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탈원전 정책 포기한 일본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방향에 따라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중단 문제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제 본격화될 찬반논의의 귀추는 국제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 전 세계에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30개국. 이 가운데 독일, 벨기에, 스위스, 대만 등 4개국이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여파로 탈원전을 선언하고 이행해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원전사고 후 원전 제로 정책을 선언했으나 불과 3년 만에 친(親)원전으로 복귀했다. 그래서 일본은 탈원전 실패 사례로 인용되곤 한다. 원전 찬반을 떠나, 에너지자원 결핍 등 여건이 우리와 흡사한 일본의 탈원전 정책이 번복되는 과정과 그 함의를 살펴본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현장은 처참했고, 이는 곧 반(反)원전 정서로 이어졌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74%가 원전의 단계적 폐지에 찬성했다. 이에 당시 민주당 정부는 2011년 7월 탈원전 정책 검토를 선언했고, 2012년 9월에 2030년까지 원전 제로를 구현한다는 혁신적 에너지전략을 발표했다. 핵심은 △40년 이상 가동한 원전 폐쇄 △원전의 신·증설 금지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등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혁신 전략을 받쳐주지 못했다. 운전 중인 50기 원전이 안전점검을 위해 차례로 정지되었는데 점검을 통과한 원전도 주민들의 반대로 재가동이 어려웠다. 그 결과 2012년 5월에는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지되기도 했다. 전력생산의 27%를 차지했던 원전이 이렇게 되자, 안정적 전력공급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광범한 전기절약 운동, 유휴 화력발전소까지 풀가동 등으로 전력 대란은 피했지만, 화력발전을 위한 연료 수입 급증은 전기요금 상승으로 이어졌고, 전기를 많이 소모하는 산업은 한국 등으로 해외이전을 추진했다. 이처럼 전기요금 등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재계 불만이 높아진 가운데 2012년 12월 총선이 치러졌고, 총선 쟁점은 원전 찬반이었다.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집권 민주당과 친원전을 주장한 자민당의 대결이었다.결과는 친원전 자민당의 압승. 국회내 친원전 의원은 총선 전 132명에서 346명으로 급증하고, 반원전 의원은 339명에서 123명으로 격감했다. 자민당 연립정부는 원전 재가동을 적극 추진하면서 2014년에 탈원전 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지난 6월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향후 에너지 기본계획에 원전 신·증설과 노후 원전의 재건축 필요성도 명기하는 것을 검토한다고 했다. 일본의 탈원전 정책이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좌절한 배경은 무엇일까? 탈원전 정책은 보통 수십 년에 걸쳐 수령이 다한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하면서 대체 에너지를 확충해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일본의 탈원전은 선언 당시의 특수사정에 따라 거의 모든 원전이 단기간에 가동 중단되는 바람에 전력의 수급불안이 당장 현실화되면서 국민을 안심시킬 중장기적 대책이 작동할 수 없었던 한계 때문이었다. 우리의 탈원전 추진환경은 이와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이 원전 위험을 알면서도 선거과정에서 친원전을 지지한 것은 향후 탈원전 추진에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탈원전 정책의 성공 여부는 국민의 공감과 지지에 달렸고 이를 위해서는 탈원전이 국민의 전기사용편익을 크게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국가 간의 자리다툼, 내 자리는 어디일까

지난 5월 이해찬 특사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면담하는 좌석 배치가 잘못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통상적으로 나란히 앉는데 이번 면담에서는 시 주석이 테이블 상석에 앉고 이 특사는 테이블 옆면에 착석하도록 해 시 주석이 면담을 주재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 간에 있어서 좌석 배치는 미묘하다. 과거의 예를 소개하자면 무대는 다자 외교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1815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회의장. 회의가 있을 때면 그 당시 강국이던 프랑스가 항상 상석에 앉곤 했다. 대다수 참석 국가들도 그렇게 좌석 배치를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한 국가가 어느 날 작심하고 일찍 회의장에 도착해 평소 프랑스가 앉던 상석 좌석을 차지한다.이 모습을 본 다른 국가들이 회의장 내에서 “프랑스의 위상에 변화가 생겼나?”라고 소곤거리고 이를 듣게 된 프랑스는 맘이 편하지 않았다. 좌석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예인데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자면 2016년 초 미국 중서부에 있는 일리노이 주의 주지사가 시카고에 있는 40여 개 국가를 대표하는 총영사들을 초청하여 일리노이 주를 소개하는 설명회를 개최했다.그날 좌석 배치를 보니 주지사 옆 좌석을 중국 총영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주지사 옆 좌석을 총영사단을 대표하여 일본 총영사가 않는 것이 상례였는데 좌석의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이 좌석 배치 하나가 현 국제정세에서 두 나라의 위상을 암시한다니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자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앉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앞에서 보는 것처럼 미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인의 경우에도 회의나 모임을 가면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살펴본다. 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불편해하고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국가가 참석하는 국제회의의 경우 좌석 배치는 매우 어렵다. 선착순으로 할 수도 없다. 그런 경우 의장국 옆자리에 서로 않겠다고 주먹다짐이라도 나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의전서열이 있다.의전서열은 대통령, 국왕과 같은 국가수반(Head of State), 총리인 정부 수반(Head of Government), 국제기구 대표 순으로 한다. 같은 그룹 내에서는 임기가 오랜 정상이 의전서열이 높다. 예를 들면 일본 총리는 정부 수반이기 때문에 국가수반인 한국 대통령보다 의전서열이 낮다. 국제회의를 보면 의전서열이 높은 사람이 나중에 입장하는데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경우도 의전서열에 따른 것이다. 도착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의전서열이 늦어 먼저 도착하는 정상의 경우 마지막 정상이 도착하기까지 40여 분 정도 기다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과거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당시 한국 대통령이 의장국으로 각국 정상들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접하고 있었다. 마지막 입장 순서를 놓고 미국 대통령과 중국 주석 간에 신경전을 벌리는 바람에 이명박 대통령은 현장에서 몇 분 정도를 우두커니 서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이만큼 국가 간에 자리다툼은 치열하다. 우리나라 속담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자기 자리를 잘 알고 처신하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세상이다. 김상일 道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주권반환 20년과 홍콩의 미래

