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논술

爭 點 討 論 시사쟁점 등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도있게 생각해보는 코너. 정보의 바다에서 알짜만을 건져 올렸죠. 어때요? 벌써 빠져들고 싶죠? 뭘 망설여요. 그럼 빠져봅시다!!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무고한 자신에게 내려진 독배를 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이 말은, 법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금과옥조로 오랫동안 쓰여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어떤 나쁜 법이라도 지켜야만 한다는 준법정신이 뿌리박히게 되었죠.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법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악덕이나 부정의를 오직 법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한다는 모순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를 강제하는 모든 법규가 정당하다면 우리는 당연히 마음으로부터 그에 복종할 테지만 현실에서는 부정의한 법에 의해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려 법을 불신하거나 기만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하지만 아무리 나쁜 법이라 해도 법이란 지켜지는 것으로 그 존재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를 섣불리 어기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악법에 대한 바람직한 시민의 자세란 무엇일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정윤희 상임연구원 <생각열기> 이미 악법으로 판명이 나 폐지 예정인 법률이 있습니다. 곧 폐지될 것이긴 하지만 이 법률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데요. 과연 이 법을 지켜야 할까요? 곧 폐지될 A법, 지켜야 할까? 법치국가 유레카국에는 다수의 국민들이 악법으로 생각하는 A법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90% 이상이 A법을 악법이라 생각하고 이를 폐지할 것을 국회에 권고해 결국 A법은 정해진 절차에 의해 폐지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국회에서 폐지를 의결하고 이를 공포하는 데까지는 여러 단계의 절차가 필요해 1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합니다. 절차에 따라서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유레카국의 국민들은 A법을 지켜야 할까요? 다음 중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그 근거를 써봅시다. ① 유레카국의 국민들은 A법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② 유레카국의 국민들은 A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법치 국가에서는 법에 의해 사회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불합리한 법은 이를 지키지 않는 것이 더 정의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악법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명제Ⅰ. 무엇이 악법인지 기준이 모호해 판단하기 어렵다! Yes/(악법도 지켜야) 어떤 법이 악법인지 아닌지 가려낼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 현실의 법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사례에 의해 사회적 합의가 도출된 것만을 법률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살인자에 대해 ‘죄질, 동기, 정황 등을 따져 얼마만큼의 형량을 내린다’는 식의 구체적이고 상식에 비추어 누구나 동의할 만한 내용을 법으로 제정한다. 이렇게 한 번 제정된 법은 예외 없이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적용됨으로써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불편한 법이라고 해서 저마다 악법이라고 판단한다면 법에 대한 혼란만 초래될 것이다. 또한 특정 개인에게 악법으로 비춰지는 법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법일 수도 있다. 특히 현대 사회처럼 다양한 계층의 이익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선 실정법이 가장 공정한 정의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떤 법이 악법인지 판단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법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No/(지킬 필요 없어) 악법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한 듯하지만 사회정의와 헌법이 보장한 권리에 의거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어떤 법이 인간의 자연적인 기본권을 교묘하게 억압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악법이다. 사회의 다수가 찬동하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정의의 대원칙에 어긋난다는 사실로 악법임을 규정할 수 있다. 특히 실정법에서 어떤 법조항이 악법인지 아닌지 규정하는 것은 모든 법의 상위법인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느냐 아니냐로 판단 가능하다. 이렇듯 사회정의에 어긋나거나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포함된 법조항은 악법으로 규정할 근거가 충분하다. 또한 국가의 이익과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인권이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 또한 악법이다. 특정한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사회의 이익과 질서란 정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역사에서 위정자들이 특정 계층이나 개인에 유리한 법을 제정하여 법의 이름으로 많은 부정의를 저지른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명제Ⅱ. 제정 절차에 문제가 없다면 악법적 요소가 있더라도 법으로 인정해야 한다! 명제Ⅲ. 악법이라도 법적안정성을 위해 폐지되기 전까지는 지켜야 한다! 명제Ⅳ. 현대사회에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저항권 행사는 인정될 수 없다! <쟁점이 술 술~> ‘악법도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먼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오래된 고민입니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악법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 배경과 법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토론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쌓아봅시다. 1. ‘악법’이란 무엇인가요? ‘악법’이란 말 자체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요. 법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인 만큼 악할 수도 없고 악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 사회와 오랜 역사 속에서 실제 악법이 존재해 왔어요. 누가 보아도 정의의 기준으로 정당성을 인정하기 힘든 법이나 권력자가 다수의 대중을 억압하는 데 사용한 법들이 실제로 있었죠. 이런 법들을 악법이라 불러왔어요. 하지만 악법을 법으로 인정해야 할지, 악법도 지켜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특히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정된 법일지라도 개인의 양심에 위배되고 약자에 피해를 줄 때 과연 이 법도 지켜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크게 엇갈리죠. 이는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지만 사회를 유지시키는 강제 규범적 역할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임의로 특정법을 악법이라 규정해서 법을 어긴다면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어요. 결국 어떤 법을 악법으로 보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죠. 2. 그렇다면 악법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나요? 무엇을 악법으로 규정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특히 현대사회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악법을 규정하는 기준이 모호할 수 있죠. 하지만 개인의 기본권이나 자유를 침해한다든가, 특정집단에게만 유리하도록 법이 제정되었거나, 소수자를 차별하는 등 보편적인 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들은 대체로 악법이라 부르곤 해요. 즉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 이성을 통해 판단했을 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법칙을 위배하는 경우 악법이라 칭하는 것이죠. 이는 법보다 더 중요한 보편타당한 법칙, 즉 자연법의 존재를 믿는 입장에 따른 판단이에요. 반면 이러한 자연법은 관념에 불과하며 현실적인 법규로 존재하는 실정법만이 법이라는 견해도 있어요. 3. 자연법과 실정법이 무엇인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법이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어 적용되고 있는 법률들이에요. ‘공문서를 위조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법규처럼 특정 상황에 대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요. 이러한 법을 실정법(實定法)이라 해요. 실정법은 나라나 민족, 시대 등 해당 사회의 조건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요. 이에 반해 ‘살인해서는 안 된다’처럼 어떤 사회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는 보편타당한 자연스런 규범을 자연법(自然法)이라고 해요. 물론 자연법은 실재하는 법률은 아니에요. 자연법을 중시하고 실정법 역시 자연법에 근거해서 정해져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악법을 법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인간의 권리는 자연이 부여한 것이며 법은 단지 이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반면 자연권이란 추상적인 개념일 뿐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은 실정법만이 영향력을 가지는 법으로 인정하죠. 이 입장은 절차에 문제가 없는 실정법은 비록 악법이더라도 법으로 인정하고 개정되기 전까지는 지켜야 한다고 말해요. 이처럼 자연법과 실정법을 둘러싼 상반된 입장은 현대사회의 법의 이념 중 정의와 법적안정성이라는 요소로 구현되어 있어요. 4. 법의 이념에서 법적안정성과 정의란 무엇인가요? 법의 이념이란 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이상을 말하는데 정의의 실현과 법적안정성이 중요한 요소예요. 현대 법치 국가에서 정의는 대체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며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해요. 법은 이러한 정의의 실현을 주된 목적으로 삼아야 하죠. 실제 정의개념은 실정법 중에서도 가장 상위법인 헌법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자연법을 구체화시켜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어요. 한편 법적안정성이란 사람들이 법을 믿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법에 대한 신뢰나 법 자체의 권위라 할 수 있어요. 법적안정성이 흔들리면 사람들이 법을 신뢰하지 않고 법률을 지키지 않아 사회혼란에 빠지게 되죠. 악법도 지켜야하는지의 물음은 법의 두 이념인 정의의 실현과 법적안정성이 충돌하는 상황이에요. 5. 악법을 거부할 권리는 없나요? 독재정권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에서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악법은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악법에 대해 저항하거나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악법이 폐지되도록 노력하죠. 이렇게 악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저항권이라 불러요. 저항권은 법치 국가에서 자연법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국가의 공권력에 대하여 국민이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비상수단이지만 법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에요. 악법은 이미 하나의 악이며 더 이상 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죠.

