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실업교육현장을 가다 <7> 영국

영국의 직업교육은 유럽내 다른 국가들보다 늦게 시작된다. 만 5세부터 시작되는 의무교육은 초등학교(Preparatory) 6년, 중학교(Secondary School) 5년으로 16세까지 모두 11년간 실시된다.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대학진학 또는 직업교육 등의 구분없이 모두 같은 교육을 받게 된다. 국내 사정과 별반 다를 바는 없으나 유럽내 인접한 직업교육 선진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7세가 되면 학생들은 일반 대학 또는 직업학교인 칼리지(college)에 진학을 하던 지 취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때 취업을 하는 학생들은 아무런 직업교육도 받지 않은 채 산업현장에 뛰어드는 셈이다. 이렇듯 학생들에 대한 직업교육의 천대(?)는 최근 영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교육제도 실패를 공언하고 나서게 된 하나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영국내 17세 청소년 기준으로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30%, 직업교육 또는 훈련 과정을 받는 학생들이 15%이다. 특히 아무런 기술도 없이 취업한 청소년들은 25%이상이며, 17세 실업률도 25.5%나 되고 있다. 이는 저소득층 출신의 학생들이 직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방황하거나 탈선을 조장하는 원인으로 꼽히면서 지속적으로 정책변화가 제기됐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오는 2013년부터 의무교육을 현행 16세에서 18세로 확대하는 한편 이 시기에 대학진학을 원하지 않는 학생들에 한해 직업교육을 전폭적으로 실시한다는 방침이다. 원래 영국 교육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의무교육을 ‘학교’에 한정시키지 않는 것에 있었다. 영국이 지난 1944년 제정한 교육기본에는 의무교육 범위에 대해 ‘학교 또는 그외의 형태’로 규정했을 정도로 학생들이 산업현장의 실무교육 등 직업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중시했었다. 이에 따라 한동안 직업교육을 천대하면서 발생된 청소년 범죄 등 갖가지 사회적 문제를 의무교육확대를 통한 직업교육 실시로 바꿔보겠다는 전략으로 성공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이에 반해 영국의 고등 직업교육은 유럽내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은 수준의 현장중심의 실무교육으로 대표된다. 특히 칼리지(college)로 통하는 고등 기술교육과 산업현장내 직업교육은 평생교육(Further Education)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잘 돼 있다. 현장에서는 이론보다는 직업 현장에서 필요한 실무교육 중심으로만 실시된다. 직업교육 칼리지(Further Education College·FE College)는 대부분 직업 교육 재정 지원 협회(Further Education Funding Council), 스코틀랜드 교육 산업부(Scottish Office Education and Industry Department), 북아일랜드 교육부(Department for Education in Northern Ireland) 등의 정부 기관으로부터 보조를 받는 공립으로 무상 또는 소정의 등록금만 내면 된다. 또 각각의 직업 교육 과정들은 여러개의 산업체와 연계돼 있어, 산업 현장에서 요구되는, 즉시 활용가능한 최신 기술을 중심으로 교육한다. 모든 직업 교육과정에는 필수코스로 일정 기간의 현장 실습이 포함돼 있어 학생들은 현장 실습을 통해 실무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며 이는 높은 취업률로 이어진다. 영국 직업교육 과정의 또 하나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융통성과 학위 과정과의 연계성이다. 상당수 직업 교육 과정은 입학 요건이 까다롭지 않으므로 현재 교육 정도 또는 졸업장에 구애 받지 않고 입학이 가능하다. 특히 언제라도 실무 교과목 A-Level (Vocational A-Level), 국가 자격증 과정 (National Diploma·ND)이 고급 국가 자격증 과정(Higher National Diploma·HND) 등의 직업교육 과정을 마치면 학사 과정에 입학하거나 편입할 수도 있다. /최종식·김대현기자 dhkim1@kgib.co.kr 2013년부터 16세→18세로 의무교육 확대 영국 정부는 오는 2013년부터 현행 16세까지의 의무교육기간을 18세까지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13년이면 내년, 2008년에 중학교를 입학하는 아이들이 이 정책의 첫 대상자가 된다. 영국의 의무교육 연령은 지난 1880년 10세로 시작해서, 1893년 11세, 1899년 12세, 1918년 14세, 1947년 15세, 1972년 16세로 늘려 왔고, 이번에 18세로 늘리면, 40년만의 확대가 된다. ‘청소년 직업훈련’이라는 측면에서 ‘18세 의무교육’ 이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시도도 아니다. 영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직업교육 또는 훈련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고,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6세에 의무교육이 끝나고 대학진학을 꿈꾸며 후기 고등학교 과정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부유층 자녀들이며, 16세에 학업을 포기하는 아이들은 저소득층 자녀들이다. 18세 의무교육이 실시되면, 지금까지 정부가 제공하던 청소년 직업교육을 외면해왔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집중적으로 압력이 걸리게 된다. 그동안 현장 직업 훈련생을 받아들이는 회사들이 대체적으로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단순노동에, 제대로 된 ‘가르치는 과정’이 없어 ‘직업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데려다가 ‘부려먹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갈만한, 또는 가고 싶은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회사들을 만들어 놓고 의무교육을 하면 좋지만, 옛날 같은 시스템 그대로 두고, 의무교육으로 만들어 강제로 가게 한다면, 아이들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난 20년 동안 실패를 거듭해왔던 청소년 직업훈련 정책들은 ‘사업’의 수준이었지만, 이번처럼 ‘법령’ 수준으로 만들어지면, 그 후유증은 상당히 복잡하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최종식·김대현기자 dhkim1@kgib.co.kr /사진=김시범기자 sbkim@kgib.co.kr

선진실업교육 유럽을 가다 <6> 프랑스(2)

