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낙선재의 비극

조선조 이왕가(李王家)의 세손 이구(李玖)씨의 부음을 들으니, 어머니되는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생각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가 생각난다. 창덕궁은 창건 당시엔 이궁(離宮)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景福宮)이 소실되고는 정궁(正宮)으로 쓰였다. 선조(宣祖) 이후 300여년의 역대 임금이 여기서 정사를 보았다. 고종(高宗) 30년(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이 된 이왕가 마지막 왕세자빈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英親王)으로 불렸던 대한제국 최후의 왕세자 이은(李垠) 공을 사별하고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낸 것은 우연치고는 기구했다. 국상을 당한 역대 왕후가 상중에 소복으로 은거하던 곳이 낙선재였다. 이 때문에 조경은 오밀조밀하게 조화를 이루었으면서도 화려함은 절제됐다. 고주택 풍의 연속된 건물 세 채엔 단청이 되지 않았다. 후원은 숲으로 우거졌다. 행랑 남쪽에 있는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맞은 편에 ‘ㄱ’자형의 낙선재가 보인다. 이방자 여사를 찾아을 때가 1986년 초로 기억한다. 무늬없는 단아한 옥색 치마 저고리 차림이었던 전하(殿下)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시종(侍從) 일을 보는 낙선재 사람들은 모두 “전하”라고 했다. 이방자 여사는 그 때 어려운 여건 속에 정박아 교육과 함께 지체부자유자들에 대한 기술교육을 위해 ‘명휘원’을 세워 정성을 쏟던 참이었다. ‘명휘’(明暉)는 남편 이은 공의 아호다. 기사 취재길엔 가수 조용필 조영남씨가 동행했다. 조용필씨 팬이라면서 특히 ‘한 오백년’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중에 조용필씨는 ‘명휘원’을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건강해 보이던 분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이다. 일본의 왕족이었던 이방자 여사의 원래 이름은 마사코(方子)다. 일본왕실의 정략결혼으로 이은 공에게 시집왔다. 당초엔 지금 일본 국왕인 아키히토의 아버지되는 히로히토와 정혼한 사이였다. 히로히토가 세자였을 적에 일본 학습원에서 왕비 수업을 받던 중 갑자기 이은 공과 결혼하게 됐다. 이은 공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가 있었던 때였다. 히로히토는 마사코 동생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작고한 이구씨와 일본 아키히토 국왕과는 이종 사촌간이 된다. 그러나 이방자 여사는 철저한 한국인이었다. 비록 시작은 부부가 다 정략결혼의 제물이었지만 살면서 싹튼 부부애는 남달랐다. 이 분들이 살면서 일군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부부가 살면선 막상 까먹는 사랑과는 비할 수 없이 숭고했다. 고초도 많았다. 시집 나라 땅을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밟은 게 1922년이다. 첫 아들 진(晋)을 안고 왔다. 그러나 비극이 기다렸다. 생후 7개월 된 갓난 아기가 갑자기 원인 모를 청록색 젖을 토하며 죽었다. 독살설이 있었다. 일본의 권부(權府)에서 망국의 왕가지만 대(代)를 끊기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말이 그 무렵에 나돌았다. 이구씨가 태어난 것은 훨씬 뒤인 1931년이다. 광복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왕가 왕실을 박대했다. 권력 게임의 도전이 있을 것을 우려해서 그랬다는 항설이 있었지만 믿긴 어렵다. 아무튼 철저히 박대하여 이은 공과 이방자 여사 부부는 일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귀국한 것은 1963년 박정희 정권 때다. 그러나 이은 공은 이미 병이 깊어 김포공항에서 들것으로 옮겨야 할 만큼 반신불수의 몸이었다. 또 건축가였던 외아들 이구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미국 여인과의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는 등 아내와 어머니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모습을 보며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이왕가 마지막 세자빈의 품위를 지키려고 힘썼던 분이 이방자 여사다. 이 분들은 일본 왕실과 철저히 담을 쌓고 평생을 보냈다. 일본 도쿄 아카스카 프린스 호텔에서 갑자기 별세한 이구씨 역시 일본 국왕과 외가로 따지면 남남이 아닌데도 서로가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이제 낙선재가 마지막 주인을 보낸다. 이은 공에 이어 이방자 여사가 가고, 오는 24일엔 그 분들의 외아들 이구씨가 낙선재에서 떠난다. 조선조 이왕가의 적통(嫡統)은 이로써 끊어졌다. 그날, 이방자 여사는 주로 사회사업 얘길 많이 했다. 그런 가운데 무슨 말 끝에 단 한마디했던 말이 생각난다. “힘 있는 나라가 돼야 하니까요…” 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에 떠오른다. 낙선재의 비극은 결코 지난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미래를 일깨우는 시대적 되새김의 함축성이 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남편 부엌데기

폭력 남편의 가정엔 평화가 있을 수 없어도 폭력 아내의 가정엔 평화가 있을 수 있다. 부부간에 어느 쪽이든 폭력의 수단화는 아주 비겁한 것이지만 차이는 이토록 엄청나다. 이렇긴 해도 남편 폭력은 물론이고 아내 폭력도 없으면 가정의 평화가 더 할 것이다. 여성의 사회참여 폭이 넓어져 간다. 모든 직종에 여성이 못하는 게 없다. 남성 비율보단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앞으로 점점 높아질 것이다. 최근의 예로 외무고시 합격자 가운데 여성이 약 절반을 차지하고 수석도 여성합격자가 차지했다. 흥미로운 건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확대되면서 가사의 남성 참여가 촉구되고 있는 점이다. 가사활동을 여성 전담으로만 여겼던 인식에 변화가 오고 있다. 물론 아직은 그렇다. 인식의 변화에 비해 실행은 아주 낮다. 가사활동을 둔 통계청 조사는 한국 남성들에게 일깨우는 점이 많다. 지난해 맞벌이 부부 중 여성이 가정관리에 쏟은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47분인 데 비해 남성은 20분에 불과했다. 전업주부가 가정관리에 들인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 19분인 반면에 전업주부의 남편이 가사관리를 거든 시간은 겨우 15분에 그쳤다. 남편의 가사시간 15~20분은 집안 청소 한 번 제대로 하는 시간도 안 된다. 결혼 이후 설거지나 장보기, 세탁, 다림질, 변기 청소 같은 걸 한 번도 안 해 본 남편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는 데 무슨 소리냐고 해서는 안 된다. 스페인을 예로 든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우리보다 더한 남성 중심의 사회다.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아내가 은행에 계좌도 개설하고, 계약서도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작성하고, 결혼한 여성은 대학 진학도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등 일상생활에 제약이 많았다. 법률로 정한 이같은 여성 규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이 불과 20여 년 전이다. 이러했던 스페인 사회에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없는 가사활동 공동부담이 ‘결혼생활에 관한 법’으로 제정됐다. 남편도 집안 청소나 설거지 등을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지워졌다. 이 틈을 타 약삭빠른 가전업계에서 부부가 번갈아가며 각자의 지문으로 작동되는 공동 세탁기를 출하시켰는 데 이는 남자의 작업량을 가늠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선 법제화까진 몰라도 변화의 시대상에 걸맞는 실행 의지를 다질 필요는 있다. 이를 위해 남성들의 의식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여성들의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특히 성장한 자녀를 둔 여성들은 더 그렇다. 가령 아들이 며느리를 거들어 설거지하는 것은 밉게 보고, 사위가 딸을 거들어 설거지하는 것은 곱게 보는 두 가지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 남편의 가사활동은 정말 좋은 체험이다. 가정의 소중함을 몸으로 터득하는 것이 남편의 가사활동이다. 예를 들어 이왕 빨래를 하려면 세탁기에 돌리기 보다는 손으로 빠는 것이 더 좋다. 비누질해가며 빨래판에 문지르고 헹구는 과정에서 가족이 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필자는 이런 말을 하긴해도 참 부끄럽다. 아내의 생전에는 나 자신도 가사활동엔 빵점이었기 때문이다. ‘락스’가 무엇인 지도 몰랐다가 ’락스’로 변기를 세척하게 되면서 항상 깨끗했던 연유를 비로소 알았다. 빨래 얘기는 따로 사는 손주들이 놀러와 자고 가면서 벗어놓은 옷을 빨며 느꼈던 얘기다. 생각해 보면 남편의 가사활동 보태기는 가정의 행복을 더 한다. 세상의 남편들, 특히 젊은 남편들에게 당부한다. 아내의 가사활동에 즐거운 맘으로 거드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일군다. 성장하는 자녀들의 정서교육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 살이에는 마음 먹은대로 잘 안 되는 일이 참 많다. 돈 버는 일이 이런 것 중의 하나다. 돈은 마음대로 안 벌려 그런다지만 아내의 가사돕기는 남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집안 구조는 옛날과 다르다. 부엌데기가 따로 없다. 남편 부엌데기, 아내 부엌데기가 서로 돕는 가정에선 폭력 남편도 폭력 아내도 있을 수가 없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갈 곳 없는 장기복무 제대군인들

