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 한가운데로 작은 도랑이 흐른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울려 빨래도 같이하고 멱도 감고 오손도손 살아갔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도랑의 폭이 점점 늘어만 갔고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도랑이 넓어지는 이유를 남 탓이라고 한다. 도랑은 점점 넓어져 이제 도랑을 건너려면 다리가 필요했고 도랑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좌우로 옮겨가야만 했다. 점차 도랑의 폭은 강의 폭으로 변하고, 전에 만들었던 다리는 없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도랑 주위에 살던 사람들은 이 마을은 이어져야 한다며 열심히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양쪽 끝에 살던 사람들이 도랑이 넓어지게 된 건 건너편 사람들 때문이라며 그 사람들과는 절대 같이 살 수 없다며 어렵게 놓은 다리마저 끊어 버리려 했다. 더욱 억울한 것은 도랑 주위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강제로 갈라졌는데 그마저 건너편 사람들과는 절대 살지 못한다고 선언하라고 한다. 저 건너편에는 내 형제와 친구들이 있는데도 그들은 강제로 선택을 강요당한다. 마침내 있던 다리마저 부숴버리고 그들은 서로 영원히 단절하고자 한다. 머지않아 어찌 된 영문인지 강폭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시 옛날처럼 폭이 줄어들어 도랑으로 변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후 이 마을이 어찌 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방향이 서로 반대여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나무와 돌도 아니고 식물이며 자라는 방법도 거의 비슷한 제일 가까운 축에 속하는 두 식물이다. 이번엔 네가 먼저 올라가고 다음에 내가 올라가고, 그 다음에는 순서를 바꾸면 싸울 일도 다툴 일도 없는 속칭 ‘절친’인 사이인 것이다. 결국 어찌 보면 갈등은 가장 친한 사이끼리 벌어지는 일이다. 다시 보지 않을 만용, 세상 다 필요 없고 나 혼자만 산다는 독불장군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퇴로는 열어 두자. 나라가 어렵고 갈등 천지다. 어느 동네 이야기처럼 있는 다리마저 부숴버리는 바보짓을 하지 말자. 갑자기 다시 훅 다가올, 강폭이 줄어들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 건너에는 형제자매, 친구, 스승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곧 벚꽃이 필 것이다. 우리는 환호할 것이고 벚꽃이 지면 잊을 것이며 어느 나무가 벚나무인지도 모르고 또 1년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삶인 것이다. 사랑하며 살자. 그 기한도 기껏해야 100년인걸....
앉은부채의 꽃말은 ‘내버려두세요’다. 이른 봄 산에서 꽃을 찾으려 하면 꽃은 아직 핀 게 없고 낙엽이 깔린 바닥에 앉아있는 듯 특이한 모양새를 한 앉은부채를 만나볼 수 있다. 곰이 겨울잠을 잔 뒤 이 풀을 먹고 묵은 변을 본다 해서 ‘곰풀’이라고도 한다. 꽃도 특이하지만 꽃피고 나오는 부채처럼 넓고 시원스러운 잎도 관상의 포인트다. 이른 개체는 겨울에도 자주색 꽃이 피는데, 이 꽃냄새가 생선 썩은 것 과 비슷해 맷돼지 같은 산짐승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와 뿌리를 캐 먹는다. 산골짜기의 습기가 유지되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농촌진흥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간의 바람벽에서 노란 기침하는 복수초 꽃눈은 봄앓이 한창이다 수 많은 발길질에 생채기 나는 살 닿는 것 밀어내는 시름 속에 넓고 가까웠던 자리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다 심호흡 다시 한번 해법 찾는 몸부림 삿갓구름 미소 지으며 바람 타고 흐르는 은행나무 우듬지 둘은 이어진다 빗나간 잔설 아래 움이 돋고 노란 하품하는 생강꽃 홍태환 시인 월간 ‘시’로 등단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2025년 봄, 국내 대학가의 풍경은 자못 이채롭다. 전국 대다수 대학가 처음으로 무전공 입학생을 수백명씩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무전공 입학은 작년 이맘때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교육 분야의 이슈 가운데 하나였는데 어느덧 대학에는 특정 전공을 정하지 않은 대학생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문과대학, 공과대학 등의 계열 구분이 전혀 없이 완전히 자유전공학부 학생처럼 입학한 유형의 학생들도 있고 특정 계열은 정하고 들어온 무전공 입학생도 있다. 현 정부가 애초에 이 입학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미래 융합형 인재 육성’을 위해서였다. 