구조의 명분은 다른데선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메가톤급 무기다. 그리고 이엔 모든 지역, 모든 계층의 간절한 열망과 불 같은 분노가 농축된 기대가 담길 것이다. 그도 언젠가는 짝 짓기를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순서가 다르다. 상층구조의 실리를 위한 선(先) 짝 짓기는 야합적 수단인 데 비해, 하층구조의 민생을 위한 후(後) 짝 짓기는 정치적 방법이다. 순전히 하층구조를 바탕으로 분출하는 이런 정치적 방법은 정치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손 전 지사는 지금 정치권의 혁명을 위해 도전하는 것 같다. 서두르지도 않고 늦추지도 않는 인내와 도전 정신은 강점이다. ‘100일민심대장정’이 반환점을 돌면서 막바지 들어 현장 고행을 함께하는 자원봉사자며 각계의 격려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처음엔 냉담했다. 고독했을 것이다. 혼자 고군분투 했을 때나 방문성시를 이룬 지금이나 한결 같은 자세라는 게 제삼자의 전언이다. 오는 10월7일이면 일단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100일민심대장정’은 아마 추석 민심 탐방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잘은 몰라도 여의도에 나타날 땐 선비 같았던 전의 면모가 아닐 것이다. 다듬어진 야성의 모습을 보일 것 같다. 민중의 바다 가운데서 직접 챙긴 민심을 어떤 정책으로 구현해 보일 지 앞으로가 궁금하다. 체험의 실체는 탁상의 논리보다 진실에 접근하는 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는 지리적 지역갈등, 사회적 계층갈등 해소에 체험적으로 터득한 사회통합의 기수라는 사실이다. /임양은 주필

국내 좌파의 ‘함정’

좌·우파간의 호상 정권 이동이 변괴는 아니다. 다른 나라에선 그렇다. 살아가는 방법의 변화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 나라의 국민은 때론 좌파 정권을, 때론 우파 정권을 선택하면서 상호 보완하는 사회체제를 꾸려간다. 며칠전 정권이 바뀐 스웨덴 역시 이러하다. 스웨덴 국민은 총선에서 ‘구호품(분배)보다 일자리(성장)를 표방한 중도우파를 선택, 복지천국을 이뤄 경제 실정과 함께 세부담을 가중시킨 십년 집권의 중도좌파에 패배를 안겼다.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도 그렇고, 프랑스나 독일도 그렇고, 남미도 마찬가지다. 일본 역시 집권당인 보수 자민당 정권이 패배, 진보적 야당 연합정권이 수립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린 이게 아니다. 말인즉슨 보수적 성장이나 진보적 분배나 상호 보완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래서 역사 발전의 두 수레바퀴로 보고자 하긴 한다. 한데, 아니다. 정부의 분배정책엔 결함이 많다. 예컨대 살인과 자살을 부르는 지경이 된 전세난 해소책으로 4천억원의 추가 지원을 한다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민생경제를 보듬어 서민소득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노숙자들에게 월 50만원씩 주는 바람에 사지가 멀쩡하면서 일 할 생각은 않고 정부 돈에 맛들인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가짜 노숙자도 없지 않다. 이 모두가 국민의 세금이 그냥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다 해서 분배 자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하는 것은 이 정부의 잘못된 분배정책이다. 이 점이 다른 나라의 좌파와 다르다. 한국적 좌파는 반기업 정서, 왜곡된 분배정책 외에 또다른 치명적 특성이 있다. 그 연유는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인 데 있다. 과거의 동·서독과 같은 평화공존의 분단국가가 아니다. 동족상잔의 시산혈하로 피비린내 풍긴 전쟁을 경험한 분단국가다. 지금도 총부릴 맞대고 있다. 한반도의 이런 특수환경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개념을 변질시킨 불행을 낳았다. 