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박홍이산(朴弘移山)

‘열자’의 탕문 편에 중국의 유명한 ‘우공이산’이라는 우화가 나온다. 우공이산은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우공은 90세 가까운 나이에 사람의 왕래를 불편하게 하는 태형산과 왕옥산을 옮기려 시도한다. 이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줬다는 내용이다. 이로부터 우공이산은 사람이란 꾸준히 노력하면 산과 바다라도 옮길 수 있다는 의미가 됐다. 필자는 현대판 우공이산인 박홍 작가를 알고 있다. 선생은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누나 밑에서 자라면서 작가를 꿈꾸었다. 그 후 그는 2025년 83세의 나이에 ‘빗물 속에 영혼이 녹아 있다면’이라는 장편소설을 펴냈다. 박홍 선생이 노벨 문학상을 꿈꾸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를 읽은 후다. 파스테르나크는 본래 시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소설 문장은 시적 표현으로 묘사력이 풍부하다. 혹자는 닥터 지바고를 시소설로 보기도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을 모스크바 문예지에 발표하려 했지만 거부당한다. 어쩔 수 없이 타국인 이탈리아에서 출판한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그는 혁명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 소설을 썼다. 이 때문에 작가동맹에서 제명되고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박홍 선생은 중학생 때 파스테르나크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는다. 노벨 문학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생은 먼저 파스테르나크처럼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 시단의 빛나는 존재였던 청록파 시인들로부터 시적 감각을 익혔다. 그 결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시에서 자연의 본성을 깊이 깨닫고 인간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는 시 공부를 통해 세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냉철한 이성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런 노력으로 선생은 2010년 시 전문지 ‘시안’으로 등단한다. 등단 5년 후인 2015년 선생은 나이 73세에 첫 시집 ‘나의 옥상 와이너리’를 출간했다. 선생의 시 세계는 청록파의 서정성과 세상을 향한 저항의식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선생은 60년이 지나 자신의 꿈에 다가섰다. 선생의 소설가가 되기 위한 과정은 더욱더 치열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소설에 운명을 건 사람처럼 사고했고 행동했다. 그는 경희대 화학과를 3학년 때 휴학한다. 그리고 천호동에서 배추 장사를 하며 세상과 만난다. 이 모든 과정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선생은 직업도 소설 작업을 고려해 신중히 선택했다. 그렇게 고른 직업이 소설 쓰기에 최적화된 2함대의 군무원이었다. 선생은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소설을 썼다. 이때 썼던 소설이 권위 있는 문예지에 연속 최종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신춘문예와 문예지에 계속 투고하는데도 낙선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선생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일찍이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곳에선 대부분의 문예지가 추천제였기 때문이다. 박홍 선생이 드디어 작가의 꿈을 이뤘다. 83세에 자전적 성장 소설인 ‘빗물 속에 영혼이 녹아 있다면’을 출간했다. 선생이 시인과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 놀랍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문학으로 삶의 전 과정을 관통한 시간이 경이롭다. 선생은 노벨 문학상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빛난다. 선생은 지금도 실존주의적 존재의 본질에 치열한 질문을 던지며 글을 쓴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기 때문에 노벨 문학상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필자는 지금 여기 ‘열자’의 탕문 편에 나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을 박홍이산(朴弘移山)이라고 바꿔 읽는다.

[경기만평] 이럴듯...