3년간 홍콩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선배들은 ‘징역 3년에 벌금 3천만 원’이라면서 홍콩 근무를 걱정해 주었다. 도시 국가인 홍콩에서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시내만 돌아다녀야 하고, 서울에서 찾아오는 손님은 많아 3년 근무기간에 빚만 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당시 ‘서양의 진수를 알려고 하면 영국으로 가고 동양을 알려면 중국으로 가라. 그러나 동서양을 동시에 만나는 곳은 바로 홍콩’이라면서 홍콩의 인기는 높았다. 홍콩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홍콩섬과 주룽(九龍)반도 그리고 신계(新界(주)New Territory)다. 홍콩섬과 주룽반도는 19세기 중반 제1, 2차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중국(淸)으로부터 할양받아 사실상 영국의 영토가 됐지만 신계는 다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배하자 영국은 홍콩섬과 주룽반도를 지키기 위해 주변의 신계가 필요했다. 1898년 영국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홍콩섬과 주룽반도의 6배가 되는 신계를 99년간 조차했다. 영국으로서는 영구 조차의 효과를 기대하였는지 모르지만 세월은 흘러 99년이 되는 1997년이 다가왔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조차 연장을 요청해 놓고 중국이 쉽게 응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달랐다. 신계의 조차 연장은커녕 홍콩섬과 주롱반도도 불평등 조약으로 빼앗은 것이니 반환하라고 주장하였다. 덩샤오핑은 홍콩섬과 주룽반도를 돌려주지 않으면 신계에서 홍콩 쪽으로 가는 수도관이며 전력 등을 모두 끊겠다고 얼음장까지 놓는 한편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s)’라는 절묘한 해결 방안을 내놓고 영국을 설득했다. 1984년 홍콩반환협정이 발표됐다. 신계를 포함 영국령인 홍콩섬과 주롱반도를 모두 중국에 반환하고 그 대신 홍콩은 ‘홍콩인 통치(港人治港)’를 원칙으로 현재의 시스템을 2047년까지 50년간 유지하는 홍콩 기본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했다. 1997년 6월30일 밤 영국을 대표하는 찰스 왕세자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에게 주권을 반환(hand over)하고 크리스 패튼 총독과 함께 왕실 전용 요트를 타고 홍콩을 떠났다. 7월 1일 0시를 기해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트럭을 나누어 타고 홍콩으로 진입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영국 식민통치 치욕을 씻어주는 비라고 했다. 1841년 아편전쟁 당시 영국인이 홍콩섬을 점령하자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영국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홍콩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대륙으로 탈출할 것인가의 고민을 했다고 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1997년에도 홍콩 주민들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일부 홍콩인들이 캐나다 밴쿠버로 대거 탈출(이민)을 한 것도 그러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올해 7월로 홍콩의 주권반환 20주년이 된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이 홍콩을 찾았다.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홍콩은 완전히 반환돼 중국의 일부가 된다. 수도 베이징에서 보면 남동쪽의 상하이, 남서쪽의 홍콩을 중심으로 창장(長江)과 주장(珠江)을 끼고 두 마리의 용이 중국 경제를 끌고 가는 모습이 된다. 홍콩에서 멀지 않은 남중국해가 영유권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다. 홍콩은 경제뿐만이 아니고 중국의 안보 면에서도 중요한 거점이 되고 있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일본과의 관계 재설정

한·일 양국 정상은 지난 독일 G20회의에서 양국 간 협력 활성화에 합의하고 셔틀외교를 복원키로 했다. 위안부 문제는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그은 채 현안으로 남겨졌다. 우리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증진을 위한 방안으로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해결과 실질적 협력관계 증진을 분리하는 투트랙(two-track) 정책을 추진코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투트랙 정책은 우리의 전 정부들도 시도하던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수면 하에 잠재하던 양국 간 과거사 문제가 일 측의 망언 등을 계기로 부상하고 국민의 감정이 분출되면서 양국관계가 경색, 일본과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가 동결되는 양상이 반복돼 그동안 효율적이지 못했다. 투트랙 정책의 진전을 위해서는 과거사 해결과 실질적인 협력관계의 증진 노력을 균형되게 가져가는 정부와 국민의 냉철한(cool) 이성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과의 관계 재설정을 향한 우리의 냉철한 접근은 일본의 정체성에 대한 통찰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일본 내 우경정권의 영원성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추동해낸 메이지유신 이념에 정치적 뿌리를 둔 우경세력은 전가 보도인 부국강병 명분하에 영구히 집권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양심세력은 과거사를 객관적 시각에서 보고 있으나, 일본사회의 주류가 돼 집권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시대에 관한 일본의 우경적 역사관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과거사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 본심으로는 신국의 영광된 역사로 보기에 한국의 식민지배에 관한 반성과 사과는 진정성이 없는 통과 의례에 그친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인 바, 이는 일본의 본색과 세계관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임을 우리가 꿰뚫어 보는 것이 좋다. 둘째, 일본인의 윤리관이다. 1899년 ‘무사도란 무엇인가(Bushido, the Soul of Japan)’를 집필한 ‘니토베 이나조’는 서양 법학자가 일본 학교에서 종교교육이 부재해 학생들에게 도덕교육을 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함을 계기로 자신에게 선악의 관념을 일깨워준 것이 무사도이며 봉건제도와 무사도에 대해 모르고서는 현대 일본의 도덕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사회는 절대자인 신 앞에 선 인간의 죄의 문화가 아니라 행운의 기원 의식은 있으나 속죄 의식이 없는 수치의 문화라고 지적한다. 수치의 문화는 도덕의 기본체계를 이루는 원동력이 죄의 자각이 아니라 치욕감이며 수치를 면하기 위해 선행을 한다. 이와 같은 일본적인 우경성과 도덕률 전통은 인류 공통의 가치를 폭넓게 공유치 못하는 폐쇄성에 비추어,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의 형상이 될 수 있다. 일본과의 과거사 갈등은 어느 하루에 해결되지 않으며 장구한 시간이 소요될 지난한 과제라고 본다면, 우리가 한일 관계의 재설정에 대해 냉철과 금도있는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더하여, 우리 사회 발전을 통해 일본인들이 우리를 진정한 존중감을 가지고 보도록 만들 때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사과도 보다 더 빨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한일 기업간 협력의 진전과 한일 우호관계

지난 6월21일 일본 도시바는 자회사인 도시바 메모리를 매각하기 위한 우선협상 대상자로 SK하이닉스가 참여한 한·미·일 기업 연합컨소시엄을 선정했다. 도시바 메모리는 세계 제2위의 플래시메모리 생산업체로서 SK하이닉스는 이번 컨소시엄 참가를 통해 도시바와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세계 플래시메모리 시장에서 약진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한다. 한일 양국 기업 간 협력이 더욱 진화되는 형태를 보는 것 같아 인수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바란다. 한일 양국의 기업 간 협력은 사실상 정부주도하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의 일방적인 기술이전을 촉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까지는 매년 한일무역회담을 계기로 100건이 넘는 기술이전희망 리스트를 일본 측에 제시하고 일본정부의 협력 조치를 압박했다.일본 측 답은 공공기관 보유기술은 가능한 협조를 제공할 것이나 민간기업 보유기술은 정부가 개입할 수 없으니 양국기업이 상업베이스에서 협의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열띤 논의가 매년 무역회담에서 반복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우리 측은 그러한 기술이전 요청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기술이전 리스트 제시를 중단했다. 대신에 우리 정부는 1980년대 중반 시작된 중소기업 기능인력의 일본연수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우리 중소기업의 기능·기술직원들을 일본기업에서 연수시키는 프로그램에 합의하고, 90년대 들어서는 매년 100명 이상을 파견하여 일본의 생산현장에서 선진기술을 습득케 하는데 매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2000년대 들어서서도 한일 정부 간 협력사업 등을 통해 우리 기업들이 일본기업의 퇴직기술자를 초빙하여 생산현장에서 기술이나 노하우를 자문 받고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이 계속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 기업과 일본기업의 기술격차는 줄어들고 우리 기업들의 생산 제품과 용역들이 일본기업에 공급되는 사례가 이제는 흔하게 됐다. 이와 함께 한일 기업 간 협력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됐다. 2007년 일본 스미토모 상사와 한국 광물자원공사가 협력하여 마다가스카르의 코발트 광산 개발프로젝트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한일 기업의 협업에 의한 제3국 시장 진출이 유망한 협력분야로 주목되기에 이르렀다. 2016년 말 현재까지 제3국에서 한국과 일본기업이 공동으로 진출한 자원개발 및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는 87건에 이른다. OECD는 2000년에서 2030년까지 전 세계 인프라 시장의 누적 투자금이 총 71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어 세계 인프라 시장의 잠재수요는 막대하다. 프로젝트 개발과 파이낸싱에 강한 일본기업과 EPC(엔지니어링·조달·건설)에 강한 한국기업이 협업하면 세계 인프라 시장에서 강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중국기업의 저가공세를 견제하고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주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정부가 공조하여 적극적인 마케팅 전개와 파이낸싱 해결 등 측면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가 개선되고 우호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과거 한일 간 기술협력의 성과가 한일 우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듯이 한일 우호관계 증진은 SK하이닉스의 도시바메모리 인수 참여 같은 또 다른 차원의 한일 기업 간 협력도 촉진할 것이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불편한 동행

