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특강 철학자처럼 논리하기, 나답게 글쓰기
최근 ‘미드’ 열풍을 주도한‘CSI 과학수사대’를 보면, 수사관은 범죄 현장에 숨어있는 단서를 찾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포위망을 좁혀간다. 지나치기 쉬운 조그만 단서도 의심해 보고 이를 통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찾아가는 추리력이 매우 놀랍다. 이 드라마가 주는 재미는 범인 찾기 놀이를 통해 ‘범죄를 재구성’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스터리 수사물을 통해 추리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 미셸푸코 /1926~1984 >
프랑스 철학자로 소위 후기 구조주의 사상가로 분류된다. 그의 지적 관심은 철학뿐만 아니라 정신병리학, 심리학, 역사학 등 폭넓게 걸쳐 있었다. 대표작으로는《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 병원의 탄생》(1963)《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1976) 등이 있다.
→논제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간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며 삶을 주기도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죽음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병원의 긍정적 기능은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인지 써보자.
→[푸코 Tip]
병원의 긍정적 기능은 상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국민보건의 측면에서 서술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문제점을 접근할 때는 푸코의 문제의식에 따라서 써 보세요. 상식적인 생각을 뒤집어보고 타당한 근거를 찾는 방법이죠. 규율을 통해 죄수를 훈련하고 통제했던 감옥의 교화방법을 병원의 시스템에도 적용해보세요.
# 어느 사회나 수많은 갈등을 안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정당 간의 대립이, 경제적으로는 노사 간의 갈등이, 사회적으로는 가치관의 갈등이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이 있듯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여러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법적으로 해결하자는 사람, 윤리와 상식으로 해결하자는 사람, 대화로 해결하자는 사람, 전문가의 견해로 해결하자는 사람, 힘으로 해결하자는 사람 등 그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어떠한 해결책이든 사태의 원인을 발견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일 것이다. 과학수사대가 범죄 현장의 단서로 범죄를 재구성하듯 주어진 문제의 단서를 가지고 문제의 윤곽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풀이의 기본전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열었다. 이 명제는 ‘인간의 사고’를 철학의 원리로 삼았다는 점에서 인본주의를,‘ 생각하는 이성’으로부터 세계의 진리를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부여받았다. 친구들 사이의 말다툼에서도 합리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비가 올거라 주장하는 학생과 점괘를 보니 오늘 비가 온다고 주장하는 학생중 여러분은 누구 말을 더 신뢰하겠는가. 과학은 자연을 숭배의 대상에서 앎의 대상으로 전환시켰고, 이로써 인간은 자연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이제 진리의 왕관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주어졌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에덴동산의 행복을 얻지 못했다. 특히 세계 1, 2차 대전에서 보았듯이 과학기술의 발달에 영향을 받은 현대 무기는 전쟁터에서 민간인과 젊은 군인들을 학살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 무렵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대결로 치닫기도 했다. 이후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준 전체주의적 경향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합리적인 인간의 판단에 따라 사회가 계속 진보할 것이라는 기대가 신기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발생한 것이다. 합리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 근대사회는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의심을 배경으로 미셸 푸코는 ‘근대의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탐구하였다. 데카르트가 말한 ‘의심할 수 없는 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특히 니체의 계보학을 본 따, 근대 초기 역사 속에서 사회가 근대의 개인들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그 과정을 파헤친 방법이 독특하다. ‘니체의 계보학(genealogy)’이란 학문을 전개한 방법론을 말한다. 마치 나의 뿌리를 알기 위해 가문의 족보를 살펴 올라가는 방법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산 음료수의 표시성분을 보는 것보다 생산 공장에 가서 어떻게 만드는지를 보는 것이 그 음료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보다 ‘나는 어떤 역사속에서 태어났는가’를 아는 것이 더 정확하게 나의 탄생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푸코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을 뒤집어 볼 것을 제안한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진짜 ‘나’가 아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뒤집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경험한다. 하지만 과연 거울이 없다면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까? 혹시 거울이 ‘나는 이렇게 생겼다’고 속이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거울이 보여준 나이지 않은가? 이처럼 푸코는 인간의 의식과 지식을 일종의 ‘거울의 반영’으로 이해했다.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란 사회와 무의식을 지배하는 권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푸코의 사고법은 논술고사에서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고 주장의 타당성을 밝히는 서술의 방식에 활용될 수 있다. 우리들의 신체(몸)에 어떻게 권력이 작용해 왔는지에 대한 푸코의 생각을 따라가보자.
● 고문에서 규율로 통제되는 육체뺖
《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대표적 저서다. 푸코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의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근대적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학교, 공장, 정신병원, 감옥 등이 모두 비슷한 시스템을 갖춘 제도라고 말한다. 푸코에 의하면 이 기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교육하고, 노동하고, 치료하고, 교화하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들은 모두 규율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는 규율제도들인 것이다.
사극을 보면 역모의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매우 잔인한 재판과정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했을까? 푸코는 이러한 끔찍한 사법행위가 자행된 이유가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절대주의 권력의 속성 때문이라 말한다. 절대 권력인 왕은 개인의 신체에 가할 수 있는 위협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극대화하여 복종시키려 한 것이다. 고문을 통한 공포의 조성은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을 통제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키려는 일종의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공개처벌과 신체형벌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민중들은 끔찍한 고문을 보면서 죄수들을 동정하거나 사형수의 최후 변론에 동요되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탓이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권력에 대한 공포감을 줄이면서도 민중의 저항을 제어할 새로운 사법체계를 고민했다. 그 결과 고문과 같은 신체형벌은 점차 감소하고 권력의 신체에 대한 구속력도 완화되었다.
