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노무현의 동북아 균형자론

지난 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의 모토인 ‘평화 번영의 동북아시대’의 건설을 위해 우리 나라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전략적 비전을 제시, 자임한 이후 그 이상과 현실을 두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마디로 “강대국들끼리의 힘겨루기를 수수방관하다가는 옛날처럼 고스란히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앞으로는 절대로 무자비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평화조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정치권과 학계 등에서는 ‘한국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에서부터 ‘국가안보를 담보로 한 과대망상적 모험’이라는 비판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찬성론자는 ‘한미동맹에 바탕하여 등거리 외교가 가능하다’고 보고, 반대론자는 ‘4강국간의 갈등을 조정할 힘이 없을 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의 균형이론을 두고 이러한 비판이론의 입장은 왜곡이며 심지어 자기비하이기하다. ‘균형자’를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세력균형과 균형외교라는 관점에서 특히 후자의 경우 ① 지역협력의 촉진자(facilitator) ② 갈등의 중재자(moderator) ③ 공동번영을 위한 창안자(initiator) 등이 가능하다. 동북의 균형자는 세력균형과 균형외교의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동북아 질서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중국의 중화사상, 미국의 패권경쟁의 정책방향이 충돌하면서 갈등만 증폭되는 양상으로 동북아 구도와 질서를 패권주의로 몰아가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에서 MH의 발언이 나온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자주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존의 안보패러다임에 있어 엄청난 변화를 뜻한다. 지난 50여년간의 안보정책은 사실상 한미동맹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구태를 탈피해 보겠다는 것이다. 유럽은 동맹체제와 다자질서가 공존하면서 화해와 통합의 길로 가고 있는데, 아시아는 과거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갈등만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런 갈등이 심화되면 우리 의사와는 관계없이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동북아질서가 갈등의 질서가 되면 남북통일은 불가능해지고 분단은 고착화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가담하지 않으면서 국익을 최대로 확대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동북아 균형자’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노대통령의 후보시절부터 이처럼 위태로운 지정학적 현황에 그의 오랜 지론이 화학결합을 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균형자론은 “궁극적으로 주변국과의 신뢰를 통해 유럽의 CSCE(유럽안보협력회의)의 다자간 안보체계처럼 동북아지역의 다자간 안보체계구축”을 모색하는 정책이다. 19세기 영국의 국방력에 의지한 균형자가 아니라 경제력과 문화수준, 그리고 역사상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은 평화애호국이라는 명분등 신개념의 연성국력(soft power)의 균형자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국제질서가 힘의 강약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보편적인 가치, 규범 등 무형의 관념의 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천도교(天道敎)의 3세 교주 의암(손병희)은 동경대전(東經大全)에서 삼전론(三戰論-道戰, 財戰, 言戰)을 주창하였다. 일제 강점기 3.1독립선언문에서 “일찌기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였는 데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전략으로 삼전론의 언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너무 현실을 모른다며 말잔치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보편성만 강조하다 보면 실용외교의 틀을 벗어나 명분론의 위험성에 빠질 위험도 상존한다. 그러나 균형외교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한반도의 균형자적 역할에 더 발전된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노 태 구 경기대 교수

경기시론/무엇을 위한 행정구역 개편 논의인가

갑자기 행정구역 개편의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여당도 야당도 행정구역 개편의 방향에 대해서는 기본 입장이 같다고 한다. 참여 정부에서 행정 구역 개편의 시도는 제주도에서 시도된 바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를 만들어 지역개발을 위한 획기적인 분권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합의가 되었으나 기초자치단체를 폐지하려는 시도가 관철되지 않아 진도를 나가지 못하였다. 시장과 시의원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계 일부에서는 행정구역을 작게 하는 것이 민주행정 이념에 적합하기 때문에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찮았다. 사실 지금 우리의 도-시, 군 -읍, 면, 동으로 이어지는 행정계층은 조선시대에서 형성된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 당시는 자치보다는 통치에 적합한 구조이었다. 큰 산이 있으면 도의 경계, 강이 있으면 시군의 경계 등과 같이 자연지리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다. 다양한 지역 개발사업의 추진을 위한 적정한 구역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계층과 구역의 설정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우리의 행정구역은 자치를 하기에는 너무 넓고 효율적인 지역개발 정책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좁은 이중성이 있다. 그러나 주민의 일상생활이 진행되고 있는 행정계층을 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대안 하나하나에 문제점과 장점이 상호 대칭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첫째, 경기도를 없애고 31개 시군에서 몇 개씩을 묶어서 예컨대 10개 정도의 광역도시를 만드는 단층제가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지방세 체계를 포함하여 기능의 조정문제가 매우 어렵고 지역간 재정력 격차가 확대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광역단위에서 정책을 조정하고 기획하는 기능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직접 통제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권력이 가시화될 우려도 있다. 둘째, 경기도 권역별로 몇 개의 시군을 통합한 광역자치단체를 구성하고 현 시군은 유지하는 방안도 있다. 예컨대 몇 개의 시군을 관할하는 경기 동도, 서도, 남도, 북도를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광역자치단체가 수행하는 기획과 재정보정의 기능은 약화될 것이다. 셋째, 광역자치단체의 숫자를 늘리는 것에 비례하여 기초자치단체를 세분화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경기남도를 구성하면서 안성시를 두 개나 세 개 정도로 세분화하는 것이다. 분권과 자치의 정신에 가장 적합한 대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의 행정자치 구역이 서구에 비해 너무 넓다는 것을 반영한 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럴 경우 늘어나는 공무원과 행정조직을 감당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는 애로점이 있다. 행정구역은 행정업무의 효율성을 담보하는 장치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정서적 소속감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의 지명은 그 명칭에서부터 지역적 정체성과 주민의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원칙을 지키는 노력과 원칙에 문제가 있어 이를 보완하는 노력은 구분되어야 한다. 원칙을 설정하고 그것을 운영함에 있어 문제가 있으면 이를 보완 할 수 있으나, 원칙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원칙 자체를 뒤흔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당들이 이러한 행정계층의 개혁을 정치적 숫자의 계산으로 접근할 것을 우려한다. 지금처럼 소선거구제로 되어 있는 경우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 국가의 대표가 아니라 지역의 대표로 활동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중·대선거구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다만 이러한 선거구제 개편을 행정구역 개편의 연장에서 논의하지 말자는 것이다. 매일 시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정치적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원 희 한경대 교수