Movie< 김봉석의 대중문화로 읽는 논술 > - 아메리칸 갱스터

미국의 범죄집단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계가 만든 마피아다. 또는 아일랜드계나 중국계가 만든 조직들도 영화에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히스패닉보다 인구가 적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영향력으로 본다면 백인 다음은 흑인들의 범죄조직은 어떨까?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흑인들의 범죄조직은 그냥 동네 양아치나 무질서한 폭력조직에 가깝다. 기업형 범죄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막무가내 유형의 무법자들로 주로 그려졌다. <대부>의 이탈리안 마피아 같은 품격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범죄조직으로서의 규율과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진 흑인 갱을 보는 것조차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아메리칸 갱스터>는 1970년대에 실존했던 흑인 갱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마약 판매조직의 보스이며 할렘의 자선 사업가였고 동시에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는 사교계 인사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역사가 더 오래 되었지만, 흑인들의 범죄조직 역시 중국이나 이탈리아인과 충분히 어깨를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프랭크 루카스라는 출중한 인물이 있었다. 리들리 스콧은 과감하게도 루카스에게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미국을 대표할 만한, 그리고 가장 미국적인 갱스터로 그를 내세운 것이다. 대체 프랭크 루카스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런 대우가 가능한 것일까? 1968년, 프랭크 루카스가 섬기던 할렘 범죄조직의 보스 범피가 사망한다. 루카스는 갱단 두목이면서도 할렘의 흑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범피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범죄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결코 사치와 향락에 물들지 않고 빈민들을 위해서 돈을 쓰기도 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이 필요하다. 루카스는 태국에서 군용기를 이용하여 직접 마약을 들여오는 혁신적인 루트를 개척한다. 그리고 시중에 나도는 마약보다 순도는 2배로 높고 가격은 절반인 블루 매직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결국은 마피아를 비롯한 다른 범죄조직들도 루카스에게서 마약을 공급받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프랭크 루카스를 체포한 마약 수사관 리치 로버츠는 그가 ‘성공한 흑인 사업가. 게다가 진보적인’이라고 말한다. 루카스가 거물이 된 이유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생산자와 직거래를 하고, 더 질 좋은 상품을 더 싸게 판다면 당연히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기존의 사업자, 갱들이 그를 질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루카스는 음모와 협잡 같은 것으로 다른 갱들의 이권을 뺏어간 것이 아니다. 루카스는 철저히 시장원리에 의해 승자가 되었다. 루카스에게서 마약을 공급받는 갱이 질 낮은 마약을 판매하는 일이 생기자, 그는 블루 매직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라고 요구한다. 자신은 브랜드를 걸고 ‘사업’을 하는 것이고 브랜드를 망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면서. 뛰어난 사업가인가, 양심적인 범죄자인가 프랭크 루카스가 현지에서 직접 마약을 가지고 온다는 말을 들은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안 마피아가 100년 동안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깜둥이가 할 수 있냐고. 인종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던 당시에는 그것이 흑인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흑인은 기껏해야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출 뿐, 제대로 된 사업 같은 것은 하지 못한다는 편견. 하지만 프랭크 루카스야말로 가장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업가였다. 고품질 저가격의 브랜드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이탈리안 마피아의 강점인 가족 경영까지 받아들였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가족들을 뉴욕으로 부른 루카스는 가족의 신뢰를 바탕에 둔 조직을 운영한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오기 전까지 가족은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 또한 루카스는 향락에 빠지지도 않는다. 부와 권력을 쥐면서도 루카스는 자기 파괴의 함정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는다. 그리고 스승인 범피의 가르침대로 할렘의 흑인들에게 온정의 손길도 베푼다. 루카스는 범죄라는 영역에서 혁신을 통해 시장을 장악한, 뛰어난 사업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메리칸 갱스터>가 루카스를 바람직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루카스가 파는 마약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파괴되는 가정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리들리 스콧은 루카스의 탁월한 장점을 과시하면서도, 루카스를 쫓는 리치 로버츠 형사를 통해서 <아메리칸 갱스터>의 균형을 유지한다. 리치는 결코 영웅적인 인간이 아니다. 멈출 수 없는 바람기 때문에 가정은 파탄났지만 리치는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유형이다. 절대 뇌물을 받지 않고 수사과정에 발견한 백만달러를 그대로 신고하는 청렴한 경찰이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 때문에 경찰 내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리치는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리치는 루카스의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다. 루카스가 비범한 인간이며 나름대로 양심적인 범죄자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루카스를 쫓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망설임도 없다. 어쨌거나 루카스가 범죄자라는 사실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니까. 리들리 스콧은 ‘아메리칸 갱스터’ 프랭크 루카스의 일대기를 통해 매력적인 범죄자의 초상을 그려내는 동시에 미국 사회의 음영까지도 수려하게 잡아낸다. 프랭크 루카스는 영웅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범죄자다. 리들리 스콧은 범죄의 스펙터클한 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범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일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대부> <좋은 친구들> <카지도> 등 할리우드의 갱스터 영화나 드라마 <소프라노스> 등은 범죄조직의 흥망을 통해서 미국 사회의 음영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범죄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미국 사회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비빔밥 논술

爭 點 討 論 착취가 없이 누구나 평등하며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나라, 또한 풍족한 자원으로 누구나 원하는 만큼 혜택을 누리고 행복이 충만한 나라를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지칭하는 유토피아 개념은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현불가능하고 허황된 그 무엇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디지토피아(Digitopia), 테크토피아(Techtopia), 에코토피아(Ecotopia) 등 새롭게 희망적인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들이 유토피아에서 파생되어 나오곤 합니다. 이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 즉 새로운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과연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고 만들 수 없는 헛된 공상에 불과한 것인지, 현실을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추동력인지 함께 생각해봅시다./조성진 책임연구원 <생 각 열 기>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요? 나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했을 때 그 기준은 무엇일지 함께 생각해봅시다.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 다음은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로직이 제안한 유토피아의 검토 잣대입니다. 물음 하나하나에 답해보며 유토피아의 모습을 상상해봅시다. ● 이 사회는 전원적일까 도시적일까? ● 이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사회일까 아니면 기본적 욕구만이 충족되는 금욕적 사회일까? ● 이성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결혼 비슷한 제도가 있을까? 이 제도는 일부일처제일까? ●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에 의해 양육될까? ● 사유재산 제도는 존재할까? ● 평온하며 안정된 삶이 존재할까 아니면 모험, 도전, 위험, 영웅심을 발휘할 기회가 있는 삶이 영위될까? ● 종교는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하나일까 여럿일까? 종교의 중요성은 어떠할까? ●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사적 관심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또는 공적 행위나 공공정책의 문제들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 사람들은 일편단심으로 한 가지 특정의 일을 성취하려 할까 또는 미친 듯이 모든 일과 즐거움을 추구할까 아니면 그들은 충족되고 만족스러운 레저 활동에 전념할까? ● 교육의 주된 목표는 무엇일까? ● 사람들의 삶에서 스포츠는 중요할까(관중으로서 또는 경기 참여자로서)? ● 예술은 중요한 활동일까? 감각적 쾌락과 지적 활동 중 어느 것이 보다 추구될까? ● 의상의 유행은 있을까?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을 가질까? ●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떨까? ● 테크놀로지는 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까? 1 이 물음 하나하나에 답해보며 여러분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개략적으로 스케치해봅시다. 2 “이것이 유토피아다”라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해봅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의 신장, 착취 없는 사회,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과학기술의 진보, 생명의 연장 등) <쟁 점 이 술 술~> 유토피아란 말은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언제부터 사용된 말인지, 실제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토피아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유토피아를 둘러싼 여러 개념을 살펴봅시다. 1.유토피아란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나요? 유토피아(Utopia)라는 용어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의 정치적 공상소설의 제목에서 유래한 말이에요. 소설 《유토피아》는 1516년에 간행된 작품으로 영국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비판하며 이상사회를 묘사했어요. 유토피아는 사실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는 말이에요. 그 하나는 ‘아무데도 없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상의 곳’을 의미하죠. 이는 utopia가 ou(no)와 topos(place)의 합성어인지 eu(good, ideal)와 topos(place)의 합성어인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두 의미 중 어떤 의미를 강조하는가에 따라 ‘공상사회’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 때론 ‘이상사회’의 의미를 갖기도 해요. 