제대를 앞둔 군인들은 하루가 한달처럼 길게 느껴진다. 제대를 하면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애인과 매일 만나야지, 돈 많이 벌어 결혼해야지, 복학해서 공부 열심히 해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지 등등 궁궐을 몇채씩 짓는다. 희망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부대 밖의 들꽃처럼 피어난다. 그러나 병(兵)과는 달리 준사관이나 장교로 10년 이상 장기복무하던 군인들은 다르다. 계급정년으로 군문을 나서는 제대자들은 부대 밖 세상이 바로 생활전선이다. 대부분이 당장 취업을 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다. 이렇게 제대하는 군인의 수가 매년 3천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취업에 성공해 사회에 안착하는 사람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800~900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예비군 지휘관, 비상계획관, 군무원 등 군 관련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머지 2천명 중 상당수는 사회에 흡수되지 못한다. 군은 조직 특성상 정년이 소령 45세, 중령 53세, 대령 56세로 다른 공무원(6급이하 59세, 5급이상 61세)에 비해 빠르다. 문제는 군(軍)이라는 특수조직에서 20 ~ 30여년간 몸을 담아온 이들이 제대로 된 취업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로 몰린다는 점이다. 오지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다 보면 사회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떨어져 제대 후 적응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개인적인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는 기업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전문기술 습득이나 기능자격 취득도 어렵다. 기업들의 위관급 장교 선호도 장기복무 제대군인들의 사회안착을 어렵게 한다. 제대군인지원에 관한 법률(7조)에 따르면 20인 이상 고용업체는 군 장기복무자나 보훈대상자 등을 의무고용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수도권 35개 기업을 조사한 자료(2002년)를 보면 의무고용 비율(3~5%)을 지킨 업체는 한 군데도 없다. 보훈대상자는 고용률이 그나마 1.8%로 체면치레를 했지만 장기복무자는 0.016%에 불과하다. 제대 후 시작한 사업이 망해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여년 간 군생활을 하다 소령으로 예편한 A씨는 3천만원을 들여 치킨점을 차렸으나 적자로 가게문을 닫았다. 설상가상으로 가압류 통보도 받았다. 간신히 지인을 통해 건설현장 소장직을 얻었지만 이마저도 임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만 뒀다. 그 와중에 가계에 도움을 주겠다며 방문판매에 나섰던 부인은 2천만원 빚만 졌고 이 때문에 우울증과 암으로 드러누웠다. A씨는 계속되는 실패에 월세방으로 밀려났고 외동딸마저 학비가 없어 대학을 휴학시켰다. 다른 영관급 제대자 B씨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업에 뛰어 들었다 퇴직금을 몽땅 날린 탓이다. 취직자리를 구해보려 했지만 경영학 석사에 고급장교 출신이라는 것이 되레 걸림돌이 됐다. 어쩔 수 없이 고졸에 병출신이라고 속여 자가용 운전기사로 취직했지만 불황에 월급이 끊겨 막일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이마저도 노는 날이 많아 걱정이 태산이다. 또 다른 영관급 C씨는 중소기업 인사관리직 제의를 받고 있었음에도 대기업 보안담당직이 비어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기업에 지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알고보니 대기업의 보안담당은 자신의 경력과는 상관없는 정보보안 전문가여서 중소기업쪽으로 생각을 다시 바꿨다. 하마터면 중소기업 일 자리도 잃을 뻔 했다. C씨의 경우는 눈높이를 낮춰야 할 사례다. 중·대령 전역자는 군에서의 위치때문에 고급 직위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어 취직에 낭패를 볼 우려가 더욱 크다. 얘기하자면 끝이 없지만 이처럼 대다수의 제대군인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 없지 않다. 외국 특히 미국과 대만의 경우, 장기복무제대자가 군 경력을 살려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 취업 알선 및 지원분야를 완벽하게 갖추었으나 우리나라는 지난해 문을 연 국가보훈처 산하의 제대군인지원센터가 고작이다. 그것도 2주일 정도 실시하는 사회적응교육, 직업전환교육이 전부다. 오죽하면 전역자들이 군대시절을 그리워하겠는가. 제대군인들이 사회에서 방황하고 절망케 해서는 안된다. 제대가 곧 제2의 새출발이어야지 인생고해가 돼서는 안된다. 장기복무 제대군인들이야말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하여 헌신한 애국자들이다. 제대군인들의 공훈을 녹슬지 말게 하라. /임병호 논설위원

목요칼럼/盧 ‘연정의 노래’

대통령의 다변증이 또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엔 좀 이상하다. ‘연정’(聯政)을 노래한다. 가수 현철씨가 부른 ‘봉선화 연정’(戀情)도 아니고 도시 아리송하다. 하긴 聯政과 戀情은 상통되는 점이 있긴 있다. 정치적 연애(戀愛)가 聯政이기 때문이다. 정치판 연애엔 보기 좋은 것도 있고 보기 추한 것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타령은 주변의 전주곡에 이어 노래가 이제 본격화됐다. 가사는 “연정을 비난만 말고 여러가지 가능성을 놓고 건설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으로 나왔다. ‘한국정치,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제목이 붙었다. 대통령은 예컨대 경제 문제에 야당을 탓한다. 부동산 문제도 야당을 탓한다. 그러나 민중의 기억으로는 이런 것들은 여소야대와 아무관계가 없다. 경제는 설비투자의 위축을 가져온 반기업 정서 조장이 결국 악화를 가져왔다. 부동산은 반시장적 무리 수가 걷잡기 어려운 거품을 부풀렸다. 오히려 이 정권에 무기력하게 끌려온 것이 야당이다. 예를 든다. ‘신행정수도법’을 손 들어준 게 명색이 제1야당이라는 한나라당이다. 이 법이 위헌 결정이 나자 대체법으로 만든 ‘행정도시법’ 역시 손 들어준 것도 한나라당이다. 공공기관 176개를 대통령 생각 하나로 옮기는 무지막지한 처사에 뒷짐만 지고 있는 것도 한나라당이다. 첨단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으로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데도, 이 정권의 정치논리에 가위 눌려 쪽을 못쓰는 것도 한나라당이다. 제17대 국회가 처음부터 여소야대인 것은 아니다. 총선은 여대야소를 만들어 주었다. 여소야대가 된 것은 선거에 법을 어겨 당선된 여당의 가짜 의원들이 많아 의원직 상실이 잇따르면서 시작됐다. 결정적인 것은 4·30 재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0 대 6으로 단 1석도 건지 지 못한 완패에 있다. 노 정권의 실정에 대한 민중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이래서 비록 여소야대가 되긴 했으나, 대통령 사람이던 조대현 헌재 재판관 후보도 통과됐다. 뜬금없는 여소야대를 빙자한 연정 타령은 그간의 실정 책임을 정치권에 떠넘기려는 술수다. 국회에서 한 두번 제기되어 그것도 불발되기도한 장관 해임건의 문제로 대통령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하는 건 예의 엄살 9단 정략이다. 올 성장률 목표치는 5%에서 4%로 내리더니 이젠 3%선으로 주저앉았다. 40만개를 창출할 것이라는 일자리를 30만개로 줄였지만 이도 될성싶지 않다. 민생의 어려움이 말이 아니다. 먹고 살 얘기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길 바라는 것이 민중의 기대다. 그런데 엉뚱한 연정 타령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석자리 반이라고 했는 데 메들리로 나온다.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에 부처의 국장급 실무까지 직접 챙겼다. 이런 대통령이 ‘경제민생점검회의’ 주재를 총리에게 넘겼다. 경제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던 연초의 다짐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회의를 주재해도 돌아가는 것은 민중의 원성이고 보니, 총리를 방패 막이로 삼는 걸로 비친다. 이해찬 총리가 실세총리인 덴 연유가 있다. 대통령을 옹위하는 충실한 악역총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한국정치가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연정을 하고, 물리적 정치권 개편을 강행해야만이 정상화되는 건 아니다. 여소야대가 비정상인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비정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정치가 비정상으로 가고 있다. 정치권 개편의 전망이 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학적 융합의 순기능이 아닌 물리적 작용의 역기능은 야바위다. 이 정권에서 거국내각을 한다하여 연정에 입각할 야당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내각이 정권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실정의 책임을 뒤늦게 바가지로 뒤집어 쓸 야당이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긴 하나 ‘알파’는 있다. 이래서 겸사 겸사한 ‘연정의 노래’는 모종의 개헌 논의를 조기에 불지피려는 간접 의도일 수 있다. 하여튼 쑤석거리는 덴 도가 텄다. 이 정권의 민중은 정말 피곤하다. 탈도 많고, 이유도 많고, 말도 많은 술수에 지쳤다. 돌멩이를 실험삼아 연못에 던질 지라도, 돌멩이에 맞는 민중의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다. 정치판의 화두를 바꾼다고 민심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칼럼란은 원래 사람사는 좋은 얘기를 하고싶어 시작했다. 그랬던 게 정치 얘기가 단골이 됐다. 좋든 싫든 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피하려 했는 데, 오늘도 추한 정치 얘길 또 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바담풍’ 정권

혀 짧은 서당 훈장이 ‘바람풍’(風)을 ‘바담풍’이라고 발음했다. 학동들은 훈장이 한대로 따라 했다. 훈장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분명히 “바담풍”이라고 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훈장의 말을 학동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원칙이 반칙에 의해 좌절되고 상식이 특권에 의해 훼손되는 사회에서는 신뢰가 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지난 달 15일 조계사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요식에 전한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인즉슨 백 번 옳은 말이다. 문제는 원칙과 반칙, 상식과 특권을 혼동하는 데 있다. 반칙을 원칙이라고 우기고 특권을 상식이라고 우기는 것은 ‘바담풍’ 훈장과 다를 바가 없다. 비근한 몇 가지 예를 든다. 176개 공공기관을 옮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법률적 근거가 없다. 재정의 소요액이 3조3천억원이나 유발된다. 종사원 90만명의 가족을 평균 3명으로 잡아도 27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긴다. 법률로 정해 옮겨도 이럴 수가 없다. 하물며 대통령의 생각 하나로 이럴 수는 더욱 없다. 원칙과 상식에 위배된다. 특권적 반칙이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인가 떨어진 경험이 있다. 낙선인사를 무던히도 챙긴다. 동병상련의 인정이라면 알아듣기가 쉽겠다.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인물 챙기기…”란 말은 도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애써 덧붙인 말을 듣고 나니 좀 알 것 같다. 다음 선거 출마 때 ‘장관’ 감투의 경력을 달게하는 것을 인물 만들기로 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생각나는 게 있긴 있다. 김대중 정권에서 대권에 뜻을 둔 잠룡이면서 백두였던 노무현은 경력 쌓기용 장관 자릴 조르다시피 원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입각했다는 말을 그쪽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그렇지, 노 대통령은 너무한다. 노무현은 그때 입각을 해도 부처가 해양수산부인 건 좀 엉뚱하지만 장관은 할만 하다고들 수긍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인재감으로 쓰는 장관 만들기는 숫제 장관감이 맞는지 의문 투성이다. 장관감이 아닌 사람을 자의로 쓰는 건 국정의 농단이다. 상식이 특권에 의해 파괴되고 원칙이 반칙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낙하산 인사는 역대 정권의 병폐였지만 이 정권만큼 심하진 않았다. 세상에 사돈에게 한 자릴 주는 정권은 일찍이 없었다. 일선 GP 총기 난사사건으로 생때같은 장병 8명이 비명에 숨진 데 책임을 진 윤광웅 국방장관의 사의표명은 국민적 상식이다. 한데, 아니라고 한다. 윤 장관은 국방개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그가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줄은 알지만 국방개혁의 실체가 무엇이고 왜 윤 장관이 그토록 필요한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사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그건 임면권자의 소관이다. 그러나 국회의 해임건의 발의를 막고 나서는 것은 월권이다. 해임건의 조항이 규정된 헌법까지 트집잡고 나서는 것은 이만 저만한 난센스가 아니다. 청와대는 낙하산 인사 비판을 두고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했다. 고유권한이 아니라고 말한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국회의 해임건의 발의 또한 국회의 고유권한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은 챙기면서 국회의 고유권한 행사는 간섭하려고 든다. ‘바담풍’ 훈장을 생각케 한다. 개혁, 개혁을 말하지만 진짜 개혁의 대상은 이 정권이다. 남의 허물은 스캔들이고 자신의 허물은 로맨스로 치부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러시아유전 투자의혹, 행담도 개발의혹사건에 수많은 청와대 사람이 연루됐다. 이런 정권은 일찍이 없었다. ‘위원회공화국’에 복수차관제로 정부를 비대화하면서 개혁을 들먹인다. 웃기는 소리다. 노 대통령은 걸핏하면 ‘왕조’를 잘 빗댄다. 그래서 생각케 한다. ‘군왕은 무치(無恥)’라고 했다. 왕은 어떤 짓을 해도 부끄럼이 없다는 뜻이다. 더러 신하가 간언하는 것을 듣긴해도 책임을 지는 일은 없다. 청와대가 이런 모양새다. 원칙과 반칙이 혼동되고 상식이 특권에 의해 훼손되어도 책임을 지는 일이 없다. 오히려 잘 한다고 우긴다. 세상에 반성이 필요없는 정부는 없다. 아무리 선정을 베풀어도 반성해야 할 점이 있게 마련이다. 결단코 선정과는 거리가 먼 이 정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반성은 커녕 오만에 찬 이 정권은 그래서 개혁의 대상이다. 국민사회에 개혁을 요구하기 전에 정권개혁이 선행돼야 신뢰가 싹 튼다. 정녕 ‘바담풍’으로 밖에 안 되면 솔직히 혀가 짧아서 그렇다고 고백해야 된다. 권모술수는 드러난다. 솔직하고자 할 용기가 없어 솔직하지 못하면, 있는 건 악업의 연속 뿐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정부 역차별에 성난민심 ‘범도민특위’ 발족

