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칠거지악

옛날에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었다는 일곱가지 사항 七去之惡이 정치판에도 등장했다. ‘아나기(아줌마는 나라의 기둥)’라는 시민단체에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하겠다는 이른바 ‘국회의원후보 칠거지악’이다. 자동차 문을 비서가 뛰어와서 열어주어야 헛기침하면서 내리는 후보가 칠거지악의 첫번째이다. 사방에 ‘사람 병풍’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도 칠거지악 후보의 하나이다. 이들은 어딜 가든 자신이 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소 주민을 위해 한 일도 별로 없으면서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들 앞에 나타나는 후보도 마찬가지다. 현역의원이라고 해도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후보이다. 합동유세장에서 자기 연설을 마친 후 다른 후보의 연설은 들을 생각도 않고 철수해 버리는 후보나 연단에 올라서자 마자 상대 후보를 헐뜯는 데 제 정신을 못차리는 후보도 칠거지악에 속한다. 국회의원후보의 지악이 어찌 ‘아나기’가 내놓은 것 뿐이겠는가. 근래 정치 고수라는 위인들이 이 동네 저 동네로 구걸하다시피 다니면서 내뱉는 지역감정 유발 언행은 이제 환멸까지 느끼는 지악이다. ‘내 탓이오’라고 사죄하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지만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이면 다른 당, 상대방 탓이라고 목청 높이는 정치꾼들의 지악은 구렁이 처럼 징그럽다. ‘선생님’ ‘총재님’하면서 충성을 하는 척 하다가 별안간 뜻이 안맞는다고 돌아서서 독재자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의 지악 또한 지겹다. 도대체 국회의원이 왜 있어야 되는지, 유권자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 국회의원 노릇은 왜 하려고 하는지를 오늘날 정치판은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국회의원후보 칠거지악’이 아니라 ‘백거지악’이 되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청하

물러나는 교사들

얼마전 명예퇴직한 한 50대 초반의 한 교사가 “이젠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을 더 이상 안보게 돼 후련하다”고 사석에서 실토한 일이 있었다. 교권 붕괴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실례이다. 서울의 모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가 자신의 아들을 꾸짖은 교사를 교실로 찾아가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교사가 체벌을 한다는 이유로 제자가 스승을 경찰에 신고해도 놀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교사를 천직으로 알았는데 이젠 그만 두고 싶다는 중학교 선생님이 늘어난다고 한다. 학생들이 무섭다는 것이다. 꾸지람하거나 벌을 주고난 날이면 그 교사의 승용차에 날카로운 흠집이 생긴다고 한다. 1년 중 가장 보람을 느껴야할 ‘스승의 날’은 ‘촌지 받는 날’로 매도됐고 급기야 정년단축의 충격파까지 밀어닥치자 교사들은 ‘정 떨어진’교단을 서둘러 떠났다. 스스로 선택해 학교를 떠난 명예퇴직 교사가 2만여명이 넘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현상이다. 전국교사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76.6%가 ‘교직을 그만 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그거? 인간두 아니야! 걔 똘아이야! 죽여야 돼!”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 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큰 소리로 했다는 말이다. “누굴 죽여야 돼?” 물었더니 당당하게 “우리 담임요!”했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이다. 물론 전체가 이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모두 이렇다면 국가 장래가 아득하다. 절망적인 사회다. ‘우리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시는 분’으로 흠모했던 옛 스승관은 전설이 되었다. 많은 교사들이 왜 교단을 떠났으며 계속 떠나려 하는가. 과연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사인가, 학생인가. 정말 누구의 잘못이 더 많은가를 깊이 따져봐야 할 때다. /청하