물론 두 의미를 결합하여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존재하게 될 이상사회’를 의미하기도 하죠. 유토피아는 인류가 오래 전부터 꿈꿔 왔던 여러 유형의 이상사회를 총칭한다고 볼 수 있어요. 2.이상사회를 의미하는 다른 말도 많지 않나요? 낙원이나 파라다이스란 말은 흔히 들어봤을 거예요.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행복만이 충만한 곳을 의미하죠. 인류는 오래 전부터 고단한 현실 생활을 잊고 지친 삶을 위로하기 위해 나름대로 이상사회와 관련된 신화나 전설을 발전시켰는데 이 때문에 이와 관련된 말이 매우 많아요. 유토피아 개념은 다양한 문명권에 등장하는데 엘도라도, 샹그리라, 아카디아 등 여러 명칭이 있죠. 동양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말이 있어요. 물론 이러한 낙원에 관한 묘사나 명칭은 철학적으로 다루는 유토피아 개념과 사뭇 다른 면이 있어요. 낙원은 현실과 달리 자원도 무한하고 사람들이 모두 선하며 모두가 무병장수한 사회를 의미하는 데 반해 유토피아는 자원이 넉넉하지 않고 인간들도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건설해야 하는 대상을 의미하죠. 낙원에 비해 유토피아가 보다 현실에 근접해 있는 의미인 셈이에요. 3.철학자들은 언제부터 유토피아를 그려왔나요? 플라톤, 생시몽, 푸리에, 마르크스, 마르쿠제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유토피아를 상상했을 만큼 유토피아의 철학적 뿌리는 깊어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시작해 마르크스의 공산사회 개념에서 그 절정을 이루죠. 유토피아는 역사가 순환한다고 보지 않고 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봐요. 미래 역사의 종착지에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죠. 또한 유토피아는 완전성을 추구해요. 아무렇게나 상상된 사회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온갖 부조리와 문제점이 해결된, 그러면서도 실현 가능하다고 보는 완전한 사회인 것이죠. 이런 이유로 많은 사상가들은 강력한 중앙 통제, 무오류의 지도자, 공동생산과 분배, 무질서한 국민들에 대한 끊임없는 교화, 일사불란하고 질서정연한 사회를 유토피아로 그려왔어요. 때문에 문학이나 영화의 세계에서는 유토피아가 결국 디스토피아로 이어진다며 조롱하곤 했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 등이 대표적이에요. 4.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의 반대말인가요? 디스토피아란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토피아와 대립되는 상이에요. 많은 문학작품이나 사상에서 부정적인 미래를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데 활용하고 있죠.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는 반대말이지만 유토피아의 추구가 결국 디스토피아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아요.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다보면 결국 사람들을 통제하는 암흑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하지만 유토피아를 그런 식의 절대적인 무엇이라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입장도 있어요. 한편 역사적으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하여 유토피아의 종언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죠. 5.디지토피아나, 테크토피아(테크노피아)와 같은 용어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요? 현대사회에 들어 유토피아의 의미를 차용한 다양한 용어들이 탄생하고 있어요. 디지토피아(Digitopia)는 디지털과 정보 중심의 이상사회를 의미하며 테크토피아(Techtopia)는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이상사회를 의미해요. 이러한 이상사회는 현대 서구사회가 꿈꾸는 이상사회이기도 하죠. 하지만 디지털이나 기술이 중심이 된 사회가 오히려 인간성을 잠식하는 암울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어요. 반면 에코토피아(Ecotopia)는 사회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과학기술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이상사회로 꿈꾸는 것이에요. 플라톤, 생시몽, 마르크스 등은 한낱 꿈에 불과한 공상을 했던 것일까요? 인류는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일까요? 상상 속의 이상향은 현실에 구현될 수 없고 걸림돌만 되는 것인지, 유토피아가 현실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함께 토론해봅시다. 명제Ⅰ. 유토피아는 사람들에게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부추긴다! Yes/(헛된 망상에 불과) 실현 불가능한 공상을 일삼는 것은 사람들에게 현실도피적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완전한 사회만을 바라는 것은 결국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개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역사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에 대한 환상적 묘사는 현재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회피하게 하고 현실의 투쟁에서 멀어지게 한다. 유토피아적 구상들이 너무나 인위적이어서 최소한의 실현 기회조차 갖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기존 현실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이 중요하지 이상적인 미래상을 기획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비과학적인 것이다. 오히려 역사에는 필연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통해 미래 사회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토피아라는 공상을 쫓는 자는 그 이상적 모습이 지닌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 실망하게 되고 현실의 변화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유토피아는 여러 비유적 형태로 현실을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No/(현실을 바꾸는 힘) 막연한 이상사회를 꿈꾸던 고대의 이상향과는 달리 근대적 유토피아는 역사성과 현실성을 갖추고 있다. 기존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 현실의 경향성이나 잠재성을 바탕으로 구상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으로서 희망을 토대로 한 미래 지향적 표상이지만 이것은 결국 현실을 초월하는 차원에서 기존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유토피아는 오히려 역사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설계도 없이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 불가능하듯, 유토피아 없이 현실을 개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존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만으로 미래 사회의 모습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존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들을 보라. 그들은 기존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치료책을 제시하는 등 갈등이나 문제를 조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제안했다. 사회를 진보의 방향으로 인도하면서 기존 사회를 초월하는 대안적 사회상을 보여준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 사상에서도 중요한 것은 낙원적 사회상이 아니라 사회비판의식이다. 명제Ⅱ. 유토피아를 논하는 것은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다! 명제Ⅲ. 유토피아의 추구는 결국 전체주의의 도래로 이어진다! 명제Ⅳ.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비빔밥논술

<쟁점토론> 시사쟁점 등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도있게 생각해보는 코너. 정보의 바다에서 알짜만을 건져 올렸죠. 어때요? 벌써 빠져들고 싶죠? 뭘 망설여요. 그럼 빠져봅시다!! 정부조직 축소, 감세,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공무원 수 축소 등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새 정부의 정책이 연이어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작은 정부는 복지의 과잉을 극복할 새로운 대안으로 세계적인 추세라고 합니다. 하지만 작은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복지가 뿌리내렸던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는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의 논쟁은 오랜 기간 별다른 결론 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다만 시대와 해당 국가의 현실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의 차이를 살펴보고,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지 함께 토론해봅시다./정윤희 상임연구원 <생각열기> 사람들의 정부에 대한 요구는 다양하지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부라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정부는 괴로워? ※아래의 사례를 읽고 물음에 답해보세요. 낙도주민 A씨 여기서 제일 가까운 육지로 가는 정기선이 있으면 좋을 텐데 수익성이 없으니 어떤 사업자도 안하려 드네요. 정부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좀 해주면 좋을 텐데…. 안될까요? 노인 B씨 나이드니 병원비랑 약값이 만만치가 않아. 그나마 의료 보험이 되면 다행인데,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질병도 많다고. 정부에서는 뭐하는 거야? 우리 같은 노인들 대상으로 의료 혜택 좀 더 늘리지 않고~ 회사원 K씨 연금이다, 보험료다, 세금이다 해서 정부가 월급에서 떼 가는 돈이 얼만데요! 도대체 정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꼬박꼬박 돈을 빼앗아 가는 겁니까? 그 돈을 펀드에다 넣으면 노후 걱정이 없겠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작은 정부’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정부가 무조건 바람직하고 좋은 것일까요? 정부의 역할은 어느 정도가 이상적일지 논쟁점을 중심으로 생각해봅시다. 현대사회, 작은정부가 바람직한가? 명제Ⅰ. 정부의 규모가 커지면 개인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작은 정부가 바람직)정부의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의 자유는 비례하여 침해된다. 정부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곧 정부가 개입해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경제활동의 규모나 범위가 확대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개별 경제주체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됨을 의미한다. 정부의 규모와 영역이 커질수록 규제의 범위도 넓어지게 마련이고 규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시민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부의 역할은 시장 메커니즘이 잘 순환되도록 조정하고 감시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그 이상의 개입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빼앗아 시장원리를 파괴할 것이다. 또한 정부 활동의 확대는 기업과 개인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 이는 어느 사회나 그 사회의 가용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용자원을 정부가 사용할수록 민간 활동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는 유지해야)공공의 목적을 위해서 합당하다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경우에 따라서 개인의 자유의사에 반하는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정부이다. 정부가 그러한 권한을 지니는 것은 경제구성원 다수가 그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개별경제주체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정부의 권한을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유방임의 상태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경쟁에 의한 시장원리’는 반드시 개인을 자유롭게 하지만은 않는다. 