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폐지운동 유감(有感)

한해의 마감을 목전에 두었던 구랍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이른바 사형폐지국가 기념식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마음이 씁쓸했다. 일부 종교인들과 사형폐지운동 단체들이 함께해 지난 1997년 12월30일 이후 10년째 집행되지 않고 있는 한국의 사형제도가 국제사면위원회의 기준에 의할 때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며 자축의 한 마당을 펼친 것이다. 일찍이 카우프만(Arthur Kauffmann)이 언급했듯, ‘형벌의 인도화의 역사는 원래 시대정신에 반항하면서 희망을 갖고 인내함으로써 미래의 성숙을 기대한 인간의 역사’라고 할 것이니, 사형폐지운동 또한 인류문화의 진보와 성숙에 기인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움직임의 일단이라 이해할 수는 있으리라. 다만 오늘날 사형폐지운동 단체들에 의해 제기되는 사형폐지의 논거들 모두가 범죄의 실상 및 형벌의 현장과는 지나치게 괴리된듯해 사뭇 공허하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접근보다는 종교·인도적인 관념론에 지나치게 경도된듯 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제의 범죄예방효과에 회의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사형의 범죄억지력을 추단할 수 있는 통계적이고 객관적인 국내외 자료를 소개하자면, 미국의 경우 사형집행이 보류됐던 1966년부터 1976년 1월까지의 기간을 포함, 1980년까지 살인범이 인구 10만명당 5.6명에서 10.2명으로 거의 두배로 늘었으나, 연평균 사형집행이 71건으로 늘어난 1995~2000년에는 살인범이 인구 10만명당 5.5명으로 46% 감소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또한 사형이 집행됐던 1988~1997년까지 10년 동안 살인사건 발생건수가 연평균 672건이었으나 사형집행이 보류된 1998~2005년 연평균 살인사건이 1천18건으로 51.4% 증가하고 있음을 자료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확정된 사형의 집행유무에 따라서도 살인범 등 강력범죄의 증감이 확연하게 구분됨을 통계를 통해 관찰할 수 있을진대, 하물며 사형제도 자체가 폐지될 경우 생명보장의 갑옷을 입고 얼마나 많은 흉악범죄가 미소를 띠며 창궐할지는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사형제도 폐지는 일반 국민들의 소박한 법감정을 다스려 가야 할 공형벌(公刑罰) 본연의 임무를 스스로 방기하는 것이다. 미국 등에서 사형집행 시 피해자의 가족을 배석·참관하게 하는 연유도 범죄의 피해자들에 대한 응보욕구의 충족과 함께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위탁한 공형벌에 대한 신뢰감을 가일층 제고시켜 나아가는데 있음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형벌의 현장인 행형시설에서도 사형은 집행의 유무를 논외로 하고 형벌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많은 사형수들이 형 확정 후 손쉽게 종교에 귀의해 열심히 활동하고, 단시간에 선행(善行)을 흉내 내고 연습한다. 감형의 기대 등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중의 발로이건, 또는 지은 죄에 대한 회오의 몸짓이건 간에 이들의 이러한 돌변은 다름 아닌 사형제도 자체에 내재된 형벌의 위하력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사형이라는 형벌의 무게가 극악무도하던 범죄인들까지 왜소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있음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사형폐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사형제도가 교화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절실함을 일깨워 주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종국적으로 사형제도는 가정파괴사범 등 흉악범을 제외하고는 사형을 적용할 수 있는 범죄의 종류를 대폭 감축시키고 개전(改悛)의 정을 참작한 선별적 감형 등 형집행의 융통성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야지, 제도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울러 사형의 대체수단으로 거론되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제도는 교정·교화대책의 무용(無用) 및 인간의 희망을 거세한다는 점에서 더욱 잔혹하고 우리의 행형 현실에도 조화되지 아니함을 차제에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한다. 흉악한 범죄행위에 대해선 반드시 치러야 할 고통스러운 대가가 있음을 예고하고 실행함은 결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선량한 이웃들의 존엄을 담보하는 정의의 회초리로 역할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평생을 가라앉지 않는 아픈 기억의 파편들로 인해 사는 것이 다만 고통일뿐인 피해자들에게 사형폐지운동은 또 다른 학대요 고문으로 다가들 수도 있다. 이미 종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사형수들의 뒤틀린 생활태도에서 형벌의 무게가 훼손되어짐을 느낀다. 교정시설의 담이 아무리 높은들 바람에 묻어오는 바깥세상의 기류마저 차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위대한 정치는 탁월한 지휘다

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던 즈음의 실화다. 어느 정부 산하 기관의 장이 바뀌었는데, 그는 새 정부와 정치적으로 유사한 배경과 이념 등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인품이 넉넉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는 분이었다. 그가 취임한 지 하루 이틀이나 지났을까? 그와 오랫 동안 ‘민주화’ 등을 위해 함께 활동한 한 사람이 그 산하 기관의 모 간부에게 심한 불평을 토했다. 어떻게 기관장으로 하여금 직접 계산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 자신을 포함한 몇몇 인사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법인카드를 내미는 그 기관장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는 것이다. 마땅히 간부나 비서가 기관장을 수행했어야 한다는 투의 말도 이어졌다. 얼핏 듣기에 이 말은 적절한 듯하지만 이를 전해 듣는 직원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관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고는 기관장의 개인적인 품위 유지나 업무 추진을 위한 자리에 식대 따위를 계산해 주는 직원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이미 ‘권위주의’를 벗고 ‘민주화’된 조직이었다.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참을 수 없다면서 언죽번죽 너도나도 한 마디씩 말을 보탰을 그 자리는 참 우울한 개그였다고나 할까. 다음 대통령 당선인은 올챙이 적 생각을 잊은 개구리들의 몽매한 개그에 좌지우지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5년이나 10년 동안, 아니면 그 이전부터 변함없이 떠받들어져 온 가치와 문화가 얼마든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늦가을 필자는 주례를 섰는데, 첫 주례라 걱정이었다. 긴 고민 끝에 아내에게 해주고 싶었으나 못한 것들을 골라 주례사에 담기로 했다. 왜 그리도 할 말이 많아지는지…. 그날 저녁 아이가 그랬다. “그럼, 아빠. 주례 많이 해야겠다.” 순간 세 식구는 크게 웃었지만 그 말의 울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흔히 남들이 못 한 것을 하려 애쓰지만 실은 내가 못 한 것을 찾아 하기가 더 어렵다. 다음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들이 지적한, 자신의 약하거나 부족한 점, 다르거나 틀린 점 등에 특히 귀를 열고, 즉 잘못했거나 미심쩍어 하는 것들을 찾아 채우고 고치고, 또 실천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말이다. 구랍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경기필하모닉 송년 음악회를 감상했다. ‘위대한 교향곡의 명악장’이라는 주제로 전혀 별개인 네 교향곡의 1개 악장씩 연주된 2부가 압권이었다. 베토벤의 제5번 1악장, 차이코프스키의 제4번 2악장, 드보르작의 제8번 3악장, 브람스의 제1번 4악장 등을 하나의 교향곡처럼 이어서 듣게 된 것이다. 지휘자 금난새는 연주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첫 시도라며 그 특유의 재치로 넷을 한데 묶은 뜻을 설명했다. 네 작곡가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브람스는 “베토벤을 존경하는 자신의 곡이 그의 곡과 함께 연주되니 영광이다”, 드보르작은 “자신은 브람스의 친구니까 괜찮다”, 차이코프스키는 “아름다운 2악장이니까 좋다”면서 다들 허락했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전화를 안 받더라는 말로 청중들을 웃기면서 연주는 시작됐다. 한 작품처럼 느껴질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워낙 유명한 곡들이어선지 결코 한 작품일 수 없었다. 조금 실망할 수밖에.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와 여러 번의 커튼콜이 이어질 때 비로소 한 작품이기를 바랐던 마음이 혼자만의 착각이나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다 다른 것들이 한 자리에 어울려 존재한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1-2-3-4악장이라는 교향곡의 기초 질서 속에서 나름대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들에게 한 목소리나 일방적인 가치를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작곡가와 그 음악, 여러 연주자와 그 연주 등을 모두 숭상하며 조화와 통합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위대한 정치는 탁월한 지휘다.