[사설] 정치인 ‘쌈’할 때 정의선은 트럼프와 담판지었다

한국 경제가 트럼프에 흔들리고 있다. 관세 폭탄 예고 앞에 무방비다. 현대자동차그룹도 그런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시장 판매 차의 57%가 국내 생산이다. 미국의 관세 폭탄에 직격탄을 맞게 된다. 관세 25% 인상에 예상 매출 감소는 19%다. 제철은 이미 25% 관세 폭탄이 시작됐다. 안 그래도 악전고투 중이었다. 현대제철 포항 1, 2공장에서만 매달 적자가 80억~90억원이다. 포항 2공장이 축소 운영에 들어갔다. 파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에 4년간 210억달러(31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정의선 회장이 24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자동차 86억달러(12조6천억원) △부품·물류·철강 61억달러(9조원) △미래산업·에너지 63억달러(9조2천465억원)다. 현지 생산을 늘려 관세 장벽을 피해 가려는 방법이다. 여기에 미래 산업 분야의 사업 기회를 확대한다는 계산도 있다. 일석이조다. 25일 아침에 전송된 장면이 신선하다.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루스벨트룸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함께했다.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 마이크 존슨 미 연방 하원의장, 스티브 스칼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도 동석했다.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의 핵심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 회장 발표에 박수로 화답했다. “현대는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트럼프 2기에서 본 가장 주목할 장면이다. 트럼프 행정부와의 교감은 세계 각국의 현안이다. 대부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철저한 자본주의적 사고에 막히는 벽이다. 우리 정부와 기업도 노력은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날아든 담판 소식이다. 짐작하건대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도 긍정적 자극이다. 보다 과감하고 자신감 있게 접근이 이뤄질 수 있다. 현대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의 정치와 정부는 뭘 했을까. 트럼프2기와의 교감 소식은 없다. 야당의 한 의원은 노벨상 해프닝을 벌였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트럼프 대통령을 추천했다. 당과 진보 진영에서조차 ‘황당한 짓’으로 평가받았다. 정부 여당은 민감국가 지정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바이든 임기 말에 지정됐는데 이를 모르고 있었다. ‘별것 아닌 일’이라는 주한 미대사관 측 워딩에 위로받는 모습이 우습다. 이게 한국 여야 정치 현실이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외부에 있다. 정확히는 미국의 트럼프 2기다. 유럽 모든 나라의 정부와 정치가 대응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전략도 그렇다. 유독 한국의 정치·정부는 안 보인다. 계엄, 탄핵, 조기 대선에 매달려 있다. 그들은 상상도 못했을 정의선 회장의 트럼프 담판이다. “한국은 정치가 4류, 관료가 3류, 기업이 2류다”. 반도체 신화를 일군 기업인의 발언이다. 딱히 수정할 게 없다.

[사설] 산불 70%는 실화... ‘자나 깨나 불조심’ 잊었나

지난 주말 전국 43곳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특히 산청, 울주, 의성 등에서는 아직도 번져 가고 있다. 건조한 날씨에 강풍이 몰아쳐 불을 키운다. 해마다 이맘때면 산불이 일어났지만 유독 심하다. 진화대원 등 인명 피해까지 발생, 국민들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불은 조기 발견과 초기 진화가 중요하다. 그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산불에 대한 경각심이다. 이번 동시다발적 산불 사태에서도 어이 없는 부주의들이 화를 자초했다. 실화(失火)로 시작한 대형 산불이다. 울산 울주군 산불은 농막의 용접 작업이 원인으로 보인다. 경남 산청 산불은 예초기를 돌리다 불티가 튀었다고 한다. 경북 의성 산불은 성묘객이 묘지 작업을 하다 실수로 불을 낸 것이다. 작은 부주의가 이 얼마나 큰 변을 초래한 것인가. 인천에서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간의 산불 10건 중 7건꼴로 입산자나 주민의 실화에 의한 것이었다. 인천에서도 지난 10년간 해마다 평균 17건씩 산불이 났다. 그 결과 매년 축구장 9개 면적을 넘어서는 산림이 불탔다. 2023년 3월에도 강화군 마니산 산불로 22만㎡가 잿더미로 변했다. 인천 산불 원인의 70%가 실화다. 입산자 실화 26%, 논밭두렁 태우기 18%, 쓰레기 소각 14%, 담뱃불 실화 6%, 주택화재 5% 등이다.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산불(28%) 중에도 실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 주말 인천 서구 경서동 인근 야산에서도 산불이 났다. 이 역시 담배꽁초에 의한 실화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산불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라 한다. 산림보호법은 과실로 산불을 낸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고의로 산불을 내면 5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형이다. 그러나 실화 산불의 경우 대부분 수백만원 벌금에 그치는 실정이다. 고의성이 없다는 이유 등에서다. 실화 산불에 대한 처벌이 평균 200만원 수준의 벌금형이라는 조사도 있다. 이번 산불 사태를 계기로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처벌을 위한 처벌을 주장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부주의라 해도 그 결과는 엄청난 실화 산불이다. 조기 발견, 초기 진압에 더 앞서야 할 것이 산불에 대한 엄중한 경각심이다. 요 며칠 창문을 흔드는 강풍이 계속 분다. 저 남녘의 산불이 더 살아날 것이 걱정이다. 실화 산불에 목숨과 터전을 잃는 참변이라니. 지난 세월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가꿔온 숲인가. 국민 모두가 산불의 무서움을 새삼 되새길 때다. ‘자나 깨나 불조심’을 잊었는가.

