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 김봉석의 대중문화로 읽는 논술 >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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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진리에 이르는 지름길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음모론 같은 것들을 꽤 진지하게 믿는 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욱 많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런 기묘한 것들이 실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증거 같은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찾아다니는 편이다.

하지만 TV나 대중매체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현상’은 그저 흥밋거리로 현상만 다룰 뿐이고, 신봉자나 비판론자나 모두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수할 뿐이다. 게다가 신봉자들은 대개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진 모습으로 나온다. UFO 헌터라는 사람은, 자신이 UFO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에 촬영 장비를 설치해 놓고 기다리면 UFO가 모습을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흉가 바깥에서 찍은 사진에 꽤 커다란 빛 두 개가 찍혀 있자, 혼의 존재를 믿고 흉가를 찾아다닌다는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영혼이고 크고 밝게 찍힌 것으로 봐서는 급이 높은 영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진 전문가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빛이 사진을 찍으면 선명하게 나오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열정 때문에 비현실적인 것만을 쫓아다니는 것도 좋고, 남들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외롭게 추구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믿고 너무 간단하게 자신들만의 논리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눈이 간 것도 그런 이유다. ≪회의주의자 사전≫은 “뉴에이지 신봉자들, 대체요법사들, 그리고 이성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더욱 좋은 책이다. 주변에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있다면, 공중부양을 하겠다면서 방에 틀어박혀 수련만 하는 친구가 있다면, 외계인과 채널링을 하며 미래의 예언을 들었다는 선지자가 있다면 ≪회의주의자 사전≫을 반드시 들춰본 후에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사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놓고 대립했을때, 대부분의 경우는 비판론자가 우세하다. 그들에게는 과학이라는 무기가 있으니까.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명확한 증거가 아니라 회의주의가 아닐까’란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 어차피 초자연적 현상이나 신비주의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철저한 회의를 거치지 않은 신비주의는 그저 광신일 뿐이니까.

≪회의주의자 사전≫은 침, 좀비, 외계인에 의한 납치, 카드점, 아틀란티스 등 신비주의와 초자연적인 현상은 물론 히스테리성 간질, 정신분석학, 형이상학 등 과학과 철학의 갖가지 현상과 명제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책이다.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시 컬리지의 철학과 교수인 로버트 토드 캐롤은 1994년부터 자신의 사이트 www.skepdic.com에 회의주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달 방문자 수가 50만 명에 달하며 국제적으로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했다고 했다. ≪비판적 사상가가 되기:새 천년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회의주의자 사전≫은 캐롤이 사이트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독선과 맹신에서 벗어나는 방법-모든 것을 회의하라!

백과사전식 구성이 좋은 것은 간단하게 하나의 사건이나 주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회의주의자 사전≫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회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사실들의 이면이나 허구를 폭로하는 점이 특히 뛰어나다. 이를테면 ‘달이 인간의 우울증이나 자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관계가 없다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식이다. ≪회의주의자 사전≫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그릇된 정보와 과장, 억측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회의주의자 사전≫을 필자의 입장과는 다르게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회의주의자 사전≫에 끌린 이유는 이 책이 신비주의의 허구를 신랄하게 폭로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주의의 광신도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유치한 자기망상에 빠져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자기만의 독선과 아집에 빠져 있는 자들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은유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주의를 비교적 믿는 편이지만 무작정 누군가에게 아틀란티스가 실재했다거나,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 해도 ‘나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는 ‘그런 가능성이 흥미롭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이다. 콜린 윌슨의 ≪불가사의 백과≫란 책을 보면 온갖 신비주의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양한 입장을 전개한다. 그 책을 읽다 보면 영혼을 믿는다 해도 거기에는 무수한 해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영혼이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어떤 연관이 있고, 그것이 이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떻게’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논리를 믿기 이전에, 자신의 논리와 증거를 끊임없이 의심해보아야 한다. 즉 회의주의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진리나 이상을 절대화시켜놓고, 거기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춘다. 타인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비논리적이지만, 자신만은 모른다. 신비론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세계라고 믿는 오타쿠나 자신의 이론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순간, 그의 논리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건 단지 맹신이고 광신일 뿐이다. <그로테스크> 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대학 시절에 배운 것은 단 하나, 모든 것을 회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을 회의할때 진정한 믿음과 진리가 탄생할 수 있다.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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