프랑스의 직업교육은 지속적인 진로 상담을 통해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이 장래 희망을 구체화하기 시작할 때부터 재취업을 희망하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직업을 완성할때까지 지속적인 진로 상담을 통해 관련 정보를 제공해 준다. 프랑스의 진로 상담은 의무교육인 중학교(꼴레쥬·college)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내 모든 중학교에는 진로 상담사가 상주하고 있다. 이들 상담사들은 교직 외에도 별도의 상담과 진로 등 관련 학과를 전공한 전문가들이다. 이에 따라 상담사들은 학생들이 학업을 모두 마친 뒤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당장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공업 또는 인문계 고교중 선택해 진학할 수있도록 해준다. 중학교 진학과 함께 장래의 직업과 이에 따른 관련 정보를 개인별·맞춤식 특별 상담을 통해 제공받는 셈이다. 이와는 별개로 모든 중학교에서는 매년 수차례씩 다양한 직업전문가를 학교로 초빙, 직업홍보 등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진로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도 한다. 중학교 과정에서 학생들의 직업관을 확고히 심어줌으로써 청소년 시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을 떨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진로 상담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프랑스에는 동네마다 소규모 진로 상담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진로상담센터에서는 지역내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진로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교육청을 통해 학생 개인별 성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성적관리를 받을 수 있으며, 지역내 학생들이 모여 스터디 그룹 등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는 ‘공부방’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같은 진로상담센터는 적은 규모의 동네별 센터로 그치지 않고 각 구(Arrondissement)별 상담센터는 물론 시별로도 상담센터가 운영된다. 상담센터의 기본적인 역할은 학생들의 진로 선택과 그에 따른 성적관리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한 정보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상담센터는 관내 기업들이 제공하는 구인정보를 수시로 업데이트 관리하며 센터 이용자들과 연결시켜 주는데 지역에 국한된 기업과 취업정보 등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상담센터별 동네→구→시→국립 상담센터로 갈수록 다양한 구인·구직 직업정보를 받아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중학생의 경우 실업·공업 또는 인문계 진학을 위해 상담센터를 찾으면서 이론적인 또는 실제 상담을 통한 진로정보를 받을 수 있지만 고교과정 이후부터는 구직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모가 커질수록 대학 도서관에 버금가는 자료와 시설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용객들 역시 대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모든 상담센터에서는 모든 상담학생들에 대한 직업관과 상담 내용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이용객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와 자료 등을 수시로 업데이트해 제공한다. 또 모든 상담센터는 교육청이 운영하면서 중·고교는 물론 대학까지 상담센터 직원이 상주·또는 수시로 방문, 진로선택에 있어서 학교와 연계한 실질적인 중계자 역할을 하고 있다. 파리 CIO(Centre Dinformation Dorientation·파리 상담센터) Solenne Pavard(쏠렌느 빠바르) 센터장은 “프랑스의 경우 학생 개인별 성적을 교육청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와 상담센터가 이를 공유해 학생진로지도에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세부적인 도움까지 줄 수 있다”며 “중학교부터 직업을 선택할때까지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개인의 능력과 희망 직업에 근접할 수있도록 하는 것이 프랑스 교육의 목표다”라고 말했다. /최종식·김대현기자 dhkim1@kgib.co.kr <실벵 드 블릭께르 프랑스 국립직업정보원 상담사> “학업과 진로선택 연계 맞춤식 직업정보 제공”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합니다” 프랑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ONISEP(국립직업정보원). 교육청이 운영하는 직업상담센터로 학교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곳은 파리내 전체 중·고교를 비롯 대학과 연계, 학생들의 개인적 성적, 성향과 재능 등의 상세 정보가 수집돼 있다. 또 파리와 인근 지역 기업에 대한 구직 현황까지 구비돼 있다. 이에 따라 하루 평균 50~100여명 이상의 학생 등이 진로 상담과 구직을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그러나 모두 자발적으로 이곳을 찾는 것만은 아니다. 일선 학교에서는 소위 문제 학생 등의 상담을 이곳에서 받도록 하고 있다. 센터내 심리상담사가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 또는 교사의 손에 이끌려 상담을 받는다. 또 센터 자체적으로 직업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방과후 또는 방학중 기업 등의 견학과 기업 전문가를 초빙해 설명회 등을 갖기도 한다. 이처럼 이곳은 진로를 위한 전문기관으로 일선 학교와 함께 연계해 학업과 진로선택을 완성시켜 주는 또하나의 학교로 자리잡고 있다. ONISEP 상담사 Sylvain De Bleeckere(실벵 드 블릭께르)는 “어릴때부터 성적과 장래 희망 등을 고려한 맞춤식 직업정보를 줌으로써 빨리 진로를 선택하면서도 다양한 기회를 가지는 셈이다”라고 말했다./최종식·김대현기자 dhkim1@kgib.co.kr

<이해웅의 입시전략>2008학년도 대입 논술 대비법 <1>

[기획의도] 등급제로 진행된 2008학년도 수능이 끝났다. 수능 변별력 상실과 등급제의 허망함으로 예상했던 대로 논술이 올해 입시의 화두로등장하고 있다. 평상시보다 등급이 나오지 않은 수험생들에게는 마지막 역전의 기회로, 본인이 원하는 등급을 받은 수험생들에게는 동점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부담으로 논술은 우리 앞에 다가서 있다. 생소하고 부담스러운 논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막연해 하는 수험생에게 도움 을 주고자 특집을 마련했다. 논술 유형별로 대학을 구분하고, 그 준비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모든 대학의 논술을 따로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가 지원하려는 학교를 그룹화 해서 활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수능은 끝났지만 입시는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서 반드시 목표한 대학에 진학하길 기원한다. [들어가며] 논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인식하자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2008학년도 새로운 입시는 내신, 수능, 논술의 3중고로 불렸지만 사실은 상위권 대학의 ‘수능+논술’전형, 일부 우선선발을 중심으로 한‘수능 중심’ 전형과 중하위권의 ‘내신 중심’전형의 세 전형으로 대변되는 것으로 끝나가고 있다. 수능이 등급제로 치러지면서 예상했던 모든 문제점을 노정한 이 시점에서 수험생들은 논술을 실시하는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마지막 ‘패자부활전’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수능 등급보다 상위 대학을 진학하려는 학생에게는 기회이고, 수능 등급에 맞추어 진학하려는 학생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물론 일부 학생들은 논술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향지원으로 입시를 끝내려는 경향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짧게는 1년 길게는 6년 이상을 매달려 온 입시에서 손해보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최소한 수능 등급에 맞는 대학에는 진학을 해야 할 것이다. 고려대학교를 예로 들어 보면 수능이 등급제로 바뀌면서 수능으로 구분할 수 있는 학생들의 급간이 점수제에 비해서 줄어들었다. 고려대의 경우, 수능환산점수로 만점인 학생이 문과의 경우 대략 1,600명, 이과는 760명 정도가 예상된다. 만점자도 논술 점수가 부족하면 불합격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표1> 참고) 논술 채점의 구조를 이해하자 고려대 법대에 지원하려는 수험생의 경우 다음과 같은 수능과 논술의 상관관계를 갖는다.(<표2> 참고) 고려대는 수능 400점 만점, 논술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95점으로 합격생을 선발한다. 물론 내신이 500점 들어가지만 사실상 내신 차이가 미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시하도록 하겠다. 물론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고려대 논술 채점이 9등급으로 진행되고 100점 만점과 95점 최하위 점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각 등급 간의 배점이 대략 0.5점(전형 총점 1000점 만점 기준)이 된다. 그리고 논술 시험 결과와 수능을 합해서 합격 커트라인이 497.5가 된다고 가정하자.(물론 이는 순수한 가정이다. 커트라인은 올라갈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 커트라인의 주요 변수는 지원자들의 수능점수와 논술점수이다.) 위의 조건에 따라 최종 결과를 예상해 보면 수능 400점 만점을 받은 수험생도 논술에서 6등급 이하를 받게 되면 불합격이 된다. 반대로 수능 398점인 수험생이 논술에서 1등급을 받으면 합격이 가능하게 된다. 논술 고득점이 필요하다 수능 변별력의 약화로 논술은 기본점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당락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 논술 고득점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각 학교별로 모두 준비할 수는 없다. 논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주어진 시간에 모든 학교의 논술을 별도로 준비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므로 논술을 실시하는 대학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해웅 유레카논술아카데미 입시연구소장

