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 선생 고택은 선생의 아버지 대에 지은 집으로 약 200여 년이 되었으며, 선생이 태어나서 일생을 보낸 곳으로 최익현홍재학 등 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던 곳이다. 이항로는 순종 8년(1808)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포기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3년(1866)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전쟁으로 맞설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사람 중의 하나로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건물은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채와 대문간에 붙어있는 집으로 주로 하인들이 머물던 행랑채가 있다. 또한 집의 안쪽에 있으며 ㄱ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안채가 있어서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다. 이곳은 지난 1980년 6월2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경기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노문리)에 위치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성종과 중종 때 무신인 황형(黃衡)의 묘가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야산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상계와 하계로 나눠져 있다. 상계에는 곡장이 없는 원형 봉분과 함께 부부의 묘가 좌위에 쌍분으로 조성돼 있다. 봉분 우측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모표가 있고, 앞에는 상석과 팔작지붕 형태의 장명등, 한 쌍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돼 있다. 묘역의 오른편 산 아래에도 신도비와 황형장군의 위패를 모신 장무사(莊武祠)가 자리잡고 있다. 황형의 자는 언평(彦平),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480년(성종 11년)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해 1486년(성종 17년) 무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라좌도방어사, 도총관, 지훈련원사,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또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돼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됐다. 문화재청 제공
박진 장군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밀양부사로 재직하던 1592년 당시 왜적이 침입해 부산ㆍ동래 등이 함락된 상황에서 싸우다 포위되자 밀양부를 소각하고 후퇴했다. 이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돼 나머지 병사를 모으고 별장 권응수에게 영천의 의병을 지휘하게 해 영천성을 탈환했다. 이어 안강에서 16개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을 공략해 성을 탈환했고 이듬해 독포사가 돼 밀양ㆍ울산 등의 싸움에서 이겼다. 이후 경상우도ㆍ전라도ㆍ황해도 등의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참판에 이르렀다. 묘역은 민간인 통제선 안인 경기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 149-2번지에 위치했다. 묘 앞에는 묘비를 받치는 사각형의 기대만이 남아 있으며 그 앞으로 상석과 근래에 설치한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다. 묘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후기 장군 김취려의 묘소가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에는 원형의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이 갖춰져 있고, 하단 부분에는 종친회가 건립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취려는 고려 후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이며, 음서(蔭敍)를 통해 정위(正尉)에 임명됐다. 그의 업적으로는 1216년 거란군이 청천강 북쪽을 약탈하자 앞장서서 싸웠고, 1219년 2월에는 강동성(江東城)을 함락하고, 거란군을 완전히 무찔렀다. 공로를 인정받은 김취려는 1232년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올랐고,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다.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배후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총길이 1천925m인 이성산성과 성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주관으로 지난 1986년부터 1999년간 7차에 걸쳐 실시됐다.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천352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 출토 토기들과 유사해 통일신라토기로 판명되며 신라가 5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역사ㆍ학술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가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고종 4년(1866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고, 고종 11년(1874년)에는 사신을 수행해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돼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고종 12년(1875년)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서쪽 지역에 파견돼 지방 관원들과 민생을 살피는 암행어사가 됐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처형된 최영(13161388) 장군의 묘소다. 부인 문화 유씨와의 합장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그는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과 공민왕 3년(1354) 장사성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해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정벌 계획을 세워 우왕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왕 14년(1388) 이성계 등의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어 선친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했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형적양식적 특성을 볼 때 이르면 13세기 전반 늦어도 중반 사이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다른 지역에서 이전해 온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청련사의 주불로 예경되었던 것으로, 몽고병란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에서 1270년 사이 개경의 수준 높은 조각 장인이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조성기나 중수기 등 불상제작과 관련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13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가깝다. 불상 특징은 단정하고 우아한 상호, 단아하고 세련된 조형미, 완급 조절이 잘 표현된 옷주름 등 세련되고 품격 높은 고려시대 불교 미술의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사암 정대년(15071578)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대년은 중종 27년(153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조 11년(1578)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에는 영지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 등이 적혀 있으며 부인의 집안과 성품, 자손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이 지은 비문을 새기려 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실행치 못한 것을, 뒤에 병조참판 오준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의 정 3품 벼슬) 김광현이 쓴 비명칭을 받아서 증손인 양우양필 형제가 세웠다. 비 뒷면에는 이러한 사실과 자손 170명의 명단을 충청도관찰사 정양필이 적어, 예조정랑(예조의 정 5품 벼슬) 유시영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제공
평산 신씨 종중 묘역(平山 申氏 宗中 墓域)은 입향조(入鄕祖) 신영이 처음으로 터(인천 대곡동 산 120-1)를 잡았고, 현재 후손 4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 묘역은 서남에서 동북향으로 흘러내린 야산 구릉지에 4기의 무덤이 층을 이뤄 조성돼 있고, 묘역 맨 위에는 빙부, 빙모의 묘가 설치돼 있다. 아래로는 이간공의 둘째 승서, 넷째 광서의 묘가 있고, 그 아래는 모두 이간공의 자손 묘가 있는 등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묘역의 원형을 잘 유하고 있다. 신영(申瑛)은 연산군 5년(1499년)부터 명종 14년(1559년) 시절 조선 문신이며, 자는 윤보(潤甫),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중종 11년(1516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중종 18년(152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됐다. 그는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화를 입은 스승(김식, 조광조)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다. 문화제청 제공