경기시론/청소년의 달, 한 가지 결심

최근 청소년들과 관련된 몇 가지 사건 소식은 청소년의 달 5월을 앞두고 건전한 청소년성장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첫째 사건은 편의점 습격사건으로 명명된 일이다. 이 사건은 영화의 가상적 내용이 청소년의 실제 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번 일에 가담한 학생들은 사회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거나 도덕적 판단을 하기보다는 친구들과 흥미위주의 영웅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 처리방향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그 행동의 기저에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쉽게 물질을 얻으려는 의식이 작용하였고, 집단의 힘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둘째 사건 역시 모일간지에서 공연장 습격사건으로 명명하여 보도한 일이다. 공연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한 학교 숙제의 일환으로 공연장에 참석한 학생들이 남을 의식하지 않는 대화로 공연을 망치게 한 일이다. 이 일은 몇 년 전부터 회자되던 일화, 즉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아이들이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주변의 지적에 대해 자기 아이 기를 죽인다고 항변 받던 일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당시 어린 학생이 자라 이제 공연을 관람하러 갈 정도의 청소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자기 아이만 생각하던 어른들의 미숙한 판단으로 공공장소에서의 기본예절이 있는지 조차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청소년을 만들어낸 것이다. 타인을 존경하지 않으면 결코 자기 자신도 존경 받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중요하면 타인도 중요하다는 역지사지의 사고가 요구된다. 셋째 사건은 매일 술에 취해 자신을 괴롭히는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인 한 여중생과 관련된 기사이다. 실정법에서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현실적이고 정신적인 피해자인 이 여학생의 양면적 입장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구명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기사는 아무리 환경이 어렵더라도 가정의 화목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보여준다. 청소년기의 중요성과 청소년 문제의 현상과 처방들은 이미 수 없이 널려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언급도 진부한 표현이 될 정도이다. 실제로 집단 괴롭힘으로 대표되는 사건들이 너무 빈번하게 보도된 바 있어, 이제 청소년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시큰둥한 무관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이런 사건들을 굳이 인용한 것은 청소년의 건전한 성장을 위한 노력은 어느 한 당사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관련된 당사자가 각자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제대로 수행을 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청소년에 대한 본보기 생활인의 모습을, 가정에서는 기본적인 질서와 도덕심의 엄격한 실천을, 학교에서는 올바른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생활과 자세를, 그리고 사회에서는 아직도 힘들고 소외된 계층에 대해 관심과 제도적 지원을 마련하는 등의 역할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는 자기 자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물질로 해결하려는 자세와 자기 자녀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호하려는 견강부회 논리를 버려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번 청소년 달에는 모두가 아주 작지만 실천이 가능한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실천하는 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놀이동산을 가거나, 자녀에게 선물을 주기 보다는 복지시설을 방문해 보거나, 힘들지만 사람들이 힘차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둘러봄으로써 함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체험 학습의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청소년들의 창의성과 모방의식이 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청소년기의 창의성과 모방의식은 그 한계가 없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창의성과 모방의식이 작용한 것이 청소년 문제라면, 그 작용 방향을 바꾸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역할인 것이다. /고 순 철 협성대 교수

경기시론/박물관과 정치

요즘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모든게 정치판 일색으로 문화는 영 뒷전이다. 그렇다면 정치가 모름지기 백성을 편안케 하고 앞을 내다 보고 백년대계를 세워야 할텐데, 백년은 커녕 과거 그랬듯이 집권기간 연장만을 노리고 있으니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엉뚱한 고구려사 왜곡이나 일본의 독도점유 야욕이 노골화되고 있는 이때, 우리가 정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심각하게 되묻고 싶다. 올 시월이면 용산에 건립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이 드디어 다시 문을 연다. 현 위치로의 부지결정 문제나 정권교체기마다 정치적 이유로 이전해야 했던 일 등등 숱한 문제를 안고 왔지만, 이제야 겨우 바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립박물관은 우리나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보따리인 국립박물관이 정치논리에 휩쓸려 몇 번이나 이삿짐을 싸고 풀고 했는지 모른다. 박물관이 역사를 떠나 정치논리에 휩쓸리고 정치마당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정치는 정치요,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미테랑대통령은 루브르박물관 리모델링 설계를 중국계-미국건축가 아이언 페이에게 맡기도록 배려한 바 있다. 결과물은 멋있는 새 계획, 글라스-피라미드로 나타났고, 자존심 강한 파리지앵들도 이제 그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정치행사로 박물관을 옮기거나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멋있는 건축계획을 만드는 데 대통령이 나서서 책임지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이다. 우리의 경우를 돌아보면 낯이 뜨겁다. 1972년 경복궁안에 국립박물관 건물을 신축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86년 그걸 버리고, 지금은 헐어 없어진 중앙청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토록 하였다. 1997년 중앙청을 헐고 임시용으로 현재의 국립박물관건물을 경복궁 궁역내에 다시 신축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2005년 용산으로 국립박물관을 이전 재개관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30년내에 무려 네 번씩이나 건립-철거-재건립에 부산을 떨었다. 이러한 일련의 결정은 그때마다 새로 부임하는 대통령의 취임과 맞춘 것처럼 보여졌고, 독립기념관이나 전쟁기념관등의 건립도 그런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박물관의 건립을 우리 역사의 창달이나 보존을 염두에 두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벤트로 다루어 왔던 것이다. 후진국 빼고는 세계 어느 나라의 문화정책도 이 정도로 심하게 정치놀음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2005년 오늘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이전문제가 또다시 논의되고 있다. 어지러운 전철을 또다시 밟고 있는 중이다. 1984년 덕수궁에 있던 미술관을 과천 산속에 지어 놓고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요새처럼 만들어 놓았다가, 1998년 덕수궁에 분관을 만들고, 다시 불편하다고 현 기무사자리에 새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짓겠다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체육이 정치판에서 춤을 추던 때가 있었다. ‘88올림픽’ ‘2004월드컵’등은 그러한 체육정치의 결과물이다. 이를 통하여 위정자는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는 했지만, 선진국들중에서 그러한 정치놀음을 하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박물관이 그러한 카타르시스의 소재가 되는 나라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세우기도 어렵지만, 한 번 만들어지면 없애기는 더욱 어렵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애꿎은 정치놀음에 박물관, 미술관이 춤을 추고 그 결과 쓸데없이 예산만 낭비되는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 종 선 경기도박물관장

경기시론/네루처럼 국난극복을

독도문제로 온 나라가 뒤끓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또 다시 국론분열로 국운이 기울어 구한말의 국망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되찾아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데 전심전력을 다해가야 할 것이다. 사실은 최소한 국민의 정부 때 DJ가 대통령자격으로 북쪽으로 갔을 때 그 당시 남·북 정상들의 만남을 통해서 민족이 하나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이미 만들어 놓았어야 했다. 기존의 정전(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체결하여 전쟁을 한반도에서 영원히 종식한다는 의미에서 남북의 군사를 각각 지금의 백만대군에서 30만정도로 줄이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간의 남·북의 상황이 지금처럼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차제에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적 상황이 다시 구한말의 민족사적 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으니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남·북의 양정권은 한민족의 이름으로 무조건 손을 잡자고 선언을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있어 보수 기득권세력들은 참여정부를 친북 용공세력이라고 하면서 인신공격을 할 것이다. 그러나 DJ가 남북을 왕래하면서 그의 지도력으로 민족사의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평화통일의 발판의 기회를 놓친 것이 바로 이러한 반공·매판세력들의 방해(음해)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여기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배워 MH는 이러한 개인적인 안위에 연연하지 말고 민족의 통일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민족사적 과업을 수행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통일을 부르짖기만 하면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용공·좌경세력으로 매도해 온 것이 사실이다. 미·소냉전 체제하에서 심지어 민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른 그 후과이기는 하겠지만 어떻든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MH가 솔선수범하여 좌·우세력을 아우르면서 한국민족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하여 남·북의 동포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민족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진 데에는 만에 하나 남쪽이 공산화통일이라도 되는 날을 우려하여 친일 매판세력들이 결사코 통일운동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원리와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가지고 남한 정부가 통일을 주도해가는 의미에서 생존에 대한 우려는 기우임을 내외에 천명해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해방을 맞아 6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을 숙청하기에는 이제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북처럼 해방 직후 과거사청산을 했더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해방이 된지 벌써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서 친일파의 제2세 3세대가 대부분 사회의 각 방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과거에 외세 의존적인 인사들까지도 미래지향적으로 모두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일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 후손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역사왜곡의 산물인 것을 주지시켜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민족사관을 수립해가기 위해서도 친일행각을 한 집안의 후손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크게 뉘우치고 반성하여야 한다. 그런 연후에라야 우리 모두는 단군의 후손(天孫民族)으로 한민족공동체 건설의 이름으로 상호간에 용서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금의 국난극복을 위해 우리는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의 통합에 성공하여 인도민족주의로 인도를 영국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고 전 인도 민중을 통일시킨 쟈하와랄 네루처럼 MH의 민족통일을 위한 큰 정치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해본다. /노 태 구 경기대 교수