이명박 성공신화의 역설

지난해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대승을 거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해진다. 첫째는 참여정부의 실정과 진보·개혁진영의 무능력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그같은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제 시대정신이 좌파 진보에서 우파 보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가 부정적이라면 두 번째는 긍정적인 요인이다. 결국 한마디로 통합신당이 패배하고 한나라당이 승리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만약 그렇다면 12명 가운데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만한 가장 훌륭한 자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제치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뽑혔기 때문에 당선됐다는 얘기다. 물론 그는 현대건설 성공신화의 주역이며 서울시장 재직시절 이룩한 업적 때문에 한나라당 후보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수많은 흠결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가 낙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위기의 고비들마다 삼성 비자금문제, 태안반도 유류 유출사고 등과 같은 대형 사건들이 터져 그와 관련된 추문들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역시 대통령은 하늘이 만든다는 것을 이번 대선에서도 필자는 실감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이 이명박 당선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높다.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한 그의 입지전적인 성공신화를 대통령이 돼서도 만들어 내기를 온 국민들은 염원한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필자도 그의 업적을 고대하지만, 이명박 성공신화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대선에서 서울지역 투표성향을 보면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가 분명히 드러났다. 잘 사는 강남 주민들은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반면 못사는 강북 주민들일수록 그의 지지율은 낮았다. 그는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의 뒤를 잇는 세 번째 상고 출신 대통령이다. 앞의 두 대통령과 다른 점은 그들처럼 최종 학력이 고졸이 아니라 명문 대학 졸업자라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학력이 향상되는 것을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앞의 두 대통령 지지자들은 상대적으로 부유층이 아니라 빈곤층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 최고위층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성공 이후에도 그런 신화를 만들 수 있는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 또 나올 수 있을까?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의 비유를 빌면, 그는 사다리를 타고 최정상까지 올라간 다음 뒷사람은 올라올 수 없도록 사다리를 걷어차는 방향으로 대한민국을 이끌려는 것은 아닐까. 이전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그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시대는 점점 그런 입지전적인 성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이전에는 교육이 신분상승의 기회였다면, 이제는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이런 구조를 바꾸고자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하다 역효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정책조차도 시장논리에 맡기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우리 사회 누구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싹을 잘라낸다면, 그의 성공은 우리 국민들의 실패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꿈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면 매년 7% 경제성장, 10년 후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이 되는 국민성공 시대를 연다고 해도 국민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당선인은 알길 바란다.

세계일류국가로 가는 길

2007년 12월19일 대한민국 국민은 제17대 대통령으로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매년 7% 경제를 성장시켜 10년 후에는 개인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열고, 세계 7대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제시했다. 이같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 살리기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천명하고, 실용의 철학에 입각한 실천을 통해 산업화 민주화의 토대 위에 선진화를 구현하는, 세계일류국가 건설을 공약했다. 국민들 누구나 이 공약이 약속대로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새 대통령이 정말로 경제 대통령이 돼 기업과 서민 등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의 주름살이 활짝 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언급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21세기 경제 살리기의 관건은 문화적 창의력에 달려 있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이자 경제학자인 기 소르망은 “한국이 겪는 위기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내세울만한 문화적 이미지가 없다는데 있다”고 충고한 바 있다. 사무엘 헌팅턴은 “21세기에는 이념과 경제를 초월해 우월한 문화력이 세계 질서를 좌우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하나의 지구촌으로 진전된 세계경제를 이끄는 힘의 원천은 바로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 같이 지적하는 문화인 것이다. 지식, 정보, 기술, 감성, 이미지 등은 앞으로 전개될 문화력 경쟁시대 경제 살리기의 키워드들이다. 이들의 경쟁력이 곧 나라의 경쟁력임을 인식한 선진국들이 창의력의 발양을 최우선의 국가과제로 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새 정부의 경제 살리기는 문화정책적 접근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화는 인간존중의 정신과 가치가 시민생활 속에 잘 녹아 든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진정한 행복은 넘쳐 나는 물질을 절제하고 풍요로운 정신적 가치를 가꿀 때 가능하다. 미국 문화 예술진흥을 지원하는 연방정부 차원의 예술기금은 미국 민주주의 강화를 첫번째 목표로 삼고 있다. 건전한 인성을 계발하고 민주시민의 정서적 자신감을 고양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튼튼히 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문화·예술활동을 통해 사회·경제적 창의성을 배양하고 미국 민주주의 토양을 풍요롭게 하며, 그것이 또한 미국의 국가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지탱해 준다는 것이다. 세계 일류 국가는 민주시민의 건전한 교양과 문화예술의 향기가 도처에서 묻어 나는 품격을 갖춘 나라이다. 성숙한 민주주의와 문화시민의 정신적 자산이 없는 한, 물질적으로 아무리 부자나라라고 해도 선진국 소리를 듣지 못하며, 세계 일류국가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10년 후 국민소득 4만달러의 세계 7대 강국, 세계 일류 국가의 장밋빛 비전을 진정 실현하려면 물질적 경제성장 못지 않게 정신적 가치와 예술의 수월성을 추구하는 문화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난 10년 동안 좌편향된 이념으로 왜곡된 정책의 우선 순위를 정상화하고, 정부 부처 조직을 혁신하며 IMF환란 이후 공공문화예술 부문에 괴질처럼 확산된 수익성 논리를 건강한 수준에서 대폭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황금알의 거위로 비유된 문화산업이 시장경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나가도록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경제가치 창출의 도구로 징발돼 기초예술로 개명된 순수예술의 위축된 위상을 바로 잡아야 하며 정치논리 과잉으로 멍들은 예술지원분야에도 새로운 활력을 되찾아 줘야 한다. 이진배 의정부예술의전당 관장

인생 이모작 ‘One Company One Job’

모든 스포츠는 패자부활전이 주어질 때 그 박진감을 더한다. 한번의 패배에 천착하지 않고 재기의 땀내음을 펄펄 풍기는 활력이 있어 선수도, 관중도 더불어 즐겁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절망의 바닥에 떨어졌어도 고개 쳐드는 욕망이 있고, 게으르지 않다면 찾을 수 있는 짧고 휘청거리는 사다리라도 구석구석 놓여질 때 더욱 살만하고 또 뜨겁다. 그러나 삶이라는 게임은 스포츠 보다는 가혹하다. 출생이라는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출발선의 불공정을 감내해야 하고, 백태클을 주저하지 않는 과격한 반칙의 범람도 이겨내야 한다. 더욱이 가끔은 심판의 휘슬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거나 힘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1차전 통과가 그리 만만한 일도 아니다. 그래서 일부 심약한 사람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판가름 난 듯한 승패의 예감에 스스로 패배의 지름길로 들어서 버리고, 용감하게 도전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1차전의 현격한 기량 차이에 좌절해 손에 쥐여진 패자부활의 카드와 운명처럼 숨어있기도 할 행운마저 손쉽게 놓치는 우(愚)를 범하곤 한다. 그리하여 패자들은 마음 가득 고인 미련과 아쉬움 탓에 자꾸만 출발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곤 한다. 인생이란 몰입하는 것일지언정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임을 모르고 있는 탓이다. 그렇다, 돌아보지 마라! 인생에는 멀리건이 없다. 언덕으로 튀었든 헤저드에 떨어져 축축하게 머물고 있든 간에 오직 마음 다잡은 세컨드 샷만이 구원이요 부활이다. 세월과 바람을 핑계 삼고 미련을 더할수록 인생의 타수는 자꾸만 뒤땅을 치고 아픔을 배가시킨다. 당면한 시간, 당면한 상황, 당면한 승부에 대한 집중만이 승리를 영글게 한다. 그 놈의 미련 때문에 뒤땅치기로 몸 다쳐 열 받고, 급기야는 금지된 장난으로 승부를 조작하다 퇴출된 무리들이, 삶이라는 멘탈게임의 집중력을 교육받고 몸을 만들며 모여 있는데가 교정시설이다. 이제는 그들도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웨이트 트레이닝에 구슬땀을 흘리고 전에는 몰랐던 게임의 법칙들도 하나 둘씩 체득하며 목하 새로운 출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들을 위한 리그는 이미 없다. 어디에도 준비되고 있지도 않다. 하 오랜 세월의 더께에도 아픈 과거는 가려지지 않고, 같이하던 동반자들의 뇌리에 그들은 다만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반칙자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섬뜩한 낙인(烙印)의 그늘은 개심한 출소자들을 인생의 뒤안길로 다시 배회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반칙의 유혹에 귀를 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나아간다. 재기의 성공과 실패는 그들의 몫으로 하고 삶이라는 게임의 터를 향한 작은 진입로 하나는 출소자들에게도 열어 둬야 하지 않을까. 범죄문제에 대한 우리 공동체의 한가함이 실로 답답하다. 최근 홍콩에선 18개 모든 자치구에서 교정국과 힘을 합쳐 출소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고용기회제공(One Company One Job)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 사회복귀 출소자들과 기업들은 거리에서 서로의 사회복귀와 후원 경험을 홍보·공유함으로써 많은 기업들의 참가를 이끄는 등 출소자의 재사회화를 위해 정부와 사회가 함께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서울지방교정청도 ‘희망등대운동’의 일환으로 이를 벤치마킹, 기업들이 요구하는 맞춤형 직업훈련의 시행, 취업알선 협의회 구성 등 출소자 취업활동들을 적극 펼치고 있다. 선량한 시민으로 훈련되고 준비된 자들로만 엄선·추천하고 있으므로 사회와 기업들이 보다 많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 실패에 길들여져 패자부활전마저 놓쳐버린 이 마음 아린 패배자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인생에도 이모작이 가능함을 희망으로 안겨주고 싶다.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우리에게 문화대통령은 꿈인가