논술은 실용적 글쓰기 2

논술은 학생들이 지닌 비판적 사고 능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논리적 글쓰기 능력을 판단하는 일종의 통합적인 시험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채점 기준표를 보면, 비판적 사고 능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어, 논술 지도 교사들은 자칫 논리적 글쓰기 능력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 난다할지라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논술에서 가장 기본이 된다. 이런 점에서 논술을,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여 자신의 견해와 반대 입장에 있는 보이지 않는 독자를 설득하는 글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논술문이 논리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논리적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각 대학의 논술문 채점 기준표를 분석해 보면 논술 채점시에 ‘논리적 기준’이 매우 중요한 항목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요구하는 논리적 기준에는 ‘논지의 적절성’, ‘논의의 일관성’, ‘논거의 적합성’, ‘논증 방식의 타당성’ 등이다. 먼저, 상대방이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을 펴는 것이 논지의 적절성이다. 논술은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글이므로, 주장은 상대방이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둘째, 하나의 논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논의의 일관성이라고 한다. 글쓰기에서는 맨 처음에 화제로 삼았던 것이 서술해 나가는 과정에서 곁가지로 빠지거나 엉뚱한 화제로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셋째, 논술문은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글이므로 논거는 논술문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논거는 확실하고 풍부하며 사실이면서 대표성을 지녀야만 적합성 있는 논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논술은 사실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입증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글이므로 논증 방식이 타당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을 논증이라고 하는데, 논술문에서 제시되는 주장은 반드시 일정한 논증을 거쳐야 한다. 논증을 거치지 않은 견해나 주장은 일방적인 외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논증에는 연역적 논증과 귀납적 논증이 있고 논증의 종류에 따라 그것을 운용하는 규칙과 절차가 있다. 규칙이나 절차가 무시된 논증은 불완전하거나 잘못된 것이고, 이런 논증은 설득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논증이란, 전제의 수용가능성(Acceptability)과 전제의 결론연관성( Relevance) 그리고 전제의 적절 충분성(Sufficiency)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올바른 추론을 위해서는 논증의 형태를 알아야 하는데, 모든 논증은 크게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추론으로 나눌 수 있다. 연역 추론과 귀납 추론의 구별은 전제가 결론을 뒷받침하는 정도에 따른다. 전제가 결론을 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연역적 추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전제는 결론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결론이 참인 것을 결정짓는다. 즉,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역 추론에는 한 명제에서부터 다른 명제를 직접 이끌어내는 직접 추론 방식과 다른 명제의 매개를 통해 추론하는 삼단 논법(간접 추론) 방식이 있다. 반면, 전제에 의해 뒷받침되는 정도가 불완전한 경우를 귀납적 추론이라 한다. 전제는 여전히 결론을 뒷받침하나 전제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믿을 만한 것을 여길 근거를 제공할 뿐 완전하게 결론이 참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전제들로 이루어진 결론도 귀납적 논증에서는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귀납 추론에는 몇 개의 개별적인 사례에서 일반적인 명제를 이끌어 내거나 일반성이 적은 명제들을 근거로 하여 좀 더 일반성이 큰 명제를 이끌어내는 일반화 추론과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들과 어떤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다른 측면에서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유비추론이 있다. 이러한 연역 추론과 귀납 추론은 논증 구조를 분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윤영진 (광명북고 교사)

비빔밥 논술 / 상식과 규범의 이면을 찾아야(미셀푸코)

최근 ‘미드’ 열풍을 주도한‘CSI 과학수사대’를 보면, 수사관은 범죄 현장에 숨어있는 단서를 찾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포위망을 좁혀간다. 지나치기 쉬운 조그만 단서도 의심해 보고 이를 통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찾아가는 추리력이 매우 놀랍다. 이 드라마가 주는 재미는 범인 찾기 놀이를 통해 ‘범죄를 재구성’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스터리 수사물을 통해 추리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 미셸푸코 /1926~1984 > 프랑스 철학자로 소위 후기 구조주의 사상가로 분류된다. 그의 지적 관심은 철학뿐만 아니라 정신병리학, 심리학, 역사학 등 폭넓게 걸쳐 있었다. 대표작으로는《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 병원의 탄생》(1963)《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1976) 등이 있다. →논제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간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며 삶을 주기도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죽음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병원의 긍정적 기능은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인지 써보자. →[푸코 Tip] 병원의 긍정적 기능은 상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국민보건의 측면에서 서술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문제점을 접근할 때는 푸코의 문제의식에 따라서 써 보세요. 상식적인 생각을 뒤집어보고 타당한 근거를 찾는 방법이죠. 규율을 통해 죄수를 훈련하고 통제했던 감옥의 교화방법을 병원의 시스템에도 적용해보세요. # 어느 사회나 수많은 갈등을 안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정당 간의 대립이, 경제적으로는 노사 간의 갈등이, 사회적으로는 가치관의 갈등이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이 있듯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여러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법적으로 해결하자는 사람, 윤리와 상식으로 해결하자는 사람, 대화로 해결하자는 사람, 전문가의 견해로 해결하자는 사람, 힘으로 해결하자는 사람 등 그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어떠한 해결책이든 사태의 원인을 발견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일 것이다. 과학수사대가 범죄 현장의 단서로 범죄를 재구성하듯 주어진 문제의 단서를 가지고 문제의 윤곽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풀이의 기본전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열었다. 이 명제는 ‘인간의 사고’를 철학의 원리로 삼았다는 점에서 인본주의를,‘ 생각하는 이성’으로부터 세계의 진리를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부여받았다. 친구들 사이의 말다툼에서도 합리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비가 올거라 주장하는 학생과 점괘를 보니 오늘 비가 온다고 주장하는 학생중 여러분은 누구 말을 더 신뢰하겠는가. 과학은 자연을 숭배의 대상에서 앎의 대상으로 전환시켰고, 이로써 인간은 자연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이제 진리의 왕관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주어졌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에덴동산의 행복을 얻지 못했다. 특히 세계 1, 2차 대전에서 보았듯이 과학기술의 발달에 영향을 받은 현대 무기는 전쟁터에서 민간인과 젊은 군인들을 학살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 무렵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대결로 치닫기도 했다. 이후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준 전체주의적 경향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합리적인 인간의 판단에 따라 사회가 계속 진보할 것이라는 기대가 신기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발생한 것이다. 합리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 근대사회는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의심을 배경으로 미셸 푸코는 ‘근대의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탐구하였다. 데카르트가 말한 ‘의심할 수 없는 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특히 니체의 계보학을 본 따, 근대 초기 역사 속에서 사회가 근대의 개인들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그 과정을 파헤친 방법이 독특하다. ‘니체의 계보학(genealogy)’이란 학문을 전개한 방법론을 말한다. 마치 나의 뿌리를 알기 위해 가문의 족보를 살펴 올라가는 방법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산 음료수의 표시성분을 보는 것보다 생산 공장에 가서 어떻게 만드는지를 보는 것이 그 음료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보다 ‘나는 어떤 역사속에서 태어났는가’를 아는 것이 더 정확하게 나의 탄생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푸코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을 뒤집어 볼 것을 제안한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진짜 ‘나’가 아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뒤집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경험한다. 하지만 과연 거울이 없다면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까? 혹시 거울이 ‘나는 이렇게 생겼다’고 속이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거울이 보여준 나이지 않은가? 이처럼 푸코는 인간의 의식과 지식을 일종의 ‘거울의 반영’으로 이해했다.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란 사회와 무의식을 지배하는 권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푸코의 사고법은 논술고사에서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고 주장의 타당성을 밝히는 서술의 방식에 활용될 수 있다. 