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PD는 기자가 아니다

“내가 연예인인가? 벗기긴 뭘 벗겨!” 아닌게 아니라 그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1983년이다. 그해 생긴 KBS ‘추적60분’은 같은해 6월에 있었던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함께 황금프로그램의 쌍벽을 이루었다. 교양제작국의 ‘추적60분’ 신완수PD는 전인미답의 이 영역에 개척의 깃발을 꽂은 기수다. 키는 작달만하지만 다부진 몸매에 안경알속으로 반짝이는 두 눈은 매섭다. 어느 신문에서 그의 모든 것을 알아보는 특집 기사 제목 중 ‘… 벗긴다’는 대목에 그는 심기가 뒤틀렸던 것이다. 그러나 첫회의 ‘추적60분-한국의 할리우드 충무로 영화가’ 방영은 실패했다. 국내 영화사를 조명하려 했던 의도와는 달리 잡담 투성이었다. ‘추적60분’이 성공한 것은 ‘택시 왜 불결한가?’ ‘낚시터 뭣을 낚는가’ ‘한국판 몬도가네식’ ‘심야지대 퇴폐의 현장’ ‘가짜 고급시계, 가짜 녹용’ 같은 고발성 사회프로그램으로 포맷을 바꾸면서 안방극장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현장 취재 땐 사람은 맞아도 카메라는 빼돌릴 퇴로를 미리 탐색해 놓는가 하면, 취재진이 길가다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국내 TV방송의 PD저널리즘 효시를 당시 서울신문에서 방송을 담당하며 이렇게 목격한 그때의 교양제작국 안국정 부장은 지금 SBS 사장으로 가 있다. PD(Producer Director)는 엄연히 구분된 프로듀서와 디렉터를 합성한 국내 방송 특유의 조어다. 기획자(Producer)와 연출자(Director)는 입안과 현장의 소임이 각기 다른데도 1인2역을 PD란 이름으로 수행하는 것이 한국 방송의 관행이다. 얼마전부터 프로듀서의 기능으로 CP(Chief Producer) 제도를 도입하긴 했지만 PD의 2중 역할은 그래도 여전하다. 고발성 사회프로그램 중심으로 시작된 PD저널리즘이 이른바 시사성 포맷으로 둔갑돼 정치색채를 강하게 풍기기 시작한 것은 진보, 즉 좌파세력이 득세한 이 정권 들어서다. KBS스페셜 ‘한국사회를 말한다’ ‘송두율 교수의 경계도시’ ‘돌아온 망명객’ 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심지어 MBC는 판결을 며칠 앞두어 대법원이 방송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사안까지 우정 방영했다. PD수첩은 공정성과 형평성 위반으로 선거방송심의위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이같은 좌파 시각의 시사물은 거의가 사물에 같은 부류 사람들만의 인터뷰 등으로 일관하여 당시의 시대를 체험하지 못한 시청자들은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믿도록 오도하곤 했다. 끼리끼리의 합작이므로 ‘추적60분’처럼 고발성 사회프로그램 제작과 같은 위험의 요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MBC ‘PD수첩’의 황 교수팀 취재원 협박은 그같은 안일한 제작 관행이 맘 먹은대로 통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오만이다. 제작 폐습이 잘 들어맞지 않은데서 나온 이성의 상실이다. PD의 2중 개념이 빚은 폐단이기도 하다. 초기의 PD저널리즘이라 할 ‘추적60분’은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의 시사물은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다. 먼저 실재한 현상을 다 취재하고나서 뒤에 구성한다. ‘추적60분’은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의 PD저널리즘은 이와 반대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제작을 그에 꿰맞춘다’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런건 제작이기 보다는 조작이다. PD도 문화세력의 축을 형성한다. PD저널리즘이 그렇다 해서 언론일 수는 없다. 언제부턴가 시사물 PD를 언론인으로 보는 시각이 생긴 것은 오류다. 영국 독일 미국 등 서구사회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다. 이들 나라의 방송에서 시사물을 만들려면 기자와 PD격인 디렉터가 공동작업을 한다. 기자는 취재를 하고 디렉터는 취재의 효과를 살리는 영상을 연출한다. 문제의 PD수첩팀은 MBC 교양제작국 소속이다. MBC 보도본부 소속이 아니다. PD수첩이 방영되고 나서 처음 말썽이 시작됐을 때 내부적으로 말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MBC 뉴스데스크의 지원사격이 인색하다는 게 교양제작국측에서 나온 불만이었던 것으로 들렸다. 그러나 보도본부의 입장에서는 같은 회사 일이라고 무조건 두둔하고 나서기에 난감한 건 당연하다. PD 독과점의 미검증물을 검증기능이 중첩된 보도본부측이 확인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분화된 사회에서 미분화된 생각을 가지면 으레 낭패를 겪기 십상이다. MBC의 명예를 추락시킨 PD수첩 역시 이러하다. 비단 MBC만이 아니다. 방송계의 성찰의 계기가 돼야 한다. PD저널리즘의 원조인 ‘추적60분’은 원래 이런 게 아니었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헌법재판소’ 비탈에 서다

헌법재판소는 태생부터가 정치적 산물이긴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으로 이뤄진 9차 개헌의 현행 헌법에 의해 부활됐다. 이전에 있던 헌법재판소가 없어진 것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5차 개헌을 하면서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간의 26년동안은 대법원이 위헌 심사 기능을 행사했다. 그러나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헌법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됐던 것이 헌법재판소를 새로 두게 된 배경이다. 1988년 8월5일 법률 4017호로 공포된 헌법재판소법은 관장사항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①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 여부 심판 ②탄핵의 심판 ③정당의 해산 심판 ④국가기기관 상호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⑤헌법소원에 관한 심판 등이다. 당초엔 헌법재판소는 특별 사람들의 특별 사건만 다루는 곳으로 여겼던 게 지금은 대중화 됐다. 법원 못지않게 대중화되어 걸핏하면 헌법재판소 관장사항이 아닌 일을 두고도 헌법재판소 제소를 들먹이곤 한다. 그러나 어떻든 헌법재판소에 사건이 폭주하리만큼 대중화된 높은 인식이 나쁜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출범 17년만에 최대의 고비를 맞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시대적 갈등은 헌법재판소 내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보수와 진보는 각각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다. 보수는 안정적이지만 답답하다. 진보는 개혁적이지만 맹랑하다. 재판의 사안을 다수의 의견으로 판결하는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개인의 성향에 따라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그 성향이 얼마나 객관적이냐는 것은 영원한 숙제다. 헌법재판소법은 재판관은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했다.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 정권들어 헌법재판소는 전례없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굵직한 사건을 세번이나 다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 결정, 행정도시특별법 헌법소원 각하 등은 사안의 정치성이 매우 짙다. 그러나 사안이 아무리 정치적이어도 심판은 법리적이어야 한다. 쟁점의 판단이 법리적이어야하고, 사실면이나 정황면을 살피는 것도 법리를 일탈해서는 법률적 심판이 아닌 정치적 심판의 의혹을 떨치지 못한다. 이런 법리의 해석 역시 재판관들의 관점에 따라 각기 판단이 다를 수는 있다. 예를 든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 결정 당시 김영일 전 재판관은 위헌의 결론은 다른 7명의 재판관과 같았으나 위헌 사유는 달랐다. 관습헌법 위반의 다수 의견이 아닌 별개 의견으로 중요정책의 국민투표(헌법72조)를 거치지 않은 게 위헌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각하의 다수 의견을 낸 사람 중 하나인 조대현 재판관은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2명의 다른 재판관과 함께 냈다. 조대현 재판관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때 변론을 맡았고, 신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사건에서 정부측을 대리한 법무법인에 몸담다가 지난 3월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재판관이 되는 덴 대통령 임명·대법원장 지명·국회(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등) 선출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이 있다. 법리해석의 객관화는 재판에 담보된 재판관의 주관적 양심의 그릇이라는 사실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재판관이 된 경로가 뭣이든 본연의 소임에 충실하는 것이 헌법기관으로서 요구받는 사명이다. 국가사회 일각에서 적잖게 걱정들을 한다. 내년 8~9월에 5명의 재판관이 퇴임하게 된다. 이 중엔 행정도시특별법에 소수의 위헌 의견을 냈던 권성·김효종 재판관도 포함된다. 진보 성향의 재판관들로 물갈이 할 것을 우려하지만 그래도 헌법기관이다. 헌법재판소가 비탈에 서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치권의 용병이 될 것으로는 믿지 않는다. 다만 이번 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각하의 이유를 두고 해야할 말은 있다. 헌법이 정한 국민투표 부의를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판단한 것이 과연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합치되느냐는 의문이다. 헌법 조문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해 협의로 보면 대통령의 임의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으로 보아서는 광의로 해석해야 한다는 판단이 앞선다. 이런데도 국민은 국민투표를 요구할 권리가 없으므로 투표권 침해가 아니라고 했다. 국민투표권을 대통령의 배급에 의한 것으로 본 각하 이유가 너무 고약하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보단, 국민의 입장에서 살피는 것이 헌법정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어른이 없다

