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약처럼 된 정치구호가 중도개혁이다. 이데올로기를 탈피한 실용 노선이다. 이런 건 있다. 중도개혁이 좌파적이냐 우파적이냐의 차별은 있다. 김대중 정권이 좌파적이라면 노무현 정권은 좌경화 정권이다. 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좌파 정권이 10년을 집권한다.
건국 후 60년 동안에 좌파 집권 10년이면 상대적으로 보아 긴 건 아니다. 그러나 이로인해 건국의 실체가 상처투성인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는 더 심하다. 중도 우파의 집권 차례라는 시각이 고개를 든다. 선택은 물론 국민이 한다. 그리고 선택 여부의 대상은 한나라당이다. 거대 우파 정치 세력으로는 유일하다.
그런데 이 한나라당이 자중지란이다. 서너 명의 당내 주자가 나서 일찌감치 대선 흥행을 벌인 것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흥행이 저질인 점이다. 관중은 재미가 있어야 구경한다. 재미없는 흥행은 관객이 떠난다. 중구난방의 뻥튀기공약 경쟁이나 비열한 인신 공격에 관중이 흥미를 갖는 시대가 아니다. 그토록 어수룩하지 않다.
한나라당 자체에 문제가 있다. 당이 대선 후보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고 당이 대선 후보에 끌려 간다. 당의 수권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태생이 5공인 것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전두환 정권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서 출발해 3당 합당 등 몇 차례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뿌리는 5공이다.
변화를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치명적인 취약점이다. 농경사회에선 변화가 거의 정체됐었다.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다. 발빠른 변화가 거듭된다. 한나라당 의식은 아직도 산업사회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꼴통’ 소릴 듣는 건 당이 시대적 감각을 소화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 본질을 파괴하는 진보는 다같이 있을 수 없다.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는 독선이며, 본질을 파괴하는 진보는 혁명이다. 한나라당이 독선에 안주하는 것은 자만이다. 지난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요인은 여러가지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만으로 집약된다.
한나라당은 만성적 자만증에서 지금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간의 재·보선 완승, 노 대통령의 여전한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 여론조사의 잇따른 우위, 열린우리당의 적전분열 등 겹치는 호재에 도취된 것 같다. 차기 정권을 벌써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기는지 모르지만 아니다. 올 대통령 선거까지는 아직도 10개월이 남았다. 상황의 가변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 두번도 아니고 몇 차례 거듭될 수 있다.
상대는 상황 창출의 승부사들이며 역전극 연출의 명수들이다. 한나라당이 비록 정권 교체에 실패해도 제1야당의 지위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걸로 여기겠다면 더 할 말이 없다. 이러지 않고 진정 정권 교체의 의지를 가졌다면 당의 자생력 배양에 사력을 다 해야 한다. 당 차원에서 국가 경영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 얼마전에 청와대서 가진 노무현 대통령,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양자 민생회담은 한나라당의 완전한 실패작이다. 강 대표가 이 정부의 민생을 촉구하면서 청와대 회담을 제의했으면 독자적인 민생 방안을 제시하고 관철시켰어야 한다. 한데,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원론적 소재에 원칙적 수준의 합의만 확인하는데 그쳤다. 결국은 청와대의 의도, ‘그래? 민생 문제에 별나고 뾰죽한 게 있으면 와서 한번 말해보라…’는 청와대측 ‘장계취계’의 역이용 계략에 말려든 꼴만 됐다. 당이 국가 경영의 비전을 지니지 못한 탓이다.
열린우리당 모양새를 보고 손가락질 할 때 하더라도 자기 당 돌아가는 것부터 먼저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당이 점입가경으로 돌아가는 판에 남의 허물만 말하는 것은 국민이 볼때 꼴불견이다. 겨 묻은 것은 보고 뭣 묻은 것은 못 보는 우매함과 같다.
한나라당은 중도 우파 개혁정당으로 가야하고 이 길로 가고자 한다면 개혁정당다운 정책적 면모를 국민사회에 각인해야 된다. 시대적 변화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민중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변화를 거부해서는 미래가 막히고, 변화를 수용할 땐 미래가 열린다. 대선 흥행 또한 이 연장 선상에 설 때 관중들이 잇따라 모이고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올 것이다.
/임양은 주필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