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문화유산]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9호 의정부2동성당

구한말 우고리(양주군 광적면)와 신암리(연천군 남면)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형성됐다. 1927년에 개성본당의 신암리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34년에는 덕정리본당(양주군 회천면 덕정리 역전 위치)이 완공되었는데, 이것이 의정부성당의 전신이다. 본 성당은 석조로 구축되었다. 조적조 외벽의 경우 대부분 적벽돌이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화강석을 사용한 예가 있다. 의정부2동성당의 경우 공사비 견적 결과 적벽돌보다 석재가 더 저렴한 것으로 판정되어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본 성당은 회천면 덕정리 돌산에서 채석하여 의정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석공들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그 무렵에 지어진 양주군청사에서도 석재의 크기나 다듬기 등에서 동일한 수법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195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성당건축은 내부의 열주가 사라지고 수직 수평의 분절이 약화되어 일제시대보다 훨씬 단순하고 일률적인 경향을 갖지만 외관 특히 종탑과 정면의 양식적 형태와 상세는 고수된다. 이러한 유형을 양식 변형 양옥(洋屋)성당이라고 하며, 특히 전쟁을 거치면서 교회에 대한 천주의 보호, 즉 견고함이 새삼 강조되어 석재를 사용하여 성채와 같이 표현됐다. 문화재청 제공

[빛나는 문화유산] 사적 제128호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했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로 유명세를 떨쳤다.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 곳서 수도생활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 데 13년이나 걸렸다. 유명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절이 소멸됐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 등이 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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