경기시론/지방의원 해외연수 논란

지방의원의 해외여행이 연수인지 관광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지방의회가 나름대로 순기능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소모적인 논쟁으로 자신의 역할을 시민사회에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소득 2만불 시대로 나아가려는 경제적 성숙도에 비해 아직 공공의 영역에서 민주시민사회의 성숙도는 매우 늦다는 자괴감마저 드는 대목이다. 외국의 선진행정과 정책 그리고 선진 문화를 배워 의정 활동에 활용한다는 명분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여행이 이러한 본질적인 의미를 달성하고 있느냐이다. 의원의 입장에서는 해외에 가는 것만으로도 교육의 기회가 된다는 주장을 하고 한다. 문제는 장소와 방법 그리고 사후관리가 쟁점이 될 것이다. 지금 시민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가장 큰 쟁점은 모든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다녀 온 이후의 출장보고서 조차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원의 해외연수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첫째, 공직자의 해외 연수는 여행사를 통해 가는 것부터 시정되어야 한다. 여행사가 제공하는 프로그램 자체가 관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단체 관광객의 수준이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여 방문하는 수준의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방문하여야 한다. 둘째, 방문국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여야 한다. 최소한 자매 결연을 맺은 지역을 방문한다면 지역간의 이해를 증진한다는 명분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의원의 경우 1년에 일회로 한정하며, 예산 책정에서 광역의원의 경우 1인당 180만원, 기초의원의 경우 1인당 130만원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공익을 위해 필요한 출장이라면 소요 경비 전액이 지원되어야 한다. 자매결연의 지역이나 정책 연수를 위해 필요한 지역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이런 경우 예산에 반영되어야 한다. 공무원이 정책연수를 갈 때 의원의 시각에서도 볼 수 있도록 같이 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넷째, 이러한 예산의 비현실적인 상한선이 오히려 편법을 야기시키고 있다. 한 자치단체에서는 의원의 해외 연수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 시청 공무원에게 관행적으로 얼마간 돈을 거두어 주다가 공무원 노조의 문제 제기에 의해 중단된 적이 있었다. 의원의 입장에서는 격려금 이었겠지만,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부담금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인당 130만원은 정부가 부담하고 초과분은 의원이 개인적으로 부담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것 역시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의원 상조회에서 돈을 모아 개별적인 여행을 하는 것이면 몰라도 의원 신분의 연장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서 의원 개인이 부담을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연수 목적을 공익에 합당한 목적으로 수정하고 지원 수준을 현실화해야 한다. 다섯째, 이러다 보니 국외여행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구성하도록 한 국외여행심의위원회가 형식적으로 운영된다. 7인의 위원이 의회 친화적 인사로 구성되고,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고 결과보고서를 접수하지 않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의원연수에 대해 지방의회와 시민사회 간에 의미를 공유할 때가 되었다. 그 출발은 모든 과정을 공식화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주민의 대표인 의회와 시민사회간에 불신이 조장되는 정치 후진성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의원의 의식 전환과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민주사회의 성숙은 사소해 보이는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원 희 한경대 교수<행정학>

경기시론/독도문제, 기록하는 습관이 핵심

일본과의 마찰과 갈등이 다시 일어났다. 특히 이번 독도문제는 영토와 관련된 것이어서 과거사를 부정하는 교과서 문제보다 더욱 심각하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영토를 빼앗긴다는 것은 다시 식민지배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대개 한·일간 갈등문제는 한 정치인이나 단체의 주장에서 시작되는 일본의 문제제기와 우리 국민과 정부의 대응, 그리고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상투적인 수순이었다. 문제제기와 대응주체가 구분된 일본의 역할분담 시나리오는 우리나라의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고단의 수이다. 대응을 하지 않으려니 인정을 하는 셈이 되고, 대응을 하자니 국가가 개인을 상대하는 우습고 애매한 상황을 만들면서, 일본의 개인적 발언은 사적 사실로 근거를 남기는 방식이 일본의 속셈인 것이다. 이번 독도 문제에서도 일본 정부는 “현(懸)의 일을 중앙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표명을 통해 문제를 확산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응이 강해지자, 총리와 외무장관 등이 나서서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언급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은근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은 우리나라와의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서도 적용된다. 몇년전, 20여 개의 소주제를 중심으로 분과회의를 구성하여 전국 세미나가 조직되었던 일본의 한 학술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각 분과회의별로 관련주제들이 지난 1년 동안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변했는가에 대한 통계나 언론에 보도된 큰 사건정보에 대한 분석보고를 공유한 후, 각자 준비한 학술발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동일 주제나 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여 축적하는 방식을 장기간 해왔다면, 그 분야에 축적된 정보내용의 양과 질의 전문성은 무시 못할 잠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아마도 일본이 독도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로 함께 가자고 주장하는 것에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정부는 일본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이른 바 ‘조용한 외교’의 입장을 취하여왔다. 일본이 의도하는 상황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굳이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전략을 취해 왔지만, 이제 조용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하다. 일본이 거의 매년 독도에 대해 시비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근거를 계속 만들어 내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활용하려는 속셈 이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실효적으로 사람이 거주한다 하더라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표시나 기록이 없는데도, 지금처럼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만큼 우리 선조들이 각종 지도나 서적에 기록을 남겨둔 것은 후손들에게 남겨준 보배인 셈이다. 새로운 대일 독트린 선언과 대통령의 담화, 민간인 독도방문 허용 등 이번 독도문제에 우리 정부의 대응은 일단 외면상으로는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명분과 실리가 확실하도록 이번 일을 기점으로 이제는 일본이 제기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대응을 하며 적극적으로 근거를 남겨두고 확보하여야 한다. 정부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각자 기록을 찾고, 분석하여, 조직화하여 활용하는 일을 사소한 일에서부터 습관화하여야 한다. 정보는 축적되는 것이고, 축적된 정보를 짜 맞추면 훌륭한 줄거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기록을 주었듯이, 우리도 후손들에게 기록을 남겨주어야 한다. 독도문제의 해결책을 일본인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하나의 희극이다. /고 순 철 협성대 교수