우리들의 신체(몸)에 어떻게 권력이 작용해 왔는지에 대한 푸코의 생각을 따라가보자. ● 고문에서 규율로 통제되는 육체 《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대표적 저서다. 푸코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의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근대적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학교, 공장, 정신병원, 감옥 등이 모두 비슷한 시스템을 갖춘 제도라고 말한다. 푸코에 의하면 이 기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교육하고, 노동하고, 치료하고, 교화하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들은 모두 규율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는 규율제도들인 것이다. 사극을 보면 역모의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매우 잔인한 재판과정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했을까? 푸코는 이러한 끔찍한 사법행위가 자행된 이유가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절대주의 권력의 속성 때문이라 말한다. 절대 권력인 왕은 개인의 신체에 가할 수 있는 위협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극대화하여 복종시키려 한 것이다. 고문을 통한 공포의 조성은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을 통제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키려는 일종의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공개처벌과 신체형벌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민중들은 끔찍한 고문을 보면서 죄수들을 동정하거나 사형수의 최후 변론에 동요되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탓이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권력에 대한 공포감을 줄이면서도 민중의 저항을 제어할 새로운 사법체계를 고민했다. 그 결과 고문과 같은 신체형벌은 점차 감소하고 권력의 신체에 대한 구속력도 완화되었다. 그러면 인간은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까? 이제 권력은 고문이라는 직접적 고통이 아니라‘훈육을 통한 신체의 통제’로 나아간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죄인에 대한 인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진보된 사법행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신체에 가해지는 권력의 작용이 변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처벌이 고문에서 교화로 이동했다면, 그것을 집행할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이 바로 감옥이다. 감옥은 간수가 죄수들을 관리할 수 있는 건축기술의 발달을 낳았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 할 수 있는 효율적인 건축구조가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구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구속한다면 얼마나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따라 범죄와 그 처벌에 대한 법률지식이 발달하였다. 이처럼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여 권력과 지식의 발달이 어떻게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혔다. 푸코에 따르면 법학의 발달은 사법체계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근대사회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와 합리성이 보장된 민주사회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푸코는 바로 그러한 생각을 비틀어준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사회가 사실은 ‘감옥’처럼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고. 그러한 의문 속에 푸코는 감옥의 규율이 군대, 학교, 공장, 병원 등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감옥에서 뿐 아니라 군대, 학교, 공장, 병원 등 그 어느 곳에서든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행동한다. 현실을 떠올려 보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지각하지 말고,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규율들은 직장 생활에서도 환영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교는 미래의 직장 생활을 위한 규범을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사회적 규범은 약속으로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 규범을 어길 경우 처벌을 받는다. 그것은 합리적인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이기에 지켜야 한다. 스스로 내린 벌이기 때문에 달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러한 논리도 사실은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규율을 합리화 하려는 논리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과연 푸코처럼 근대사회를 분석하는 방식이 어떤 도움이 될까? 푸코는 근대 초기 사회를 분석하면서 현대 사회가 그때로부터 뿌리 내리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마치 족보를 들추듯 우리들이 이렇게 살게 된 연원을 살핀 셈이다. 푸코를 따라가 보면, 현대사회의 갈등 구조들이 그 뿌리가 깊어 단순히 대화나 법적 장치로는 해결될 수 없는 구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백화점에 숨어 있는 자본권력의 손짓 이제 사회 속에서 자본권력이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와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온 과정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쇼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은 어떨까? 고대나 중세에도 시장과 상점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백화점같이 대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서구사회의 경우 백화점은 19세기 중반이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왜 19세기 중반부터 집중적으로백화점이 생겨났을까? 이는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대량소비라는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백화점은 생산과 소비를 대량으로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백화점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대량소비가 가능하려면 인구가 집중된 도시가 필요하다. 도시인구를 백화점으로 연결하는 교통기관의 발달도 필수적이다. 또한 백화점이라는 거대상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을 위한 주식회사와 금융기관의 발달도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백화점이란 판타지공간을 만들어낼 건축기술의 발전과 신문과 같은 광고 매체의 발달도 있어야 한다. 이처럼 백화점은 단순한 쇼핑공간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을 변화시킨 수많은 기술이 응축된 공간이다. 백화점의 등장은 소비자들에게 소비와 선택의 자유를 열어 주었다. 우리는 백화점에 가서 멋진 제품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소비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백화점은 단순히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탄생한 곳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진열된 상품들을 주체적으로 구경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상품의 눈으로 볼 때는 지갑을 열 예비 구매자를 구경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주체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의 도구로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대량소비의 사회에서 광고로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의 기호에 따라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백화점의 판타지는 판매를 통해 이윤을 실현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 소비대상으로 전락한 육체 우리들의 육체가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육체라는 점은 장 보들리야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소비의 사회》에서 주객이 뒤바뀐 소비의 대표적 사례로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 중세사회에서 육체는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금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금욕의 장막을 걷어내고, 육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날 얼짱문화와 성형의 유행은 아름다워지려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육체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거대하고 은밀한 사회 구조의 결과이다. 소위 예쁜 여자는 착하며, 성공한다는 드라마 속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끊임없이 외모에 대한 소비를 자극한다. 즉 육체와 외모는 나의 실체가 아니라 소비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념이며 기호일 뿐이다. 오늘날 웰빙문화, 얼짱 문화, 성형유행 등은 단순히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본성의 발로가 아니라 대량 소비 사회가 창출한 시장이 가진 특징일 뿐이다. 그러니 예뻐지고 잘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 논리가 아니라 배후를 통찰하자 이처럼 푸코와 보들리야르의 주장은 사회와 인간을 인간중심으로 바라보았던 전통적 시각에 반기를 들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세계의 중심인 주체이며, 합리적 주체로서 인간은 세계를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발전은 모두 이러한 인간관에 기초했다. 그러나 푸코는 이를 뒤집는다. 친구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친구가 말하는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심전심처럼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푸코의 계보학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사회구조의 배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물론 푸코의 주장이 어떤 정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푸코의 문제의식과 뒤집어 생각해보는 사고방식은 일상적인 생활과 사회에 대하여 규범과 상식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비빔밥 논술

