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행정도시病 ‘증후군’

살다보면 남을 탓할 일이 있긴 있다. 남을 탓할 때 탓해도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하는 것이 세상사 이치다. 세상사는 자신에 의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를 애써 외면하는 이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다. 심대평 충남지사가 3선의 디딤돌이던 자민련을 탈당했다. 충청권, 즉 중부권을 발판으로 하는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시효가 소멸된 자민련 대신 제2자민련을 만든다는 소리다. 염홍철 대전 시장은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다만 신당참여를 말하지 않은 것은 형세를 관망하고자 할 생각일 것이다. 김종필(JP)같은 ‘충청당’의 새 맹주를 꿈꾸며 기선을 제압하고 나서는 심 아무개에게 당장은 이용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없지 않을 수 있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 여야의 백중지세를 틈타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해가며 재미를 본 것이 자민련을 무기삼은 JP의 정치곡예다. 노무현 정권 역시 여야가 난형난제다. 이 틈을 타 심대평이 JP의 후계 구도를 꿈꾸는 야심은 그 말로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의 임의다. 문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 있다. 그같은 지역당 재출현의 빌미를 만들어준 것이 바로 여야 양대 정당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충청당’ 창당선언에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은 떨떠름하고 있지만 그게 다 남을 탓할 일만이 아닌 자업자득이고 자승자박이다. 열린우리당은 무산된 행정수도 대신 행정도시를 만들어 주면 충청권은 절로 텃밭이 될 것으로 여겨 안간힘을 다 썼지만 죽 쑤어서 무엇 좋은 일 시킨 꼴이 됐다. 사정은 한나라당 역시 다르지 않다. 충청권의 기존 세력을 다독거린답시고 행정수도도 찬성하고 행정도시도 손들어 주었지만 닭 쫓던 뭐가 지붕쳐다 보는 꼴이 돼 간다. 정치는 신념이고 원칙이다. 신념과 원칙에 의해 형성되는 표가 진짜 표다. 이러지 않고 상황논리에 의한 요령과 변칙으로 노리는 표는 언제 꺼질 지 모르는 거품과 같다. 열린우리당은 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났을 때 그만 두는게 대선공약의 사슬에서 자연스럽게 풀리는 좋은 기회였다. 한나라당도 행정도시라는 이름의 수도 분할을 수도 이전의 위헌 결정을 방패삼아 반대하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런데도 두 당은 표에 눈이 멀어 코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볼장 다 본 아무개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나서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건 남을 탓하기 앞서 여야가 자신을 탓해야 한다. 목전의 불이익이 결코 불이익이 아니고, 이익이 결코 이익이 아님을 가릴 줄 아는 형안은 이러므로 요령과 변칙이 아니고 신념과 원칙이다. 열린우리당이 수도권의 행정도시 반발 무마책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내놓는 갖가지 장밋빛 선심 변칙을 경멸하는 이유도 이에 있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국익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 행정도시를 반대하면 규제를 풀지않고, 찬성하면 규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보는 흥정거리 대상이 아니다. 나라 운영의 정책을 마치 장돌뱅이 행상의 에누리처럼 이렇게 저렇게 흥정해서는 그러한 정책 자체가 신뢰를 얻지 못하는 건 원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행정도시 반대와 수도권 규제 완화 및 철폐는 별개의 사실이란 점이다. 수도권 규제완화가 아니라 수도권정비계획법을 없앤다 하여도 행정도시 건설은 동의할 수 없다. 당장 국익을 해칠 뿐만이 아니라 장차 통일 한반도의 미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가소로운 건 열린우리당의 선심 남발이 예컨대 해당 부처에선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국방시설까지 옮기는 것으로 흘리는 무책임이다. 수도권 민심 수준을 그토록 만만하게 보는 오만함에 오히려 분노를 갖는다. 지금이라도 아주 늦지 않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새치기 할 생각보단 제 줄로 갈 생각을 해야 한다.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용기가 참다운 용기다. 남을 탓하기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오기로 더 가다가는 제2 충청 지역당의 신당만이 아니라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를 당하기 십상이다. 나라가 혼란에 빠져 민생이 어려워진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호주제 폐지 ‘만세!’라니

다수의 여성 국회의원과 여성단체 지도자들이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불렀다. 이같은 신문 보도 사진을 보면서 난 자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가를’.(그 여성들도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지만 나 역시 그들 못지않은 판단력을 지녔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도 사진은 전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 통과와 관련한 2월28일자 어느 전국지 2면의 기사 내용에 실렸다. 호주제는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기각이(정족수에서 한 사람의 재판관이 모자란) 6 대 3으로 헌법 불합치판결이 나 2008년 1월까지의 한시적 폐지가 불가피하게 됐다. 헌재의 결정은 여성계 일각에서 양성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받아 들인 것이 대체적인 이유다.(결정은 당연히 기속력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점에 이견 제시를 제한받을 이유 또한 없다. 이래서 한마디 하자면 호주제의 성 평등 위배 관점은 다분히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지구촌에서 결혼으로 여성의 성을 남성의 성으로 바꾸어 빼앗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밖에 없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성 평등은 있을 수가 없다. 성씨의 부계혈통 계승에(무슨 여성 해방운동이나 벌이는 것처럼) 이의를 달지만 일본이나 선진 서구사회의 여성들이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본 성씨를 남편의 성씨로 바꾸는 것을 성 평등에 어긋난다며 이의를 달았단 말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했다. (아내의 성씨를 빼앗지 않는)중국이나 북녘에서도 호주제를 폐지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 해방이 아닌 가정을 공산주의의 단위 세포로 조장하기 위한 정책 수단이었다. 일본도 2차대전 후 호주제를 폐지했으나 이 후유증으로 새로운 성씨가 수만개나 제멋대로 생겨 성씨 고유의 의미가 사라진지 오래다. 호주제를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조선민사령’을 근거로 빗대어 힐난하는 ‘일제설’ 주장은 아주 잘못된 오류다. 조선조의 ‘경국대전’에 뿌리를 둔 전통적 가족제도가 곧 호주제의 기원이다. 호주제의 호주는 가족 중심의 구심적 상징일 뿐 무슨 절대적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다. (호주제가 싫어)앞으로 1인1적제 등을 강구한다지만 가족붕괴가 불가피하다. 형제자매나 조부모, 조손 간 혈통확인의 직접 문서가 끊긴다. 호주제가 지닌 불합리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미혼모의 경우다. 열심히 아기를 키운 미혼모가 뒤늦게 나타난 생부로 인해 아버지의 호적으로 아기를 빼앗기는 것은 실로 억울한 일이다. 이같은 폐습을 막기 위해 생부가 나타나도 미혼모의 자녀를 어머니 성씨로 하게하는 것은 법률의 보완만으로도 능히 가능하다. 굳이 호주제를 폐지하는 건 ‘교각살우’와 같다. 호주제 폐지에 따라 제발 앞으로 이런 일일랑 없으면 좋겠다는(몇가지) 우려를 갖는다. 여성이 시댁과 친정 양쪽으로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친정이 있을 수 없는 남성으로서는 불평등의 역차별이다. 결혼한 아내가 남편의 호적에 입적하지 않고 자신만의 가족부(1인1적제)를 만들어선 진정한 법률혼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연금이나 보험 등 상속에 다툼이 심화할 수 있다. 자녀들 중 아버지와 어머니 성씨를 따로 받아 같은 한 부모의 형제자매가 성이 다를 수 있다.(이외에도 많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생각해보면 건강한 가정은 호주제가 폐지되든 말든 상관이 없다. 상관이 있는 것은 결손 가정이다. 재혼하는 개가 여성이 전 남편의 자녀 성씨를 새 남편의 성씨로 바꾸는 편의를 법률로 보장하는 것이 호주제 폐지다. 이런 상대적 소수의 결손 가정 여성을 위해 호주제를 폐지하는 게 옳다고 보기엔 심히 의문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성씨를 멋대로 바꿔 뒤죽박죽 됨으로써 족보가 별 의미가 없게 되는 점이다. 동물원의 동물에도 족보가 있고 진돗개 같은 개에도 혈통승계를 입증하는 족보가 있다. 하물며 사람이 성씨도, 본관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혈통승계가 불분명해지는 사실은 한국인으로서는 차마 설명하기가 어렵다. 단언한다. 남성도 어머니와 아내와 딸과 손녀는 여성이다. 여성 역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과 손자는 남성이다. 자신이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사시의 눈으로 호주제를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만세!’를 부른 그들은 도대체 어떤 여성들일까)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어줍잖은 ‘고양이’

쥐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형국이다. 보통 쥐가 아닌 들쥐다. 기왕 죽기로 작심하고 대들면 고양이도 물린다. 한 마리의 고양이만도 아니다. 다섯마리의 고양이다. 이 많은 고양이들이 한 마리의 쥐를 상대로 벼르고 어른다. 그러나 쥐는 고양이들을 되받아 쳐 되레 궁지로 몰곤 한다. 평양정권의 허허실실 전법이다. 북의 핵보유 선언에 새삼 놀라는 건 이상하다. 그럼, 핵무기가 있는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진 게 6자회담이다. 핵보유 선언에 대한 경악은 실컷 울고나서 누구의 초상이냐고 묻는 우문과 같다. 북이 보유한 핵무기 수량은 두어 세개쯤 되고 수준은 (탄두로) 쏘아올릴 수는 없는 (비행기) 투하용으로 히로시마 원폭 수위의 위력일 것이라는 등 갖가지 추측이 무성했다. 국내에서도 국정원과 국방부와 통일부의 판단이 저마다 달랐다. 하긴 그렇다. 북의 핵무기 보유 능력의 개연성은 인정하면서도 실체는 파악하지 못한 채 가진 것이 이미 지나간 6자회담이다. 북의 핵 보유 선언과 상관없이 저들이 진짜 핵무기를 가졌느냐는 의아심도 든다. 그러나 그토록 공갈을 칠만한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 정황이고 또 그만한 시일을 그동안 밀고 당기면서 충분히 벌었다고 봐야한다.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평양에 간지가 여러날 됐다. 그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못만났다’는 등 소식이 오락가락하더니 지난 21일 비로소 만나긴 만난 모양이다. “미국이 믿을만한 성의를 보이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견지하며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6자회담을 반대한 적도 없으며 회담의 성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게 김 위원장이 밝혔다는 요지다. 이에 정부측은 “최악의 상황, 추가적 상황 악화를 덜어주는 측면이 있다”(통일부) “6자회담을 완전히 깨버리려는 태도가 아니란 점에서 긍정적이다”(외무부)라고 평가했으나 외신 논평에는 차이가 있다. ‘표현이 애매한 유화 제스처다’(NYT) ‘미국에 회담 중단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다’(마이니치) ‘지원 양보를 얻으려는 북의 오랜 전술이다’(BBC)라고 했다. 문제는 평양정권 관련의 정보 부재다. 우리는 더 말할 것 없고 첩보능력이 가공할 정도인 미국조차 모란봉 능선의 평양 금수산 1호청사 소식엔 한마디로 깜깜하다. 핵에 관한한 서슬이 시퍼런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사찰을 못하고 있다. 단편적 첩보는 미국에 귀동냥하고 북에 대한 교섭은 중국을 유일 창구로 삼고 있는 우리 정부의 현실적 한계가 참으로 딱하다. 그동안 연평균 2천300억원에 해당하는 쌀과 비료며 갖가지 물자를 1조원어치 이상을 북에 지원해 왔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것이 인정이고 동포애다. 아무것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북 옹호발언에도 저들은 냉담하기만 하다. 평양정권은 민족공조를 말하면서도 공조할 수 있는 정보 뭣 하나를 우리에게 주지않고 있다. 남북간에 가졌던 모든 회담마저 올스톱 됐다. 김정일 위원장의 왕자루이 부장 면담 발언은 새로운 게 아니다. 종전에 주장했던 북미회담 요구의 큰 틀에 속한다. 미국의 북측인권법 제정은 김정일 정권의 평화적 붕괴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부시가 종국적으로 속셈하고 있는 무력에 의한 붕괴와 양대 축을 이룬다. 이 중간 선상의 것이 6자회담이다. 김 위원장은 이를 잘 알고 있으므로 미국에 체제보장을 먼저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6자회담 테이블에서 얘기하자는 것이 부시의 주장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역할을 늘 강조해 왔다. 북과 미국의 양자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대통령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그러나 중·일·러 등이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6자회담 전략 속에서 정작 조율 상대인 북과 미국에게마저 내심 따돌림 받고 있다. 우리 한국은 어줍지 않은 고양이 신세다. 쥐의 놀림에서 고양이 노릇도 더 제대로 못하며 고양이 무리에 들어있다. 그러나 북의 핵무기 위협에서 가장 두렵게 근접하는 것이 바로 우리다. 어떻게든 한반도의 핵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평양정권을 사생 결단의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지 않으려는 고충은 이해하나 무작정 감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할 말은 해야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게 대화의 등가성이다. 중국의 대북창구화는 차선책이다. 직접 대화를 가져야 한다. 정부가 이를 노력하는 데도 안되고 있는 것은 정책 결함이다. 이에대한 방안은 나중에 따로 말하겠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사형제 폐지?

