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단상]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성공 과제들

세계 반도체 산업의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지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 공급망 리스크, 그리고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경쟁국들은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보조금을 투입하면서 경쟁력 강화에 직접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제조업에서 10%, 수출에서 20%, 그리고 총 투자에서 30%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경제의 핵심 산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압도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우려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현재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세제 지원 같은 정책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을 통해 지원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국민적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와 다른 산업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 현재 경기도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펩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회사들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공장 등 반도체 관련 산업이 집중돼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서 이 지역의 반도체 생산 비중은 80%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특히 용인시 처인지역에서는 SK와 삼성의 초대규모 반도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하이닉스가 140조원 규모의 반도체 팹 건설을 진행 중이며 삼성전자는 300조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공장이 완공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클러스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용인반도체클러스터가 발전하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은 바로 교통 인프라 문제다.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단순히 제조시설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활한 물류와 인력 이동을 위한 교통망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SK하이닉스와 삼성국가산단이 들어설 용인의 도로와 철도 인프라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내년부터 공사가 본격화되는 SK하이닉스 주변의 57번 국지도, 318번 지방도는 왕복 2차선으로 극심한 정체를 예고하고 있다. 당장의 공사 과정뿐 아니라 공장이 완공되면 교통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도로 인프라 확충과 유지에 더 많은 정부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철도 인프라도 개선이 필요하다. 용인과 인근 반도체 산업 단지에는 철도 및 전철 등의 인프라가 사실상 부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기 광주에서 용인 남사로 연결되는 경강선의 조기 추진과 동탄~부발선의 스케줄 재조정이 시급히 필요하다. 특히 용인 구성에서 이동·남사의 삼성국가산단, 원삼의 SK하이닉스를 연결하는 GTX-A 지선을 만들어 강남 30분 접근성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은 반도체클러스터 성공의 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아울러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의 공급이 중요하다. 세계적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그 중심에는 교육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탠퍼드대, 대만 신주산업단지의 칭화대 같은 우수한 교육기관이 성공적인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용인반도체클러스터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반도체 전문 공과대학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도권의 집중 규제로 인해 신규 대학 설립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행히 현재 명지대와 명지전문대학의 통합이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용인 명지대에 반도체 특성화 공과대학을 설립할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교육부와 지속적으로 소통해 통합을 성사시키고 반도체 공대 설립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각오다. 반도체 산업의 성장은 단순히 한 산업을 넘어 국가의 미래와 안전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교육기관이 힘을 합쳐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가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미래의 반도체 산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할 것이다.

[기고] 우리 모두의 문제 ‘관계성범죄’

스토킹, 교제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이미 맺어진 일정한 관계에서 반복되는 특성이 있는 범죄를 관계성범죄라고 한다. 관계성범죄는 가족, 연인 등 가까운 특정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이기에 재발의 위험이 높고 주변에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반복, 지속될 뿐만 아니라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해 그 어떤 범죄보다도 피해자 보호가 중요하다. 폭력은 대물림 되는 특성이 있어 아동학대 피해자가 교제폭력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되고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알려진 것처럼 연쇄살인범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도 아동학대 피해자였다. 관계성범죄 피해자가 반복되는 폭력의 사슬을 끊고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보호와 지원이 필요하다. 용인동부경찰서에는 2023년에만 3천845건의 관계성범죄 신고가 있었다. 경찰은 모든 관계성범죄 신고에 대해 다음 날 피해자를 모니터링해 심리적, 경제적 지원을 위해 유관기관과 연계하고 접근금지 처분, 스마 워치 등 안전 조치를 통해 피해자를 보호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또 용인동부경찰서는 관계성범죄는 피해자가 노출돼 타 범죄에 비해 불안감이 높다는 점에 착안, 경기남부자치경찰위원회에서 공모한 치안 관련 특화사업에 피해자에게 지능형 폐쇄회로(CC)TV 등 민간 경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제안해 선정, 63명의 피해자에게 민간 경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용인대와 협업해 범죄프로파일러가 스토킹 가해자를 심층 면담해 위험도를 판단하고 수사 자료로 활용하거나 가해자의 상담을 통한 교정을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피해자를 보호하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을 경찰과 함께 지자체 및 지역사회 내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관계성범죄의 원인 및 범행 동기를 분석, 연구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범사회적인 노력 또한 필요하다. 관계성범죄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피해자 보호 및 범죄 예방을 위한 보다 촘촘한 협업체계가 구축된다면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안전한 일상을 누리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된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경기만평] 이런 느낌...

