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초순. 발칸 유럽의 북서부 지역에는 120년 만에 최대의 폭우가 쏟아졌다. 사흘 동안 퍼부은 장대비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를 가로지르는 사바강이 범람하는 등 최악의 홍수 사태가 일어났다. 피해는 동유럽의 여러 강이 합류하는 세르비아, 세르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동부 ‘부코바르’, 보스니아 동북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함은 물론, 20여 년 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파묻힌 지뢰와 폭탄들이 유실되면서 피해지역 접근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제 구호단체들은 긴급히 인적 물적 지원에 나섰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정부는 자국 주재 외교단에 지원을 호소했다. 필자가 근무하던 주크로아티아 대사관은 인접 주세르비아 대사관과 함께 본국에 긴급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결정했으나, 크로아티아는 국민소득이 1만 불을 넘는다는 사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중국은 크로아티아 정부에 현금 약 5만 불을, 일본은 10만 불에 해당하는 구호물자를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 대사관은 인력과 예산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 대사관의 공공외교 활동에 늘 밀린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작지만 우리 대사관의 마음이라도 전달하자고 했다. 현지 크로아티아인 행정직원들까지 참여해 1천200불이 모금되었고, 크로아티아 적십자사에 송금했다.
곧 적십자사 총재의 요청으로 적십자사를 방문해 감사장을 받았고, 얼마 후에는 예상치도 않게 크로아티아 외교부 장관으로부터 감사서한을 받기도 했다. 외교부 간부는 한국 대사관만이 직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의연금을 보내온 데 대해 외교장관이 감동한 것 같다고 전해왔다.
이재민들에 대한 높은 관심과 지원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 지지만, 이재민들의 고통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당시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은 동부 국경지대 ‘부코바르’였다. 그곳은 과거 전쟁 당시에도 포화에 쑥대밭이 돼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데, 한국 태권도 보급에 열의를 갖고 있는 인사들이 있어서 우리 대사관이 그 지역 상황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대사관은 매년 개천절에 주재국 수도에서 개최하는 국경일 리셉션을 부코바르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은 예산이지만 그 지역에서 쓰고 재해지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수도에서 300㎞나 떨어진 변경에서 개최된 국경일 리셉션은 주재국내 외교단은 물론 언론 및 정부에 상당한 화제가 되었고, 대단히 성황이었다. 부코바르 시장은 필자가 주재국을 이임할 때 일부러 자그레브에까지 와주었다.
외교에는 국가이익 관철을 위한 치밀한 계산과 냉철한 사고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외교정책을 펴나가는데 해당국가 국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고자 추진하는 공공외교 활동에서는 물질적 지원만이 아니라 그 위에 마음을 얹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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