한자말로 ‘문화’를 처음 쓴 이는 당나라의 두광정(杜光庭)이다. 국가 발전을 두고 ‘修文化而服遐荒(문화를 닦고 물질을 풍부하게 하다)’라고 논한 그의 문장에 문화가 나오며, 중국 고전에서 이 문화는 문물교화(文物敎化)를 뜻했다. 또한 문화의 영문 단어인 ‘culture’는 라틴어 cultura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본래 뜻은 동식물의 경작이나 재배였다. 이는 동식물을 따라다니며 잡고 빼앗던, 즉 힘과 폭력이 지배하던 그 옛날 수렵 채취 시대에는 문화가 없었고, 일정한 곳에서 오래 머물며 동식물을 기르고 서로 돕는, 즉 경험과 지혜가 지배하는 농경 정착 시대에 문화가 등장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 판에서는 평범한 다수가 탁월한 소수보다 더 지혜롭다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믿고 있는 웹2.0의 시대정신이 그다지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이번 대선은 문화의 지고한 가치인 도덕과 양심이 ‘집단’으로 뒤죽박죽되어 경험과 지혜가 무용하기 짝이 없는 참으로 비문화적인 정글 판이 아닌가. 더욱이 눈에 버쩍 뜨이는 문화정책 부문 공약마저 없어 우울하다. 최근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76%인 190개가 비전이나 주요 추진 전략으로 문화를 내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행복한 문화예술 도시’(춘천시), ‘긍지 높은 문화 군민’(예천군)과 같은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는 정치와 경제의 앞이나 위, 아니면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적 지위에 문화를 올려놓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바로 ‘문화의 세기’다. 이렇게 자치단체는 ‘문화의 세기’에 걸맞게 문화로써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라를 이끌 대통령 후보들의 문화 정책은 어떠할까. 요즘 대선 관련 보도에서 문화예술인들을 직접 만나 표를 달라는 후보들의 행보는 띄엄띄엄 발견되지만 정작 문화 공약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문화예술지 2007년 겨울호에는 몇몇 대통령 후보들의 문화정책에 관한 서면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는데, 답변지를 작성했을 참모진들의 말의 잔치만 무성할 뿐이다. 대선 진영의 문화 정책은 약속이나 한 듯 다들 빈곤하여 조금 심하게 말하면 ‘문화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적극 지원하겠다’는 매우 단순한 원론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60년대까지의 보릿고개 시절을 넘어설 즈음에야 근대적인 의미의 우리나라 문화 정책은 시작되는데, 72년 8월 14일 문예진흥법 제정, 73년 10월 11일 문예진흥원 개원, 73년 10월 17일 문예중흥 5개년계획 선포, 73년 10월 20일 제1회 문화의 날 행사 등 일련의 흐름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압축적인 근대화로 인한 정신의 소외를 문화로써 치유한다면서 안으로는 지식인과 예술인을 달래고 억압하여 유신 체제를 다지는 데 활용하기도 했던 문화 정책이 한 세대 뒤에는 ‘문화의 세기’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숭상되고 있다. 아직은 깃발뿐이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깃발을 휘날리며 앞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날 정글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극복하고 양극화를 치유하는 첫째는 그 사회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다음 정부는 이를 위해 ‘문화민주주의’ 정책을 강력히 전개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경제적 관점의 마구잡이식 개발을 방지하는 ‘문화영향평가제’, 문화행정의 전문성을 보장하는 ‘문화행정직렬제’의 도입도 요구된다. 그러나 이번 대선 판을 지켜보면서 불행하게도 필자는 다음 정부의 문화정책에 회의를 갖게 된다. 한 국가의 문화정책이란 결국 지순한 도덕과 양심에 따라 국민들이 마음대로 즐거울 수 있도록 잔칫상을 차려 주는 일일진대, 집단지성마저 방향을 잃은 지금의 대선 판은 우리가 오래도록 신봉한 가치들을 전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그름이 제대로 가려질 때 문화는 싹트는 법이다. 우리에게 문화대통령은 아직 꿈인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

전문가들은 이번 대선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근대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승부라고 말한다. 전자의 근대화를 우파가 성취했다면, 후자의 민주화는 좌파의 투쟁으로 쟁취됐다. 근대화주의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근대화 이후 경제성장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 민주화세력은 우파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은 1997년 IMF 사태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이로부터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를 치유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화두가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여론을 보면 민주화세력이 절대적인 열세다. 성장주의자인 이명박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거의 60%에 육박한다. 거의 날마다 이명박 후보와 관련된 의혹들이 제기되지만, 지지율의 큰 변동은 없다. 왜 이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필자는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준표 의원의 진단대로, 이명박 후보가 도덕적으로 완전 무결한 후보가 아니라는 것을 유권자들은 잘 알고 있지만, 그만이 어려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명박 후보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민심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실하게 노력만 해서는 성공신화를 만들 수 없고 편법과 비리를 저질러야 한다는 집단심성이 만연돼 있다. 이에 대해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는 ‘이상한 나라의 노망 든 국민’이라는 실망감을 표출했다. 필자는 우리 국민들이 정말 노망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것들을 보면 정치·경제·문화의 어느 곳 하나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정아 교수의 학력위조사건을 계기로 미의 세계인 문화계가 얼마나 추하고 속물적인 곳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 문화계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여론의 폭발적인 관심은 사회적 관음증을 증폭시켰다. 필자는 그들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한 유언비어를 열심히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을 읽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이 삼성이다. 속속 드러나는 삼성의 영향력을 알면 알수록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혹자는 이렇게도 생각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룩한 것보다 더 많은 성공을 삼성이 성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보다 ‘삼성공화국’이 되는 편이 낫다고. 지금 우리의 딜레마는 성공의 결과를 인정하고 향유하면서도 그 결과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범했던 잘못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륜을 욕하면서 부러워하고, 삼성이 저지른 비리를 처단하기 보다는 삼성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을 더 걱정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에 대한 고해성사를 이제는 해야 한다. IMF 위기가 닥친 어려운 시절, 새해인사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돈이면 다인가? 위로는 대통령 후보와 재벌총수, 아래로는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천민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았던 삶을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 진정 무엇을 위해 단 한번의 삶을 살 것인지를 성찰하지 않고 눈 앞의 성공만을 위해 돌진했던 지난날 우리 삶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내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회갑이 되는 해다. 육십갑자로 회갑이면 새로운 출발점에 이르는 시간이다. 이제 다시 초심으로 되돌아가 대한민국을 건강한 나라로 다시 세우는 일에 모두가 매진해야 한다.