초로의 노인이 길에서 봉변을 당했다. 젊은 사람에게 밀치고 멱살잡이까지 당했다. 그 젊은이는 당초엔 또래의 여성을 주먹질 끝에 씩씩거리며 발로 마구 차댔다. 여인은 길바닥에 쓰러진 채 “사람 살리라!”라며 소리쳤다. 구경꾼은 많았으나 아무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길가던 그 노인이 보다못해 말렸다. 주먹질하는 젊은이 손을 붙잡고 “무슨 일인진 몰라도 약한 여잘 손질하면 되나?”하며 타일렀다. 이게 화근이 됐다. 젊은이는 “무슨 일인지 모르면 그냥 가! 영감태기야!!”하고 떠밀면서 불똥은 노인에게 번졌다. 구경꾼들은 여전히 구경만 했다. 이 사회에 어른이 없다. 산업사회에서까지도 이러진 안했다. 깡패끼리 싸우다가도 어른이 말리면 “에잇, 재수없어…”하고 혼자말로 투덜대면서도 말을 들었다. 지금은 이웃 어른도, 동네 어른도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 없다. 그저 나이든 사람은 보잘것 없는 영감태기이고 할망구일 뿐이다. 백발의 노구를 삶의 경륜이 축적된 존경의 대상으로 보지않게 된데는 연유가 있다. 사람이 살면서 무수히 중첩되는 경험적 가치가 곧 소중한 식견이었던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른의 경험이 필요했던 농경사회가 아닌 정보사회다. 정보사회는 또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서와 같은 협동사회가 아닌 개별사회다. 나와 상관없는 일은 아예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어른이 없기는 가정 또한 마찬가지다. 예컨대 살림 사는 얘길 늙은 부모와 의논하는 젊은 부부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세대 차이를 들어 뒷방 늙은이로 치부하는 예가 많을 것이다. 나이 들수록이 재산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 노인들 입에서 많이 나온다. 재산을 미리 나눠주고 나면 그 날로 찬밥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재산이 있는 노인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억지로라도 어른 대접을 받을 판이니, 재산없는 노인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어른이 없기는 국가사회도 매한가지다. 아니 이 즈음은 더 심하다. 자유당 독재정권도 정적(政敵)을 어른대접할 줄 알았다. 그의 사저(私邸)를 ‘서대문 경무대’(청와대)라 했을만큼 세도가였던 이기붕도 신익희·조병옥 등을 국가 원로로 처우해야 할 땐 했다. 유신정권에서 박정희는 연로한 야당 당수 유진산과 무진장 싸우면서도 그를 어른 대접했다. 이 바람에 유진산은 ‘사쿠라’니 뭐니하고 별의별 소릴 다 듣기도 했지만 그가 죽어 가족에게 남긴 것은 자기집도 아닌 전세든 한옥 한 채의 전세돈 뿐이었다. 이 정권은 민주화세력이란 걸 간판 삼는다. 민주화운동은 온통 자기네들만 한 것처럼 공치사를 일삼지만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대부(代父)다. 이 어른이 노무현 정권에 쓴소리를 했다 하여 이해찬 총리가 발끈했다. 이해찬은 그의 말마따나 민주화운동할 때 쫓겨 다녔다. 그 무렵 명동성당에서 암탉이 병아리 품듯이 열혈청년 이해찬을 품어 보호한 사람이 김 추기경이다. 감히 폄훼할 입장이 못되는 어른이다. 이 총리는 또 수십 명의 국가사회 원로들이 ‘나라의 정체성 확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자 “그 사람들은 원래가 그런 사람들”이라며 의미를 깎아 내렸다.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하여도 어른 대접을 그렇게 해서는 나중에 자신도 대접받기가 어렵다. 이런 건 있다. 어른이 어른노릇 하는 게 어른 대접하기보다 더 힘들다. 하지만 자기 생각과 생각이 같은 어른만 어른이고 틀리면 어른이 아니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단원화(單元化) 사회가 아닌 다원화(多元化)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대사회는 정신적 공황의 시대다. 오뉴월 흉년과 같다. 흉년에 먹을게 귀해 죽을 쑤면 어른 아이를 구분하여 그릇에 퍼담기가 힘들다. ‘오뉴월 흉년에 어른도 죽 한 그릇, 아이도 죽 한 그릇이다’라는 속담이 이래서 나왔다. 어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대체로 똑같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공황의 현대사회다. 인간사회 규범의 으뜸은 법률도 도덕도 아닌 인성(人性)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으면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다. 어른이 없는 현대사회는 이리하여 참으로 두렵지만 그래도 미래는 있다. 역시 인간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전철이나 버스의 경로석을 젊은 사람이 차지한 채 양보할 줄 모른다 하여 노여워하기보다는 참는 것이 어른의 면모다. 비굴함도 옹고집도 버려야 한다. 맑은 심성의 혜안을 갖도록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한다. 어차피 노년의 세월은 인고(忍苦)의 세월이다. 정녕, 어른은 없는 것일까.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범야권 단일화, 가능할까

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인 2007년 12월19일, 두 해 이틀을 앞 둔 대선 고지 탈환의 야권 후보군 진군이 시작됐다. 여권도 물론 수성의 물밑 경쟁은 가동된 상태다. 정동영 통일, 김근태 보건복지 등 두 장관은 이미 차기감으로 분류된 후보군이다. 여기에 변종의 돌출도 예상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여권의 차기 확정이 조기에 노출되는 것은 집권하고 있는 현 정권 시임의 속성이 원하지 않아 다소 늦어질 수가 있다. 여권의 복잡한 속사정이 또 있다. 여·야 간에 차기 후보 확정은 난항임이 틀림은 없지만, 그래도 여권보다는 야권이 훨씬 더 난해하다. 우선 야권 제1당인 한나라당의 형편이 복잡하다. 대선후보 경선 방식을 놓고 벌였던 한바탕 기싸움은 그같은 사례의 하나다. 당장 칼자루를 쥐고 있는 박근혜 대표, 청계천 끗발을 간판 삼는 이명박 서울시장, 쉼없는 소걸음으로 가고 있는 손학규 경기도지사 등 삼파전 양상은 판세의 뒤짚기가 있을 수 있어 예측을 불허한다. 문제는 당내에 그치지 않는 데 있다. 그 누가 한나라당의 차기 후보가 되든 범야권연합의 후보 단일화가 안 되면 고지 탈환의 승산이 어렵다. 당장 고건 전 총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여러갈래로 자생조직을 지닌 입장에서 요즘은 대변인을 구한다고 한다. 사실상 캠프 채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남은 것은 가능하다면 정당 선택의 저울질 일 것이다. 뜻이 없지 않기는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마찬가지다. 중부권 신당의 이인제 의원도 저력의 기사회생 기회를 모색한다. 가능성이 희박하고 설 무대도 없긴 하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 또한 추종자들의 추대 형식으로 고개를 들지 모른다. 변수가 또 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정치권 재편의 가능성을 배제하기가 어렵다. 그 촉매로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계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정치권이 현 체제로 가든 재편이 있든 지 간에 범야권연합의 단일화가 이루어지 지 않으면 여권에게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다음 대선 판도 역시 새 진보세력 대 새 보수세력의 대결로 보면 진보층에서도 열린우리당 외의 정당 후보가 나올 것이다. 우선 민주노동당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을리가 없다. 군소 정당이 또 있다. 이로 인하여 진보층의 표가 분산되긴 한다. 하지만 당선 가능성의 잠식은 진보층보단 보수층의 당선 가능성 잠식이 더 치명적이다. 보수정당끼리의 후보 단일화가 안 되면 공멸의 백전백패가 뻔한 연유가 이에 있다. 생각같아서는 보수 대 진보 양쪽이 다 단일화 된 양대 대결로 가면 좋을 것이다. 보수·진보의 양대 정당 체제로 가는 것이 정치발전의 요체다. 그러나 국내 정치권 풍토는 이미 잘못 길 들여졌다. 역대 정권이 야권 분산을 노린 다당제를 부추긴데다가, 정치 지도자들 역시 ‘계구우후(鷄口牛後)의 객기를 선호한다.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여 미니 정당일지라도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다. 이러하여 양대 정당제가 못되고 하고많은 정당 투성이의 다당제 하에서 범야권 단일화가 과연 형성될 수 있을는 지 의문이다. 한나라당이 보수층을 대표하는 제1당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지금 같아선 안 된다. 정책정당의 면모를 갖추려면 상호 충돌되는 당론이나 정책을 제대로 정비하는 등 ‘꼴통보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신선한 개혁적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궁금한 게 있다. 지금의 당내 후보군 중에서 누구든 당의 후보로 확정되면 당내 반대 세력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인 지 알 수 없다. 이를 추스를 줄 아는 포용력과 지도력이 있어야만이 범야 단일화를 모색할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여권이든 야권이든 예상밖의 후보가 확정되어 예상밖의 당선자가 나오는 일이 또 있을지 모른다. 어떻든 다음엔 좋은 대통령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돈, 돈… 돈!

나이 많은 아버지가 작고했다. 60대의 맏아들 내외는 아버지를 모셨지만 아버지 이름으로 된 집의 소유권을 등기 이전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가 맏아들이 갑자기 병사했다. 며느리가 집을 팔려고 하자 두 시동생이 나섰다. “우리도 아버지 유산에 대한 상속권이 있는 데, 왜 형수가 독차지 하려느냐”는 것이다. 이래서 매매가 3억원의 거래 흥정은 계약 단계에서 깨졌다. 형수는 “그럼 너희들이 삶아먹든 볶아먹든 알아서 하라”며 집을 비어주고는 수원을 떠났다. 예전 같으면 홀로된 형수를 위해주는 것이 전통적 정서의 미덕이다. 돈 맛을 아는 세태가 이런 미덕을 배덕했다. 그 형수는 사는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 시동생들의 비정에 아마 의절을 작심했을 지 모른다. 어떤 소주 애호가는 X만 선호하다가 △△로 바꿨다. 전엔 △△만 마시다가 X으로 바꾸었는 데 다시 바꾼 것이다. 연유는 이렇다. “△△가 집안 재산 다툼을 하는 꼬락서니가 보기싫어 X으로 바꿨는 데, 이번엔 X을 만드는 재벌이 형제간에 싸우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로 다시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했다. “소비자가 잘 팔아주어 번 돈이 화근이 되어 집안 쌈질이나 하는 업체의 제품은 안 팔아줘야 한다”면서 “제3의 소주가 시중에 나오면 그 소주를 애호하겠다”고 했다. 어느 장의예식장에서는 아버지 빈소 앞에서 형제자매 간에 벌써부터 유산 분배를 두고 벌어진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이 난무하여 ‘112’가 출동해야 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 고인은 자녀들에게 남겨준 많은 유산이 오히려 가슴에 사무치는 통한이 됐을 것이다. 물론 돈은 벌어야 하고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 돈은 있어야 한다. 수원에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재산가로 노년을 멋 있게 보내는 이가 있다. 전통 사상의 정신공익 사업을 하는 분인데 드러나지 않은 장학에 대한 관심이 한편으로 더 높다.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대준지가 20년이 가까워 그 수가 수 십명이나 되는 중엔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 궁금해서 캐어 물으면 “에이! 그런 얘긴 말고 술이나 먹자!”며 손사래를 내젓곤 한다. 일상의 생활을 무척 마음 편하게 대하며 산다. 그래서 그런지 친지들과 술을 꽤나 즐기는 데도 건강하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한 날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병신이 뭔고?”하자 중신들은 별의별 신체장애를 다 들었다. 그러나 환공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대들 말을 들었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세상에서 돈이 없는 것 보다 더 큰 병신은 없다”라고 했다. “돈이 없으면 부모 생신이나 기일이 닥쳐도 제대로 예를 못갖추고, 돈이 없으면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친구가 와도 반갑지 않고 하여 사람 구실을 못하니 이보다 더 큰 병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했다. 환공의 이같은 비유는 그러므로 가난한 백성이 없도록 민생을 잘 거두라는 당부의 뜻으로 했던 것이다. 남을 도울만큼은 못되어도, 내가 남에게 폐를 안끼치고 제대로 사람노릇 해가며 살기 위해서도 돈은 있어야 하지만, 돈이 있다고 꼭 행복하고 돈이 없다고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맘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시(視) 청(聽) 후(嗅) 미(味) 촉(觸)의 오감(五感)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의 오욕(五欲)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은 노력은 해야하지 않나 싶다. 어느 초등학교 어린이가 미술시간에 ‘아버지’를 그리라고 하니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그렸다고 한다. 우의(寓意)적 추상이 무척 놀라웠지만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걱정이 됐다. 자녀들 보는 데 앞에서 부부가 돈 타령을 벌이곤해 아버지를 돈 버는 기계처럼 여기도록 만든 것이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궁리끝에 서재에서 차근차근하게 알아듣게끔 설명해줬더니, 이번엔 책이 가득찬 책꽂이 그림에 아버지의 눈을 그려 오버랩했더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믿는다.(有錢可使鬼)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돈이 없어 해결못하면 시일이 해결해 주지만, 세상사엔 돈으로 해결치 못하는 것도 더러 있다. 이것이 ‘돈나고 사람 난 것이 아니고, 사람나고 돈 난’ 인성의 존엄성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중국의 ‘김치전쟁’ 속내