사형제 폐지? 안된다. 왜? 인명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18일부터 사형제폐지특별법안 심의에 착수했다. 오래 전 부터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논의는 계속돼 왔지만 정식 법안으로 상정돼 국회 심의를 받는 것은 처음이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대신 수형자가 사망할 때 까지 가석방이나 감형 없이 계속 복역하는 종신형 제도를 도입하자는 게 법안의 주요 골자다. “국가 권력이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헌법의 정신과 모순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다. 범죄 피해자가 느끼는 증오가 아무리 커도 오판으로 사형 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엔 절대 비할 수 없다. 피해자의 복수심을 대신 복수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 아니다.”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의 주장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4년 4개월 동안 사형수로 복역한 그로서는 당연히 할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소위 사상범, 양심수는 논하지 않겠다. 극악무도한 살인자만 얘기를 한다. 그렇다해도 피해자를 대신하여 국가가 복수? 당치 않다. 법이 응징하는 것이다. “사형제도가 수천년 동안 존속돼 왔지만 범죄는 갈수록 흉악해지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응보형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된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의 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형제를 폐지하면 범죄가 양순(?)해지고 감소한다는 게 아닌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범인이 사형을 당하지 않고 종신형으로 수감됐다면 평생 참회했을 것이다. 오히려 종신형이 더 큰 벌”이라고 말했다. 1982년 술에 취해 총기로 한마을 주민 56명을 살해했던 우순경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앓느니 죽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식물인간상태(종신형)보다는 안락사(존엄사·사형)가 편타. 사형제도는 존치돼야 한다. 과거 ‘지존파’나 ‘막가파’는 물론 테러에 의해 한 번에 수백, 수천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범죄자를 살려 둘 경우, 한 명의 목숨은 소중하고 피해자 수천명의 목숨은 그렇지 않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어불성설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아무 원한도 없는 부녀자를, 결혼 하루 앞둔 신부를, 출산 앞둔 임신부를 죽이고 토막내는, 살아 있는 사람을 구덩이에 넣고 흙을 덮어 매장하는, 밀폐된 공간에 가둬 놓고 태워 죽이는, 늙은 부모를 자식들이 때려 죽이는 그런 인종을 법으로 살려 주자는 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소리다. 국책을 좌지우지하는 헌법재판소도 일찍이 사형제를 인정했다. 1996년 11월 사형을 규정한 형법 제41조와 제250조의 관련조항에 대해 ‘사형은 범죄에 대한 근원적인 응보방법이자 예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작년 9월엔 대법원이 신도 6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영생교 신도 모씨를 “극악범죄자는 인격체로 볼 수 없다”고 사형제 필요성을 인정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2003년과 2004년에 각각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사형제 존치에 찬성하는 의견이 69.5%, 66.3%에 이르렀다. 살인 범죄자도 자신의 목숨은 귀하게 여긴다. 죽음 앞에서는 공포에 떤다. 사형제가 없으면 죽을 염려가 없으므로 살인행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부터도 인간은 원래 그렇다. 사형제 존치는 인명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인권은 인권을 존중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사형제 존치? 당연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목요칼럼/영원한 그 이름, 아내여!

입원할 땐 부축하며 나란히 손잡고 들어섰던 병원을 주검으로 퇴원했구려. 그게 불과 일주일만이오. 설 연휴엔 밤낮으로 당신과 함께 있을 거라고 했잖소. 그 새를 못견디고 가버렸구려. 당신의 고통을 짐작은 했지만 미처 더 헤아리지 못한 못난 남편의 허물이 크오. 평생동안 내 뒷바라지를 해온 손을 매만지며 나눈 몇마디가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병환 중 보낸 지난해 추석을 얘기하며 올 설은 웃음으로 보내자고 했잖소. 수술을 잘 마치고 나온 서너달은 지금 생각하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참으로 소중한 나날이었소. 그 어려운 항암치료를 오직 살고자하는 의지 하나로 여섯차례나 견디고 나선 졸업한 것으로 알고 우린 좋아했지요. 다시 도져 허리로 옮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날벼락이었소. 수술이 너무 늦도록 당신의 건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다 나의 잘못이오. 배필잃은 사생활을 무슨 염치로 여기에 얘기하느냐고 너무 탓하지 마오. 못난 경험으로 미루어 나같은 세상 남편들이 또 있을까봐 그래서 이러오. 많은 주부들이 그런 것처럼 당신은 아파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소. 바깥 일하는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요. 어쩌다가 낌새를 채고 병원에 가보라 해도 “이러다 괜찮을 거”라며 버티곤 하는 것을 그냥 넘긴 나야말로 정말 미련스런 남편이었소. 당신의 손목을 억지로 끌고서라도 진즉 초기에 큰 병원을 찾지 않았던 회한이 이토록 가슴을 저미는구려. 어느덧 4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이오. 당신과 함께한 세월을 전엔 어리석게도 잘 몰랐소. 가고나서야 비로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던 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집안 구석구석 밴 당신의 흔적속에 주인없는 빈 자리가 너무도 크오. 나야 가전품 돌리는 건 고사하고 심지어 면도날 하나 가는 것조차 당신이 다 해줬잖소.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을 적마다 갑자기 이게 뭔가 싶고, 입원하러 가면서 썰어놓은 김치로 밥을 먹을 때면 덩그러니 임자잃은 당신의 식탁 의자가 목 메이게 하는구려. 벌써부터 나오는 빨래감에 세탁기를 다룰줄 몰라 일일이 손빨래를 하면서도 당신의 손길에 닳은 빨래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는구려. 두 아들 며느리와 손주들, 세 시동생과 동서들, 그리고 조카들을 이리저리 다독거리며 집안을 무던히도 잘 챙겨온 당신이었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밀물처럼 엄습하는 고독이오. 큰아이 내외가 함께 있자는 것도 싫고 우리 집에 와서 밥 해주겠다는 것도 귀찮기만 하오. 밤늦도록 술에 찌든 것만은 유난히 잔소리하던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 영 들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숨이 막힐듯이 답답하기만 하오. 아버지 어머니 상을 당신과 함께 치렀잖소. 불효스런 말이지만 배필을 잃은 슬픔은 어버이를 잃은 슬픔과 또 다른 것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실감하오. 당신의 속을 적잖게 썩였소. 믿었기 때문이오. 내가 어떻게 하든 다 이해하고 용서해줄 것으로 알았고 또 당신은 그래왔소. 카드빚도 여러차례나 갚게해 당신의 계획을 망치게 하곤 했잖소. 입원하기 바로 전엔 누웠다가 일어서기가 거북하여 퇴근하는 나를 보고 장롱에 기댄 채 이부자리에서 미소 지어 손을 흔들곤 했지요. 지금도 당신의 손때 묻은 방안의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데, 이 세상 어디에서도 영 당신을 찾아볼 수 없게 됐구려. 하긴, 부부의 사별이 어찌 나만이 당하는 아픔이겠소.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섭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사의 숙명인 것을 혼자만의 아픔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외람된 생각이지요. 하지만 생전에 고생시키고 또 허망하게 떠나보낸 자책감이 너무 커 더욱 그립구려. 이 칼럼란은 당신이 칭찬보다는 지적을 많이 하면서도 빼놓지 않고 늘 읽어 주었소. 겉멋은 부리지 말고 알기쉽게 쓰라고도 했지요. 당신 얘기를 이렇게 쓰게될 줄은 차마 몰랐소. 주책없다거나 뭐라고 또 나무라겠지요. 그리고 사별의 상심에만 사로 잡히는 게 당신의 뜻이 아닐거란 것을 생전의 성품에 비추어 왜 모르겠소. 열심히 살다가 당신이 간대로 우리가 약속한 카톨릭의대를 통해 뒤따라 갈 것이오. ‘안소자’란 이름, 당신은 영원한 그 이름 그대로 아내요. 삼가 명복을 비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어머님 전상서