경기시론/미술품 투자와 투기

최근 외신보도에 빌 게이츠가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하고 자식들에게는 1000만달러씩만 주겠다는 내용이 실려 화제가 되었다. 한술 더 떠 주식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그의 전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런 미담들이야말로 자본주의를 활짝 피워낸 미국사회의 진정한 저력이다. 개인이 노력해서 엄청난 부를 이루어 냈더라도, 열매는 다시 사회로 되돌리고자 하는 청교도적 양심의 발로이다. 그래서 미국사회에서 부자는 최고로 존경받는 대상이 되어 왔다.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존경받는 부자가 거의 없다. 미국의 몇십배가 넘는 유구한 우리 역사에 비교하면 너무나 불행한 일이다. 비단 존경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본받을 마음마저 생기지 않는다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 어둡기만 하다. 우리나라 부자들은 왜 미국처럼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할까. 사촌이 땅을 사기만 해도 배가 아파진다는 우리의 비뚤어진 심사때문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멀리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사립박물관의 효시인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은 엄청난 재산을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에 쾌척하였다. 그의 수집비사를 보면 우리 미술품을 놓고 일본인과 경합을 벌이기 여러 차례였고, 한 번에 지금의 아파트 여러채 값으로 귀한 문화재를 계속 사들이곤 하였다.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 소재)에는 그렇게 해서 수집된 국보 보물이 수두룩하다. 간송 생존시에 그렇게 사들인 문화재를 되팔았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오늘의 삼성가를 있게 한 이병철회장이나 여러 수집가들도 규모의 대소는 있을지 모르나, 나름대로 소신과 명분을 갖고 문화재를 수집하고 이를 지키는 데 열성을 바쳤다. 이들의 공통점은 만약 이를 되팔았다면 엄청난 시세차익을 거두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수집에만 전념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골동상과 박물관, 혹은 상업화랑과 미술관의 차이는 수집한 문화재나 미술품을 되팔아 이익을 냈느냐 아니냐에 있다. 투자후 이익회수냐 아니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를 향한 ‘일편단심-투자’만으로 일관한 간송이나 호암 등의 에피소드와는 달리, 일부 몰지각한 졸부들이나 80년대 복부인들 중에는 문화재나 미술품을 투기의 수단으로 삼아 이익을 본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들은 애호가가 아니라 투기꾼이었다. 물론 이런 기류에 편승해서 불로소득을 올린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나, 속칭 막차를 타거나 가짜에 재산을 헌납한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문화재나 미술품은 조건부 투자의 대상이 아니다. 더더욱 투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부자가 없다는 사실은 간송이나 호암처럼 조건없이 자기의 재산을 던져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문화나 복지의 혜택’을 늘리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제적 이익이나 업적을 오로지 개인을 위해서만 누리고자 할 때, 이들을 존경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직계가족에게 몰래 물려주거나 이해집단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노림수나, 엄청난 차익만을 노리는 투기성 재산운용을 덮을 수는 없다. 그런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빈축을 사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니 존경이 생길 리가 없다. 전국토가 부동산투기의 마당이 되어가고 있고, 전국민이 재테크에 몰두하고 있는 이때에 미술품만이라도 그런 광풍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우리문화의 긍지를 지키고 우리미술의 앞날을 밝히기 위해서는 간송같은 아름다운 투자가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이 종 선 경기도박물관장

경기시론/‘한’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하여

멕시코 갱들이 미국에서 유명하지만 그들이 같은 멕시칸들인 자기 동족을 향해 살인강도를 저질렀다는 소리를 별로 듣지 못한다. 물론 흑인, 일본, 중국의 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직 한인 갱들은 일 나가고 없는 동족의 빈 집만 골라 털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 자괴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반공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동족을 치도록 가르쳤으니 한인이 한인을 노리며 사는 습관에 일찍이 젖어온 우리가 해외에 나간들 그 버릇 개 주겠는가.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남과 북은 서로 너 망하고 나 망하는 논리를 버려야 한다. 공멸의 논리는 서양철학자가 물려준 모순율과 배중률(排中律) 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논리 때문에 남북분단이라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래서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논리의 발견이 시급하다. 우리는 바로 이 분단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퍼지논리라고 생각한다. 퍼지논리(fuzzy theory)적 시각에서 볼 때에 가장 바람직한 통일방안은 ‘한연방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선 ‘한’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한’에 담긴 의미를 논리적으로 천착함으로써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한국철학을 정초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일(一)과 다(多)는 서로 상용적인 것으로 최근 서양에서는 양자역학, 카오스이론과 홀론과학을 통해 부분, 즉 전체(partwhole)라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동양은 그 전반적인 철학의 기저에 있어서 부분, 즉 전체를 전제하고 있다. 원효도 양변을 버리고 양변의 가운데마저 버리라고 했다. 율곡은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이(理)와 유물론적이고 물질적인 기(氣)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하였다. 우주질서의 연방적 질서를 두고 하는 말로 한연방의 뜻을 담고 있다. 동학의 인재천(人乃天)원리도 일리야 프로고진(Illya Progogine)의 산일(散逸)구조(dissipative tructure)와 같은 것이다. 혼동으로부터의 질서인 것이다. 이상의 사상은 그 민족사적 배경이 한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사상은 다음의 5가지의 사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① 하나(一, 한마음) ② 여럿(多, 한아름) ③ 가운데(中, 한밤) ④ 같음(同, 한가지) ⑤ 얼마(或, 한 십분, 비결정성). 신의 이름인 ‘하느님’ 역시 어원이 ‘한’에서 유래한다. 이는 곧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의미한다. 한은 초분별적 통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남북의 가치가 분별됨이 있으나 조화되어짐을 의미한다. 남북쌍방의 가치나 체제가 다 사는 통일이다. 한의 구조는 양자택일의 either/or나 변증법적 both /and가 아니라 우리의 민족성에도 알맞은 이중 부정인 neither/nor의 논리이다. 이중 부정에 의한 비결정적 그리고 퍼지적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한연방제의 최종의 의미이다. 우리 민족의 속성이 전체와 부분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민족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민족성에 따라서 통일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북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반통일세력인 것이다. 오도된 정치철학이 우리의 퍼지적 통일방식, 그리고 한연방제(Han federal country)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김상일교수의 ‘한’연방제식 통일은 상호간에 민족성원 전체가 척이 없이 신명만 나는 무척 좋은 세상을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 태 구 경기대 교수

경기시론/농촌정책 개발의 딜레마

참여정부의 정권 브랜드로 삼고 있는 지역균형 발전이 처음 대두되었을 때, 경기도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당장 경기도 내에도 낙후 지역이 있는데 수도권이라는 이름 하에 경기도 전 지역의 발목이 잡히는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경기도에 있는 농촌지역에 대한 투자가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친환경 유기농 사업이나 농촌 체험 마을 등의 도농교류를 통해 충분히 경쟁력 있는 지역개발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막상 농촌 개발을 위해 투자를 하려고 하면 다양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예컨대 농촌 지역에 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음악회를 열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회를 열면서 수건이나 기념품을 주면 다음에는 아예 기념품을 받기 위해 온다. 공연의 질을 높이려는 예술가와 일단 정부 지원 사업으로 하는 사업이기에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기획사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누군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초기 자본을 투자한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형평이라는 이름 하에 단체별로 조금씩 보조금을 나누어 주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사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5백만원 짜리 10개의 사업이 나열되지만 정말 수준 높은 5천만원 짜리 사업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관 단체의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유사한 이벤트가 나열된다. 지역 청소년 사업을 여러 단체에게 나누어주다 보면, 유사한 청소년 댄스 경연대회만 여러 번 하게 된다. 한 여학생이 각 단체가 주관하는 대회를 돌아다니면서 일등을 독식했다는 이야기도 지역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농림부가 지역 당 70억원씩 지원하겠다는 농촌마을 종합계획의 경우도 경기도에 양평, 이천, 안성, 연천 등이 선정되었으나 아직 지역에서 토착된 계획을 선정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자칫 도시 흉내 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지역의 잠재력을 키우는 장기적인 관점보다는 누구네 앞마당에 집중 투자되지 않을까 경계한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차라리 해당 지역 주민에게 현금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자조 담긴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지역의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사업들이 너무 단기적으로 결정된다. 행정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업은 한번 잘못 설계되면 사후에 유지 관리하거나 복원하는데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루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돈은 주되 간섭하지 말고, 지역의 학습이 이루어질 때 까지 자금 집행의 여유를 두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지도자를 육성하고 주민과 정부 그리고 전문가가 모여서 함께 토론하고 학습하는 모임이 더 중요하다. 성남시가 안성시나 광주시 지역 주민들과 연계된 사업을 하는 등 지역을 넘어서는 사고의 발상이 필요하기도 하다. 종전에 천수답(天水沓)이 있었다. 하늘이 주는 비에만 의존하는 영농이었다. 지역 개발이 자칫 정부답(政府沓)이 될 우려가 있다. 정부에 대한 의존만 강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자생적인 노력이 유발되지 않는 지원은 결코 성공할 수 없지만, 정부의 초기 투자 없이 무엇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딜레마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종전과 다른 시각에서 지원의 조건과 정책의 설계를 구상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농촌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구축하는 것이 도로를 건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시기이다. /이 원 희 한경대 교수