김치전쟁이 예사롭지 않다. 국산 김치를 중국에 수출하는 것은 타산이 맞지 않는다. 국내 가격에 비해 4분의 1 밖에 안되는 중국 소비자 가격에 맞춰 수출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런 데도 중국에 수출하는 국산 김치에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면서 전면 수입 금지 조치를 취했다. 수출하지도 않은 품목을 수입금지 한다는 건 해프닝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중국의 김치전쟁 도발은 의도가 있다. 김치를 두고 애를 먹인 것은 중국만이 아니다. 일본은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조직위원회에 선수촌 공식 식품으로 납품하려고 했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AC)의 국제표준 규격으로 인증을 신청하기도 했다. 다행히 농협의 분발로 두 가지를 모두 저지시키고 올림픽선수촌 공식 식품으로, 또 CAC 국제식품규격으로 인증을 받았다. 김치는 예컨대 해외 스포츠 게임에 출전하는 한국팀에겐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먹는 덴 눈치를 살펴야 했다. 김치를 간수하는 소임은 팀의 막내가 늘 맡으면서 식탁에 내놓는 덴 요령이 있어야 했다. 김치를 당당하게 공식 음식물로 먹게 된 것은 애틀랜타 올림픽 부터였다. 한국 선수들 만이 아니라 이젠 서구의 선수들에게도 기호식품이 됐다. 한국음식의 특징은 중국의 볶음이나 서구의 구운 음식과는 달리 탕과 발효에 있다. 김치는 발효식품이다. 오늘의 김치문화가 형성된 것은 약350년 전으로 당초엔 ‘침채’-‘잠길침 자’(沈)에 ‘나물채 자’(菜)-라고 했던 것이 그 어원이다. 마늘과 고추는 김장의 필수적 조미료다. 북방식물인 마늘은 단군신화에도 나온다. 단군의 어머니되는 웅녀가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인간이 되기까지엔 마늘을 먹은 시련의 고통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도 마늘을 산(蒜)이라 하여 재배 기술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방식물인 고추가 수입된 것은 17세기 초엽이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은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됐다 하여 ‘왜계자’라고 했다는 대목이 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엔 이같은 구절이 있다.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젖국지 장아찌라 / 독 곁에 종두리요 바탱이 항아리요 / 양지에 가가 짓고 에 쌓아 깊이 묻고…’라고 했다. 김치가 지금의 김치로 발달된 것은 고추가 들어온 연후이지만 일찍이 발효식품의 노하우를 익힌 선조들은 독보적 경지를 일궜던 것이다. 가짓수 또한 예순 가지가 넘는 김치는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인의 식품에서 동양의 식품으로, 동양의 식품에서 세계의 식품으로 자리바꿈 하였다. 이에 시샘하여 일본의 ‘기무치’가 뒤늦게 도전했다가 한국인의 완전 원조 식품으로 인정하여 두 손 들었다. 중국은 감히 도전할 생각은 엄두 못낸 반면에 무역전쟁의 보복 수단으로 삼고 있다. 국내에 수입되는 중국산 김치의 납성분 과다 함량, 기생충 검출 등이 잇따르자, 국산 김치 역시 기생충 알이 나왔다는 중국의 일방적 발표는 황당하다. 인분의 시비 없이는 검출될 수 없는 것이 채소류의 기생충이다. 지금 국내에서 인분을 시비하는 농장이나 농업인은 눈 씻고 보아도 없다. 중국에서나 하는 인분 시비를 한국에서도 할 것으로 알았다면 착각이다. 하긴, 중국 정부도 이를 내심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억지를 쓰는 것은 강대국의 오만이다. 한국은 북 핵 문제의 해결사인 중국에 정치적으로 물려 있다. 정치적 물림에 이어 김치전쟁을 기화로 경제적 물림까지 가고자 하는 서막이 터무니 없는 한국산 김치의 기생충 되받아 치기다. 북녘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어서, 한국 정부가 중국에 매달리다 보니 그들은 그 뭣에도 두려움이 없어졌다. 금세기에도 다를 바가 없다. 강대국들은 패권주의로 치닫는다. 미국의 패권주의 만이 경계의 대상은 아니다. 일본의 패권주의도 경계해야 하고 중국의 패권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일본과 중국의 패권주의 경쟁은 한국에 특히 지대한 영향을 준다. ‘김치전쟁’, 유서깊은 한국의 김치문화에 도전할 외세는 감히 있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중국이 굳이 ‘김치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단순히 김치에 국한하는 게 아니다. 명(明), 청(淸)조 시대를 방불케 하는 신(新) 사대주의 인식을 유도하는 속내의 포석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시점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색깔에 묻힌 말 ‘동무’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건 원래 아는 게 모자라서 그런다지만…” “그런다지만?” “나라를 왜 이북에 말이야…” “설마 그럴려구?” “설마가 아니야, 노골적으로 편 드는 막말을 해도 비호해 주잖아!” “그도 자유라고 하니까” “역적이나 하는 말을 해도 괜찮으면, 그럼 여기는 뭐야?” “그런 말하면 케케묵은 색깔론이란 말 듣는다!” “이 사람아 나도 유신 때 감옥에 갔던 사람이야…” 어느 좌석에서 있었던 60대의 대화 내용이다. 색깔이라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동무다. 이 동무란 말이 색깔속에 폭 파묻혔다. 국어대사전은 동무란 말을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친구·벗’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동무나 친구나 벗은 다 같은 뜻이긴 하지만 맛이 다르다. 친구는 ‘친할친 자’(親)에 ‘옛구 자’(舊)로 된 한문 용어다. 이에 비해 동무나 벗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뜻은 같지만 맛이 달라 쓰임새 역시 다르다. 어린이들 간에는 원래 동무라고 했고, 벗이란 말은 어른들 사이에 많이 쓰였다. 어린이들이 벗이라고 하거나 어른들이 동무라고 하는 건 생소했다. 그런데 지금은 꼬마 아이 동무도 친구라 하고 어른 벗도 친구라고 한다. 어른 벗끼리 친구라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동무 또래의 어린이까지 친구라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 원래의 맛이 아니다. 속담에 ‘동무 따라 강남간다’고 했지 ‘친구 따라…’라고는 안 했다. ‘어깨동무’라야 자연스럽다. ‘어깨친구’는 영 어색하다.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으로 ‘동무생각’이란 가곡이 있다. ‘(전략)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 백합같은 내 동무야(후략)’ 만약 여기서 ‘내 동무야’를 ‘내 친구야’로 부른다면 노래의 맛깔스럼이 쉰다. 이 좋은 동무란 원래의 우리 말이 꺼리어 쓰길 피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다. 낙동강 전선만 빼놓고 남쪽이 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이 됐을 때다. 인민위원회, 보위대,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할 것 없이 토착 좌익 진영은 남하한 인민군대 따라 서로의 호칭을 무조건 ‘동무’로 통했다. 하급자는 가령 상대가 위원장이면 ‘위원장 동무’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이름)아무개 동무’라고 했다. 또래 끼리는 ‘김 동무’ ‘박 동무’라고 불렀다. 동무란 호칭이 이렇게 퍼지다 보니 더러는 형제간도 동무라고 했다. 심지어 북에서는 사상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비유로 ‘아바이 동무’라고 까지 한다는 말이 나왔다. 동무라는 호칭은 한국전쟁이 있기 전에는 남로당이 지리산 피아골 등에서 맹활약 한 빨치산(반란군)끼린 썼다. 그랬던 게 공산주의 세상이 되다보니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만이 아니고, 포의(布衣)도 붉은 완장을 상대할 때는 “동무…동무” 소릴 할 지경이 돼 버렸다. 동지도 아닌 동무란 말을 그토록 호칭에 즐겨쓴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계급사회가 아닌 평등을 강조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 가지동 자’(同)에 ‘힘쓸무 자’(務)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녘은 광복 직후 한문을 없애고 한글만을 썼던 것을 생각하면 후자보다는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그러고 나서는 동무란 말이 사라졌다. 당시의 보수정권에서 금지령을 내렸던 것도 아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난 시대상은 반공(反共)도 아닌 멸공(滅共) 일색이었다. 그같은 사회 분위기가 붉은 완장을 연상케하는 동무란 말을 절로 추방한 것이다. 그러나 동무는 원래의 우리 말이다. 불행한 시대적 배경을 극복해야 한다. 어린이에게는 친구란 것보다 동무라는 것이 더 정서적이다. 이념의 격랑속에 실종되어 반세기동안 묻힌 동무란 말을 살리는 것이 진정한 이념의 퇴색화다. 돌아보면 동무란 말 말고도 이런 류의 잔해가 또 있을 것이다. 보수도 변화를 거듭한다. 멸공, 반공에서 승공(勝共)으로 점차 둔화됐다. 이젠 협공(協共)도 비정치 분야에선 인정한다. 그러나 합공(合共)은 아니다. 그들 60대들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거나, 6·25는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내전이라는 말은 저쪽 대변인이나 하는 말이지, 그게 무슨 학문이야?” “문제는 그런 말을 하고도 큰 소릴 치는 강(아무개)교수란 사람 보다는 그토록 간을 키워주는 정부에 있는거야! 마치 카멜레온 같아요. 색깔을 드러내면서 색깔론이라며 되레 맞받아 치거든, 살다보니 정말 별 꼴을 다 봐!” 생각이 다른 좌·우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 서구사회에도 있다. 이런 데도 우리의 처지가 서구사회와는 달리 불신의 골이 깊은 것은 전쟁을 일으켰던 북녘이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데 있다. 남쪽은 지금 분단국가에 겹친 분열국가의 혼란에 빠졌다. 이 정권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민중 정서를 좌파로 보는 것은 오산이다. 말하자면 예의 동무란 말을 살리는 수위의 사회복원이 적절하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젊은날의 사상 편력