설이 다가옵니다. 이맘 때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놋그릇을 닦는 것이 어머니께서 맨 먼저 서두르시는 설 치레였습니다. 밥그릇이며 찬그릇은 말할 것 없고 대야며 촛대며 아버지 재떨이에 이르기까지 놋쇠로 만든 유기류란 유기류는 다 닦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푸라기에 아궁이 재를 묻혀가며 그 많은 유기를 흡사 명경 알처럼 얼굴이 비치도록 닦으셨습니다. 막 닦은 놋그릇에 담은 그날밤 저녁밥 그릇엔 파르스름한 구리 성에가 끼던 게 생각납니다. 진종일 밖에서 자치기나 연놀이 같은 것으로 해를 보내다가 밥먹을 시각에야 집에 돌아온 저는 그 저녁밥이 그토록 맛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어머니의 증손주들은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만 노는 방안 퉁수가 됐습니다. 그러다가 피자나 치킨이란 것을 시켜 먹기도 하지요. 그래도 며느리나 그 녀석들이 귀여운 걸 보면 세상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인정은 그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별미를 만들면 이집 저집에 조금씩이라도 나눠먹는 배달 심부름을 하는 건 제몫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어머니 친구분들이 들려주는 칭찬이 듣기가 좋았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별미를 이웃과 나눠먹는 일도 드물지만 어쩌다가 들어오는 음식이 있더라도 잘 먹지 않습니다. 그냥 쓰레기 봉투에 담아 슬쩍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놋그릇 닦는 주분 아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놋그릇만도 아니지요. 명주옷을 빨래하고 손질하고 다리미질하는 일도, 이불 호청을 뜯어 빨아 풀먹이고 다시 꿰매는 일도 없습니다. 어머니를 도와 다리미질감 잡던 일이 생각납니다. 초저녁에 잠은 쏟아지는 데 물기 먹인 다리미질감은 딱 들러붙어 포개진 채 왜 그리도 좀처럼 줄지 않던 지 참 고역이었지요. 제가 그만 깜박 졸아 팽팽히 맞잡아야할 다리미질감이 갑자기 느슨해져 다리미 숯을 쏟기도 했지요. 때론 어머니가 졸아 제 손등을 다리미로 스쳐 데이면 황급히 간장을 발라주며 안쓰러워하기도 하셨습니다. 한번은 다리미질을 또 잡아야할 것 같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구 집으로 뺑소니 쳤던 적이 있었지요. 이튿날 아침 조바심 내며 집에 들어간 저에게 미소만 지어보인 어머니께서 혼자 밤이 깊도록 다 다리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나무라기 보다는 혼자 다리느라고 볼품이 덜나게 다려진 것을 걱정하셨지요. 아버지는 그래도 사랑채에서 친구분들과 밤새워 바둑만 두셨지요. 제가 나이 들수록이 돌아가신 아버님이 더욱 존경스럽지만 여자를 낮춰보시던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달갑지 않았던 기억은 잊혀지 지 않군요. 설도 이젠 예전같지 않습니다. 동네 어른들을 다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사돈네 팔촌까지 서로 찾곤했던 그런 설이 아닙니다. 바쁘기 때문이라고들 말합니다. 농사만을 짓던 예전에는 한 겨울이면 별로 하릴이 없어 설이면 서로 찾는 게 인륜사의 대사였지요. 굴뚝공장이 많아지면서 사람 살기가 달라지더니 이젠 꿈도 못꾸었던 컴퓨터 세상이 되면서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참 이상하대요. 문명이 발달하여 살기가 편해지면 시간이 남아돌 것 같은데 더 바쁘게 사는 것이 요즘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어머니의 증손주들 세상 땐 뭣이 나와 어떻게 달라질 지 또 모릅니다. 제가 철부지였을 적의 일로 떠오른 어머니 생각은 아주 아득한 옛날 이야기지만 저는 그런 어머니 모습을 그려보는 게 참 좋습니다. 그 무렵의 어머니들이 다 그랬었지요. 어머니 또한 한 집안의 며느리로 인종을 미덕으로 알고 무던히도 참으며 열심히 사셨습니다. 제가 거들어드릴 수 있는 일은 여름에는 돌확에 보리쌀 가는 일이고 설 땐 떡메 치는 일이 또 있었지요. 아버지는 사랑채에서만 줄곧 사시고 집안에 장정이 없다보니 힘이 부쳐 부대끼면서도 떡메를 칠 때는 그래도 신명났었지요. 이제는 시골에서도 떡메 치는 소릴 좀처럼 듣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머니, 세상 살이는 달라져도 자식에 대한 어버이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지금의 어머니들도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똑같이 그렇게 키운 줄은 모르고, 제 자식들에게 자기만 그런 것처럼 온 정성을 다 하니까요. 저처럼 나이가 더 들면 나중엔 알겠지요. 어머님의 며느리가 설은 다가오는 데 몸이 몹시 안좋습니다. 이러다 보니 올해 따라 이 세상에 안계신 어머니가 더 생각납니다. 아버지도 그립습니다. 일흔살 먹은 아들이 아흔이 넘은 어머니 앞에서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지요. 저도 좀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맘이 들어 어머니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노조천국’ ‘노조망국’

기아자동차(광주공장) 노조가 간부들의 취업장사로 언론 보도에서 보는 것 처럼 된통 걸렸다 하여 노조를 싸잡아 욕할 생각은 없다.(우량노조도 적잖다) 그러나 반성할 줄 모르는 노조는 유감이다. 기아차 노조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은 아직도 빳빳하다. ‘잘못이지만 노조 탄압의 이면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검찰조사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과도 미룬 채 자체조사란 것을 벌이는 모양이다.(이들의 생각은 다른데도 그러는 일종의 관행을 두고 왜 부풀리느냐는 게 불만인 것 같다) “청탁없이 투명한 절차에 따라 입사한 경우는 100% 없을 것이다. 언론이 기아차 문제만을 집중 부각, 성토하고 있지만 여타 대기업의 입사관행도 파헤쳐야 한다”(모 노조위원장) 놀라운 이야기다. 취직장사를 한 데가 노조든 기업이든 다른데도 있는 게 사실이면 다 파헤쳐야 하는 건 맞는 말이지만 드러난 죄상이 면책될 수는 없다. 지금의 귀족노조를 서울 평화시장 지하 봉재공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다 못해 분신으로 항거한 고 전태일씨가 보면 아마 통곡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발상기도, 투쟁기도 다 지났다. 노동운동의 성숙기다. 착취당하는 노조나 조합원은 없다.(투쟁기에 불가피했던)불법적 강성을 여전히 무기화하는 노동운동, 불법의 제재를 오히려 트집잡는 노동운동은 협박이다. 탄압이란 당치않다. 협력업체 선정 같은 이권에 개입하고 기술개발의 공개를 요구하고 인사나 순익관리에 관여하려 드는 노조는 이미 노조가 아니다.(노조와 기업의) 공동 경영은 성립이 될 수 없다. 기업(자본)이 없으면 노조(일자리)가 있을 수 없다. 외국자본이 국내 투자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노조에 있다.(국내자본이 외국에 공장을 세우는 것도 역시 노조 때문이다)외국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각인돼 있는 것이 국내 노조다. 예를 든다. 이번에 손학규 지사를 단장으로 한 경기도외자유치단이 유럽에서 가장 애를 먹은 것이 국내 노조에 대한 외국자본의 이런 부정적 시각이다. (“한국의 노조는 무섭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 “한국 노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익히 다 알고 있다”는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었을 정도다) 이런 가운데 영국 BOC사와 1억7천만 달러 규모의 산업용가스사업에 투자협약(MOA)을 맺는 등 독일·벨기에·스웨덴·프랑스 등 5개국 16개 업체에서 모두 4억6천900만 달러의 유치 실적을 올린 것은 노·사·정이 함께 가 국내 노조의 강성 이미지 탈피에 합심한 노력의 성과다. (사례:독일 보슈사측은 “한국 노조는 왜 외국기업을 두렵게 하는가, 한국 내 파트너사와의 관계를 끊는 것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이화수 한국노총경기도지역본부 의장에게 힐문했다. 이에 이 의장은 “강성노조가 과거엔 국내 기업조차 투자 저해 요인의 작용을 했던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달라지고 있다. 많은 노조가 이젠 일자리와 회사를 중시하고 있다”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왜 함께 안 갔는 지 궁금하다. 경기도가 초청을 안 했으면 협량하고 민주노총이 노·사·정 합심이 선명성 경쟁에 흠이 된다고 여겨 거부했으면 치졸하다. 노동운동의 위축을 원하는 게 아니다. 자본의 오만이 없도록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이 활성화해야 한다. 그러나 노조위원장이 회사 제공의 쏘렌토 승용차를 자가용으로 굴리고 개인 통장에 1억8천만원을 부정축재할 수 있는 군림형 노동운동은 식상했다.(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험한 구호를 외치며 주먹질 해대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 혐오감부터 갖는 것이 사회정서다) 왜 이렇게 됐는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파업을 하더라도 시민사회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파업을 해야 한다. 불법파업을 해놓고 억지 부리는 집단행동은 집단이기이 지 노동운동이 아니다.(경영권 침해나 정치적 집단행위 역시 노동운동의 한계 일탈이다) 연례행사로도 모자라 ‘춘투’다 뭐다 해가며 계절별로 경제사회를 괴롭히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구조적 비리의 취업장사가 들머리판 난 것을 쌤통이다 싶어 싸잡아 비난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제발 달라져야 한다는 게 사회적 여망이다. 상급단체나 대기업 노조나 공기업 노조는 물론이고 중소기업 노조도 개중엔 달라져야 할 노조가 있다. ‘노조천국’이 ‘노조망국’의 풍조가 되어선 공공사회를 해치는 사회적 죄악이다. 세상은 강성 노조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개혁독재의 ‘함정’