영상토론(映像討論) <오만과 편견>논술로 감상하기 18세기 영국 사회를 들여다보니 결혼은 재산획득과 신분 상승을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경우가 허다하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보면 좀 다를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입으로는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라 미화하지만 실제로 결혼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어느 만큼 보장해 줄 수 있는지 저울질한 연 후에야 하는 일종의 보험 상품 같다. 너무 지나친 풍자일까? <오만과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다며 조건을 중시하는 전통적 결혼관에 맞선다. 그는 사랑의 결실인 결혼을 향해 당당히 걸어 나가지만, 그 길이 쉽지는 않다. 자신에 대한 ‘오만’과 타인에 대한 ‘편견’이 방해꾼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베넷가의 자매들을 보며, 나는 과연 누구와 가까운지 견주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김경미(상임연구원) CF 광고에서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미녀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재벌이 아닐까? 유명 연예인들과 재벌의 결혼 소식은 언제나 구설수에 오르내린다. 몇 달 전에는 1000억 재산가가 자신의 딸을 대신해서 공개구혼을 해 화제를 모았다. 공개구혼에는 수백명의 남성들이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걸 보면 여성이나 남성이나 부자와 결혼하기를 꿈꾸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결혼’이 장사처럼 거래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사실 결혼의 이중성이 꼭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가 사이에서만 드러나는 문제는 아니다. 정도와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의 관문을 통과할 즈음에는 멈칫거리며 자신의 배우자를 전혀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돈 많은 신붓감, 신랑감, 사윗감, 며느리감이 나타나면 절로 눈이 밝아진다. 고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엘리자베스의 사랑과 결혼을 보면서, 과연 우리 안에 결혼에 대한 이중잣대가 없는지 곱씹어볼만 하다. ●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 사람들은 말한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고. 더불어 결혼은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라고. 사랑과 결혼의 관계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사랑은 결혼의 전제조건이고, 결혼은 더 큰 사랑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 제인 오스틴의 유명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만과편견>을 보면 그 비유가 꼭 들어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오만과편견>은 18세기 영국의 가난한 시민계층 베넷가(家) 사람들 이야기를 화면에 담았다. 베넷가의 안주인 베넷부인은 딸만 다섯인데 딸들의 결혼문제야말로 일생일대의 고민거리다. 다섯 딸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해 보면, 제인, 엘리자베스, 키티, 메리, 리디아다. 베넷 부인은 딸들의 ‘유리한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언제나 분주하다. 짧게 말하면 <오만과 편견>은 ‘결혼’을 두고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담은 이야기다. 그런 베넷부인이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 젊고 부자인 빙리 씨가 이웃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베넷 부인은 이것이야말로 딸들의 ‘유리한 결혼’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어떻게 해서든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 동분서주한다. 빙리 씨에게 자신의 딸들을 소개시키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으므로. 그런데 대체‘유리한 결혼’이란 어떤 결혼일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베넷부인에게 유리한 결혼이란 자신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과 결혼해 평생을 편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은 물론 가족들의 살림에도 보탬이 되는 결혼이다. 이렇게 단정하고 보니 베넷부인은 돈만 밝히는 속물로 보인다. 아니, 베넷부인만 이런 ‘유리한’ 결혼을 바란 것은 아니다. 제인과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나머지 딸들도 그런 결혼을 꿈꾸었고, 베넷가의 주변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비단 여성들만 이런 유리한 결혼을 꿈꿨던 게 아니라 남성들 역시 부유한 여성이나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당시 영국 사람들은 모두 속물? 하나의 일반적 관념은 그 사회상에서 비롯된 것이니, 영화에 나타난 사람들의 결혼관은 당시 영국 사회의 한 단면이 사실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결혼이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을 이해하기 한결 수월할 것이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장남만 부모의 재산과 지위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 외의 아들들은 군인이나 목사가 되어 귀족의 지위와 생계를 근근이 유지해 나가야 했다. 그러니 장남 이외의 아들들이 부를 누릴 수 있는 기회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상대와 결혼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딸들은 어떤가? 차등없이 균등하게 상속받을 수 있었을까? 딸들은 일정한 조건에 맞는 경우에만 상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럴 때에도 결혼을 해야 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영국 사람들은 결혼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부나 높은 지위를 손에 넣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사람들은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과 결혼하려 들 수밖에. 사람들은 사랑없는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들의 경우 남성에 비해 재산을 상속받기도 어려웠고, 경제력 있는 직업을 갖기란 거의 힘들어 결혼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군인도, 목사도 할 수 없었으니. 결혼의 첫째 조건이 사랑이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이 친구인 샬롯에게는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소리로 들렸다. 샬롯은 엘리자베스가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며 거절한 콜린스와 결혼했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샬롯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샬롯이 일침을 놓는다. “사람들 모두가 로맨틱해질 여유가 없는 거야. 덕분에 안락한 집에서 보호받으며 살게 됐어. (중략) 난 스물일곱이야. 돈도 없고 미래도 없어. 게다가 난 이미 우리 부모님께 짐만 되고 있단 말이야! 난 그게 두려워!” 여러분이 샬롯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 18세기 영국, 21세기 한국 자, 이제 영화밖으로 나와 볼까? 18세기 영국을 떠나 21세기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사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또한 스스로 능력만 갖춘다면 직업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여성들에게도--물론 논란의 여지야 있지만--직업적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지위와 재산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으니, 엘리자베스의 말처럼 사랑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의 결혼세태를 바라보면, 무언가 불순한 것이 끼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결혼의 외피는 사랑인데, 그 외피를 들추고 보면 수많은 조건이 내걸려 있다.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위해, 신분 상승을 위해 결혼 조건을 보는 일은 다반사다.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18세기 영국의 상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1등 신랑감과 1등 신부감은 재력과 학벌이 좋은 사람이다. 각종 결혼 정보 회사에서도 재력이나 학벌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물질적으로 넉넉해지고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데도 사람들은 부자나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기를 갈망한다 왜 그럴까? 예나 지금이나, 영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 아닌 재산 획득과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이야기 하고 보니,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보다도 재산과 지위만을 계산하여 결혼 결심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고집스럽게 말한다. 사랑이결혼의 첫번째 전제 조건이라고.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보니 오로지 사랑만을 결혼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데도 그 결혼조차 순탄하기 어려운 듯하다. 사실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잘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야 가능하다. 사랑 하나만으로 실제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버겁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이 만나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 가족과 한 가족이 어우러져 또하나의 가족을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경제적 사회적 요소의 차이로 여러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결혼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재력이나 신분 등 외적 조건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결혼관이 오히려 합리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근대를 지나 현대로 넘어 오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개인의 성품과 선택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사회의 위계질서나 가족의 화합만큼이나 나의 자유와 선택도 중요해졌다. 사랑에 대한 욕망도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건만을 우선시 하는 전통적인 결혼관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또다른 새로운 결혼관이 생겨나고 있다. 결혼이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며 동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결혼을 아예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앞으로는 조건이냐 사랑이냐가 아닌 다른 이유들이 결혼에 대한 기존 관념에 맞설지도 모르겠다. <오만과 편견>은 1813년 영국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지금까지 많은 나라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200여년이 흐른 뒤에도 그토록 사랑을 받는 이유는 결혼을 통해 전통적 가치관과 근·현대적 가치관의 충돌과 융합을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 엘리자베스의 결혼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엘리자베스는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에만 결혼을 할 생각이다. 전통적 결혼관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의 결혼관은 현실화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엄마가 부의 획득을 위해 친척인 콜린스와 결혼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 엄마가 콜린스와 결혼해 동생과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하라고 애걸하는데도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은 할 수 없다며 당차게 돌아선다. 이런 엘리자베스에게 전통적인 결혼관이 널리 퍼졌던 당시 사회 분위기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생각처럼 결혼을 쉽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랑을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결국에 가서는 다아시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결혼에 이른다. 그런데 둘이 처음부터 마음이 맞았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오해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증오했다. 그리고 오해가 생긴 것은 두 사람 모두 자신에 대한 오만과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지녔기 때문이다. 둘은 첫인상만 보고 서로를 성급하게 판단했다. 첫인상만 보고 타인에 대해 잘 알 수 있다는 오만이 발동한 셈이다. 그리고 첫인상을 가지고 내린 판단을 오랜 시간 동안 유지했다. 편견이 자리잡으면서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해로 서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여느 연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오만과 편견>은 하나의 연애담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오만과 편견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태도나 생각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종종 오만과 편견으로 사물이나 사람 혹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곤 한다. 여러분은 혹시 오만과 편견 때문에 오류를 범하거나 실수를 저지른 경험이 없는가? 그때 어떤 방법으로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나? ● 영화 VS 소설 앞서 말했듯이 영화 <오만과 편견>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어떤 이들은 영화가 소설 내용을 제대로 농축하고 있다고 평하는 반면 원작의 본질을 흩뜨려 놓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소설의 줄거리와 거의 흡사하다. 하지만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데 반해 영화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주인공으로 한다. 소설에서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영화는 주인공들 사이의 성적 긴장감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오스틴 순수주의자들은 영화가 원작의 의도를 왜곡한다며 분노를 표했다. 그들은 오스틴이 소설에서 당시 사회적 관습과 형식을 표현하려 노력했는데 영화가 그것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재미있게 본 관객의 경우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영화가 전통적인 결혼관이 퍼져 있는 당시 현실과 낭만적 사랑을 갈구하는 주인공의 갈등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다고 호평한다. 소설은 언어를 통해 상황의 디테일을 표현하고 있지만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몸짓이나 옷차림새 등으로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 쪽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궁금한 독자는 영화와 소설을 함께 보며 직접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누구든 쉽사리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모름지기 예술은 예술을 발판삼아 나아가는 것일 테니.