[지지대] 외로운 세기

한국 사회에 외로움의 그림자가 커졌다. 통계청이 25일 발표한 ‘2024 한국의 사회지표’를 보면 19세 이상 국민 중 ‘외롭다’고 느낀 사람의 비중이 21.1%로 전년보다 2.6%포인트 증가했다.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고 느끼는 비중도 3.2%포인트 늘어 16.2%로 집계됐다. ‘외롭다’고 느끼는 비중은 60세 이상에서,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고 느끼는 비중은 40대에서 두드러졌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도 주목할 만한 통계가 나왔다. 연구원의 ‘2024 고립·은둔 청소년 실태조사’ 결과 고립·은둔 청소년 3명 중 2명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온라인 조사에 응답한 1만9천160명 가운데 고립, 은둔 청소년은 각각 12.6%, 16.0%로 나타났다. 청소년의 28.6%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21세기를 ‘외로운 세기(the lonely century)’라 이름 붙인 학자도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다. 그는 2021년 발간한 ‘고립의 시대’에서 21세기를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외로운 사람들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오는 시기로 진단했다. 그의 말처럼 기술은 진보하지만 우리의 삶은 고립되고 있다. 안정적이지 못한 근무환경에서 일하는 플랫폼 노동자의 증가, 대면 접촉이 차단된 디지털을 매개로 한 만남의 일상화, 소득 수준에 따른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시의 구조. ‘초연결사회에서 격리된 우리’다. 파편화된 개인의 외로움은 사회를 습격한다. 묻지마 범죄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언제나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었다.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극단적인 견해에 빠지기 쉽고 포퓰리즘 정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허츠는 대안으로 ‘연결’을 제시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기업의 협조, 시민의 다정함과 참여다. 극단주의와 혐오, 각종 음모론이 일상의 언어로 퍼지고 있는 한국 사회가 곱씹어 봐야 할 지점이다.

[세상읽기] 불평등 공화국 끝내야 한다

정국이 요동치면서 정치권은 대선 후보와 정당 지지율에 관심을 쏟고 있다. 지지율은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의 지표는 끝없이 내려가고 있다. 정당들이 봐야 할 것은 지지율이 아니라 자살률, 자영업자 연체율, 청년 취업률, 비정규직 숫자 등 불평등 지표다.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는 새로운 대한민국도, 더 강한 민주주의도, 더 좋은 성장도 불가능하다.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의 방법론을 한국에 적용하면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기여한 비중이 1990년대 29%에서 2010년대에는 38%로 높아졌다. 우리나라 50대 부자의 절반은 부를 물려받은 상속형 부자다. 대한민국의 자산은 상위 10%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반면 청년 백수 120만명 시대다. 취업해도 4명 중 1명꼴로 단시간 노동이다. 부모보다 못사는 첫 세대로 남을 수 있다. 동시에 부모의 부와 지위를 대물림받은 특정 지역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은 경로가 구조화됐다. 양극화와 청년 대공황 시대에 감세 경쟁을 펼치며 2030의 지지율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절감해야 한다. 한국사회가 자살률에 둔감해지는 건 심각한 문제다. 최소한 대선을 준비하는 유력 후보들은 자살률에 충격과 공포, 아픔을 느껴야 한다. 자살률이 10만명당 27.3명으로 치솟았다. 자살은 사회적 죽음이자 절망사다. 국민이 절망에 쓰러지는 것, 딛고 일어설 희망을 포기하는 것, 이것은 정치의 실패다. 빛의 혁명을 거치며 국민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남태령 민주주의를 성취한 세대는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혁명을 지나 이태원 참사, 내란과 탄핵을 마주했다. 그 과정에서 새 시대를 향한 뜨거운 에너지를 응축했다. 민주당과 야권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응답해야 한다. 만성적인 불공정과 구조적 차별, 무한 경쟁에 따른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을 깨는 불평등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 먼저다. 대한민국의 특권과 기득권을 깨겠다는 담대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정권교체 이상을 바라는 국민의 에너지는 차갑게 식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희생을 딛고 서 있다. 역대 우리나라 정부 가운데 성장을 외면한 정부는 없었다. 모두 성장 중심 정책을 중시했다. 불평등 해소와 분배를 우선한 정부는 없었다. 불평등 종식이 다음 정부의 국정 운영 기조가 돼야 할 시기다. 역대 정부가 가보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 통합을 견인하고 극우 포퓰리즘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소득, 노동, 주거, 의료,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사회경제적 약자가 존엄과 행복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한다. 권력구조 개헌에 앞서 몫이 없는 국민의 몫을 찾아주는 기본권·사회권 개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상병수당 전면 도입과 노동시간 단축, 전국민 사회보험 보장, 재벌 지배구조 개혁과 조세 정의 실현, 토지공개념 도입, 차별금지법 제정, 한국은행이 제안한 대학입시 지역별 비례선발제 등을 다음 정부의 국정과제로 만들어야 한다. 더는 정부의 정책에서 배제되고 소외받는 ‘잊혀진’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 불평등엔 악성 이자가 붙는다. 평범한 국민에게만 붙는다. 불평등이 임계점까지 왔다. 우리는 뭐라도 해야 한다.