이 정권의 편협증이 나라 경제를 망가뜨리고 민생을 어렵게 만든다. 지구촌은 글로벌 무한경쟁시대다. 올들어 중국은 9.5%, 일본은 5.3%의 성장률을 보였다. 우리나라는 2.7%에 머물렀다. 중국이나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 정권은 가리는 것이 너무 많다. 지방을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눠 투자를 규제하는 편협증은 그중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 국민사회는 정부가 국민을 먹여살리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국민을 먹여살리는 것처럼 내세우는 분배 지상주의는 보조 역할에 불과하다. 재정자금에 의한 분배는 세부담인 국민의 돈이다. 그러나 기업자금은 성장과 분배를 동반한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수출로 먹고 살아야하는 현실은 기업자금의 활성화를 전제한다. 기업자금, 즉 기업의 활성화는 경제성장을 촉진시켜 ‘파이’를 키울뿐만이 아니라 고용 증대와 임금 안정으로 소득의 재분배를 가져온다. 현대 국민사회의 민생주체는 정부가 아닌 기업이다. 참다운 애국자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아니다. 어려운 조건속에 크든 작든 기업을 꾸려가는 기업인들이다. 함께 벌어 남에게 월급을 주는 직장이라면 그가 식당 주인일 지라도 위정자들 보다 훨씬 더 애국자다. 이 정부의 분배정책은 그나마도 엉터리다. 지난해 청년실업대책을 예로 든다. 햄버거집 등에서 음식을 나르는 단순 작업을 청소년직장체험프로그램의 직업연수 명목으로 대상에 포함시켜 1인 채용에 월 30만원을 6개월간 업소에 지원했다. 이렇게 해서 날린 재정이 무려 5천643억원에 이른다. 정부는 이래놓고 청년실업률이 줄었다고 발표했다. 빈곤층이 날로 늘어 500만명을 돌파했다. 서민층도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아우성이다. 벌어먹도록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 시급하다. 기업의 투자 활성화가 유일한 돌파구다. 근원적 치유의 처방이다. 정부는 이를 도와주는 것이 소임이다. 그런데 도와주기는 커녕 되레 방해한다. 투자 규모가 3조6천억원이면 2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경제사회에 직·간접으로 미치는 파급 효과가 또한 ‘메가톤’급이다. 이런 데도 투자를 못하게 한다. 수도권이라는 이유 하나로 국민경제를 부당하게 제약한다. 다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국내 기업은 대체로 470여 업종이다. 이 가운데 경기도가 아니면 외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첨단업종 25개 분야의 공장 신·증설을 허용해달라고 해도 불가를 고집한다.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는 문제는 경영논리의 판단에 속한다. 정권이 간여할 일이 못된다.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비수도권에 가서 지으라고 하지만 기업 경영의 판단에 위배되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가지 않으면 투자도 하지 말라’는 것이 이 정권, 이 정부의 수도권 죽이기지만 수도권이 죽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경쟁력이 죽는다. ‘국가균형발전’이란 것을 간판 구호로 내걸지만 ‘국가균형공멸’을 자초하고 있다. 도내 첨단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면 국가경쟁력이 강화된다. 전 국민의 수익으로 돌아간다. 지역적 혜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수도권이 더 이익이라면 좋다. 국가경쟁력 확보에 수반하는 발전이익을 타 지역과 공유할 수 있는 공동 번영의 방향을 요구하면 얼마든지 응할 수 있다. 당장 한시가 급한 것은 첨단업종의 공장 신·증설을 허용해 3조6천억원 규모의 대기업 투자에 물꼬를 트는 일이다. 경제논리를 이 정권처럼 정치논리로 철저하게 덧칠하는 정권은 일찍이 없었다. 프랑스나 일본 같은데선 이미 20여 년 전에 완화한 수도권 규제 정책을 뒤늦게 우긴다. 이런 정부가 다른 나라에 있다는 말을 또한 듣지 못했다. 국가성장동력이 이토록 훼손되어서는 나라와 민생의 미래가 더욱 어둡다. ‘나라경제살리기·일자리창출범도민특별대책위원회’가 발족됐다. 문병대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장, 우봉제 경기도상공회의소연합회장, 이화수 한국노총경기지역본부의장 등이 공동대표다. 도내 경제인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 대표가 성난 민심을 대신해 창립총회를 가졌다. 지역사회의 여망속에 정부의 부당한 역차별 철폐를 위해 1천만 도민의 총의와 역량을 강력히 결집해 나갈 것이다. 순수한 국가경쟁력 강화 요구를 수도권이기로 왜곡하는 이 정권의 정권이기주의에 각성을 촉구해 둔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김우중을 말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괴물이다. 성장을 이끈 거인이 시장의 역적으로 전락했다. 해외 도피생활을 5년8개월만에 끝내고 돌아왔다. 귀국 즉시 영어의 몸이 됐다. 김우중 진앙의 지진이 요란하다. 41조원 규모의 분식회계 원조로 꼽히고 있다. 20조원의 불법대출 혐의를 받고 있다. 25조원 상당을 해외도피시킨 것으로 전한다. 20조원의 비자금을 조성, 10조원 가량이 정·관계 로비에 흘러든 것으로 알려졌다. 투입된 공적자금 40조원 중 약 15조원은 회수가 불가능해졌다. 대우가족들 피해가 막심하다. 그룹의 경영비리로 임원 14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임원 7명은 추징금 23조원이 병과됐다. 임원들은 그렇다고 쳐도 사원들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또 대우가족은 가족이니까 그런다지만 도산된 대우 관련의 중소기업들은 아무 죄없이 당했다. 국내 재벌은 정경유착이 태생지다. 1970년대 고도성장으로 나간 박정희 정권이 외국에 내세울 국민자본의 대표자가 필요해 만든 것이 곧 재벌들이다. 달러를 벌어들이는 덴 재벌의 주역이 O서방이든 X서방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국내에 외화만 떨어뜨리면 그만이었다. 정경유착의 관치경제, 관치금융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김우중 역시 그런 정경유착에 힘입어 대우그룹을 굴지의 대기업 종합상사로 키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경위가 어떻든 성장과 고용에 크게 기여는 했다. 그러나 그는 때를 몰랐다. 여러 재벌의 창업주들이 물러간 차세대 경영의 잇따른 등장은 재계의 변화를 예고했다. 당연시됐던 정경유착을 점차 부도덕시 하게 됐다. 비록 정권의 우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어도 시류는 변했다. 재벌은 권력의 힘보다 시장의 힘에 지배되는 추세로 인식이 달라졌다. 그런데 김우중은 그게 아니었다. 경영 일선의 재벌1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생각이라도 바뀌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정경유착의 창업 관념을 여전히 신앙화 했다. 그룹이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이 여기서 시작됐다. 분식회계, 불법대출, 외화유출,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등이 다 정경유착의 전형적 관행이다. 기업 이윤을 노동력 착취로 본 진부한 잉여가치설은 퇴출된 지 오래다. 기업은 존립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현대적 개념이다. 작금의 국가사회를 버텨주는 것도 기업이다. 정권은 외형상의 모습이다. 내공의 힘은 기업으로 집약 분출된다. 이런데도 반기업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대기업에 대한 시각은 더 한다. 김우중 같은 부도덕한 기업인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대우 사태의 원흉이 아니다. 수 십 조원의 국민세금을 축낸 날도둑이다. 반기업 정서를 조장시킨 파렴치한 경제사범이다. 도망자이긴 해도 중국·독일·프랑스·수단·미국·베트남 등지를 주유했다. 생활도 요족하였다. 자진 귀국의 시점이 왜 이 시기인가에 대해 보는 눈이 분분하다. 갖가지 설이 나돈다. 당국과의 교감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거액의 정·관계 로비자금이 어디까지 흘러 들었는 지 궁금하다. 비록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는 지났어도 정치 생명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앞으로의 검찰 진술이 주목된다. 어쩌면 이도 정경유착이 아닐지 모르겠다. 현 정권의 입맛에 맞추어 골라가며 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귀국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책임지기 위해 귀국한다”고 했다. 물론 책임은 져야 한다. 하지만 몸으로만 때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징역 좀 살면서 특사받을 꿍꿍이 속이 있다면 국민사회의 지탄을 면치 못한다. 법의 심판을 받고 나면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외에 도피시킨 달러, 국내에 은닉된 부동산 할것 없이 전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내놔야 한다. 이만이 진정으로 책임지는 거인다운 면모다. 고희를 넘겼다. 인생을 달관까지는 못해도 그런 노력의 마음가짐은 가질만하다. 빈 손으로 왔다고 빈 손으로 간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마음을 못비우는 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왕년의 김우중다운 거인의 면모를 역시 보일 것인지, 아니면 끝내 시장의 역적으로 전락할 것인지는 그의 선택에 달렸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청와대 편지 ‘분노와 증오를 먼저 버리십시오’