소년은 집에서 잠을 자지못했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이집 저집 옮겨가며 밤을 새웠다. 그래도 불안했다. 창호지 방문안에 줄을 치고 두터운 요를 방문에 걸었다. 밖에서 총을 쏴도 방탄구실을 하도록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일이다. 아버지는 건국운동을 한다며 집안 일은 팽개치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아버지도 테러의 표적이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역사상 최초의 5·10 선거는 이런 가운데 치러졌다. 선거를 방해하던 그들은 투표소를 급습, 사람을 죽이고 투표함을 불사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익인 나는 우익 진영의 가족이었고 우리를 위협했던 저들은 좌익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아버지가 받은 것은 이승만의 감사장 한 장이었고, 가업이던 과수원은 돌보는 이가 없어 황폐화했다. 남로당과 토착 빨갱이 등 좌익 세력의 준동은 우익에 의해 건립된 대한민국을, 건국 후에도 무력 도발로 부단히 괴롭혔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국군장교로 들어갔던 아버지는 낙동강으로 후퇴했고, 어머니와 나와 동생들은 국군 가족의 멍에속에 감시의 대상이 됐다. “안 나가면 주목받는다”는 어머니 말에 나는 소년단에 나가 진종일 ‘김일성 장군의 노래’ ‘혁명가’ ‘적기가’ 등을 배우고 불렀다. 시일이 좀 지나 시골의 외할아버지가 “공기가 이상하니까 (할아버지 집에) 와 있으라”는 말씀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족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9·28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면서 무수한 우익 인사와 가족들이 저들 좌익에 의해 참살 당했다. 수복이 되고는 진짜 좌익, 무고한 좌익이 또 많이 우익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좌익의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어 안달을 부린 건 호기심과 반발심이었다. 호기심은 전쟁 때 체험한 공산주의는 전쟁시절이었으니까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반발심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의 저항이었다. 황산덕 서울대 교수가 쓴 ‘법철학’ 중 약 50쪽 분량의 공산주의 이론을 몇 번이고 탐독했다. 자본주의 입장에서 쓴 것이므로 의미를 뒤집어 판독해가며 읽곤하였다. 헌 책방을 뒤져 일본어로 된 관련 서적을 사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기도 했다. 군에 입대하기 직전엔 마침 진보당이 창당되어 들락거렸다. 말단 중 말단이었지만 재미가 있었다. 진보주의 사상에 심취해가는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게 대견하게 여겨졌다. 군에 입대했다. 부패한 군대는 쌀이든 군복이든 물자란 물자는 위에서 다 팔아먹어 이런 썩어빠진 군대의 나라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대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아도 장교나 하사관 등이 자기네 식구들 먹이기 위해 떼어가는 바람에 사병식당의 국그릇은 고기 한 점 없는 멀건 국물 뿐이기가 일쑤였다. 소가 물 건너가면서 냄새만 피운거나 같다고 해서 ‘황우도강탕’이라고 했다. 제대를 하고 나니 집안은 이미 많이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서울 홍제동 채석장에서 막 일을 시작했다. 취직이라고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운 판이니 어찌 할 수 없었다. 1961년 봄이다.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의 지방의원 선거가 있었다. 채석장주인이 시의원에 출마하는 것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그는 당선되어 서울시의회 의장이 됐다) 나도 출마했다. 선거 연설을 통해 욕이나 실컷 하고 싶어서였다. 제비뽑기 운이 좋았던지 기호가 두 손가락이나 양 팔로 ‘V’자 모양을 그리기 쉬운 2번이었다. 선거구는 서대문 제5선거구다. 선거구호는 다분히 선동적이었다. ‘무산계급에서 나온 사람, 무산대중이 밀어 주자’는 게 나의 선거구호였다. 물론 떨어지긴 했지만 빈민층이 많았던 지역이어서 어느 정도는 먹혀 들어갔다. 만 스물다섯살 시절의 일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나는 중도 보수주의다. 공산주의를 버린 것은 그 이론이 절대적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필연적 소산이긴 해도 결국은 신 계급사회의 지배구조이므로 수정 자본주의에 이은 재수정 자본주의를 선택했다. 뭣보다 공산주의 사회는 인성 말살의 기계적 사회다. 난 지금 인생을 잘못 살아 벌집 같은 다세대 주택에서 금융부채까지 진 소시민이지만 중도보수가 후대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얘길 하는 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 적잖은 젊은이들이 진보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설득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스로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나의 젊음에 비추어 그러하다. 또 하나는 불행하게도 좌·우의 이념이 아직껏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는 광복후, 한국전쟁 전후의 좌·우 대립이 살상과 전쟁으로 얼룩진 태생적 업보다. “냉전수구, 유신독재 망령이 되살아 났다”는 이 정권의 강정구 사태 반론은 강모와 같은 꾼다운 억지다. 이 정권은 좌익으로 가면서 아니라고 우긴다. 평양정권의 정치적 ‘민족공조론’에 말려들면서 아니라고 하는 그 실체가 의문시 되는 것은 사실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공산당’ 간판이 나붙는다

간첩 관련의 구호가 다 철거된 가운데 어쩌다 남은 표지판이 오히려 낯 설다. 북의 공작원, 즉 간첩은 지금도 건재하다. 사이공 정부 패망 직후에 나타난 기막힌 현상이 있었다. 정부내 요인, 학계, 사회단체 등 지도층에 하노이 정부의 공작원 노릇을 한 의외의 인물이 수두룩했다. 남쪽 사회를 일컬어 ‘간첩천국’이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간첩 노릇도 되레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작계 5026 북한 전략거점 정밀타격 전략’ ‘작계 5027 대북 선제공격 등 전면전 계획’ ‘작계 5029 북한 붕괴 등 돌발사태 대비책’ ‘작계 5030 북한 압박통한 정권교체 계획’ 등은 한반도 정세의 상황 변화에 따른 돌발 사태의 대비책이다. 국방 비밀문건이다. 간첩도 입수할 수 없는 이런 고급 기밀이 정치권의 입방아에 의해 절로 누설되고 있다. 평양 대남공작부서가 웬만한 첩보 보고는 ‘이런 것도 첩보라고 올렸느냐’며 질책하기에 딱 알맞다. 어차피 남쪽 사회의 첩보는 이리저리 ‘자연뽕’으로 다 까발려지고 있다. 첩보 활동도 좋지만 혁명 완수의 결정적 시기를 보다 앞당겨 성숙시키는 방향을 ‘공작원’의 새 소임으로 부여될 수가 있다. 이대로 가면 공산당 간판이 서울 거리에 나붙는다. 중앙선관위에 정당 등록이 되어 정치활동을 합법적으로 하게 된다. 이미 형해화된 국가보안법이 그나마 숨이 끊어지면 북쪽 체제를 선전해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어진다. 대한민국 법률 그 어디에도 공산당을 불법화한 규정은 없다. 이에 비해 있는 것은 학문·예술의 자유와 저작권 등의 보호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이 기본권은 곧 표현의 자유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이의 이득을 톡톡히 보고 있다.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신기남 전 의장, 천정배 법무부 장관에 이어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 표현의 자유를 들어 강 교수를 두둔하고 나섰다. 검찰은 구속방침을 정하고도, 정권의 조직적 비호에 눈치를 살핀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인 국정원은 식물화됐다. 통일부는 신원조회 없이 520명을 ‘아리랑 공연’ 참관을 위해 방북시켰다. 국정원의 ‘방북 부적절’ 의견을 통일부가 일방적으로 무시한 사례 또한 숱하다. ‘주체의 인테리론’ ‘김정일 장군 선군정치 이론’을 비롯한 서적과 북의 체제찬양 가요CD 등이 방북인들에 의해 대량 반입됐다. 이 역시 서적과 CD를 지니고 듣고 보는 것만으로는 현행 국가보안법상으로도 처벌하기가 어렵다. 국가보안법이 폐기되면 학문의 자유로 둔갑될 것이다. 공산당 간판을 내걸 수 있는 구실은 헌법이 규정한 양심의 자유다. 양심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다. 공산당을 불법시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논리를 내걸 것이다. 6·25 한국전쟁을 통일내전으로 왜곡하는 부류들이 앞으로 공산당 불허는 위헌이라는 주장을 안 할 리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2003년 6월29일 일본 방문에서 가즈오 일본 공산당 위원장에게 “한국은 현재 공산당 활동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나 민주국가로서 문제다”란 말을 한 바가 있다. 양심의 자유를 들어 공산당 활동을 제기하면 이를 저지할 헌법상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즉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 및 사기업의 국·공유화 또는 통제 등 금지로 자본주의를 경제질서의 기조로 삼고 있다. 그리고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해 해산시킬 수는 있으나 이의 제소권을 정부가 갖고 있다. 공산당 간판을 달았을 경우, 이 정부가 과연 헌법재판소에 해산 청구의 제소를 할 것인 가는 의문이다. 공산당 간판이 나와도 일본의 공산당 같으면 또 모른다. 국내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자는 대개가 친북세력이며, 북은 교조적 사회주의도 아닌 우리식 사회주의며, 우리식 사회주의는 김일성주의다. 김일성주의도 이젠 김정일주의로 가고 있다. 공산당이 국내 정당화한다 해도 민중사회의 호응을 크게 얻는 지지 세력으로 떠오를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혼란은 불가피하다. 당대와 후대가 먹고 살아갈 일이 바쁜 이 시점에서 낡은 이념의 논쟁으로 국력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남북의 당면과제는 공존공영이며 장래과제는 평화통일이다. 이 과정에서 동포애의 남북교류를 틈탄 북의 정치적 침투를 이 정권이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는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제발, 벌어먹게 해 주시오’

빚잔치를 하는 재판 절차가 파산이다. 법원의 파산선고를 받으면 빚더미 귀신으로부터는 풀려난다. 재산이 더 없어 다 갚지 못한 빚은 합법적으로 떼어 먹는다. 대신, 알거지가 된다. 길거리에 나앉다시피 된다. 한 마디로 망하는 것이 파산이다. 이만이 아니다. 파산선고로 박탈된 공·사권의 제한을 해제, 그 권리능력을 회복시켜 주는 복권이 있기까지는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한다. 차마 못당할 일이 파산이다. 대통령은 아는지 모르겠다. 이런 파산 신청이 줄을 잇는다. 미처 처리하지 못해 미제율이 높아만 간다. 수원지법이 올 상반기동안 접수받은 개인 파산 신청은 1천699건으로 지난 한해 동안의 곱절에 가까운 데 비해 처리율은 811건으로 35.8%에 머문다. 수원지법만도 아니다. 신문보도는 의정부지법이나 인천지법 등 역시 사정은 비슷 비슷한 것으로 전했다. 수도권 법원만도 아니다. 전국의 지방법원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례없이 폭주하는 파산신청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에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52명이라는 통계청 발표가 있었다. 이들이 노숙자든 혼자 사는 노인이든 간에 어떻게 이토록 굶어죽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건지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다. 통계에 안 잡힌 굶어죽은 사람이 몇 배나 더 많을 것 같다. 사회안전망이 잘 발달된 선진 복지사회에도 그늘은 있다. 어찌 파산이 없을 수 있고, 굶어죽는 일이 없을 수 있을까 만은 이건 너무 심각하다. 그런데 탈은 옛 속담대로 주인이 배 부르니까 머슴 배 곯는 줄 모른 데 있다. 어느 때, 어디에든 문제는 다 있게 마련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는게 진짜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중앙 일간지 경제부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런 생각을 밝히면서 “우리 경제는 전반적으로 잘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예를 든 파산 신청은 민생경제 파탄의 반영이다. 수년 전에 비해 약 100배가 늘었다. 파산은 전에도 있었지만 이렇게 절박하지는 않았다. 한해 동안에 몇 배씩 느는 현상은 노 대통령 치세 들어 더 심화됐다. 이대로 가면 더 할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음식점을 비롯한 접객업소같은 자영업은 열 곳이 생기면 일곱 곳은 1년을 못 넘기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채 문을 닫는다. 서민층 가계에 빚없는 가구는 별로 없을 것이다. 법외 파산자는 이미 수두룩하다. 참 기분 나쁜 신문기사를 봤다. 유라시아그룹이 한국 사회를 ‘방향타 잃은 배’로 분석한 보고서 내용이다. 정부의 문제점으로 측근비리(부패척결 무력화), 연정 등 국민정서와 먼 정치 의제(지지도 하락), 즉흥적 발언(국민 실망), 전문성이 결여된 정부 운영(정책수립 차질), 여당 내부 분열(젊은층 지지도 하락) 등을 지적했다. 유라시아 그룹은 세계적인 컨설팅기관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의 정부를 비판해도 우리가 해야지, 남들이 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않다. 문제점 지적이 다 맞는 건 아니지만 과히 틀렸다 할 수는 없다.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켕기는 것은 일본식 장기불황의 경고다. 이 또한 걱정해 왔다. 다른 문제점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으면서 장기불황 얘긴 귓등으로 흘리지 못하는 덴 연유가 있다. 먹고 살 걱정이 태산이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지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우월감 보다는 성장산업 분야의 정부 역할을 줄여야 한다. 만들어진 ‘파이’를 분배하기 보다는 ‘파이’를 키워 분배할 줄 알아야 한다. 물고기를 잡아다 주는 적자재정의 복지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고용과 생산형 복지로 가야한다. 대통령의 말엔 괴벽이 있다. 쉬운 말은 굉장히 쉬운 데, 어려운 말은 굉장히 어렵다는 게 민중의 소리다. 대체로 막말하는 말은 알아듣기가 쉽고, 정책을 말하는 덴 알아듣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얘기를 꼭 어렵게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릴 줄 아는 것은 총명이다. 민중은 이런 총명을 기대한다. 경기불황이 가정파탄으로 많이 번지는 것은 또 하나의 사회 문제다. “제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이것이 절박한 민중의 절규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盧의 ‘통합적 진보주의’