지난 6월11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펼쳐진 U-20 월드컵 대회 결승전에서 한국을 예선전에서 꺾은 잉글랜드가 우승을 차지했다. 혹자는 왜 영국이 아닌 잉글랜드 팀인지 궁금해한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 4개 지방정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제축구시합의 경우 영국 단일팀이 아닌 4개 팀으로 지역 예선전에 참가한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필자가 2000년대 초반 영국에 근무할 당시 영국 외무성 직원과 면담을 한 기억이 떠오른다. 영어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을까봐 필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고 양해의 말을 전했더니 영국 외교관은 대뜸 자신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고 하면서 필자를 안심시켰다. 놀라서 연유를 물어보니 자신은 스코틀랜드인이라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론 필자를 편하게 해주려는 생각이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영국의 역사를 보면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중심 민족인 잉글랜드 간의 뿌리 깊은 애증을 이해할 수 있다. 약 2천400년 전 영국 본토에는 유럽에서 이주한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54년 로마제국의 영국 침공 이래 로마인의 지배하에 있던 영국은 4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로마인이 떠난 후 410년 전후 이번에는 북쪽 게르만족인 색슨(Saxen)족과 앵글(Angle)족의 침략을 받게 된다. 영국 땅에 살고 있던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간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지는데 이 전쟁에서 패한 켈트족은 영국의 서·북부로 내몰리게 된다. 이들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13세기 말엽 스코틀랜드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 승계문제를 두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또 한 번의 전쟁이 벌어진다. 이 당시의 상황은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자기가 살던 땅을 타민족에게 빼앗기고 이에 더해 1707년 잉글랜드에 합병을 당한 스코틀랜드인들의 마음속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앙금이 존재하고 있다. 잉글랜드에 합병당한 지 310년 만에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독립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지난 2014년 9월의 독립 투표(그 당시는 찬성 44.7%, 반대 55.3%로 좌절)에 이어 2017년 3월28일 또다시 독립주민투표 법안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가결했다. 독립 투표를 위해서는 영국 중앙정부와 지난한 협의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으로서는 당면한 유럽연합(EU)과의 탈퇴협상이 힘든 과정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내부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 움직임이 반가울 리 없다. 영국 정부 대변인은 “메이 총리는 스코틀랜드 정부와 협상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은 영국 전체를 위해 EU와 협상하는데 전념해야 한다”고 밝혔다.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주장이 유럽의 일부 국가들에 긴장감을 불러올 수 있다. 스페인의 경우 북쪽의 바스크 지역, 동쪽의 카탈루냐 지역의 분리, 독립이 골칫거리이다. 벨기에도 크게 화란어를 사용하는 플라망 지역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 지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플라망 지역이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이들 국가로서는 스코틀랜드의 독립 움직임이 도미노 현상을 가져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관계를 보면서 아프리카 속담이 떠오른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 김상일 道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하려면

중국의 부상으로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투키디데스 함정’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해 왔다. 고대 그리스의 장군이자 역사학자인 투키디데스(BC465~400)는 기원전 5세기 해양세력으로 신흥 강대국이 된 아테네와 기존 강대국 스파르타와의 패권투쟁을 그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란 역사서를 저술했다. 그는 국가 간의 관계는 정의보다 패권의 기반하에 이루어지는 현실에 입각하여 역사서를 기술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그래함 앨리슨 교수는 사례연구를 통해 지난 500년간 역사에서 대부분의 패권교대가 전쟁을 통해 이루어져 왔음에 착안,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s Trap)’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앨리슨 교수는 오늘날 미중관계를 떠오르는 중국(rising China)과 패권국 미국(reigning America)과의 관계로 보고 두 나라가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미국의 문제를 지적했다. 중국은 화평굴기(peaceful rise)라는 표현을 쓰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를 통해 가급적 아시아를 하나로 연결하고 미국을 아시아로부터 밀어내려고 한다. 이는 과거 중국과 아시아 이웃 간의 천하개념(天下槪念 천하의 모두는 황제의 것)을 연상시킨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중관계를 보면 양국은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지 않고 패권교대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일본 등 태평양 연안 11개국과 맺기로 약속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탈퇴를 선언했고, 최근에는 세계의 195개국이 참여한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TPP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다자 자유무역(FTA) 기구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으로 볼 때 ‘미국 우선주의 (American First)’를 내세워 그 간 미국이 추구해 온 글로벌 리더십, 즉 패권을 포기하고 국내 지지층의 이익에 매진하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보다 ‘미국의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적인 행동에 분노한 독일의 메르켈 수상은 ‘미국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 유럽인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빠져나간 글로벌 리더십의 공백을 조심스럽게 채우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의 TPP 탈퇴에 따라 당황해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에게 RCEP로 손을 내밀고 있으며 파리기후협약 탈퇴로 분노하는 세계를 달래고 있다.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글로벌 리더십 승계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아직도 미중 간의 국력의 격차는 크다. 지금 당장 미중 간에 글로벌 리더십의 교대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마이웨이가 계속되고 중국이 인권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면서 대외적으로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을 감추고 어둠에서 힘을 기름)의 정신으로 때를 기다린다면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하고도 글로벌 리더십을 획득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특사외교와 한일관계