분노를 잊으십시오. 증오를 버리십시오. 모순 덩어립니다. 임기의 중반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과연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닙니다. 정권 내부에서조차 야단들이잖습니까. 벌써부터 겪는 말기적 레임덕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다 자초하신 일이니까요. 실정의 근본이 머릿속 깊이 잠재된 이분법적 사유가 발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양극화의 역학을 대립과 갈등으로 인식한 처방이 혼란을 가져왔다고 판단합니다. 빼앗아서 주는 것을 균형으로 보는 사시적 시각이 가치판단의 혼돈을 가져왔다고 사료됩니다. 몇가지 예를 들까요. 집 값은 강남에서 판교에 이어 분당·용인·과천·평촌까지 급등세 바람이 불어 불과 한 달 사이에 1억원이 오른 곳도 있습니다. 이 무슨 꼴입니까. 잡겠다던 집 값을 올려 놓은 게 일시적 현상이 아닌 데 문제가 더 큽니다. 비싼 강남집 가진자에 대한 증오가 결국 이런 역풍을 가져왔습니다. 지방균형발전은 또 뭡니까. 지방 특유의 산업문화를 현대화시켜 고루 진작케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방을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대립적 관념으로 고착화시키는 생각은 쇠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수도를 반쯤 옮기고, 공공기관 이전을 배급하고, 첨단 대기업을 수도권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장을 못짓게 하면 지방균형발전이 정말 된다고 보시는지요. 이분법적 맹점의 미신입니다. 국민 세부담의 천문학적 재정을 근거없는 무속적 주술로 낭비하는 게 개혁일 수는 없습니다. ‘영세자영업종합대책’이란 또 뭔지요. 국가 권력이 그만큼 하릴이 없어 서민경제 생계까지 규제하고 나서야 합니까. 경제를 잘 돌아가게 하면 서민생계는 절로 잘 풀립니다. 기업을 부도덕시한 반기업 풍조의 조장이 투자를 위축시켜 이 어려움을 가져온 단초가 된 사실을 성찰하셔야 합니다. 양극화 현상은 어느 분야든 다 있게 마련입니다. 또 어느 나라든 다 있는 현상입니다. 문제는 이의 상대적 해소를 어떻게 푸느냐에 있습니다. 가령 중소기업 같으면 중소기업 자체가 잘 돌아가도록 해야지, 대기업을 옭아 맨다고 중소기업이 잘 되는 건 아닙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벌이가 잘 되도록 국민경제를 활성화시켜 주는 것이 잘 사는 길이지, 가진 것 있는 사람의 것을 뺏어준다고 잘 사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성장보다 분배에 치중한 그간의 시책이 다 이렇게 해석되는 것은 유감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바 있는 ‘균등사회의 공동체적 통합’ 역시 그렇게 해서는 결코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균등은 모든 국민계층이 다같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구심적 조건이 충족돼야 하고, 그래야 공동체적 통합이 가능한 것이지 말로 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 말로 해서 안되는 사례를 하나만 들겠습니다. 당선자 시절에 낙하산 인사는 안하겠다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낙하산 부대로 꽉 채워졌습니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이고 뭐고 할것없이 100여자리가 주변의 사람들로 투하됐습니다. 낙하산 인사는 주관적 요소입니다. 마음 먹기에 달려 안하면 그만인데도 이러는 판에 객관적 충족이 요구되는 ‘공동체적 통합’이 말로 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낙하산에 한 말씀만 더 올리겠습니다. 만약 낙하산 사정이 부득이 했다면 개혁을 더 말씀하실 입장이 못됩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대통령이 생각하시는 원칙과 변칙은 국민이 생각하는 원칙과 변칙 사이에 이렇게 다른 큰 틈이 있습니다. 벌써 닥친 레임덕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있습니다. 평소 대화와 토론을 대단히 좋아하는 면모를 보이려는 것으로 힘쓰지만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화나 토론에 미리 틀을 정해놓고 그에 맞춤을 요구하는 결론이 대화와 토론일 수는 없습니다. 겉으로는 상대를 인정하는 것 같아도 내심으론 상대를 인정하지 않아 보입니다. 왜 이리 보일까요. 성장 과정에서 잠저시절까지 원한 맺히도록 뿌리박힌 분노와 증오를 버리지 못한 탓 입니다. 다 버리지 못한 잔상이 사물을 아직도 대립적 관념으로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내치에 투쟁 대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포용의 대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존경받는 대통령의 면모입니다. 제발 국민에게 분노와 증오의 갈등 해소를 말씀하기 전에 대통령부터 먼저 분노와 증오를 내던지십시오. 탄탄대로의 길을 찾는 돌파구가 이에 있습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세탁소를 못낸다고?

이 정권처럼 규제를 좋아하는 정권은 봐도 봐도 처음 본다. 대기업, 중소기업 등의 기업 규제를 말로만 푼다 푼다하며 옥죄이더니 이제는 구멍가게까지 규제에 나섰다. 세탁업소 제과점 미용소 등 개인서비스업 개업까지 간섭하는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하는 나라 치고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이런 짓은 안 한 것으로 안다. 이들 나라가 사회주의이긴 해도 이미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실험의 졸업단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개인 서비스업 제한은 사회주의 나라에서나 있을 일이지만, 사회주의 나라에서도 남들은 졸업하는 것을 이 정권은 입학하려고 든다. 구조조정이랍시고 감원이다 명퇴다 하여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들을 대량 거리로 내몰았다. 실직자가 장사라도 해 보려는 것을 막겠다면 도대체 뭘 해먹고 살란 것인지 정말 해도 너무 황당하다. 상권은 호황이든 불황이든 살아 쉼쉬는 생명체와 같아 상태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정부가 이런 상권을 전국에 500개로 나눠 업종별 밀집도와 정보를 개발한다는 발상은 큰 시대착오다. 그같은 자료를 파악하는 순간, 순간에도 상황이 변하는 게 현대 상권의 특성이다. 정보화시대의 상권을 산업사회나 농경사회처럼 여기는 생각부터가 오류를 범했다. 상권은 증권시장과는 본질이 달라 판이하다. 경쟁력없는 자영업자를 다른 직종으로 재취업 시키거나 가맹점사업으로 전환을 유도한다는 건 단세포적 탁상공론이다.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고 싶어도 이미 형성된 거래관계로 인해 닫을 수 없는 자영업자들이 수두룩하다. 이외에도 개개인마다 또다른 사정이 있다. 정부가 유도하는 직종이나 가맹점사업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고 공짜로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이른바 ‘영세·자영업자 종합대책’이라는 정부 자료를 보면 과잉진입예방·경영안전지원·사업전환 및 퇴출유도 등의 기본방향 외에 개인서비스업·소매업·화물택시운송업·봉제업 등에 이르는 분야별 지원 및 과잉진입 예방제도의 세부 항목이 빽빽이 씌어 있다. 이들 업종의 업체 형편을 세세히 알아 정부 말대로 먹고 살게 해 줄 요량일 지라도, 그래서 전 행정력을 이에 다 쏟는다 해도 될지 의문이다. 방만한 업무량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숱한 내부모순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행정학의 조직원리다. 있는 규제도 풀어야 할 정부가 없는 규제를 만들어 국민생활을 귀찮고 번거롭게 하는 것이 잘 살게하는 길은 아니다. 자영업이 무더기로 생기고 집단폐사하는 다산다사(多産多死)로 파악한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점포마다 장사가 제대로 되는 게 없어 아우성이다. 하지만 거미줄 규제 처방은 틀렸다. 직장을 구할 수 없어 더러는 빚을 내어 가게를 열어 업종마다 경쟁이 심화되고는 있으나 인위적 구조조정을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원인 제거가 더 중요하다. 직장을 원하는 자영업자는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자영업을 계속 원하는 사람에겐 장사가 잘 되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취해야 할 민생 책무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 기업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 제조업 등의 투자확대를 유도하고 유통을 활성화시켜 돈이 사회 저변에 고루 퍼지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 정권은 이런데도 거꾸로 간다. 성장률은 겨우 2.7%로 최악의 빙점에 얼어 붙었다. 장기 불황의 늪이 눈 앞에 선하다. 이러한 판에 구멍가게 시장 개입을 들고 나섰다. 국민사회는 말한다. 제발 엎친 데 덮치지 말고 가만 놔두어 덧나게나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이 정권은 돌팔이 의사다. 매독 환자의 스피로헤타팔리다 병원균은 놔둔 채 온 몸에 퍼지는 부스럼만 갖고 치료한답시고 법석 떠는 돌팔이 의사와 같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했다.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했다. 그런데 새탁소도 마음대로 못내고, 있는 것도 문 닫도록 한다고 한다. 잘 되든 안 되든 처분은 업주의 임의에 속하는 자유다. 이러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시장원리에 대한 반역이다. 정부 발표가 있던 날 열린우리당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주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아무 것도 몰랐던 ‘들러리 여당’을 앞세워 입법 조치에 나서겠지만 안 된다. 대한민국 국민은 사회주의적 실험도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이 정권의 권력부패 두 類型

“한전의 서울 잔류도 한 방안이다”(김혁규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추병직 건교부장관) “한전 때문에 갈등이 많다면 갈등을 낮추는 것이 낫다”(장영달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한전이 서울에 잔류할 가능성은 없다”(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둘러싼 여권의 내부 혼선이 이런 양상이다. 공공기관 중 가장 욕심내는 한전을 가져가는 곳은 수도권을 제외한 13개 시·도 가운데 한 곳 뿐이다. 나머지 지역에선 불만에 쌓인다. 이것이 여권의 고민이다. 한전만이 아니다. 좀 괜찮은 공공기관은 비수도권 지자체가 저마다 목하 눈에 쌍불을 켜고 유치공작이 한창이다. 광주·전남, 충북 등지에선 공공기관 이전관련의 대규모 집회가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인기가 없는 공공기관도 있다. 여권은 같은 유치 대상인 데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공공기관 때문에 속앓이를 앓고 있다. 끼어넣기 처방이 이래서 나오는 모양이다. 인기 품목에 비인기 품목을 끼어 이전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이전이 백화점 세일은 아니다. 이 따위로 해서 무슨 지방균형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인 지 정말 넋나간 사람들이다. 180개 공공기관을 이전하는 데 12조원이 든다. 이전 대상의 공공기관 건물과 토지 자산액이 8조7천억원이다. 결국 모자란 3조3천억원은 국민이 세 부담으로 떠안는다. 공공기관 이전의 법률적 근거도 없다. 이런 막중 대사를 대통령의 고집 하나로 추진하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닌 인치주의다. 공공기관 이전에 해당 기관의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다. 이전 준비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경영진은 임기 중이라도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한다. 독재다. 공공기관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육사도 이전을 검토한다’(당정) ‘경찰대와 국방대도 이전 검토 대상이다’(김한길 열린우리당의원)라고 한다. 김한길 의원은 백지화 된 서울공항 이전설을 맨 처음 꺼낸 장본인이다. 하는 일들이 천방지축이다. 권력을 뭣한 사람이 도끼자루 휘둘러 대듯이 한다. 공공기관 이전은 당초 선거선심용 이던 게 되레 부메랑이 돼 간다. 행정도시 예정 지역의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이미 전패의 수모를 겪었다. 이만이 아니다. 충청권 신당이 태동되고 있다. 이 정권이 표밭으로 공들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제2 자민련의 텃밭으로 가고 있다. 정략놀음은 결국 정략놀음으로 망한다. 공공기관 지방이전 같은 건 정권의 사병화 놀음이다. 정권의 공적(公的)부패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행담도(行談島)라니, 대체 어디에 있는 섬인가 싶어 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 아산만에 위치한 섬.(0.81㎢·58명)’ 이렇게 씌어 있다. 인구는 1971년 기준이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서해대교 밑 바다 복판에 있는 외딴섬 행담도가 갑자기 유명해졌다. 서해대교 섬 주변을 매립, 복합 레저시설을 만든다는 게 이른바 행담도개발사업이다. 궁금한 것은 1995년 10월 도로공사의 사업승인 신청으로 건교부 승인이 난지 오래인 이 사업에 왜 이 정권의 나으리들 이름이 핵심 인물로 거명되고 있느냐는 점이다. 감사원 감사가 진행중인 행담도개발사업 의혹에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아시대위원회 문정인 위원장, 전 청와대 인사수석 정찬용씨 등이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어 이목을 끈다. 금융권에서 사업성 불투명으로 대출이 거부된 자금 조달책으로 미국서 유치했다는 8천300만 달러가 외자가 아닌 국내 공공자금인 데다가, 지분에 석연치 않은 내용이 많은 게 의혹의 핵심인 것 같다. 마치 러시아 유전투자의혹사건을 연상케 한다. 이도 또한 감사원 감사 이후에 검찰 수사가 착수되지 않을는 지 모르겠다. 행담도개발의혹사건의 전모를 아직은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큰 짐승의 시체일 수록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막강한 권력자의 권력 부패 역시 더 지독하다. 행담도 개발의혹 또한 유전투자의혹과 유형이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정권의 사적(私的)부패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대북정책, 한심하다