노무현 대통령은 중앙일간지 경제부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자신을 ‘통합적 진보주의자’로 분류했다. 그의 생각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점에서 눈길을 끈다. 독일 슈뢰더 정권의 사회개혁에 꽤나 매력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슈뢰더는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 좌파나 독일 좌파나 영국 블레어의 ‘제3의 길’이나 유럽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정권이 분배 우선으로 치달아 방만한 적자재정으로 가고 있다. 그의 통합적 진보주의의 반영인가 싶다. 통합적 진보주의는 대통령의 표현이다. 중도 좌파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고전적 유럽 사회주의를 통합적 진보의 모델로 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필자는 중도 우파의 입장이다. 온건 개혁에 동의한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도 좌파, 즉 통합적 진보주의를 배척할 생각은 없다. 중도 우파나 중도 좌파나 다 건강한 측면에서 고찰하면 상호 보완의 관계를 갖는다. 물론 다소간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금 겪고 있는 국내 혼돈의 본질은 이런 원론적 개념의 차이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념 논쟁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갖는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가 갖는 슬픔이다. 원론적 개념의 차이보다는 대북 관점이 논쟁의 본질이 됐다. 평양 정권을 협량하게 대하면 꼴통 보수로 매도된다. 평양 정권을 관대하게 대하면 깨인 진보로 대접 받는다. 더 나아가 친북을 하면 선각자 대우를 한다. 예컨대 중국 공산당 의용군의 한국전 참전엔 일언반구의 말이 없다. 미군의 한국전 참전은 ‘통일내전’에 대한 침략이라고 힐난한다. 같은 외세 개입인 데도 평가가 다르다. 미군이 중국 의용군보다 먼저 참전했으며 아직껏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양 정권이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침략행위는 통일전쟁으로 미화하고 침략에 대한 방어는 제국주의로 깎아 내린다. 이에 사용되는 주술이 ‘민족’이라는 용어다. ‘민족자주’ ‘자주통일’은 평양 정권이 가장 즐기는 대남 최면술이다. 통일 방안에서 저들이 남북연합제가 아닌 남북연방제를 고집하는 덴 ‘민족자주’ ‘자주통일’의 깊은 함정이 있다. 연방제가 되면 주둔 미군의 철수가 불가피하다. 남쪽 군사력은 북쪽 군사력에 비해 게임이 안 된다. 평양 정권이 다시 쳐들어와도 연방제하에선 정말 내전 형태가 되어 나라밖에선 방관만 해야한다. 일국 일당의 공산주의엔 원래 국제공산당만 있을 뿐 민족의 개념은 부정됐다. 민족이란 말은 공산주의 혁명의 저해 요인으로 지탄됐다. 광복 직후 건국을 유보하는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우익과 함께 좌익세력도 적극 반대했다. 그러다가 하룻밤 새에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한 게 모스크바의 지령에 의해서였다. 그 당시엔 좌익이 오히려 외세 진영이었고 우익은 만족 진영이었던 것이 지금은 우익이 외세 세력이고 좌익이 민족 진영인 것처럼 됐다. 광복 이후 60년의 세월이 참 무섭다. 그렇다고 평양정권과 반목하거나 싸우자는 것은 아니다. 미우나 고우나 동포다. 북녘을 지배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집단이다. 대화를 해야하고 교류를 해야 한다. 돕는 것도 좋다. 그러나 제 정신이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국기인 나라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제 정신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을 방해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유혈 책동속에 건국됐다.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려면 무엇때문에 그토록 피를 흘리며 나라를 세울 필요가 있었겠는가, 한국전쟁 땐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지 않으려면 그냥 내줄 일이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목숨을 초개같이 희생했는가를 생각해볼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을 지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남북 분단으로도 모자라 심한 이념적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은 이 정권 들어 더욱 심화한 현상이다. 국토의 분단에 겹친 국가의 분열, 즉 분단국가 더하기 분열국가는 참으로 힘든 고통이다. 간곤하게 나라를 세우고 지킨 대한민국이 있어 오늘의 ‘노무현’이 대통령자리에 있다. 그의 ‘통합적 진보주의’가 보는 나라의 정체성은 뭣이며, 대북관은 뭣인 지에 대해 진솔한 생각을 듣고 싶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소주세 올린 ‘盧’

노무현 대통령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들러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소주 등 증류주에 대한 세율을 대폭 올리는 ‘주세법개정안’ 반대는 열린우리당이 거듭 거듭 확정한 당론이다. 그런데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재경부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사회봉을 ‘땅땅’ 두들겨 가결을 선포한 사람은 바로 노 대통령이다. 소주는 국민주다. 지난해 소주 내수량은 108만1천833㎘로 전년도 104만4천38㎘에 비해 3.8%가 늘어 IMF환란 때보다 더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통계청 집계가 이렇다. 병으로 따지면 무려 30억509만여 병이다. 20세 이상 성인을 약 3천500만 명으로 잡으면 1인당 평균 87병을 마신 셈이다. 올 음주량은 더 많을 것이다. 소주는 서민주다. 돈 없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마신다. 가난한 노동자, 월급쟁이, 영세상인, 중소기업인들이 선호한다. 노숙자들이 즐기는 술도 또한 소주다. 기분이 좋아서 마실 때도 있지만 울화가 터져 마실 때가 훨씬 더 많다. 노 대통령은 민중의 울화통을 이리저리 잘 터뜨리는 별난 기술자다. 소주는 이래서 민중의 친구다. 불황의 늪에서 민생고로 허우적거리는 민중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변덕과 배신이 판치는 세태에서 언제나 변하지 않고 위로를 주는 벗이다. 뭣보다 돈이 덜 들어 좋다. 주세법 개정으로 주세율이 지금의 72%에서 90%로 오르면 삼겹살 집에서 받는 병당 가격이 3천원에서 약 4천원으로 뛴다. 소주 한 병 더 걸치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안마시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을 안주 삼아 죄없는 소주병만 더 비울 것이다. 소주세 인상은 내년도 정부 예산안의 세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다. 자그마치 221조원 대의 방만한 규모다. 올해보다 무려 6.5%, 그러니까 13조2천억원이 더 많은 팽창예산으로 가고 있다. 이에 돈 만들 구멍이 없다보니 적자국채를 9조원 가량 발행할 계획이다. 국민이 세금으로 갚을 국가채무만 눈더미처럼 불어난다. 2002년에 국민 1인당 279만원이던 국가 채무가 올핸 509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내년에는 국가채무 누적액이 279조원으로 치솟아 국민 1인당 579만원 대가 될 전망이다. 세부담 역시 폭증했다. 2002년에 국민 1인당 284만원이던 세부담이 올핸 340만원이 됐다. 세부담이 늘면 나라빚이 줄든 지 해야할 터인데 빚은 빚대로 세금은 세금대로 더 늘리면서 뭐 하나 딱 부러지게 해놓은 건 없는 것이 이 정권이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잡고 있는 세수입은 142조8천억원이다. 이를위해 세금을 이렇게 저렇게 쥐어 짜내는 것 중의 하나가 엊그제 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방망이를 두드린 소주세 인상이다. 열린우리당은 정부의 소주세 인상을 반대하는 대신에 대안을 제시했다. 기업은행 지분 등 정부 보유 주식과 국유지 매각으로 재원을 마련하자고 했다. 세출 예산을 조정해 세수 공백을 메우자고도 했다. 세출예산 삭감은 불요불급한 지출을 없애는 것으로 옳은 조치다. 이런데도 노 대통령은 한덕수 재경부 장관의 손을 들어줬다. 한 장관은 대통령이 지극히 좋아하는 이해찬 국무총리가 총애하는 사람이어서 그랬는 진 몰라도 책임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당론을 무시당해 여당의 체모가 말이 아닌 열린우리당이 발끈하고 나섰다. 정세균 원내대표는 “소주세 인상은 적절치 않다”며 “당의 생각대로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석호 제3조정위원장도 “정부안을 국회에서 부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말씀’ 한마디면 ‘일렬종대’ 차렷 자세로 길들여진 열린우리당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반발이다. 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주세법개정안을 여당이 국회서 부결시킬 것인지, 아니면 ‘찻잔속 태풍’으로 끝날 것인 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흥미로운 건 따로 있다. “여소야대여서 대통령 노릇 못해 먹겠다”고 걸핏하면 입버릇처럼 말하는 분이 사전조율 한마디 없이 여당 당론을 배척한 사실이다. 여당은 하부기관이 아니다. 여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보기보단 보조기구로 보면서 하물며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대통령노릇 못해 먹겠다”는 말이 나오는 건 이런 인식의 결함에 기인한다. 소주세 올려 국민노릇만 더 힘들게 됐다. (각의에서 함께 통과된 ‘조세특례제한법개정안’ 악법과 그리고 보통화한 LNG에 대한 특소세 문제는 따로 다루겠습니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女傑, 현정은 회장

