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신재 한상경(韓尙敬, 13601425)의 영정(影幀)이다. 한상경 영정에는 조선 초기의 초상화 양식을 잘 반영돼 있다. 관모의 양각이 아래로 내려온 모양, 흉배가 없는 담홍색 단령, 등받이가 없는 접이식 의자인 승상(繩牀) 등이 단서다. 이 초상은 여러 가지 단서로 볼 때 17세기 베껴 그린 이모본(移模本)이지만, 표현상의 요소는 15세기를 대표할 단서를 갖고 있다. 화폭의 왼편 상단에는 표제가 있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이경석(李景奭)이 화상찬(畵像贊)을 남겨 이 초상의 원본인 개국공신도상을 17세기에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상 인물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고 공수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았다. 안면의 표현은 채색을 담담하게 썼으며 묘사가 간결한 원본의 모습을 충실히 따라 그렸다. 복식에서 고려 말 조선 초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주대소리는 노동요로서 어부들이 바다에서 사용하는 닻줄을 만들 때 불리던 노래로, 인천시 무형문화재이다. 내용은 나무타령자우소리줄 놓는 소리꼼새소리순레소리채짓는 소리여사소리사리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타령은 나무를 벨 때 부르는 소리, 자우소리는 줄을 단단하게 꼴 때 부르는 소리이다. 줄 놓는 소리는 굵지 않은 세 가닥의 줄을 꼬아나갈 때, 꼼새소리는 줄이 단단하고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른다. 순레소리, 채짓는 소리는 가는 3개의 줄을 하나의 굵은 줄로 만들 때 부르며 굵게 꼬여진 줄을 둘둘말 때 여사소리, 사리소리 등을 부른다. 문화재청 제공
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가르치는 장면을 그린 거대한 그림(일명 영산회도)으로 탱화의 길이는 863cm, 폭은 486cm 규모다. 1657(효종8) 화원 신겸이 그렸으며 17세기 이후의 불화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군도 형식을 띠고 있다. 해학적인 표현과 하단에서 위로 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점점 작게 그리는 원근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신겸의 다른 작품으로는 안심사 괘불 등이 있다. 지금도 일 년에 한 번 이 그림을 법당 앞 뜰에 있는 괘불대에 걸어 놓고 재를 드리는데 이때 그림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목조각은 조각의 소재인 나무가 가진 양감과 질감을 표현하는 전통조각이다. 주로 사용하는 재료로는 결이 아름답고 견실한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을 많이 사용한다. 목조각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사찰 건축과 불상 등 불교 의식과 관련된 조각들을 제작하면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분실,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기능보유자 이방호 선생은 목조각 가운데서도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불상을 주로 제작하고 있다. 조각의 특징은 불상제작을 마무리할 때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과정에서 사포를 사용하지 않고 조각칼만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문화재청 제공
삼막사사적비는 삼막사의 사적을 기록한 비로 안양 석수동 대웅전 동쪽 약 30m 위치에 건립돼 있다. 비문에는 신라 원효(元曉) 스님이 창건하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고 개칭했고,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삼막사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나옹(懶翁)ㆍ무학(無學)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조선 태조(太祖) 때 왕명으로 비가 중수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사적비가 경기 관악산맥 삼성산 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 숙종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밝힌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인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1571년(선조 4)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당시 해주읍성의 풍경과 행렬을 10년 뒤인 1581년(선조 14)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맨 위쪽에 류영수양관연명지도(留營首陽館延命之圖)라는 표제를 썼고, 그 아래에 해주읍성의 수양관과 관아의 전경, 관찰사의 행렬 등을 수묵담채로 그렸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7언시를 썼다. 그림은 후대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6세기 후반기의 화풍의 단서가 남아 있다. 멀리 배경에 그린 원산(遠山)에는 짤막한 선과 점으로 표현한 조선전기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요소를 볼 수 있다. 이 그림과 문자로 남긴 기록은 지방관의 부임 장면을 그린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근해 갯가노래 뱃노래는 1988년 지정된 무형문화재다. 갯가노래는 어렵고 고된 생활을 하소연하는 여인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고, 뱃노래는 어부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다. 갯가노래에는 물장구 장단의 나나니타령과 조개를 캘 때 부르는 군음이 있다. 뱃노래는 노동의 양상에 따라 다른 노래가 불러진다. 항해를 위해 닻을 감아 올릴 때 부르는 닻감는 소리, 어획기를 맞아 시선배가 어선으로부터 고기를 매입해 육지로 운반하면서 부르는 시선뱃노래, 풍어를 기원하거나 만선 귀향을 축하하는 뜻으로 부르는 배치기 등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동요 중에서 대표적인 노래다. 문화재청 제공