‘위스콘신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30번째로 1848년 미국의 주(州)가 된 위스콘신 주는 주로 독일계와 폴란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 제일의 낙농지역이며 맥주의 생산지이다. 강원도의 10배 정도 되는 땅에 500여만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밀러 맥주가 위스콘신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밀워키에서 생산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주도(州都)인 매디슨에 위치한 위스콘신 주립대가 있다, 본래 위스콘신은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릴만큼 미국 중북부의 황량한 대지로 살기 어려울 정도의 혹독한 추위와 수십㎝씩 쌓이는 눈으로 유명하다. 위스콘신 사람들은 위스콘신이 가장 질 좋은 미국 치즈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크다. 자동차 번호판에 미국 최고의 낙농의 땅이라는 의미의 ‘America’s Dairyland’ 슬로건을 붙이고 다닌다. 그러나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 사람들은 위스콘신 사람들을 ‘치즈 헤드’라고 비아냥 거려 왔다. 그러나 이제 위스콘신은 치즈 냄새 물씬 나는 낙농의 땅만이 아니다. 10여년 전부터 시작된 문화시설 건설붐이 위스콘신을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탈바꿈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100여곳에 이르는 공연장과 전시장 등이 신축되거나 개·보수, 또는 증설되고 확장됐다. 이 결과 밀워키 미술박물관이 세계 예술 지도 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밀워키의 이미지를 문화예술 도시로 쇄신시켰고 주 수도 매디슨의 시가지 한 블록을 주립 문화·예술공간으로 변모시킨 화려한 문화예술센터(Overture Center)는 문화예술 위스콘신의 위상을 끌어 올리는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아름다운 숲 속에 자리한 야외극장, 솔론 스프링스의 루시우스 우즈 아트 센터((Solon Spring’s Lucius Woods Arts Center)라든가 벨로이트 다운타운에 문을 연 미술관(Fine Arts Incubator) 등은 지역사회 발전을 보다 집중적으로 도모한 사례들로 꼽히고 있다. 학교 강당들도 지역사회 문화·예술활동과 연계되도록 했고 수준 높은 예술공간은 도시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명제 아래 농촌 지역과 소도시, 조그만 도시 외곽의 마을 등에까지 훌륭한 문화예술 공간들이 대대적으로 건립됐다. 이같은 예술공간 건립 붐은 위스콘신주 차원으로부터 단위 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일궈 낸 가치, 즉 ‘문화예술은 시민 생활 그 자체’라는 사회적 합의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상당히 짧은 기간에 수많은 문화·예술공간들을 건립하다 보니 공간 운영에 있어서나, 지역사회에 대한 서비스에 있어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그래서 위스콘신예술위원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문화시설 지원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지난 2002년부터 12명 안팎의 전문 인력들을 투입, 지역사회의 문화·예술시설 운영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다. 위스콘신의 이같은 일련의 문화예술 진흥시책은 20세기 초반 위스콘신 주지사 로버트 라폴렛트와 같은 시기의 위스콘신대 총장인 찰스 하이즈가 주창한 ‘위스콘신 아이디어(Wisconsin Idea)’에 근원을 두고 있다. 위스콘신 아이디어는 “정부는 훈련된 전문가의 재능과 식견 있는 학자들의 자문, 그리고 능동적이며 잘 교육된 시민정신을 조화시키고 공유해야 한다. 이같은 문화요소는 경제·사회 발전의 핵심이다”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위스콘신 아이디어가 중점을 뒀던 부문은 대학교육 시스템을 확립하고 주의 구석구석까지 교육과 문화 등의 혜택들을 보급하는 일이었다. 이를 이어 받아 문화시설과 예술공간을 확충, 위스콘신 아이디어의 꽃을 만개시킨 리더십의 중심에 위스콘신대 농대 로버트 가드(Robert Gard)가 있다. 그는 “예술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게 하자. 학교와 사회와 정부로 확산되도록 하고, 우리가 있는 지금 이곳에 예술의 아름다움이 숨쉬게 하고, 삶 속에 예술의 가치를 드높이게 하자”고 말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서 한번쯤 위스콘신 아이디어를 반추해 본다. 무엇이 진정 이 나라를 위한 리더십인가를 생각해 보자.

‘참여’와 ‘생산’의 문화정책

오랫동안 정치와 사회 영역의 담론을 이끌어온 민주주의의 문제가 문화 부문으로 옮겨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대형 시설 확충 위주의 문화정책을 전개한 제5공화국 때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문화가 만나 만들어낸 최초의 단어(숙어)는 ‘문화의 민주화(The Democratization of Culture)’이다. 그러나 이 문화의 민주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바뀌면서 그 지향하는 가치가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고급문화의 보급과 확산을 중심으로 한 기득된 문화 권력의 시각에서 펼쳐진 담론이기 때문이다. 1991년 부산에서 처음 등장한 노래방은 현재 전국적으로 4만여곳에 이른다. 이 노래방은 예로부터 음주와 가무악(歌舞樂) 등을 즐긴 우리 민족의 모든 놀이들 가운데 그 인기 면에서 단연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을 음치로부터 탈출시켰다는 부수적인 성과 또한 적지 않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면 누구나 가수이며, 누구나 예술가다. 취기를 깨우려는 목적을 넘어 노래 몇 곡으로 자신과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아울러 일상의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일반적인 예술이나 축제의 기능과 다를 것이 없다. 한편 1990년대 말부터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디카(디지털 카메라)는 벼르고 별러 찍던, 그러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그때까지의 사진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즉석에서 확인한 다음 지우거나 다시 찍을 수 있고, 또 포토숍으로 조정할 수 있는 디카의 즉흥적 기능은 기록성과 사실성과 지속성에 기초했던 기존의 사진을 새로운 놀이의 하나로 거듭 나게 했다. 더 나아가 디카 사진은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영상(Visual) 의사소통을 위한 기호로서의 의미를 획득했으며, 이에 디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미지나 기호의 단순한 수용자에서 적극적인 생산자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노래방과 디카는 인간이면 누구든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데서부터 출발한 ‘문화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의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엘리트 중심의 문화를 지역적, 또는 계층적 소외자에게 더 많이 누리게 하는 게 문화 민주화의 기본 가치라면, 모든 이들에게 내재된 창의성과 창조적 역량을 인정하고 이를 계발하는 것이 문화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민주화는 예술에의 접근성과 예술 교육, 그리고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문화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실제 즐기는 문화 활동을 우선시하면서 문화의 평등성과 다양성 등을 존중한다. 사용자가 제작한 콘텐츠(User Created Contents)라는 뜻의 UCC를 보라. 개인 프라이버시와 저작권의 침해, 정보와 상징의 조작 등 갖가지 우려 속에서도 UCC는 이 시대 문화현장의 당당한 총아다. 참여와 공유와 개방이라는 웹2.0의 정신이 문화민주주의의 이념과 결합해 탄생된 UCC는 ‘지금’이나 ‘여기’ 우리들이 즐기는 최신식 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UCC의 문화적 지위를 인정한다고 해서 물론 자신의 예술적 신념에만 충실한 전통적인 고급문화 생산자들의 역할과 가치를 폄훼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다만 그들의 창작 행위와 그 작품의 보급·확산을 앞에 두는 문화정책이 수정돼야 함을 지적할 뿐이다. 최근 몇년 새 나눔과 베풂의 이름으로 여러 문화예술 단체들의 ‘찾아가는 문화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이들에 대한 공공부문의 지원 또한 적지 않으나, 이 나눔과 베풂의 문화정책은 문화 권력의 남용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비록 ‘그 밥에 그 나물’이라도 주민들의 참여와 생산 등을 기본 양식(樣式)으로 하는 지역 축제가 ‘찾아가는 문화 활동’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시장에서의 고급문화 보호정책은 마땅히 지속돼야 하겠지만, 이제 문화정책은 ‘나눔과 베풂’ 보다는 ‘참여와 생산’을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장