500마리의 소 떼를 실은 트럭 행렬은 장관이었다.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달렸다. 내외신은 다투어 크게 보도했다. 1998년 6월의 일이다. 소떼를 이끌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고인이 됐다. 고인이 됐지만 그는 역사속에 남는다. 언젠가 평화통일이 되면 통일의 물꼬를 튼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000년 6월15일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의 만남을 주선한 배후 인물이 소떼를 몰고간 정주영이다. 그리고 오늘의 남북경협에 시발점이 되는 금강산관광사업의 첫 출항으로 금강호가 뜬 게 그해 11월이다. 만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현대는 약 10억5천300만달러(1조530억원)를 금강산사업에 쏟아 부었다. 돈을 번 것도 아니다. 지난해만 7억가량의 순익을 남겼을 뿐 거의 해마다 적자를 면치 못했다. 금강산 관광 대가외에 방만한 투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금강산 시설물 공사로 1억4천461만달러(1천735억3천200만원), 유경 정주영체육관 건립비 4천776만달러(573억1천200만원),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 5만대 공급에 740만달러(88억8천만원) 등 이밖에도 허다한 공식 및 비공식 지원이 많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대북사업 철수 가능성을 공개하고 나섰다. 시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 남편 정몽헌 회장이 심혈을 기울였던 대북사업이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갔다. 유지를 받들기 위해 개성관광사업에 이어 백두산관광사업을 따냈다. 백두산은 지금 천지를 중심으로 북녘 땅과 중국 땅으로 나뉘었으나 원래는 다 북녘 땅이다. 이를 반반으로 갈라 중국땅이 된 게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후 중공군 참전 대가로 내준 영토 할양이다. 이래서 중국땅을 통해 백두산 관광을 다녀올 수 있었던 사람이 그동안 많긴 하지만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어떻든 북녘 땅을 밟아 천지를 오를 수 있는 백두산관광사업은 현정은 회장으로서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연장선이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참 상승하는 현정은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북측의 돌변이다. 백두산관광사업을 무기 연기시켰다. 심지어는 현대가 이미 시범관광까지 가진 개성관광사업을 다른 파트너를 구해 넘기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현대아산과 북의 아태평화위원회는 대북사업의 직통 창구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독단으로 가진 모종의 대북 커넥션이 문제가 되어 현대는 그를 일선에서 후퇴시켰다. 아태는 김윤규씨의 일선 복귀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현정은 회장의 거부는 단호하였다. 북측은 이에 심사가 뒤틀렸다. 현대는 계약상으론 금강산, 개성, 백두산 등 주요 관광지의 토지 이용권을 50년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대북관광사업은 현대의 독점권이다. 그러나 계약을 담보할 수 있는 기속력이 없다. 대북사업 투자의 허점이 이에 있지만 현대는 주저치 않는다. “투자는 포기하면 그만이다. 더 잃을 것은 없다. 부당한 이익보다는 정직한 양심을 선택하겠다”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대북사업의 기로”를 선언했다. 공을 넘겨받은 북측의 반응은 아직 없다. 어쩌면 금강산관광사업을 압박하고 나올지 모른다. 아니면 냉각기간을 두고 쌍방 합의의 돌파구를 모색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대북관광사업 독점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북의 파트너 바꾸기에 군침을 삼키는 국내 자본이 있어서는 안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북의 입맛들이기에 휘둘려서는 대북사업이고 뭐고, 너도나도 죽도밥도 안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각이다. 그가 소 떼를 몰고가서 금강산관광사업을 따낼 때, 돈을 번다고 확신했을 지 어쨌는 지가 궁금하다. 그동안의 관광객이 약 70만명이다. 당초 예상한 연간 50만명에 비하면 비교가 안된다. 현대는 이래도 사업수익과 상관없이 매월 일정금액을 입금하는 럼섬(lump sum) 방식의 계약에 따라 송금해야 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또 다른 야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말년을 남북의 물꼬, 통일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다는 말을 듣고싶어 했다고 보는 추측이 가능하고 또 그런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남편을 대신해 대를 이어받은 며느리는 북측이 당장은 어떻게 나오든 대북사업의 기득권은 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북의 길들이기에 끌려가지 않고 되레 길들이는 결단이 여걸답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盧의 자충수

하긴 오래됐다. 헌정 57년 동안에 18년 여를 지속하기는 제6공화국이 처음이다. 1공은 13년, 2공은 9개월, 3공은 10년, 4공은 8년, 5공은 7년을 지속했다. 6월 항쟁으로 쟁취한 것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현행 민주화 헌법이다. 4공 때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5공 때 대통령선거인단 등이 장충체육관에서 간선으로 뽑던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 출현을 없앴다. 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됐다. 그러니까 헌정상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다 같은 6공 정권이다. 굳이 따지면 노태우는 6공1기, 김영삼은 2기, 김대중은 3기, 노무현은 4기라 할 수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정권이 6공에 뿌리를 둔 사실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뭣보다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6공의 원조인 점은 아주 견디기 힘든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래서 집을 다시 짓고 싶어 한다. 개헌을 통한 제7공화국 건설을 설계하는 게 ‘연정론’의 배경인 것으로 분석된다. 실언(失言)이고 망언(妄言)이고, 강변(强辯)이고 다변(多辯)이고 간에 그 속엔 계산된 속셈이 없지 않다. 그의 머리는 컴퓨터가 쉼 없이 작동한다. 개헌 의도가 맞다면 대통령중심제의 중임제가 되기 보다는 내각책임제일 공산이 많다. 대통령 단임제가 없어지더라도 현행 헌법 개헌 당시의 대통령은 중임이 배제된다. 이에 비해 내각책임제는 총선에서 승리만 하면 장기 집권이 가능하다. “임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대통령 말은 하야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재임중 내각책임제로 개헌되면 총리직을 위한 대통령직의 사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노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면 임대아파트에서 살겠다는 뜻도 비쳤고, 농촌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뜻도 비쳤지만 당장은 아니다. 먼 훗날의 얘기다. 그는 정치에서 물러가기는 아직도 연부역강 하다는 생각을 갖는 티가 역력하다. 지역구도 타파에 반론은 있을 수 없지만,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능사는 아니지만 지역구도 타파에 다소나마 도움이 된다면 제도개편 논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정은 아니다. 대통령중심제에서 연정 제의는 처음 본다. 더욱이 내각이 국정의 중심에 있다고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대통령 비서실이나 대통령 직속의 무성한 위원회들이 내각을 조종하는 것이 이 정권의 취향이다. 권력을 통째로 줄 수도 없지만 준다고 해도 주인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주인이 내준 권력을 통째로 거둬들이면 권력을 빌려받았던 박근혜나 한나라당은 닭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다. 이 정권의 실정만 바가지로 뒤집어 쓴다. 대통령은 막판에 열린우리당 탈당의 극약 카드를 내비칠 지 모른다. 그래도 아니다. 내각책임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의 연정 제의는 정당정치에 위배된다. 헌정 질서를 문란케하는 위헌이다. 국민은 노무현에게 대통령직의 권한을 부여했지, 대통령의 권한을 무책임하게 통째로 빌려주라고 뽑아준 것은 아니다. 헌법조항 어디에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이런 규정은 없다. ‘헌법을 형식논리로 보고 형식논리에 구애됨에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또 하나의 신형(新型) 독재다. 되지않는 연정을 미끼삼아 빙빙 돌리기 보다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떳떳하다. 개헌을 원한다면 당당하게 개헌 카드로 가는 게 옳다. 제2공화국의 장면 정권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내각책임제 거론에는 물론 많은 부담이 따른다. 만약 대통령의 본의가 이것이 아니면 연정 얘기는 이제 끝내야 한다. ‘노무현 시대의 마감’을 ‘새로운 출발’이 아닌 지금의 ‘노무현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진정이라면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는 것이 도리다. 6공의 4기 정권은 자신이 선택한 태생적 숙명이다. 제7공화국을 여는 개헌 여부는 임기를 절반 남긴 현직 대통령이 간여할 일이 못된다. 승부사에게도 실패는 있다. 연정론의 승부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충수라는 생각을 갖는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나이롱 뽕’은 그만 하시지요-청와대 편지

노무현 대통령님의 생각이 걱정됩니다. 연정과 관련해 지역구도를 해소하는 쪽으로 선거구제가 개편된다면 2선 후퇴나 조기 사임할 수도 있다고 했다는 신문보도가 맞습니까.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의 청와대 초청 만찬에서 이같이 말씀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이라면 말이 안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 자릴 왜 그렇게 만만하게 보십니까. 그토록 헌신짝 버리듯이 할 수 있다는 건 통 큰 마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국민을 헌신짝 대하듯이 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국리민복을 위해 대통령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라는 것이,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연정을 하고, 선거구제 개편에 대통령직을 건다고는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그건 개인의 정치철학일 뿐입니다. 개인의 정치철학과 대통령직의 소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당신은 정말 안좋은 대통령입니다. 도대체 말씀하시는 대연정은 뭡니까. 쉽게 말해서 야당이 없는 여당위주의 정치가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 어떤 형태의 선거구제를 원하십니까. 지역구도 해소는 물론 해야겠지요. 하지만 지역구도 해소를 빙자해 뭐든 다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신임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국민의 잘못입니까. 이에 대해 대통령 자신을 반성할 생각은 못하고 오히려 알아주지 않는다며 국민에게 투정과 몽니를 부리는 게 가당치나 한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대통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연정인가, 대연정도 그렇지요. 연정이 대통령의 능력 부족으로 대통령 스스로가 제의하게 된 것이고 보면 이게 대통령 말씀대로 무슨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총정리의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수치스런 정치인생의 마감인 것이지요. 민중은 지금 먹고 살기가 바쁩니다. 이런 판에 왜 국민사회를 불안으로 몰고 갑니까. “텔레비전에 노무현이 나오는 것이 겁난다”고들 합니다. 세평이 이렇습니다. 입만 뻥긋하면 생뚱맞은 얘기가 나오다 보니 또 무슨 소릴 하나 하고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국민사회는 엉뚱하게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죽을 맛입니다. 정치는 투명하고 예측이 가능해야 국민사회가 안정되고 편합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대통령님의 말씀은 종잡을 수가 없으니 편할 리가 만무하지요. 장막에 가려진 불확실성의 ‘노무현 코드’에 민심은 지칠대로 지쳐 있습니다. 당신네 여당 의원들도 종잡을 수 없다고 하면 말 다 한것 아닙니까. 충격요법도 한 두 번 이어야지요. 충격요법을 남용하여 면역성만 생기고 말았습니다. 너무 합니다. 연정론에 이의가 일자 대통령은 ‘임기 단축’의 사임 카드를 내거는 초강수로 이의를 잠재웠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임기내에 마칠 것으로 보는 눈은 없습니다. 또 모르겠습니다. 헌법재판소에 계류된 행정도시법 위헌여부 심판이 위헌으로 결정나면 혹 모르겠지만, 절로 물러설 대통령님이 아니란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의 일이 돌이켜집니다.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결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 판 승부의 ‘나이롱 뽕’ 같은 도박을 했다고 보십니까.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직은 도박을 거는 자리가 아닙니다. 왜 ‘나이롱 뽕’ 자리에서나 할 수 있는 무책임한 막말을 열세 번이나 하십니까. 노 대통령이 국민사회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사회를 위해서입니다. 대통령을 지내면 민생은 도탄에 빠뜨렸어도 전직 대통령 예우받고 비서들 두어가며 연금으로 여생을 잘 먹고 잘 삽니다. 대통령을 위해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존경할 수 없는 대통령을 둔 민중만 불쌍한 것이지요. 제발 이러면 이렇게 말하고 저러면 저렇게 말하는 옛 이집트 고사에 나오는 현란한 ‘악어의 논법’으로 나라를 더 헷갈리게 하지 마십시오. 나라 밖에서 나라 안을 어떻게 볼 것 인가도 좀 생각해 주십시오. 지나간 임기도 중했지만 앞으로 남은 임기는 더 중합니다.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경망스런 당신의 모습을 국민사회는 정말 원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직은 승부수를 던지는 자리가 아니고 민생을 보듬는 자립니다. 그래도 정 못하겠다면 국민사회를 협박하지 마시고 조용히 하야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대통령님의 생각이 심히 걱정됩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盧, 반환점에 서다