[천자춘추]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하자

지금 우리사회는 분열의 도가니다. 올해로 광복 된 지 80년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새김질하면서 국가 기업 개인의 앞으로 나갈 길을 생각 할 여유조차 없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문제만 해도 80년이나 해묵었다. 경기도박물관이 ‘광복80’특별전 3부작 모토를 ‘합合’으로 정하고 김가진, 여운형, 오세창을 모신 이유다. 이를 통해 일 년 내내 합(合)의 참뜻을 되새김질 하고, 역사를 통해 내일을 보고자 한다. 문제는 ‘합(合)’이 그냥은 안 된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합은 의미도 없다. 흙을 뭉치게 하는 물 같은 존재가 필수다. 여기서 물은 비전이다. 암흑천지인 일제강점으로 돌아가면 북극성과 같은 존재인데,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물가물 망각 되가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망국을 생명의 땅으로 회복시켜낸 원동력이 홍익인간이었다. 총칼로 폭탄으로 일제를 무찔렀던 궁극의 이유도 우리민족의 자주독립너머 인류차원의 홍익인간 실현에 있었다. 안중근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후 외쳤던 ‘대한독립만세’가 1910년 3월 26일 여순에서 순국할 때 ‘동양평화만세’로 도약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홍익인간이다. 우리는 일제와의 36년 전쟁에서 단군의 홍익사상 발명으로 민족주의·공산사회주의·무정부주의까지 모두 합(合)해내어 자주독립으로 광복을 쟁취해냈다. 홍익인간의 잣대로 보면 비폭력의 2천만 민족의 3.1독립만세혁명(1919)은 이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1918) 이전에 자주적으로 전개되었다. “합하면 서고, 나누어지면 엎어진다(合則立分則倒)”고 시작되는 ‘대동단결선언’(1917)이 그것이다. ‘무오독립선언’(1918)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주의 진선미(眞善美)를 체현하여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선언서의 초안자인 조소앙을 비롯하여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여준, 이동녕, 이동휘,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문창범, 박은식, 박찬익, 신성, 신채호, 안창호, 윤세복, 황상규 등 대부분이 단군사상으로 무장한 대종교 출신 인물이라는 점에서 망국 당시 홍익인간이 우리의 등불이었음을 절감한다. 이렇게 자등명(自燈明)을 이어받은 3.1혁명은 도미노로 중국의 5.4운동을 촉발시키고, 필리핀 베트남 인도 터키 이집트로 번지면서 전 세계 피압박민족들의 독립 도화선이 됐다. 그리고 3.1혁명 결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 된 것은 우리의 역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쾌거중의 쾌거다. 이후 임정이 주도가 돼 전 세계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한 결과 1945년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정전(停戰)상태이다. 남북분단으로 통일의 과제가 주어져 있다. 남북통일이야 말로 완전한 광복인 이유다. 통일은 절대 도둑같이 그냥 안 온다.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다가는 그 이전에 다른 놈이 가지 채 꺾어 집어 삼키고 만다. 내 노력이 있고나서야 남도 돕는다. 인류역사 자체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쟁역사다. 여기서 ‘강(强)’은 당연히 문무겸비다. 문(文)은 철학이다. 일제강점 시공에서 홍익인간이었다면, 홍익자연과 홍익우주가 분단과 기후변화, AI, 우주시대 인류의 비전이다. 대한민국이 합(合)으로 세계무대에 주체적으로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해나가는 것’이 통일의 길이다.

