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젊은날의 사상 편력

소년은 집에서 잠을 자지못했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이집 저집 옮겨가며 밤을 새웠다. 그래도 불안했다. 창호지 방문안에 줄을 치고 두터운 요를 방문에 걸었다. 밖에서 총을 쏴도 방탄구실을 하도록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일이다. 아버지는 건국운동을 한다며 집안 일은 팽개치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아버지도 테러의 표적이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역사상 최초의 5·10 선거는 이런 가운데 치러졌다. 선거를 방해하던 그들은 투표소를 급습, 사람을 죽이고 투표함을 불사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익인 나는 우익 진영의 가족이었고 우리를 위협했던 저들은 좌익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아버지가 받은 것은 이승만의 감사장 한 장이었고, 가업이던 과수원은 돌보는 이가 없어 황폐화했다. 남로당과 토착 빨갱이 등 좌익 세력의 준동은 우익에 의해 건립된 대한민국을, 건국 후에도 무력 도발로 부단히 괴롭혔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국군장교로 들어갔던 아버지는 낙동강으로 후퇴했고, 어머니와 나와 동생들은 국군 가족의 멍에속에 감시의 대상이 됐다. “안 나가면 주목받는다”는 어머니 말에 나는 소년단에 나가 진종일 ‘김일성 장군의 노래’ ‘혁명가’ ‘적기가’ 등을 배우고 불렀다. 시일이 좀 지나 시골의 외할아버지가 “공기가 이상하니까 (할아버지 집에) 와 있으라”는 말씀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족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9·28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면서 무수한 우익 인사와 가족들이 저들 좌익에 의해 참살 당했다. 수복이 되고는 진짜 좌익, 무고한 좌익이 또 많이 우익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좌익의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어 안달을 부린 건 호기심과 반발심이었다. 호기심은 전쟁 때 체험한 공산주의는 전쟁시절이었으니까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반발심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의 저항이었다. 황산덕 서울대 교수가 쓴 ‘법철학’ 중 약 50쪽 분량의 공산주의 이론을 몇 번이고 탐독했다. 자본주의 입장에서 쓴 것이므로 의미를 뒤집어 판독해가며 읽곤하였다. 헌 책방을 뒤져 일본어로 된 관련 서적을 사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기도 했다.

군에 입대하기 직전엔 마침 진보당이 창당되어 들락거렸다. 말단 중 말단이었지만 재미가 있었다. 진보주의 사상에 심취해가는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게 대견하게 여겨졌다. 군에 입대했다. 부패한 군대는 쌀이든 군복이든 물자란 물자는 위에서 다 팔아먹어 이런 썩어빠진 군대의 나라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대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아도 장교나 하사관 등이 자기네 식구들 먹이기 위해 떼어가는 바람에 사병식당의 국그릇은 고기 한 점 없는 멀건 국물 뿐이기가 일쑤였다. 소가 물 건너가면서 냄새만 피운거나 같다고 해서 ‘황우도강탕’이라고 했다.

제대를 하고 나니 집안은 이미 많이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서울 홍제동 채석장에서 막 일을 시작했다. 취직이라고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운 판이니 어찌 할 수 없었다. 1961년 봄이다.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의 지방의원 선거가 있었다. 채석장주인이 시의원에 출마하는 것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그는 당선되어 서울시의회 의장이 됐다) 나도 출마했다. 선거 연설을 통해 욕이나 실컷 하고 싶어서였다. 제비뽑기 운이 좋았던지 기호가 두 손가락이나 양 팔로 ‘V’자 모양을 그리기 쉬운 2번이었다. 선거구는 서대문 제5선거구다. 선거구호는 다분히 선동적이었다. ‘무산계급에서 나온 사람, 무산대중이 밀어 주자’는 게 나의 선거구호였다. 물론 떨어지긴 했지만 빈민층이 많았던 지역이어서 어느 정도는 먹혀 들어갔다. 만 스물다섯살 시절의 일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나는 중도 보수주의다. 공산주의를 버린 것은 그 이론이 절대적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필연적 소산이긴 해도 결국은 신 계급사회의 지배구조이므로 수정 자본주의에 이은 재수정 자본주의를 선택했다. 뭣보다 공산주의 사회는 인성 말살의 기계적 사회다. 난 지금 인생을 잘못 살아 벌집 같은 다세대 주택에서 금융부채까지 진 소시민이지만 중도보수가 후대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얘길 하는 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 적잖은 젊은이들이 진보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설득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스로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나의 젊음에 비추어 그러하다.

또 하나는 불행하게도 좌·우의 이념이 아직껏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는 광복후, 한국전쟁 전후의 좌·우 대립이 살상과 전쟁으로 얼룩진 태생적 업보다. “냉전수구, 유신독재 망령이 되살아 났다”는 이 정권의 강정구 사태 반론은 강모와 같은 꾼다운 억지다. 이 정권은 좌익으로 가면서 아니라고 우긴다. 평양정권의 정치적 ‘민족공조론’에 말려들면서 아니라고 하는 그 실체가 의문시 되는 것은 사실이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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