산업계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융합 기술의 혁신을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치열한 입시 경쟁 교육으로 중·고등학교 때 적지 않은 학생이 전공 탐색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도 이 제도 추진의 또 다른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제안 당시부터 여러 반론이 있었다. 무엇보다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무전공 입학생들이 결국 특정 인기 학과로 몰릴 게 뻔하고 그로 인해 인문학이나 순수과학 분야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게 가장 큰 우려였다. 그리고 그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입학 직후 무전공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공 선호도 조사 결과 상경대와 공과대 등 특정 전공으로의 쏠림 현상은 매우 심했다. 또 1년 후 무전공 입학생들이 전공을 정하고 나면 이들은 기존 전공별 입학생들과 학습 내용에 아무 차이가 없어진다. 융합 인재 육성이라는 애초의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물론 무전공 입학제도는 잘만 보완하면 좋은 제도로 안착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항이 고려돼야 한다. 첫째, 계열 구분 없이 모집하는 무전공 입학제도의 경우 명실공히 융합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적어도 완전히 다른 두 계열의 학문, 예컨대 철학과 컴퓨터 공학, 국어국문학과 언론학 등을 필수적으로 심화 탐구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둘째, 계열별로 입학하는 학생들도 계열 내의 여러 학문을 두루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특정의 협소한 전공만이 아니라 인접 학문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인재로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십수년간 끊임없이 제안되는 새로운 교육제도의 시행을 경험하면서 갈수록 깊이 절감하는 문제의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현재의 이런저런 교육 혁신 제안이 과연 정말 우리의 교육을 혁신으로 이끄느냐다. 우리 교육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누구나 인지하듯 어릴 적부터 거의 ‘아동 학대’ 수준에 가까운 ‘지옥’ 같은 입시경쟁이다. 이 문제를 상당한 수준에서 완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육의 혁신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상공업사회에 단지 적응할 뿐인 인간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주된 목표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교육이 현존 경제 질서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지만 시장경제의 ‘노예’가 돼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최우선 목적은 시장의 융성이 아닌 인간을 인간답게 기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경기경제자유구역 지정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도내 5개 지방자치단체가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수원시는 한국형 실리콘밸리 내 첨단과학기업과 연구소를 계획했다. 광명시는 인공지능(AI)과 미래차가 중심이다. 양주시는 경기양주테크노밸리와 은남일반산업단지를 묶어 준비했다. 의정부시는 미디어콘텐츠·AI·바이오메디컬을 꿈꾼다. 파주시는 미디어콘텐츠와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꾸렸다. 정성껏 만든 청사진이다. 경제자유구역은 기업 집적을 위한 특별 우대 지역이다. 조세 감면, 투자 유치 지원 등 혜택이 주어진다. 산업생태계 육성을 통해 지역 발전을 견인한다. 고용창출과 생산성 향상이 기대된다. 지자체로서는 유치에 절박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단체장들의 정치적 셈법도 있다. 지방선거가 1년여 앞으로 다가왔다. 현 상태의 경기경제자유구역 유치는 그 자체로 치적이다. 물론 시민에게도 나쁠 것 없다. 4월 중으로 선정될 예정이다. 모두 장점이 있고 특색이 있다. 파주시는 LG디스플레이 유치 성공의 역사가 있다. 의정부시는 반환 미군공여지 활용이라는 의미가 크다. 양주시는 제2순환고속도로와 서울~양주 고속도로 등이 장점이다. 광명시는 3기 신도시 등 인적 인프라가 자산이다. 수원시는 산학연, 산업생태계가 다 뛰어나다. 한 곳을 정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당장의 여건만 놓고 보면 등수가 매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심각한 맹점이 생긴다. 