회복적 정의 - 희망등대 프로젝트

1960년 이후 미국에선 ‘법과 질서’를 기치로 집권에 성공한 닉슨 행정부가 막대한 자금과 인력 등을 투입, 행형을 포위하고 요리했다. 그때까지도 가장 구태의연하고 낙후성의 표상인 양 치부돼 오던 사법행정분야, 이 중에서도 특히 교정행정에 사회학자, 심리학자, 형사학자 등이 대량 진입했고 형사정책적 방법론으로 제시돼 왔던 모든 이론과 처방 등은 원도 한도 없이 현장 행형에 다이내믹하게 접목됐다. 그러나 그 엄청난 예산과 과학적 방법의 투여를 아랑곳하지 않고 범죄자들은 연일 격증했고 큰 기대를 품고 관여했던 학자들은 뾰족한 변명의 자료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한 완벽한 실패에 두손을 들고 학문적 만용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은 ‘인간교정’이란 거창한 구호를 슬그머니 접고 구금으로 인해 인간성이 더욱 악화되는 것만이라도 차단시켜 보자는 겸허한 입장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으나, 그나마도 넘쳐나는 수용인원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격리·구금기능 그 자체를 수행하기도 벅찬 실정에 이르고 말았다. 이처럼 행형은 힘들고 두렵다. 범죄자들의 우리에서 구두선(口頭禪)적 구호나 섣부른 인간애, 또는 과도한 온정주의 등이 자리를 잡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늑대로 가득한 세계에서 양으로 보이면 곤란을 겪게 된다’는 말이 있듯 말이다. 그러함에도 행형은 형벌의 본질인 응보와 또한 이와 상충되는 범죄자들의 재사회화를 동시에 추구해 나가야 하는 당위론적 업보를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이 둘을 함께 아울러 ‘범죄의 회귀’를 줄여가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많은 교정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이로 인해 최근 형벌체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있는 게 바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회복적 정의란 형사사법체계에서 소외돼 왔던 범죄 피해자를 교정단계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이들 간의 소통과 중재를 통해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범죄가 피해자와 사회에 어떠한 아픔을 끼쳤는지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형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행위로 야기된 해악을 이해·반성하도록 해 그 피해의 회복과 정의의 실현에 솔선하도록 유도함은 물론, 그 이행도를 행형성적에 반영함으로써 수형자사회를 정화시키고 미래범죄를 예방해 나가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종래 수형자들이 반성과 회오라는 강요되고 막연한 숙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깨우치고 피해자와의 갈등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이미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는 교정단계에서의 ‘회복적 정의’ 접목으로 재범률을 대폭 감축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바, 국내 행형에도 이를 도입·시행하고자 서울지방교정청은 지난 6월14일 경기일보사와 함께 ‘희망등대 프로젝트 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공청회도 성황리에 개최한 바 있다. 현재 기획·홍보·재정·화해중재·교육문화·자립지원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의 편지쓰기 운동’과 ‘희망나눔 문화여행’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무쪼록 교정단계에 ‘회복적 정의’가 구현됨으로써 보다 많은 수형자들이 진실의 시간을 접하고 그로 하여 교정시설이 징역살이의 지혜만을 탐하는 ‘선량한 수형자’를 뛰어 넘어 ‘선량한 사회인’을 배출할 수 있는 시설로 정착돼 나가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디지털시대에서 맞이하는 독서의 계절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단풍의 고운 빛깔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고운 단풍 잔치는 우리에게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을 위한 의례다. 부처님 말씀처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온 것은 반드시 가는 것이 순리다. 이런 순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가을은 인간에게 사색의 계절이다. 인간은 책을 통해 사색하고 사색을 통해 책을 만드는 존재다. 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책을 읽고 쓰는 존재다. 책이란 지식과 정보의 보고(寶庫)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이전 시대와 다른 장소에 살았고 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매체가 책이고, 이 책 덕택에 인간은 문명의 발달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 지식기반 사회로 이행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인 책은 더 이상 지식과 정보의 보고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핫(Hot) 미디어’와 ‘쿨(Cool) 미디어’로 나눴다. 자료와 정보를 미디어 자체 내에 충족하고 있는 높은 정세도를 가진 인쇄물이 ‘핫 미디어’라면, 적은 양의 정보만을 제공하는 낮은 정세도를 가진 TV는 ‘쿨 미디어’다. 책을 읽기 위해선 그 개념적 의미를 능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이에 반해 영상매체에 의한 메시지 전달은 직접적인 감각을 매개로 수동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시간과 노력 등이 절약된다. 이같은 경제성의 차이로부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이나 신문보다는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한다. 디지털 시대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의 이행이 일어남으로써 독서의 계절로서 가을의 이미지는 퇴색하고, 낡은 시대의 풍속도로 여겨진다. 반도체 집적도가 1년6개월에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보다 더 빠르게 1년에 2배씩 증가하는 ‘황의 법칙’이 어김없이 현실화되는 시대에서 인간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뒤따라가기에 바쁘다. 하지만 책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있게 된 우리는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가? 영상매체 기호들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서 단편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또 그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놓치고 마는 한계를 갖지만, 책은 반복적이면서도 반성적으로 해석됨으로써 깊은 차원의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정보의 바다를 헤매야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소비하는 능력보다는 양질의 정보를 찾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생산적 소비, 곧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프로슈밍(Prosuming)’ 할 수 있는 소양이다. 이런 소양은 ‘쿨 미디어’인 영상매체가 아니라 ‘핫 미디어’인 책을 통해 배양될 수 있다. 성경 말씀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같은 정말 중요한 문제는 변한 것이 없다. 지난달 31일부터 2일까지 출판도시문화재단 주최로 제2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 2007이 ‘아시아 출판의 재발견-문학·역사 콘텐츠와 글로벌 출판’을 주제로 열렸다. 세계화시대 아시아 출판시장은 지식의 디지털화와 전지구화라는 이중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아시아적 가치’를 토대로 아시아출판공동체를 구축하지 않으면 아시아 출판시장의 미래는 없다는 위기의식이 이같은 행사를 열게 만들었다. 경기도에 있는 출판도시 파주가 아시아출판공동체의 메카가 돼 가을을 다시 독서의 계절로 부활시키길 기대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대통령 선거와 문화정책

대통령선거가 성큼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신문과 방송 등은 새로운 대통령 후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기에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정책과 관련해선 극히 개론적이거나 다분히 구호성인 언급에 그치고 있다. 십수년 전 호주의 호크 수상을 뽑을 때, 세율 1%의 증액이 경제·사회와 국민생활에 미칠 영향을 마치 양파 껍질 벗기듯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고 “바로 이런 게 선거쟁점이고 정책대결 선거이구나”라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정책선거의 중요성이 거론되는 것을 보았고, “이번 만큼”은 하고 기대했으나 매번 그 기대는 하릴 없는 물거품으로 끝났음을 기억하고 있다. 정략성 폭로에 폭로가 뒤를 잇고, 끝내는 검은 폭로의 흙탕물 속으로 모두 가라앉아 버리거나 민주·통일과 같은 거대담론에 험산 준령 넘듯 애매모호하게 끌려가다 분간하지 못할 안개 속으로 헤맨 일들이 많지 않았나 싶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 하며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 생명과 재산, 우리의 일상적 삶과 그 삶의 질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무책임하게 뽑아 왔다. 이제 그런 대통령선거를 또 다시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이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나 숨 가쁘기 때문이다. 분단이라는 구시대 질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세계질서 변화에 대처해 나가야 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 참으로 위중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달 탐사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고 일본이 새로운 경제도약의 길로 접어 들고 있다. 인도가 신흥 경제대국의 꿈을 현실화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연합과 미국 등은 선점한 선진국 기득권을 지속화하는데 국력을 집중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질서 징조들이 한결 분명해지고 있다. 세계의 석학들이 이같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오래 전부터 예고해 왔고 이들 석학들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이끌어 갈 역학관계가 문화의 힘에 의해 좌우될 것임을 설파해 왔다. 21세기 국가 경쟁력은 각국의 창의성에 달려 있으며 창의성은 문화의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게 공통적인 정설이다. 이미 지난 2000년을 전후한 새천년의 문턱에서 ‘창의 미국’이나 ‘창의 영국’ 등이 국가 핵심정책으로 천명됐고 다른 선진국들도 속속 이같은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04년 두툼한 분량의 ‘창의 한국’을 공표한 바 있다. 지난 2004년 발표된 ‘창의 한국’이 다른 나라들과 다른 건 ‘창의 미국’이나 ‘창의 영국’ 등이 구체적이고 실용주의적 정책 추진과제를 천명하고 있는 것과 달리 분배적 평등주의의 이념적 편향성이 강한 문화복지 비전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의한국’의 비전과 방향 등은 참여정부의 문화정책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실제 정책에 있어 ‘예술의 수월성’을 창의성의 원천으로 보기 보다는 지역적 균형과, 소외, 나눔 등 사회적 ‘문화참여’를 정책수행의 우선 과제로 추구해 오고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국민의 정부의 문화정책은 IMF사태 이후 경제논리가 풍미하는 가운데 문화산업에 정책의 중점이 주어졌다. 그리하여 지난 10년 동안 문화의 품격을 끌어 올리고 경제적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력의 원천인 ‘순수예술의 수월성’은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물론 문화산업과 문화복지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될 정책과제이다. 그러나 문화산업과 문화복지는 ‘고품격 문화’와 ‘예술의 수월성’을 기본으로 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일류 선진국 진입의 필요충분조건인 ‘고품격 문화’와 ‘예술의 수월성’ 등은 ‘창의한국’의 올바른 지향점이며 인간존중의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을 성숙시켜 주는 자양분이기도 하다.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문화정체성 등을 굳건히 지켜내면서 국가경쟁력을 극대화할 ‘문화 대통령’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번에는 정신적 가치와 창의성의 고양으로 국민적 통합과 국가 경쟁력 등을 일궈 낼 문화정책과제가 안보·경제와 함께 선거의 주요 쟁점이 되길 기대한다.