중국의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의 죽음이 제갈량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촉한나라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가진 위나라와의 일전 중 병사하면서 자신의 시신을 수레에 앉힌 채 위나라 군영에 진군하도록 유언했다. 위나라 사마의는 죽었다는 제갈량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는 또 무슨 계략인가 싶어 도망쳤다. 자오쯔양의 사망이 소요사태를 유발할 것을 우려한 중국 당국은 외국 신문의 관련기사는 도려낸 채 배달하고 있는 게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쫓아 냈다’는 고사를 방불케 한다. 자오쯔양이 두려운 것은 아직 살아있는 그의 합리주의 정신 때문이다. 제갈량 또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유연한 전법을 구사했다. 감성적 비합리성과 우연을 배제, 도리와 이성적 논리의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합리주의다. ‘노사모’ 출신 등 친노세력 주축의 국민참여연대가 정치 세력화를 공식 선언한 것은 정치적 자유이긴 하다. 그러나 다분히 감성적인 것은 심히 우려스런 대목이다. 노무현 주군을 옹위하는 충성 맹서는 마치 3김 시대의 가신정치가 되살아난 것 같다. “대통령에게 욕을 하는 동창과 친구들에게 왜 대통령에게 님 자를 붙여야 하며, 왜 대통령이 위대한 지 그 이유를 설득해야 한다” “우리에게 누굴 지지할 것 이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있을 뿐이다” “재야파나 다른 당내 커뮤니티들은 칼바람을 막아주는 노 대통령 덕분에 달릴 수 있는 무리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말 한 것으로 전해진 명계남 국참연 의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합리성을 일탈했다고 보아 이만 저만한 독선이 아니다. 국참연은 같은 개혁파인 유시민 중심의 참여정치연구회와도 선명성 경쟁을 내세워, 노 대통령의 적자임을 자임하며 참정연을 마치 서자 대하듯이 한다. 무엇보다 4·2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국참연이 당권 접수를 설정하고 나선 것은 당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공식 입장이 평당원인 점에서 주목된다.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겸하지 않는 당정 분리에도 리모컨 정치로 능히 당을 더 효율적으로 장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강경 개혁파에 의한 이부영 전 의장의 낙마가 이같은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전당대회 대의원 1만5천명 중 5천명을 확보하겠다는 기염은 뒷배가 없인 나오기 어려운 소리다. 청와대는 국참연의 이런 움직임에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일 이라며 선을 긋고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개혁에 변함없는 강한 사인을 이미 마운드에 보냈다. 지난 신년 기자회견을 가리켜 처음으로 험담없는 조용한 회견이라고들 말하는 것은 겉만 보아 하는 말이다. 개혁 법안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이의 반대를 가리켜 ‘기득권자’들이라며 목소리를 심히 높였다. 정치인 ‘노무현’은 변하지 않았다. 좀 달라진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전술적 변화일 뿐 전략적 변화가 아니다. 이에 사이클이 일치되는 것이 국참연의 강경일변도다. ‘벙시레 웃음’은 정치인으로서 강점이다. 정몽준이 이 웃음에 녹아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했다고 보는 관측이 있다.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예의 ‘벙시레 웃음’을 만발해 보였으나 머릿속 컴퓨터는 치밀하게 돌아갔을 것으로 본다. 궁금한 것은 혁명에 비유하는 개혁의 종국적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전 이기명 후원회장은 “개혁은 혁명보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고 다짐했다. 국참연의 무서운 응집력은 세를 확산할 수도 있으나 와해도 어렵지 않다. 논리적 필연성으로 해명될 수 없는 감성의 모순에 부딪히면 오성의 눈이 트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발견하고도 치닫는 것은 오기다. 집권 여당이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는 것이 나라 안팎으로 중차대한 이 시기에 합당한 것인 지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제갈량의 팔진도법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인정하며 공략하는 전법이다. 죽은 자오쯔양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부질없는 이념 논쟁의 시위는 자제할 것을 권고할 것이다. 상대는 모두 적이고, 협상은 굴복이고, 대화는 사치로 보는 일방주의가 세를 떨치고, 이 정권이 이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되면 개혁독재다. 이 또한 청산돼야 할 민주화 대상이다. 과거 개발독재하의 민주화운동을 간판 삼는 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임양은주필

목요칼럼/우군에 포위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은) 기업이 곧 나라”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기업을 위해 뭘 하나 한 것은 없다. “(4대 개혁입법에 대해)천천히 가자”고 했다. 이런데도 강경개혁파의 국회 농성 시위가 위세를 떨쳤다. 강경개혁파, 즉 매파는 경제따윈 거의 안중에 없다. 민생이 어렵다. 제일은행 등 주요기업의 IMF 급매물이 외국자본의 좋은 먹이가 돼 간다. 이래도 그들은 지금같은 세상에서는 어차피 그러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살기좋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다. 자나 깨나 개혁타령이다. 개혁이라는 좋은 단어를 식상케 만들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개혁은 혁명적 수준이다. ‘국민참여연대’ ‘참여정치연구회’ ‘노사모그룹’ 등으로 분류된다. “대통령 한 명만 바뀌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 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킨 주축 세력들이 모두 정치 일선에 나서기로 했다”고 했다. 친노그룹의 한 재야 거물이 그랬다. 여권의 4·2 전당대회 전초전이 이렇게 돌아간다. 매파들은 예컨대 당내 ‘안개모’(안정적개혁모임)같은 건 이단의 반동분자로 보고 있다.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 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얘기가 무엇을 함축한 것인 지는 알쏭달쏭 하지만 그렇다. 노 대통령인들 달랐겠느냐는 것이다. 그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대통령에 출마했고, 당선되고 나선 결심을 굳히고, 취임하고 나선 실험도 해 봤다. 지난 2년의 국정 갈등이 이에 연유한다. 사람따라 코드란 것을 형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기업 정서로 한동안은 기업인을 죄인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좀 변했다. (그 자신도 “재야시절의 노무현이 아니다”라고 했다) 청와대 밖에서 본 세상과 청와대 안에서 본 세상과의 시각 차이를 그는 발견하게 됐다. 2005년은 집권 3년차다. 대립각을 낮춘 뉴 데탕트, 경제 전념의 실용주의 노선 구상은 새로운 전환점이다. 그런데 이게 순탄치 않을 조짐이다. 그를 둘러싼 매파의 온건노선에 대한 강한 비판은 기실 대통령을 겨냥하는 화살이다.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를 고집하는 이른바 개혁지상주의 집단은 노 대통령을 가리켜 언젠가는 ‘변절자’라고 말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협상을 거부, 쟁취만을 추구하는 매파는 부단한 긴장관계를 투쟁의 본질로 삼는다. 이들의 눈엔 대통령의 긴장 완화가 배신으로 비칠 수가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특유의 지지층에 힘입어 당선됐고, 당선되고 나서도 대통령은 여의도 광장에서 “한 번 더 밀어 달라”고 했을 만큼 부동의 지지층을 기반으로 해 왔다. 이러한 기반이 무서운 부메랑이 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로니컬 한 현상이다. 정치에는 정말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숙적도 없다는 게 이래서 틀린 말이 아닌 지 알 수 없다. 요컨대 선택은 대통령의 몫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대통령은 이미 우군인 매파들에게 포위돼 있다는 사실이다. 긴장 완화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진군해도 그렇고, 긴장 촉구의 개혁주의 노선으로 회군해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매파의 반발에 포위되고 후자는 매파의 입김에 포위된다. 중요한 것은 집권 3년차라는 대목이다. 국정에 더 이상의 실험을 용납할 여유가 없다. 또 정권의 힘이 정점에 오르는 시기다. 노 대통령의 최종 평가가 올해의 향배에 따라 사실상 판가름 난다. 어차피 여당과 원내 판도는 재·보선 결과가 말해준다. 어쩌면 정치권의 재편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은 참으로 고민스런 시점에 서 있다. 정치적 동지를 무던히 챙기는 것은 정치인 ‘노무현’의 강점이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에게는 동지보단 국민을 챙겨야 할 책임이 더 막중하다. “기업이 곧 나라다”라고 했던 게 말에 그친 것을 올핸 실감나게 구현할 줄 알아야 한다. 중첩된 규제를 풀어 기업 환경의 활성화를 이룩해야 민생경제가 산다. 국민사회의 대다수는 4대 개혁입법 따위엔 관심이 없다. 긴장 완화의 실용주의 진군이냐, 긴장 촉구의 개혁주의 회군이냐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절충형 모색이냐)는 것은 대통령의 결심에 달렸다. 올 국정 운영의 연두 기자회견을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차돌에 바람 든 평양정권은?

북녘 변화에 몇가지 전망이 가능하다. 우선 평양정권의 몰락을 들 수 있다. 평양정권의 몰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몰락을 꼭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정권의 대체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 이의 배후엔 중국의 강력한 후견인 역할이 작용할 것이다. 시기는 김정일 정권 체제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손익계산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는 중국 지도부의 선택에 달렸다. 부시 미국 행정부의 대북 기본방침은 여전히 ‘악의 축’을 없애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도덕한 김정일 정권 같은 정권은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추방해야 한다는 부시의 당초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북핵문제는 그 한계선이고 6자 회담은 구실과 시간 벌기다. 북의 핵무기 완전포기선언이 나오지 않는 한 종국엔 경과조치로 내세우고 있는 평화적 해결의 ‘비둘기 카드’를 버릴 것이다. 이 경우 북녘 동포의 희생이 불가피하여 동의하기가 심히 어렵다. 또 미국의 대북 무력행사는 조·중방위조약에 의한 중국과의 충돌을 유발할 수 있어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조·러안보조약 또한 뇌관이다. 가장 바람직한 북녘은 통일에 앞서 그들이 잘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된다. 먼저 대량살상 무기 개발을 생존 수단화한 군비확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개혁 개방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미사일, 화학전, 핵 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 개발을 포기할 징후는 아직 없다. 다만 ‘우리식 사회주의’로 불리는 제한적 개혁을 옆길 게걸음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협동농장의 공동작업을 2~3가구로 세분하는 분조화 농업개혁은 단위 생산량 증가를 위한 새로운 개혁 사례로 꼽힌다. 이는 1978년 중국의 사회주의 농업개혁의 초기단계와 같은 것으로 사실상의 가족영농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농사를 잘 짓는 데 모든 역량을 총집중 총동원해야 한다’는 신년사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는 5월에는 구미 등지의 300여 기업체 유치를 목표로 하는 초대형 무역박람회를 연다. 합작투자를 모색하는 이의 제한적 개방 성격을 가리켜 북측은 ‘경제조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가피한 개혁 개방을 이처럼 제한적으로 고민스럽게 해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중국의 성공한 개혁 개방에 비하면 북녘은 토양적 조건이 다르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 사회체제 전환이 정치적 전략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북녘은 지금도 김일성주의의 유일 주체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주체사상이 폐쇄사회의 응집력에는 크게 기여했으나 개혁 개방에는 거추장스런 모순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여기에 북녘 동포의 중국 왕래, 남한에서 U턴한 탈북자 등의 틈새 바람은 차돌 같았던 경직사회에 균열을 일으켜 푸석돌이 되어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철의 권력승계가 3대로 이어질 공산은 매우 낮다. 후계자 문제 등을 둘러싼 평양정권 내부의 심상치 않은 정황이 여러 갈래로 관측된다. 2002년 7·1조치로 개인의 영리활동이 인정돼 시장이 형성되면서 나타난 빈부현상은 큰 사회적 혼란이 내제되고 있는 데도 통제되지 못 하고 있다. 한류바람도 세차다. 남쪽 드라마나 영화 테이프만도 100여 가지가 지하로 유통되면서 탤런트 송혜교가 젊은층의 스타로 뜨고 있다. 공안 당국은 가두 방송 등을 해가며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있지만 한류풍은 여전히 드세다. 남조선 머리모양, 남조선 옷가지며 화장품 등은 더 할 수 없는 인기 품목이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종말을 가져오게 한 단초가 미국의 청바지문화 유입이다. 북녘 인민은 자유의 맛, 부르주아의 맛을 보기 시작한 가운데 폐쇄사회의 통제력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붕괴되지 않는 길은 중국처럼 정치적 체제개혁을 수반하는 완전한 개혁 개방으로 나오는 것 뿐이다. 더는 합리화 시킬 수 없는 낡은 유물의 주체사상을 내 치야 하는데도 제 발목에 걸려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정권의 취약성과 군사적 위험성은 별개다. 저들은 세계에서 톱텐 안에 드는 군사강국이다. 신년사에서도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고 했다. 정 안 되어 이래도 저래도 망할 판이면 일전불사의 전쟁 도발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선군사상이다. 지도층은 도박을 건 승부에 패해 중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하면 그만이지만 한반도의 남북 동포는 피투성이가 된다. 이같은 불행을 막기 위해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평양정권을 상대하자니 무척 힘이 든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얼굴없는 ‘천사’ 얼굴있는 ‘얌체’

