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논술 고사의 제시문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 책은 ‘장자’로 총 9번 출제되었다. 동양 고전인 ‘논어’(5회) ‘맹자’(4회)가 그 다음이며, 서양고전 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4회)과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3회)가 있다. 전부 동서양의 고전(古典)으로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서는 배우지 않는 책들이다. 그러다보니 논술 하면 고전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고, 지금도 많은 학교와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고전을 읽힌다. 그러나 강제로 고전을 읽히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독(毒)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논술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신장시켜 주기 위한 교육이다. 다시 말해 학생들의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지, 암기력이나 독해력을 길러주는 교육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종합적인 사고력을 위해서는 암기력이나 독해력도 필요하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새로운 생각을 해 낼 수는 없으므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독해력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지식들을 구조화해서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는 암기력도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대학 논술 시험에서는 학생들에게 논제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제시문을 함께 출제해왔다. 그러나 그 제시문의 출전이 대부분 고전이었고, 난해한 지문을 독해하지 못한 수많은 학생들이 논술에 손도 대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그동안의 논술 시험은 어려운 제시문을 독해할 수 있는가 없는 가의 독해시험이었다. 그러나 논술 시험이 변하고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15개 주요 대학의 2008학년도 논술 모의고사 제시문(인문계열)을 보면 교과서 비중이 29%이다. 지금까지 교과서 비중이 2.9%였던 것에 비하면 10배나 늘어난 것이다. 심지어 서울대는 교과서에서 47.1%가 나왔으며, 경희대(45.5%), 건국대(33.3%)도 교과서 비중이 높아졌다. 논술 시험이 학생들의 사고력을 측정한다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고전 지문을 읽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심층적, 다각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측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되는 논술 시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학생들에게 고전을 강제로 읽히는 것은 학생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 물론 학생이 충분한 독해력을 갖고 있어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정도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해 본 결과 그 정도의 독해력을 갖고 있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전 지문을 독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고전 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논술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두려움마저 갖게 한다. 또한 논술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되어 논술이란 어려운 고전의 배경지식을 암기하여 서술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논술 시험에서 자신이 아는 주제가 나오게 되면 무조건 비슷한 배경지식을 서술하는데, 이는 대부분 논점을 이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에 비해 교과서는 논술의 보고(報告)이다. 그동안 논술 시험에 나왔던 수많은 주제들이 이미 교과서에 나와 있다. 이 말이 믿기 어렵다면 고등학교 사회, 윤리, 문학 교과서들을 한번 펴 보시기를 바란다. 어떠한 주제도 관련된 내용을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교과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적당한 수준의 어휘로 서술되어 있어 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독해력에 구애받지 않고 학생들의 사고력을 신장시켜 줄 수 있다. 그리고 교과서에는 이미 논술 문제가 들어 있다. 많은 분들이 이를 놓치고 있는데, 교과서에 들어 있는 학습 활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논술 문제이다. 자신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의 학습 활동만 꾸준히 풀어본다면 논술 준비를 따로 안 해도 될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준다. 논술이란 따로 시간을 내서 혹은 학원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정규 수업 시간에 교과서를 통해서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려운 고전을 헤매며 논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키우는 대신, 늘 손에 들고 다녔던 교과서를 꼼꼼히 읽고 학습활동을 풀어본다면 논술에 대한 자신감과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세영 수성고 교사
사회
이세영 수성고 교사
2007-11-1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