문학관-‘책 밖’의 문학을 위하여

전시라는 행위는 박물관과 함께 19세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발견이며, 이 전시 행위의 확장된 형태인 만국박람회는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크게 성공한다. 만국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산물을 전시해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으나, 문학만큼은 아니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결산 보고서는 “문학은 만국박람회 프로그램에 포함되지도, 포함될 수도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2년 빅토르 위고 박물관이 설립되는 등 문학과 전시예술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됐으며,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프로그램에 ‘문학 박물관(Musee de la litterature)’이라는 이름의 문학 전시회가 드디어 포함된다. 이 ‘문학 박물관’은 1937년 만국박람회가 거둔 가장 놀라운 성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예술을 이렇게 대중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논쟁은 만만찮았다. 결국 이 논쟁은 독자가 아닌 대중의 관점에서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모색됐을뿐 아니라 그 대중들이 작가들의 내밀한 창작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성과를 남겼다. 그 이후 오랜 동안 작가의 삶과 창작의 자취들을 전시해 온 고전적 형식의 프랑스 문학관들은 최근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이나 순수 문학 활동보다는 문화 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아라공문학관장은 문학관을 ‘문학과 독서, 책, 그리고 문화와 예술에의 접촉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신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들이 이뤄지는, 대중들에게 열린 모든 공간’이라고 정의했다.(윤학로·김점석의 논문) 우리나라 문학관을 살펴보기에 앞서 문학정책들을 잠깐 돌아보자. 우리나라 문학정책들은 창작과 독서 행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둬 왔으며, 그마저도 공급자적 관점을 벗지 못했다. 그러께부터 광범위하게 펼치고 있는 우수 문학작품 보급사업도 ‘얼마나 잘 읽었는가’보다는 ‘얼마나 많이 뿌렸는가’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다. 이제 문학정책들은 창작 발표 지원, 독서 기회 확대 등과 같은 전통적 방식 위주에서 탈피해야 한다. 시각예술이나 공연예술의 경우 마땅히 그러할 수밖에 없겠지만 박물관·미술관, 공연시설 등을 통해 대중들과 만난다. 여가 생활 기회의 확대, 디지털 환경의 변화 등은 가만히 앉아 하는 독서 중심의 문학 향수를 쉽지 않게 만들었다. 1992년 부산에서 문을 연 추리문학관부터 지난 9일 개관한 목포문학관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문학관 수는 통틀어 40곳이 안 된다. 일본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1997년부터 중앙·지방정부의 문학관 건립지원정책이 펼쳐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문화부문 시설인프라 조성정책의 중심이 60~70년대 지방문화원, 80~90년대 문예회관, 90년대 이후 문화의 집 등이었다면, 이제는 문학관이다. 생산(창작)이든 소비(독서)든 ‘닫힌 곳’에서 ‘나 홀로’ 한다는 특성을 지닌 문학에 하드웨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문학도 열린 바깥으로 나가 대중들에게 보여지면서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상이 됐다. 그 열린 바깥에는 문학관이 있다. 조선왕조 500년 이상의 도읍지와 현재의 수도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는 그 예술적 업적을 길이 보존할만한 숱한 문인들이 나고 스러진 지역이다. 그러나 문학관은 운영 중인 곳이 2곳(조병화문학관 만해기념관), 계획 중인 곳이 2~3곳 정도뿐이다. 박물관 86곳, 미술관 23곳, 문예회관 22곳, 문화의 집 18곳 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프랑스처럼 문학관은 이제 ‘문학을 넘어 문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제2세대 문학관’(프랑스 쥘베른문학관장)의 이념은 우리 문학의 한 지평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문학을 즐기는 방법에 책 읽기 이외의 다른 수단이 있음을 인정하고, ‘책 밖’으로 나가자. 문학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다.

땀의 갤러리, 교정작품 전시회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현재도 미국의 유명한 저술가이자 연설가이며 칼럼니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닉슨 대통령의 법률 고문으로 일하며 따뜻한 햇볕과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연방교도소 수형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벼락처럼 모진 충격과 그 깜깜함이 오히려 그의 인생을 구원했다. 복역생활 중 그는 운명처럼 종교를 조우했고 그가 맞이한 신(神)에 힘 입어 세속의 프리즘에 현혹돼 너덜거렸던 마음의 때를 처절한 반성과 참회의 눈물로 씻었다. 그는 다른 수형자들을 위해 궂은 일을 자처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생활로만 일관했다. 출소 후에도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어 수형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수형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종교 확산을 위해 민간단체인 국제교도소협회(Prison Fellowship International)도 창립했고, PFI 주관으로 지난 2002년부터 회원국들과 함께 수형자 예술작품 전시회를 마련, 해마다 나라를 달리하며 개최하고 있는 등 비범한 삶의 전형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인생의 순항을 기습하듯 차단하고 선 벽을 향해 소리치고 울부짖는 대신 감옥의 그 벽보다 더욱 견고하게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욕망의 때가 낀 돌들을 하나씩 드러낼 줄 알았던 그 심성(心性)과 지혜를 돌이킬 때 그의 구원은 참으로 의미롭고 찬란하다. 수형자들의 심성 순화와 기능개발욕구 유인 등을 통해 그들의 갱생을 장려하는 수형자의 예술 및 작업작품 전시회는 나라들마다 그 필요성을 인정받아 각국 정부 주관으로도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1962년 덕수궁 전시실에서 교정작품 전시회가 처음 열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관심의 원근(遠近)에 개의하지 않고 면면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초창기에는 국무총리까지 개관식 및 시상식 등에 참여하는 범사회적인 이벤트이었던 점에 비해 요즈음은 교정 관계자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듯한 행색(行色)의 초라함과 섭섭함 등에 조금은 힘이 빠지지만 말이다. 올해도 제36회 교정작품 전시회가 오는 22~28일 경기도 문화의전당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그동안의 섭섭함을 털어 내기 위해 규모를 크게 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준비했다. 수형자들의 그림이나 서예 등 문예작품들과 정성들여 만든 가구 등 교도작업제품 1천126점이 선보인다. 작품 하나하나 모두에 햇볕이 그리운 수형자들의 언어와 이야기 등이 진솔하게 새겨져 있으며 버려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땀과 절박한 몸짓들이 가득 투사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부르 튼 그들의 손으로 오늘을 위해 송이송이 소중히 가꿔온 대규모 국화전시회도 같은 장소에 준비됐으며, 교정행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행형의 과거와 오늘 등을 비교하고 그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도록 교정역사관과 희망등대관 등도 특별히 개설됐다. 교정시설이 다만 수형자들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교정시설이 재활용 불가능의 폐기물처럼 버려지고 내쳐진 것들의 집산지인 양 존재하고서는 우리 공동체 미래는 암울하다. 고독에 몸부림치는 수형자들의 비명 같은 소리에도 한번쯤 귀를 열어주고 그 신산(辛酸)한 삶들의 가슴 한쪽에 아직 죽지 않고 남아있는 깃털같은 희망 하나라도 살랑거린다면 이끌어 우리에게 데려와야 할 것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을 이 땀 젖은 갤러리에서 만났으면 한다. 예로부터 죄수들이 만든 물건 하나 집안에 소장하면 액을 땜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오지 않는가. 요즘 기업들의 메세나 역할이 모 여성 큐레이터의 문제로 위축되고 있다는데, 교정작품 전시회야말로 기업들이 당당하게 기여할 수 있는 메세나의 영역이라고 할 것이니 많은 참여가 있었으면 좋겠다. 기업의 액땜을 위해서도. 누가 아랴! 이 땀 젖은 갤러리에서 후일 오래도록 기억될 위대한 예술가 한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이 태 희 서울지방교정청장

인생의 의미와 인문학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 신정아와 변양균 사건,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우리는 날마다 사회적 드라마를 보면서 산다. 새 드라마를 보면서 지난 드라마는 잊는다. 한달반 동안 방영된 ‘아프가니스탄 인질 구하기’ 드라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뜨거웠으며, 네티즌 사이의 공방은 날마다 뉴스거리였다. 뉴스가 뉴스를 낳던 드라마가 인질 구출로 종영되고 국력의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교회에게 보상권을 청구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어떤 결론이 났는지 필자는 그 이후 뉴스를 듣지 못했다. 이제 그 문제를 모두가 잊은 것처럼 보인다. 잊고 싶어 잊은 게 아니라 새로운, 더 재미있는 드라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정아라는 신데렐라와 그녀를 도와준 키다리 아저씨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주연의 국내 연속극은 우리의 말초신경까지 자극하는, 그야말로 캐면 캘수록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갑남을녀나 장삼이사가 모이면 온통 그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얘깃거리가 된다. 그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가방을 메고 무슨 장신구를 달았는지까지 뉴스가 되고, 그 물품은 명품으로 알려진다.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고 사람들이 견디며 사는 이유를 프랑스의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는 “현대사회가 ‘스펙터클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삶의 현실은 사라지고 TV나 신문, 인터넷 등에 등장하는 기사가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에 자신의 삶을 투사하면서 사는 게 우리네 일상생활이다. 지식인 중의 지식인인 대학 총장, 대한민국 돈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을 가진 고위관리, 아름답고 격조 있는 작품과 함께 사는 예술인,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다니는 큰 절의 큰스님도 별 수 없이 다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드라마를 사람들은 보고 즐기며 욕하면서 부러워한다. 백남준의 말대로 예술은 고등 사기다. 그렇다고 삶까지도 그래야 하는가? 누가 가짜와 진짜 예술가를 구분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랑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가? 돈에 눈이 멀고 사랑에 귀가 먹고 오직 부와 명예를 위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사기 치면서 사는 게 우리 인생인가? 어쩌다 우리가 이런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됐는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인생이 아니라 지식이다. 지식과 삶의 분리가 문제의 근원이다. 옛날 사람들은 내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사서삼경을 읽었다. 공부의 목적이 내 심성을 닦는 것이었다.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은 그 결과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좋은 직업과 예쁜 아내, 또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잘 먹고 즐기기 위해 공부한다. 학문의 이같은 도구화로부터 발생한 게 인문학 위기다. 인문학이란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학문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과학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답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우리는 잃어버린 인간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 이같은 취지로 교육인적자원부는 올해부터 매년 한글날을 즈음해 인문주간을 선포하고 학술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올해는 서울대에서 8~9 양일간 ‘융합의 인문학, 창조의 인문학’을 주제로 학술제가 열린다. 인문학을 구하는 일조차도 스펙터클을 만들어 ‘쇼’를 해야 하는 게 서글프지만 더 늦기 전에 인문학을 구해야 한다. 인문학을 구하는 일이란 바로 인간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문화예술교육인가?