신념은 이성적 판단이며 아집은 감성적 작용이다. 이성적 판단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릇된 것도 있다. 이에 비해 감성적 작용은 열이면 열 다 그릇된 판단에 든다. 치자의 판단은 이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형이 대체로 후자에 들어보이는 것은 유감이다. 나라의 혼선을 가져온 연유가 이에 있다. 노 대통령의 통치관은 신·구의 가치관, 계층별 대립관, 이 두 가지를 기조로 해보인다. 과거 투쟁단계의 앙금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모순이다. 과거는 구악 일색으로 배척하면서 구악을 답습한 신악의 변론엔 무척 관대하다. 사회 대통합 관념엔 평준화를 신앙화하는 흔적이 역연하다. 문제는 방법이다. 하층구조를 중간층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참다운 평준화의 플러스 접근 법이다. 상층구조를 중간층으로 깎아내리는 방법을 즐기는 것은 마이너스 발전법이다. 부동산대책을 예로 든다. 세부담 상한제 폐지, 보유세 실효세율 등 검토는 실수요자들의 부담 가중 요인이 짙다. 세제의 차별화는 계층간 갈등을 유발할 수가 있다. 투기와의 전쟁도 그렇다. 행정도시다, 지역균형발전이다 하는 장밋빛으로 온 국토를 투기마당으로 만들었다. 이에 겹쳐 ‘강남 저주’로 시작된 부동산대책은 수십 번 오락 가락하면서 되레 폭등시켰다. 부동산 투기로 엄청나게 챙기는 불로소득엔 중과세하고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아니다. 정권이 시장을 왜곡한 실패의 요인이 마이너스 발전법에 있는데도 아집을 버리지 못한다. 지역균형발전이란 것도 그렇다. 지역 특성의 기능을 살리는 융합적 조정이어야 한다. 수도권내 공공기관을 무 자르듯이 떼어주는 수치적 배급이 균형발전일 수는 없다. 말에 신뢰가 담기지 못한 것도 아집에 기인한다. 실례로 수도권을 선관리계획 후 규제완화로 전환하겠다는 말은 취임후 가진 중앙지 편집국장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똑같은 말을 지금도 한다. 아마 내년에도 되풀이 할 것이다. 고유가 대책을 들어 언론이 대안 제시없이 비판만 한다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래, 비판하는 기자 니가 한 번 와서 해보라”는 대목에선 실소를 자아낸다. 현재 석유 비축량은 1억1천620만 배럴의 비축시설 규모에 비해 불과 64.2%인 7천465만 배럴에 그친다. 75일분 분량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비축량 113일분 보다 무려 38일분 분량이 미달한다. 고유가에 대비해 대통령 말대로 무슨 “뾰족한 수”는 고사하고 평상시 대비도 안 된다. 에너지대책의 이완이 이러면서 “니가 와서 해 보라”는 것은 역시 감성적 대응이다. 대연정의 끈질긴 제의는 가히 스토킹 수준이다. 그런다고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건 아니다. 헌정 질서만 어지럽힌다. 이런데도 제의를 외면하려면 지역구도 타파 대안을 내놓으라고 한다. 전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요구는 억지다. 이런 저런 대통령의 아집을 사례로 들었다. 좀 정돈된 모습을 보고 싶다. 안정된 면모를 바라고 싶다. 토론이나 대화를 꽤나 많이 갖지만 언제나 일방적이다. 상대의 생각을 들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생각은 아예 없어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기에 바쁘다. 토론이나 대화는 이래서 으레 대통령 생각의 틀에 맞춰 짜여진다. 통치자가 소신이 없으면 국민이 불행하다. 그러나 통치자의 아집이 세면 국민이 헷갈린다. “대통령의 말을 듣고 나면 무슨 말인 지 헷갈릴 때가 많다”는 것은 민중사회의 정평이다. 대통령의 말은 알아듣기 쉽고 뜻이 분명해야 한다. 변칙을 원칙으로 돌려댄 상황논리는 반합리적이다. 알아듣기 어렵고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로 임기가 반환점을 돈다. 벌써 반인가, 아직껏 반밖에 안됐나 하는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완주코스 42.195㎞의 마라톤에서는 선수가 반환점을 도는 컨디션으로 성적을 가늠한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다. 저 내년엔 다음 대통령 선거로 한 해를 보낸다. 레임덕이 불가피해진다. 노 대통령에게는 내년이 중요하다. 주관적 강요의 아집보다, 객관적 설득의 소신을 기대한다면 역시 무리일는 지 모르겠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盧, NO…“개그는 이제 그만”

“국민의 정부가 겪었던 여러가지 실패의 과정을 이번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2003년 4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힌 노무현 대통령은 이튿날 “엄살 좀 떨어봤다”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공산당 활동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나 (이는) 민주국가로서 문제다. 내가 일본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최초의 한국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 방문에서 시이 가즈오 일본 공산당 위원장에게·2003년 6월9일) 대통령의 이 말에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원론적 수준의 덕담이라며 서둘러 파문 진화에 나섰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칠레 AFEC 정상회의 때) 개성공단에 함께 가자는 내 얘기를 받아들였다”는 말에 매클렐린 미 백악관 대변인은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즉각 반박했다. (사실은 내년 부산 AFEC 회의 때 부시가 오면 개성공단에 한 번 가자는 정도로 혼자 비공식 인사 치레로 가볍게 말한 것), 청와대는 대통령의 이 말에 외교적 파장이 일자 역시 덕담이었다고 해명했다. (올 1월5일) “모든 측면(물가·외환·경제성장률·실업률)에서 한국경제는 완전이 회복했다” (4월16일 터키 경제인 간담회)는 말엔 어느 나라 경제를 얘기하는 것이냐는 반론이 국내에서 일자, “당장 문제될 만한 구조적 요인은 극복했다”는 뜻이라고 김영주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이 애써 봉합에 나섰다. 대통령의 다변증은 정말 기록적이다. 2003년 5·18 행사 때 한총련 등 대학생의 과격 시위를 제대로 대처치 못해 쏟아진 비난에 대해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고도 했고, 취임 얼마후에 가진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민주당 당내 후보시절 모 검찰 지청장에게 사건 청탁한 사실을 한 검사가 들추자 “이쯤하면 막 가자는 것이죠?”라는 말을 뱉듯이 했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에서는 자신과 한나라당측 불법자금을 가리켜 “티코 대 리무진”이라고 희한한 비유를 했다. 그의 독설은 가히 촌철의 독기다. 기자회견 때 향리에 있는 맏형의 비위 사실을 두고 “좋은 대학 나오신 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라고 해 되레 핍박 받은 대기업 사장이 한강에 투신했다. 당선자 시절 국영 기업체 임원의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다짐했던 낙하산 인사 배제가 말과는 달리 낙하산 부대 일색으로 투입된 데 대한 비난을 의식, 중앙 언론사 간부 청와대 초청 오찬 자리에서 “잘 봐 달라”고 전례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말은 품격이 없는 게 특징이다. ‘쪽수’ ‘통박’ ‘배알’ ‘개판’ ‘조지고’ ‘깡통차고’ ‘맛 좀 볼래’ 등 시정에서도 막된 사람이나 쓰는 언어가 그대로 난무한다. 말 바꾸기의 명수다. 하긴, 대통령을 하기 전에도 그랬다. “재벌의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서 노동자에게 분배하자”는 것은 1988년에 있었던 대정부 질문이다. “잘 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 물에 빠져 죽으면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노동자가 염병해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끝이다”라고 한 것은 1989년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한 말이다. 이런 말이 후보시절 말썽이 되자 “지금은 그같은 견해나 기업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 (2002년 3월 KBS 라디오 방송) 라고 말하고 파업 현장 발언은 “상징적인 정치연설”(2002년 3월 전주 TV토론)이라고 말 머릴 돌렸다. ‘노무현 화법’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한 실수나 무식, 생각의 모자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효과를 노린 의도적 수단이다”라고 했다. (2003년 6월 정윤재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결국 천방지축의 다변증은 계산된 개그인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구분되는 탈 권위와 탈 품격을 혼돈하는 것은 인식의 혼돈을 드러낸다. 마치 독재자처럼 헌법을 가볍게 보는 건 그같은 인식의 혼돈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다. 그의 ‘대연정론’에서 “정권을 내준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헌정질서 파괴다. 대통령직의 정권은 헌법상 불가분이다.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정, 내주고 싶으면 하야하는 길이 유일하다. 8·15 경축사에서 ‘국가범죄 민·형사 시효 배제’를 주장해 위헌 파문이 확산되자 하룻만에 “형사적 소급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라고 말을 바꿔 한 발 뺐다. 그런다 해도 노무현 방식의 그같은 주장은 분단국가에 겹쳐 분열국가를 만드는 폐악만 가져온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세 자리 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과거에만 매달리는 정략적 집념의 개그 메들리에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민중은 지쳐 식상할대로 식상해 있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배신의 ‘정치철학’

김영삼, 이인제, 김대중의 함수 관계는 오늘의 노무현과 유관하다. 김영삼 말대로 노무현을 정계에 ‘픽업’한 것은 그 자신이지만 무원고립의 정치고아였던 노무현에게 정치 영양분을 공급한 것은 김대중이다. 1991년 9월 야권 통합의 민주당 출범 당시, 김대중 공동대표 밑에서 노무현은 초대 대변인을 지냈다. 1992년 총선, 1995년 지방선거, 2000년 총선에서 호남당의 영남 후보로 나서 연거푸 낙선했다. 김대중은 이런 노무현을 그때마다 보듬었다. 1992년 총선 낙선 이듬해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47세로 최연소 당선자가 되게 했다. 1995년 지방선거 낙선후엔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국민회의 후보로 내세워 금 배지를 달게했다. 2000년 총선에서 또 낙선한 그해 김대중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2001년 10월엔 당내 대권 예비주자와 격을 맞춰주기 위해 김대중 민주당 총재는 노무현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했다. 당내 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깬 노무현 돌풍의 광주(光州) 이변이 일어난 것이 2002년 3월16일이다. 지각변동의 진앙이 김대중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대중 후광에 힘입어 호남에서 90%가 넘는 몰표가 쏟아져 노무현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다. 이는 이인제에 대한 팽(烹)이었다. 김영삼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 이인제가 김대중, 이회창과 대권을 다툰 것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기도 하지만 정치사부(師父) 김영삼의 영향이 컸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을 지낸 마당에 정적이었으며 민주화 동지인 김대중에 대한 애증(愛憎)이 새로웠다. 그는 괘씸죄가 심한 걸로 여긴 이회창보다는 김대중을 의중에 두었다. 이 과정에서 모종의 각서를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써주었다는 ‘각서설’이 정가 이면에서 있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어떻든 김영삼의 원려로 김대중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인제가 얻은 4백92만5천591표는 김대중(1천32만6천275표)에게 이회창이 불과 39만557표 차이로 패배한 9백93만5천718표의 절반에 육박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민주당이 이인제의 국민신당과 합당한 것도 차기에 대한 묵계가 있었다고 보는 관측이 유력했으나 버림받았다. 이인제는 팽 당할 무렵, 청와대 담판 시도가 철저히 봉쇄됐을 만큼 오히려 권력의 핍박을 받았다. 김대중의 노무현 선택은 순전히 대북 관계에 있었다. 남북 관계에 상호주의와 중도 우파를 말하는 이인제 보다는 좌파 성향의 노무현이 미더웠던 것이다. ‘남북 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깽판나도 좋다’는 노무현 후보 시절의 말이 이에 연유한다. 6·15 공동선언을 역사적 업적으로 각인하려는 김대중으로서는 오로지 대북관계 계승만이 후계자 선택의 잣대였다. 하지만 배신은 이어진다. 그러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대중이 처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 2003년 3월 여소야대 국회가 통과시킨 ‘대북송금특검법’ 공포다. 동교동측이 바란 거부권 행사의 기대를 저버린 것은, 김대중 고리를 끊고 정면돌파를 시도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입장에서는 대북송금 5억달러의 비밀을 이인제는 안 묻어 주어도 노무현만은 묻어줄 것으로 알았던 믿음이 깨진 건 경악이었다. 두 번째는 열린우리당 창당이다. 노무현은 민주당의 적자임을 자임, 이인제를 서자 취급하면서 ‘민주당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고 당내 후보시절에 수 차 말했다. 그랬던 그가 개혁세력의 결집을 표방, 민주당을 낡아빠진 당으로 침뱉고 분당으로 동강냈다. 김대중을 욕보였다. 세 번째가 이번에 말썽이 된 도청 파문이다. ‘또 치욕을 주느냐’는 것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동교동측의 분노다. ‘김대중 정권 때도 국정원이 도청했다’는 발표가 모독이나 음모 공작은 아니라고 변명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아들을 8·15 특사 하는 등 김대중 달래기에 신경을 쓰는데도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도청 테이프가 노무현 대통령 말대로 ‘파헤친 게 아니고 불거져 나왔다’해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건 틀림이 없다. 이미 도청 테이프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로서는 공개가 이롭다는 이해득실의 계산이 나와있는 것 같다. 구악(舊惡)을 확 쓸어내는 새판 짜기의 계기로 삼을 요량이지만 신악(新惡) 또한 구악 못지 않다. 배신은 또 배신을 부른다. 대권을 둘러싼 배신의 철학이 참 무섭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비틀대는 판.검사들