그러면 인간은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까? 이제 권력은 고문이라는 직접적 고통이 아니라‘훈육을 통한 신체의 통제’로 나아간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죄인에 대한 인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진보된 사법행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신체에 가해지는 권력의 작용이 변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처벌이 고문에서 교화로 이동했다면, 그것을 집행할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이 바로 감옥이다. 감옥은 간수가 죄수들을 관리할 수 있는 건축기술의 발달을 낳았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 할 수 있는 효율적인 건축구조가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구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구속한다면 얼마나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따라 범죄와 그 처벌에 대한 법률지식이 발달하였다. 이처럼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여 권력과 지식의 발달이 어떻게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혔다. 푸코에 따르면 법학의 발달은 사법체계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근대사회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와 합리성이 보장된 민주사회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푸코는 바로 그러한 생각을 비틀어준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사회가 사실은 ‘감옥’처럼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고. 그러한 의문 속에 푸코는 감옥의 규율이 군대, 학교, 공장, 병원 등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감옥에서 뿐 아니라 군대, 학교, 공장, 병원 등 그 어느 곳에서든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행동한다. 현실을 떠올려 보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지각하지 말고,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규율들은 직장 생활에서도 환영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교는 미래의 직장 생활을 위한 규범을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사회적 규범은 약속으로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 규범을 어길 경우 처벌을 받는다. 그것은 합리적인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이기에 지켜야 한다. 스스로 내린 벌이기 때문에 달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러한 논리도 사실은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규율을 합리화 하려는 논리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과연 푸코처럼 근대사회를 분석하는 방식이 어떤 도움이 될까? 푸코는 근대 초기 사회를 분석하면서 현대 사회가 그때로부터 뿌리 내리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마치 족보를 들추듯 우리들이 이렇게 살게 된 연원을 살핀 셈이다. 푸코를 따라가 보면, 현대사회의 갈등 구조들이 그 뿌리가 깊어 단순히 대화나 법적 장치로는 해결될 수 없는 구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백화점에 숨어 있는 자본권력의 손짓뺖
이제 사회 속에서 자본권력이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와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온 과정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쇼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은 어떨까? 고대나 중세에도 시장과 상점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백화점같이 대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서구사회의 경우 백화점은 19세기 중반이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왜 19세기 중반부터 집중적으로백화점이 생겨났을까? 이는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대량소비라는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백화점은 생산과 소비를 대량으로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백화점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대량소비가 가능하려면 인구가 집중된 도시가 필요하다. 도시인구를 백화점으로 연결하는 교통기관의 발달도 필수적이다. 또한 백화점이라는 거대상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을 위한 주식회사와 금융기관의 발달도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백화점이란 판타지공간을 만들어낼 건축기술의 발전과 신문과 같은 광고 매체의 발달도 있어야 한다. 이처럼 백화점은 단순한 쇼핑공간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을 변화시킨 수많은 기술이 응축된 공간이다.
백화점의 등장은 소비자들에게 소비와 선택의 자유를 열어 주었다. 우리는 백화점에 가서 멋진 제품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소비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백화점은 단순히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탄생한 곳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진열된 상품들을 주체적으로 구경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상품의 눈으로 볼 때는 지갑을 열 예비 구매자를 구경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주체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의 도구로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대량소비의 사회에서 광고로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의 기호에 따라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백화점의 판타지는 판매를 통해 이윤을 실현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 소비대상으로 전락한 육체뺖
우리들의 육체가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육체라는 점은 장 보들리야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소비의 사회》에서 주객이 뒤바뀐 소비의 대표적 사례로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 중세사회에서 육체는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금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금욕의 장막을 걷어내고, 육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날 얼짱문화와 성형의 유행은 아름다워지려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육체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거대하고 은밀한 사회 구조의 결과이다. 소위 예쁜 여자는 착하며, 성공한다는 드라마 속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끊임없이 외모에 대한 소비를 자극한다. 즉 육체와 외모는 나의 실체가 아니라 소비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념이며 기호일 뿐이다. 오늘날 웰빙문화, 얼짱 문화, 성형유행 등은 단순히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본성의 발로가 아니라 대량 소비 사회가 창출한 시장이 가진 특징일 뿐이다. 그러니 예뻐지고 잘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 논리가 아니라 배후를 통찰하자뺖
이처럼 푸코와 보들리야르의 주장은 사회와 인간을 인간중심으로 바라보았던 전통적 시각에 반기를 들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세계의 중심인 주체이며, 합리적 주체로서 인간은 세계를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발전은 모두 이러한 인간관에 기초했다. 그러나 푸코는 이를 뒤집는다. 친구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친구가 말하는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심전심처럼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푸코의 계보학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사회구조의 배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물론 푸코의 주장이 어떤 정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푸코의 문제의식과 뒤집어 생각해보는 사고방식은 일상적인 생활과 사회에 대하여 규범과 상식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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