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봉(1578~1660)은 조선조 성종의 12남인 무산군의 손자다. 나라에 공이 있어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부인은 현부인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현부인 엄 씨는 적군에 잡혀 욕을 보이느니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인조 16년(1638)에 열녀정려가 내려졌다. 당산에 있는 묘역에는 승헌대부 순평군지묘, 현부인 영월 엄 씨, 능선 구 씨의 묘가 있으며, 당시에 세운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등이 배치돼 있다. 묘비는 갈색 대석에 갈색비로, 높이는 1m 23cm이고, 폭이 49cm이다. 능선 구 씨의 묘는 시체를 찾지 못하여 자결 시 남은 신발과 유서를 쓴 치마폭을 묻은 것으로 전해진다. 문화재청 제공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신중도는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그려진다. 봉영사 신중도는 화면을 이단으로 나누어 좌우로 대표적 호법신인 제석천과 범천의 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남양주 봉영사 신중도의 제석천과 범천은 거의 같은 모습이지만, 오른쪽(향좌측)의 존상이 풍성한 모란꽃 가지를 들고 있어 제석천임을 알 수 있고, 범천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합장하고 있다. 이들 사이로 약간 아래쪽으로는 갑옷을 입고 깃털장식의 투구를 쓴 위태천을 그리고 주변으로 천자 도상을 배치했다. 하단은 구름으로 구회 한 뒤 위태천이 이끄는 천룡팔부중의 세계를 그렸다. 남아있는 묵서를 통해 밝혀진 조성 화원 두흠(斗欽)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서울ㆍ경기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화승인데, 이 그림의 도상구성과 양식은 당시의 시대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양시 길상사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이 묘법연화경은 1561년에 전라도 장흥 지제산 천관사에서 간행했다. 지난 2011년 10월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60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연수구 흥륜사 소장 대장일람집 권 제78은 인천 연수구 흥륜사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8호다. 대장일람집은 명나라 영덕(寧德)우바색(優婆塞)진실(陳實)이 건국 초에 편찬해 건안의 유오삼랑서국에서 간행보급한 것으로, 이 판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바로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번각(飜刻)하고 그 각판에서 찍어냈다. 책장에 따라 새긴 글자에 다소의 마멸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그 뒤 조선 전기에 찍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전 10권 중 제 7 8권 영본 1책이 전래된 것으로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이 대장일랍집은 대장경에 수록된 여러 경론과 성현전기류를 망라해 8문으로 크게 나눈 다음, 그 문을 다시 60품으로 세분하고 각 품의 주제에 해당하는 내용을 두루 발췌해 이용에 편리하도록 집대성 해놓은 사전류라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
고양 원각사 신중도는 제석천(帝釋天)을 비롯한 여러 권속을 그린 신중도다. 신중도는 대승불교에서 호법선신(護法善神)으로 봉안돼 신앙의 대상이 된 신중(神衆)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나타낸 예배용 불화다. 비단 바탕에 채색해 그려져 화면은 크게 상하 2단으로 구분돼 상단에는 제석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동ㆍ천녀ㆍ일궁천자ㆍ월궁천자가 각각 배치돼 있고 하단에는 깃털 투구를 쓴 위태천을 중심으로 좌우 8금강(金剛)이 배열돼 있다. 전체적으로 붉은 안료를 두텁게 발랐으며 제석천을 비롯한 여러 권속의 얼굴 묘사나 의복기법이 서로 같다. 정확한 봉안 사찰은 알 수 없지만, 건륭43년, 즉 조선 정조 2년(1778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전등사 대웅보전 수미단(傳燈寺 大雄寶殿 須彌壇)은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에 있는 인천시 유형문화재다. 수미단은 불상을 안치한 일종의 대좌와 같은 형식으로 대웅전 내의 천개와 더불어 장엄한 불교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다. 전등사 수미단은 가로 480㎝, 세로 118㎝, 폭 200㎝로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맨 하단 받침부 몰딩 사이에 불법(佛法) 수호신격인 도깨비와 같은 문양이 익살스럽게 조각돼 있고, 중간 부분 장판에는 꽃나무새당초문보상화문상상의 동물 등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제공