이러한 자유란 약자에게 굶어죽을 자유를 의미할 뿐이다. 이에 정부는 공정한 사회정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정부의 역할 확대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오히려 정부 규모의 확대로 인해 교육과 기본적인 생존권에 있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명제Ⅱ. 정부의 개입보다 민간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합리적이다! 명제Ⅲ. 현재 우리나라 정부는 큰 정부에 가깝다! 명제Ⅳ. 현 상황에서 감세와 정부조직 축소, 규제완화 등 작은 정부가 바람직하다! 쟁 점 이 술 술~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작은 정부’를 강력히 표방하며 정부조직을 축소 개편하고 감세를 추진할 예정이라 합니다. 이를 두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는데요, 작은 정부와 큰 정부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최근 논란의 배경은 무엇인지 토론에 앞서 살펴봅시다. 작은 정부란 어떤 정부를 말하나요? 작은 정부란 정부의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통해 경제·사회적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정부를 의미해요. 정부의 시장개입이나 규제를 줄이고 상당 부분을 민간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특징이죠. 또한 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는 만큼 세금도 줄여나가요. 이에 비해 큰 정부는 시장실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조세제도나 다양한 사회복지 정책의 시행을 통해 분배에도 큰 역할을 담당해요. 당연히 정부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규제도 많아지죠. 결국 작은 정부는 효율성을 중시하고 큰 정부는 형평성을 중시하는 차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작은 정부는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70~80년대에 새롭게 부각되었지만 그 원류는 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어요. ‘작은 정부론’은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등장했나요? 존 로크의 영향을 받은 정부관은 정부가 개인과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존재이유를 한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소의 정부가 최적의 정부라는 생각이죠. 이는 19세기의 야경(夜警)국가론과 동일해요. 이러한 작은 정부론의 입장은 자유주의 경제관과 맞물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어요.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 현상, 경제대공황 등 이른바 시장의 실패가 등장하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었어요. 이것이 복지국가, 행정국가이며 이른바 ‘큰 정부’예요. 이후 복지국가 모델이 선진국들의 목표가 되면서 정부의 역할은 비약적으로 커졌어요. 그러나 70년대 말 만성적인 경기침체와 재정악화, 그리고 복지병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정부론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죠. 하지만 작은 정부의 새로운 경향은 역사적 교훈을 토대로, 무조건 정부의 역할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추구하며 통화를 통해 경제와 금융 흐름을 조절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작은 정부와는 차이가 있어요. 이후 다수의 선진국들이 작은 정부의 흐름을 았지만 여전히 복지국가 모델을 유지하며 발전한 북유럽 국가들도 적지 않아요. 현재 여러 국가들은 ‘크다’ 혹은 ‘작다’라는 식으로 단순 평가를 내리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요. 작은 정부와 큰 정부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죠? 한 국가의 정부를 작은 정부인지, 큰 정부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 경제 규모, 정치 체제, 통치 방식 등 다양한 영역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만큼 그 기준도 명확하지 않고 쉽지 않은 작업이에요. 하지만 대체로 정부 재정의 크기로 판단하죠. OECD도 GDP 대비 총재정규모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구분하고 있어요. 하지만 공무원 수나 재정규모 등 외형적 기준만으로 구분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때문에 정부 규제의 범위, 정부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함께 고려해야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죠. 예를 들어 정부기능을 대대적으로 축소했더라도 민간부문에 개입하는 정부 기능이 온존된 상태라면 작은 정부라 보기 힘들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작은 정부인가요? 큰 정부인가요? 외형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작은 정부에 해당돼요. GDP대비 재정규모는 27% 정도로 미국(36%), 일본(37%), 영국(44%), 스웨덴(57%)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죠. 공무원 수도 인구 1000명 당 18.5명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작은 편이에요. 하지만 재정규모 통계의 집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또한 전통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기능을 선호했고 규제의 폭과 강도가 적지 않은 만큼 큰 정부라 보는 시각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재정지출을 살펴보면 상대적으로 경제 지출 비중이 많고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선진국의 1/4 수준에 불과한 것이 다른 나라와 다른 특징이에요. 이는 60~80년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에 치중했던 경험 때문이죠. 최근 작은 정부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계속해서 작은 정부의 방향을 추구해왔어요. 특히 IMF 이후 정부규제를 크게 완화하고 정부조직을 축소 개편하는 등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사실 노무현 정부도 그러한 방향을 견지한 채 출발했으나 2006년 이후 복지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재정확대를 도모했어요. 작은 정부인지 큰 정부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율을 추구하되 국민이 제대로 공적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이 때문에 감세냐, 증세냐를 둘러싸고 작은 정부 논란이 확산되기도 했어요. 실제 노무현 정부 하에서 공무원 수가 5만8천여 명 늘어나기도 했어요. 최근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며 이전 정부와의 차별적 정책을 내세우고 있어 논란이 다시 확대되고 있죠.

BOOK < 김봉석의 대중문화로 읽는 논술 >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음모론 같은 것들을 꽤 진지하게 믿는 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욱 많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런 기묘한 것들이 실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증거 같은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찾아다니는 편이다. 하지만 TV나 대중매체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현상’은 그저 흥밋거리로 현상만 다룰 뿐이고, 신봉자나 비판론자나 모두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수할 뿐이다. 게다가 신봉자들은 대개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진 모습으로 나온다. UFO 헌터라는 사람은, 자신이 UFO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에 촬영 장비를 설치해 놓고 기다리면 UFO가 모습을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흉가 바깥에서 찍은 사진에 꽤 커다란 빛 두 개가 찍혀 있자, 혼의 존재를 믿고 흉가를 찾아다닌다는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영혼이고 크고 밝게 찍힌 것으로 봐서는 급이 높은 영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진 전문가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빛이 사진을 찍으면 선명하게 나오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열정 때문에 비현실적인 것만을 쫓아다니는 것도 좋고, 남들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외롭게 추구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믿고 너무 간단하게 자신들만의 논리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눈이 간 것도 그런 이유다. ≪회의주의자 사전≫은 “뉴에이지 신봉자들, 대체요법사들, 그리고 이성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더욱 좋은 책이다. 주변에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있다면, 공중부양을 하겠다면서 방에 틀어박혀 수련만 하는 친구가 있다면, 외계인과 채널링을 하며 미래의 예언을 들었다는 선지자가 있다면 ≪회의주의자 사전≫을 반드시 들춰본 후에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사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놓고 대립했을때, 대부분의 경우는 비판론자가 우세하다. 그들에게는 과학이라는 무기가 있으니까.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명확한 증거가 아니라 회의주의가 아닐까’란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 어차피 초자연적 현상이나 신비주의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철저한 회의를 거치지 않은 신비주의는 그저 광신일 뿐이니까. ≪회의주의자 사전≫은 침, 좀비, 외계인에 의한 납치, 카드점, 아틀란티스 등 신비주의와 초자연적인 현상은 물론 히스테리성 간질, 정신분석학, 형이상학 등 과학과 철학의 갖가지 현상과 명제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책이다.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시 컬리지의 철학과 교수인 로버트 토드 캐롤은 1994년부터 자신의 사이트 www.skepdic.com에 회의주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달 방문자 수가 50만 명에 달하며 국제적으로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했다고 했다. ≪비판적 사상가가 되기:새 천년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회의주의자 사전≫은 캐롤이 사이트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독선과 맹신에서 벗어나는 방법-모든 것을 회의하라! 백과사전식 구성이 좋은 것은 간단하게 하나의 사건이나 주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회의주의자 사전≫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회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사실들의 이면이나 허구를 폭로하는 점이 특히 뛰어나다. 이를테면 ‘달이 인간의 우울증이나 자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관계가 없다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식이다. ≪회의주의자 사전≫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그릇된 정보와 과장, 억측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회의주의자 사전≫을 필자의 입장과는 다르게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회의주의자 사전≫에 끌린 이유는 이 책이 신비주의의 허구를 신랄하게 폭로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주의의 광신도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유치한 자기망상에 빠져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자기만의 독선과 아집에 빠져 있는 자들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은유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주의를 비교적 믿는 편이지만 무작정 누군가에게 아틀란티스가 실재했다거나,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 해도 ‘나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는 ‘그런 가능성이 흥미롭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이다. 