경기시론/대학입시제도와 대학 구조조정

오늘로 전국 4년제 대학의 신입생 선발이 마무리된다.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편입학, 수시 모집, 정시모집, 추가모집까지 많게는 일년 동안 6회의 입시가 진행되었고,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대학에 지원하는 일이 있었다. 현행 대학입시제도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험생의 수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선발권보다 수험생의 선택권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형시기가 다양화되고,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언제든지 합격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지원자나 합격자 수보다는 등록 포기자들을 관리하는 일이 과외의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다. 둘째로 특기 적성자를 선발하고자 도입된 수시 입학제도에 객관적 기준이 결여된 여러 유형의 전형방식이 도입되면서, 수시모집 입학정원이 전국 4년제 대학 입학정원의 50%를 넘어설 정도로 대학 지원자를 선점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셋째, 정원 외로 모집할 수 있는 농어촌 거주 학생이나 실업계 학생 등에 대한 배려가 강조되다 보니, 아무리 정원 외 선발이라 하지만, 대학입학이란 자체로만 보면 수험생간에 상대적 박탈감도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대학입시제도의 문제점은 사교육비 경감이란 사회적 문제로 인해 표준화된 수능시험 결과보다는 고교 내신 성적 반영비율을 더 많이 권장하는 교육당국의 지침아닌 지침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입학제도의 이해당사자인 대학이나 수험생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비록 시대 조류에 따라 대학보다는 전공간 경쟁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사실상 대학의 서열이 고착화되어 있는 현실로 인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각종 유형의 부정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고, 내신조작 등으로 공교육 제도와 관련 종사자에 대해 사시적(斜視的) 시각이 만연하고, 사교육 시장은 축소되지 않고 있다. 또한 등록금 의존율이 높은 사립대학이나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지방대학의 경우 입학생을 최대한 확보하여야 하는 이유로 인해 입학생간 성적 격차가 심하게 발생하여, 대학에서도 우열반을 편성해야 한다는 진담같은 농담이 회자될 정도이고, 대학을 마치 하나의 사업체로 해석하는 경제적 논리가 지배하게 되어 고등교육이 파행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로에 처해 있다. 다행히 최근 당국에서는 대학 구조조정을 통해 고등교육의 질적 수월성을 향상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이 또한 그 방식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들어오는 입구는 막아놓고 물만 밖으로 빼내는 식으로 대학의 수를 줄이는 것만이 구조조정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일하게 해석되는 증상에 대한 처방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최소양분의 법칙’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성장이나 질병은 아무리 비중이 작아도, 유기체가 필요한 양을 채워주지 못하는 성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규모의 대학이라도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발전은 국가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입학생 선발 후 대학운영과 관련된 각종 지표에 의존한 물리적인 구조조정을 취하기 이전에 대학존립에 영향을 주는 입학생 선발에 대한 자율권을 대학에 부여하여야 한다. 선발시기와 사회적 형평성 보장 등과 같은 최소한의 지침 외에는 대학에 자율권을 주는 것이 구조조정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선발, 교육, 졸업 후 사회적 기여도와 같은 대학 운영과 관련된 연속선상의 모든 일에 대해 대학에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수험생의 대학 선택권은 물론 보장되어야 하고, 운영을 잘못한 대학의 경우 당연히 퇴출대상이어야 하지만, 물이 다 빠질 때까지 오래 걸리는 큰 저수지는 놔두고, 작은 저수지는 금방 물이 말라버리도록 만드는 방식으로는 또 다른 문제만 야기할 뿐이다.

경기시론/박물관 업보

박물관이 낡고 오래된 유물들을 쌓아 놓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지 오래다. 박물관 역사를 보면, 초기에 희귀하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모아들이던 ‘수집의 시대’가 있었고, 시민사회의 등장과 함께 귀족들이 전유하던 미술품들을 시민과 공유하던 ‘전시의 시대’가 그 뒤를 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학교교육을 보충하는 제3의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하는 ‘교육의시대’가 이어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새 세기에는 박물관의 기능이 단순히 고대유물을 수집 보관하고, 전시하거나 세련된 교양교육 등을 담당하는 데에서만 그치지는 않는다. 특히 최근 세계적 추세인 주2, 3일 휴일제 혹은 재택근무등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박물관은 완전히 새로운 변모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박물관은 시민들의 휴식공간 또는 문화창출공간의 새 모습으로 얼굴이 크게 바뀌고 있다. 드디어 박물관에도 업무 뒤 재충전의 휴식시간을 보람있게 보내는 장소로서의 ‘레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낡은 이념 따위는 박물관에 보내져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은 이러한 박물관의 위상변화를 읽지 못하는 무지한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30년이 넘는 박물관 전문가 생활 동안 박물관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 보았다. 개중에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춘 사람들도 있었다. 드물게 상당히 재정적 여유가 있는 경우도 보였다. 체계적이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유물도 수집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박물관을 시작했기 때문에 낭패를 본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겉으로는 아주 매력적으로 혹은 고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상당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다. 낭패겪는 이유야 각양각색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철저한 준비 없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필수요건들이 일찍부터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체계적으로 수집된 유물 둘째, 분수에 맞는 규모의 건물 셋째, 유물을 다룰 전문직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예산을 비롯한 경영여건등이 그에 해당된다. 보통 일반인들의 경우, 유물과 건물만 있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무턱대고 시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실패하기 쉽다. 출발할때에는 꽤 요란하게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소리 소문없이 문을 닫고 수집품이 남에게 넘어간 박물관들도 많다. 여러 요건중에서도 전문직원(큐레이터)은 특히 박물관 진흥법에 명시되어 있어서 비껴갈 수 없는 중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박물관을 운영하기 위한, 아니 경영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기업만이 아니라 박물관도 최고경영자(CEO)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 되었다. ‘박물관 경영’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결국 유물을 살리거나 죽이는 일로 귀결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 건립은 꿈을 키워온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하였듯이, 박물관을 하려면 웬만한 결심만 갖고는 되지 않는다. ‘박물관 업보’라는 말이 있는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서 박물관을 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아무나 무턱대고 덤벼들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사재를 털어가면서 사립박물관을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떤 동기가 작용했던간에 자기 혼자서 그 짐을 다 지려 하면 안된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아야 한다. 이들이 숨은 애국자요, 살아있는 역사지킴이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들이 ‘박물관 업보’를 겪지 않고 나름대로 보람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사회적인 도움이 절실하다. /이 종 선 경기도박물관장