우리 신정부는 지난달 10일 출범한 지 2~3주 사이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각각 대통령 특사를 파견해 신정부가 앞으로 차분하게 외교안보정책을 펴나갈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 같다.지난 대선 기간 중 대북한 정책,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합의 등 외교·안보 문제들이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곧 주변 주요국들과 외교 갈등이나 위기를 겪게 될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기에, 집권 초기 신속한 특사파견 등을 통해 이러한 우려들이 상당히 불식됐기 때문이다. 필자는 방일 특사단의 일원으로 5월17일~20일 도쿄를 방문해 특사외교의 현장을 보게 됐다. 특사단은 3박 4일 동안 아베 총리와의 면담을 비롯한 스무 개에 이르는 면담과 오·만찬에서 문재인 정부가 지향할 외교안보정책의 목표와 방향에 관해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했다.특사가 전달한 핵심 메시지는 △북한 핵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한·일간 및 한·미·일간 공조체제를 지속 강화할 것이며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 교류협력은 북핵 문제의 진전도 고려하면서 단계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점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가고자 하는 신정부의 의지를 밝히는 한편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 대부분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명확히 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양국 간 제반 현안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상 간 빈번한 직접 소통이 필요하다고 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중단된 한일 정상 간 상호 방문외교(셔틀 외교)를 복원하기 바란다는 점 등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및 정계 인사들은 특사단과의 의견교환을 통해 우리 신정부의 대북한 및 대일 정책노선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을 내려놓고 안도하며, 향후 한일관계 회복과 협력강화를 크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아마도 일본 측은 우리의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 신정부가 원칙 없는 대북 유화정책을 펴고 일본에 대해서는 과거 문제에 집착한 반일적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상당히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언론도 우리의 셔틀 외교 복원 제안을 특히 부각해서 보도하면서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선 기간 중 문재인 후보의 집권 가능성에 우려하던 보도 논조와는 사뭇 달랐다. 이어 특사단이 만난 일본 경제계 지도자들은 한일 정치관계 개선이 양국 기업 간 제3국 공동진출 등 경제협력 가능성을 크게 넓혀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환영했다. 또한 그간 한일관계가 나빠지면서 일본 내 혐한론이 확산돼 심적으로나 영업상으로나 고통을 받던 재일동포사회의 대표들도 한일관계 개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데 안도와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처럼 신정부 출범과 동시에 정상 간 통화외교에 이은 신속한 특사외교를 통해 우리 신정부와 일본 정부 간에 우려와 의구심을 일단 걷어내고 앞으로 한일관계 회복을 위한 소통과 협력의 큰 방향을 마련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한일관계 회복의 과제는 이제부터다. 특히 위안부 합의 문제와 같이 한일관계를 언제든지 악화시킬 수 있는 현안은 선제적으로 대책을 강구하고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상황을 관리해나가야 할 것이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은?

미국 역사상 임기 중간에 탄핵을 당한 대통령은 전무한 반면 암살을 당한 대통령은 4명이나 된다. 암살당하는 것보다 탄핵당하는 것이 더 어려운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지난 5월9일 트럼프 캠프의 러시아와의 연계문제를 조사하던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해임된 후 이른바 ‘코미메모’가 등장하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논의가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또 미국 온라인 배팅사이트인 Betfair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4년 임기를 못 채운다는 배팅확률이 50%라고 한다. 미국 역사상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이 9명이 있다. 그중 4명은 임기 중 자연사했으며 링컨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등 4명은 임기 중 암살을 당했으며, 닉슨 대통령은 1974년 탄핵에 의해서가 아니라 탄핵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임한다. 이외에 탄핵에 근접했던 대통령이 2명 있는데 제17대 앤드류 존슨 대통령과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은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후 상원의 탄핵 표결에서 면죄부를 받는다. 미국의 탄핵 결정절차를 알아보면 하원이 우리의 국회처럼 탄핵안을 발의하는데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고, 상원이 우리의 헌법재판소처럼 탄핵을 심의하고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데 상원의원 100명 중 23에 해당하는 67명의 찬성이 필요하다. 탄핵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미국 헌법 제2조 4항에 열거된 미국 대통령의 탄핵사유인 ‘반역죄, 뇌물죄, 중대 범죄와 경죄’에 해당하는지 여부, 둘째, 상원의 탄핵 심판에서 의원 23의 찬성표를 확보할 수 있는지 여부, 셋째, 대통령의 인기도가 있다. 첫 번째 혐의와 관련해서 최근 민주당 일각에서는 법무부가 전 연방수사국 뮬러 국장을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을 수사할 특별검사로 임명한 점과 상원과 하원의 동시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캠프의 러시아와의 내통이나 트럼프 대통령의 수사중단 압력 등 ‘사법방해’의 명확한 증거 없이 탄핵을 밀어붙이다 역풍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는 고려에서 탄핵 속도 조절론을 제기하고 있다. 두 번째 관련해선 공화당과 민주당 간의 대결 현상이 뚜렷한 가운데 공화당이 하원과 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 상황을 감안할 경우 가까운 시일 내 하원에서 탄핵안 발의와 상원에서 판결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세 번째 대통령의 인기도와 관련해선 의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미국도 다름 아닌 재선 여부이며 재선 여부에 대통령의 대중 인기도는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통령의 인기도가 너무 낮으면 의원들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인기도는 30% 중반으로 닉슨 대통령 사임 당시 인기도인 20% 중반보다는 높다. 현 상황에서 탄핵 가능성을 점치기는 어렵다. 다만 탄핵사유가 될 만한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등장하거나, 공화당 의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이 더 이상 공화당이나 자신들의 재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민주당이 2018년 말 중간선거에서 놀랄만한 승리를 거둔다면 상황은 변할 수 있다. 펄 벅 여사가 자서전인 ‘다리를 지나가기 위해’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불가능하다고 입증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불가능한 것도 현재 불가능한 것일 뿐이다.” 김상일 道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광화문 시대’

문재인 더불어 민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불통의 대통령에서 소통의 대통령 시대가 왔다. 몹시 추웠던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민심은 ‘소통의 대통령’을 선택했다. ‘시민주권시대’의 문을 여는 문재인 대통령은 ‘소통’ 면에서는 과거의 어느 대통령과 크게 다를 것으로 본다. 취임 첫 주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인사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서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에서 나와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겠다는 약속의 이행이 중요하다. 한국 대통령의 실패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청와대 환경이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들고 제왕처럼 행동하다 보니 소통이 실종돼 실패하는 대통령이 많았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임명한다. 1926년 조선왕조의 정궁(正宮)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내고 독일인 설계로 서양식의 거대한 화강암 석조의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총독부 건물은 독립 후에도 1995년 철거될 때까지 정부청사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됐다.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완성한 후 경복궁 후원(royal garden)으로 과거 역대 왕족들이 활쏘기 등 무예에 힘쓰던 경무대(景武臺)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1939년 완공된 경무대 총독관저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처음 입주하여 태평양전쟁 패전 후 미군에 의해 쫓겨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도 사용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부터 경무대 총독관저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고 4ㆍ19 후 윤보선 대통령에 의해 일제의 잔재와 독재의 상징이 된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바꿨다. 그 후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청와대는 지금과 같은 권위주의 건물로 신축됐다. 청와대의 위용과 내부구조는 문민 대통령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문민 대통령은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으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예산 및 경호상 이유 등을 내세워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조선왕조 시대 궁궐의 일부였던 청와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중국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가 생각난다. 중난하이도 청조(淸朝) 자금성 후원(皇家園林)의 일부였다. 중난하이는 청조 말기 실력자 서태후가 거주하던 곳이다. 서태후는 서양에서 도입된 철도를 좋아하여 중국 최초의 철도는 중난하이에 부설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하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중난하이에 총통부를 설치했고 1949년 신 중국이 건국되면서 중난하이는 중국 공산당 중앙과 국무원 청사 그리고 정부요인의 거류구가 됐다. 중난하이와 연결된 베이하이(北海)는 시민공원으로 주말에는 나들이 나 온 시민들로 크게 붐비지만 남쪽의 중난하이는 너무 조용해 완전히 딴 세상처럼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에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기기 전까지 일상 업무를 여민관(與民館)에 마련된 집무실을 사용하고 청와대 본관은 주요 행사나 내 외빈 접견 등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소통의 문재인 대통령이 ‘광화문 시대’를 열면서 지금의 청와대는 본래 모습으로 복원돼 경복궁과 함께 역사 문화거리로 시민에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우리 외교의 도전과 기회