콜린 윌슨의 ≪불가사의 백과≫란 책을 보면 온갖 신비주의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양한 입장을 전개한다. 그 책을 읽다 보면 영혼을 믿는다 해도 거기에는 무수한 해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영혼이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어떤 연관이 있고, 그것이 이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떻게’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논리를 믿기 이전에, 자신의 논리와 증거를 끊임없이 의심해보아야 한다. 즉 회의주의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진리나 이상을 절대화시켜놓고, 거기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춘다. 타인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비논리적이지만, 자신만은 모른다. 신비론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세계라고 믿는 오타쿠나 자신의 이론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순간, 그의 논리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건 단지 맹신이고 광신일 뿐이다. <그로테스크>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대학 시절에 배운 것은 단 하나, 모든 것을 회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을 회의할때 진정한 믿음과 진리가 탄생할 수 있다.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글로벌 리더’ 를 키우는 기업교육의 산실

급변하는 대내외 경영환경에서 기업을 이끌어 가는 CEO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고와 미래지향적인 인적 네트워크 구축으로 경쟁우위를 창출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유능한 리더에 대한 인식과 기대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경영자의 변화는 흐름을 넘어 하나의 사명이 됐다는 것이다. 경기공업대학의 글로벌 CEO과정은 글로벌 교육을 목표로 경영자들이 격변하는 시대의 경영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회사경영에 필요한 각종 정보제공과 인적 인프라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소수정예경기공업대의 글로벌 CEO과정은 수익성을 목표로 하는 여느 대학의 기업인 교육과정과 달리 소수정예로 이뤄진다. 한번에 모집하는 인원이 고작해야 20명에 지나지 않는다. CEO들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양보다 질이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대학의 기업교육 프로그램은 기업의 간부급이상이면 참여할 수 있지만 글로벌 CEO과정은 CEO가 아니면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교육프로그램글로벌 CEO 과정은 기본적인 기업경영에 필요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국내외 경영환경 변화와 경영전략, 실전적 경영실무 등의 강의가 마련돼 있고, 무엇보다 프로그램 전체가 해외글로벌, 세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남아시아 등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여건과 경영환경을 직접 탐방하는 기회도 주어진다. 해외 우수기업을 벤치마킹 하기 위해서다. 또 CEO들의 휴먼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상호간 교류를 유지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정보제공의 기회도 얻는 이득이 있다. ◇산자부장관 상 등 수여경기공업대의 글로벌 CEO과정을 수료하면 수료 성적과 기여도에 따라 산자부장관상, 중소기업청장상, 경기도지사상 등 외부기관장 상이 수여된다. 또 대학내 고가장비 및 시설 이용을 지원하고 독일 지멘스, 보쉬렉스로스, 보콤대학의 연수기회도 제공된다. 산업경영과 김만균 교수는 글로벌 CEO과정은 수익을 내기위한 기업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기업경영의 리더인 CEO가 사회적인 부분에서도 리더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비빔밥 논술

시사쟁점 등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도있게 생각해보는 코너. 정보의 바다에서 알짜만을 건져 올렸죠. 어때요? 벌써 빠져들고 싶죠? 뭘 망설여요. 그럼 빠져봅시다!! 새 정부에서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 정책이 대대적으로 변화할 예정이다. 그 중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신문·방송의 겸영 문제다. 대통령인수위원회는 참여정부가 만든 신문법을 폐지하고 신문·방송 겸영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 담긴 대체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신문·방송 겸영이 허용되는 것이다. 이에 신문의 방송계 진출 여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겸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주목한다. 방송, 신문, 인터넷, DMB 등 다양한 매체가 융합되는 시대에 겸영은 낡은 규제일 뿐이라 일축한다. 하지만 반대 입장의 사람들은 신문·방송 겸영이 허용되었을 때의 언론 독과점과 이로 인한 여론의 편향성을 우려한다. 지금부터 신문·방송의 겸영을 둘러싼 논란에 참여하여, 어떠한 방향이 보다 타당한지 함께 생각해보자. /제윤아 상임연구원 쟁 점 이 술 술~ 정권이 바뀌면서 언론·미디어 정책에도 큰 변화가 예상됩니다. 그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신문·방송의 겸영 문제입니다. 신문·방송 겸영 문제는 시장의 관점과 공익의 관점이 부딪히면서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됩니다. 토론에 앞서, 어떠한 내용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1.신문·방송 겸영이란 무엇을 말하나요? 개인이나 기업이 두 가지 종류 또는 그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산업을 소유한 형태를 말해요. 교차소유라고도 하는데, 이를테면 신문 소유자가 방송국이나 케이블 방송 등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이에요. 우리나라는 신문법과 방송법을 통해 신문·방송 겸영을 규제하고 있어요. 신문법 15조는 신문이 방송 사업을 겸영할 수 없고, 방송사 지분의 1/2 이상 소유한 자는 다른 신문의 지분 1/2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해 놓았어요. 또한 방송법은 종합일간지 및 뉴스통신사가 지상파 방송, 보도 및 종합채널사업을 겸영하거나 주식, 지분을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해 놓았죠. 이처럼 겸영을 규제하는 것은 언론이 지닌 특성 때문이에요. 2.겸영을 규제하는 것은 언론의 어떤 특성 때문인가요? 언론이나 매체가 여론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에요. 특히 겸영 규제는 여론의 독과점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해요. 겸영이 이루어지면 소수 언론에 의한 독점이나 소유권 집중 등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로 인해 수용자의 알 권리가 축소되어 언론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역기능이 나타날 수 있어요. 또한 언론이 가진 공익적 특성도 규제의 배경이에요. 특히 방송이 더욱 그렇죠. 전파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방송사는 전파 소유권을 갖는 게 아니라 이용할 권리를 위임받아 일정기간 동안 국민을 위해 활용하는 공익적 역할을 담당해야 해요. 때문에 방송은 하나의 산업이라기보다 공론의 장 혹은 보편적인 문화전달 미디어로 간주돼 왔어요. 그래서 방송정책은 시장에 맡기기보다 다원성, 공익성, 보편적 서비스 제공이라는 방송철학에 근거해 왔어요. 겸영을 규제하는 이유도 방송이 가진 공익적 측면과 여론형성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에요. 하지만 근래 들어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고 있어 겸영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요. 3.근래의 미디어 환경이 어떻게 변화한 거죠? 다채널, 다매체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케이블 방송, 위성방송, DMB, 인터넷 등 방송 및 신문사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미디어 플랫폼들이 많아졌고,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방송과 통신 영역 간 기술 경계가 무너졌죠. 이에 통신사업자가 케이블 방송 영역에 진출하고, 방송사업자가 초고속인터넷과 같은 통신영역에 진입하는 등 교차진입이 이뤄지고 있어요. 이렇게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 등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미디어 융합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방식의 규제가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주장이 일고 있어요. 신문 산업이 위기상황에 직면한 것도 변화의 한 측면이에요. 신문사들은 인터넷의 보편화, 방송의 다채널화, 무료신문의 등장 등 여러 변화로 인해 신문 구독률이 급감하는 위기를 맞게 됐어요. 신문들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할 방안으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주장하고 있어요. 현재 신문들은 DMB 사업에 참여하거나, 모바일 콘텐츠를 제공하고, 신문사 사이트에 동영상 뉴스를 제공하기도 해요. 다양한 미디어 컨버전스를 시도하고 있는 거죠. 이종 미디어 간 콘텐츠 교류와 뉴미디어산업 진출, 네트워크 강화 등이 신문 산업의 생존전략으로 추진되고 있어요. 이러한 미디어 컨버전스는 자연스럽게 신문·방송 겸영의 문제와 연결돼요. 4.최근 우리나라의 겸영 관련 논란의 현황에 대해 알려주세요. 신문·방송 겸영 문제는 겸영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긴 신문법 제정 전후로 크게 부각이 된 이후, 논란이 지속되고 있어요. 2006년에는 헌법재판소가 겸영 규제에 대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죠.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신문·방송 겸영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왔어요. 이 당선자는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것처럼 신문과 방송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신문·방송의 겸영으로 신문 산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어요. 이에 인수위는 신문법을 폐지하고, 겸영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이 담긴 대체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지요. 5.외국의 경우, 어떻게 하고 있나요? 다른 나라들도 대부분 일정 부분의 규제를 가하고 있어요. 어느 수준으로 겸영을 허용할 것인가가 각기 다를 뿐이죠. 독일은 점유율 규제만 할 뿐 신문·방송 교차 소유 금지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 않으며, 일본은 다른 미디어에 대한 출자를 허용하되 겸영은 규제하고 있어요. 미국은 지난 32년간 여론 독과점 등의 우려로 강력하게 규제해 왔지만 지난해 12월 시장점유율 4위 밖의 신문사나 방송사에 한해 제한적으로 신문·방송 겸영을 허용키로 했어요. 명제Ⅰ. 신문·방송 겸영 금지만이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문·방송 겸영 문제로 새해 벽두부터 치열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디어 산업의 성장을 위해 신문·방송 겸영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언론의 다양성과 공공성 확보를 위해 겸영을 끝까지 규제해야 할까요? 각각의 찬반 입장에 대해 살펴봅시다. Yes/(겸영 허용해야)과거엔 겸영 금지가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조치일 수 있었다. 