[김종구 칼럼] 헌재의 ‘151석’ 결정, 재탄핵 조장하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불완전한 권한이다. 법적으로는 모든 권한을 넘겨받는다. 다만 중요한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다. 투표 등 국민의 선택으로 부여받은 권력이다. 민주주의가 창출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러다 보니 대행은 정치에 치이고 휘둘린다. 야당에 의한 견제가 특히 심하다. 그중에도 무서운 공격이 탄핵이다. 그동안은 없어서 몰랐다. 이번에 알게 됐다. 더불어민주당이 한덕수 대행을 탄핵했다. 직무 시작 열흘 만에 날아갔다. 그리고 87일 됐다. 헌재가 탄핵을 기각해 복귀시켰다. 그런데 하루도 안 돼 ‘한덕수 대행 재탄핵’ 얘기가 나온다. 24일 기자가 물었다.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으면 재탄핵을 검토하나.”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이 답했다. “속단할 수 없다.” 탄핵 성적 9전9패의 민주당이다. 대놓고 말하기 민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많은 언론이 다음 날 지면에 대행 재탄핵 얘기를 실었다. 복귀 하루 만에 정부를 휘감아 도는 공포다. 출발은 헌재의 24일 결정문이다. 151석을 대행의 탄핵 소추 요건으로 인정했다. 6명이 동의한 이유가 이렇다. “(대행은 대통령과 비교해) 상당히 축소된 간접적 정당성만 보유한다”, “권한대행 지위가 새로 창설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래 신분상 지위(총리)에 따른 의결 정족수를 적용해야 한다”. 대행의 권한을 제한적이라고 봤다. 현실은 알겠는데, 법률에 근거가 있나. 대통령에게만 있고, 권한대행에게 없는 권한?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엔 논리상의 어색함도 있다. 재판관 후보자 불(不)임명이 발단이었다. 한 대행이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 임명 권한이 대행에게는 없다고 본다.’ 그러자 민주당이 ‘권한 있으니 임명하라’며 탄핵했다. 헌재가 권한쟁의 심판을 했다. ‘임명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했다. 한덕수 대행이 ‘임명 권한·책임 없다’고 했고, 민주당·헌재는 ‘임명 권한·책임 있다’고 했다. 그랬던 헌재가 정족수에서는 달라졌다. ‘대행의 권한은 제한적’이라고 봤다. 소수 의견이 있다. 정형식·조한창 재판관이다. 절차 흠결을 이유로 탄핵을 각하했다. 둘의 논리가 이렇다. “권한대행자를 대통령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비상 상황에서는 탄핵 제도 남용을 방지할 필요성이 더욱 크다”. 그러면서 이런 비유도 했다. -현행법에서 차관은 탄핵 대상이 아니다. 그러면 차관은 장관직을 대행하면서 중한 위헌·위법을 해도 탄핵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된다-. 정치 현실과 법률 해석이 보다 명료해 보인다. 혹자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입장을 얘기한다. 151석 밀어붙인 부담을 덜어줬다는 것이다. 혹자는 민주당에 탄핵 무기를 쥐여줬다고 얘기한다. 홀가분하게 재탄핵할 근거를 줬다는 것이다. 헌재가 이런 계산을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 흔한 지라시 한 장 받아 본 적 없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결과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151석’이 더욱 개운치 않다.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광화문 차벽도 아슬아슬하다. 시위대는 법원까지 난입했다. 물리적 내전과 국가 위기가 경고된다. 싸우는 걸 보면 곧 망할 나라다. 하지만 이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대(當代)는 언제나 난세(亂世)라 했다. 당대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다. 결국 대통령 한 사람의 사건 아닌가. 곧 역사에 기록되고 정리될 것이다. 탄핵 정족수를 특별히 붙들고 늘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당대뿐 아니라 미래까지 끌어갈 기준이라서다. 헌법재판소는 판결이 아니라 결정을 한다. 판례가 아니고 결정례(決定例)·선례(先例)다. 미래에 미칠 구속력에서 판례의 그것과 다르다. 한번 내린 결정이라도 바뀔 수 있다. ‘151석 아쉬움’을 남겨 놓는 이유다. 언젠가 200석으로 바뀔 바람을 적어 두겠다. 김종구 주필

