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사는 통일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 857년-?)을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869년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879년 중국 당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주모자인 황소에 의해 황소의 난(黃巢-亂)이 일어나자, 이를 정벌하기 위한 토황소격문을 지어 적을 물리쳤던 명문장가였다. 청성사는 크게 사당과 삼문으로 구성돼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가진 초익공(初翼工;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 맞춰 댄 새 날개 모양의 목재) 형식의 건물로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우물 정(井)자 형태로 만들어진 마루 형태)로 그 중앙에 최치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입구에는 솟을삼문(솟을三門; 문이 세 칸인 대문에서, 가운데 문의 지붕을 한 단 높게 세운 대문)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문숙공 류사눌(13751440)의 묘소다. 류사눌(1375~1440)의 자는 이행(而行), 본관은 문화(文化),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류사눌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학문에 힘써 경전에 밝고 문장에도 능했다. 특히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예문관 대제학 재직시에는 악학제조를 겸하여 아악보 서문을 찬하기도 했으며, 세종 16년(1434)에는 진작가사를 찬하여 제악부에 싣는 등 박연과 더불어 아악을 정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조 초기 16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8세 때인 태조 2년(1393년)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해 좌정언, 이조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태종 7년(1407)에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해 사헌부 장령이 됐다.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경상도 도관찰사가 된 후 함경도 도순문사, 강원도 도관찰사 등을 거쳐 세종 5년(1423)에는 한성부윤이 됐다. 그 후 세종 10년(1428)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서 진하사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종 14년(1432)에 동지중추원사가 됐다. 문화재청 제공
김중만장군사패교지는 조선 영조 4년(1728)에 무신 김중만에게 이인좌와 정인량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분무공신 2등에 봉한다는 공신록 1점과 교지 2점으로 구성됐다.1728년 7월에 작성됐고 1등 공신 1인, 2등 공신 7인, 3등 공신 7 인 등 총 15인의 공신명단과 포상 내용이 기록돼 있다.각 공신의 명단 위에는 흰색 부전지를 붙여서 이름을 가렸다. 뒷 면 마지막 부분에는 황색 부전지에 李善行製 崔重大書라고 기록해 글을 짓고 쓴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1907년에 세워졌으며, 당시 이름은 인천공립보통학교였다. 1933년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 1938년 인천창영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창영공립국민학교, 광복 후 창영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31운동 당시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통 깊은 곳이기도 하다. 옛 학교 건물은 1924년에 세운 것으로, 一자형의 구성이다. 벽체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좌우 대칭면에 넓은 창을 규칙적으로 배열해 직선을 강조했으며, 지붕에는 그 아래쪽 방을 밝게 하기 위한 지붕창을 만들어 놓았다. 문화재청 제공
청련사 큰 법당에 봉안된 삼장탱(三臧幀)이다. 제작연대는 고종 18년(1881)이다. 상하 2단으로 크게 구분하고 상단에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권속들로 가득 메우고 있다. 하단에는 이들 보살의 협시와 권속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삼장보살은 하나의 방형 수미단 위에 중앙 천장보살의 신광만 바탕을 금니로 처리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이중륜광의 두 신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했다. 채색은 주로 적색과 청색, 백색, 황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금니를 사용했는데, 천장 지지지장보살상의 몸색은 황색을 사용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백색으로 처리했다. 문화재청 제공
신창리삼층석탑은 봉국사(奉國寺)로 추정되는 절터에 흩어져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1991년에 복원한 고려 후기의 석탑이다. 약 2.18m 높이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형식으로, 면석 모서리와 중앙부에 측면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모각했다. 상층기단은 넓은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고 탱주 없이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했다. 갑석은 네 모서리에 합각선을 표현했고, 완만하게 낙수면을 형성했다. 처마선을 따라 전각(轉角) 부에는 매우 낮게 반전(反轉)을 표현했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문화재청 제공
평산 신씨 묘역은 대곡동 황곡에서 두밀로 향하는 소로의 좌측 야산에 있다. 묘역 맨 위에는 빙부, 빙모의 묘가 설치돼 있으며, 아래로는 이간공의 둘째 승서, 넷째 광서의 묘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모두 이간공의 자손묘가 있다. 신영(申瑛)은 연산군 5년(1499년)~명종 14년(1559년) 조선문신이며, 자는 윤보(潤甫), 본관은 평산(平山) 사직서령 세경(世卿)의 아들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중종 11년(1516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중종 18년(152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됐으며, 수찬(修撰)으로 있을때 화를 입은 스승(김식, 조광조)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다. 뒤에 형조좌랑 함경도 도사를 거쳐 공조, 형조, 병조정랑 지평(地平)을 역임했다. 권신에 아부하지 않아 한때 수원부사로 좌천돼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는 1728년에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한 오명항의 공적을 칭송한 비다. 오명항은 안성과 죽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해 분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됐다. 송공비는 안성 군민들이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 1744년에 건립했다. 함께 종군(從軍)했던 조현명(趙顯命)이 비문을 짓고 박문수(朴文秀)가 글씨를 썼다. 그리고 이광덕(李匡德)이 전액(篆額 ; 전서체로 비석의 이름을 새긴 부분)을 썼다. 문화재청 제공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해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높이 2.2m, 둘레 128m의 규모로, 성곽은 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고, 해안 쪽을 향해 4개소의 포좌(포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출입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어 다른 돈대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한다. 문화재청 제공