< 대중문화로 논술하기 > 사람들이 10대 소녀 그룹들에 열광하는 까닭은?

요즘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다. 올해 상반기와 하반기에 연이어 등장한 이들 소녀 그룹은 침체의 늪에서 좀체 탈출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한국 가요계의‘구세주’가 되어 있다. 두 그룹은 멤버 숫자, 음악 스타일, 캐릭터 등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보다는 공통점이 더 부각되고 있다. 두 소녀 그룹은 모두 10대 소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팬층은 30~40대 성인 남성들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이 두 가지 공통점이 요즘 연예계는 물론이고 대중 문화계 전반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올라 있는 상태다. ‘원더걸스’는 5인조이다. 16살 중학교 3학년 2명, 19살 고등학생 3학년 2명, 20살 대학생 1명이다.‘ 소녀시대’는 9인조이다. 17살이 1명, 18살이 2명, 19살이 6명이다. 완전히 소녀 일색이다. 두 소녀 그룹의 의상을 보면 ‘원더걸스’가 스트리트 룩이나 언더그라운드 씬의 패션을 하고 있고,‘ 소녀시대’는 그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정돈된 패션을 하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10대 소녀 멤버들의 앳됨, 건강함, 밝음, 명랑함을 최대한 강조하고 있다는 기본 전략은 같다. 이들 소녀 그룹을 또래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30~40대 성인 남성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방송사 뉴스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오마이뉴스의 조은미 기자는 ‘원더걸스’의 대표곡 ‘텔미’에 중독된 사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30대 김유식씨는 황당했다. 나이가 몇인데 10대 아이돌 가수 노래에 이렇게 빠지다니? 창피했다. 그런데 ‘텔미’ 중독자가 그뿐이 아니었다. 둘러보니 많았다.” 같은 기사는 ‘원더걸스’의 ‘텔미’가 열풍을 넘어 중독증으로까지 확산되어 있다고 진단하고, 심지어 중독단계까지 소개하고 있다. 1단계 중독은 ‘텔미’노래를 자꾸 듣는 것, 2단계는 ‘텔미’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 3단계는 ‘텔미’ 뮤직비디오를 보고 ‘텔미’UCC 동영상을 찾아 보는 것, 4단계는 ‘텔미’ 댄스를 따라하는 것, 5단계는 ‘텔미’ 댄스 UCC를 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학교와 군대는 물론이고 경찰들도 따라하고 여러 직장의 중년 남성들도 ‘텔미’를 흥얼대거나 ‘텔미’ 댄스를 어설프게라도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사는 1단계 중독이면 괜찮지만, 2단계 이상으로 넘어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30~40대 남성들까지 이들 소녀 그룹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음악 전문가들은 두 소녀 그룹의 대표곡인 ‘텔미’와 ‘소녀시대’ 노래가 모두 1980년대에 유행했던 음악 스타일을 복고풍처럼 차용해 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덧붙여 특히 ‘텔미’는 곡이 쉽고 멜로디가 단순하며 어려운 창법도 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텔미텔미테테 테테테 텔미’라는 후렴구가 신나게 반복된다. 한번만 들어도 후렴구를 금세 따라 부를 수 있고, 더욱이 댄스 동영상과 함께 보았다면 몸을 들썩이게 된다는 것이다. 댄스의 위력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원더걸스’는 ‘텔미’를 통해 일명 팔찌춤과 흔들흔들춤을 선보이고 있고,‘ 소녀시대’는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에서 일명 안녕춤과 꽃봉오리춤을 선보이고 있다. 두 소녀 그룹의 댄스는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는데,‘ 소녀시대’의 댄스는 파워풀하고 화려하며 따라하기에 난이도가 높은 반면, ‘원더걸스’의 댄스는 몸치라도 대충 따라 할 수 있게 간단하고 쉬운 동작이 반복된다. 어쨌든 두 소녀 그룹의 댄스는 10대 소녀들의 건강함과 섹시함이 뒤섞인 묘한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이 때문에 문화평론가들은 두 소녀 그룹에 대한 성인 남성들의 뜨거운 관심을 롤리타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롤리타 신드롬은 남성 어른들이 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정서적으로 동경심을 갖고 성적으로도 집착하는 현상인데,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일명 ‘원조교제’나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 영화와 만화책 그리고 라이트 노블(light novel)이라 불리는 소설 등에서 광범위하게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미소녀’ 캐릭터 열광까지 다양하게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더걸스’로 예를 들면, 그 이전까지는 한국 가요계의 여성 코드가 성인 남성들을 겨냥한 섹시 코드로 치달아왔다면, ‘원더걸스’로 인해 성인 남성들이 섹시 코드에서 귀엽고 앙증맞은 여동생 코드로 넘어 갔다고 진단한다. 다시말해 문근영 신드롬으로 확인되었던 그 열망이 지금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에 대한 인기로 재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경제적 구매력을 가진 30대이 상 남성들의 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한 철저한 분석과 마케팅에 따른 결과라고 바라보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이들은 수년간의 기획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 소녀 그룹의 멤버들이 갖는 별명만 해도 그렇다.‘ 원더걸스’는 민죽이, 태왕사유빈, 순수천사, 박여사님, 만두소희 등으로 불린다. ‘소녀시대’는 꼬마리더, 매력소녀, 흑진주, 티파니, 얼음공주, 명랑소녀, 사과공주, 막내공주, 귀염둥이 등으로 불린다. 이런 별명은 이들이 다양한 캐릭터들로 구성된 애니메이션 드라마의 주인공들 같은 느낌을 준다. 요컨대 이들은 그냥 10대 가수가 아니라 10대부터 30~40대 남성들까지를 소비자로 포섭하는 다양한 미소녀 캐릭터 종합세트인 셈이다. 김종휘 문화평론-기획자, 방송인, 노리단 단장, 하자센터 기획부장. 저서 <일하며 논다, 배운다> <내 안의 열일곱> <너 행복하니?> 등

논술은 실용적 글쓰기 1

필자는 수능 이후 학생들이 논술을 학교가 아닌, 외부 기관에 의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방과후 논술 수업을 개설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신청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10명이 조금 넘는 학생이 선택하여 학생에게 이유를 물으니 “선생님 저는 논술을 반영하지 않는 대학에 가기 때문에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당시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나 또한 논술을 대학을 입학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술 공부를 하다 보니 그 때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대학 입학의 수단으로써의 논술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논술적 사고와 태도라는 점에서 논술은 삶을 살아가는데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대학에서 과제는 대부분 보고서이고 시험 또한 논술식이다. 연필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대박을 터뜨릴만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상사에게 말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안을 제출해야 한다. 이 기획안이 바로 논술인 것이다. 즉, 나의 주장을 상사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논리적이고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처럼 논술은 우리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때문에 논술 교육은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지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논술이란 무엇인가? 논술은 실용적 글쓰기이다. 어느날 문단에 등단한 시인 선생님이 “윤선생! 학생들이 논술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선생님의 고민은 문학적 글쓰기와 실용적 글쓰기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논술은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견해나 주장을 내세운 다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자기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글쓰기 활동이다.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특별한 형식이나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진술하는 수필이나 감상문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논술이란 무엇일까? 학교에서 논술 수업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선생님! 왜 가르치는 사람마다 논술에 대한 정의와 논술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이 다르죠?”라고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선생님은 논술을 잘 하기 위해서 많이 읽으라고 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많이 읽는 것보다 얼마나 깊이 있이 있게 읽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선생님도 있다. 신문의 사설을 읽으라고 하기도 하고 사설보다 오피니언(의견)이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논술은 주어진 논제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논술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 전체를 평가한다. 먼저 비판적 읽기란 반성적이고 능동적으로 글을 읽는 것이다. 신문의 광고를 볼 때 어떤 학생은 광고 제작사가 의도한 그대로 수용하는 학생이 있는 반면, 어떤 학생은 왜 이 광고가 좋은 광고 인지, 어떤 이유에서 나쁜 광고인지를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광고의 내용이 여성의 성을 상품화 시킨 것인지, 과장 광고나 허위 광고 인지, 지나친 다이어트 조장으로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만연시킬 수 있다는 등의 비판적 태도를 지닌다. 두 번째로, 창의적 문제 해결은 논술의 내용(비판적 읽기와 창의적 문제 해결을 논술의 내용에 해당되고, 논리적 글쓰기는 형식에 해당된다.)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창의적 문제 해결은 주어진 논제에 대한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사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 글을 읽는 사람이 평가한다는 점에서 억지로 의도된 글 보다는 진실된 글에서 창의성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글쓰기는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 사고의 핵심은 ‘논증’이다. 논증이란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말하며 주장(결론)과 근거(이유)로 이루어진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재밌다.’고 주장하면 ‘김선아의 연기가 실감이 나고 대사가 톡톡 튀고 진짜 같기 때문에’이라는 근거를 대야 논리적인 글이다. 반면, ‘김아중은 미녀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미녀는 괴롭다.’ 그런데 ‘김아중은 행복하다.’라는 것을 제시한다면 논리적인 글이 아니다. ‘000도 달았다.’라는 대사처럼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는 논술과는 다르다. 상품 광고는 물건을 많이 파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소비자의 감정에 호소해야만 한다. 하지만 논술에서는 ‘권위나 대중에 호소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력, 논리적 사고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통합 교과형 논술이다. 통합 교과형 논술의 핵심은 영역 전이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전이(transfer)라는 말은 의학 용어로 사람에게 (암)전이가 되면 좋지 않지만, 통합 교과형 논술 시험에서는 전이가 되면 될수록 좋다. 예를 들어, 논제로 ‘균형과 평형’이라는 것이 출제 됐다면 영역 전이가 잘 되는 학생은 윤리 시간에 배운 ‘쾌락주의 역설’과 경제 시간에 배운 ‘한계 효용의 체감의 법칙’, 사회 시간에 배운 ‘제로섬 게임’, 과학 시간에 배운 ‘에너지 보존의 법칙’, 환경 시간에 배운 ‘생태계의 항상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역 전이가 서툰 학생은 이 중 한두 가지만 떠오를 뿐이다. 어쩌면, 영역 전이가 잘 되어 통합을 잘 하는 사람은 교사보다 전과목을 배우는 학생일 것이다. 때문에 통합은 교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해야 하며, 교사는 그런 통합 능력을 길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윤영진 (광명북고 교사)