春頌

우수경칩이 지나 봄을 맞은 대지가 훈기를 뿜어 꿈틀거리는 듯 하다. 물이 오르면서 새 생명을 싹틔운다. 꽃샘추위가 제법이지만 이젠 추워봤댔자 말그대로 꽃샘추위다. 봄이 꽃샘바람을 타고 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엔 들꽃이 많기로 유명하다. 들꽃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들나물 또한 많다. 달래며 돌나물이며 쑥은 대표적인 자연의 봄나물이다. 백합과에 속하는 달래는 땅속 깊이 박혀 잘못캐다가는 칼을 부러뜨리기 일쑤다. 돈나물은 돌나물이라고 하여 돌나물과, 쑥은 쑥과의 원조로 돌나물엽액은 해독제와 화상약제로 쓰기도 한다. 이 두나물은 대개 양념에 무쳐서 먹지만 특히 달래는 장에 버무려 장아찌, 돌나물은 물김치를 만들면 여간 맛깔스럽지 않다. 쑥은 국거리로 아주 제격이다. 춘궁기란 것이 있었던 시절엔 절량 농가에서 쑥밥을 해먹기도 했다. 봄나물은 춘곤증으로 입맛을 잃기 쉬운 사람들에게 밥맛을 돋워주면서 겨울을 나는동안 인체에 모자란 각종 비타민을 채워준다. 자연의 섭리는 이처럼 오묘하여 전에는 들판에 봄기운이 돌면 나물캐는 여인네들 모습을 볼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사라진지 오래다. 들나물도 비닐하우스로 재배하다보니 너도나도 그저 손쉽게 사먹을 생각들만 한다. 인간사가 어떻든 대자연은 어김없이 봄의 약속을 지켜주어 대지에 춘색이 완연하다.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白山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일본의 봉건시대 무사들이다. 가마쿠라시대 이후 막부(幕府)에서 정무를 보는 일본의 봉건 영주는 쇼우쿤(將軍)들로 많은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미대륙이 건맨들의 총잡이로 개척됐다면 일본열도는 사무라이들의 칼잡이로 개척됐다. 명치유신이 있기전까지 그랬다. 사무라이 이야기가 미국의 서부활극 이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한쪽 눈, 한쪽 팔마저 원수에게 잃은 불구의 몸으로 와신상담끝에 복수에 성공하는 ‘가다매 가다데 당개’천민 출신으로 명망있는 일류 사무라이가 되는 ‘미야모토 부사시’같은 얘기가 그러하다. 중세기에 프랑스의 ‘삼총사’같은 검귀족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는 일본의 막부시대 검귀족이라 할 수 있다. 신의와 의리를 검술 못지않게 중히 여겨 영주가 싸우다 죽으면 그를 따랐던 사무라이들도 자결하곤 했다. 제2차대전에서 패전하자 많은 일본인들이 단도로 할복한 것은 그같은 사무라이 조상의 할복자살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일본사람들은 지금도 사무라이 영화를 좋아한다. 사무라이 정신이야말로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정신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속칭 ‘짠짠바라바라’라고도 하는 사무라이 영화의 대부분은 이런 권선징악적 요소로 각색, 많이 미화되고 있다. 쌍칼을 찬 사무라이 모습들도 흥행성이 다분하다. 사무라이 일본영화가 들어오는 모양이다. 미국의 서부활극, 유럽의 검객영화, 중국의 검술영화와 또다른 맛이 있는게 사무라이 영화다. 그러나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일본의 현대 젊은이들도 사무라이가 되고 싶어하는, 즉 변할 줄 모르는 그들의 국민정서다. /백산

新婦

동상례라고도 하고 댕기풀이라고도 했다. 장가든 신랑은 신부집 동네 총각들에게 푸짐한 술상을 내야했다. 관례를 올리고 첫날밤에 들기전이다. 이 댕기풀이가 간단하지 않다. ‘처녀 도둑놈’(신랑)으로 시비를 걸어 신랑신부를 함께 묶어 매달기도 하고 방망이로 신랑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치기도 한다. 장난이 심해지면 신랑 장모되는 이가 발을 동동구르다 못해 나와서 ‘봐달라’며 애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같은 동네 총각들의 짓궂음은 동네 처녀를 빼앗아(데려)가는 신랑에 대해 심술기를 부리는 면도 있지만, 처음 본 신랑신부가 첫날밤에 어색하지 않도록 댕기풀이 장난을 통해 예비접촉을 갖도록하는 조상들의 슬기어린 민속이었다. 벌써 40∼50년전에 사라진 민속이다. 그땐 신부가 며칠지나 이윽고 신랑따라 시댁으로 신행갈땐 친정어머니와 차마 헤어지기가 서러워 곱게 단장한 뺨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친정어머니도 신부의 등을 다독거려주고는 돌아서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지금 세상에는 예식장에서 신혼여행 떠나기가 바빠 눈물 흘리는 신부란 볼 수가 없다. 부모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서 눈물짓는 친정어머니는 있지만 요즘 신부는 울기는 커녕 마냥 싱글벙글이다. 그렇다고 어찌 석별의 정이 없을까마는 시속이 달라진 것이니 그저 시집가서 잘 살면 그것이 친정어머니에 대한 보은이라 할 것이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한동안 뜸했던 결혼청첩이 또 늘어간다. ‘인륜지대사’를 경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역시 아름다운 것 같다. /백산