참 순박하다. 민초들이 이러하다. 세금 낼 것 다 내고 적십자 회비도 내면서 이웃돕기 성금을 또 낸다. 풍수해가 나거나 폭설 피해가 덮치면 또 성금을 낸다. 용천역 폭발사고 같은 북녘 참사에도 성금을 내는 어진 민초들이다. 그런 일에 쓰라고 내는 것이 세금이고 적십자 회비다. 그런데도 모금을 하면 차마 외면할 줄을 모른다. 올 세밑 구세군 자선냄비 역시 온정이 넘쳤다. 약 25억5천만원이 쌓여 지난해 보다 8%를 웃돈 것은 더욱 괄목할만 하다. 이 경기 불황에 아우성이 높다. 그래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하는 티없는 마음씨가 이처럼 큰 강을 이루었다. 세상은 각박하지마는 않은 것 같다. ‘얼굴없는 천사’라는 제목으로 익명의 독지가들이 이 신문 저 신문에 보도됐다. 전국 곳곳의 자선냄비에 크고 작은 뭉칫돈이 입맞춤 했다. 안양역 광장의 자선냄비에서도 현찰을 100만원씩 담은 흰봉투 10개가 나왔다. 자선냄비만이 아니다. 전주에서는 쇼핑백에 담긴 현금과 돼지저금통을 동사무소에 건네고, 서울에선 100만원짜리 수표 10장을 아름다운재단에 내고 말없이 사라진 이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누구냐고 묻는 말에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신문에 안 난 이같은 숨은 이들이 아마 또 있을 것이다. ‘얼굴없는 천사’는 비단 거액 기부자들만은 아니다. 동전 몇 개를 냈어도 생색낼 줄 모르는 사람은 모두가 ‘얼굴없는 천사’들이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찾아가 라면상자 같은 것을 쌓아놓고 그 앞에서 사진 찍길 좋아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사진 찍으려고 기부하는 사람들이다. 선거직 출마 예정자에 대한 단속이 있다보니 이나마 생색내기 기부도 발길이 끊겼다. 기업체의 기부행위도 있다. 경영이 어려운 판에 참 고마운 일이지만 기부한만큼 세금 혜택이 돌아간다. ‘얼굴없는 천사’들은 사진이나 세금과는 거리가 멀다. 거리가 멀다기 보다는 전혀 아무 관계가 없다. 남을 돕는다는 것, 그것은 마음의 여유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하지 못하는 게 베풂이다.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것, 이것이 열린 가슴을 지닌 자선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지난번 자선냄비에 동전 한 닢을 넣지 않았다. 부끄럽다면 부끄럽지만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이래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렇다고 ‘얼굴있는 얌체’도 못 된다. 사회복지시설 관계자들을 만나면 으레 선심수표를 떼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곧 쌀 한가마 보내주겠다”고 한다. 심지어는 “어디 어디를 통해 쌀을 보냈는 데 받았느냐”고도 한다. 선심은 말 뿐이지 부도수표다.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 중에 이런 위인이 많다. 그것도 꼭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골라가며 해 댄다. 곁에서 듣는 사람들은 쌀을 보내겠다면 나중에 말대로 보낸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아무개가 쌀을 준다고 해 놓고 안 주었다고 광고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영락없이 받은 모양새가 되고 만다. 이도 한 번이 아니고 말 뿐인 선심수표가 겹치면 그 사람은 꽤나 도움을 주는 것으로 듣는 이들에겐 인식된다. 세상에는 이런 별난 얌체들이 또 있다. 정말로 도와주는 독지가는 남 모르게 도와주곤 한다. 하늘이 맑아 아무리 햇빛이 고루 비춰도 응달은 있다. 하물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요즘같은 불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은 어려워 남의 도움을 받을 지라도, 장차는 남을 넉넉히 도와줄 수 있는 미래가 없다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람의 삶, 곧 인생이다. 합당한 얘기가 될진 모르겠으나 예를 들어본다. 유방을 도와 항우를 멸한 대장군 한신은 젊었을 적에 빨래품 파는 아낙네들로부터 한동안 밥을 얻어 끼니를 때웠다. 공자가 뜻을 이루지 못해 천하주유를 하다가 정나라에 갔을 때다. 사람들이 “용모는 요임금을 닮았지만 몰골은 초상집 개와 같다”고 했다. 공자는 웃으며 “용모는 맞지 않지만 몰골이 초상집 개라 함은 맞다”고 했다. 지구의 축을 뒤틀며 일으킨 미증유의 지진 해일로 동남아시아 여러나라 해변이 쑥대밭이 되면서 수만명이 숨졌다. 죽은 사람에겐 애도를 표할 일이지만 산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나마 그래도 산다. 바닷물 지옥이 된 폐허에도 희망은 핀다. 사람인자(字) ‘人’은 서로 기댄 형상이다. 어려울 때나 어렵지 않을 때나 서로가 더불어 사는 게 사람살이다. ‘얼굴없는 천사’들이 ‘얼굴있는 얌체’가 있으므로 하여 그래서 마음속에 더욱 크게 돋보인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권세의 수명

시위를 떠난 화살, 이를 두고 동서양의 개념이 다른 두가지 예가 있다. 명주 천도 뚫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강한 활의 쇠뇌도 점차 힘이 떨어져 종내엔 지금의 산동성인 노나라 명물의 명주 천도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나라 경제때 흉노의 화친 제의를 일축하는 척화파를 한장유라는 사람이 설득하면서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에선 ‘강노말불능천로호’(强弩末不能穿魯縞)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대 아테네의 궤변학파는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날아가는 것 같지만 날지 않는다고 했다. 날아가는 화살의 시간대를 무한대로 나눠 구분하면 어느 순간 머문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한장유는 동적(動的) 정(靜)으로 본 관점이고 궤변학파는 정적(靜的) 동(動)으로 본 관점이다. 그러나 궤변학파의 논리는 역시 시공(時空)의 모순을 지닌 곡론인 반면에 ‘강노말불능천로호’ 논리는 시공이 수용된 정론이다. 권세도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어쩌면 생로병사를 타고난 인간의 숙명처럼 권세의 한마당 과정 역시 생로병사가 불가피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지만 십년도 아닌 반십년이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끝은 더욱 가혹하지만, 설령 재창출에 성공했다 하여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새로운 집권자는 언제나 새로운 자신의 무대를 연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간 권세의 무대에서 많은 주연·조연·단역의 권문세도가들이 명멸해 갔다. 권세가 화근이 되어 재앙을 겪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이 정권은 이것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오래 갈망하였으므로 오래 권세를 누릴 것으로 애써 착각하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세월은 정권따라 속도가 조절되는 게 아니다. ‘태산명동서일필’이라지만 쥐 한마리는 커녕 뭐하나 해놓은 게 없다. 새해 들어 불과 두 달 넘기면 집권 2년을 가득히 채운다. 무성한 것은 말 뿐이고 넘치는 것은 국민사회의 분열 뿐이다. 지난 3월 집권한 사파테로 스페인 사회노동당 당수가 부럽다. 40대의 이 스페인 총리는 현란한 말잔치나 구호따윈 모른다. ‘제3의 길’ 노선을 조용한 가운데 열정적으로 가고 있다. 우파나 지역의 목소리를 듣는 척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내 시책에 반영하곤 한다. 실용적 중도 좌파의 면모로 국민적 인기를 받고 있다. 고촉동(吳作棟) 싱가포르 총리는 “젊은이들이 출세와 돈과 근사한 집밖에 몰라 나라밖의 도전에는 너무 무지하다”며 젊은이들을 질타했다. 이 정권은 편가르기 출세주의를 충동질한다. 젊은이들은 절망의 나락에서 발버둥친다. 사회는 아우성이다. 우물안 개구리 같은 나라가 되어 간다. 대통령이 바깥 나들이에서 환대를 받았다하여 열린 나라가 되는 건 아니다. 이웃 나라, 다른 나라는 다 호황을 누린다. 유독 우리만이 경제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나라를 우물안 개구리 꼴로 만들기 때문이다. 1968년 10월22일 멕시코올림픽경기장의 높이 뛰기에서 경이적인 스포츠 개혁이 일어났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다리를 치올려 바를 넘는 정면도 아니면 배 안쪽으로 넘는 복면도를 구사했다. 그러나 포스베리는 등 쪽으로 바를 넘는 배면도를 시도했다. 마침내 2m18㎝를 넘어 종전 기록을 6㎝나 경신하면서 미국에 금메달을 안겨 주었다. 정면도나 복면도보다 몸의 무게 중심을 효과적으로 들어 올리는 배면도는 오늘날 높이뛰기의 교과서가 됐다. 이것이 개혁이다. 이런데도 개혁을 만능 상품화하는 이 정권은 살아갈 일보단 지나간 일에만 더 집착한다. 근래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안희정씨를 청와대로 몇차례 부르는 등 밀실 접촉을 갖더니 예의 가신들 회동이 잦아진 모양이다. 가신정치는 정면도나 복면도처럼 청산돼야할 묵은 게임 방식이다. 개혁세력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되레 반개혁적인 게 많다. 자신에겐 개혁으로부터 관대하고 남에게만 가혹하게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반개혁이다. 이 정권의 권문세도가들은 이렇게 여기는 것 같다. 시위를 떠난 권세의 소멸을 생각지 않기 위해 권세의 화살이 궤변학파들 곡론처럼 날지않고 머무르는 것으로 믿고싶은 지 모른다. 그러나 서슬이 시퍼런 권력의 위세도 종국엔 엷은 명주 천 하나를 뚫지 못할 때가 온다. 권력을 책임으로 알고 행사한 사람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 홀가분하게 여겨진다. 권력을 특권으로 알고 휘저은 사람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 두렵게 여겨진다. 반십년의 권세를 믿고 설치다가는 나중에 다치는 전례를 또 겪을 수 있다. /임양은주필

목요칼럼/‘악어의 눈물’