[사설] 예측 실패로 코로나 백신 1천400억원어치 버렸다

3년 전, 나라는 코로나19 백신에 아우성이었다. 국가의 능력 평가도 코로나19 백신이었다. 얼마나 백신을 확보하느냐가 모든 걸 평가했다. 그 중심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있었다.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을 겸하던 그가 반복한 설명도 같았다. 2021년 3월29일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능한 한 백신 공급 일정을 앞당기고 많은 물량을 확보하는 범정부적인 노력을 하겠다. 수요와 수급에 대한 관리, 백신 확보 노력을 최대한 진행할 것이다.” 2025년 12월24일, 경기일보가 이런 통계를 보도했다. ‘코로나 백신 연 60만회분 폐기...혈세 줄줄 샌다.’ 불과 3년 만에 ‘백신 확보’가 ‘백신 폐기’로 바뀌었다. 2023, 2024년 2년간 경기도에서 폐기된 코로나19 백신이 123만여회분이다. 2023년 69만8천828회분, 2024년(10월10일 기준) 53만1천882회분이다. 이걸 돈으로 따지면 1천400억원이다. 전체 폐기량의 96%는 유효기간 경과였다. 맞을 사람이 없어 그냥 버려진 것이다. 3년 전 상황을 잠시 돌아보자.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백신의 양은 확보 가능한 대로 우선 사들였다. 그 과정에 선금 지급 등의 경쟁까지 벌어졌다. 그러다가 2023년 6월에 엔데믹이 선언됐다. 방역 당국이 감염자 추세, 전파 속도 등을 판단해 내린 결정이었다. 상당 기간 감염자가 줄고 있음을 추적했을 것이다. 백신 접종자도 그만큼 줄었을 것이다. 바로 그 방역 당국이 백신 수급과는 미스매치를 빚은 것이다. 수요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본보 기자가 확인한 의료 현장의 목소리는 분명하다. 한 병원 관계자는 “코로나 백신 접종은 급격히 줄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보건소에서도 2023년 이후 백신 수요량 급감을 한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질병 당국은 여전히 조(兆) 단위 백신을 구입했고, 그걸 지자체에 배분했고, 엄청난 폐기량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필요할 땐 구하지 못하고, 남아돌 땐 쌓아 둔 꼴이 됐다. 그 업무가 지자체로 넘어왔다. 지자체가 모든 걸 알아서 결정한다. 예산은 지자체와 질병관리청이 각 50%씩 부담한다. 경기도도 내년도 관련 예산을 세웠다. 654억여원을 세웠고, 100만명분을 구입한다고 한다. ‘너무 많이 잡은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다. 경기도 관계자는 기간별 구매 등의 대책을 설명했다. 혈세 낭비의 폐단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차피 해마다 거칠 질병 정책 아닌가. 데이터 관리 체계 등이 필요해 보인다.