조선족

중국에서 한국인들은 ‘봉’이라고 한다. 지난해 중국에서 발생한 한국인 관련 사건·사고는 182건으로 전체 외국인 관련 사건·사고의 70%를 차지한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족 범죄의 배경에는 한국인들과 조선족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과 경시풍조가 깔려 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한국인들은 조선족 동포들을 무능력하며 게으르고 자기이익만 밝히는 존재로 보는 반면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인이 늘 거만하고 사람을 무시하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2차, 3차에다 폭탄주까지 마셔 싸움도 쉽게 일어나고 지갑도 털린다고 한다. 술에 취한 채 택시를 타고 객기를 부리며 베이징시내를 이리저리 돈다고 한다. 말이 통한다고 조선족 동포들을 너무 쉽게 믿는 경향도 사고를 부채질한다. 가라오케 여종업원의 숙소에 무턱대고 따라가거나 외국인의 숙박이 금지된 싸구려 민박집을 찾는 등의 경계심 부족도 사고를 초래하는 주요요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인들이 조선족 동포들의 반감을 부채질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라오케 조선족 종업원에게 월급이 얼마냐고 묻고는 그걸 월급이라고 받느냐는 투로 거만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을 말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 종업원이 월급을 달라고 하면, 네가 돈 쓸데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한국인 업주가 있다고 한다. 이 말 역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말이다. 물론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인 모두가, 또 조선족 모두가 이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한국인들의 조선족 경시풍조와 거만한 언행이 자주 범죄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조선족 범죄가 급증하는데도 자국민 보호는 안하고 팔짱만 낀채 방관하고 있는 정부 당국은 더욱 한심하다. /청하

이상한 나라

“3·1 인민봉기는 평양에서 김형직 선생이 몸소 키우신 애국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을 선두로 시작됐으며 삽시간에 서울 등 전국으로 퍼졌다.” 지난해 북한이 ‘3·1운동 80주년 평양시 기념보고회’에서 주장한 말이다. 북한의 이같은 주장은 3·1운동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33인의 민족대표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돼 점화됐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 상징성을 은폐하고, 3·1운동의 발원지를 평양으로 뒤바꾸어 놓고 있다. 역사 왜곡은 이뿐만이 아니다. 3·1운동의 성격을 노동자·농민·학생이 주체가 돼 일으킨 계급투쟁성격을 띤 ‘인민봉기’로 규정해 놓고,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을 ‘일제에 투항한 비겁자, 변절자’등으로 매도하는 대신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인 김형직을 주동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북한은 또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당시 대중을 이끌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전제아래 ‘김일성 대망론’을 등장시켰다. 이 ‘김일성 대망론’은 오늘에 와서 김정일정권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는데 북한의 언론매체들이 3·1운동과 관련한 글을 통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체혁명위업’을 계승 완성해 나가는 김정일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3·1운동이 발발한지 81주년이 된 오늘날 3·1절을 노는 날로만 생각하고 태극기 게양조차 안하는 사람들이 있는 남한도 한심스럽지만, 3·1운동을 김정일 총비서 일가의 ‘혁명전통성’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북한당국은 지나치게 해괴하다. 노동신문과 중앙방송, 평양방송이 3·1운동의 발발 배경과 의미를 평가하면서 역사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북한은 정말 ‘이상한 나라’다. /청하