공산주의엔 원래 민족의 개념이 없다. 국제공산당은 민족주의를 이단시했다. 오직 1국1당(공산당)에 의한 국제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국제공산당은 1919년 3월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의 사회주의 좌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세계 각국 공산당의 통일적 국제 조직이다. 1945년 광복이후 좌우익 이념 대립이 격화됐을 때다. 보수 우익세력을 민족진영이라고 불렀다. 혁명 좌익세력은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로 보았다. 국제공산주의 개방 노선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그 무렵(북녘을 포함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찬탁 돌변은 그같은 대표적 사례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미·소 등 강대국 신탁통치안에 민족진영과 함께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랬던 게 하룻밤 사이에 찬탁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의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공조론은 평양 정권이 내세우는 간판 메뉴다. 최근에는 김정일 이념으로 무장화 됐다. 모든 문제 해결에 만능으로 대입되는 공식이론이 ‘우리민족끼리’라는 용어다. 저들은 우리를 외세와 결탁하는 반민족주의로 왜곡한다. 민족의 개념을 거부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이란 말을 황금시하는 것은 공사주의 원전에 어긋난다. 변질이다. ‘우리식 사회주의’자체가 공산당 선언이 금기로 삼은 수정주의다. ‘수령론’을 신앙화 한 지도체제는 공산주의 혁명론이 가장 경계했던 종파주의다. 북의 핵 무기 농간이 극점으로 치닫고 있다. 북만이 아니다. “북한이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미국이 관심을 갖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시각이 남한 내부에도 있다. 그러나 핵 무기의 생존 수단화는 입에 칼 물고 도랑 뛰기다. 파키스탄이 핵 무기를 가져 잘 산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핀란드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는 핵 무기가 없어도 잘만 산다. 핵 무기는 결국 핵의 재앙을 불러 들인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이래서 꼭 지켜져야 한다. 평양 정권이 시한폭탄 같은 핵 무기를 가져서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북의 핵 문제에 미국과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은 미국이 이뻐서가 아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다. 민족을 위해서다. 남쪽에서 쌀이든 비료든 ‘달러’든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다 얻어가면서 핵 문제는 미국만 상대하려고 한다. 남쪽은 빠지든지 아니면 민족 내부 의 일로 자기네 편에 서서 해결하자고 우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민족에 대한 인식과 저들이 말하는 민족의 인식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순수한 동포애로 보는 우리의 인도적 인식과는 달리 저들은 의도적 정략화로 보는 혁명사상이 내포됐다. 우리는 이래서 북녘 땅에 대한 미국의 핵 무기 공격을 반대하지만 평양 정권은 다르다. 최악의 경우엔 남녘 동포를 향해 핵 무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이를 혁명과업 완수라고 저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에서는 혁명사상 재무장을 모든 전달 매체를 통해 독려하고 있다. 당 간부도 혁명사상의 이완이 있다면서 맹렬한 자체 비판이 진행 중이다. 이틀로 잡았던 차관급 회담인지, 실무자 회담인지가 이틀이 지연되어 나흘로 잡혔다. 공동보도문 합의 작성이 난산인 것은 핵 문제 때문이다. 회담에서 핵 문제를 꺼낸 것은 이쪽일 뿐, 저쪽은 시큰둥하게 듣기만 했다. 평양 정권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원망스러운 건 우리 정부다. 국제사회 보기가 창피하다. 이런 회담을 하자고 그동안 그토록 북에 애걸복걸 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딱하다. 북쪽 사람을 만나거나 평양에 왔다 갔다 하는 걸 장관이나 대통령 재임 중 업적으로 여길 계제가 이젠 아니다. 우리는 그간 북에 돈을 퍼주고 평화를 사왔다. 평화를 살만하면 돈을 주고라도 사긴 사야겠지만 상대를 잘못 길들여서는 평화를 지키는 게 아니다. 이 정권은 평양 정권을 완전히 잘못 길들여 만만하게 보이는 지경이 됐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매정하게 당하다가도 눈 한 번 깜박해가며 웃어 보이면 감지덕지하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대화다운 대화가 될 수 없다. 저들은 사회주의 이념도 자기네들 편리하게 멋대로 바꾼 사람들이다. 민족의 개념도 자기네 입맛에 맞게 고친 사람들이다. 차관급회담은 북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앞으로의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이 정권은 평양 정권을 좀 더 알고 상대해야 한다.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라면) 정신차려야 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수도권 문제, 손학규와 이해찬

‘망건 쓰다가 장 파한다’고 했다. 이 정부가 외투기업 공장 신설을 행정도시 건설 및 공공기관 지방이전 효과를 보아가며 점진적으로 허용하겠다는 게 이렇다. 망건 쓰다가 장 파하고 버스 떠난 뒤 손드는 꼴이다. 물론 장은 다음 날 장도 있고 버스는 또 온다. 그러나 이번 장을 꼭 봐야 하고 지금 오는 버스를 꼭 타야할 기약된 절박한 사정이란 것도 있는 게 세상사 이치다. 미국 3M, 일본 NEG, NHT 등 LCD소재 첨단 업체가 이번 상반기 중 예정된 공장 신축공사를 착공하지 않으면 기껏 유치해 놓은 5억3천600만 달러의 외자가 날아갈 위기에 놓인다. 십중팔구는 중국 등 제3국으로 갈 것이다. 1천570여 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무산된다. 상반기라야 50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 여파로 독일의 자동차 부품, 영국의 독감백신 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4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마저 막판 단계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기도 입장에선 외투기업의 공장신설 허용문제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국민경제로 보아서도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다음 장날이나 다음 버스로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다. 이런데도 이 정권은 행정도시와 공공기관 이전 효과를 보아가며 천천히 하자며 늑장 타령이다. 국내 첨단 대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도내 공장증설이 안 되면 투자를 대기하고 있는 6개 대기업의 3조6천억원이 다른 시·도로 가는 게 아니고 투자를 포기하거나 중국 등으로 갈 판이다. 고용 증대를 해칠 뿐만이 아니라 연간 100억달러의 수출 차질을 가져온다. 정략에 눈이 멀어 국민경제를 압살하고 국가경쟁력 저해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 정부가 즐기는 토론이나 회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협의가 아니다. 미리 짜놓은 결론의 입맛에 구색을 맞추기 위한 토론이고 회의다. 퇴장은 성급했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소린 뭘 모르는 한가로운 소리다. 말하기 쉬운 양시론이나 양비론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이해찬 총리가 주재한 수도권발전대책협의회 제3차 회의에서 들러리 노릇을 거부하고 자릴 박차고 나온 것은 아주 적절했다. 그런 사람들의 정략적 입장 변화가 없는 한 더 이상의 대화는 백날 애써 봐야 무의미하다. 이 총리는 이미 행정도시에 동의한 손 지사를 들러리 세워도 자릴 박차기까지는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손 지사는 용케 탈출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천신만고 끝에 유치한 외자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도내 첨단 대기업의 애로 타개가 국익이라고 믿었던 평소의 소신도 소신이지만, 행정도시 반대에서 동의로 돌아선 훼절은 큰 부담이었다. 이를 공공기관 지방 이전 반대로 탕감하려고 했지만 훼절의 부담을 덜기엔 지은 과오가 너무 컸던 것이다. 수도권 규제 철폐를 얻어내기 위한 행정도시 동의의 고육지책이 결국 이 정권에 이용만 당하는 처지에서 용케 탈출하는 데 타이밍을 맞춘 것이 제3차회의 중도 퇴장이다. 이해찬 면전 핍박은 손학규로서는 시기나 명분이 딱 들어 맞았던 것이다. 손 지사의 행정도시 동의는 철회되지 않았다. 이의 철회 여부는 이 총리가 악역으로 나선 이 정권의 입장, 즉 수도권규제철폐 여부와 함수관계를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차기 대권 다툼과도 무관하지 않다. 손 지사는 이미 다 알려진 한나라당 차기 주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총리는 정동영, 김근태 두 장관이 드러난 열린우리당 주자인 데 비해 숨어있는 주자다. 이런 구도에서 이 총리의 손 지사 견제구는 고도의 α술수가 잠재된 속내일 수 있다. 행정도시 동의를 우군으로 보기보다는 되레 훼절의 취약점을 역이용해 무력화시키자는 것으로 해석되는 객관적 관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권 다툼 관련의 이런저런 역학 관계가 어떻든 간에 분명한 것은 외투 첨단 기업의 공장 신설, 국내 첨단업종의 대기업 공장 증설은 국익과 민생을 위해 시급하다는 사실이다. 수정법도 계획적 관리 체제로 전환돼야 하는 것이 새로운 시류다. 우리가 후발국인 중국에 추월당하고 있는 것은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가 좋으냐, 검은 고양이가 좋으냐는 식으로 고양이 색깔시비를 일삼는 이 정권의 정략놀음 때문이다. 망건 쓰다가 장 파하는 낭패가 있어선 안 되는 건 국민적 경고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거리의 市長