기막힌 일이다. 서울 삼남매 소사 사건 말이다. 경찰관 아빠는 야간근무를 하고 엄마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나갔다. 그틈에 몹쓸 불이나 올망졸망하게 나란히 누워자던 어린 아이들이 비명에 숨졌다. 날벼락도 유분수 지 부모에게 이보다 더한 참혹함은 있을 수 없다. “엄마를 용서하지 마라!” “얼마나 뜨거웠니…”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가슴에 대못이 박힌 엄마는 아이들의 관을 움켜쥐고 통곡했다. 운구하는 경찰 기동대원들도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고 신문보도는 전했다. 정부 기관 앞에서 소복 차림의 침묵 시위가 있었다. 몸파는 여성들이다. 매매춘 단속으로 생업을 잃은데 대한 항의다. “내년 1년이면 병든 부모님 모시고 자그마한 가게를 열 수 있었는 데 그만 이렇게 됐다”는 한 소복 여인의 한숨 소리가 깊었다. 성매매가 생업일 수 있느냐는 시비는 그녀에겐 새삼스런 얘기인 것 같다. 타이탄 트럭 행상을 하는 40대 남자는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는 것이 내년의 최대 목표다. 지긋지긋한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장사를 다 해 봤지만 먹고 살기가 바빴다. 소쿠리마다 소복이 담은 감귤 진열앞엔 ‘1000원’이라고 쓰인 팻말이 놓였다. 그렇게 팔아서 언제 빚을 다 갚을진 모르지만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는다. 그런 위안마저 없으면 마음이 허전하여 당장 배겨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의 가년스런 삶은 이밖에도 숱하다. 저마다 벅찬 고비에서 좌절하거나 넘겨도 어렵게 넘기곤 한다. 큰 일이다. 경제는 내년에도 어렵다고들 모두 말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국책연구기관이다. 이런 KDI가 내년 성장률을 3%대 후반에 머물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형 뉴딜인가 뭔가를 4조~5조원 쏟아 부으면 잘 해야 4% 선을 턱걸이 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성장률을 5%로 잡아 무난할 것으로 보는 것은 이 정부 뿐이다. 성장률 5% 비관론은 여러 민간 연구기관에서도 이미 진단된 분석이다. 성장률이 1% 포인트 떨어지면 약 10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진다. 정부가 내년에 내거는 40만개의 일자리 창출 다짐도 허풍일 공산이 높다. 보나마나 목표치 달성에 공공근로나 날품 같은 수치를 마구 꿰어 맞출 것이 거의 분명하다. 무엇보다 제조업이 늘어야 고용이 창출되고 정액소득자가 증가되는 데 도산의 도미노 현상을 맞고 있는 것이 제조업이다. 이 정권의 반기업 정서는 대기업만이 아니고 중소기업까지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개성공단에서 첫 제품으로 냄비 세트가 생산되어 기념식을 가졌다며 야단이다. 물론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인력과 토지가 합작된 남북협력사업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그러나 내코가 석자나 빠진 서민 대중들은 그같은 소리가 남의 일로만 들린다. 임시국회 공전을 두고 여야가 으르렁거린다.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는 정통민주세력을 자임하며 냉전수구 세력을 대표하는 한나라당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리는 대회전을 벌이겠다고 야단이다.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단독국회 획책은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쿠데타적 발상이라며 금기선을 넘으면 감당못할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한나라당도 잘한 건 없지만 열린우리당의 잘못이 더 크다. 왜냐하면 상생의 정국을 주도할 책임은 어느 정권이든 언제나 집권 여당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귤 한 소쿠리에 1000원을 받고 팔기가 더 급한 서민 대중들은 그같은 정치판 얘기 역시 귀에 들리지 않는다. ‘악어의 눈물’이란 게 있다. 이집트 전설이다. 나일강의 악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먹이를 유혹하고 먹이를 잡아 먹으면서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거짓 눈물인 것이다. 교활한 위선으로 비유한 것이 ‘악어의 눈물’이다. 민생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마다 ‘악어의 눈물’을 연상케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내년엔 또 어떻게 살 것인가 걱정이 태산이다. 당장 어려운 것도 걱정이지만 정작 삶의 햇빛이 비치지 않는 게 더 큰 걱정이다. “엄마를 용서하지 말라!”는 기막힌 울부짖음을 이 시대의 권문세도가들은 듣기나 했는 지 잘 모르겠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수능시험 필요한가

“대학을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도록 하겠다”고 했다. DJ 말이다.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그랬다. 평택문예회관인가에서 가진 ‘평택시민과의 대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두가지를 약속했다. 그린벨트 완화와 대학입시 개선이다. 영국서 그린벨트가 중요시된 게 국토에 평야가 많은 것과는 달리 한국에는 산이 많으므로 그린벨트의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나서 그린벨트를 대폭 해제하여 후대 자원으로 수십년 지켜온 개발제한지역을 당대에 형해화해 버렸다. 그러나 대학졸업의 국가시험제 공약은 끝내 불발됐다. 대학 수능시험을 폐지, 입시를 대학 자율에 맡기는 대신 졸업자격을 국가시험제로 하여 대학가에 면학풍토를 조성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시민과의 대화 현장에서 이 말을 들으면서 마땅치 않게 여긴 그린벨트 완화는 이루어지고, 전부터 여겨온 평소의 생각과 신통하게 일치했던 대학졸업 국가시험제는 말도 끄집어내지 못한 채 그는 임기를 마쳤다. 남녘 광주발 수능시험 부정 사건이 16개 시·도의 전국적 범죄로 번지면서 한국 교육이 휘청거린다. 휴대전화 커닝, 대리시험 등은 이미 고질화된 구조적 비리로 밝혀졌다. 수백명이 형사문제화하거나 무효처리되고도 수능시험은 여전히 강진의 진앙 속에 묻혀 있다. 경찰은 2만건의 문자메시지 내용을 분석하는 가운데 1천600여명의 의심자를 밝혀냈다. 총체적 결함을 지닌 수능시험은 권위와 신뢰를 잃어 얼마나 승복력을 가질 것인 지 심히 의심된다. 문제는 앞으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나선다지만 도시 미덥지 않다. 크게는 열다섯번, 작게는 스무번도 넘게 고친 정부 관리의 대학입시제 자체도 아직 문제점 투성이다. 여기에 커닝과 대리시험으로 치명상을 입고 있는 내우외환의 수능시험을 더 고집하는 게 과연 옳은가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 개혁피로의 증후군이 쏟아질 정도로 개혁을 입버릇 삼는 이 정권이 유독 대학입시제만은 개혁을 말하지 않는 데는 큰 착각에 기인한다. 평등과 능력을 혼돈하고 있다. 평등은 인권차원의 인식이며 능력은 인격차원의 관념이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만 인격은 천차만별이다. 천차만별의 인격적 가변능력을 불변가치인 인권적 평등의 잣대로 묶는 것이야 말로 실로 잔학스런 불평등이다. 학력(學歷)은 높으면서 학력(學力)은 낮은 오늘날의 하향 평준화의 개탄이 이에 연유한다. 국내사회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경쟁이 날로 심화하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경쟁을 경험할 학생에 대한 학교 교육이 무경쟁을 지표로 삼는 게 학생을 위한다 할 순 없다. 공부않고는 실력자가 있을 수 없고 실력없인 인재 또한 있을 수 없다. 지식산업의 경쟁력 확보는 인재 배양이 관건이다. 인재가 국가사회를 먹여 살리는 시대상은 앞으로 더욱 가열될 것이므로 지식산업의 경쟁력은 생명이다. 물론 전인교육엔 지적교육을 겸하는 인성교육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성교육은 윤리교과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성교육은 교사의 품성이 곧 또하나의 교과서다. 존경받는 교사가 많으면 그것이 바로 학생의 인성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만, 존경받지 못한 교사가 많으면 학생의 인성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예컨대 툭하면 교단을 등지고 길거리로 나서기가 일쑤인 교사들로부터 학생들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지 매우 궁금하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된 루소의 자연주의는 인간의 능력에 의한 기회 균등이 본질이다. 맹목적 평등으로 개성을 유린하는 것을 거부한다. 페스탈로치의 인간학교는 능력의 자발적 활동을 통한 조화를 강조한다. 듀이는 지식교육 속의 인성교육, 인성교육 속에 지식교육이 있음을 설파했다. 해마다 수능시험을 치르는 난리를 벌이면서도 연례행사가 되는 말썽은 정부가 수능시험을 포기하지 않는한 계속될 것이다. 사교육비 문제는 어차피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는 터에 대학 자율에 맡기는 것이 좋다. 정부가 대학이 못미더워 시험을 치를 요량이면 입학보다 졸업자격을 관장하는 것이 국가사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분도설의 음모, 그들은 누군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산인가, 허성관 장관의 행자부 처사가 괴이하다. 경기북부의 접경지역지원사업은 이미 시작됐다. 우선 착수된 게 81건에 175억원 규모다. 물론 이걸로는 턱도 없다. 더 많이 해야 한다. 한데, 행자부가 더 도와주기는 커녕 시비를 걸고 나섰다. 접경지역은 국가 안보의 요충이다. 접경지역지원사업은 정부의 당연한 의무다. 이런 데도 굳이 현지 평가를 하겠다고 뜬금없는 말을 한다. 좋다. 현지 평가가 나쁠 건 없다. 정부의 예산 지원을 삭감하고자 하는 구실 찾기의 억지가 문제다. 허 장관은 경기도 분도추진은 할만 하다며 훈수한 사람이다. 이해찬 국무총리도 그랬다. 문희상씨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그만두기가 바쁘게 경기도 분도 얘기를 꺼낸 건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른바 분도설은 이런 배경과 훈수꾼들의 잇따른 애드벌룬 속에서 진행됐고 또 되고 있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다. 그렇다고 그들 뜻대로 될지는 의문이지만, 수도권에 여권이 갖지 못한 광역단체장 자리 하나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분도 추진의 정치적 음모다. 하긴, 수도 이전까지 획책한 사람들이 뭘 못할까 마는 당치 않다. 분도가 부당한 이유는 이모 저모로 이미 수차 밝혔고 또 모르고 어거지 구실을 내세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상대할 필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여튼 경기도청에서도 분도를 반대하니까, 그럼 어디 맛좀 봐라는 식으로 북부 주민을 위한 접경지역지원사업 마저 볼모로 삼는 것은 해도 너무 한다. 북부 주민을 위한다는 그들 말이 얼마나 허구인 지를 드러낸다. 이만이 아니다. 이 정권이 하도 정치를 잘해서 기업이고 장사고 뭐고 제대로 되는 게 없는 민생고로 인해 세금이 잘 걷히지 않아 자치단체 재정이 몹시 어렵다. 경기도 역시 재정이 좋지않아 국비지원이 절실한 마당에 주던 국비도 깎아내어 보조금 살리기가 한창이다. 이런 데도 명색이 정권의 실세라는 북부출신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은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지역사회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다. 분도하면 북부지역 주민들을 마치 꽃방석에 올려놓을 것처럼 무책임하게 떠드는 걸 보면 정말 다른 지역사회가 하는 게 부럽다. 예컨대 대구·경북은 1981년 갈라진 후 양측 모두 경쟁력이 떨어져 공멸하고 있다면서 ‘경기북도 분도추진위’와는 반대로 ‘대구시·경상북도 통합추진위’ 구성이 추진되고 있다. 이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 82%가 이에 찬성하는 가운데 조해녕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지사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으로 들린다. 대구·경북이 통합하면 지역총생산이 67조원에 이르러 서울과 경기에 이어 3위로 도약할 것으로 보는 공조공생론이 크게 탄력받고 있다. 통합론은 광주시와 전라남도 등지에서도 거론되고 있다. 이런 판에 유독 경기도만이 거꾸로 분단되면 남·북도 모두 2위는 커녕 대국 망하고 소국 망하는 꼴이 될 게 뻔하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무조건 충성과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열린우리당 노사파(盧思派)는 대통령은 물론이고 이해찬 국무총리의 뜻을 거스른 행위는 개혁을 반대하는 반개혁 세력으로 치부하는 모양이다. 개혁이 혼미해져 도대체 개혁의 실체가 무엇인 지 잘 알 수 없으나 경기도 분도 역시 개혁의 이름으로 이같은 기류와 접목한다면 기전사회 고유의 정서에 대한 반역이다. 예컨대 전래의 경기민요는 사설이 정돈되고 기교적이면서 하나의 아류를 이뤄 두 아류로 나뉠 수 없는 게 특성이다. 경기도의 남북 분단을 반대하는 것은 갈라지면 서로 불구가 되기 때문이다. 장차 통일 한반도의 중핵으로 북부지역이 각광받기 위해서도 경쟁력 있는 경기도로 함께 가야 한다. 분도론자들이 진정 북부지역을 위한다면 공연한 불화를 일으켜 부채질 하기 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해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하늘을 우러러 성찰하여야 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盧 정권의 對美觀?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 청와대서 갖는 각 정당 대표 및 3부 요인 초청 남미 순방외교 설명회는 솔직히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특히 ‘북 핵무기 주장에 일리 있다’는 로스앤젤레스 연설과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산티아고에서 가진 한·미 두 나라 정상회담의 배경 설명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이 귀국길에 있었던 호놀룰루 동포 간담회에서 없지 않았으나 그같은 원론적 얘기를 듣자는 게 아니다. 또 노·부시 회담에서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이 쟁점화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그래서 대통령이 외교안보팀에 한턱 내겠다는 그런 자화자찬의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다. 한·미 간에 이견이 정말 없는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의 실체가 무엇인가, 로스앤젤레스 연설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포석인가 뭔가를 밝혀 국민적 이해를 구하는 진솔한 자리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한·미관계에 큰 걱정이 없다’는 말이 이 정권들어 잦은 것은 바로 이상 징후가 있다는 반어이기 때문이다. 한·미관계의 겉과 속이 달라 혼란스럽다는 것은 최근 미국의 전략문제 전문가들 역시 시인한 일이다.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은 노무현 정부의 언행이 다르다며 한마디로 불신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연설 역시 그들은 평가절하 한다. 연설 내용은 부시에 대한 촉구인 데도 그렇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 주한 미국의 한 고위 인사는 “흥분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의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의견을 내겠다”는 미 국무성의 시큰둥한 반응이 나온 것은 그 이튿날이다. 같은 날 “북한이 외화를 얻기 위해 무기급 플루토늄을 테러 집단에 팔 수도 있으며 이는 전 세계적 재앙”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다. 부시의 공식 외교채널이 이처럼 노 대통령의 연설을 외면한 가운데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란 것을 묵인한 건 일종의 암수다. 그렇다면 한번 해보라는 의미다. ‘동의한다’는 것은 북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시도를 말하는 것이지 ‘북의 핵 보유에 일리가 있다’는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한·미관계의 미봉책이 유효기간을 오래 갖는 것은 아니다. 부시의 숨고르기가 끝날 때까지 북을 설득하는 노 대통령의 주도적 역할이 미흡하게 되면 부시는 드디어 북을 제재하는 압박수단의 구실로 삼을 공산이 높다. 미국에 할 말을 하는 대미외교가 정작 부시를 만난 자리에선 말을 안하는 게 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대놓고 한국전쟁의 책임을 따졌고, 박정희는 카터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해서 남한내 미군철수의 대선 공약을 백지화 시켰다. 이 정권은 뭐가 좌파냐고 말하지만 미국의 시각은 좌파로 보고 있다. 한·미 동맹이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이래서 난다. 한·미 관계에 또 하나 걱정되는 것은 미군 용산기지 평택 이전이다.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인 지 의심스럽다. 정부가 성의를 다 한다고 보기 어려운 징후가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연유의 의도가 무엇인 지를 판단하기가 심히 두렵다.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배알이 없어 미국 대선에 부시를 지지하고 나선 건 아니다.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다. 반미나 친미 따위의 공허한 개념을 떠난 용미의 실리주의인 것이다. 우리라고 배알이 뒤틀린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반미나 친미정서로 결부시키는 것은 무위하다. 한·미 동맹은 반미의 좌파 이념이나 친미의 맹종이 아닌 용미차원의 국익을 위해 추구돼야 한다. 주한 미국의 그 고위 인사는 한·미 관계의 전환기에 수평적 정립을 위한 상호노력을 강조한 끝에 이런 말을 했다. “한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미국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다. 한·미 관계가 정상이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미국이 속 쓰려도 한반도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이 있은 후였다. 부끄럽지만 안보나 경제 등의 대미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게 현실이다. 자동차 대미 수출만 압박받아도 수만·수십만명의 실업자가 쏟아진다. 허장성세나 공연한 배알에 치우치기 보다는 시급히 국력을 키워야 한다. 대통령의 대미관은 이러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하다. /임양은주필