경제자유구역의 목적이 뭔가. 미래 산업 육성이다. 미래 산업 본거지를 만드는 일이다. 이 부분에서 당연히 고려돼야 할 가치가 있다. 지역 균형 발전이다. 낙후된 지역을 배려하는 미래 투자가 돼야 한다. 지금 경기도에는 세 곳의 경제자유구역이 있다. 모두 경기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북부 10개 시•군에는 한 곳도 없다. 370만 주민의 미래 터전이 없는 셈이다. 다른 곳도 아닌 경기도가 선정하는 작업이다. 감안돼야 한다. 때마침 ‘민선 8기 경기도’의 역점 사업도 경기북부특별자치도다. 경기북부 대개발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이 정책의 핵심 가치도 균형 발전이다. 이번 선정에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물론 경제자유구역의 성패도 중요하다. 텅 빈 유령 특구를 만들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까지 포용하는 선택으로 가야 한다. 철저하게 성공 확률로만 선정한 곳과 미래 균형발전을 대폭 반영한 곳을 복수로 선정하는 방법이다. 복수 선정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들린다.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50대 여성이 경찰에 형사 입건됐다. 청소용역업체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공원 등을 청소하는 게 평상시 업무다. 죄목은 야생동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야생 비둘기 11마리를 죽게 했다는 혐의다. 살충제가 든 생쌀을 비둘기에게 먹였다고 한다. “비둘기가 청소하는 데 방해 돼 살충제를 먹게 했다.” 여성이 경찰에서 밝힌 범행 이유다. 처벌로 징역형 또는 벌금형이 정해져 있다. 일반 형사사건과 같이 평생 전과로 남게 된다. 여성의 ‘비둘기 살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현행법으로 금지된 범죄 행위 맞다. 하지만 범행에 이른 현실을 토론하지 않을 수 없다. 2023년 9월 광주에서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 공원에서 비둘기 21마리가 죽은채 발견됐다. 사체에서 농약에 쓰이는 ‘카보퓨린’이 발견됐다. 누군가 ‘비둘기 살해’를 저지른 것이다. 범행의 동기는 이번과 같다. 감당할 수 없는 폐해 때문이었다. 청소 직원, 시민들이 힘들어한다. ‘징글징글하다’고 말한다. 비둘기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유해야생동물이다. 2009년 6월 환경부가 정식으로 지정했다. 배설물이 주는 심각한 질병 우려도 학계에 보고됐다. 뇌수막염, 조류 독감, 피부병 등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비둘기의 서식 공간이다. 공원, 놀이터, 주택가 등 인간의 생활 공간과 겹친다. 개체수가 늘면서 이제 아파트 내부까지 파고든다. 아파트 베란다의 에어컨 실외기가 대표적이다. 이쯤 되면 퇴치를 위한 공적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이게 없다. 공원 곳곳에 지자체가 내건 경고가 전부다. ‘비둘기 먹이 제공 금지’라는 권고문이다. 이마저 과태료 부과 등의 강제 규정이 없다. 이렇다 보니 남는 게 시민들의 자력구제다. 시중에서 조류기피제로 처치해야 한다. 개인이 구매해야 한다. 정도가 심하면 방제 시공을 한다. 조망 및 PE망을 설치하거나 연무소독을 한다. 전문 업체까지 등장했는데 경비 부담이 상당하다. 유해동물 지정은 국가가 하고, 처치는 개인이 하는 셈이다. 포획해 처분하는 시행 규칙이 있기는 하다. 시장·군수·구청장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비둘기의 경우는 멧돼지 등과 다르다. 개체수가 천문학적이고, 서식 장소도 시민 생활 공간과 겹친다. 애초부터 시민 한두 명이 시도할 일도 아니다. 행정이 나서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없다. 격무에 지친 아주머니가 비둘기를 죽게 했다. 유해동물 죽인 죄로 처벌받고 전과자 될 판이다. 비둘기 배설물이 공원을 덮어 가는데 어쩌라는 건가. ‘비둘기 살해 사건’에 대한 토론을 제안한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푸른색은 물론이고 쪽빛에 가까운 바다 빛으로 보인다. 바닷속에서 올려다보면 흰 수면으로 보이는 분위기가 창백하다. 대표적 등푸른 생선인 고등어 얘기다. 서민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누가 뭐래도 국민 생선이다. 삼치, 참치 등과 같은 과에 속하는 이 녀석은 밥상에 조림이나 구이, 찌개 등으로 변형돼 잃은 입맛을 되찾게 해준다. 문어나 돔배기, 가자미 등과 같이 제수용으로도 쓰인다. 몸 길이는 40㎝가 넘는다. 10~22도의 따뜻한 바다를 좋아하는 회유성 어종이다. 세계적으로도 널리 분포한다. 치어 때는 플랑크톤을 먹고 성어는 멸치 또는 작은 물고기를 주 먹이로 삼는다. 