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越同舟, ‘南北同舟’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춘추시대 오·월 두 나라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고사다. 남쪽의 햇볕정책과 북쪽의 핵 실험이 새로운 고사로 전할 동상이몽의 ‘남북동주’(南北同舟)를 방불케 한다.

월왕 구천(句踐·?~BC 465)은 오왕 부차(夫差·?~BC 473)의 아버지 합려와 싸워 그를 죽인 사람이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위해 섶나무 위에서 잠자며 복수심을 불태운 끝에 마침내 BC 494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계산(중국 동남부 절강성의 명산) 싸움에서 구천에게 패배를 안겨 항복을 받는다. 부차의 노비가 된 구천은 부차가 마차에 오르내릴 때마다 땅에 엎드려 등받이 발판이 되고, 마차를 끄는 말앞에서 고삐를 매고 말과 함께 달리며 마차를 끌곤 했다.

노비생활 3년만에 오나라의 속국이 된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은 10여년동안 쓸개를 핥으면서 설욕을 위한 양병(養兵)을 부차 모르게 은밀히 힘쓴다. 양병설이 부차의 귀에 들어가 부차는 월나라로 직접 가보지만 그땐 구천이 이미 군대를 심산 깊이 숨긴 뒤다.

구천이 오나라에서 부차의 노비생활을 면하고 월나라로 돌아가 비교적 자유롭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나라 태재(太宰) 백비의 두둔이 크게 작용했다. 반면 상국(相國) 오자서는 회계산에서부터 투항한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부차에게 주청했다. 오자서는 이후에도 구천의 귀국을 반대하고 양병설 또한 사실로 보고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백비는 구천의 죽임을 그때마다 반대했다. 구천을 살려 월나라를 이용하는 것이 오나라의 부국강병에 도움을 가져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왕 부차는 항상 백비의 말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구천의 양병설로 월나라에 갔을 때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만약 구천이 군대를 길렀을지라도 용서하려고 했다”고 했다. 연유는 부차가 꿈꾼 중원(中原·황하지역) 원정에 구천의 군대가 도움이 될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움이 될 것으로 알았던 구천의 군대는 자신의 뒷덜미에 비수를 꽂았다. 부차가 원정을 나가 오나라를 비운 새에 구천은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기습한다. 황급히 회군한 부차는 연전연패 끝에 항복을 요구하는 구천 앞에서 “난 너와 다르다”며 투항을 거부했다. 이때가 BC 473년이다.

‘사기’(史記)는 이렇게 전한다. 사람됨이 요즘말로 부차는 단순했고 구천은 교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그렇지만 일깨움은 있다. 부차가 구천을 죽이지 않고 나중에 월나라로 되돌려 보내기까지 한 것은 지금말로 하면 포용정책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그토록 베푼 관용은 복수의 악순환을 그만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지 모른다. 그래서 기회있을 때마다 구천을 죽여야 한다는 오자서의 주청을 끝내 뿌리친 것은 햇볕정책이다. 월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땐 만섬의 구휼미를 보내기도 했다.(오자서는 자신의 주청을 고집하다가 부차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고, 오나라가 구천에게 망할 것을 알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무려 2천460여년 전의 일이다. 월왕 구천이 여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가 죽으면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던 때의 일이니 아득한 옛날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역사의 무대는 달라도 역사의 공식은 동일하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21세기형 현대판 오월동주다. 동포이기 때문에 남북간의 언어는 같아도 뜻은 판이하다. 가장 많이 쓰는 ‘민족’이란 말은 대표적인 예다. 이쪽에선 열린 뜻의 ‘민족’인데 비해 저쪽에선 닫힌 뜻의 ‘민족’을 말한다. 똑같은 말인데도 ‘개방형’과 ‘폐쇄형’의 정반대 의미를 지닌다. 같은 ‘통신’이란 말도 저쪽에선 방송을 포함한다. 혁명 수단화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만이 아니다. 핵 실험을 해놓고도 “비핵화 선언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어길 생각이 없다고 우긴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언행의 표리가 부동하다. 퍼주는 대북지원으로 평화가 정착된다면, 평화를 돈 주고 사야하는 건 맞다. 그러나 언젠간 평화는 깨지고 퍼준 돈으로 만든 비수가 이쪽 뒷덜미를 위협할 공산이 높다. 동상이몽의 ‘남북동주’인 것이다.

오나라 멸망을 앞두고 백비는 승승장구한 구천에게 신(臣)을 칭하면서 ‘오왕 부차를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나 구천은 자신을 죽이지않고 살도록 해준 은인을 조롱하며 거드럼을 피우자 그만 자결한다. “이 백비의 호의를 이렇게 악용할 줄 차마 몰랐다”는 절규가 마지막 터뜨린 분통이었다.

부차 역시 다를 바 없다. 구천이 ‘대왕’이라고 신칭(臣稱)했던 부차에게 ‘너’라며 “너의 아량과 인덕으로 오늘이 있게 됐다”고 했다. 부차는 “세상에 아량(포용정책)과 인덕(인도주의) 따윈 소용없다. 오직 음모만 있을 뿐이다”라며 자신의 칼을 가슴에 꽂았다. 일찍이 오자서의 주청을 듣지않은 걸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상호주의 포용이 아닌 추종주의 포용이 빚은 화근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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