목요칼럼/객기인가? 경륜인가?

다 좋다. “대북 봉쇄정책은 불안과 위협을 장기화 할 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무력행사는 협상전략으로서의 유용성이 제약받을 수 밖에 없다”고도 했다. 무력행사 부정, 대북봉쇄 배제를 부시에게 촉구한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연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것이 미국에게 할 말은 한다는 당당한 대미외교용이든, 모험을 건 국제게임용이든, 지지층 결집을 위한 국내 정치용이든 간에 다 좋다. 그러나 이 말은 실언이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일반적으로 북한의 말을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고 한 끝대목은 잘못이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합리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가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을 고쳤다. 대북 비호의 의지를 가늠케 하는 촌극이다. 만일의 경우 예상할 수 있는 미국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동포를 보호하는 것이 잘못이란 건 아니다. 남이든 북이든 한반도 전역이든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알아야할 게 있다. 대통령은 부시에게 강력한 김정일의 대변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북으로부터 무엇을 보장받았느냐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투명성을 위해 공개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공개해야 하지만 일을 위해서 당분간 비밀에 부치겠다면 이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 대신 김정일로부터 아무 보장받은 것 없이 남북정상회담이나 바라는 짝사랑 끝에 한 말이라면 공연한 객기다. 북이 생존 수단으로 삼는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밥상을 차려 대겠으니 먼저 6자회담에 성의있게 나오라는 미국과 그 밥상부터 먼저 보자는 북과의 대치에서 제 역할을 다 해야 하는 것이 노 대통령이다. 이것이 바로 남북 공존공영이고 한·미동맹 관계의 유지인 것이다. 부시 코 앞에서 가진 비위 건들기 로스앤젤레스 연설이 과연 이에 얼마나 합치되는 지가 의문이다. 의문은 또 있다.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제는 북한이 개혁과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관심”이라고 말했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북이 개방·개혁에 나서면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에 긴장이 있을 이유가 없다. 한반도는 그 자체가 곧 평화다. 이런 데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주체사상-수령론-혈통승계-우리식사회주의가 연계고리를 이루는 북의 체제는 개방·개혁이 바로 체제 붕괴다. 김정일이 중국에서 상하이 쇼크를 받은 지가 이태가 넘는다. 그 자신도 개방·개혁을 절실히 느꼈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 우리식만을 계속 고집한다. 인민들은 배고파도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탈북자가 늘어도 국제사회의 창피를 모른 채 외면하는 연유 또한 이에 있다. 주체사상이 오늘의 체제유지를 가져오는 덴 성공했지만, 인권유린과 기아선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승자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평양정권의 고민이다. 북이 이런 실정에서 과연 대통령 말대로 개혁과 시장경제를 할 것인지는 역시 미지수다. 만약 이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면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희망사항이라면 대통령다운 경륜이 아니다. 부시는 아직 아무 말이 없다. 백악관과 국무성도 그 흔한 대변인 논평조차 없다. 부시 흔들기에 앞서 한·미 두나라 정부 간에 어느 정도의 물밑 교감이 있었는 지 없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조용하다. 이러한 조용함이 긍정인 지 부정인 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거의 분명한 것은 기존의 대북관계 틀에서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부시는 재선으로 자신의 방법에 더욱 자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날 노무현·부시회담이 주목된다. /임양은주필

목요칼럼/‘행정특별시’는 또 뭔가?

대통령이 그냥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결정이 난지 얼마 안 되어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던 ‘행정특별시’란 게 본격적으로 가열되고 있다. 위헌결정이 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세워두었던 대안의 계획일 수 있다. 다만 발표를 12월 중순으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약간의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업어치나 메어치나 결과는 같다. 신행정수도나 행정특별시나 그게 그것이다. 청와대와 외교안보부처 그리고 국회와 사법부 수뇌는 서울에 그대로 둔다지만 이게 눈감고 아웅하는 격이다. ‘나머지는 옮길 수 있는 건 다 옮긴다’는 게 이미 정리된 청와대 내부 방침이다. 이렇게 해서 옮기는 정부 기관이 15부4처3청을 비롯하여 60여 개나 된다. 이만이 아니다. 제2청와댄가 청와대분손가도 만들고 미처 못옮긴 기관은 다음에 마저 다 옮길 요량으로 부지를 비워둔다는 것이다. 지금의 서울은 수도 개념에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 요건만 남기는 게 이른바 대통령이 밝힌 바 있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저촉되지 않는 대안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꼼수는 누가 봐도 사실상 신행정수도와 다름이 없는 편법논리다. 위헌결정의 취의에도 어긋난다. 여권은 행정특별시를 고집하는 이유로 충청권 민심 수습을 들면서 야권도 충청표를 의식해 드러내 놓고 반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특정지역을 의식한 구태 정치가 가져온 망국적 지역감정을 명색이 개혁을 한다는 이 정권이 한술 더 떠 즐기고 있다. 이러면서 수도권 달래기로 수도권 규제완화 등 재정비 계획도 함께 포함할 것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가관이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되는 저잣판의 흥정거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걸핏하면 수도권이기주의를 말한다. “지방의 지역이기주의와 수도권의 지역이기주의는 다르게 봐야 한다”면서 수도권이 지역이기주의를 앞세우면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된다고도 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상호 보완 관계를 도외시한 그같은 대립각은 정말 위험한 시각이다. 수도권의 지역이기주의가 지방의 지역이기주의를 침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 대학 설립이나 입시정원 배정에 불이익을 받는 등 예를 들자면 얼마든지 있다. 수도권의 국제경쟁력을 국가적 안목으로 확보하면서 발전 이익을 타지역과 공유하려는 것을 수도권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건 국익을 외면한 정치공세다. 수도권 비대는 행정수요만 가중하므로 바라는 일이 아닌 데도, 중앙정부가 신도시다 대단위택지개발이다 하여 인구 과밀을 유발해 놓고 이를 트집잡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신행정수도 형태의 행정특별시를 또 고집하는 이유를 이 정권은 예의 지방균형발전을 들먹인다. 생각해 보자, 행정특별시 또한 천문학적 국민부담만 가져올 뿐 정작 전국의 균형발전을 가져올 근거는 발견할 수 없다. 참다운 지방균형발전은 그런 물리적 개념에 있지 않다. 기능적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권능을 지방정부에 대폭 이관하는 것이 제대로 된 지방균형발전의 동력이다. 이 정권의 지방분권론은 허구다. 그동안 2년이 가깝도록 뭐하나 지방에 제대로 넘겨준 게 없다. 예컨대 국토이용계획은 개요만 중앙정부가 설정하고 집행계획은 지방정부 책임으로 넘겨야 한다. 신도시 조성 같은 것을 지방정부 협의없이 중앙정부 멋대로 하는 게 지방분권인 건 아니다. 중앙집권의 배급관념으로 여기는 지방균형발전론은 허상이다. 국가경영의 상위 골격을 제외한 중·하위 권능은 모두 지방에 넘겨 지방정부간에 지역 특성의 창의적 공익 경쟁을 유발케 하는 것이 제대로 가는 지방균형발전이다. 행정특별시와 지방균형발전은 이처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정권의 청개구리 취향은 행정특별시란 괴물을 우길 게 틀림이 없다. 물론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므로 이도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국회에서 통과될 지 잘 모르겠지만, 통과되어도 국민투표에 부치는 단서가 붙지 않으면 또 헌법소원이 제기될 공산이 많다. 대통령이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을 거부한다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재량권 일탈의 권한 남용이라는 지적을 또 들을 수 있다. 선량한 충청인들을 한 번도 아니고 이번엔 행정특별시란 작명소 같은 이름 짓기로 두 번이나 속인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충청도 민심을 헤아리고자 하면 미흡해도 다른 차선책을 강구하는 것이 정직한 자세다. 노무현 정권 내내 되지않는 대선 선심의 일로 국력을 낭비할 것만 같아 심히 걱정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대통령의 말, 말