고등어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 때문에 생산지와 소비자 가격이 오르면서 밥상 수산물 물가도 뛰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수산업관측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고등어 생산량은 5천608t으로 지난 1월에 비해 72.5%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및 평년과 비교해도 각각 38.1%, 10.9% 줄었다. 관련 업계는 어황이 좋지 않고 기상으로 인한 조업일수 감소의 영향으로 생산량이 전달보다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값도 덩달아 껑충 뛰었다. 지난달 산지 가격은 ㎏당 5천937원으로 생산량 감소 영향으로 전달보다 28.4% 올랐다. 도매 가격도 전달보다 6.7% 상승했다. 소비자가격(신선냉장)은 ㎏당 1만3천620원으로 평년과 작년 대비 각각 21.8%, 23.3% 올랐다. 불현듯 198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 ‘어머니와 고등어’ 노랫말이 떠오른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어머니 코 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소금에 절여 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 걸”.
산불이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다. 경북 의성과 안동, 경남 산청·하동, 울산 울주 등 전국 곳곳에서 대형 산불이 잇따라 발생해 순식간에 수만㏊의 산림이 잿더미로 변했다. 희생자가 늘어나고 수만명이 대피소로 몸을 피해야 했다. 산림청과 지자체가 모든 장비를 총동원했으나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다. 투입된 전국의 산불 진화 헬기들은 동시다발로 발생한 산불을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난 25일 의성 산불에 투입된 헬기가 추락하며 조종사 한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국가 재난 상황을 지켜보며 한 비행기의 존재가 절실하게 떠올랐다. ‘고정익 소방항공기’. 헬기처럼 회전하는 날개가 아닌 고정된 날개를 가진 항공기로 해외의 산불 진압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기다. 고정익 소방항공기는 헬기보다 훨씬 강력한 물 투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강풍이나 급변하는 기상 상황에서는 헬기의 화재 진압 투입이 어려워 산불의 초기 차단 및 확산 방지에 한계가 있다. 반면 고정익 항공기는 강한 바람에도 운용이 가능하며 헬기에 비해 넓은 작전 범위와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그 비행기가 있었더라면 이번 산불 진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소방항공기 도입 요구는 이전부터 있었다. 21대 국회에서 의정부를 지역구로 둔 소방관 출신 오영환 의원은 고정익 항공기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그는 지난 2023년 5월 국회 소방청 현안질의에서 “고정익 항공기, 즉 비행기를 활용한 산불 진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소방청을 설득하는 데 힘썼다. 또 21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에서는 ‘산불진압 소방항공기의 특징과 효율적 운용방안 연구’라는 정책자료집을 통해 고정익 항공기 도입의 당위성을 재차 역설했다. 고정익 항공기는 국내에서 잠시 도입한 적이 있다. 2012년 경남에서 헬기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저수 능력을 갖춘 캐나다산 기종의 고정익 항공기를 연간 120일간 20억원에 임차 도입한 바 있었다. 하지만 비싼 임대료와 야간 산불 진화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계약이 중지됐다. 고정익 항공기가 국내 실정에 안 맞을 수 있다. 항공기가 비행하며 물을 담을 만한 강이나 호수가 마땅치 않아 공항에서 소방차를 이용해 물을 받아야 하는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산이 많은 국내 지형에는 항공기보다 헬기가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국내에는 고정익 소방항공기가 없다. 도입 시도는 있었다. 지난해 산림청이 8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군 수송기에 물탱크를 부착하는 방식을 추진했으나 국방부의 협조를 얻지 못해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대형 산불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최악의 산불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다. 이제는 고정익 소방항공기 도입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다. 소방항공기를 국가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부처 간 협력을 통해 예산과 운영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고정익 비행기 도입이 힘들다면 담수 능력이 큰 산불 진화 헬기를 더 많이 도입해야 한다. 