지난 5월9일 선거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국민들이 지난 수개월의 국정 공백기를 뒤로하고 이제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교분야에서는 북한 핵 미사일 실험에 따른 안보위협의 증대,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과의 관계 악화, 위안부 합의 이행을 둘러싼 일본과의 관계 경색, 미국 트럼프 신 정부와의 한ㆍ미 동맹관계 재정착 등 중첩된 다수의 현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능동적인 대처가 부족한 것으로 보여 우리의 안보와 국익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당면한 외교 현안들은 그간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법이 쉽게 나올 수 있는 사안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이 출발하는 우리 정부에게는 어려운 도전일 수밖에 없으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난제들의 극복과정을 통해 우리 외교가 한 단계 격상되어 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북한은 5월14일 우리 정부가 출범한 지 수일 만에 2번이나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우리 정부에게 북한 핵문제의 엄중성을 재차 각인시켰다고 본다. 북한 핵 미사일 위협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은 크게 본다면 2개의 선택지가 나와 있다. 1단계는 북한이 핵 미사일 개발을 중단 및 폐기하도록 UN의 대북제재조치를 중심으로 긴밀한 국제적 공조체제를 통한 압박과 제재를 구사하여 북한을 대화와 협상의 장으로 나오도록 유도하고 이것이 성공치 못할 땐 군사적 수단의 동원도 상정될 수 있으나 이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참화가 초래될 가능성이 매우 큰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방안으로 보인다. 따라서 2단계로는 불가피하게 핵의 균형(미국의 핵 전략 자산배치 등)을 통해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우리가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는 것은 안보 측면에서 국민들이 수용치 않을 것이며 또한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북한의 발언권을 강화시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도 커다란 제약이 될 수가 있다. 또한 우리는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남북대화의 창을 여는 노력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국 트럼프정부도 북한 당국과 대화용의를 표명하고 있고, 중국은 북한과 항상 대화의 문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고 볼 때, 우리도 남북한 간의 대화를 추구해 우리 나름대로의 대화창구를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남북 대화의 추구는 핵 문제 등 전반적인 남북관계에 관해 우리의 능동적 참여가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대화를 통해 우리의 고유한 외교공간을 조성해 나갈 수 있다면 이는 미ㆍ중의 노력을 보완해 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며, 이들 국가와의 역할분담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외교 공간의 확보 노력은 동맹국인 미국과 긴밀한 사전조율과 협의, 정보공유가 선결적이라고 생각된다. 한미 동맹과 남북대화가 상호보조를 같이하면서 보완적이 될 수 있도록 함이 긴요하다고 보며 이에 우리 외교의 중요한 과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재난 지원과 공공외교

강원도 지역에서 일어난 산불이 희생자와 이재민을 내면서 모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재해로 순식간에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한 지원과 관련해 물질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필자의 해외근무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2014년 5월 초순. 발칸 유럽의 북서부 지역에는 120년 만에 최대의 폭우가 쏟아졌다. 사흘 동안 퍼부은 장대비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를 가로지르는 사바강이 범람하는 등 최악의 홍수 사태가 일어났다. 피해는 동유럽의 여러 강이 합류하는 세르비아, 세르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동부 ‘부코바르’, 보스니아 동북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함은 물론, 20여 년 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파묻힌 지뢰와 폭탄들이 유실되면서 피해지역 접근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제 구호단체들은 긴급히 인적 물적 지원에 나섰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정부는 자국 주재 외교단에 지원을 호소했다. 필자가 근무하던 주크로아티아 대사관은 인접 주세르비아 대사관과 함께 본국에 긴급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다.우리 정부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결정했으나, 크로아티아는 국민소득이 1만 불을 넘는다는 사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중국은 크로아티아 정부에 현금 약 5만 불을, 일본은 10만 불에 해당하는 구호물자를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당시 우리 대사관은 인력과 예산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 대사관의 공공외교 활동에 늘 밀린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작지만 우리 대사관의 마음이라도 전달하자고 했다. 현지 크로아티아인 행정직원들까지 참여해 1천200불이 모금되었고, 크로아티아 적십자사에 송금했다. 곧 적십자사 총재의 요청으로 적십자사를 방문해 감사장을 받았고, 얼마 후에는 예상치도 않게 크로아티아 외교부 장관으로부터 감사서한을 받기도 했다. 외교부 간부는 한국 대사관만이 직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의연금을 보내온 데 대해 외교장관이 감동한 것 같다고 전해왔다. 이재민들에 대한 높은 관심과 지원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 지지만, 이재민들의 고통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당시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은 동부 국경지대 ‘부코바르’였다. 그곳은 과거 전쟁 당시에도 포화에 쑥대밭이 돼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데, 한국 태권도 보급에 열의를 갖고 있는 인사들이 있어서 우리 대사관이 그 지역 상황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대사관은 매년 개천절에 주재국 수도에서 개최하는 국경일 리셉션을 부코바르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은 예산이지만 그 지역에서 쓰고 재해지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수도에서 300㎞나 떨어진 변경에서 개최된 국경일 리셉션은 주재국내 외교단은 물론 언론 및 정부에 상당한 화제가 되었고, 대단히 성황이었다. 부코바르 시장은 필자가 주재국을 이임할 때 일부러 자그레브에까지 와주었다. 외교에는 국가이익 관철을 위한 치밀한 계산과 냉철한 사고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외교정책을 펴나가는데 해당국가 국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고자 추진하는 공공외교 활동에서는 물질적 지원만이 아니라 그 위에 마음을 얹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중남미 포퓰리즘의 쇠퇴