[경기만평] 9전 9패...

[사설] ‘탄핵에 이를 정도인가’, 윤 탄핵에 핵심문구 될 듯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이 기각됐다. 기각 5, 인용 1, 각하 2로 갈렸다. 한 총리는 즉시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복귀했다. 한 총리 탄핵은 기각 또는 각하 예상이 많았다. 실제 결과도 예상의 범주 내에서 나왔다. 사실 관심은 윤 대통령 탄핵 가늠이었다. 한 총리 결정문으로 짐작이 가능할 거라고 봤다. 실제로 24일 오후부터 각종 해석이 쏟아지고 있다. 논리를 빗대 진영의 바람을 이끌고 있다. 전망이라며 쓰지만 사실은 희망이다. 엄연히 다른 사건이다. 혐의 속 역할이 다르고 법률이 보장하는 신분이 다르다. 비교해서 결론을 추론할 연관성이 박약하다. 굳이 살펴볼 가치가 있다면 큰 틀의 원칙이다. 재판관들이 밝힌 의견에 깔려 있는 접근 기준이 있다. 판결의 일관성 또는 개인적 소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판단의 근거나 기준을 담아내는 각자의 그릇과도 같다. 5(기각), 1(인용), 2(각하)라는 결론만으로 분석될 순 없다. 결론에 이르는 논리가 중요하다. 정형식·조한창 재판관은 각하 의견을 냈다. 법률이 정하는 절차를 엄격히 해석하고 있다. 본안 속 혐의는 판단하지도 않았다. 윤 대통령 측에서는 헌재 불공정을 문제 삼았다. 내란죄 제외, 기일 일괄 지정 등이다. 같은 기준으로 살필 가능성이 있다. 정계선 재판관은 혐의가 인정되고 파면해야 할 정도라고 했다. 내란 동조, 재판관 임명 보류 등 5개 혐의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의 윤 대통령이다. 짐작되는 방향이 있다. 기각한 김복형 재판관은 혐의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탄핵 조건을 가장 까다롭게 따졌다. 주목되는 것은 나머지 기각 4인의 의견이다. 결론에 이르는 논리가 주목할 만하다. 한 총리에 대해 ‘헌법 또는 법률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헌법 재판관 후보자 3명의 임명을 보류한 부분이다. 그런데 결론은 기각이다. 탄핵에 이를 정도로 ‘중대하지 않다’거나 ‘단언할 수 없다’는 이유다. 위법과 탄핵을 분리해서 본 것이다. 윤 대통령의 운명은 ‘6인’이다. 찬성이 ‘6인 이상’이면 파면, ‘5인 이하’면 복귀다. 한 총리 결정에서 큰 틀의 방향은 비쳤다. 중간 지대에서 형성될 4~5인의 향배가 관건이다. 이들의 의견에 등장한 것이 ‘불법의 크기’다. ‘위험·위법한 행위가 인정된다’는 전제가 같더라도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탄핵에 이를 정도’라면 인용, ‘탄핵에 이르지 않을 정도’라면 기각이다. 감사원장의 탄핵심판에서도 같은 논리가 등장했다.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사들에 대한 심판에서도 있었다.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고 그 때문에 논쟁할 여지도 적다. 어찌보면 법원과 구별되는 가장 헌법재판소적인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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