민족혼

일본은 점점 극우화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1869년 메이지왕이 청일전쟁 노일전쟁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성역으로 도조 히테키 전총리등 2차대전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돼 있다. 지난해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참배객들로 하루종일 일장기가 빽빽하고 군가가 쾅쾅 울려퍼져 마치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노인 200여명은 해군복 차림으로 욱일기를 든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노인들뿐만이 아니다. 신세대 젊은이들도 ‘가미가제’ ‘인간어뢰’등 2차대전 당시의 자살특공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열광했다. 이런 가운데 각료들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빈도가 늘고 있다. 각료의 참배는 물론 개인자격이라고 하지만 이는 일본 사회의 극우화 정서를 말해준다. 일본은 비록 2차대전에 패했지만 과거의 약소국 침략을 합리화 하러들고 2차대전을 영웅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3·1절 81주년기념일이다. 1919년 3월 1일, 맨주먹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침략에 저항한 날이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3·1운동만세는 세계 역사상 보기드문 비폭력 저항운동의 장거로 기록되고 있다. 수많은 인명이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그 후손인 우리가 맞이한 어제의 3·1절은 무엇이었을까. 차라리 공휴일지정을 취소하는 게 옳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저 노는 날로만 인식해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민족혼이 퇴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열도는 저토록 자신들의 침략전쟁마저 ‘야마토 타마시’(일본정신)를 말하며 미화하는 것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안일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도 민족혼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분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제 당신집에 태극기를 달았습니까?’ /백산

고위공직은 理財家?

고위 공직자들은 거의가 이재에 능한 듯하다. 청빈이 자랑인 것만은 아니니 이재를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일정한 수준의 품위생활을 유지하자면 여력이 있어야 할터이니 부정이 아닌 방법으로 재주껏 하는 축재를 나무랄 것도 없다. 입법, 사법, 행정 등 3부 요인 1천64명의 재산변동상황이 신고된 가운데 1억원이상 는 사람이 129명이나 된다. 국회의원 가운데는 약 100명이 5천만원이상 늘었다. 수십억원, 수백억원이 늘어난 이들도 많은판에 5천만원, 1억원쯤 는게 무슨 대수냐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해에 단돈 300만원을 저축하려해도 덜먹고 덜쓰며 아등바등해도 목표달성이 어려운 서민들 입장에서는 꿈같은 얘기다. 먹을것 다 먹고 쓸것 다 써가면서도 한해에 서민들 몇집 살림에 해당하는 돈을 그뜬히 늘리니 사람은 지위가 높고 봐야 하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주식투자로 벌거나 은행이자가 늘려주었다는 점이다. 공무 다망한 가운데 어느틈에 주식시장을 잘 내다보는 머리를 써서 그토록 벌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도대체 은행에 얼마를 예금했길래 은행금리가 재산을 그토록 늘려주었는지도 궁금하다. 부익부빈익빈은 원래 가진것 없는게 원죄가 되는 서민들로서는 그래도 부지런히 일해 저축해야 하겠지만 살기가 무척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 공직자재산등록은 또 실제보다 적게 신고했으면 했지 실제보다 많게 부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산

여성 월간지

‘부인 간통사건후…’ ‘별거끝에 이혼한 ○○○’ ‘총각 ×××와 재혼하는 아무개’ ‘무성한 소문에 휩싸인 △△△, △△△추적’ ‘묻지마 ○○’ 여성월간지의 제목들이다. 어느 월간지랄 것이 없다. 월간지마다 거의가 이모양이다. 이도 대기업 언론사에서 발행하는 것들이다. 명색이 대 언론사에서 내는 여성월간지란 것이 연예인 일변도의 섹스 스캔들로 장식돼 있다. 가관인 것은 저마다 독점기사라는 것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저마다 ‘단독회견’으로 나와있다는 점이다. 언론도 기업이니만큼 상업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해도 너무하는 추태다. 이러면서 문화사업을 말하는 것이 대기업 언론이다. 적어도 교양지를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생활가이드의 여성잡지를 만드는 것이 대언론사다운 제작방침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도 제목부터가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저질내용들이다. 마치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도 저도 가리지 않는 듯 싶다. 여기에 광고투성인 것이 여성월간지의 특징이다. 광고 페이지마다 대중생활과는 거리가 먼 호화찬란한 의식주의 충동구매를 유발하고 있다. 언론사에서 잡지를 만드는 것부터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재벌기업의 문어발식 경영을 질타하는 언론이 자신이 자행하는 문어발식 경영의 잡지발행은 잡지전문분야의 업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사회공익에 합치된다면 또 모르겠다. 연예인 중심의 시시콜콜한 섹스스캔들 투성이의 저질 여성월간지는 오히려 여성을 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여성단체의 견해를 듣고 싶다. /백산