좌파는 친북이고 우파는 반북으로 보는 통념이 오늘날 국가사회가 지독하게 겪고 있는 갈등의 요인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핵 무기 및 대북제재 등 문제의 본질이 결국 이에 귀납된다. 무조건 친북, 무조건 반북 다 정답이 아니다. 이 시대에 멸공이나 북진통일을 말하는 극우는 정신병자다. 북녘과 포괄적 상호 관계의 동포애 교류가 있어야 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극좌는 아니다.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극좌 역시 정신병자다. 문젠 이런 정신병자를 두둔하는 이 정권이다. 평양정권의 대변인격이 됐다. 예컨대 북의 달러화 위조는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사실이다. 중국도 인정한다. 이 정권만이 “아닐 것”이라고 우기다가 고립을 자초하는 이상한 입장에 처했다. 5·16 군사정부나 신군부의 군사독재는 민주주의의 패륜으로 지탄하면서도 북의 선군정치는 민족주의라며 미화하는 좌파들이 있다. 여기 같으면 현역 군인은 앉을 수 없는 요직을 큰 왕별 단채 앉을 수 있는 것이 평양정권의 권력구조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군을 모든 권력의 우위 권력으로 주술화한 것이 선군정치다. 남북장관급회담 합의사항도 군이 비토하면 그만이다. 최고 지도자를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최대 경칭이다. 군사독재와 비할 수 없이 더 심한 평양식 군사독재의 선군정치를 민족주의로 보는 좌파 인식엔 분명히 문제가 있다. 대북 관계에서 가장 고려되는 것은 전쟁 재발이다. 전쟁 재발을 걱정하면 좌파에선 “별 잠꼬대 같은 수구 냉전의 소릴 다 한다”고 비꼰다. 금강산 구경도 가고 평양도 다녀오고, 남북간에 공식 교류도 갖는다. 지난 10여년 동안에 6조5천899억원 상당의 대북지원을 했다. 이 정권이 들어서고는 3조 970억원 상당을 퍼주었다. 전체 규모의 46%나 된다. 이런 판에 설마 전쟁이야 나겠느냐는 것이지만 역사에 예고된 전쟁은 없다. 한 번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두 번인들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모든 권력의 우위에 선 군의 선군정치는 시한폭탄 같은 도발의 위력을 지녀 평화를 바라는 민족적 염원을 간단없이 위협한다. 진보와 보수, 좌·우의 통상적 가치 추구가 국내에선 이처럼 평양정권을 보는 잣대가 또 다른 기준인 것이 한국적 현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력 세습의 우리식 사회주의 통일도 통일로 보아 동조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정체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곧 나라의 정체성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참다운 분배와 성장의 좌·우파 정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계급투쟁과 혁명사관에 사로잡혀 공산주의도 아닌 평양정권의 수정주의를 우군으로 보는 좌파는 그 자신의 오기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김문수, 거꾸로 가는가?

말과 짓이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이런 모습은 도민의 불행이다. 예산에 관한 편견은 가히 소아병적 수준이다. 경기도의회 예결특위에서 한창인 낭비성 추경의 논란은 김 지사의 도덕성을 의심케 한다. 기구확대는 주민부담의 가중 요인이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도 취임 벽두에 시작한 첫 번째 일이란 게 고작 기구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런 말을 들었다. ‘서울시만큼 기구가 커져야 한다’고 보는 게 도지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면 졸렬한 생각이다. 예컨대 팔당호 문젠 도지사 산하의 무슨 본부를 두기보단 관련 시·군끼리 지방자치법상의 (팔당호)조합을 구성케 하는 것이 순리다. 더욱 시급한 것은 팔당호 관리의 일원화 체계다. 제3별관 신축 문제도 그렇다. “청사 이전까지 6년간 대체 임대료 5억5천400만원으로 해결할 일을 100억원 대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김옥이(한) 박덕순(민) 의원의 질타는 열번이고 마땅하다. 