매체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 영향력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TV, 인터넷, 케이블, DMB 등 매체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특히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다양한 언론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이런 상황에선 신문·방송의 겸영 금지만이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겸영을 허용할 때 독점적 구조에 놓여 있던 방송이 다양한 소유구조로 재편되어 보다 폭넓은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다. 또한 실제 신문의 수가 많다고 해서 의견이 다양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경쟁하는 2~3개의 고급 정론지만 있는 시장이 수많은 매체가 존재하는 시장보다 여론의 다양성을 더 잘 보장할 수도 있다. 과거에는 방송과 신문이 여론을 형성하는 막강한 매체였지만 지금은 그 독점적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다. 여론의 다양성은 국가의 제도적 개입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여론의 다양성을 더 잘 보장하는 길이다. No/(겸영 규제해야)신문·방송 겸영은 언론의 독과점을 막고, 여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다. 겸영 허용은 일부 경제적 능력이 있는 신문사에 독과점의 길을 합법적으로 열어주는 일종의 특혜다. 방송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수백억 원의 자본이 필요한데, 이를 충당할 수 있는 곳은 소수의 거대 신문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일부 신문사가 신문시장의 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송 겸영까지 열어준다면 거대 자본에 방송이 예속되고 메이저 신문의 독과점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언론의 독과점이 심화된 상황에서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언론사는 사회 이슈에 대한 해설과 비판을 제시하며, 일정한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할을 소수의 언론사가 독점하면 여론시장이 획일화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일은 민주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다. 여론이 조작되거나 왜곡되면 참다운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언론이 여론의 다양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신문·방송의 겸영 규제는 유지되어야 한다. 명제Ⅱ. 규제 완화가 현 신문산업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 과적인 방안이다! 명제Ⅲ.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은 신문·방송 겸영의 허용을 요구하 고 있다! 명제Ⅳ. 신문·방송 겸영 규제의 완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Movie< 김봉석의 대중문화로 읽는 논술 > 다즐링 주식회사

<다즐링 주식회사> ● 원재 : The Darjeeling Limited, 2007 ● 감독 : 웨스 앤더슨 ● 출연 : 오웬 윌슨, 에드리언 브로디, 제이슨 슈왈츠먼 진정한 웃음은 단지 찰나의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짜 코미디는 한순간 실컷 웃고 나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힘이 있다. ‘힘들어 보이는 노동자가 힘겹게 길을 가다 바나나껍질을 밟고 넘어지면 측은한 심정이 든다. 하지만 잘 차려입고 거들먹거리는 신사가 넘어지면 폭소가 터진다.’ 찰리 채플린의 예리한 지적처럼, 웃음이란 우리들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는 무기이자 인생의 괴로움을 위안하는 치유제이기도 하다. <무한도전>이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평균 이하의 캐릭터임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이웃이 갖은 고난을 겪으며 바보짓을 하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 공감을 주기 때문에. 그들의 바보짓에 조롱을 하다가도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비웃다가 공감하게 하는 코미디는 <다즐링 주식회사>를 만든 웨스 앤더슨 감독의 특기다. 아버지가 죽은 후 1년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던 망나니 삼형제가 인도 여행을 간다.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며 인도로 떠난 후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굴러 얼굴 전체에 붕대를 휘감은 큰 형 프랜시스는 언제나처럼 강압적으로 동생들을 몰아붙인다. 둘째 피터는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안감에 오히려 이혼을 생각한다. 막내 잭은 헤어진 애인에게 집착을 하면서도 스치는 여자마다 수작을 거는 바람둥이다. 부잣집 자식들인 삼형제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에게 애정도, 관심도 있지만 이상하게 함께 지내면서 뭔가를 행동에 옮기면 심하게 어긋나고 결국은 싸우게 된다. 늘 환각제에 빠져 살고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다가오면 도망쳐 버리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한다. 그런 삼형제가 그들이 사는 서구 사회와는 전혀 다른 가치와 세계관으로 움직이는 인도 여행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아니 깨닫기 이전에 몸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깨달음이 없어도 문득 알게 되는 것이다. <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얄 테넨바움>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등 앤더슨의 영화에는 언제나 삶의 방향이 뒤틀린 사람들이 나왔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이상한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 그들에게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고, 그 상처의 후유증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내보이기는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상류층 혹은 지식인이다. 물질적으로는 하등 부족한 게 없는 그들이 뒤엉켜 소동을 벌이다가는 결국 자신들의 맨얼굴을 보고 화해하게 된다. 우리 역시 이상한 놈들이라고 생각하며 보다가 어느새 그들에게 동화되어버린다. 조금 과장되고 뒤틀렸지만 그건 우리들이 일상에서 수없이 보거나 경험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순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앤더슨은 홍상수의 영화처럼 폭력적으로 우리들을 발가벗기지 않는다. 어리석음을 드러내면서도 따뜻하게 감싸안아준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웃기면서도 편안하다. 오리엔탈리즘-서구인의 시선에 갇힌 한계 웨스 앤더슨의 영화 세계는 작은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무엇을 말하는 대신 친하고 익숙한 사람들과 그들만의 안정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다. 프랜시스를 연기한 오웬 윌슨은 <바틀 로켓> <로얄 테넨바움>의 각본을 함께 쓰고 연기도 한, 앤더슨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얄 테넨바움>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 나왔던 빌 머레이는 <다즐링 주식회사>의 앞뒤에 잠깐 출연해준다. <로얄 테넨바움>의 안젤리카 휴스톤은 삼형제의 어머니로 다시 나온다. 잭을 연기한 제이슨 슈왈츠먼은 함께 각본을 썼고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는 <대부>의 감독 프랜시스 코폴라가 삼촌이고 배우인 탈리아 샤이어가 어머니인 할리우드의 명문가 출신이다.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안정적이고 차분하다. 그의 영화는 할리우드의 천박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문학과 미술, 음악 등 고급문화의 향취가 물씬 풍겨난다. 그런저런 이유로 대중적인 영화도 아니다. 기이한 사건이 충격적으로 연발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희극적인 상황이 이어지지도 않는다. 화장실 유머나 엽기적인 행각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전작인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 대한 “스토리와 놀라움 부족은 나를 화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이 영화의 관람시간 대부분이 매우 즐거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평처럼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은근한 즐거움이 만재해 있다. 또한 배신, 죽음, 구원과 용서 등 보편적이면서도 절실한 인간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은근히 깔려 있다. 거대하면서도 일상적인 문제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미세한 감정을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그의 영화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웨스 앤더슨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달리는 기차 안에 집어넣는다. 파리에서, 이탈리아에서,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언제나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고, 지금 지나는 곳이 어디인지 보지 않으면 그런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하지만 잘못된 길이라도 어디론가 달리는 그 순간이 가장 빛나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그 착오의 순간을 매혹적으로 어루만지는 포근한 예술가다. 하지만 <다즐링 주식회사>는 전형적인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도라는 공간은 서구인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원시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문명이 여전히 자연의 품안에 머무르는 곳. 그 안에서 서구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다시 떠나간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서구인의 눈에 관찰된 인도인의 내면은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서구인이 만든 영화가 그들의 서선으로 그려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도나 아시아를 다룬 영화 대부분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모습이 늘 ‘신비’의 공간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분명 어색한 일이다. 특히 아시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비빔밥 논술