李仁濟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1동 7의6 김영삼 전대통령 자택이 요즘 문전성시다. 엊그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다녀갔다. 제4당이란 것이 민주국민당(가칭)으로 뜨면서 저마다 ‘도와달라’며 YS를 붙잡고 늘어진다. 한나라당 공천후유증이 잇따른 영남권 중진들의 탈당 사태로 파급된 가운데 PK정서장악을 위한 YS끌어안기가 한창인 것을 보면 정치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YS는 누구나 다 만나지만 절대로 안만나는 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한 사람이 이인제로 전해졌다. YS와 이인제로 말하면 집권중반에 후계자 거론시 ‘깜짝 놀랄만큼 젊은 사람’이라고 YS입으로 이인제가 암시됐던 사이다. 이인제도 경기도지사 당시 “나도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YS총애에 감격을 술회한적이 있다. ‘이인제의 정치스승’이니, YS의 ‘정치적 적자’니 한 말이 나왔던 게 이런 일이 있고 나서였다. 그랬던 것이 세월이 흐르고 흐른 지금에 와서는 YS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돼버린 것은 누구의 잘못일는지. 듣기로는 이인제가 국민회의(민주당)에 입당할 때 “망할 정당에 왜 들어가느냐”고 YS가 만류했지만 말을 듣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괘씸죄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인제가 상도동을 다녀가면 YS가 말하지도 않은 엉뚱한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YS로는 가지말라는 정당에 들어가 4·13선거대책위원장까지 맡고 있으니 무척 섭섭한 모양이다. 이에 아직 입을 열지 않는 이인제의 말없는 항변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백산

빨갱이

태극기와 나란히 걸린 북한의 인공기 사진과 함께 국화 ‘목란’을 설명한 초등학교의 ‘통일’관련 부교재가 나온 것을 보면 우리의 ‘햇볕정책’덕분인지 북한의 ‘식견있는 지도자’때문인지 아무튼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38명의 일선 초등학교 교사들이 집필한 이 ‘통일’부교재는 평양소녀 ‘해님이’와 서울소년 ‘해돌이’가 등장, 북한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는데, 1학년 교재는 해님이가 북한 언어인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고려의사(한의사)를 해돌이에게 가르쳐주는 만화도 곁들였다. 2학년 교재에는 북한의 2개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을 상세히 소개했으며 3·4학년 교재에는 ‘5장6기’가 들어 있다. ‘5장6기’는 북한 주민이 가지고 싶어 하는 이불장, 옷장, TV수상기, 사진기 등 생활필수품을 줄인말이라고 한다. 평양 시가지와 북한의 행정구역을 그림으로 자세히 보여주고 ‘북한을 바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통일의 장애’라는 문구를 달아 놓았다. “해님아, 사슬돈 잘 받아서 놀지 말고 인차 와야 한다”는 말은 5·6학년 교재에 있는데 ‘사슬돈’은 ‘거스름 돈’이고 ‘인차’는 ‘곧’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공장(양계장), 직승비행기(헬리콥터) 외동옷(원피스) 등 재미있는 북한 말도 실려 있다. 여기에 더 신선한 소식은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1월 26일 ‘통일’교재를 인정도서로 채택하고 학교장 재량에 따라 부교재로 선정, ‘통일’교육을 시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제 2000년대 어린이들은 북한 하면 얼굴이 새빨간 빨갱이, 또는 뿔이 몇개씩 달린 도깨비, 붉은 늑대를 연상하는 등의 불행은 겪지 않게 되었다. 이 ‘통일’부교재가 서울을 비롯 전국 초등학교에서 얼마나 채택될는지 궁금하지만 대북 교육은 적(敵) 개념이 아닌 ‘민족개념’의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청하

간과 쓸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우면 체면은 물론 이면도 안가리고 아무쪽이나 달라붙는 사람을 가리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간사한 사람을 질책할 때 ‘도대체 너는 간도 쓸개도 없느냐’고도 한다. 이 속담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학계에선 이 속담이 의학적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이 장기의 기능이나 위치를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이다. 간과 쓸개중 한 쪽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은 두 장기의 기능이 서로 다른 한쪽을 대체할 수 있을만큼 유사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실제 쓸개는 의학적 관점에서는 간의 복수장치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담즙으로 불리기도 하는 쓸개즙은 사실 쓸개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간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쓸개즙이 쓸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쓸개는 담즙을 저장하는 일종의 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진화학자들은 쓸개가 간이나 혹은 십이지장으로 연결되는 도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해부학적으로도 간과 쓸개는 밀접한 관계다. 쓸개는 간 바로 밑에 위치해 마치 간에 달라붙어 있는 듯 하다. 간과 쓸개의 이런 관계는 ‘간담이 서늘하다’는 등의 속담에서도 알 수 있고 ‘담력이 크다’ ‘간 큰 사람’이라는 말에서 보듯 담과 간은 사실상 비슷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서양에서는 ‘담즙질’유형은 ‘의지에 강하고 불같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4·13 국회의원 선거 후보공천·낙천 후유증으로 탈당하거나 헤쳐 모여를 거듭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라고 비유해도 욕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청하