연주세영첩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당대의 문신이자 학자들이 지은 친필시를 모아서 만든 첩이다. 연주세영첩에서 연(漣)은 경기도 연천(漣川)을, 주(朱)는 무주(茂朱)를 가리킨다. 대를 이어 연천과 무주의 현감으로 벼슬한 영예를 기념하기 위한 시첩이라는 뜻이다. 첩의 마지막에는 한 집안에서 같은 지역의 수령을 60년 만에 다시 맡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송시열(宋時烈)의 친필 서문이 있다. 조선후기의 인물들의 친필시는 문학과 서예적 가치 이외에 그들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지난 2019년 4월2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傳燈寺 藥師殿 現王幀)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교회화로, 200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179호)에 보존돼 있는 현왕탱인데, 이 그림은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도상화한 것이다. 조선 고종 21년(1884)에 제작된 그림으로 화면은 원형구도로서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비록 색 배합은 뛰어나지 않지만 꼼꼼한 필력이 구사된 점, 현왕도의 도상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점 등 19세기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고양 강매 석교는 네모진 돌기둥 24개로 먼저 교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장방형으로 긴 교판석 110개를 2열로 놓아 교각과 교판석이 매우 견고하고 세밀하게 구축됐다. 석교는 교판석 중앙에 새겨진 강매리교 경신신조(江梅里橋 庚申新造)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강매리(江梅里)는 대한제국의 리동합병(里洞合倂) 정책에 따라, 1910년 8월25일에 강고산리(江古山里)와 매화정리(梅花亭里)가 합쳐진 이름이다. 따라서 이 석교는 1920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교량인 보다리 중에서 가장 격식이 있는 다리 양식의 맥을 잇고 있으며 도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민간 통행용 우물마루 돌다리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지난해 8월2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초대 선교사 고요한 주교와 함께 영국에서 내한한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해 선교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신부가 한국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해 기술적인 적용을 했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연와구조로 된 5량 4간의 홑집이다. 문화재청 제공
상덕총록은 재상 채제공의 덕을 모두 기록한 책이란 뜻이다. 채제공 말년의 행적을 순 한글로 필사했다. 채제공의 충성과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임금으로부터 받은 신임 등을 기술해 집안의 딸이나 며느리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부분은 1791년 12월부터 1799년 1월 채제공의 죽음까지 채제공 말년의 행적을 서술했고 이후 정조가 채제공의 제사에 지어준 뇌문을 인용해 또 뇌문을 풀이하며 채제공의 행적을 정리했으며 마지막에 뇌문을 가지고 채제공의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운 경위를 적고 있다. 책에 수록된 내용은 주로 번암집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부 승정원일기와 홍재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50개에 육박하는 어려운 한자어에 한글 주석이 달려있어 주요 원출전 자료인 번암집의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 자료다. 2018년 9월10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5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향교(江華鄕校)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유적건조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4호다. 성현들에게 제사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국립교육기관으로 고려 인종 5년(1127) 세웠다. 그 뒤 여러 차례 옮기고 복원했는데, 지금 있는 위치는 영조 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옮긴 것이다. 남아있는 건물로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높이 47cm의 대형 백자 병으로 목이 유난히 길어 속칭 거위병이라고도 부른다. 병은 몸통 부분에서 목이 길고 가늘게 올라가서 구연부에서 둥글게 말리는 모습이다. 긴 목에 비해 몸통이 다소 왜소해 보여 조형상의 균형감이 다소 떨어지지만, 두툼하게 제작된 하단부가 무게중심을 이루어 안정감이 있다. 백자를 굽는 과정에서 생긴 잔 빙렬이 있으며 은은한 순백색의 유면은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어 정치ㆍ경제적으로 부강했던 18세기 조선의 당당한 위상을 보여 주는 듯하다. 경기도자박물관 소장 백자대병의 용도는 다병(茶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9년 8월2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6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보문사 석실(普門寺 石室)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인천 강화군 보문사에 있는 석굴사원이다. 이곳은 나한상(羅漢像)을 모시는 나한전의 구실을 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문을 만들고, 그 안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해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ㆍ제화갈라보살, 나한상 등을 모셨다. 