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를 떠난 화살, 이를 두고 동서양의 개념이 다른 두가지 예가 있다. 명주 천도 뚫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강한 활의 쇠뇌도 점차 힘이 떨어져 종내엔 지금의 산동성인 노나라 명물의 명주 천도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나라 경제때 흉노의 화친 제의를 일축하는 척화파를 한장유라는 사람이 설득하면서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에선 ‘강노말불능천로호’(强弩末不能穿魯縞)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대 아테네의 궤변학파는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날아가는 것 같지만 날지 않는다고 했다. 날아가는 화살의 시간대를 무한대로 나눠 구분하면 어느 순간 머문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한장유는 동적(動的) 정(靜)으로 본 관점이고 궤변학파는 정적(靜的) 동(動)으로 본 관점이다.
그러나 궤변학파의 논리는 역시 시공(時空)의 모순을 지닌 곡론인 반면에 ‘강노말불능천로호’ 논리는 시공이 수용된 정론이다. 권세도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어쩌면 생로병사를 타고난 인간의 숙명처럼 권세의 한마당 과정 역시 생로병사가 불가피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지만 십년도 아닌 반십년이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끝은 더욱 가혹하지만, 설령 재창출에 성공했다 하여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새로운 집권자는 언제나 새로운 자신의 무대를 연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간 권세의 무대에서 많은 주연·조연·단역의 권문세도가들이 명멸해 갔다. 권세가 화근이 되어 재앙을 겪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이 정권은 이것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오래 갈망하였으므로 오래 권세를 누릴 것으로 애써 착각하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세월은 정권따라 속도가 조절되는 게 아니다. ‘태산명동서일필’이라지만 쥐 한마리는 커녕 뭐하나 해놓은 게 없다. 새해 들어 불과 두 달 넘기면 집권 2년을 가득히 채운다. 무성한 것은 말 뿐이고 넘치는 것은 국민사회의 분열 뿐이다.
지난 3월 집권한 사파테로 스페인 사회노동당 당수가 부럽다. 40대의 이 스페인 총리는 현란한 말잔치나 구호따윈 모른다. ‘제3의 길’ 노선을 조용한 가운데 열정적으로 가고 있다. 우파나 지역의 목소리를 듣는 척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내 시책에 반영하곤 한다. 실용적 중도 좌파의 면모로 국민적 인기를 받고 있다. 고촉동(吳作棟) 싱가포르 총리는 “젊은이들이 출세와 돈과 근사한 집밖에 몰라 나라밖의 도전에는 너무 무지하다”며 젊은이들을 질타했다.
이 정권은 편가르기 출세주의를 충동질한다. 젊은이들은 절망의 나락에서 발버둥친다. 사회는 아우성이다. 우물안 개구리 같은 나라가 되어 간다. 대통령이 바깥 나들이에서 환대를 받았다하여 열린 나라가 되는 건 아니다. 이웃 나라, 다른 나라는 다 호황을 누린다. 유독 우리만이 경제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나라를 우물안 개구리 꼴로 만들기 때문이다.
1968년 10월22일 멕시코올림픽경기장의 높이 뛰기에서 경이적인 스포츠 개혁이 일어났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다리를 치올려 바를 넘는 정면도 아니면 배 안쪽으로 넘는 복면도를 구사했다. 그러나 포스베리는 등 쪽으로 바를 넘는 배면도를 시도했다. 마침내 2m18㎝를 넘어 종전 기록을 6㎝나 경신하면서 미국에 금메달을 안겨 주었다. 정면도나 복면도보다 몸의 무게 중심을 효과적으로 들어 올리는 배면도는 오늘날 높이뛰기의 교과서가 됐다.
이것이 개혁이다. 이런데도 개혁을 만능 상품화하는 이 정권은 살아갈 일보단 지나간 일에만 더 집착한다. 근래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안희정씨를 청와대로 몇차례 부르는 등 밀실 접촉을 갖더니 예의 가신들 회동이 잦아진 모양이다. 가신정치는 정면도나 복면도처럼 청산돼야할 묵은 게임 방식이다. 개혁세력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되레 반개혁적인 게 많다. 자신에겐 개혁으로부터 관대하고 남에게만 가혹하게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반개혁이다.
이 정권의 권문세도가들은 이렇게 여기는 것 같다. 시위를 떠난 권세의 소멸을 생각지 않기 위해 권세의 화살이 궤변학파들 곡론처럼 날지않고 머무르는 것으로 믿고싶은 지 모른다. 그러나 서슬이 시퍼런 권력의 위세도 종국엔 엷은 명주 천 하나를 뚫지 못할 때가 온다.
권력을 책임으로 알고 행사한 사람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 홀가분하게 여겨진다. 권력을 특권으로 알고 휘저은 사람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 두렵게 여겨진다. 반십년의 권세를 믿고 설치다가는 나중에 다치는 전례를 또 겪을 수 있다.
/임양은주필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