[사설] ‘천원주택’ 준비 끝... 저출생 극복 넘어 청년 투자다

지난 7월 인천시가 ‘천원주택’ 정책을 내놓았다. 신혼부부가 하루 임차료 1천원 정도만 부담하면 주거 걱정을 덜 수 있다.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효과도 불투명한 이런저런 저출생 정책들 중 금방 돋보여서다. 그러나 ‘과연 실현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적지 않았다. 소요 재원이 5천억원에 이른다. 이런 우려를 딛고 내년 1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고 한다. ‘천원주택’은 인천형 저출생 주거 정책이다. ‘1억 플러스 아이드림’에 이은 또 하나의 저출생 대책이다. 1일 임차료 1천원(1개월 3만원)으로 신혼부부에게 주거를 제공한다. 매입임대와 전세임대, 두 가지 방식이다. 매입임대는 인천도시공사(iH)가 매입해 놓은 공공임대주택을 지원한다. 전세임대는 희망자가 입주하고 싶은 시중 주택이 대상이다. 신혼부부 등이 주택을 선택하면 인천시가 집주인과 전세계약을 맺고 공급한다. 최대 전세보증금 2억4천만원이며 초과액은 자부담이다. 지원 기간은 최소 2년부터 최대 6년이다. 예비 신혼부부 및 결혼 7년 이내 부부가 대상이다. 무자녀 65㎡, 1자녀 75㎡, 2자녀 85㎡까지 가능하다. 현재 인천의 민간주택 평균 월 임차료가 76만원 정도다. 평균 임차료의 약 4% 수준 비용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잘만 되면 신혼부부의 주거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다. 인천시는 이를 통해 자녀 출산과 양육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인천시는 정책 발표 후 예산 등 필요 행정 절차를 거쳤다. 보건복지부와의 사회보장제도 신설 협의도 최근 마무리했다. 지난주에는 iH와 ‘천원주택 공급 업무협약도 맺었다. 매입임대와 전세임대를 각 500가구씩, 연간 1천가구를 공급한다는 목표다. iH는 최근 천원주택 입주자 모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입주자 모집은 우선 매입임대 주택부터 시작한다. 이후 전세임대 주택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내년 1월1일부터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곧바로 공모 절차에 들어간다. 상반기 중 대상자 선정과 주택 공급을 마무리한다는 일정이다. 올해 들어 인천의 출생아 증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월 1만1천326명으로 8.3% 늘었다. 이 기간 혼인 건수도 9천661건으로 12.4%나 증가했다. 아직은 인천형 저출생 정책과의 연관성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천원주택’의 시작은 저출생 극복이다. 동시에 우리 청년에 대한 사회적 투자이기도 하다.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 청년들이 ‘천원주택’으로 힘을 얻기 바란다.

[지지대] 온도차

분위기가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딱 1년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 매년 크리스마스 당일 새벽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을 자동차 트렁크에서 꺼내 집 안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뒀는데 올해는 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산타할아버지가 중학생까지 챙길 시간이 없어 못 오실 것 같아 선물을 포기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그럼 올해부터는 아빠가 산타할아버지 대신 필요한 선물을 나눠주는 ‘아빠 산타’가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딸아이와 집 근처 애플스토어에 가서 그렇게도 원하던 아이패드를 사줬다. 집에 돌아와 늦은 새벽까지 아이패드를 연구하는(?) 아이의 모습이 사뭇 낯설었다. 1년 전만 해도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겠다며 일찍 잠들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컸지’ 하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바뀐 것은 비단 필자의 집에서만은 아닐 것 같다. 탄핵 정국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대한민국 전체를 덮고 있는 요즘이다. 1년 전, 코로나19가 사실상 종식되고 맞았던 크리스마스는 거리마다 울리는 캐럴과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행복해 보이는 이들의 아름다운 미소로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올해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온도차는 작년과 크게 다르다. 나라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데 쓰이는 캐럴이 낯설고, 가족과 행복한 장소에서 함께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보다는 집회 현장에, 그리고 경기가 어려워 그저 방콕하는 가족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너나 탓할 것도 없다. 미래의 주역인 우리 아이들의 가슴에 행복감을 심어 주기 위해 우리는 오늘의 차가운 이 온도를, 내년에는 온도계 최상단까지 끌어올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이다.