승용차를 들이 받았다. 뺑소니쳤다. 7㎞쯤 가다가 중앙선을 넘었다. 역주행으로 마주오는 승용차와 부딪치고는 멈춰섰다. 뺑소니 운전자는 처음 들이받쳐 뒤쫓아온 승용차 운전자에게 붙잡혔다. 연쇄 가해차량 운전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가 0.231%의 만취상태였다. 성남 분당서 사고를 내기 시작하여 광주 오포에서 사고를 끝마친 이 분은 인천의 부장검사다. 검사는 사회공익의 대표 기관이다. 사회공익을 대표하는 검사가 이런 저질적 반사회성을 저지른 예는 일찍이 없었다. 청주에서는 판사가 술에 취해 남의 승용차를 훔쳤는 지, 혼자 생각으로 빌렸는 진 몰라도 아무튼 남의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붙잡혔다. 판사는 사회정의를 지키는 보루다. 사회정의의 보루인 판사가 이런 저질적 반사회성을 저지른 예 또한 일찍이 없었다. 삼복 중이라 날씨가 푹푹 찐다. 음식이 잘못되어 쉬듯이 사람도 잘못되어 쉬는 지 맛이 간 이런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슬프다 못해 웃긴다. 개가 사람을 문 것은 뉴스가 아니라고 했다. 견습기자 시절에 들은 선배들 말이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게 뉴스’라고 했다. 만취된 뺑소니 검사나 술마시고 남의 차를 훔친 도둑 판사 같은 뉴스는 사람이 개를 문 것과 같은 진문이면서도 추문이다. 하필이면 판·검사들인가 싶어 애꿎게 더운 날씨를 탓하기도 한다. 날씨 탓이 아니라 술탓이거나 두 가지가 겹쳤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다 아니다. 지금의 지법 원장이나 지검 검사장급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이니까 참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무렵 법조를 출입하던 때 기묘한 사건에 부딪혔다. 초임의 총각 검사가 하숙집에 틀어박혀만 있기가 무료하여 밤에 거리로 나온 게 요즘같은 여름철이었다. 마침 길에 멈춰서서 서성거리는 젊은 여자가 총각 검사의 눈에 이성으로 비친 것은 자작해 마신 소주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를 스쳐 지나 가다가 손목을 잡은 것이 공교롭게 남편에게 들켜 화근이 됐다. 그 여성은 택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렸던 것이다. 총각 검사는 파출소까지 가 이내 나오긴 했으나 문제는 뒷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정보는 경찰에서 흘리게 마련이어서 검찰의 보안 조치는 허사가 됐다. 기자실을 찾은 검사장은 재치가 있었다. 만약에 구구한 변명을 늘어 놨으면 영락없이 기사화 됐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출세해 보겠다고 고생끝에 모처럼 고시에 합격한 한 젊은이의 장래를 죽이겠소, 살려주겠소?”하는 말에 그만 더 들을 것도 없이 안들었던 일로 치워버렸다. 다같이 술마시고 저지른 판·검사의 실수지만, 총각 검사의 성희롱에 비해 뺑소니나 차량 절취는 사안의 질이 판이하다. 그땐 성희롱의 법률적 개념이 정립안됐을 때인데도 기속력이 있었던 것은 윤리성을 요구받는 직분 때문이었고, 그같은 윤리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판사·검사의 일은 법률 적용이지만, 이를 해석하는 자유심증주의 잣대는 법률이 아닌 양심이다”라는 말은 법조 출입 당시 재조 원로들에게 많이 들었고 또 본 바가 있어 영원한 법언이라고 믿는다. 수양에 의해 달관된 인생관을 가진 판·검사가 고심을 갖고 사건을 보는 눈과 거품에만 들떠 기계적으로 안일하게 사건을 보는 눈의 차이가 엄청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다. 피의자가 취조를 받을 때 검사가 커보이고, 피고인이 재판을 받을 때 판사가 커보이는 것은 직분의 권능 때문이다. 그런데 비틀대는 주인공들을 두고 이런 말이 있다. “판·검사도 수가 많다보니 별 것 들이 다 있는 것 같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독재정권에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검사, 군사정부 권총 부리에도 위협을 두려워 하지 않은 판사 등 대쪽 같았던 선배들이 전에는 많았다. 물론 판사·검사도 사생활이 있다. 술도 즐긴다. 그러나 아무리 술에 취해 실수를 해도 사회통념의 한계가 있다. 윤리성을 심히 일탈해 법률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서는 맛이 가도 완전히 갔다. 비틀거리는 판·검사가 더이상 법률 적용을 검토하는 지위에 있는 것은 더욱 슬픈 코미디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복중한담(伏中閑談)

참 덥다. 낮이나 밤이나 연일 후텁지근한 찜통속이다. 열대야에 견디다 못해 밤새 창문을 확 열어놔도 그게 그 것이다. 누가 물었다. “아무 쓸모없는 모기는 왜 생겼습니까?” 조물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쓸모없긴, 그 거라도 있어야 밤 손님을 막지!” 문 열어놓고 잠자기 마련인 여름철 밤에 모기에라도 물려야 실물을 막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다는 옛 우스갯 소리다. 자동차 배기가스 같은 가스로 인한 지구의 온난화로 여름 날씨가 더 덥다고 하지만 여름은 원래 더운 게 제격이다. 지구의 온실효과로 북극과 남극 양극 지방의 거대한 빙벽이 녹아 해수면이 높아간다고 전문가들은 재앙을 걱정한다. 지구촌 곳곳이 가뭄과 홍수 등이 잦은 천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 여름에 모질게 겪는 34℃의 불볕 더위가 예전이라고 없었던 건 아니다. 수원기상대 관측 이래 가장 높은 것으로 기록된 1994년 7월23일의 37.3℃는 올 여름 들어 가장 높은 지난 23일의 34.1℃ 보다 무려 3.2℃나 높다. 올 여름 같은 더위는 수 십 년 전이나 선대에도 있었던 더위다. 그런데 선풍기도 없어 부채 하나로 여름철을 나던 때에 비해 지금은 많이 다르다. 선풍기는 기본이고 더러는 에어컨을 두고도 더위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생활구조의 차이다. 한옥 중심의 도시가 아파트 등 시멘트 집 중심으로 바뀌면서 아스팔트 시가지로 탈바꿈했다. 벽이 황토벽이던 한옥은 그 자체가 피서지였다. 맨땅 마당은 낮엔 물을 뿌려 납량을 하곤 하였고, 밤엔 대나무평상에 가족이 모여앉아 담소로 더위를 식히곤 했다. 들어 앉으면 시멘트벽 투성이고 나가면 아스팔트 투성인 것이 괴물화된 거대도시의 현대 모습이다. 폭염에 달궈진 시멘트 집이나 맨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아스팔트 길 폭염의 열기에 갇혀사는 현대인들은 체감 온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자연환경과 멀어진 인공환경의 재앙이다. 자연은 여름다운 여름을 좋아한다. 푹푹 찌는 여름 날씨여야 오곡백과가 무럭 무럭 자란다. 논 물은 손을 넣으면 뜨거울 만큼 쩔쩔 끓어야 시퍼런 벼의 성장이 아침 저녁으로 달라진다. 밭 곡식은 콩밭을 매는 호미 끝마다 땅 김이 코가 막히도록 푹푹 솟아야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여름은 가을의 결실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그 에너지가 바로 쨍쨍 내리쬐는 태양의 뙤약볕이다. 삼복 중이다. 한 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다. 이 달에 초복과 중복이 있었다. 초복은 하지(夏至)에서 세 번째 경일(庚日), 중복은 네 번째 경일, 말복은 입추(立秋)에서 첫 번째 경일이다. ‘경’은 ‘갑·을·병·정·무·기’로 나가는 십간(十干)중 일곱 번째를 말한다. 그런데 절후가 일러 초복이 일찍 오면 월복(越伏)이란 게 있다. 올해는 월복이 든 해다. 초·중·말복이 열흘 간격이므로 여느해 같으면 지난 25일 중복에 이어 열흘만에 말복이 돼야 하는 데 올핸 월복이 끼어 스무날만인 8월14일이 말복이다. 삼복 더위가 그만큼 더 길어진다. 복날은 벼가 한 살씩 나이를 먹는 날이다. 줄기마다 세 마디가 있는데 복날에 마디가 한 개씩 더 생긴다. 세 살을 먹어 세 마디가 생겨야 이삭이 패게 된다. 그러니까 벼는 복 중에 성장을 다 하고 삼복이 끝나면 결실을 위한 출수로 들어간다. 여름철 이상 저온은 이래서 두려운 천재다. 덥지않아 좋다며 이상 저온을 반겨서는 흉년들어 배곯기 딱 십상이다. 여름철에 더위를 저주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자연에 감히 반역은 못해도 더운 것은 역시 덥다. 더운 데 안 덥다고 한다면 맛이 간 사람일 게다. 피서가 한창이다. 휴가철이다. 피서가기 위한 것이 휴가다. 피서 떠날 형편이 안 되어 휴가를 틀어박혀 보내는 ‘방콕 가장’들은 꼬마들에게 체면이 안 서기도 한다. 산하가 온통 오염되어 가까운 곳에서 멱감는 건 고사하고 족탕을 즐길 마땅한 곳도 찾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피서를 떠난다고 더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피서길 또한 무덥긴 마찬가지다. 다만 기분일 뿐이다. 피서를 가든 말든 더위를 잘 수용할 줄 아는 것이 생활의 지혜다. 그리고 이의 요체는 마음 가짐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무엇보다 삼복 복 중을 건강하게 넘기는 것이 상지상책이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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