신륵사극락보전은 불교의 여러 보살과 부처 중에서 서쪽의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신륵사의 중심 불전이다. 건물의 모습을 보면 평지에 길게 다듬은 화강암을 3단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주춧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했다. 규모는 작지만, 공포를 높고 화려하게 두면서 여기에 비례해 지붕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실의 보호를 받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에 따라 건물의 격식도 높이는 조선 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철종외가는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으로, 인천 강화군 선원면에 있으며 1995년 문화재로 지정됐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돼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했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광주유정리석불좌상은 화강암의 석불상이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로 얼굴과 신체의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는 좁으며,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기술이 세련되지 못한 지방 장인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광배(光背 ; 붓다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것)는 남아 있지 않다. 목에는 삼도(三道 ; 붓다의 지혜를 상징하는 세 줄의 주름)가 표현됐다. 양 손은 배에 모아 왼손 바닥위에 오른손을 올리고 양손의 엄지를 맞댄 선정인(禪定印 ; 명상에 들어 있는 붓다의 고요한 상태를 상징)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의 무관인 이여발(16211683)의 묘다. 이여발의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정익(貞翼)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의배(義培)의 손자로서 조선 효종 2년(1651) 무과에 급제, 비변랑(備邊郞), 도총사를 거쳐 숙천(肅川)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현종 때 병공조참판에 특진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가 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연습시키는 한편 병기를 준비해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어영대장, 한성부 좌우윤을 역임하고 숙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사망했다.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돼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문인석 한 쌍이 세워진 평범한 묘제를 취하고 있다. 분묘 앞 10여m 아래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김중만은 본관이 언양이고, 자는 원중(元重)이다. 공신록은 두루마리 형태로 표지 제첨에 奮武功臣二等金重萬이라 적었다. 1728년 7월에 작성됐고 1등 공신 1인, 2등 공신 7인, 3등 공신 7인 등 총 15인의 공신명단과 포상내용이 기록돼 있다. 2등 공신 김중만에게 녹훈된 구체적인 포상내용을 살펴보면, 품계는 2계급 올려주고, 적장자가 그 봉록을 세습하도록 했고 노비, 전답, 은자, 내구마 등을 하사했다. 각 공신의 명단 위에는 흰색 부전지를 붙여서 이름을 가렸다. 뒷면 마지막 부분에는 황색 부전지에 李善行製 崔重大書라고 기록해 둬 글을 짓고 쓴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 5년에 내린 이 공신록에는 분무공신을 그대로 쓰고 있다. 공신록과 관련된 교지 2점은 현재 도난문화재로 신고돼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문화재청 제공
진이란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도시를 이른다. 용진진은 조선시대 각 진에 배치됐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던 곳으로, 101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개소, 총좌(총을 놓는 자리)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 대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는 출입문 2곳만이 남아 있었는데, 1999년 그 위로 누각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됐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연주암삼층석탑은 대웅전 앞에 있다. 연주암은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관악사(冠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단장을 거치고, 양녕대군과 효녕대군이 머물면서 연주암이라 부르게 됐다. 높이 3.2m의 이 석탑은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각 면 6판의 단엽(單葉) 연화문(蓮花紋)을 조각했다. 연판(蓮瓣) 위에는 각형(角形) 3단의 받침을 만들어 기단을 받쳤다. 기단은 단층으로 4매의 판석을 엇물려서 조성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가 정연하다.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기단 갑석(基壇甲石)의 아래에는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위에는 각형 2단의 받침 위에 굽형 괴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건평돈대는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있는 성곽시설로, 1999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해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건평돈대는 정포보 소속의 돈대로서, 6조(六朝)에 올리는 조운의 감시소 역할과 국토방위의 임무를 겸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이 돈대를 설치했다고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
명종의 장인이었던 심강(沈鋼, 1514~1567)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596년(선조 29)에 건립한 비이다. 본관은 청송이다. 신도비는 묘역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귀부이수(龜趺首) 양식을 갖추고 있다. 용머리처럼 생긴 귀두(龜頭 ; 거북 머리)의 얼굴은 우측으로 고개를 길게 빼서 뒤를 돌아보며 있다. 앞발은 땅을 헤치고 곧장 뛰쳐나갈 것처럼 역동적이다. 귀갑(龜甲 ; 거북 껍데기) 위를 덮은 연잎 모양의 복련(覆蓮)은 볼륨감 있게 조각되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차지하고자 다투는 모습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비신(碑身 ; 글씨를 새기는 부분)을 귀부(龜趺 ; 거북 모양의 받침돌)의 등에 세로로 세워 매우 특이하다. 비문은 심수경(沈守慶)이 짓고 손자인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제공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 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해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다. 무태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인화돈대광암돈대구등곶돈대작성돈대와 함께 인화보의 관할 하에 있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45m, 석벽의 높이는 120~530㎝이다. 문화재청 제공
구리 아차산 3층 석탑은 1952년 붕괴됐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해발 180m 지점의 넓은 암반 위에 있으며, 주변에 사찰과 관계된 유적이 조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산천의 지세(地勢)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裨補)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반 위에 수미단 형식의 기단을 설치했는데, 하대석은 자연석에 가깝고 중대석은 여러 매의 석재를 이용해 구성했다. 상대석은 2매의 석재로 이뤄져 있는데, 하부 부연을 크고 사선형으로 처리했다. 3층의 탑신부는 각기 1매의 석재를 사용해 탑신석과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을 구성했다. 1층 탑신석은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했고, 아랫면이 윗면보다 넓게 치석(治石)해 마름모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