부계팔경도는 모산 유원성(1851~1945)이 일제강점기 안산 부곡 일대(現 상록구 부곡동237)의 팔경을 묘사해 그린 8폭 병풍이다. 총 8폭으로 그려졌는데 화모산 나무꾼의 피리소리 와 부곡 시냇가의 달빛 속 낚시, 숲속 봄날의 꽃비, 진벽루의 흰 구름, 지평 뜰에서 들려오는 농군들 노랫소리,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 우산에 지는 석양, 판천교 다리의 게잡이 불빛 등이 들어 있다. 부계팔경도는 각 경관마다 화제가 있고 독특한 필치로 산수와 전원 또는 기암괴석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전경도에는 지형산세지명까지 기록되어 있어 지명 연구 등 향토사적 자료가치가 매우 높으며, 1920년대 부곡 지역의 지형구조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인종 5년(1천127년) 화개산 북쪽에 지어진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향교는 조선 영조 17년(1천741) 조호신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 이후 1966년 복원 수리를 진행,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교동향교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 밖에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교동향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천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고려 충렬왕 12년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 상을 들여와 교동향교에 문묘를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서울의 각 읍에 조상이나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가 설치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해관문서는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인천감리서로 보낸 공문의 부본 12종으로 2종은 1886년, 10종은 1889년에 작성된 것으로, 인천 동구 화도진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이 문서에는 당시 인천세관장 대리 J.F.Schoenicke(한국명:사납기)의 친필서명 및 발송 연월일이 기재되어 있으며, 당시 인천해관 세무사의 직인을 제1면 좌측에 첨부했다. 이 문서는 사납기의 친필서명과 서명일시, 문서번호 등 명문이 뚜렷한 보기 드문 자료로 평가된다. 19세기 말 인천항 개항시기의 각국 조계지 조성과 관련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나라의 영문표기가 COREA로 표기된 것이 눈에 띄는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제공
오산시 궐리사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으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정조 17년(1792)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 3칸ㆍ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서 조선 후기 사당형식을 잘 보여 주는 곳이며,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ㆍ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으로, 사적 제370호로 지정됐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강화 가릉은 개경의 왕릉과 비교할 때 형식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규모가 작은 편이다. 능역은 가로 11m, 세로 14m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석실이 존재하는데, 석실 내에 부장대는 없고, 벽화의 흔적이 존재하지만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다.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경기도 여주에 있는 이 불상은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있는 높이 1.7m의 석조미륵좌상이다. 민머리에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에는 반쯤 감은 눈, 오똑한 코, 풍만한 양 볼과 짧은 귀가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주름과 가슴에 묶인 띠매듭은 정교하게 묘사돼 있지만 둔탁한 편이다. 무릎은 신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양 발목 사이에는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대좌는 상ㆍ중ㆍ하대로 구성돼 있는데, 상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돼 있고 8각의 중대석에는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4각형의 원만한 얼굴, 넓고 당당한 어깨, 둔탁한 옷주름의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옛 대화조(大和組) 사무소는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인천항에서 조운업(하역업)을 하던 하역회사 사무소 건물이며,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 위치하고 있다. 인천등록문화재 제567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가난한 조선인 인부들이 드나들던 개항 시절의 하역회사 사무소 겸 주택으로 사용한 공간으로, 근대 일본 점포겸용주택의 하나인 정가(町家, 마찌야) 유형의 건물이다. 2011년,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았던 지금의 카페 주인이 건물을 매입하면서, 옛 건물은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적인 정가 양식 건물은 1층에 상점(영업장), 2층에 주거공간을 배치하는 지상 2층 구조이지만, 이 건물은 한 층을 더 설치하여 1층에 사무실, 2~3층에 주거공간을 배치한 지상 3층 규모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인천에 남아있는 정가 양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인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역노동자의 노동력착취의 현장으로써 역사적 가치도 크다. 문화재청 제공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으로, 이 부도는 오봉사터에 자리잡고 있다. 오봉사는 신라 때 창건한 사찰로, 대규모를 이루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현재는 건물에 쓰였던 돌, 부도, 탑비만이 남아 절터를 지키고 있다. 부도는 직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종모양을 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높이 2.5m, 둘레 4m로 보기드물게 규모가 크며, 응회석(凝灰石:화산 분출 때 나온 재나 모래가 엉겨 생겨난 암석)으로 만들었다. 바닥돌은 윗면에 1단의 받침을 두어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연꽃을 새겨 장식했다. 꽃봉오리 모양을 한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탑신과 한돌로 조각한 것으로, 이곳에도 연꽃무늬를 새겼다. 부도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의 조각수법과 조형방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이승훈(1756~1801)의 묘이며, 인천시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 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1785년 서울 명동의 역관집안 출신인 김범우의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비록 몇 차례 배교했으나 조선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던 이승훈의 유해는 만수동 남동 정수장 뒤편 초곡산에 묻혔다. 1981년에는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 만이 그의 아들 택규, 신규의 묘와 함께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대불정다라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다라니 중 하나로 대불정여래가 마음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다라니를 모은 것을 진언집(眞言集)이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대불정다라니등 5종의 다라니를 모아 편집한 오대진언집 이 널리 유통되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첩장의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5.6㎝, 가로 8.8㎝이다. 간행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판각한 글자가 많이 닳고 인쇄가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 새기고 조선초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