문화관광부는 지난 2004년 11월 ‘창의한국’ 비전 구현을 위해 문화예술교육과를 신설했다. 지난 2005년에는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이 제정됐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은 문화예술교육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국민들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국가의 문화역량 강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은 문화예술교육의 기본원칙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이 모든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유와 창조력 함양을 지향하며 모든 국민들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역별로 지역문화예술교육지원협의회를 둬 문화예술교육지원에 대한 지역별 시행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해 놓고 있다.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의 양성과 자질 향상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필요한 시책을 강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문화관광부장관에게는 지역 문화예술 교육지원의 효율적인 실시 및 이에 필요한 참여 주체간의 협의·조정, 그밖의 협력 증진을 위해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또는 기초자치단체장과의 협의를 거쳐 지역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일컬어지는 21세기의 정보화·세계화 물결 속에 지식기반 경제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키워드로 대두됨에 따라 지식기반 경제를 떠받칠 문화 창조력이나 통상 회자되는 창의력 등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화예술은 창의력의 원천이고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예술적 수월성에 바탕을 둔 문화역량 강화는 세계화 무한경쟁시대를 남보다 앞서 헤쳐 나갈 수 있는 국가 경쟁력 그 자체이므로, 이처럼 중요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지원의 제도화는 시기적절하며 그 내용 또한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그러나 법 제정 본래의 취지를 살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다면 그 법은 휴지 조각에 불과할 뿐이므로 앞으로 이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고 활성화해 나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올바른 현실 인식과 실효성 있는 접근이다. 올바른 현실 인식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성숙한 민주시민사회의 건설이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성숙한 민주시민사회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다. 인간 존중의 가치를 확장하는 일환에서 문화적 삶의 질을 고양하고 삶의 현장 속에서 개개인의 문화 예술적 교양을 높여 나가는 문화예술교육이야 말로 일반 국민들이 문화예술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는 단초가 된다. 다시 말해 문화예술의 기쁨과 즐거움을 개개인의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창의성은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받고, 자유로운 사고와 자기 표현이 가능할 때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문화예술교육지원의 대상인 학교, 단체, 예술인 및 일반국민 등을 문화예술교육의 단순한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 단체, 예술인, 일반국민 등의 자발성과 자율성 등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운영의 묘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에 있어 정부 차원의 지원은 어디까지나 민간 부문의 자발적 호응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하고, 민간부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최근 경기문화재단이 지역 특성화에 초점을 맞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등 지역 주민들이 지역 문화예술의 주인이 되게 하려는 지역 문화예술단체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음은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법에서 규정하고 있듯,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질 높은 문화예술 교육을 위해 교육과정과 교육프로그램 개발·연구와 교육활동을 위한 예산과 시설·장비 지원 등에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해야 할 것이다. /이 진 배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

선시제도(善時制度)는?

교통·통신의 급속한 발전으로 국가간 교류가 확산되고 사람과 문화 등의 빈번한 이동이 생활화된 이른바 지구촌시대를 맞이하면서 범죄 또한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국내외를 넘나들며 횡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외국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현지 교정시설에서 복역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 외국인들에 대한 국내 교정시설 수용인원도 점증, 어느덧 1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자국이 아닌 외국의 교정시설에 구금된 수형자들에게는 자유 박탈이라는 형벌 본래 굴레와 더불어 언어, 문화, 생활양식의 차이, 가족 및 지인의 접견 곤란 등 이중적인 고통들이 수반될 수밖에 없고 이들을 수용·처우하는 각국의 교정당국 또한 효율적인 관리대책을 수립·시행해 나가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이에 따라 외국인 수형자들에 대한 수용관리상 난제(難題)를 해결하고 동시에 처우에 적합한 환경을 배려해 사회 복귀를 지원해줄 수 있는 방안이 형사정책적 관점에서 모색되면서 ‘국제수형자 이송제도’가 비롯됐다. 우리나라도 국제 수형자 이송제도 시행을 위해 지난 2003년 12월31일 ‘국제수형자 이송법’(법률 제 7033호)을 제정한 바 있으며 유럽평의회의 ‘수형자의 이송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Transfer of Sentenced Persons)에 가입해 이 협약이 지난 2005년 11월1일부터 발효함으로써 외국과의 수형자 국제이송을 시행하게 됐다. 그런데 몇 달 전 미국에서 국내로 이송돼 복역 중인 한국인 수형자가 미국과는 다른 국내의 행형제도로 복역기간이 부가(附加)돼 그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와 세간의 관심을 끈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지난 1993년 미국에서 마약유포 혐의로 19년 7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아 현지 교정시설에서 복역하면서 모범적인 행장(行狀)을 인정받았고 모범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형기를 단축해주는 ‘선시제도’ 혜택을 받아 이송 전 거의 2년에 이르는 형기를 미리 삭감받아 놓았었다. 그러나 선시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 법령 탓에 오랜 기간의 수형생활 동안 땀 흘려 취득한 ‘미래의 자유’가 졸지에 물거품이 돼버린 상황이니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선시제도란 법관에 의해 선고된 형기를 수형자가 교도소 내 선행·작업성적·교정 프로그램 참여 정도, 또는 특별한 공적 등에 따라 일정한 점수를 취득해 자신의 형기를 스스로 단축시켜 나갈 수 있음을 법령으로 정한 제도다. 이 경우 단축되는 일수는 수형자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획득한 법적 권리로 인정받아 ‘형기 자기단축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제도는 지난 1817년 미국 뉴욕주에서 뉴 게이트(Newgate) 교도소의 과밀한 수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시보상법(Good Time Law)을 제정한 데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후 수정·보완을 거쳐 현재 선진국에서 수형자에 대한 유용한 사회복귀 프로그램으로 확산돼 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미군정 시절인 지난 1948년 3월31일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72호로 ‘우량수형자 석방령’이 공포되면서 즉시 선시제도가 시행돼 왔으나 아쉽게도 지난 1953년 신형법 제정시 그 부칙에 의해 폐지돼 이제는 행형사의 구석진 행간에서 빛 바랜 흔적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해방 이후 일제 강점기의 조선감옥령을 의용하고 조선총독부의 행형조직을 그대로 인수해 운영할 수 밖에 없었던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교육행형의 이념에 바탕한 선진적인 교정제도를 행형 현장에 접목·시행할 줄 알았던 그 대견함이란 행형사적 관점에서는 물론 오늘의 교정행정에도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 어쨌든 국가간 수형자 이송이 글로벌시대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해 향후 더욱 빈번해 질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할 터인 바, 이송된 수형자에게 ‘형의 가중적 부담’을 안게 하는 요인들은 가급적 배제될 수 있도록 형벌 집행을 위한 국가간의 법적·행형제도적 차이점들을 보다 면밀히 비교·검토해 조화롭고 슬기로운 방안의 도출을 위해 고민해 볼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형벌이란 반칙행위에 대한 당연한 응보인 동시에 내일의 굿타임(Good Time)을 약속하는 훈육과 갱생의 과정임을 인식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 태 희 서울지방교정청장