와이셔츠 바람에 앞치마를 두른 그를 보고 시장으로 얼른 알아보긴 힘들었다. 양 어깨에 맨 빨간 앞치마를 가슴에서부터 길게 늘어뜨린 김용서 수원시장은 1일 자원봉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 26일 수원 만석공원 야외음악당앞 길 건너편 한길봉사회 경로무료급식소의 점심 시간은 이날도 붐볐다. 1일봉사는 자원봉사 어머니회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시장을 비롯한 시청 간부들의 이 자원봉사는 연례행사인 ‘사랑의 삼각끈’ 행사였다. 마음을 모아야하는 2인3각의 달음질처럼 사랑의 삼각끈으로 지역사회를 밝게 하자는 게 행사의 취지로 알고 있다. 주방에서 식판 수십개에 소복이 반찬을 담던 그는 이윽고 시간이 되자 배식에 나섰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일일이 밥상을 갖다 바치고 또 바치곤 했다. 반찬 중엔 고깃국이 김을 모락모락 풍기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을 찍으면 그만 둘법도 한데 계속했다. 급식소가 지닌 식판이 150여개라고 한다. 이 식판이 다 나가고 되돌아온 식판이 반쯤 다시 나갈 때까지 시장의 배식작업은 이어졌다. “거리의 시장 아니여!” 시장의 배식을 두고 담소를 나누던 한 좌석의 노인이 한 말이다. 딴은 그렇다. 사무실 집무보다 길거리 집무를 더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욕을 많이 얻어 먹는다. 우만동 고가도로를 만들 땐 거의 날마다 데모를 했다. 차량 행렬이 쾌적하게 빠지는 지금은 그런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지만 다른 공사로 욕얻어 먹긴 여전하다. 도로공사를 유난히 많이 벌인다. ‘거리의 시장’이 좋아하는 도로공사판 때문에 공사기간 동안은 교통체증이 더 심하다. 장안구청 사거리 산업도로 지하도공사만 해도 벌써 1년넘게 출퇴근 시간이면 겹겹이 밀린 차량이 장사진을 이룬다. 그래도 욕을 하거나 말거나다. 고지식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나면 그만 둘법도 한 배식작업을 식판이 바닥 나서도 멈출줄 모른 고지식함과 같다. 시장 티를 낼 줄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네 아저씨 같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시청 구내식당에서 점심시간에 직원들에게 일일이 국을 퍼준 적이 있다. 책상머리 보고를 받기보다는 사람들 속에 파고 들기를 좋아한다. ‘거리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고지식해서인 지 고집도 세고 배짱도 있다. 한 번 결정된 일은 고집불통으로 밀고 나간다. 도비 보조나 국고 보조를 잘 따내는 것은 그의 배짱이다. 시장이 되는 데, 또 시장이 되고나서도 많이 밀어주었다고 자칭하는 사람들로부터 탓도 많이 듣는다. 자신들을 안 돌아본다는 게 이들의 불평 불만이다.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다. ‘거리의 시장’에게 쏟을 진짜 불평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많다. 그 가운데 생활행정에 드는 것으로 쓰레기 문제를 들겠다. 이면도로 구석구석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대로변에도 쓰레기 투성이다. 이면도로는 쓰레기 차량이 다니는 아침 시간이면 동네 주차장이 되어 드나들 수 없고, 대로변은 차량 행렬이 쓰레기 봉투를 터뜨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나 재활용품 집결지 또한 무질서하다. 이로인해 동네싸움이 곧 잘 일어난다. 시민의식이 미흡한 것도 문제다. 형편이 이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창의행정이 아니다. 환경미화원을 탓하고 청소행정 공무원들을 나무래서 될 일이 아니다. 요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해서 특유의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예산이 소요되면 투자 또한 주저해선 안된다. 명색이 ‘거리의 시장’이 되어 시가지가 쓰레기로 오염되는 것을 착안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지정시’ 승격 추진을 현안으로 삼고 있는 것도 마땅치 않다. 시 공무원들의 직급이 올라가는 것은 좋겠지만 시민들은 세부담만 더 늘어난다. 서둘 일이 아니다. 대체로 열심히 뛰는 정열적인 모습은 보기가 참 좋다. 생일은 모르지만 1941년생으로 안다. 노인들에게 밥상을 갖다가 바치긴 했으나 그도 내년이면 노인법에 의한 법정노인이 된다. 예비노인으로서 이를테면 호된 노인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시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사랑의 삼각끈’ 올 행사가 한길봉사회에서 있었던 것은 수원 노인들을 대표한 장안구 송죽동과 팔달·권선구 등 인근 동 노인들의 행운이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말... 아, 말이?

좋은 말을 듣고 싶다. 잇속있는 말만 좋은 말인 건 아니다. 손해가 나도 듣기에 좋은 말이 있다. 잇속을 챙겨 주어도 듣기싫은 말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빛나는 것은 극중 대사, 즉 말이 빛나기 때문이다. 그의 대사는 인간사에 시대를 초월하는 신비성이 담겼다. 사람이 살면서 빛나는 말만 하면서 살 순 없다. 범부들은 그렇다. 그러나 우리네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말은 다르다. 나라를 이끄는 책임있는 사람들 말은 더더욱 달라야 한다. “1997년 한국경제가 한번 팍 고꾸라진 뒤 2003년에 또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제 다 극복이 된 것 같다. 한국 경제는 매우 건강하다” 국민 여러분! 정말 지금 우리 경제가 매우 건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먹고 잘 사는 높은 분네들께 묻는 것이 아니다. 빚 투성이에 허덕이는 서민들, 장사가 안 되어 아우성인 소상공인들,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는 실업자들, 물가고에 시달리는 주부들, 공장을 멈춰야할 판인 중소기업인들, 이런 국민 대다수 분들께 묻는 것이다. 해답은 이렇다. 어느 나라 얘긴지 모르겠다는 것 같다. 바로 우리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짜 팍 고꾸라질 일이다. 바깥 나들이만 나가면 뭣이 도지는 것 같다. 터키에 사는 동포 간담회에서 한 노무현 대통령의 ‘친미론’ 얘긴 조(趙) 아무개 청와대 대변인이 애써 거드는 지경까지 됐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부 언론인과 학자가 친미파…”란 얘긴 도시 무슨 소린지 알다가도 모를 소리다. 해괴한 것은 외교부다, ‘대한민국 외교부엔 친미파가 없다’니 이는 또 웬 뚱딴지 같은 흰 소린지 갈수록 가관이다. 반(潘) 아무개 장관은 아직도 청와대수석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외교부 장관은 대통령의 외교 참모일 뿐 대통령의 외교 선생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아부인지 무소신인지 듣기에 헷갈린다. 명색이 일국의 국무위원이 대통령에게 소신에 따라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고 시키는대로 한다는 말은 듣다 보아도 처음 듣는 소리다. ‘외교부’란 간판이 아깝다. 자유당 정권 시절 대통령 이승만 내각에 ‘지당장관’과 ‘낙루장관’이란 게 있었다. 이승만이 말하면 덮어놓고 “지당하십니다…”로 맹종하는 각료가 ‘지당장관’이었고, 대통령 말에 감격이 넘친 것처럼 눈물 쇼를 벌이는 장관이 있어 ‘낙루장관’이라고 했었다. 근래 돌아가는 모양새가 오래 전의 일로 까마득하게 잊었던 고사를 연상케하는 것은 국민적 불행이다. 한미동맹이 불건전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를 걱정하는 게 친미라면, 그럼 한미동맹이 잘 나간다고 우기는 관점은 뭣인지 묻는다. 친미와 대칭되는 용어가 반미인 진 몰라도 여기선 굳이 그보다는 ‘비친미’라고 일단 표현하고 싶다. 비친미가 주장하는 국익은 친미가 보는 국익과 어떻게 다른가도 묻고 싶다. 도대체 아무 짝에 쓸모없는 ‘친미’를 들춰가며 긁어서 부스럼내는 것을 국익으로 여긴다면 이는 현대판 대원군식 사고 방식이다. 미국과 공조하는 한국적 국익을 사대주의적 친미행위로 매도하는 자폐증은 병세가 너무 심각하다. 지금같은 세상에 사대주의를 가질 쓸개 빠진 백성은 친미든 아니든 있을 수가 없다. 상대가 알아주지 않는 큰 소리, 되레 국민이 불안해 할 큰 소릴 쳐놓고 큰 소리 쳤다고 자위하는 것은 웃기는 비극이다. 남북 대화가 1년 가깝도록 중단된 가운데 북은 6자회담 복귀는 커녕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영변 원자로 가동 중단으로 미국을 압박해 미국은 이에 북 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 회부 태세로 맞서고 있다. 친미 매도, 동북아 균형론의 중국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아무 약발없이 북 핵 문제는 더 어렵게 꼬여만 간다. 정말 팍 고꾸라질 노릇이다. 이 정권은, 이 정부는 좀 더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 할 말을 해도 전략화가 필요하다. 전략화되지 못한 허튼 소린 메아리가 없다. 국민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부담이 가는 듣기싫은 말도 듣기좋은 말이 되는 게 얼마든지 있다. 당장은 입에 쓴 말도 신뢰성이 있어 희망이 보이면 박수를 친다. 이처럼 빛나는 말을 들을 수 있길 근심 걱정많은 이 나라 백성들은 갈구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동북아론’의 허구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전한다’ 20세기의 역사학 태두 토인비 말이다. 나사 바퀴가 한 바퀴 돌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다만 층(차원)이 다를 뿐이다. 그는 역사의 진전을 이렇게 설파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미·일·중·러 열강들의 역학 관계가 100년전 구한말의 정세와 흡사하여 매우 걱정된다”는 독자의 편지는 토인비의 말을 생각케 한다. 다만 차원(층)이 다른 점은 있다. 우선 한반도의 분단을 들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의 간접 영향권, 그리고 미·일·중이 벌이는 직접 영향권의 각축전은 100년전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또 언짢은 변화는 한·미 관계의 악화다.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동맹관계) 변화는 구한말에 일본의 조선 병탄을 묵인키로한 ‘미·일 밀약설’을 떠올린다.(“한국이 원하지 않으면 미국은 언제든 떠날 준비는 돼 있다”는 말은 힐 미 국무성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주한 미 대사 때 공식으로 직접 들려준 말이다) 장차 한·미 동맹의 반파나 완파가 만약에 있게되면 미국은 일본과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다툼에서 일본을 밀어 중국을 견제할 것이 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가 이를 전망케 한다. 대통령은 중국을 선호하는 것 같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곧 중국 중심의 판도를 의미한다.(미국은 점점 멀어져 가다가 절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 정부는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한·미동맹 속에 한다지만 말잔치일 뿐이다. 한·미 관계에 이상이 없다는 정부 발표는 한·미동맹에 이상이 많다는 반증이다. 금이 간지 오래다. 미 전략문제연구소 역시 한·미동맹은 겉과 속이 다름으로써 유발되는 혼란을 시인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한국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미국측 관점이다. 미2사단을 감축 통합하는 것은 전세계 미군 재배치에 따른 불변의 주한미군 재조정 과제다. 대신 전력 증강의 보완책이 서 있었다. 150개 분야의 전력을 증강하고 스트라이크여단 및 고속 함선을 재배치 한다는 것이 지난해 11월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공석 면전에서 들려 준 주한미군 전력 증강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다. 미국은 전쟁 대비 비축 탄약마저 빼가겠다는 등 한·미간 군사 현안마다 입장을 달리하는 대립각으로 나온다. 미국의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예의 동북아 균형론이 결정적 분기점이다. 미국과 소원해도 잘 살 수 있다면 얼마든 지 그래도 상관이 없다. 역대 대통령마다 새로 취임하면 백악관을 찾는 관행부터가 아니꼽다. 겉으론 미국의 국빈 맞이 이지만 속으로는 새 대통령의 문안 조공이다. 미국은 국내 기업의 최대 수출국이다. 자동차 수출 하나만 제한하여도 국내 경제가 흔들린다. 실업자가 속출한다. 국제사회의 신인도 또한 미국과의 유대 관계가 작용된다. 남북간의 군사 대치에서 남한만의 군사력으로는 역부족이다.(남한은 사회복지비를 확충한 대신 북은 군사대국의 확충에 힘썼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니꼬워도 미국을 더불어 이용해야 하는 연유가 이에 있다.(만약 미군이 철군하면 국내에 투자된 외자도 대거 일탈한다) 노 대통령이 주장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역할론은 북의 전쟁 도발 억제 수단으로 볼 순 있다.(당장은 6자회담 복귀를 위한 압박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중국과 실리외교 관계를 추진한다 해도 중국이 북측보다 남한을 우선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동북아 균형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 역할의 실체가 안 보인다. 말인즉슨 그럴듯 하지만 말 뿐인 게 동북아 역할론이다. 대통령은 독일 방문에서 “북의 개혁 개방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나 평양 정권이 개혁 개방을 제한하는 것은 돈이 들어서가 아니다. 사회주의 개혁 개방의 모델이 되는 중국식으로만 해도 김일성주의의 체제 붕괴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빗장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벼랑끝 외교 전술을 이래서 생존 수단으로 삼고 있는 북은 항상 우리에겐 위협의 대상이다. 동북아 균형론은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나 가능한 소리다. 역대 정부가 국가안보를 다자틀로 추구한 것은 합리적이다. 미국을 굳이 외면하지 않고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다자틀이다. 미국을 실속없이 모나게 비위상하게 한다하여 돌아오는 국익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정권 들어 심화된 반미감정은 미국의 반한감정을 불러 일으켜 한·미동맹의 균열은 겉보기보다 심각하다.(북의 입장에선 결정적 남반부 해방의 혁명 시기가 점차 성숙되어 간다) 북이 6자회담 복귀를 이 구실 저 구실로 늦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0년 전의 한반도 주변 상황을 방불케하는 열강을 견제하는 길은 미우나 고우나 한·미동맹의 복원에 있다. 이 만이 또 동북아 정세의 균형을 유지할 수가 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나는 증언한다