제3별관 안은 원래가 폐기된지 오래다. 뜬금없는 도지사 공관 음향시설은 무슨 소린지 황당하다. 도지사 부인은 한나라당 지구 운영위원장 부인 등 40여 명을 공관에 초청, 오찬간담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안다. 일찍이 역대 도지사 부인들은 그런 일이 없었던 좀 이상한 공관 모임이다. 난데없는 음향시설은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모임에서 음향시설이 없어 도지사 부인이 불편을 느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든 도의 지방채 발행이 1천억원이나 되는 판에 3천100만원을 책정한 공관 음향시설비는 당치않다. 도청 담장을 취임도 하기 전에 개방 한답시고 허물더니 청사방호시스템 등과 관련해 책정한 6천400만원은 한 치 앞도 못내다 본 소모성 예산이다. 따지자면 어찌 이 뿐이겠는가, 시시콜콜하게 따진다고 해서도 안 된다. “헛 돈은 단 1원도 안 쓴다”는 자신의 말에 비추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예산절감은 건전재정운용의 기본이다. 행정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다. 이런데도 자신만이 추구하는 특수가치인 것처럼 해보이는 연출은 난센스다. 이른바 예산절감에 중점을 두고 벌인다는 한류우드조성·광교신도시건설·백남준미술관건립·경기도미술관건립·영어마을운영·환경교육센터·도립직업학교 등의 도지사 감사 지시가 그러하다. 공연한 전임자 발목잡기로 보일 수도 있다. 파주 영어마을은 일본의 NHK 등 17개국 28개 언론사가 취재, 극찬했을 만큼 지대한 관심을 끈 프로젝트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사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남준미술관건립 같은 게 그 예다. 그러나 이미 상당부문이 진척됐다. 지금 그만두면 그만두는 것이 좋지않은 상황이 됐다. 기왕 시작했으면 또 해두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걱정되는 것은 관료사회의 속성이다. 도지사 지시를 받고 감사에 나섰으면 필시 도지사 의중을 살펴 문제점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점 없는 정책은 없다. 아무리 좋은 정책일 지라도 일반적 문제점은 지닌다. 만약 도지사 지시에 따른 감사보고가 일반적 문제점을 치명적 문제점으로 과대포장된다면, 자치단체 사업의 연속성 훼손을 부단히 위협하는 김 지사의 독선이 또 무슨 돌출을 보일지 알 수 없다. 물론 연속성 사업에도 때론 보완의 필요성이 있음을 부인하진 않는다. 이런 선의에서라면 방법이 ‘취모멱자’(吹毛覓疵)의 감사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 말은 입으로 털을 불어가며 흠집을 찾는다는 것으로 남의 의도적 흠집 잡기를 경계하는 뜻이 담겼다. 손학규 전임 도지사가 자릴 뜬지 얼마 안 된다. 그는 자청하고 나선 민심탐방이지만 충북 보은군 마로광업소에서 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 고행하는 몰골이 말이 아니다. 김 지사의 감사지시는 이런 전임자에 대한 예우로 봐서도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하긴, 타고난 성정이 과한 것 같긴 하다. 이 때문인지 모든 것을 챙기려고도 한다. 실학·평화축전은 최근의 사례다. 해마다 경기문화재단이 해온 이의 설명회를 김 지사가 직접하겠다고 뒤늦게 들고나서 일정이 지사 한 사람 때문에 바뀌고 말았다. 경기도의 모든 것은 도지사인 자신이 챙겨야 한다는 아집은 시스템을 파괴하는 독선이다. 독선은 충고를 거부한다. ‘나의 것은 로맨스고 남의 것은 스캔들’로 여기는 평소의 아집은 습관성 독선과 일치한다. 걱정인 것은 앞으로의 도정이다. 선거공약 중 말이 안 되는 공약까지 꿰맞추기 주문에 시달리는 도청 공무원들의 신음 소리가 안타깝다. 누군가가 말했다. “큰 청개구리 때문에 가뜩이나 시끄러운 판에 작은 청개구리까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도민의 기대와는 달리 거꾸로 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역사회와 지역주민 위에 군림하는 청개구리 자세는 머슴을 자청한 취임 초 말과는 거리가 멀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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