경기시론/새 공동체주의 세상에서

을유년 설날을 쇠면서 새삼 우리는 ‘효도’의 참 뜻을 되새기며 살기좋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16세기 초반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발간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꿈꾸며 살아왔다. 여기서는 실현가능한 차선의 세상으로 바람직한 한국적 사회과학의 토착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모색으로 새공동체주의(Heterotopia)를 제시하고자 한다. 공동체주의는 개체보다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념이다. 개인의 자유나 선택이 희생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 이념과 대립된다. 전체는 개체보다 중요하다는 철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주의는 롤즈의 자유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 발전되어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구조를 배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지닌 긍정적 가치성의 통합을 추구한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의 정의를 전제로 여성의 관점을 통합한 이념을 새공동체주의로 명명해본다. 여성도 타자가 아닌 공동주역의 동등한 존중을 받는 사회의 이념이 된다. 즉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와 자유와 평등과 여성적 가치의 통합이 바로 새공동체 이념인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을 여성의 신체 자체가 열등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孝經’의 첫 장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라는 말은 남녀불문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감히 몸을 손상시키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역경의 음양론에서도 양은 강하고 음의 부드러움은 어길 수 없는 생래적임을 원리로 하고있다. 剛·柔의 본질은 서구의 가치우열의 2원론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서구의 2원론은 이성과 감성, 합리성과 직관, 정신과 육체, 문화와 자연, 신과 인간, 남성과 여성의 짝에서 항상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합리성과 이성을 직관과 감성보다 우위에 놓는 2분법은 서구의 남성우월주의자들, 특히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이며, 동양의 전통을 하위에 위치지우는 문화제국주의의 편린이다. 서구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이러한 2원론을 해체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한국여성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단군신화의 웅녀의 속성에서도 끈기와 인내심이 바로 여성의 속성이 아니던가. 인내심과 끈기의 강인함을 부드러움의 표면으로 감싼 것이 바로 한국여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리고 여성의 속성은 후천적인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많은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여성들도 공적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기회균등과 선택의 자유, 즉 중산층 중심의 자유주의 여성해방론의 입론은 아직 한국에서 유효하다. 여성우월주의자, 급진주의 여성해방론자의 여성해방정치학은 지극히 허무주의다. 새공동체주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공·사 영역에서 동등한 토대위에 존엄성과 평등을 함께 나눌 것이다. 새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의 시장과 사회주의의 공적 소유제의 결합형인 시장사회주의의 모델을 제3의 대안으로 소개한다. 강숙자박사는 민주주의체제를 바탕으로 동학과 맑스의 경제적 평등사상을 종합하려 한다.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원리 등 한국의 전통사상에 기초한 한국적 여성신장주의(페미니즘)의 이념의 정립으로 21C 민족의 정치발전, 평화통일, 나아가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노 태 구 경기대 정치학 교수

경기시론/대학 개혁의 방향

교육부 부총리 임명을 두고 말들이 많다. 원래 한정된 자리를 두고 인사를 하는 것이라 인사 후에는 각자 입장에 따라 말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번의 임명이 워낙이 특이한 것이기도 하다. 교육부는 관료로 성장한 정부 내부인사가 수장이 될 수 없는 자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대학정책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인식되는 대학교 총장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해찬 현 총리가 이러한 관행을 깨고 예외적으로 교육부 장관이 되었을 때 상식을 뛰어 넘은 개혁이 있었다. 당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추진된 정부개혁의 연장에서 교사 정년 감축, 학부제 도입 등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이러한 뼈아픈 기억이 있기에 경제관료 출신의 부총리 임명에 교육계가 바짝 긴장을 하는 것이다. 이번의 경제부처 관료 출신 장관이 가져올 파장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첫째는 인력 시장의 공급과 수요를 생각하는 개혁이 있을 것이다. 현재 교육부의 공식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이다. 교육을 인적자원의 수요 공급과 연계하여 수행하자는 취지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부총리급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취지가 구현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위상만 부총리 급으로 격상되었을 뿐, 실제 정책조정의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국가 전체적 입장에서 노동의 수요와 연계하여 교육을 생각하고 집행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산업계의 수요를 고려하는 공급 체계의 개편이 불가피하다. 청와대에서 이공계 출신의 인사를 찾으려 했다는 노력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는 교육에도 그야말로 시장의 논리를 적용하겠다는 의지를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시장이 심히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로지 대학 진학이 목표이기 때문에 모든 교육은 대학 입학의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피교육자의 목표인 대학교육이 비정상이다. 대학의 입학생 숫자가 곧 현금으로 들어오는 대학의 수입이라 생각하고 경쟁적으로 대학의 신입생 숫자를 늘렸다. 정치인도 한 몫 거들어 대학교 유치를 커다란 업적으로 내 걸었다. 전국적으로 대학의 외형 키우기에 골몰하게 되었으나 이번 입시에서 정원의 30%를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발생하고 있다. 이제 1997년의 IMF 외환위기를 극복할 당시에 부실한 기업과 은행을 퇴출시키고 M&A 하듯이 교육 시장에도 이를 적용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더라도 그 방향을 나아감에 있어 전략적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부는 제도적 기반의 구축에 노력해야 한다. 사립대학의 경우 퇴로를 만들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립의 경우 시장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만 그 시장의 논리가 워낙 냉정하기 때문에 정부는 제도를 정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재단이 출연한 재산을 어떻게 공익과 사익을 조화시키는 수준에서 보장하느냐의 결정이다. 한편 사립대학의 자구노력을 촉구하면서 국립대학을 보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국립의 경우 물리적으로 몇 퍼센트 감축하는 수치에 연연해하지 말고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하여야 한다. 특히 경기도의 경우 서울 유명대학의 분교(分校)가 많은 반면 국립대학은 하나 밖에 없다. 경기도민의 고등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자체의 고민도 필요하다. 199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개혁의 바람이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을 바꾸게 했다. 그러나 대학은 지식인이 모였다는 상아탑의 논리, 동창의 힘 등의 병풍을 무기로 무풍지대에 있었다. 경제계 출신 인사가 불게 할 교육 개혁의 바람이 위기에 선 우리의 교육계에 엄청난 파장을 줄 것은 분명하다. /이 원 희 한경대 교수

경기시론/사회적 서비스, 기업이 나서야 할 때

결식아동과 독거노인들에게 점심으로 제공된 도시락이 부실하고, 배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동일 가격으로 제공되는 대기업의 점심 식사 메뉴를 비교한 사진은 국민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번 일에 대해 관계자들은 도시락 용기와 배달료 등을 감안하면 타산을 맞추기가 어렵고, 당연히 질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항변을 하고 있다. 사실 도시락 제공 등과 같은 사회서비스는 국가의 일차적인 책임이지만, 책임의 범위에 대해서는 국가마다 다르다. 자원봉사가 활발한 국가에서는 국가는 재정적 부담을, 전달체계는 수급자의 자존심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이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국민의 의식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사회서비스에 대한 각성도 신문 등 언론에서 보도되는 사건 등을 통해 이루어지다 보니,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여론에 노출된 대상에게 지원이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회서비스의 범위도 문제가 된다. 도시락 제공은 그야말로 생존과 관련된 가장 기초적인 도움이지만, 이들 수급자 대부분이 결손 가정이나 최저 생활 보장 수급자들이기 때문에, 건전한 성장 발달에 영향을 주는 인성이나 사회성 등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집단들이라는 점은 간과되었던 사안이다. 간혹 밥 한 그릇보다는 따뜻한 대화나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번 도시락 문제에 대책으로 새마을 부녀회나 담당 공무원이 뒤늦게 도시락 배달을 자청하고 있으나, 담당 공무원의 기본 업무 등을 감안한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 사회 서비스는 지방자치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조적 사업이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 개인, 학교, 공공기관, 기업 등 모두가 관련이 되겠지만, 특히 어떤 형태로든 지역주민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지역사회의 기업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감이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하여야 한다. 이번 일이 일어나기 전, 지난 해 10월 전경련은 ‘지역사회 소외계층과 함께 하는 나눔 경영 확대’나 ‘기업임직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자원봉사 활동 강화’와 같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을 발표한 적이 있어, 선언 내용과 관련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문제는 양적 접근이 아니라 질적인 접근이다. 특히 인적, 물적 자원이 비교적 넉넉한 기업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관심을 갖지 못했던 소외된 곳, 구석진 곳을 찾아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육체적 노동력의 제공이나 재정적 후원과 같은 단순한 형태의 도움에서 창의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또한 원초적인 생존권 보장보다는 건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상공회의소가 주축이 되어 학교와 기업을 자매결연시키거나, 단독 기업에서 직원들의 점심시간 동안 도시락을 배달하는데 참여시키거나, 직장인들이 학교의 결손 가정 아동들을 정기적으로 순번제로 방문하여 인생 상담이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진로지도를 하는 친구되기 운동과 같은 미국 기업의 사례는 도시락 파문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 순 철 협성대교수