1945년 해방 직후의 일이다. 만주에서 귀국한 사람들 중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사태났다. 아편장사 했던 사람도, 심지어는 일본 헌병밑에서 밀정노릇을 했던 사람도 독립운동가를 자칭했다. 이국의 황야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고혼이 된 진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저승에서 치를 떨 일이었다. 우리의 언론사엔 ‘해직기자’란 특유의 기록이 있다. 1973년 유신정권, 1980년 신군부가 언론 탄압으로 양산하였다. 언론계의 숙정작업을 명분 삼았다. 겉으로는 언론사 자율을 내걸었으나 당시 문화공보부와 중앙정보부가 배후에서 조종했다. 이런 배후 권력에 의해 언론계에서 쫓겨난 게 ‘해직기자’들이다. 수많은 이들 중엔 정권에 항거한 보복으로 억울하게 해직된 언론인들이 상당하다. 그러나 ‘해직기자’가 다 이런 사람들인 건 아니다. 이권, 청탁, 공갈 등으로 금품 수수를 일삼은 악덕기자들 또한 적잖았다. 세월이 흘렀다. ‘해직기자’란 명칭이 무조건 정의의 필봉을 휘두른 언론투사로 잘못 조명되고 있다. 진짜 언론투사들 입장에서 보면 옥석이 구분안된 ‘해직기자’란 무더기 이름으로 같은 반열에 서는 게 창피할 정도의 사이비가 수두룩하다. ‘언론사 통폐합’은 우리 언론사에 기록된 또 하나의 수치다. 신군부의 전두환 소장이 이른바 ‘국보위’를 만들어 정권을 장악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남긴 작품이다. ‘해직기자’사태를 내면서 강제로 언론사를 통폐합하는 이중 구조의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그러나 ‘언론사 통폐합’의 경우, 초법적인 수단은 다분히 부정적이었으나 사실면에선 긍정적인 효과가 컸다. 특이한 건 강제 폐간된 언론사 종사원 중 해직 안 된 대다수의 언론인들 전원은 통합된 큰 언론사에 역시 강제로 구제된 점이다. 이 바람에 삼류 신문사에 있다가 일류 신문사로 가고, 삼류 방송사에 있다가 일류 방송사로 가는 벼락출세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그 때 없어진 언론사 가운데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몇 개사를 제외하고는 다 없어져야 할 언론사들이었다. 예를 들면 중앙 일간지에서도 외근 기자들에겐 월급 한 푼 안 준 신문사가 있었다. 월급은 고사하고 외근 기자가 오히려 회사에 월정급을 갖다 바쳐야 했다. 강제 해직, 강제 통폐합의 벼락치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월급의 강제 인상은 또 다른 벼락이었다. 중앙지의 경우, 대다수가 약 3배나 올랐다. 이밖에 연간 보너스 600~800%, 학자금 등 각종 수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사가 대졸 취업자의 인기를 끌어 경쟁이 치열한 입사시험이 ‘언론고시’로 불렸던 연유엔 이런 배경이 있다. 요즘의 언론환경에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 마치 1980년 언론사 통폐합 직전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는 세간의 우려엔 이유가 있다. 중앙지고 지방지고 발에 채이는 것이 신문사다. 여기에 이 정권의 대언론 정책은 한 술 더 떠 아주 지능적이다. 이와 관련한 중앙지 부문은 지방지이므로 말 않겠다. 지방지에 해당하는 ‘지역신문육성법’인가 뭔가도 그렇다. 이 법은 정부가 자기네 입맛에 맞는 전국의 지방지를 골라 돈을 준다는 것이 골자다. 사견으로는 정부가 아무리 지방지일 지라도 신문사에 돈을 준다는 것도, 신문사가 정부 돈을 받아 먹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또 준다는 돈이 말 그대로 신문을 육성할만한 금액도 아니다. 기껏 3억원을 준다고 해도 한 달 인건비도 안 된다. 이런데도 정부가 생색을 내고자 하는 덴 이를 미끼로 하는 복선이 깔려 있다. 정부가 정말 언론환경을 정화할 의지가 있으면 신문사의 경우, 법을 고쳐 등록 요건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 ‘돈 5천만원만 있으면 일간 신문사를 만든다’는 항간의 냉소가 뭘 의미하는 가를 헤아려야 한다. 중앙지든 지방지든 언론의 소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응분의 요건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상당한 자본금을 담보케 하고, 사옥 및 인쇄 등 시설, 그리고 종사원에 대한 상응한 처우 등에 일정 기준을 세워 현지 실사 끝에 신문사 등록을 받든지 말든지 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신문사는 법에 경과기간이 지난 뒤 실사하여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등록이 취소되도록 하면 된다. 오늘은 ‘신문의 날’이다. 1896년 4월7일 국내 신문의 효시인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우리 언론사 109년 가운데 칼럼자는 42년을 현업에 종사해오고 있다. 신문은 즐겨 보면서 신문을 만드는 사람은 아직도 경원시하는 사회 일각의 풍토가 가슴 아프다. 물론 나 자신부터 반성한다. 그리고 신문환경의 난세를 틈타 아편장사를 독립군 만들기로 기도하는 정부의 농간은 오히려 과거보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는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러시아 油田, 緣木求魚의 미스터리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말이다. 한글사전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하는 뜻이라고 풀이해 놨다. 또 하나의 생소한 뉴스가 우릴 괴롭힌다. ‘러 유전 피해 65억 떼일판…’이란 기사를 제목만 얼핏 보아서는 무슨 말인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은 이미 오래전에 벌어졌다. 러시아 유전개발회사 중 하나인 알파에코사 인수 조건으로 계약금 620만달러를 송금한 것은 지난해 9월3일이다. 약정한 인수 금액의 10%에 해당하는 돈이다. 철도공사가 산하 단체인 한국철도교통진흥재단을 앞세워 이 돈을 우리은행에서 빌려 보냈다. 이런 사실을 무려 7개월동안 우리가 몰랐던 것은 철저히 비공개사업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또 유전개발합작회사로 무슨 ‘코리아크루드오일(KCO)사란 게 급조되고, 러시아 회사와 밀고 당기는 우여곡절 끝에 계약 조건이 파기됐는 데도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아 결국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우렁속 보다 깊이 묻혔던 그 간의 과정을 여기에 장황하게 옮길 필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문제는 석유공사도 아닌 철도공사가 뜬금없는 유전사업에 왜 손을 댔느냐는 것이다. 철도공사는 ‘수익선의 다변화’를 구실삼은 것으로 전한다. 돈만 되면 뭣이든 다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철도교통진흥재단을 만든 배경 설명이 또 가관이다. ‘수도권의 인구 분산과 철도교통의 활성화’를 이유로 들었다. 철도교통의 활성화는 그런다손 치더라도 철도기관이 웬 ‘수도권의 인구 분산’을 들먹이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이도 그렇다. 경기도의 경우, 유입인구 집중은 역대 정부가 신도시 건설이다 대단위 택지조성이다 해가며 부추긴 것이지 경기도가 좋아서 불러들인 건 아니다. 이 정부 또한 전철을 밟아 여전히 그같은 도내 인구 유입을 부채질하고 있다. 철도공사까지 수도권 인구 집중이 마치 지역의 죄업인 것처럼 들먹이는 것은 연목구어 같은 소리다. 연목구어인 것은 철도공사가 유전사업에 나선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석유공사가 한다고 해도 성공률이 매우 낮은 것이 유전사업이다. 유징이 있어도 막상 시추를 해보면 유정을 만나는 확률은 10% 내외다. 이런 모험을 돈이 된다면 아무리 뭣이든 한다고 하여도 그렇지, 전문기관도 아닌 문외한들이 손댄 것부터가 연목구어다. 알 수 없는 것은 문외한들이 왜 쉬쉬해가며 들고 나섰느냐는 것이다. 무슨 명목으로 어떻게 구렁이알 같은 은행돈을 65억원이나 빼낼 수 있었는 지도 궁금하다. 희한한 미스터리의 전말에 이광재 의원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 것도 의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는 여권 386세대 실세가 하필이면 좋지않은 일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니 참 딱하다. 듣건대 이 의원은 지난해 여름부터 에너지 문제 일환으로 러시아 유전개발사업에 여러가지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한다. 에너지 문제야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는 절실한 과제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같은 관심이 러시아의 알파에코사 인수 작업과 어떤 함수관계냐는 것이다. 이 의원의 관심으로 그런 작업이 시작됐는 지, 그같은 작업이 있어서 관심을 가졌는 지가 중요하다. 이도 저도 아닌 우연의 일치라면 이 의원과 가까운 KCO 인맥과 철도공사 사장 등 접촉에 대한 의문에 석명이 필요하다. 개혁은 기존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지만 이도 순리와 역리가 있다. 산 중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연목구어는 순리가 아닌 역리다. 순리엔 비전이 보이지만 역리에는 혼란을 가져온다. 이 정권의 개혁이 역리에 치우치는 것은 국민의 불행이다. 이래서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 그간의 혼란이 순리를 외면한 개혁의 실패에 기인한다. 러시아 유전사업이 에너지대책의 순수한 의도였는 지, 또 다른 알파의 의도가 있었는 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덤벙 술덤벙 같은 연목구어식 개혁의 연장선상이라는 사실이다. 개혁은 의지가 요구되지만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분야마다 전문가의 안목이 수반돼야 한다. 다원화·다중화 사회의 개혁을 한 사람의 의지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개혁독재다. 개혁독재가 개혁부패를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또 하나의 생소한 연목구어의 러시아 유전 뉴스가 얼마나 우리를 식상하게할 지 걱정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교육삼락회원들의 노익장