노벨평화상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시작된 노벨상이 내년이면 제정 100주년을 맞는다. 수상자 선정 등에 전혀 비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위력이 막강한 노벨상 수상자를 한국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가까운 일본은 지금까지 과학분야 5명, 문학 2명 등 7명의 수상자를 냈으며 중국도 과학분야에서 4명이 수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2000년도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에 오른 것이 공식 발표되면서 한가닥 희망을 안겨주고 있으나 후보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등 전세계 1백12명의 인사와 32개 단체나 된다고 한다. 김 대통령이 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것은 이번이 14번째인데 평화상의 경우 많은 정치적 고려와 다른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수상자 선정은 매우 신중하다. 한국인으로 노벨상 수상에 근접한 사람으로는 김대통령을 비롯,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의 피터 김(한국명 김성배)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겸 미 국립보건원 선임연구원 이서구박사, 버클리대 김성호 교수, 워싱턴대 테니스 최(한국명 최원규)박사, ‘옥수수박사’로 북한의 식량증산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경북대 김순권 교수 등이다. 노벨경제학상과 문학상은 현재의 학계풍토나 번역 관련 여건상 수상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학계나 문단에서 스스로 진단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인이 노벨상을 타려면 교육체계의 대대적인 혁신과 학자 및 작가 개개인의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국가차원의 지원과 투자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우선은 국력이 부강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만일 2000년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다면 반 DJ측 사람들, 특히 정치를 한다는 인사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아닌게 아니라 그것이 알고 싶다. /청하

富의 가치

연대 미상, 작자 미상의 우의(寓意)소설 ‘흥부전’의 주인공은 흥부가 아닌 놀부일 수 있다. 흥부는 마음만 착했을 뿐 무위도식하는 이를테면 룸펜이다. 놀부는 비록 심보는 나쁘지만 근검절약하는 구두쇠다. 동생에게 유산을 떼어주지 않은 것도 흥부의 무능을 미덥지 않게 보는 형의 수성(守城), 즉 유산지키기로 볼 수가 있다. 흥부가 제비다리를 고쳐주고 벼락부자가 되는 것은 다분히 희극적이다. 불로소득의 졸부가 된 흥부에게 심술을 부리는 놀부가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라 할 수 있다. 부(富)의 가치를 치면 알뜰하게 유산을 지키는 놀부가 땀 안흘리고 번 흥부보다 더하다 할 것이다. 돈많은 사람을 나쁘게 보는 요즘의 세태는 땀 안흘리고 번 것으로 여기는 그릇된 선입견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으로, 술수로, 투기등으로 온당치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번 금만가들이 많아 땀흘려가며 알뜰살뜰 모은 재력가마저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다. 돈 많은 것이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저주의 대상이 된 사회병리현상은 구조에 뭔가 단단히 고장난데가 있기 때문이다. 재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고쳐야할 여러가지가 있지만 흥부같은 요행수로 졸부가 되는 것도 금물이 아닌가 한다. 가령 증권시장이 투기시장이 되는 것도 잘못된 현상이다. 경마가 건전한 레포츠가 되지 못하고 이 역시 투기장이 되는 것도 잘못된 현상이다. 갖가지 복권바람이 이는 것도 고려할 일이다. 기존의 복권으로도 모자라 30억원짜리 새 복권이 생기는 것은 국민을 더 요행수로 몰아넣는 것 같아 개운치 않다. 미국같은데서는 몇십억원짜리 복권이 있다지만 우리는 미국이 아니다. /백산