중남미 사람들에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트럼프식 포퓰리즘은 낯설지 않다. 이미 자기 국가에서 유사한 정치인들과 포퓰리즘 정책들을 많이 봐 왔다고 생각한다. 중남미에서 포퓰리즘을 내세운 대표적인 인물들은 예를 들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들이다. 이들 모두가 정치의 전면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퇴장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15년 실각하고, 에콰도르의 코레아 대통령은 금년 임기를 종료한다. 이외에도 브라질의 딜마 루세프 대통령이 2016년 탄핵당하고, 한 세대를 풍미했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도 2016년 11월 사망함으로써 중남미 포퓰리즘 지도자 대부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남미의 포퓰리즘은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Juan Peron) 대통령에서부터 시작된다. 뮤지컬 에비타(Evita)의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Don’t cry for me, Argentina)’ 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영부인이었던 에바 페론(Eva Peron)과 대통령인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국민들, 특히 빈민들과 노동자를 위한 복지제도 도입 등 무리한 국민영합주의 정책을 취하여 국민들의 반짝 인기는 얻었으나 결국 국가 경제를 그르치고 이로 인해 군부의 쿠데타로 정권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중남미 포퓰리즘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중남미 포퓰리즘의 특징은 우파와 좌파를 떠나 대부분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며, 국민들에게 ‘구원자’를 자처하고 기존 집권세력과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대항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또한 중남미 포퓰리즘은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와 균형을 무시하고, 당, 정부, 지방정부 등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한다. 그들이 성장은 중남미 국가들이 안고 있던 극심한 소득과 부의 불균형이 배경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시에서 급격히 증가하는 빈곤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 세력으로 만들고 그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됐다. 2000년대 중남미에서 포퓰리즘이 재등장하게 된 계기는 1990년대 후반에 일어난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중남미 지역경제가 침체된 것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와 빈민층을 위한다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유사한 정책을 표명하며 등장한 포퓰리즘 지도자들은 그 당시의 어려운 국가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그 이후 운이 좋게도 중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되고 이로 인한 호경기로 인해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충분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한 선심성 정책을 흥청망청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경기가 하향세를 걸으면서 중남미 지역 경제도 2010년부터 6년간 경제성장 하락세를 보임에 따라 중남미 포퓰리즘도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중남미에서 포퓰리즘이 아닌 진정 국민들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길 기대하며 플라톤이 국가론(The Republic)에서 말한 것을 떠올려본다. “진정한 의미의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국민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다.” 김상일 道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재스민’ 외교

지난 4월 초 미국을 방문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펑리위안(彭麗媛) 부부는 긴박한 정상회담 가운데서 트럼프 대통령 내외와 함께 아라벨라(5세)와 조지프(3세) 남매가 부른 중국 민요 ‘모리화(茉莉花)’로 모처럼 흐뭇한 시간을 가졌다. 중국어를 또박또박 잘하는 이 남매는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의 자녀들이다.‘아름다운 모리화여 사랑하는 님에게 한 송이 꺾어 드리고 싶네 눈보다 희고 아름다운 모리화여’ 이러한 가사로 시작되는 모리화 노래는 중국의 창장(長江) 남쪽에서 유행하고 있는 민요의 이름이기도 하다. 중국의 아열대 산지에서 자생적으로 피는 모리화는 그 독특한 향과 순백의 색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그 노래가 민요로 만들어졌다. 1896년 청조(淸朝)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유럽을 순방하였다. 방문국에서는 국빈을 맞아 연주할 국가(國歌)가 필요했다. 당시 청조에서는 국기(國旗)로서는 황룡기가 있었지만 국가는 없었다. 리훙장은 중국에서 누구나 잘 아는 모리화 노래의 곡을 임시 국가로 지정하였다. 1920년대 초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가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를 주제로 한 오페라 ‘투란도트’를 작곡할 때 모리화 곡을 주제곡의 하나로 삽입함으로써 모리화 노래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중국의 공식 국가는 항일의용군 행진곡으로 바뀌었지만 모리화 노래는 여전히 중국을 상징하는 노래에는 변함이 없다. 1999년 마카오가 중국으로 반환될 때 모리화 곡이 연주되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메달 시상식 때에도 이 곡이 연주되었다. 중국을 상징하는 노래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우리의 ‘아리랑’처럼 즐겨 부른다고 한다. 시 주석 내외가 이방카 자녀의 모리화 노래를 듣고 잠시 고향 생각을 하였는지 모른다. 모리화는 3~6세기 중국을 지배한 북방의 기마민족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전래됐고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아랍인에 의해 북아프리카 튀니지까지 흘러들어 갔다. 모리화의 순백의 색상은 청결을 좋아하는 튀니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튀니지의 국화(國花)가 되었다. 튀니지에서는 ‘신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모리화를 야스민(jasmeen)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영어권에서는 재스민(jasmin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튀니지의 노점상 청년이 부패한 경찰의 단속에 분신자살로 항의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튀니지 민중의 반정부 투쟁으로 24년간 계속된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튀니지 혁명을 ‘재스민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재스민이 튀니지의 국화이기 때문이다. 재스민 혁명은 튀니지에 그치지 않고 이집트 리비아 등 다른 아랍의 국가에도 확산되어 이른바 ‘아랍의 봄’을 가져온 기폭제가 되었다. 모리화는 차(茶)로도 만들어져 차의 나라 중국인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일반 차에 없는 독특한 향과 모리화의 하얀 꽃잎이 들어 있는 모리화차는 중국에서 손님이 오면 즐겨 내 놓는 차다. 11세기 중국의 송조(宋朝)시대, 차의 고장인 푸젠성(福建省) 산지에서 흔히 피는 신선한 모리화를 녹차에 섞어 꽃의 향기가 찻잎에 흡수되도록 하여 만들기 시작한 것이 모리화차로 외국에서는 재스민차로 알려져 있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프랑스의 정체성 선택

오는 4월23일 개최되는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극우 ‘르펜’ 후보와 중도 ‘마크롱’ 후보가 예측 불허의 불꽃 접전을 벌이고 있다. 세계에 충격을 준 영국의 EU 탈퇴 선택과 미국민의 트럼프 대통령 선택에 이어 유럽의 중심부인 프랑스에서 유권자들이 어떠한 정치적 선택을 할 것 인지가 주목된다. 첫째, 유럽에서 극우주의 정권의 탄생 여부이다. 르펜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EU 탈퇴를 위한 국민투표 실시, 이민감축과 규제를 위한 국경봉쇄, 유로화 대신 프랑화로 환원 등 반EU, 반이민, 반 이슬람의 프랑스 우선주의를 공약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EU탈퇴가 현실화 되면 유럽 전역은 엄청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다.EU 탈퇴 도미노 현상이 뒤따르고 EU가 해체될 것이며 2차대전 후 유럽 안정의 주춧돌 역할을 해온 프랑스-독일 간 연대관계도 붕괴될 우려가 크다. 작년 말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 금년 초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극우정당이 집권에 실패했으나 프랑스에서 1940년대 이후 처음으로 극우주의 정권이 수립될 것인지 주목된다. 둘째, 금번 선거를 프랑스의 정체성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EU 체제하에서 급증하는 이민유입과 강화된 EU의 통제로 인해 영국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EU 탈퇴를 결정한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르펜 후보도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경제, 높은 청년실업률, 빈번한 테러 발생 등 프랑스가 당면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EU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하면서 EU를 탈퇴하여 프랑스 고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톨레랑스’(tolerance, 관용 정신)가 존중받아 왔다. 즉, 자신과는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다양성(diversity)으로서 수용하는 개방적 정신문화인데 프랑스 사회와 문화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가치이다. 프랑스가 국민적 긍지로 자부해온 관용정신을 버리고 르펜 후보의 프랑스 우선주의의 대중영합적 조류에 편승할지 궁금하다. 셋째, 프랑스 대선에서도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 국민들의 최우선 관심사인데, 르펜 후보와 마크롱 후보의 공약 차이가 대비된다. 르펜 후보의 공약은 EU 체제와 유입된 이민들이 일자리를 뺏어갔다고 보고 반 EU와 이민유입 규제를 통해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마크롱 후보는 EU와의 협력 강화, 규제 철폐 그리고 노동시장 개혁으로 신규 일자리 창출을 약속하고 있다. 르펜 후보는 외국인으로부터 자국민으로의 일자리 환원을 추구하는 뺄셈의 프랑스 우선주의정책이고, 마크롱 후보는 개방적 세계화의 지지를 통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는 덧셈의 정책인 것이다. 프랑스 국민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마크롱 후보(39)의 부인 ’트로뉴’는 25세 연상이다. 마크롱 후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반 지도교사였던 부인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부인은 세 명의 자녀를 둔 기혼녀였으나 마크롱 후보의 열애를 받아들여 재혼한 것이다. 사생활에 대해 이처럼 관대한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대통령선거 외교안보 선명경쟁은 우려