爭 點 討 論 시사쟁점 등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도있게 생각해보는 코너. 정보의 바다에서 알짜만을 건져 올렸죠. 어때요? 벌써 빠져들고 싶죠? 뭘 망설여요. 그럼 빠져봅시다!! 누구나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원본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복제인간의 장기를 채취하고 노예처럼 부려먹는 일이 정말로 발생할까요? <아일랜드> <6번째날> <블루프린트> 등 인간복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은 하나같이 복제인간이 불러올 어두운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종교계와 생명윤리계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수단화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인간복제를 결코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말 인간복제는 인류에게 재앙만을 가져올까요? 일각에서는 인간복제 기술이 현실화되기만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공수정으로도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들과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환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인간복제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아직까지 풀지 못한 생명의 신비가 하루빨리 풀리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과연 복제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허용해선 안 되는 것일까요? / 김인규(상임연구위원) 여러분이 [상황1]의 가상국가 A에 사는 시민이라면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만들지 않을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복제인간을 만든다면 어떤 이유로 만들고자 하는지, 만들지 않는다면 왜 안 만들 것인지 말해봅시다. 여러분이 [상황2]의 나대로 씨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장기를 이식받을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생 각 열 기>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했던 복제인간이 현실로 나타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복제인간이 일상화된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누구나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1996년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포유동물 복제가 성공했어요. 복제 양 돌리가 그 주인공인데요. 복제양 돌리의 성공이후 인간복제가 실현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기대감과 함께 반대여론도 높아졌죠. 2002년 미국의 종교집단 ‘라엘리언 무브먼트’가 만든 클로네이드사에서는 인류 최초로 인간복제를 성공시켰다고 선언하여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어요. 주장의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집단의 발표는 인간 복제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죠. 다음의 가상 상황을 읽고 물음에 답해봅시다. → [상황1]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했던 복제인간이 현실로 나타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복제인간이 일상화된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 [상황2] 나대로 씨는 위의 가상국가 A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대로 씨는 얼마 살지 못하는 심장병에 걸렸다는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다. 담당의사는 3년 내에 유전자가 일치하는 건강한 심장을 새로 이식받지 않으면 나대로 씨는 죽게 된다고 말했다. 나대로 씨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심장을 이식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나대로 씨의 복제인간은 심장을 내어주고 죽고 만다. 나대로 씨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Yes/No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복제할 권리가 없는 것일까요? 과연 인간복제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며 인류를 재앙에 빠뜨릴까요? 인간복제를 허용할 수 없는 것인지 함께 토론해봅시다 명제Ⅰ. 인간복제는 개인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Yes/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불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대체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한 개인이 존귀한 이유는 유일하면서도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유일성과 일회성, 즉 대체 불가능성과 반복 불가능성은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다. 만일 동일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생명의 유일성이 깨질 것이다. 인간복제는 동일한 유전형질이 여럿 존재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인간복제는 인간 유전형질의 유일성과 대치 불가능성을 파괴하며 인간이 유전적으로 유일하게 될 고유성을 침해한다. 또한 복제인간은 마치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복제인간에 대한 인식은 결국 원본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인간복제는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윤리적 도전이다. 인간이 수단으로 다뤄지고 누군가의 복제품이 되고 만다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인간복제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실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수많은 배아(생명)를 희생해야 한다는 점도 윤리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한다. No/ (오남용을 막는다면 허용가능) 복제인간은 체세포를 제공한 원본인간과 유전적으로만 동일할 뿐 전혀 별개의 인간이다.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또 하나 더 태어난다고 해서 원본인간의 유일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이는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일란성 쌍둥이가 존재한다고 하여 유일성이 훼손되지 않는 것과 같다. 흔히 복제 반대론자들은 복제인간은 원본인간을 똑같이 닮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 중요한 후천적 환경 요인을 간과한 발상일 뿐이다. 출생 시기, 자궁 내 환경, 성장 환경 등이 다르기 때문에 히틀러를 복제하더라도 똑같이 독재자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인간복제 기술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시험관아기가 처음에는 거부감을 주었지만 이내 거부감 없이 용인되었던 것처럼 복제인간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 존엄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탄생의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탄생 후의 성장에 의해, 사회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복제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허용된다면 부작용보다는 그로부터 얻는 이익이 더 클 것이다. 명제Ⅱ. 복제인간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과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명제Ⅲ. 복제인간은 여러 측면에서 사회혼란을 불러올 것이다! 명제Ⅳ. 인간을 수단화시키는 치료용 복제인간도 허용되어선 안된다! <쟁 점 이 술 술~> 나와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복제는 먼 미래의 일일수도 있지만 만일 현실화된다면 인간을 둘러싼 여러 개념과 사회적 관계에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복제의 허용을 둘러싼 토론에 앞서 복제인간에 대한 여러 측면을 살펴봅시다. 1.복제인간이란 무엇을 말하나요? 복제인간은 “인간개체복제 기술을 이용하여 한 인간과 유전적으로 동일하게 만들어진 인간”을 말해요. 즉 인간복제 기술이 발전하여 현실화될 경우 유전자 정보가 동일한 인간들이 다수 존재할 수 있어요. 복제인간은 남녀의 결합에 의해 탄생하는 자연적 인간과 달리 암수개체가 필요 없는 무성생식의 과정으로 만들어지며 결국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경우죠. 2.복제인간은 원본인간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건가요? 복제인간은 원본인간과 동일한 유전자 정보를 지녀요. 때문에 외모가 거의 동일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원본인간의 경험이나 능력, 정신까지 복제되지는 않아요. 설사 아인슈타인을 복제하더라도 반드시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적 재능을 발휘할 것이라 단정할 순 없는 거죠. 물론 원본인간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개체를 생성하는 인간복제가 아주 먼 미래에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를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죠. 현재의 복제기술과 발전 방향을 살펴보면 복제인간은 단순히 늦게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3.그렇다면 복제인간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인간복제의 방법 중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직 없어요. 실제 인간복제를 시행해서 성공한 경우도 없고요. 현재 인간복제는 복제양 돌리를 만들었던 것처럼 체세포 복제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 보고 있어요. 체세포 복제는 원본인간의 체세포에서 핵을 분리해 난자와 수정시켜 배아를 새롭게 분화시키는 방법이죠. 이렇게 수정란을 만들어 실제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키고 9개월 동안 임신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출산해야 복제인간이 탄생해요. 물론 대부분의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들에서는 인공난자나 인공자궁을 이용해 복제인간을 만드는 경우를 상상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곤 해요. 또한 원본인간과 동일한 성장단계를 보이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경우도 등장하죠. 아주 먼 미래에 이러한 기술들이 개발될지, 개발되지 않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압축적인 성장과정을 통해 성인인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시기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죠. 하지만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에요. 이처럼 복제인간 관련 기술은 아직까지 매우 낮은 단계에요. 기술의 발달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기도 하죠. 이번 토론은 복제 기술의 발달 여부에 상관없이 복제인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상황이라고 가정하여 그 허용 여부를 토론해보도록 해요. 4.사람들은 왜 복제인간을 왜 만들려고 하나요? 복제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목적에 따라 다양해요. 자기 자신을 복제하여 계속 영생을 얻고 싶어 하는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고, 아인슈타인이나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복제하여 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목적에서 복제인간을 만들려고 하기도 해요. 하지만 대개는 현실적인 이유가 강해요. 예를 들어 인공수정으로 시험관아기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불임부부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목적이나 유전병을 물려주지 않고 자녀를 탄생시키려는 목적도 있어요. 또한 원본인간의 난치병을 치료하거나 이식 가능한 장기를 생산하는 등 치료용 목적에서 개발하려는 이유도 있죠. 인간복제 기술을 연구하면 생명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있어요. 하지만 복제인간이 출현했을 때의 윤리적, 사회적 혼란과 인간 존엄성 침해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인간복제 기술의 연구를 금지하고 있어요. 5.현재 인간복제를 허용하는 나라도 있나요? 아직까지 인간복제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국가는 없지만 치료용 인간복제에 대해서는 국가마다 약간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인간복제에 대한 규제는 크게 각국의 입법상 규제와 각종 국제기구를 통한 규제가 있어요. 국제기구를 통한 규제로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는 1947년 제정된 뉘른베르크 강령이 있어요. 이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대해 규정하고 있죠. 인간복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1997년 유엔총회에서 유네스코에 의해 주도된 인간유전자와 인권에 대한 보편선언이에요. 이 선언은 인간유전자를 이용한 상업 활동을 금지하고, 인간존엄에 위배되는 행위, 즉 인간복제와 같은 행위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규정해요. 이 선언에 대해서 유엔회원국들은 일반준수에 대한 외교상의 의무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체세포 복제배아 연구기관이 희귀·난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복지부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체세포 복제배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체세포 복제배아를 자궁에 착상시켜 인간복제를 시도하는 연구는 금지하고 있어요.

교과서에서 찾은 논술 / (철학·역사·사회·문학을 번갈아 연재합니다.)

