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은 이성적 판단이며 아집은 감성적 작용이다. 이성적 판단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릇된 것도 있다. 이에 비해 감성적 작용은 열이면 열 다 그릇된 판단에 든다.
치자의 판단은 이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형이 대체로 후자에 들어보이는 것은 유감이다. 나라의 혼선을 가져온 연유가 이에 있다.
노 대통령의 통치관은 신·구의 가치관, 계층별 대립관, 이 두 가지를 기조로 해보인다. 과거 투쟁단계의 앙금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모순이다. 과거는 구악 일색으로 배척하면서 구악을 답습한 신악의 변론엔 무척 관대하다. 사회 대통합 관념엔 평준화를 신앙화하는 흔적이 역연하다. 문제는 방법이다. 하층구조를 중간층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참다운 평준화의 플러스 접근 법이다. 상층구조를 중간층으로 깎아내리는 방법을 즐기는 것은 마이너스 발전법이다.
부동산대책을 예로 든다. 세부담 상한제 폐지, 보유세 실효세율 등 검토는 실수요자들의 부담 가중 요인이 짙다. 세제의 차별화는 계층간 갈등을 유발할 수가 있다.
투기와의 전쟁도 그렇다. 행정도시다, 지역균형발전이다 하는 장밋빛으로 온 국토를 투기마당으로 만들었다. 이에 겹쳐 ‘강남 저주’로 시작된 부동산대책은 수십 번 오락 가락하면서 되레 폭등시켰다. 부동산 투기로 엄청나게 챙기는 불로소득엔 중과세하고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아니다. 정권이 시장을 왜곡한 실패의 요인이 마이너스 발전법에 있는데도 아집을 버리지 못한다.
지역균형발전이란 것도 그렇다. 지역 특성의 기능을 살리는 융합적 조정이어야 한다. 수도권내 공공기관을 무 자르듯이 떼어주는 수치적 배급이 균형발전일 수는 없다. 말에 신뢰가 담기지 못한 것도 아집에 기인한다. 실례로 수도권을 선관리계획 후 규제완화로 전환하겠다는 말은 취임후 가진 중앙지 편집국장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똑같은 말을 지금도 한다. 아마 내년에도 되풀이 할 것이다.
고유가 대책을 들어 언론이 대안 제시없이 비판만 한다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래, 비판하는 기자 니가 한 번 와서 해보라”는 대목에선 실소를 자아낸다. 현재 석유 비축량은 1억1천620만 배럴의 비축시설 규모에 비해 불과 64.2%인 7천465만 배럴에 그친다. 75일분 분량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비축량 113일분 보다 무려 38일분 분량이 미달한다.
고유가에 대비해 대통령 말대로 무슨 “뾰족한 수”는 고사하고 평상시 대비도 안 된다. 에너지대책의 이완이 이러면서 “니가 와서 해 보라”는 것은 역시 감성적 대응이다.
대연정의 끈질긴 제의는 가히 스토킹 수준이다. 그런다고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건 아니다. 헌정 질서만 어지럽힌다. 이런데도 제의를 외면하려면 지역구도 타파 대안을 내놓으라고 한다. 전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요구는 억지다.
이런 저런 대통령의 아집을 사례로 들었다. 좀 정돈된 모습을 보고 싶다. 안정된 면모를 바라고 싶다. 토론이나 대화를 꽤나 많이 갖지만 언제나 일방적이다.
상대의 생각을 들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생각은 아예 없어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기에 바쁘다. 토론이나 대화는 이래서 으레 대통령 생각의 틀에 맞춰 짜여진다.
통치자가 소신이 없으면 국민이 불행하다. 그러나 통치자의 아집이 세면 국민이 헷갈린다. “대통령의 말을 듣고 나면 무슨 말인 지 헷갈릴 때가 많다”는 것은 민중사회의 정평이다. 대통령의 말은 알아듣기 쉽고 뜻이 분명해야 한다. 변칙을 원칙으로 돌려댄 상황논리는 반합리적이다. 알아듣기 어렵고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로 임기가 반환점을 돈다. 벌써 반인가, 아직껏 반밖에 안됐나 하는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완주코스 42.195㎞의 마라톤에서는 선수가 반환점을 도는 컨디션으로 성적을 가늠한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다. 저 내년엔 다음 대통령 선거로 한 해를 보낸다. 레임덕이 불가피해진다. 노 대통령에게는 내년이 중요하다.
주관적 강요의 아집보다, 객관적 설득의 소신을 기대한다면 역시 무리일는 지 모르겠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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