대통령 선거가 이제 몇 주 앞으로 다가왔다. 과거 대선 때의 북풍 논란이나 이번 대선의 북 미사일 발사 논쟁처럼, 북한은 우리 대선 판에서 여전히 빼놓을 수 없는 불쏘시개이다.그러나 사드 문제와 같은 구체적인 안보·외교 이슈가 대선 후보 진영 간에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된 경우는 과거에 없었던 것 같다. 또, 이들 외교·안보 이슈에 이해관계를 갖는 주변 강대국들이 우리 대선후보들의 입장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골적으로 말과 행동을 보여 온 경우는 더더욱 없었던 것 같다.그만큼, 이들 이슈가 우리나라와 주요국 간의 미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 결과에 따라서는 우리의 대외경제와 나아가 국민의 경제생활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드 배치 문제. 미국과 현 대통령 권한대행 정부는 대선 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사드 배치를 완료해서 기정사실화하겠다는 생각에서, 배치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겨 부지(성주 롯데 골프장)도 정리되기 전에 사드 장비부터 들여 놓기 시작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1월 하순 출범한 이래, 곧 국방장관(2월), 국무장관(3월), 부통령(4월)이 연이어 방한하여, 북한 핵·미사일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사드를 조기 배치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중국은 정반대로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한국은 엄청난 후회를 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고, 실제 배치가 이루어지면서 경제·문화 분야를 중심으로 보복조치를 강화해오고 있다. 중국의 고위관료들이 한국을 연이어 방문하여, 관계, 정계 및 재계를 순회하며, 사드 문제가 현행대로 배치되어 가면 한중관계에 손상이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다닌다. 참으로 양 대국 사이에서 사면초가 상황이다. 그런데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우리 대선 후보들 간 사드 토론에서는 사드 배치에 찬성이냐 반대냐, 기존 주장과 다른데 말을 바꾸었느냐 하는 선명성 공방만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사드 배치 찬성은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것이고 반대는 한미동맹을 깨자는 것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논란도 눈에 띈다. 그러나 외교에서 절대적 입장은 위험하다. 타협하기 어려운 입장은 있어도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협상에 임하는 바보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최고 결정권을 갖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사드 문제처럼 국가 안보와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중대 교섭 사안에 대해 찬반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답답하기만 하다. 현 정부는 사드 배치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결함과 의혹을 범하였고 최고 외교관인 대통령이 궐위되어 있는 상황이기에, 사드배치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미국이나 중국의 주장이나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도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어서 합리적 해결방안을 찾으려는 여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런 점에서 남은 대선과정에서 후보들이 서로 찬성이냐 반대냐로 압박할 것이 아니라, 대선 후 신정부 하에서 어떤 과정으로 어떤 원칙에 따라 해법을 찾아야 하는지를 논의하기를 기대해본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미국과 중국관계는 판도라 상자?

4월 초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첫 번째 미ㆍ중 정상회담이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트럼프 대통령 소유 리조트인 마라라고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현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주요 2개국(G-2)의 첫 회담인 만큼 전 세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불구가 된 미국(Crippled America)’이란 저서에서 중국에 대해 ‘두 얼굴’을 가진 나라로서 “국내적으로 자유를 제한하고 세계경제를 조작한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미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과 경쟁하고 있는데 중국이 미국의 기술을 훔치고 화폐가치를 낮추는 방법 등으로 미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지키고 있다.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을 활용하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2015년 총 무역적자 7천371억 달러의 절반인 3천657억 달러의 무역적자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하니 속이 편할 까닭이 없다. 한편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지난 2013년 3월 공식 취임연설을 통해 “중국 부활의 꿈”을 달성하고, “국제무대에서 중국을 강대국으로 재건”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런 배경에서 개최되는 금번 정상회담이 향후 미ㆍ중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ㆍ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필자가 2015년 가을 대표적인 현실주의 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imer) 시카고 대학교수로부터 미ㆍ중 관계 전망을 청취한 기억이 떠오른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역사적으로 신흥강대국이 평화적으로 부상한 경우가 없다고 하면서 중국의 부상도 미국과의 긴장, 경쟁 관계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했다.중국의 부상은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자신의 세력권을 확보하는 노력으로 연결될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대부분의 국가가 거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대통령은 1823년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남미 지역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반대하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외교정책으로 천명한 적이 있다. 자기 세력권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존 세력을 퇴출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신ㆍ구 강대국 간에 충돌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우며, 그런 지역의 하나로 한반도가 거론된다. 우리의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미ㆍ중 관계의 향후 전망과 관련해 키신저 박사처럼 미ㆍ중간 긴장, 갈등 관계를 ‘필연이 아닌 선택’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미ㆍ중간 협력을 통해 갈등을 극복해 나갈 것으로 전망하는 학자들과 전문가들도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미어샤이머 교수, 미국 노트르 댐 대학의 세바스티안 로사토(Sebastian Rosato) 정치학 교수와 마틴 쟈크(Martin Jacques)와 같은 학자들은 미ㆍ중 관계가 국제관계의 불안정한 속성과 상대국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다. 미ㆍ중 관계라는 판도라 상자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한반도 미래에는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미ㆍ중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향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김상일 道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사드와 일편빙심