경기시론/미술관의 명암

언젠가 문화부장관이 우리나라에 천개의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다. 2004년말 기준으로 전국에 이미 360여개의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경기도에도 70개소에 달하는 박물관, 미술관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의 경제규모나 지적수준에 비겨 볼 때 꿈같은 이야기지만, 최근의 추세로 보아 빨리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작년 10월 서울 한남동에 멋있는 미술관이 하나 새로 생겼다. ‘리움-삼성미술관’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미술관은 고미술, 현대미술, 어린이미술관의 3자 복합체로 과거 용인에 세워졌던 호암미술관을 새롭게 확장하여 만든 것이다. 이 미술관은 유독 건축분야에 있어 국수적이고 후진을 면치 못하는 우리나라에 보기 드물게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등 3명의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세부분 각각의 특색을 살린 설계를 별도로 부탁하여 통합 구성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현대는 건축이 점점 대형화되고 예술품화 되어가는 추세에 있다. 그러한 경향속에 예술품처럼 만들어진 리움은 이름의 영문조합 ‘LEE-UM’이 말해주듯,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이건희 회장으로 이어 운영하는 미술관이라는 케치 프레이즈를 분명하게 앞세우고 있다. 지난 연말 강원도 양구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리움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아주 특별한 작은 미술관을 다녀왔다. 이 아담한 미술관은 ‘박수근미술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념관 성격의 미술관으로 국내 건축가의 작품인데, 그 설립은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화가 박수근의 유족과 애호가, 그리고 작은 지자체-양구군의 협력이 이루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때묻지 않은 강원도의 그림같은 자연속에 불우했던 화가 박수근의 염원이 어린 터전을 끼고 다소곳하게 자리잡은 이 미술관은 건물 자체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은근하게 배어나고 있었다. 전시실 두개정도 규모의 그리 크지 않은 이 미술관에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일컬어지는 박수근의 작품세계와 고난의 연속이었던 작가약력 등이 단촐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미술관의 생명은 대개 건축보다는 소장품의 질로부터 나온다. 그런 면에서 리움-삼성미술관은 건물도 훌륭하지만 자타가 인정하는 미술품의 보물창고이다. 2대에 걸쳐 집중 수집된 삼성가의 수장품은 질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반면에 70년대 우리나라 미술품 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는 데에 일조를 한 박수근의 작품 성가에 비한다면, 유품수준의 스케치류 등과 손바닥 크기의 유화작품 세점만 달랑 걸려 있는 박수근미술관은 참으로 썰렁하다. 이는 우리의 미술애호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한국에서 제일 비싼 그림으로 알려진 박수근의 그림들은 도대체 다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앞다투어 고가로 박수근의 유화작품을 모아 들인 수집가들은 왜 이 미술관에 좋은 그림 한점이라도 더 기증하려 하지 않는가. 이는 우리나라의 미술을 보는 시각이 아직도 부동산 투자의 연장인 재테크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미술관이 잘 되기 위해서는 좋은 미술품의 입수 통로가 크게 열려 있어야 한다. 외국의 명문 미술관들의 유명대가 작품일수록 그 밑에는 아무아무개의 기증품이라는 명판이 돋보인다. 그에 비해 우리는 왜 기증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을까.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아직도 미술품을 투기재산으로 전유하려는 개인적인 치부욕과 미술품의 투자를 죄악시하거나 재산 빼돌리기 정도로 보아 기부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으려는 당국의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이래 가지고야 어느 천년에 좋은 미술관이 생기겠는가. 너무도 걱정스럽다. /이 종 선 경기도박물관장

경기시론/미주동포의 정치참여와 통일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인물보다는 성경띠(Bible Belt) 전략으로 예상을 뒤엎고 남부표를 싹쓸이한 부시 후보가 케리 후보를 누르고 당선 되었다. 부시는 자신은 대통령후보 이전에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은 복음의 선교사라고 공표를 하면서 지지자들이 내놓은 자금은 정치자금이 아니고 신성한 선교헌금이라고까지 하면서 남부의 표와 돈을 결집하였다. 미국의 유권자를 보수와 진보로 나누고 그 격차를 벌려서 보수계의 표만을 확보하여 당선이 되었다. 전쟁을 정치처럼 수행하는 신보수주의자(Neocon)들의 권력이 공고화되었다. 앞으로는 백악관 조찬기도회시 기도제목이 곧바로 정책으로 결정, 시행될 것 같다. 세계의 모든 분쟁지역엔 전쟁의 빨간 불이 켜지게 되었다. 그러나 본토가 처절하게 공격당한 시민들의 분노와 위기감은 민주당의 어떠한 정치인도 전쟁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9·11 바로 다음 날 백악관 안보대책회의에서 울포비츠 국방부차관이 곧바로 이라크 공격을 주장한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환경, 인권, 평화 등의 이슈가 순식간에 전쟁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미주 한인사회의 정치력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동안 이들은 미국사회의 참여보다는 본국의 정치권력에 참여하는 것에 집착하였다. 그러나 2004년 현재 미국 속의 한인들의 인구를 볼 때 한인 동포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주류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다. 또 9·11 테러를 당하면서 미국 속의 소수계가 깨달은 핵심은 이 곳에서 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자기의 모국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미국 내 한인들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로 되는 한반도의 안정이 결국에는 미국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과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평화를 위하는 일이고 이렇게 되어야 우리의 안전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모국을 떠나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은 공동운명체이다. 각 인종은 세계 속에서 공동운명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마침 참여정부에서 한미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선 정부는 재미동포정책으로 해외동포를 21세기 국가발전전략의 틀 속에서 하나의 주체세력으로 전제하고 역학론적으로 정책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정보·통신의 공유로 국경이 무시되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로 집결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해관계를 놓고 민족단위로 더욱 공고화되고 있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 내 인종들이 그렇게 생존의 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9·11 이후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한반도의 안정과 통일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미국과 북한 관계를 어떻게 한국의 중심으로 변화 발전시켜나가는 가에 달려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한국 내 미국시민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미국 속의 한인 200만은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정말로 보물 같은 존재이다. 미국시민의 입장에서 유권자의 입장에서나 주류 정치인을 압박하는 일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200만 미국동포의 정치세력화는 미국 내 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는 일에 앞서서 한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위하여 더 긴급한 일이다. /노 태 구 경기대 교수