지역문화, 지원은 넘쳐도 진정한 정책은 없다

광주(光州), 부산, 경주, 전주 등 4개 도시는 각각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영상문화도시, 역사문화도시, 전통문화도시로 불리면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이 나라 다른 많은 문화도시들의 대표주자임을 자임하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이들 4개 도시를 ‘지역별 문화 성장 거점 도시’로 집중 육성하기 위해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벌어졌던 광주시의회와 경주시의회와의 다툼은 우리 지역문화 정책의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지난해 9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뒤질세라 세계역사문화도시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이에 대해 광주시의회가 국가 재정 부담에 따른 광주 관련 사업이 축소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 결의안을 채택했고, 경주시의회 의원들이 광주시의회를 항의 방문하는 등 촌극이 벌어졌다. 광주시의회의 사과로 일단 봉합은 되었으나, 이 사건은 우리 지역문화 정책을 근본부터 다시 돌아볼 것을 웅변하고 있다. 국가와 지자체가 지역문화 정책을 전개할 수 있었던 최초의 근거 법률은 1965년 제정된 지방문화사업조성법인데 이 법은 1994년 지방문화원진흥법으로 대체된다. 그 뒤 문화예술진흥법(72년), 경제사회발전5개년수정계획(83년), 지방문화중흥5개년계획(84년) 등에서 지역문화 정책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의지가 확인되고 있음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시설 확충을 위한 예산 지원 말고는 실질적인 지역문화 정책 대안은 없었다. 1995년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지역문화 정책은 비로소 관심을 끌게 되지만, 2001년 치른 ‘지역문화의 해’는 서울 중심의 시혜적 관점에서 지역문화 정책이 펼쳐져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이에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는 2004년을 지역문화 진흥의 원년으로 삼게 된다. 지난해 6월 국회에 발의되어 지금껏 논의 중인 지역문화진흥법과 함께 국가 단위에서 전개되는 지역문화 정책의 선봉장은 아무래도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프로젝트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행정수도론(충청권), 물류수도론(부산권), 경제수도론(수도권)과 함께 한 두름으로 엮이어 정치적으로 제기된 문화수도론에서 출발하였다. 대규모 지역 건설 사업인 양 추진되는 모양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된 만큼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역거점 문화도시가 왜 호남에만 둘, 영남에만 둘이어야 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많은 도시가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요즈음, 정책의 원칙과 철학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본법이라도 어서 만들어야 할 판이 아닌가. 그럼, 지방자치단체와 개개 문화예술 단체에 의해 펼쳐지는 지역문화 정책이나 운동은 어떤 모임일까. 지난해까지 우리나라 지역축제는 모두 1천176건인데 그 중 76%인 889건이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시되던 1995년 이후에 새로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최근 몇 년 사이 서울이나 대도시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많은 문화예술 단체들이 복권기금 등의 혜택으로 거의 의무적으로 너도나도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바라지 않는 문화예술 행사까지 자꾸 맞이하게 되는 지역에서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고, 이제 그만 오라는 지경에 이른 지역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지역문화 정책은 국가 차원에서는 문화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지자체 차원에서는 ‘그 밥에 그 나물’인 축제 중심으로 펼쳐졌다. 또 프로그램 차원에서는 수용자인 지역민의 관점이 무시된 채 공급자인 문화예술 단체, 특히 서울과 대도시의 관점으로 마치 폭포수처럼 내리쏟아졌을 뿐이다. 재원이나 인력의 지역 이전과 프로그램의 지역 순회가 지역문화 정책의 전부일 수 없다. 지역문화 정책은 처음부터 지역의 관점에서 설계되고, 지역의 관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지역문화, 지원은 넘쳐도 진정한 정책은 없다. 박 상 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장

시론/노인권익운동의 필요성과 과제

최근 노인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하여 노인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으며, 고령사회에 대비한 노인복지대책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노인인구의 급증에 비하여 노인복지대책이 부진한 것은 국가가 근본적으로 노인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투자가 부족한 면도 있지만, 당사자인 노인들이 노인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의사표현과 정책결정에서의 적극적인 태도가 부족한 것에도 원인이 있다. 고령사회에 있어서 노인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정책결정권자의 책임 있는 결단과 정부의 노인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 및 노인들이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노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다는 미국은퇴자협회를 비롯하여 1천여개의 노인단체들이 노인의 권익보호와 복지증진을 위해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은퇴자협회는 노인권익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단체로서 노인회원의 욕구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회원을 대상으로 건강보험, 자동차보험, 주택보험, 재산관리서비스, 약배달서비스, 법률서비스, 여행자 할인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 단체는 50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쉽게 회원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엄청난 예산과 인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기업·단체들과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있고, 단체의 목적 추구를 위해 자원봉사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퇴자협회는 항상 초당파 입장을 견지하고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정부의 정책수립과 시행과정에 그들의 의견을 각종 통신매체(신문, 방송, 편지, 엽서, 전화, 전신, 인터넷 등)를 통하여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인복지정책의 개발을 위한 전문적인 연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노인단체들도 고령사회의 심각한 노인문제에 대비하여 미국은퇴자협회처럼 많은 회원과 예산을 확보하고 다양하고 적극적인 회원 권익보호와 복지증진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노인권익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노인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전문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기존의 단체들이나 새로운 단체들이 상호간의 연계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하며,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정부의 정책과 행정에 그들의 전문적인 견해를 피력해야 한다. 또 노인 스스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전문 권익단체 활동의 참여, 유권자로서의 권리행사, 노인문제 및 노인복지정책에 대한 학습과 이해 등과 같은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다른 시민단체나 복지단체들도 노인권익운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노인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사회의 압력집단이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높여 나가야 하며, 노인단체의 대표나 활동가들의 수준 향상을 위해 전문적인 학습이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여기에 노인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노인의 권익옹호 및 복지증진과 관련된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함께 고령사회로의 진전이 가속화되는 속도에 비하여 정부의 노인복지대책이 뒤져가는 현실에서 노인단체들이 노인권익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통하여 정부로 하여금 노인복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전문적이면서도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적절한 대책을 제시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이 근 홍 협성대 인문사회과학대학장

경기시론/국어에도 관심 가져야

최근 들어 ‘외국어 마을’이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경기도만 해도 2004년 대한민국 1호로 개원한 ‘아산 영어마을’ 이 예상외의 호응과 성과를 얻은 것으로 나왔다. 이 외 국어 마을은 최근까지 학생은 물론 공무원, 일반인 등 3만 여명이 교육을 이수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소득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영어 사교육비 지출로 인한 가계부담 감소, 공교육 보완 외에도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 양성이라는 세 마리의 토끼를 잡는 성과까지 얻고 있다. 또한 경기도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영어 마을의 후속으로 중국어 마을 조성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세계화를 겨냥한 것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런 외국어 바람을 타고 자칫 국어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거나 경시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국어가 외국어에 치이고 입시 교육에 밀리어 점차 관심 밖으로 외면 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국어는 우리의 모국어이다. 조상들이 사용했고 현재는 우리가 쓰고 있을 뿐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줄 겨레의 유산인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 또한 역사의 숨결이 스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어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갖은 어려움을 감내했는가 하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기도 했다. 일본에 나라를 잃고 말과 글을 빼앗겼을 때는 목숨까지 내 놓으며 이를 사수하려고 했다. 이런 국어가 최근 들어 이리 몰리고 저리 내둘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심히 서글프기 그지없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위 ‘인터넷 언어’가 횡행하다 보니 우리의 국어가 요상한 형태로 변질되는 일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문장은 커녕 말도 되지 않는 언어가 오히려 ‘멋’으로 둔갑하고 급기야는 국어를 망가뜨리는 결과까지 낳고 있다. 국어의 훼손은 이것만이 아니다. 거리의 간판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다. 오죽하면 한 탈북자가 한국의 거리 구경을 나왔다가 ‘여기가 정말로 한국 맞느냐?’고 했겠는가. 거리의 간판만 보자면 외국이라고 해도 나무랄 수 없는 풍경이 돼버렸다. 음식점이나 가게에서 파는 물건의 이름도 한글 표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같은 한글이라도 비비꼬고 비틀어서 요상한 어휘로 만들어 붙였다. 순수 한글의 이름을 가진 과자나 음료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국어는 오히려 안에서보다도 밖에서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국력이 신장하면서 우리의 말이 세계에 알려지는 게 그런 경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응원 구호였던 ‘대^한민국!’이 세계인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게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대^한민국’은 이미 한국의 이미지로 굳어버린 ‘아리랑’과 함께 우리 한국을 알리는 고성능 트럼펫이다.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나라 국민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들이 자국의 말에 긍지를 가지는 것을 보는 일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영어 마을도 좋고 중국어 마을도 좋다. 어디 스페인어 마을이 선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문제는 국어 교육과 육성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말과 글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서 외국어에만 죽자살자 매달리는 것은 국적 없는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해서 하는 말인데, 국어 마을도 하나쯤 세우는 일은 어떨까 싶다. /윤 수 천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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