삼현육각(三絃六角)은 198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인천의 문화유산이다. 삼현육각은 조선시대 궁중무용과 행악, 지방관아의 연회, 높은 관리나 귀인의 행차, 향교의 제향 및 각 지방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두루 쓰이던 악기편성을 뜻한다. 향피리 2명과 대금해금장구북 각 1명의 6인조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악기의 종류나 편성인원에 다소의 차이가 있으며 지역(경기호남해서영남 등)에 따라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에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주형태는 가로 1줄로 앉아서 연주하거나, 세로 2줄로 서서 연주하거나, 세로 2줄로 걸어가면서 연주하거나, 말 위에서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세조 때 문신인 한확(韓確, 1400~1456)의 행적을 기록한 비다. 1455년(세조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역 아래의 비각 안에 방부이수((方趺螭首) 양식을 갖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왕명으로 1494년(성종25)부터 1495년(연산군1)까지 2년에 걸쳐 만들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장인들이 참여해 이수(螭首)의 쌍룡쟁주(雙龍爭珠)와 받침돌의 복련(覆蓮) 및 안상(眼象)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했다. 장방형의 대리석을 다듬어 이수와 비신(碑身)을 만들었고 비신을 꽂은 사각형 받침돌은 화강암으로 제작했다. 받침돌 밑에는 2단의 기단석을 마련하였다.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신도비의 하나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장수동 은행나무는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인천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됐다가 올해 2월 국가천연기념물 제562호로 승격됐다. 수령 8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장수동 은행나무는 높이 30m, 둘레 8.6m 규모로 5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뻗어 있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예로부터 집안에 액운이 있거나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면 이 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올렸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매년 음력 7월1일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지역 전통문화 도당제 행사가 열리는 등 자연학술적민속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동구 제공
이회선생신도비는 성종의 아홉째 왕자인 이회(李懷, 1488~1552)의 행적을 새긴 비로, 1587년(선조 20)에 건립됐다. 이회는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성공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신도비는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방부이수(方趺87AD首) 양식으로 건립됐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으며, 전액(篆額 ; 전서체로 비석의 이름을 새긴 부분)은 김응남(金應南)이 썼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필 한석봉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한국 서예사 연구의 귀중한 비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수미정사 고봉화상선요는 인천 미추홀구 수미정사에 전해 내려오는 불서(佛書)로, 지난 3월15일 인천시 유형문화재 79호로 지정됐다. 수미정사 고봉화상선요는 1571년 충남 보원사에서 개간한 목판본으로 다양한 판본이 국내 여러 기관, 사찰 등에 다수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보원사 판본 중 수미정사에 보관 중인 고봉화상선요가 선본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간본으로 인출시기를 알려주는 묵서가 있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불교사 및 불전 연구에 의미가 있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인천시 제공
여주계신리마애여래입상 홍천면 계신리 부처울 마을의 남한강변의 암벽에 새겨진 고려 전기의 마애불이다. 불상은 두광을 갖췄는데 3겹의 동심원이 계단식으로 중첩되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신체 표현과 자세, 얼굴의 온화한 인상 등에서 이 지역에서 지방화된 고려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먼머리 정상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방형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미소띤 얼굴에 양 볼의 볼륨감으로 인해 귀엽고 후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귀는 길어 어깨까지 내려오며,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됐다. 당당한 자세에 유려한 윤곽선, 양감 있는 얼굴에 부드럽고 귀여운 표정에 옷주름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표현 등 통일 신라 시대 불상 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 전기 여주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문화재청 제공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1(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六十一)은 인천 연수구 동춘동 흥륜사에 있는 불경으로, 2015년 12월2일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됐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종의 소의경전으로서 대승불교의 역사 속에서 널리 읽는 경전이다. 