대응을 미룬다면 산불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가 된다. 재난은 예고 없이 오지만 대응 체계는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3일, 우리 국민은 무장 계엄군이 국회를 침탈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위헌·위법한 내란 사태는 독재의 망령을 떠올리게 했고 우리 사회가 피로 지켜온 민주주의를 되돌아보게 했다. 불법 계엄 일주일 후, 한강 작가는 노벨 문학상 수상을 통해 폭력과 불평등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계기를 만들어 줬다. 마치 밤도둑처럼 들이닥친 이번 위기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회복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확대는 우리 사회에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했다. 소득과 자산, 기회의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생활고에 절망한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잇따랐다. 2014년,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70만원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진 ‘송파 세 모녀’ 사건은 복지 사각지대의 위험성을 충격적으로 드러냈다. 우리는 이런 비극을 끝낼 근본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또 우리나라는 디지털·AI 혁명, 국제질서 재편, 저출생·고령화, 저성장, 기후 위기 등 전례 없는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초과학기술이 몰고 올 새로운 불평등과 불안에 우리는 어떤 가치와 정책을 바탕으로 대응해야 할까. ‘기본사회’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다. 기본사회는 모든 국민의 기본적 삶을 보장함으로써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고 실질적 자유를 달성하는 사회를 뜻한다. 기본사회는 ‘기본소득’의 범위를 뛰어넘어 주거·금융·교육·의료·공공서비스 등 삶의 필수 영역을 국가가 책임지는 ‘기본서비스’, 그리고 경제적 가치를 폭넓게 순환시키는 ‘사회적 경제’를 아우른다. 필자의 정치적 비전인 ‘모두를 위한 나라’ ― 사는 곳, 세대, 성별,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와도 일맥상통한다. 지난 3월12일, 민주당이 기본사회위원회 2기 발대식을 열면서 정책 논의가 본격화됐다. 필자는 경기도 기본사회위원장으로서 도내 31개 시·군의 다양한 여건과 필요를 반영한 ‘경기도형 기본사회’ 모델을 숙성하고 있다. 이미 경기도가 시행한 ‘청년기본소득’은 청년들의 정신건강과 행복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전남 신안의 ‘햇빛 연금’은 신재생에너지의 개발이익을 주민과 공유해 지역 인구 증가에 한몫했다. 전국 지방정부가 추진해 온 많은 정책의 성과들은 기본사회의 가치와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기본사회를 현실화하려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국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한다. 사회안전망 강화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정책을 입체적으로 설계해 더는 경제적 약자가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고, 실패해도 다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산층을 보호하고 양극화를 예방하는 일석삼조의 정책이다. 우선 과제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다. 경기도가 앞장서겠다. 경기도가 하면 대한민국이 할 수 있다. 시민 참여형 정책으로 공감대를 넓히고 증거 기반 정책 추진으로 성공 가능성을 높이겠다. 지역 실험의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small betting, scale up’의 방식으로 모범 사례를 만들겠다. 기본사회로의 이행을 통해 더욱 튼튼한 민주주의와 민생 회복을 함께 구현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12·3 비상계엄 사태의 트라우마를 조속히 치유하고 사회 통합을 촉진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드라마 ‘오징어게임’처럼 서로를 해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극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를 넘어 협력과 공존의 정신에 기초한 ‘지속가능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본사회의 여정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