비빔밥 논술

쟁 점 토 론 시사쟁점 등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도있게 생각해보는 코너. 정보의 바다에서 알짜만을 건져 올렸죠. 어때요? 벌써 빠져들고 싶죠? 뭘 망설여요. 그럼 빠져봅시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서 유명인들의사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연예인과 스포츠선수, 유명인사들의 연애담과 가십성 기사들은 이제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잡아 유쾌한 화제거리가 되곤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 헌법은 개인의 사생활 비밀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유명인들은 왜 그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국민의 알권리는 정당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유명인들의 사생활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사생활이 보도되는 것에는 굉장히 민감합니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은 언론에 아무 거리낌 없이 언론에 보도되어도 정당한 걸까요? 만약 정당하다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김인규 상임연구원 생 각 열 기 우리는 유명인들의 결혼과 이혼, 연애관계, 가족관계 등 사생활과 관련한 소식들을 인터넷과 신문, 잡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접하는 유명인의 사생활에 관한 보도들은 모두 합당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평소 프라이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이 보도는 명예훼손인가? 다음은 A언론사에서 밑줄 친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고 보도한 기사들입니다. 당사자들은 모두 A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법원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난 후 법원판결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① 미혼인 여성 연예인이 재벌 2세와 동거한다는 사실 또는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보도 ② 대기업 회장의 자식이 배우자의 아이가 아니라 혼외정사에 의하여 낳은 아이라는 소문을 보도하는 경우 ③ 국회의원이 배우자가 아닌 여인과 호텔방에서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경우 ④ 인기 연예인이 올 가을에 결혼을 한다는 보도 ⑤ 유명 스포츠선수가 미모의 인기 여가수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보도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경우 Yes/No 유명인의 사생활 보도는 괜찮은가? 연예인 부부의 이혼보도나 누드사진 게재 등 유명인들의 사생활은 언론을 통해 광범위하게 알려지기 일쑤입니다. 유명인들의 사생활 보도는 정당한 것일까요? 정당하다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요? 다음의 사례를 통해 함께 생각해봅시다. 사례Ⅰ. 유명인의 사생활 보도는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불가피하다! 한때 최고의 인기 영화배우였던 A씨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며 연예계를 전격 은퇴했습니다. 그는 은퇴한 후 20년 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끊고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A씨는 이웃에서 소동으로 들릴 정도로 격한 부부싸움을 했고 이웃의 제보로 한 언론사는 A씨의 부부싸움을 취재하여 보도했습니다. A씨는 이에 대해 “연예계를 은퇴한 지 20년이 된 자신은 더 이상 공인이 아니다”며, 허락도 없이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한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언론사는 추억의 스타를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알권리를 위해 정당한 취재활동을 펼쳤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Yes (알권리 중시) A씨의 부부싸움을 보도한 언론사는 무죄다. 우선 A씨는 스스로 공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한때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누리며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설사 연예계를 은퇴하여 언론의 화려한 조명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관심과 인지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평범하게 살아간다고해서 공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때나마 국민들의 관심과 인기를 받았던 공인으로서,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국민들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알권리에 해당한다. 국민의 알권리란 비단 공공의 이익에 관여된 것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공중의 정당한 관심사로 인정되는 사안이 있다면 이는 충분히 보도될 수 있는 영역이다. 예를들어 미혼 연예인이 언제 결혼할 것이라는 보도는 본인이 보도되는 것을 원치 않더라도 공중의 정당한 관심사로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고 연예문화의 현황과 그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 등에 비추어 일부 사람의 흥미 내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인의 자녀출산소식, 대학의 졸업혹은 입학, 과로로 입원한 사실 등은 본인의 동의 없이도 공개가 가능하며 정당한 알권리에 포함된다. A씨의 부부싸움 역시 이웃에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정도의 소동으로 번진 사건이다. 본인이 원치 않았더라도 보도할 수 있는 사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이언론사는 A씨를 파파라치처럼 따라 다니다 부부싸움을 목격한 것이 아니다. 제보자가 있으며 이 보도에 어떠한 악의도 발견할 수 없다. 사례Ⅱ. 공직자와 사회지도층 등 공인의 부도덕한 사생활에 관한 보도는 정 당하다! No (사생활 중시) A씨의 경우 연예계를 은퇴한 지 20년이나 흘렀고, 언론과의 접촉을 끊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A씨는 사실상 사인이라 보아야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A씨를 기억하는 사람의 수도 많이 줄었을 것이며 현재의 관심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흥미 위주의 관심을 위해 사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A씨의 사생활을 허락도 없이 보도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다. 일반인의 부부싸움을 언론이 보도할 이유는 없으며 만일 이를 보도했다면 당연히 프라이버시권 침해로 보아야 한다. 설사 A씨를 공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국민의 알권리를 주장하려면 보도의 내용이 공공의 생활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공공의 이익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판단기준 없이 단순히 대중의 단순한 흥미거리를 알권리의 대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부부싸움은 극히 내밀한 사적영역으로 유명인의 경우라 하더라도 대중의 정당한 관심사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영역이 보도될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의 허락을 얻을 때에 국한된다. 프라이버시권은 누구나 보호받아야 한 다. 공인의 사생활 보도의 영역도 공적인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극히 일부 영역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상업주의 언론들이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해 선정적인 사건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은밀한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남발하여 보도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관음증적 욕망을 알권리로 착각하여, 사생활과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는 언론관행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때문에 A씨의 부부싸움을 보도한 언론사는 처벌되어야하며 A씨에게 법원에서 판결하는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 쟁 점 이 술 술~ 얼마 전 문화일보의 신정아 씨 누드사진 게재로 유명인의 사생활과 인권 침해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언론의 자유, 국민의 알권리와 프라이버시 보호는 양립 불가능한 것일까요? 토론에 앞서, 유명인의 사생활 보장과 관련한 논쟁들을 살펴봅시다. 1.유명인은 누구인가요? 유명인(有名人)은 말 그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말해요. 여기에는 정치인, 고위공직자, 교수, 기업인, 연예인, 스포츠선수 등 각 분야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모두 지칭하죠. 그런데 유명인은 공인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요. 최근 가수 성시경이 방송에서“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이 된 이유도 공인에 대한 판단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2.유명인과 공인, 사인은 어떻게 다른가요?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인(公人)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 혹은 ‘공직에 있는 사람’을 뜻해요. 즉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을 말하죠. 하지만 이는 공인을 공직자(公職者)로 매우 협소하게 본 것이에요. 현대사회에서 공인이라 함은 대체로 유명인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곤 하죠. 우리나라의 경우 법으로 공인의 범위를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공직자 외 정치인이나 연예인 혹은 스포츠 스타, 유명 대학교수, 사회저명인사와 같이 대중에 노출됨으로써 이익을 얻는 존재를 대개 공인으로 간주해요. 공인은 다수의 사람이 알고 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며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죠. 공인의 말이나 행동은 여론이나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사인(私人)과 구별하고 있어요. 사인이란 공인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개인적 자격으로서의 일반인을 지칭해요. 하지만 이러한 공인 개념은 그 구분점이 명확하지 않아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과 관련하여 논란을 빚기도 해요. 3.유명인도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인간은 누구나 인격권과 프라이버시를 침해받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우리나라 헌법에도 제17조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그리고 제10조 행복추구권 등을 통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죠. 