이 경은 실차난다(實叉難陀)가 번역한 것으로 당경화엄경, 당본화엄경, 신역화엄경, 팔십화엄이라고도 한다. 1244년에 대장도감에서 간행한 재조 본 고려대장경 판본의 전 80권 가운데 권61의 한 축인 두루마리 형태의 닥종이에 인쇄된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인평대군(16221658) 제사 때 쓰인 치제문을 새긴 비다. 치제문이란 공적이 뚜렷한 인물의 제사때 왕이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주면서 내려준 제문이다. 묘역에는 효종ㆍ숙종과 영조ㆍ정조순조의 어제어필 치제문을 각각 새긴 2기의 치제문비가 있다. 건립의 전후 과정을 인평대군 손자인 양원군 이환이 별도의 글을 지어 밝혔으며 전액 영조와 정조의 치제문은 치제문비 건립 당시에 새겼고 순조 치제문은 나중에 새긴 것이다.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조선시대 다섯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비이다. 문화재청 제공
증주당현절구삼체시법 권1은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가천박물관에 있는 인천시 유형문화재다. 증주당현절구삼체시법은 송(宋)나라 주필(周弼)이 칠언절구, 칠언율시 그리고 오언율시 등 삼체시(三體詩)만을 모아 편찬한 시선집(詩選集)이다. 주필은 작시(作詩)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당시(唐詩)를 편리하게 감상하고 한시의 표현기법과 구성형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자 이 책을 편찬했다. 거기에 석원지(釋圓至)가 주를 달고 배유(裵庾)가 증주(增註)했으며, 조선 초기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각(飜刻)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 중기 무렵까지 간행이 이뤄졌는데 경상도를 비롯해 전라도, 충청도 등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됐으며 당시를 학습할 때 사용했다. 이 책은 한시를 학습하려는 사람들이 참고한 일종의 시학 교제로서 한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서지학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는 1715년(숙종 41) 북한산성 동소문 안에 있던 금위영 유영(留營)을 보국사(輔國寺) 아래로 옮긴 후 그 전말을 기록한 비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중앙 군영(軍營)인 삼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설치해 한양 도성을 직접 방어하게 했다. 그래서 1711년(숙종 37)에 이들 군영을 동원해 북한산성을 개축하고 현지 주둔 부대인 유영(留營)을 두어 산성의 수비를 구간별로 나누어 분담하게 했다. 이중 금위영 유영의 지대가 높고 무너질 위험이 있어 1715년 이건한 것이다. 북한산성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반의 한쪽 면을 잘 다듬어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보호를 위해 얹은 지붕돌은 용마루, 내림마루, 처마만 간략히 표현하였다. 비문은 이이명(李9824命)이 지었으며 1715년(숙종 41)에 건립했다. 문화재청 제공
옹진 백령도 진촌리 맨틀포획암 분포지는 인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154의2 일대 6천307㎡ 부지에 펼쳐진 자연유산으로, 천연기념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감람암 포획현무암이 분포하는 곳은 경기도 연천 전곡, 평택 강원도 철원 일대, 울릉도 및 제주도에 국한돼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백령면 진촌리에서 동쪽으로 1.3㎞ 정도 떨어진 해안에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지름 510㎝ 크기의 노란 감람암 덩어리가 들어 있는 용암층이 만들어져 있다. 용암층은 두께가 10m 이상이며, 검은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지구 속 수십㎞ 아래에서 만들어진 감람암이 용암이 분출할 때 함께 올라와 만들어진 것으로 지하 깊은 곳의 상태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사나사 원증국사탑은 태고화상 보우(太古和尙普愚, 1330~1382)의 사리탑이다. 보우의 본관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 첫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로 홍주(현재 홍성) 출신이다. 이 탑은 보우 스님의 입적 다음 해인 우왕 9년(1383) 건립됐다. 방형 기단과 종형 탑신으로 구성된 부도로, 기단 상면에는 복련(覆蓮) 연판문양을 표현해 탑신 받침 역할을 하고 있다. 석종형 탑신 표면은 문양 없이 간결하게 치석했고, 정상부에는 주변을 평평하게 한 후 중앙에 높은 연봉형 보주를 갖췄다. 주변에 세워진 탑비에는 스님 입적 이듬해 문인 달심(門人達心)이 주도한 부도와 탑비 건립내용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경은(耕隱) 조서강은 조선개국 공신 조반의 아들로 태종14년(1415)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지내고 세종13년(1431)에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우관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41년에 도승지를 지냈으며, 1443년 이조참판이 됐다. 세종 26년 3월 10일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쌀과 콩 각 30석, 종이 10련, 그리고 관곽을 부의로 내려 후하게 장사지내게 했다. 그의 묘는 직사각형 기대석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둘레돌을 두른 봉분이 있는데 봉분은 전방후원묘로 돼 있고 앞에는 묘비와 상석, 한 쌍의 문인석이 배치돼 있다. 묘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조공지묘라고 새겨져 있으며 한 송이의 연꽃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조각한 옥개석이 있다. 조서강 묘와 묘역에 설치된 석물들은 조선 초기의 것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