[삶, 오디세이] 작가와 트라우마

12·3 비상계엄 사태는 시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상처였다. 서울 도로에 나타난 군 장갑차와 국회의사당으로 들이닥친 무장한 군인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과거 계엄 때 받았던 공포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수많은 시민이 한밤중인데도 국회의사당으로 모여들어 맨몸으로 계엄군을 막아냈다. 시민들이 계엄군과 맞서는 사이 우원식 국회의장 등 다수의 국회의원이 국회의 담을 넘었다. 결국 국회의사당에 모인 190명의 국회의원이 155분 만에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지금 이곳의 작가에게 심리적 외상을 입혔다. 이제 작가들은 작품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시를 쓰는 데 바탕이 되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 임화는 ‘현해탄’에서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며 주권 잃은 트라우마를 노래했다. 의열단 요원이었던 이육사는 ‘광야’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며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날을 예고했다. 그런가 하면 서정주처럼 ‘오장 마쓰이 송가’를 써서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어간 동족의 젊은이를 미화한 시인도 있다. 서정주는 민족의 트라우마를 잘못 사용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서사라는 특징 때문에 중요한 소설의 소재가 된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관과 우리나라의 분단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좌익 진영의 염상진과 우익 진영의 염상구는 형제다. 두 인물은 남북이 형제라는 것을 상징한다. 또 김원일은 ‘손풍금’에서 분단의 비극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서사로 엮어냈다. 손풍금은 남파 간첩으로 잠입했다가 체포돼 21년을 복역한 박광수와 남한에 정착한 박도수의 이야기다. 태백산맥처럼 손풍금도 분단 시대의 형제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은 우리에게 닥친 큰 충격이다. 이러한 충격이 역사적 트라우마로 작가의 작품 소재가 됐다. 심리적 외상인 트라우마는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와 미술 등에 종사하는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소재가 된다. 천만 관객 달성으로 알려진 ‘서울의 봄’은 12·12군사반란에 의한 트라우마를 형상화했고 액션의 명작인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서사화했다. 이처럼 트라우마는 화면에 생생한 액션을 불러오고 잘못된 역사에 저항했던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든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가 역사적 트라우마로 ‘절규’라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그는 미술사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뭉크는 노란색과 붉은색 등 원색으로 공포에 질려 있는 인물을 그렸다. 세계대전을 경험한 뭉크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원색으로 질문을 던진 통찰력이 뛰어난 화가다. 작가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세계에 질문하고, 현상에 질문하고, 사물에 질문한다.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질문한 결과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소설 ‘소년이 온다’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질문했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제주4·3항쟁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질문했다. 이제 지금 이곳의 작가들이 12·3 비상계엄이라는 트라우마로 작품을 만들 것이다.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감독은 영화로, 화가는 그림으로 12·3 비상계엄에 질문을 던질 것이다. 작가는 질문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읽기] 제7공화국의 문을 열어야