하지만 공인인 경우 사생활의 공개가 일정부분 허용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적지 않아요. 이는 ‘국민의 알권리’ 때문이에요. 공인에 대해 혹은 공인의 활동에 대해 국민이 알아야 할 권리 역시 존재하죠. 물론 공인의 공적 영역만 알권리에 해당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공인의 공적 활동과 사적 활동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사적 영역이라도 공공의 이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면 공개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요. 예를 들어 납득할 수 없는 결혼 과정이나 상당한 정도의 정신병력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공직자에 있었다면 이것이 향후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이러한 부분은 공공의 이익에 큰 영향을 주는 만큼 비록 사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경우에 따라 보도나 비판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처럼 공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논란은 언론의 자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4.언론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건가요? 사실 국민의 알권리는 언론의 취재보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제기되어 왔어요.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의 수탁인으로서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사안을 판단하고 발굴하여 이를 국민들에게 전달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죠. 이는 언론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 견제의 역할이기도 해요. 문제는 알권리에 근거한 취재보도 활동이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는가에 있어요. 사생활 보호의 권리와 국민의 알권리, 모두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지만 이들 권리는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무엇을 보다 중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5.다른 나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나요? 나라마다 공인과 사인을 구별하는 법적인 규정과 양 권리의 충돌을 둘러싼 논란을 대하는 입장이 달라요. 미국의 경우 공인에 한해 사생활의 침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강해요. 언론의 자유를 보다 중시하는 견해죠. 따라서 언론이 공인의 사생활을 자세히 보도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 미국의 법은 공인의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문제에 있어‘현실적 악의(惡意)의 원칙’을 적용해요. 즉 언론이 해당 공인을 위해할 목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보도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소송에서 언론의 손을 들어주는 원칙이죠. 반면 프랑스의 경우 공인일지라도 사적인 영역은 충실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강해요. 법원의 판례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가 사생활 보호에 무게를 두고 있죠.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는 미국의 입장에 다소 가깝지만‘현실적 악의의 원칙’을 부정하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공공의 이익에 관여된것인지를 판단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철콘 근크리트> 잔인한 현실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 중에서 제일 먼저 접한 것 은 <핑퐁>이었다. 꾸불꾸불하고 약간은 지저분한 것도 같은 선으로 그려놓은 <핑퐁>은 정말 압도적인 만화였다. 탁구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페코라는 소년이 있다. 친구인 스마일은 그를 동경하여 탁구를 배웠지만, 페코는 게으른 천재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페코는 보통의 재능을 가진 노력파 아쿠마에게도 패배하여 방황하게 된다. 페코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영웅이다. 얼핏 보기에 페코는 자신의 재능에 도취하여 잘난척하는 유아독존형 인간이지만, 사실은 가장 순수하고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인간이다. 그는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하여 달려간다. 그러다 보면 <하나오>의 하나오처럼, 중년이 되어서도 야구선수가 되겠다며 몽상에 빠져 있는 덜떨어진 어른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다. 그나마 아이일때는 그런 단순한 열정이 인정받을 수 있지만, 어 른이 되어서까지 그렇다면 조롱을 받기 십상이다. 마츠모토타이요의 영웅은 결국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스마일은 그런 페코를 여전히 동경한다. 자신에게도 어느정도 재능이 있어 탁구를 하기는 하지만, 그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순간에, 어떤 정도의 승리를 거둘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스마일은 영웅인 페코를 바라보며, 보통 사람으로서의 길을 걸어간다. 그건 패배주의도 아니고 자학도 아니다. 스마일은 자신의 그릇을 알고 있다. 그리고 평범함의 가치도 알고 있다. 마츠모토타이요의 <핑퐁>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만화의 하나다. 프랑스 코믹이나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표현의 그림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그 세계관이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아키라>의 오토모 가츠히로 이후 일본만화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만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외형적으로는 탁월한 그림이 눈에 띈다. 꾸불꾸불한 선으로 이어진 마츠모토의 만화는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하다. 또한 오토모 가츠히로 이상으로, 앵글과 장면전환에서 영화적 기법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박력이 느껴진다. 마츠모토 타이요가 유럽과 미국에서 각광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시로와 쿠로-함께 희망을 만들어가다 하지만 마츠모토 타이요의 내면은 외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아니 심오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철콘 근크리트>는 가상의 공간인 다카라쵸에서 벌어지는 활극을 그리고 있다. 시로와 쿠로는 다카라쵸에서 고양이라고 불리는, 최강의 악동이자 실질적인 지배자다. 야쿠자도 있고 양아치도 있지만, 진짜 강자는 바로 시로와 쿠로다. 거리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돈을 훔치고, 때로는 나쁜 인간들도 폭행하면서 시로와 쿠로는 자유롭게 살아간다. 거친 세상의 다카라쵸에는 오랜만에 돌아온 야쿠자도 있고, 그를 잡으려는 형사도 있고, 기존의 룰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카라쵸를 접수하려는 신흥 조직도 있다. 이제 다카라쵸는 변해야만 한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의 인물들은 사라져야 한다. 혹은 변하든가. 시로와 쿠로는 아이다. 그들은 함께, 거친 야생의 거리인 다카라쵸에서 싸워간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생존본능과 폭력이다. 그들은 거침없이 싸우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시로와 쿠로는 서로 다르다. 시로는 ‘순수무애’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아이다. 바보 같으면서도, 시로는 세상의 진리를 알고 있다. 쿠로는 그것을 알기에 시로와 함께 살아간다. 만약 시로가 곁에 없다면, 쿠로는 암흑 속으로 달려 갈 수밖에 없다. 폭력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폭주할 것이다. 서로 다른 존재인 시로와 쿠로는, 함께 존재함으로써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희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핑퐁>에서 스마일과 페코의 관계와 흡사하다. 스마일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지만, 왜 이겨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페코는 그저 이기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이긴다. 스마일에게 페코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영웅이다. 스마일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진리를 알려주는 영웅이다. 쿠로 역시 마찬가지다. 시로가 없다면, 쿠로는 살아갈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방법은 이미 알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시로가 알려주어야 한다. 시로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를 알고 있는 아이니까. ‘철콘 근크리트’라는 제목은 아이들이 철근 콘크리트를 잘못 발음한 아동어라고 한다. 서로 다른 것을 혼동하여 하나로 인식하고, 서로 뒤섞이면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핑퐁>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마츠모토 타이요의 철학을 보여준다면, <철콘 근크리트>는 우화적인 공간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 마츠모토 타이요가 일본의 젊은이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유는, 시대의 공기를 탁월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버블경제가 끝나고, 10년 불황의 한가운데에서 젊은이들이 느낀 답답함과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과 분노가 마츠모토타이요의 만화에는 담겨 있다. {img5,R,300} <철콘 근크리트>는우화적인이야기이지만, 그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현재진행형의 폐쇄감이다. 그들은 다카라쵸에 갇혀 도망칠 수 없고, 승리자가 될 수도 없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잔인한 현실에서 패한다는 것에 대해 쿨한 인식’을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는 99%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아니 더 나아간다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패배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된다. 쿠로가 싸움은 더 잘 하지만 결국은 시로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다. 시로는 다정하고, 부드러우니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니까.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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