이 석불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한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 나타난 대로 모셔 뒀더니 큰 부자가 됐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불상의 제작연대는 그처럼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계해사궤장연첩은 이 서첩의 표지에 기록된 제목이며, 계해년에 궤장을 하사받은 후에 열린 잔치의 시첩으로 풀이된다. 1623년(인조 원년) 9월6일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국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 받은 후에 열린 연회에서 참석한 빈객들이 축시를 모아 시첩으로 만든 것을 바탕으로 다시 옮겨 쓴 시첩이다. 본문 첫 장에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시 서문, 이어서 오언배율(五言排律) 십운시(十韻詩)가 있고, 여기에 차운(次韻)한 참석자들의 시 21편과 연회 후에 보내온 시 11편이 수록돼 있다. 시의 내용은 대부분 이원익의 덕행을 칭송하고 궤장을 하사받은 영예를 축하하는 것이다. 지난 2009년10월1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8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유적건조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5호다. 이곳은 조선시대 관아의 하나로 강화지방의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이다. 영조 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앞면 8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이라는 현판은 당시의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16801714)이 썼다. 문화재청 제공
시흥 군자봉 성황제는 시흥시와 안산시의 경계에 위치한 군자봉 성황단에서 김부대왕을 주신으로 모시고 행하는 굿이다. 음력 10월3일에 본격적인 의례를 거행하며, 안산 잿머리 성황제와 성격이 유사하다. 군자봉에는 군자산성터와 함께 성황단이 남아 있다. 성황단은 산성이나 고을 관아의 주위에 나타나는데, 고을이나 성 안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 수령이 백성들과 더불어 위무했던 곳이다. 시흥 군자봉 성황제는 마을 농악대와 무당일행이 마을굿에 동참한 다는 점에서 공동제의적 성격을 지니며, 안산, 수원, 평택 등의 지역까지 걸립을 다니는 판도를 구축하고 있다. 지난 2015년 11월20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향교(仁川鄕校)는 인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유적건조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1호다.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고자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천향교가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중반에 수리했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에 대성전명륜당삼문 등을 고쳤다. 현재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남아있다. 뒤쪽에는 제사공간을 이루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향교에서는 인성 및 예절교육 등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은 물론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기능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보광사목조여래좌상은 다른 불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목을 곧추 세운 당당한 모습이다. 치맛자락 끝도 꽃잎 모습으로 표현하고, 양 무릎을 덮은 옷자락도 여러 가닥의 율동적인 주름으로 표현하여 시대 차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어 단아한 느낌을 주지만 이목구비가 가운데로 쏠려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무표정한 사각형의 얼굴과 신체 표현, 두터운 옷자락으로 인해 몸의 양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한 신체표현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양식의 불상이지만 당당한 자세와 입체적인 옷주름 표현 등에 이전 시대 불상의 여운이 남아 있어 조성 시기는 17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과천 교육원로 41(갈현동) 소재 보광사에서 관리 중이며 지난 1996년 12월2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부평도호부관아(富平都護府官衙)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부평초등학교 교정 모퉁이에 있는 옛 부평도호부 관아 건물이다. 건축 양식은 합각지붕을 한 정면 6칸, 측면 2칸의 굴도리집으로, 포작(包作)은 없다.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세벌대의 장대석과 고막이, 네모꼴 초석, 그리고 긴장대석을 이용해 쌓은 욕은지(浴恩池)라 부르는 네모꼴 연못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전배했다. 1789에는 먼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현륭원(사도세자의 원)을 참배했다. 이때 정조는 부평에 들러 부사를 인견하며 활을 쏘고 이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 한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