지난해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뜻밖의 대상을 선정해 화제를 모았어요. 주인공은 바로 ‘당신(You)’이었어요. 인터넷 공간에 이용자제작 콘텐츠(UCC)를 열심히 보탠 ‘당신’이 200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것이죠. 또한 타임은 지난해 ‘올해의 발명품’으로 미국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www.youtube.com)를 꼽았어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유튜브는 평범한 20대 남성 3명이 만든 동영상 공유 사이트죠. 2005년 문을 연 유튜브는 동물원 비디오 한 편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하루방문자수가 1천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요. 하루에 재생되는 동영상수도 1억개에 달하고 있죠. 유튜브가 세계 최대 동영상 공유 사이트로 성장하자 미국의 검색회사인 구글은 유튜브를 16억 5000만달러(1조5500억원)에 인수했어요. 예전에는 개인들이 인터넷상에서 각자 필요한 정보를 무료로 나누는데 그쳤어요. 하지만 유튜브는 개인들이 만든 정보공유의 장을 열고 광고를 유치해 경제적 이익을 누렸어요. 이처럼 과거와는 달리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 정보의 공유화가 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그런데 정보의 공유화는 무료로 이뤄져야 하고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있어요. 교과서에 나온 문제를 보면서 정보의 공유화가 경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함께 생각해 볼까요?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정보와 지식의 생명은 나누고 공유하는 데 있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은 돈을 주고받지 않고 교환해야 한다. 그 보상은 물질이 아니라 심리적 보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은 영리적인 기업가가 아니라 무상의 봉사자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며, 어떤 조직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정되어서는 안된다. 1. 위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찬성 () 반대 () 2. 그 근거는 무엇인가? 정보화로 인해 산업의 구조는 재화 중심에서 서비스 중심의 생산으로 바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생산보다 정보를 중심으로 하는 지적서비스 생산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정보란, 인간의 지적활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무형의 생산물을 의미한다. 책이나 신문 등 인쇄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생산물은 물론,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와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것, 라디오와 같은 음성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것 등이 모두 정보에 포함된다. 그러면 정보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지는 정보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일반 제조업 생산품과는 달리 정보는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정보는 남에게 전하거나 판매를 해도 없어지거나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정보는 대량 생산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의 정보로써 모든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정보를 다른 정보와 합치거나 그 일부를 빼거나, 형태를 바꿈으로써 얼마든지 새로운 정보를 바꿀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지는 정보가 크게 중시되면서 육체노동이나 기술보다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기능이 사회적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 고등학교 도덕 - 교육인적자원부 - 10쪽 > 교과서는 정보를 “인간의 지적 활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무형의 생산물”이라 해요. 간단히 말해 정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생각해 낸 모든 것인 셈이에요. 그런데 교과서가 언급하고 있듯이 정보의 여러 특징은 노동에 대한 우리의 가치 판단과 산업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육체 노동만을 노동으로 인식했던 데 반해 최근에는 정보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활동도 노동으로 꼽히고 있죠. 그리고 기존의 산업에서는 여러 사람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노동했지만 지식 산업에서는 소수 혹은 1인이 특정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활동이 가능하게 됐어요. 한번 만들어진 정보는 없어지거나 줄어들지 않고 하나의 정보로도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고 창조적으로 만들어낸 정보는 물론 남이 만들어낸 정보를 변형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까요. 교과서에 따르면 정보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예요. 먼저 한 번 만들어진 정보는 없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아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의 경우 시간이 흐르거나 사용을 하면서 마모되거나 아예 사라지죠. 하지만 정보는 그렇지 않아요. 또한 정보는 남에게 전해지거나 판매되어도 그대로 있죠. 예를들어 블로그에 내가 만든 정보를 올렸더니 누군가가 그 정보를 퍼갔다고 해봐요. 그렇더라도 원래 정보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정보는 대량 생산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만든 정보가 남의 손에 들어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정보는 무한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여러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죠. 무한복제를 통해 같은 정보가 대량으로 생산되는가 하면 하나의 정보가 다른 정보와 만나 새로운 정보를 만들기도 해요. 또한 하나의 정보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거나 다른 정보를 보태거나 형태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정보를 낳기도 하죠. 이러한 정보의 특징들은 정보의 산업화를 이끌었어요. 정보의 산업화는 엘빈 토플러가 이미 예견한 바 있어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미래학자인 토플러는 1980년에 쓴 자신의 저서 《제3의 물결》을 통해 미래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바뀔 것이라 내다봤어요.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 즉 정보화를 통해 생겨난 산업은 정보를 중심으로 한 지적 서비스 산업이에요. 정보화란 말의 뜻이 가물가물하다고요? 교과서는 정보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요. 일반적으로 정보화란, 정보 통신 기술을 사회 생활의 각 부문에 응용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정보처리능력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컴퓨터, 통신 속도를 극대화시킨 광섬유와 인공 위성의 등장은 현대 사회에 정보화라는 새로운 현상을 출현시켰다. 미래학자 토플러는 이러한 정보화를 가리켜 농업 혁명(제1의 물결)과 산업 혁명(제2의 물결)에 뒤이은 ‘제3의 물결’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고등학교 도덕 - 교육인적자원부 - 9쪽 > 설명이 다소 딱딱하게 보일 수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정보화’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더구나 ‘정보화’는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도 하고요. 핸드폰을 통한 정보 교환이나 인터넷 상에서의 정보 습득과 커뮤니케이션도 정보화의예라 할 수 있어요. 이처럼 정보의 산업화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정보가 지니는 여러 특징들 때문에 정보는 결코 산업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특히 인터넷상에서 만들어지는 정보와 지식은 나누고 공유될 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요. 인터넷은 정보에 대한 자유접근이 생명인 세계니까요. 또한 인터넷에서의 정보와 지식은 인터넷 상의 다른 정보와 지식과 만나 더 유용한 정보와 지식으로 거듭나기도 해요. 이 때문에 정보의 산업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보와 지식은 무료로 교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요. 더불어 인터넷은 영리적인 기업가가 아니라 무상의 봉사자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하죠. 그들은 인터넷이 어떤 조직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정되어서도 안 된다고 해요. 정보의 공유화를 주장하는 것이죠. 인터넷이 통제되거나 조정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교과서는 이렇게 설명해요. 이러한 인터넷은 여러 네트워크가 서로 자발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포괄적인 지배력을 가지는 특정한 관리자가 등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터넷에 의한 정보의 확산은 중앙 집권적이고 수직적인 조직 원리를 분권적이고 유연한 조직 원리로 나아가도록 촉진시킨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활성화는 중앙 정부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가상 공간의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이처럼 정보화는 새롭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 고등학교 도덕 - 교육인적자원부 - 11쪽 > 인터넷에서의 정보는 이용자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참여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런 형태로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될 때 인터넷과 인터넷의 정보는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하지만 정보의 공유화가 이뤄져서는 안되며 정보도 충분히 산업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정보의 공유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보에도 소유권이 있고 처음 정보를 만들어낸 주인에게 그 권리와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요. 특히 정보를 만드는 데에도 노동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설명하죠. 실제로 모 인터넷 게임 업체는 이용자들이 정품을 사지 않고 공유화된 게임만을 사용하려 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어요. 정보의 공유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보가 무상으로 공유될 경우 정보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도 지적해요. 현재 인터넷에서는여러 정보의 일부를 모아서 하나의 새로운 정보를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 과정에서 원래 정보들의 의미가 손상될 수도 있고 원래 정보와 상관없는 엉뚱한 정보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인터넷 정보에 대해서도 지적재산권이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요. 최근에는 정보뿐 아니라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여러 콘텐츠의 지적재산권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해요. 대표적으로 온라인 음악서비스업체인 ‘소리바다’의 경우를 꼽을 수 있어요. 소리바다는 개인대 개인간(P2)에 음악 파일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요. 2000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소리바다는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다 2002년 소리바다는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서비스 중지 결정을 받아요. 이후 소리바다는 유료로 서비스를 제공했어요. 그러자 소리바다를 이용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무료로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소리바다의 장점이자 매력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지자 더이상 이용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음반업체들은 소리바다의 서비스가 유료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해요. 또한 각 음악의 저작권이 음반업체에 있으니 서비스 제공시 어느 정도의 대가를 자신들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말하죠. 음반업체들중에서는 최근 한국음악의 침체가 소리바다처럼 무료로 음악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업체들 때문이라 지적하기도 해요. 이처럼 정보 사회로 접어든 요즘 정보의 공유화를 두고 찬·반주장이 엇갈리고 있어요. 과연 정보는 무료로 공유화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유료로 공급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정보 공유화의 이익은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요? /김경미 유레카논술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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