맹자(孟子)는 부모가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우러러 보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천하의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을 ‘군자삼락’이라 하였다. 한국교육삼락회는 이 군자삼락의 전통을 발전· 승화시켜 ‘가르치는 즐거움, 배우는 즐거움, 봉사하는 즐거움’을 실천하면서 청소년 선도, 학부모 교육, 학교교육 지원을 기본목표로 하는 평생교육단체다. ‘퇴직교원 평생교육활동 지원법(법률 6947호)’이 말해주 듯 교육삼락회 회원들은 교단에서 정년퇴임한 교육자들이다. 그동안 교육삼락회는 정부의 일관성없는 교육정책 개선, 저하돼 있는 일선교원들의 사기 진작, 공교육의 위상 확립을 위하여 수시로 애정어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입시(入試)만을 위주로 하는 교육으로 인해 파묻혀버린 역사윤리, 도덕 교육을 질타하면서 밝은 사람, 밝은 가정, 밝은 학교, 밝은 사회, 밝은 국가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학교교육이 학원교육보다 낡았고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여 진취성이 없다고 혹평만 하지 않고 현직 교원들에게 꿈과 사기를 돋우어 참 스승의 길을 걷도록 격려와 성원을 보냈다. 비록 교단에서는 물러 나왔지만 불안한 교육현장을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험만큼 소중한 자산이 또 있겠는가. 얼마 전 경기도교육삼락회 제37회 정기총회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18대 김순태 회장 취임 및 특별강연을 겸한 이날 정기총회는 행사장소인 경기도교원단체 총연합회 대회의실이 넘쳤다. 무슨 이권이 있는 집회도 아닌 터에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어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가 고희 전후의 회원들임에도 혈색이 하도 좋아 기자의 얼굴이 오히려 무안했다. 미처 입장하지 못해 복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교육삼락의 열기를 뜨겁게 느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할 일이 많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1930년생이니 75세, 한국나이로 76세다. 이스트우드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석권했다. 그는 1993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헨리 범스테드는 89세, 남우조연상 모건 프리먼은 68세다. 평론가들은 이들의 작품에 대해 “연륜에서 배어나오는 섬세한 심리묘사” “관객들을 쥐었다 폈다 하는 노련한 연기”라는 찬사를 바쳤다. “내 커리어에서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3월 9일 CBS 앵커자리에서 물러난 댄 래더가 남긴 말이다. 1981년 월터 크롱카이트로부터 마이크를 넘겨 받은 지 정확히 34년, 1961년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44년만이다. 언론인으로 최고의 영광을 누렸지만 “나는 아직도 멋진 취재 보도에 배고프다”고 말했다. 래더의 나이는 올해 73세다. 서울대 교수 김성수 박사의 특별강연 ‘청소년교육을 위한 가정·학교· 사회의 협력’을 들으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댄 래더의 말을 떠올린 것은 삼락회 회원들의 모습에서 그들과 같은 ‘젊은 노익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교육삼락회 회원들은 평생을 제자들에게 학식과 함께 올바른 가치관, 의로운 정신을 심어 준 인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육은 권한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신념으로 교단에서 반세기를 보냈다. 그리고 교단에서 물러나서도 평생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이 어찌 ‘젊은 노익장’이 아닌가. “사람의 입김은 추울 때 가장 뜨겁고 사람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생길 때 가장 깊은 지혜가 생긴다” 경기도교육삼락회장에 재추대된 김순태 회장의 말이다. 배우고 가르치며 봉사하는 즐거움을 실천하는 평생교육자인 교육삼락회 회원들의 이념을 대변해 주는 명언이다. ‘인생에서 은퇴란 없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임병호 논설위원

목요칼럼/부부의 ‘행복’이라는 것

서울 강남구 서초동 카톨릭 간호대 봉사부에 ‘사별가족모임’이 있다. 카톨릭 의대의 의학 연구를 위해 시신을 기증한 유족들 모임이다. 대개는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의 시신을 기증했지만 부부가 함께 사후 기증해 놓은 예가 많다. 결국은 부부가 같은 길을 가지만 살아 남은 쪽이 당장 겪고 있는 사별의 고통이 없을 수 없다. 봉사부에선 ‘사별가족나눔지’를 발행한다. 다음의 시는 나눔지 7호(3월17일자)에 실린 전문이다. ‘나로 인한 불행에게 하늘에서’(죽은 나로 인해 불행을 겪는 당신에게 하늘에서 보낸다는 뜻-필자 주석-) 보고 싶은 당신 / 나 지금 이렇게 당신이 그립습니다 / 당신이 너무 멀리 있어 당신이 그리운 날입니다. 내 속에 당신있고 / 당신 속에 내가 있어 / 우리는 하나인 것을 / 그래서 당신이 더 그리운 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더욱 / 이렇게 가슴 저려서 / 당신이 그리워서 /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 / 당신 옆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 당신도 날 그리워하고 있어서 / 나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 밤새 잠도 설치고 울고 있어서 / 그리운 님 당신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꿈속에 찾아가 / 이젠 편히 살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 그리운 당신의 기억에서 이제 내가 / 잊혀지기를 원한다면 거짓이겠지만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 고통과 아픔 속에서만 산다면 / 나 역시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의 인연은 짧았지만 / 당신을 사랑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 그리움에 살고 있는 당신을 보면서 /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 애타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 / 이 마음 또한 고통스럽습니다 / 이 생애에서의 인연은 짧았지만 / 언젠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내가 쉬고 있는 이곳에서 /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 살아서 못 다한 사랑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편히 사십 시요 / 이제 당신이 편한 밤을 자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이 시를 실은 나눔지엔 먼저 간 배필에게 산 사람이 보내는 시가 ‘늘 당신이 있었습니다’란 제목으로 또 실렸다. 내가 돌아가는 길엔 / 늘 당신이 있었습니다. 멀리 손짓을 하며 서 있기도 하고 / 이 따금씩 지쳐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 곁엔 늘 당신이 있었습니다 / 낯 익은 모습으로 당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잠시 당신을 등지고 떠나 있는 날에도 / 당신은 두 손 꼭 쥔 채 / 늘 있던 곳에 있었습니다. 내가 되돌아와 당신을 보았을 때 / 눈물 머금은 당신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내가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 / 당신이 있었습니다 / 이제 보니 당신은 나의 그림자였나 봅니다. 내가 힘겨워 하면 / 그만큼 당신 지친 모습 보이고 / 내가 슬며시 웃음 보이면 / 그만큼 즐거워 하는 당신은 / 또 하나의 나였나 봅니다. 내 곁에는 지금도 그런 당신이 있습니다. 위의 두 시는 죽은 배필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배필에게 보내는 애틋한 사랑이 짙게 농축돼 있다. 유명을 달리하는 죽음,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서는 부부의 사별은 누구에게든 이처럼 애처롭다. 생전에 살 땐, 살다보면 다투는 것 또한 부부다. 미워할 때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을 당하고 나서 비로소 그 모든 게 부부애였음이 확인되면서, 고독 속에 새삼 가슴 저미는 어리석음을 인간은 갖는다. 안익태 선생의 미망인 롤리타 안 여사가 동수원초등학교 음악회에서 애국가가 합창되자 두손으로 백발의 노안을 감싸며 터뜨린 오열, 그건 복받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잘 났건 못 났건, 잘 살든 못 살든 부부의 정이란 다 같다. 세파를 헤쳐가노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할 게 없는 것이 부부다. ‘사별가족 나눔지’의 시를 읽으면 부부가 해로하고 있는 그 자체가 더 할 수 없이 큰 행복이다. 사별가족들은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정오에 카톨릭 의대 대학성당이 올리는 시신 기증자의 위령 미사에 참석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국민투표가 왜 겁납니까?-청와대편지

참 이상하네요. 수도 이전의 원안이 위헌으로 판가름 났습니다. 그럼 끝난게 아닌가요. 대선에서 행정수도 약속으로 아무리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를 행정도시로 바꾼 반쪽 이전의 후속대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국사를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지요. 물론 국가균형발전론을 또 들겠지만 생돈을 들여 행정수도를 만든다고 전국 방방곡곡이 고루 발전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논리의 비약이니까요. 되레 국력 낭비의 평지풍파로 축적된 국가경쟁력마저 저해될 요인이 다분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그만 두겠습니다. 이미 이 단계가 지났다고 보니까요. 문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수도 이전의 대전제가 무효화된 판에 분할 이전의 소전제가 어찌 유효화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안이 부당 불법하여 헌법에 위배되면 변형은 더 부당 불법한 것 아닌가요. 역사 의식의 결핍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장차 한반도가 통일되면 그때 가서도 행정도시가 지금 대통령께서 주장하신대로 필요하다고 차마 말씀하실 줄은 없을 것으로 압니다. 나라의 미래사적 명운에 아무 쓸모없는 행정도시를 왜 난릴 쳐가며 억지로 만들어야 합니까. 난리를 치는 것은 국회가 만든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친다고 말씀하시겠지만 아닙니다. 행정도시법 같은 건 국민적 공론 과정을 거쳐야 설득력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사회 인식입니다. 정치적 의중이 투합하여 국회에서조차 제대로 된 토의없이 뚝딱 해치운 법이, 그것도 수도를 변칙으로 분할하는 야합이고 보면 어찌 거센 반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책임은 원인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렇습니다. 포용과 신념은 중용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포용과 신념이 각을 형성할 땐 신념을 선택하는 것이 소신있는 자세일 것입니다. 고사를 보아 황희는 너그러우면서 강직하였고, 송시열은 강직하면서 너그러웠습니다. 한 분은 포용을 보이는 가운데 신념을 지켰고 또 한 분은 소신을 지키는 가운데 포용을 보였습니다. 공통되는 것은 두 분 다 소신을 굽히지 않기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왕조에서 임금의 세자 책봉에 감히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은 임금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런데도 두 분은 공교롭게 세자 책봉에 소신을 굽히지 않아 태종의 노여움을 산 황희는 유배되었고 숙종의 진노를 산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잖습니까.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정부청사를 옮기는 과천에 그에 못지않은 연구단지 등을 들여 세운다니까 “연구단지가 그렇게 좋은 것 같으면 허허벌판인 연기·공주에 들일 일이지 멀쩡한 청사를 번거롭게 옮겨가며 왜 과천에 들이냐”고요. 그러나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와서 행정도시를 철회할 수 없는 것처럼, 이의 반대 또한 철회할 수 없게 된 게 현실입니다. 서로 포용될 수 없는 신념의 충돌을 대통령께선 어떻게 해결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행여라도 그냥 밀어 붙인다는 생각은, 측근의 그같은 건의가 있더라도 받아 들이지 않길 충심으로 바랍니다. 국민투표로 묻는 것이 대통령께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길입니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책무이기도 합니다. 포용될 수 없어 충돌하는 두 신념 중 하나를 이의가 없게 잠재울 방법은 국민투표밖에 없습니다. 북 핵 문제가 심상치 않습니다. 나라 안팎사정이 어렵습니다. 행정도시 파문을 시급히 국민투표로 국론을 통일하시기 바랍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국민투표 요구의 함성에 왜 귀를 막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국민에게 직접 묻는 것이 겁이 납니까. 행정도시란 게 그토록 좋다면 국민투표에 자신을 갖지못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지역 갈등을 조장한다는 구실일랑은 아예 말씀마십시오. 참으로 불행한 것이 지역 갈등이어서 시정돼야할 폐습이지만, 이런 가운데 각급 선거를 치러온 마당에 새삼 국민투표라고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국민투표도 시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에 대한 위헌심판청구가 제기되어 위헌 결정이 또 나게되면 국민투표에 부칠 기회마저 잃게 되니까요.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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