오랜 세월 국회도서관 책장에 있던 헌법이 스스로 낡은 옷을 벗고 여의도 광장으로 나왔다. 대한민국이 더 놀라운 희망의 빛을 봤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주도하는 K-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확신이다. 87년 체제가 시대적 역할을 다하고 새로운 세대가 다음 세상을 열어 가는 흐름이 열렸다. 민주주의의 시대교체다. 국민이 만든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뜻을 따를 것이다. 그래서 탄핵 절차는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아니라 국민의 시간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이 새로운 헌법을 쓰는 시간이어야 한다. 탄핵 심판은 단순히 대통령의 과거 행위의 위법과 파면 여부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헌법적 가치와 질서의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강한 민주주의 회복력을 확인했지만 국민의 삶은 힘들고 트라우마는 깊다. 지금 대통령 파면 여론은 약 80%로 나타난다. 이 압도적 국민의 마음은 특정 정치인과 정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본질이다. 계층과 처지가 서로 다른 80%가 공유할 만한 연합 의제와 가치, 비전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실현해 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조기 대선은 현실로 다가왔다. 탄핵 절차와 대선은 사실상 기간이 일치한다. 특히 K-민주주의의 시대교체 시기와 맞물린다. 절실하게 대한민국을 리셋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래서 윤석열 파면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내란 세력의 청산에 그쳐서도 안 된다. 정권 교체로 멈춰서도 안 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탄핵해야 하고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탄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탄핵해야 하며 왜곡된 검찰권력을 탄핵해야 한다. 기본권과 권력구조 등의 개헌, 민주주의, 불평등, 선거제도, 고용, 사회보장, 공교육, 기후, 인공지능(AI) 경제, 한반도 평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K-뉴딜, 즉 사회대계약을 추진해야 한다. 87년 헌법을 만든 세대와 응원봉을 든 K-민주주의 세대가 서로 연결되며 제7공화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삶을 지키고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질적 성장을 이루는 진정한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가장 중요한 전제다. 국민은 국민의힘의 행태를 보면서 비상식적 정치구조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수도권 122석 가운데 19석을 얻었다. 반면 영남권(대구·부산·울산·경남·경북)에선 65석 중 60석(92%)을 얻었다. 국민의힘 지역구 국회의원 90명 중 영남권 지역 비율이 67%를 차지한다. 지역 독점 구도만 유지된다면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을 비판하지 않아도, 탄핵소추안에 반대해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을 주장해도, 검찰 개혁을 막아서도, 다음 총선에서 국회의원직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들이 극우 정당화되는 과정에 문제의식도 필요 없을 것이다. 경쟁없는 지역 독점 구도에 균열을 내야 비정상적 정치가 사라진다. 선거제도 개혁이 전제되지 않은 개헌은 무의미하고, 정책연합과 가치연합은 지속적일 수 없다. 정권교체와 제7공화국의 문을 여는 데 동의하는 모든 세력이 함께하는 뉴딜 연합을 시작해야 한다. 모두가 함께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천자춘추] 지속가능 내일 위한 ‘ESG 경영’

필자가 소속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서는 ESG 경영에 열심이다. 도대체 ESG 경영이란 무엇이길래 기관의 역량을 이렇게 집중하는 걸까.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로 기업의 성과 창출을 넘어 환경 보호, 사회적 책임, 그리고 투명한 지배구조 확립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영전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공기관은 왜 ESG 경영을 추진해야 할까. 공공기관은 공공서비스 제공을 통해 국민의 복지와 공공이익을 달성하는 곳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ESG 경영은 공공기관의 본질적 역할을 재조명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지역사회와 상생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ESG 경영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이다. 심평원의 ESG 경영, 무엇이 다를까. 심평원은 ESG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본원 및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ESG경영추진단 조직을 별도 신설했다. 심평원 고유사업을 연계한 ESG 대표과제를 발굴해 중점 추진하고 ‘의료기관 ESG 경영 우수사례 및 아이디어 공모전’ 개최 등 보건의료 분야 ESG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지역 시민이 일상 속 ESG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감탄위크 체험단’을 지원하며 참여형 ESG 활성화를 이끌고 있다. 이에 발맞춰 심평원 경기남부본부에서는 2024년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해 수원역 노숙인 무료진료 봉사, 홀몸어르신 만성질환 특화 교육 등 보건의료 전문인력과 지식을 활용한 사회공헌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또 취약계층 성장 지원을 위한 어르신 일자리 창출과 지역자활센터 서비스 정기 이용, 친환경·저탄소 환경 구현을 위한 전기차 충전소 국민 개방, 투명경영의 일환으로 지역사회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민참여열린경영위원회를 구성해 의견을 수렴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ESG 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듯 심평원은 ESG 경영을 통해 국민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보건의료 전문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심평원의 실천 사례가 지역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전달하고 다함께 성장할 수 있는 내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