‘노무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한 실수나 무식, 생각의 모자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의도적 수단이다.’(정윤재 정신문화연구원 교수·2003년 3월 ‘대통령과 한국의 정치문화’ 논문) 이 말대로라면 실수하거나 무식하고 생각이 못 미친 게 아니고 일부러 그런 투로 말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뉘앙스가 듣기 좋을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뛰면서 생각하니까 헷갈리기도 했다.”(2003년 6월 수석·보좌관회의) 민중은 더 헷갈린다. “종잡을 수 없다”고들 말한다. 자신의 불법 대선자금이 상대 후보 진영의 10분의 1이니, 티코와 리무진이니 하는 비교화법은 지도자의 윤리성에 어긋난다. “이쯤하면 막가자는 것” “대통령직을 못 해 먹겠다”는 등의 직설형은 할 말이 못 된다. 국회 파행을 가져온 이해찬 국무총리의 막가는 독설은 대통령을 닮아 보이려고 하는 직설화법의 승계다. “말 많이 한다고 탈권위는 아니니 말을 줄여주기 바란다. 말을 할 때는 할 말, 안 할 말 신중하게 가려야 말을 믿을 수가 있다” 이것은 민주노총의 성명서 요지다.(2003년 11월·제목 ‘할 말이 많아서 슬픈 노무현이여!’) 농담형도 있다. “국민의 정부가 겪었던 여러가지 실패의 과정들이 이번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을 받는다”(2003년 4월·문화일보 인터뷰) 그러고는 “어제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엄살을 좀 떨었다. 참 우울하다고 했다”(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 ‘국정과제TF워크숍’) 식언형은 이미 위헌결정이 나긴 했지만 수도이전 문제를 예로 들어본다. “한나라당이 수도 이전에 따른 비용 문제를 부풀려 비판하고 있는데 필요하면 국민투표에 부칠 수도 있다”(2002년 10월·내일신문과의 후보 인터뷰) “국민적 합의를 요구하는 문제이므로 국민투표에 부쳐서 결정하겠다”(2002년 12월·부산 서면 후보유세) “당선후 1년 이내에 국민 합의를 도출해 국민투표로 최종 결정하겠다”(2003년 12월·KBS1 TV 후보연설) “여야간 충돌 때문에 국회에서 저지되면 돌파하기 위한 차선의 방법으로 말한 것이다”(2003년 2월· 대전 국정토론회) “국민투표하면 탄핵이 먼저 생각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2004년 6월·언론사 경제부장과의 만찬회동) ‘공기업·산하단체장의 인사원칙은 효율성·공익성·개혁성이다.’(2003년 1월 당선자 인수위 지시) “농부는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낸다”(개혁을 발목잡는 정치인을 가리켜·2003년 5월·청와대 홈페이지 e메일) 궁금하다. 개혁의 실체가 의문시되고, 정부 산하기관에 낙하산부대가 대거 투하되고, 청와대는 특진해방구가 되고, 친여 예술단체와 친여 시민단체에 나가는 무더기 지원금 등 이밖에도 허다한 반개혁성 신기득권 양상도 개혁인지 묻는다. “세상이 진보와 보수로 양분화되던 시대는 끝난 것 같다”(2004년 3월·민노총 지도부 오찬 간담회) “경제의 핵심적 문제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근로자와 중소기업 근로자로 나뉜 양극화 문제다”(2004년 8월·열린우리당 지도부 오찬) 양분화시대를 부인하면서 상호 보완기능의 해결 방안을 양극의 대립각으로 보는 시각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역시 외국에 나와 보니 기업이 바로 나라다 하는 생각이 든다”(2004년 9월·러시아 방문 중 기업인과의 다과회) “기업활동에 대한 여러가지 애로와 장애를 풀어가는 데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2004년 10월·베트남 방문 중) 모순형의 대표적 사례다. 재계가 반기업법으로 꼽는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국회에 계류중인 13건 법안에 대한 검토요청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공장 하나 짓는데도 무려 68가지의 규제사항으로 6개월이나 걸리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창업절차가 12단계로 145개국 중 104번째를 차지할 만큼 기업하기가 어려운 나라다.(세계은행 ‘기업활동 2004보고서’) 간첩이나 사노맹 출신이 의문사위 조사관이 되고, 전향을 거부한 빨치산 등이 민주화 인사가 되는가 하면, 탈북자 ‘자유북한방송’이 협박을 받고, 김일성을 창조적 이념주의자로 둔갑시킨 교과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세상이 됐다.(위대한 장군님께서 남조선 진보세력의 활동공간을 넓혀주고 극소수 반공 보수분자들을 고립시킨 결과다·조선로동당 출판 강연자료) 최근 서울대 교수 협의회 토론회는 ‘사회분열과 반지성주의의 위험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나를) 과격하고 좌파로 보는 우려는 좋은 평가가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2003년 2월·당선자로 미 헤리티지재단에서) 이에 대한 평가는 민중의 몫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나라는 ‘옛 진영땅’이 아니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을 한번 확 바꿔버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려서 너무나 가난하였고 커서도 대학을 갈 수 없었던 형편에서 유일한 출세의 돌파구는 사법시험 뿐으로 여겼던 것 같다. 총명한 머리에 가슴은 한(恨)으로 찌들면서 타고난 옹고집 성격은 더 거칠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으로 득의와 좌절을 거듭 맛보는 외로움 속에서도 오뚝이같은 돌파력과 도박사 같은 승부기질은 그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정상을 쟁취하는데 따른 운(運)이라 할까, 이런 시운도 스스로 만들어 거머쥐었다. 실로 천신만고의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 동북아경제중심국가 건설을 내세웠다. 이 정권은 수도이전과 함께 이를 4대 국가발전전략으로 표방했다. 그랬던 것이 둑이 무너졌다고 한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결정으로 나머지 전략의 기본 틀이 흔들리는 것은 수도이전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란 게 이 정권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다. 그러나 계획이 거창하고 간판만 그럴듯 하다고 하여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정책 구상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조직적이어야 하고 추진 절차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 나름대로 야심만만한 작품의 제목은 대통령으로서 능히 부칠만 하다. 문제는 조직성과 합리성의 결여다. 국가(지방)균형발전을 거부할 정신나간 사람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입안에 든 것을 빼앗아 다른 입에 넣어주는 것이 국가균형발전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 공장 하나가 있으므로 저기에도 공장 하나를 세우는 것이 지방균형발전은 아니다. 수치적 개념에서 기능적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체는 처방약이 체질에 따라 다르고 지역은 특색에 따라 발전 방향이 다르다. 이 정권에서 무엇보다 말잔치 만이 무성한 것이 지방분권론이다. 1년8개월 동안을 이래 왔다. 아니 속셈은 오히려 지방홀대의 냄새가 짙다. 예컨대 이 정권이 신설하려는 종합부동산세 국세화는 지방세의 요체인 보유세의 근간을 위협한다. 동북아경제중심국가 건설은 정말 좋다. 수도권을 동북아 물류 및 정보기술 비즈니스의 중심도시로 육성, 경제중추지역으로 발전시키려는 청사진은 수도권에서도 작심하고 있는 여망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서울이 수도인 게 거추장스런 이유는 하나도 없다. 투자활성화를 위한 세제혜택 및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등 산업인프라 구축이 시급한데도 이 정권은 되레 수도권이기주의라며 이를 저해한다. 천도(遷都)는 이 정권이 내포하고 있는 근원적 모순의 결함이다. 자그마치 160조원이 들어도 후대를 위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해야겠지만, 그보다 훨씬 적게 든다 하여도 가치성의 발견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결국 이의 차이는 관념적 인식의 차이다. 지금은 정치논리가 경제논리 우위의 시대가 아니다. 이러함에도 정치논리 우선의 관점에 근거를 두려는 무리함이 헛바퀴 소리가 요란한 괴리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실로 그의 지나온 인생길은 가히 입지전적이다. 이러한 인간승리에 훼손을 가져오는 대통령의 옹고집은 실로 유감이다. 물론 안다. 결단과 추진력이 있어야 국가를 신념에 따라 다스릴 수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적 기반을 잃어서는 설득력이 없다. 지금은 김해 땅의 못사는 진영동네와 잘사는 읍내로 구분되는 시대가 아니다. 읍내 아이의 책가방을 찢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도 아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결정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천도를 획책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요구가 아니다. 헌법재판소를 억압하는 힐난은 그가 말한 헌정질서를 되레 어지럽힌다. 어느 측근은 말했다. “대통령은 혁명적으로 일 하고 있다”는 그 측근의 말이 아니어도 세상을 한번 뒤바꿔 보고싶어 하는 심경을 미루어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恨)풀이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간곤한 광복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가 광복된 나라에서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예가 있다. 간곤한 민주화운동가가 유능한 정치지도자가 아닌 예가 또한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투지가 아닌 경륜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빌어먹을 놈의 세상이 아닌데 그렇게 돌아가게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열린 마음으로 눈을 더 크게 뜨는 반성을 구하는 것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서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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