탄핵 심판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파면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대선정국에 중국의 사드 보복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것처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롯데마트를 중심으로 한국 상품의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유커(遊客ㆍ중국관광객)들로 발붙일 곳이 없었던 국내 면세점이나 명동거리는 썰렁하다 못해 한산하다. 얼마 전 제주도에 기항한 크루즈 선박에서 3천400여 명의 유커들이 ‘애국적 행동’이라면서 하선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유통, 관광, 통관 등 중국의 전방위적인 사드 보복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다. 2015년 10월 중국의 항일 전승기념 천안문 열병식에 한국의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서방세계 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한중관계는 밀월(蜜月)관계로 표현되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의 지나친 중국 경사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북한의 도발이었다. 북한은 지난 한해 두 차례의 핵실험과 24번의 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한국을 위협했다. 중국만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은 한국으로서는 실망과 함께 신뢰도 무너졌다. 사실 사드 배치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3년도 넘었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이 김정은 북한 정권의 핵 포기를 끌어내어 사드 배치가 필요 없게 되기를 바라면서 사드에 대해 ‘불요청-불협의-불결정’이라는 3불 정책으로 일관했다. 중국도 유엔 결의안에 따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술이 점차 고도화되고 김정은은 더욱 호전적이 돼 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중국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China has done little to help!)”라고 일갈했다. 당(唐)대의 문인 왕창령(王昌齡, 698~755)이 지은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이라는 시(詩)가 있다. 친구를 떠나보내면서 낙양의 지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지은 시라고 생각한다. 한우연강입오(寒雨連江入吳ㆍ차가운 밤비 강물을 따라 오나라 땅으로 흐르는데). 평명송객초산고(平明送客楚山孤ㆍ이른 아침 친구 떠나보내니 초나라 산이 외롭게 보이는 구나). 낙양친우여상문(洛陽親友如相問ㆍ낙양의 벗들이 내 소식을 묻거들랑)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ㆍ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항아리에 담겨 있다 전해 주게). 한중관계는 25년이나 되는 오래된 친구(老朋友)사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중국을 사랑하여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업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 최근 미국의 하원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방미를 앞두고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는 용납할 수 없다’는 중국에 대한 경고의 결의안을 발의했다. 한국의 사드 배치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한미동맹 차원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불가피한 자위 조치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중국의 사드 보복조치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한 조각 얼음같이 깨끗한(一片氷心)’ 한국인의 마음을 중국의 벗들이 알아주어 사드 보복이 하루라도 빨리 철회되기를 바라고 있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우리 이웃나라들의 진면목

지금 우리는 대통령이 탄핵 재판을 통해 파면되면서 조기 대통령선거에 임하는 위기상황에 있다. 그런데 이웃 국가들은 우리와의 현안을 그들 쪽으로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는 양태를 보이고 있어 실망스럽다. 격언에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다는데 금번에 이웃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 그리고 일본과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추구해 왔으나 현재 양국이 사드 사태와 부산 소녀상 문제로 경제 보복 조치와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구두선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가 체험하였다. 우리와 중국, 일본은 이웃 국가로서 장구한 역사적 관계를 나눠 왔다. 이제 역사는 중세의 왕조 시대와 근세의 식민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시대에 왔으나 우리 이웃의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볼 때 과거의 정복(征服) 왕조적 또는 식민제국주의적 의식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중국과 일본의 우리에 대한 현금의 조치는 분명히 균형감이 결여된 과수(過手)이다. 중국의 경우 사드(THAAD)배치에 반대하면서 관광금지, 한한령과 함께 롯데에 대한 경제적 보복조치를 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조치가 적절한 가에는 심지어 중국 내에서도 의문과 자성의 의견이 제시되기 시작하고 있다. 중국이 사드배치의 근본 원인인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방관한 채 방어적인 사드배치를 중국의 안보 위협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방조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한·중 양국이 수교 이후 25년간 성실히 발전시켜온 우호협력관계를 중국이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자세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양국관계의 한계는 우리와 중국 간 존재하는 이념과 체제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부산 소녀상 문제로 주한 일본대사의 소환 등 외교적 압박은 가하고 있으나, 이 또한 시민단체가 주도하여 지방자치단체가 승인한 소녀상 설치에 대해 우리 국가를 상대로 외교적 조치를 취하는 것은 과하다. 일 정부는 지난해 12월 위안부 합의를 양국 간 과거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우호협력 관계를 추구해 나가는 주춧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위안부 합의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위안부 희생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일본 측의 보완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며, 일 정부는 이러한 보완적인 조치를 통해 위안부 합의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중국과 일본은 현재 취하고 있는 조치가 과수(過手)이기 때문에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우리와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현 상황을 의연하게 극복해 나간다면 우리 이웃들은 민낯을 드러낸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본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엿보이는 왕조적, 식민주의시대적 가치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 체계로 선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동일본 대재난과 역사의 교훈

일본의 지진관측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매그니튜드 9.0)으로 도쿄를 포함한 동일본지역 전체가 흔들렸던 동일본 대재난이 발생한 지도 벌써 6년째다. 필자는 대지진 하루 전인 3월10일 일본근무를 위해 도쿄에 도착했다. 다음날 오후 사무실에 첫 출근하여 책상에 앉자마자 별안간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하여, 벽걸이 TV가 덜커덩거리고 화병이 넘어지고 책장의 책들도 무너져 내렸다.진동이 다소 잦아들어 건물 밖으로 대피하니 여진으로 건물들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 거리 어디에도 눈에 띄는 건물손상은 없어 보였다. 오래된 건물들은 내부가 엉망이 되기도 했다지만 그 큰 흔들림에도 파손된 건물 한 채 없을 정도로 대도시 도쿄의 지진 대비는 탄탄했다. 문제는 땅 흔들림이 아니었다. 지진이 초래한 거대한 쓰나미, 그것이 재앙이었다. 진앙지에 가까운 일본 동북지역의 해안지방은 초대형 쓰나미로 쑥대밭이 되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도 삼키고 해안 지역의 집들은 파도에 실려 뭍으로 떠밀려 올려졌다. 해안가 평지대는 수 킬로미터까지 휩쓸리기도 했다. 피해는 엄청났다. 사망자 1만5천여 명, 행방불명자 2천500여 명. 당시 피난민은 47만여 명이었고, 6년이 지난 지금도 12만 3천여 명이 피난생활을 하고 있을 정도다. 대지진 후 한동안 TV에서 반복해서 방영되는 쓰나미 위력을 보며 사람들은 자연이 빚어낸 재난의 참상에 공포와 무력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일본 대재난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 초래된 인재(人災)였다고 생각됐다. 우선 쓰나미로 황폐화된 해안지대에서 집 한 채 희생자 한 명 없는 마을이 화제가 됐다. 미야코시 아네요시(宮古市 吉)라는 주민 11세대 40명의 조그만 마을이다. 해발 60m 마을 어귀에는 ‘이곳에서부터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마라’ 는 선조의 경고를 담은 석비가 서 있다. 이 석비의 가르침을 지켜온 주민들은 동일본대재난 당시 선조들이 남긴 교훈의 엄중함을 새삼 절감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896년 대쓰나미 때 주민 60여 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는 단 2명뿐이었는데, 약 40년 후 1933년 대쓰나미 때는 주민 100여 명이 사망하고 오직 4명만이 생존하는 괴멸적 손해를 또다시 입었다. 이후 주민들은 주거지를 고지대로 옮기고 석비를 세웠던 것이다. 동일본대재난 때는 쓰나미가 석비 앞 70m에서 멎었다 한다. 이와는 반대의 사례가 보다 흔했던 것 같다.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에 나미와케(浪分) 신사가 있는데, 이는 과거 쓰나미로 침수된 지역과의 경계선에 1702년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다 쪽으로 집을 짓지 마라’는 교훈은 세월이 흐르면서 잊히고 후대에 전승되지 못했다. 이 신사에서 해안까지 직선거리는 5.5㎞.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시가지와 마을들이 세워졌고 6년 전 쓰나미로 그곳은 초토화됐다. 어떤 형태의 재난이든 반복되고 그래서 역사가 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가 과거 재난으로부터 교훈을 남기지 못하거나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3ㆍ11 동일본 대재난에서 다시금 생각해 본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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