경기시론/환경문제와 사회적 협약

새해에는 환경과 관련한 정부의 정책 변화가 눈에 띈다. 정부는 올해를 음식물류 폐기물 직매립 금지 원년으로 설정하여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음식물 폐기물을 땅에 매립하게 될 경우 악취와 해충, 침출수 등으로 환경을 오염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지역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폐기물을 바로 매립하지 않고 적정한 처리와 재활용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우리나라에서 쓰레기 정책이 도입된 것은 1995년이다. 이때부터 넘치는 쓰레기의 양을 줄이고 사용가능한 재활용 쓰레기를 늘리기 위해 자신이 버리는 쓰레기의 처리비용을 스스로 내게 하는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했다. 최근의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가능만 하다면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 이유는 교육열, 나쁜 환경, 부동산 투기 등으로 우리의 ‘삶의 질’이 너무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회문제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원인자이고 공범자이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다보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있다. 내 어린 시절에 여름이 되면 집 근처에 있는 냇가에서 목욕을 했다. 그러다 치열한 입시를 마치고 내 지역을 다시 돌아보니 그 냇가는 산업폐기물로 흘러 넘쳐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이미 악취로 근접조차 힘든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그 이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들른 내 고향의 하천은 복개되어 없어지고 도로로 변해 있었다. 내 추억마저 세월의 단층 속에 영원히 복개되어 버리고 내 아이의 세대에게는 전원풍의 낭만과 자유로운 상상이 막혀 버렸다. 환경은 한번 파괴되면 복구되기 어렵고 너무나 큰 사회적 비용을 치루게 한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은 다음 세대의 것을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름다운 자연, 맑은 공기와 물, 따스한 햇볕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잠깐 빌려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쓰레기를 자원화해야 한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화두이자 관심거리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쓰레기는 환경오염의 가장 주된 요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쓰레기를 단순히 버리는 폐기물이 아닌 새로운 자원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쓰레기 재활용과 자원화를 위해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분리수거하고, 제대로 쓰레기를 버리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선행되어야 할 사안은 쓰레기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의 지속적이고 관심어린 홍보와 교육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 속에서 생산자가 폐기물 처리를 책임지도록 하여 생산 단계에서 재활용을 고려해야 한다. 마음대로 생산하고 마음대로 소비하고 그리고 누군가가 최종적으로 처리하도록 하는 책임의 단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은 자가 처리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폐기물 정책에 있어서 처리시설 공급 위주 정책에서 폐기물 수요 관리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러한 입장에 서있다. 이같은 시스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원의 리사이클을 위해 정부와 시민 간에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지역의 쓰레기를 어떻게 분리 배출하고 자원화 할 것인지에 대해 정부와 시민이 약속을 하는 문건이다. 이러한 협약을 쓰레기 문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이 쓰레기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쓰레기를 버려야 할 폐기물이 아니라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제 주민과 공무원 그리고 업체 모두가 모여 우리의 쓰레기를 버려야할 폐기물이 아니라 자원화 하기 위한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고 구체적인 집행을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이다. 쓰레기 문제에 대해 누구도 ‘그들’의 책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우리’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첫 걸음이 지역사회에서 쓰레기 문제에 대한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이 원 희 한경대 교수<행정학>

경기시론/새롭게 새해를 맞이하자

누구나 그러하듯이,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해가 시작되면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은 개인이든 국가이든 지난 1년 동안의 잘못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다. 지난 2004년도에도 국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동일 사안에 대해서도 각자가 처해 있던 입장에 따라 좋게 평가되기도 하고, 나쁘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상반된 평가가 극단적인 갈등구조로 확산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사는 세상의 이치이다. 새해에는 자기만 옳다는 주장이 없었으면 좋겠다. 대통령 탄핵소추,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시비, 4대 법안에 대한 첨예한 대립 등과 같은 굵직한 사건에서 비롯된 각종 시위와 집회, 이로 인한 피해는 국가신인도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감정이입 능력이 조금만 있다면 일정한 타협선을 찾을 수도 있었던 일이다. 새해에는 최소한의 도덕심조차 없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쓰레기 만두 파동, 프로 야구선수들의 병역기피, 대학수학능력 휴대폰 부정 사건은 이러한 행위의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먹는 음식을 가지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를 회피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남보다 조금 더 점수를 받으려던 이러한 일들은 결국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의 삶과 명예를 포기하는 행위였다. 새해에는 자신의 인격만큼이나 타인의 인격도 중요하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성매매 특별법이 사회적 약자에 처한 여성들의 인격을 보호하는 좋은 본보기라면, 이라크에서 벌어진 참수장면 공개나 연쇄살인 사건은 인간의 생명을 한낱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일이었다. 한 개인의 삶은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인척 등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는 행위이다. 사람의 인격은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에게 은근한 미소를 짓게 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각종 국제 영화제 감독상 수상, 욘사마 열풍, 이웃돕기 성금 등은 매번 같은 장면을 보아도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런 일들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와 땀의 결실이다. 비록 현재에는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꾸준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꿈을 달성한 것이다. 준비 없는 삶의 결과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타인이나 사회에 돌리는 일은 자신에게는 위로가 될지는 모르나 결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새해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대책들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최악의 재앙이었던 동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 올림픽 체조경기에서의 심판오심,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 운동 등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소수 전문가들의 주장을 무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대처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소를 잃고 나서라도 외양간은 잘 고쳐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 새해에 바라는 이러한 소망은 혼자의 힘으로는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주장하는 법과 제도적 장치와 같은 외부 요인만으로도 힘들다. 자신의 내적 기준을 강화하는 본질적인 측면을 생각하여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여 남을 조금 더 배려하는 도덕심을 배양하는 노력을 우리 모두가 결심하였으면 좋겠다.

경기시론/‘저희나라’ 유감

존댓말을 잘못 사용하면 안함만 못하다. 무심결에 ‘우리나라’를 ‘저희나라’라고 하는 이가 많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유식한 체한다. ‘저희나라’라면 우리가 외국사람에게 ‘우리나라’를 낮추어 말할 때 써야 할 표현법이다. 그런데 우리끼리 ‘저희나라’라고 낮추어 말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대형 존댓말을 이렇게 잘못 사용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또 수월치 않게 듣는 표현중에 이중존칭이 있다. 요즘 자주 듣는 ‘연말연초에 일하시느라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운운의 이중 삼중 존칭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의원님의 사모님’이라든지 ‘회장님 사모님’등의 표현은 듣기에는 대단히 정중한 표현같지만, 말하는 사람의 얄팍한 교양이나 무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촌스런 화법이다. ‘업무처리에 바쁘신데도 불구하고’나 ‘회장 부인 혹은 사모님’으로 충분한데도 무엇이 그렇게 존경스럽고 송구스러운지 존칭을 두 번 세 번 거푸 반복한다. 존칭의 바겐세일이다. 적절한 존칭어 사용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을 한결 돋보이게 하기도 하지만, 그 사회의 도덕성이나 사회규율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건강한 청신호이다. 반면 부적절한 존칭의 사용 내지 예법에 맞지 않는 존댓말의 사용은 말하는 사람의 천박함이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회가 어딘가 어둡고 건전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리는 위험한 적신호이다. 언어학자들이 공감하듯이, 우리말 우리글은 전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말이요 글이다. 우리말이 갖는 언어학적인 탁월성은 표현에 있어서 ‘새콤달콤한’같은 수식어로부터 ‘젓수셨다’등의 극존칭어에 이르기까지 개별 언어가 갖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표현에 그 튼실한 바탕을 두고 있다. 요즘은 우리말 우리글이 너무 혹사당하는 시대이다. 그 이면에는 산업화와 속도화의 폐단때문에 살벌해진 사회현실과 얄팍한 문화생활이 있다. 그런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현이나 표피만을 자극하는 언사가 판을 치다 보니 우리말이 갖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크게 손상되어가고 있다. 그런 판을 더욱 악화시키는 데에 속성 언론이 일조를 하고 있어 유감이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고양시키는데에 공교육이 앞장서야 한다. 탁한 것이 있어야 맑은 것이 돋보이고 추한 것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듯이, 아름다운 것을 제대로 가려내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탁한 것을 걸러내려는 시도가 없으면 우리말과 우리글은 언젠가는 지저분한 쓰레기더미같은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리라. ‘방가방가, ㅋㅋㅋ’등의 표현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인터넷 대화문자이다. 특히 핸드폰 문자메시지에 많이 쓰이는 이런 표현을 접하다 보면, 언어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통속성에 거부감이 앞서고 일상어마저 유희도구화 하려는 현대인들의 속물적 근성에 치를 떨게 된다. 어느 집단에나 은어나 속어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것들은 어찌 보면 당대 문화의 다른 얼굴이거나 집단스트레스 해소창구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현대는 속도의 시대이고 따라서 많은 생략과 간편화는 불가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류의 편리함이 우리의 미풍양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을 흠집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이를 무작정 방관할 수는 없다. 우리처럼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논리적이기보다 감정에 치우치는 심성의 민족에게는 그런 면에서 각별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닭띠 새해에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세련된 표현을 기대한다. /이 종 선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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