北韓

북한의 인권문제를 외국 언론이 더 관심을 갖고 보도하고 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지는 중국으로 탈북한 3만∼5만명의 북한 주민들이 목숨까지 위협받는 최악의 인권상황속에 있다고 보도했다. 베이징 특파원의 이 르포기사는 미국등 서방세계의 침묵 속에 이같은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만약 세계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미국이 분노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이처럼 침묵하는 이유가 북한의 미사일 문제 때문이라고 전했다. 며칠전엔 중국이 중재하는 남북정상회담에 북측이 4억달러상당의 물자지원을 중국에 요구했다는 국내 어느 일간지보도가 있었다. 중국은 4억달러의 일부를 우리측에 분담토록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보도가 사실같으면 언젠가는 남북정상회담을 돈주고 사는 형상이 안될지 모르겠다. 국제사회에서 달러를 비롯, 쌀이며 비료며 기타 생필품 등을 공짜로 얻어 쓰면서도 언제나 구걸하는 쪽이 더 당당한 것이 북한이다. ‘식견있는 지도자’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평화를 돈주고 사면서도 주는 쪽이 항상 끌려다닌다. 이제는 숫제 북한 당국자의 기분맞추기 추파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상한 것은 북한엔 관대한 사람들일수록이 남한은 호되게 비판하는 풍조다. 북한의 인권상황은 일언반구도 안하면서 국가보안법개정은 인권을 핑계대는 허울좋은 구실로 목청을 높인다. 정신차려야 한다. 이쪽이 보기에는 북한을 리드하는 것 같지만 저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무늬는 변화무쌍해도 실체는 절대 불변인 것이 북한의 전술전략이다. 환상과 실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백산

心性

노래를 부르는데는 사투리가 없다. 팔도사람이 불러도 노래를 부르는 말엔 사투리가 나오지 않는다. 또 노랫말은 모른채 외국노래의 곡만 들어도 노랫말의 정감을 안다. 노래는 기쁠때 많이 부르지만 슬플때도 부른다. 기쁠때 부르는 노래는 더욱 기쁘게 만들고 슬플때 부르는 노래는 슬픔을 달래준다. 유럽의 동화 가운데 이런게 있다. 어느나라 백성들이 싸움질을 잘했다. 사소한 다툼에도 곧잘 주먹다짐부터 벌이곤 하여 왕이 말을 금지시켰다. 모든 대화를 말대신에 노래로 불러 의사를 소통하도록 했다. 이러다보니 가령 저잣거리에서 발등을 밟혀도 전같으면 ‘왜 남의 발을 밟냐?’ ‘모르고 밟았기로소니 웬 시비조냐!’해서 나중에는 주먹다짐이 날판인데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노래로 말을 대신하다 보니 격했던 감정이 누그러져 결국은 웃음이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화이지만 이즈엄 세태에 뭔가 시사해주는 점이 있어 생각이 난다. 우리는 무척 급한 감정속에 살고 있다. 옛날 양반은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길던 옷고름이 짧아지고 그것도 단추로 바뀐 것은 동학란 이후 세상이 시끄러우면서 시작됐다. 그러다가 일본에 병탄되고 광복이 되고나서는 6·25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살기가 그저 바쁜 가운데 감정이 격해졌다. 정치 또한 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이런 혼돈을 틈탄 벼락부자도 생기고 벼락출세도 만연했다. 만사가 급하다보니 감정에 여유가 있을리 없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래 한마디만 부를 여유를 가지면 누그러질 수 있는 감정을 주체치 못하고 쌈질을 일삼지 않는가 싶다. 심성이 척박해지는 것 같다. /백산

연산군

요즘 KBS 1-TV 사극 ‘王과 妃’의 주역으로 나와서 생모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연산군(燕山君)은 조선의 제10대 왕이다. 성종의 뒤를 이어 1494년 12월 즉위하여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그해 11월 타계했다.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고, 중전이던 생모가 폐비되고 사약을 받고 죽을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두 숙의(淑儀)를 타살했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구타, 치사케 하는 등 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생모를 폐비할 때 동조했던 윤필상·김굉필을 사형시키고, 한명회·정여창을 부관참시한 연산군을 사가들은 폭군으로 기록했다. 그러한 연산군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금전(金殿)에 아지랑이/둘러 떠 있네/잔치를 자주 여니/우애(友愛)좋은데/넌지시 사람 끄는 고운 얼굴/그 몇이뇨” “비나니 어진 정승들이여/나의 잘못을 살펴주고/복령(茯笭)과 대춘(大椿)처럼/오래 오래 사시오” 125편의 한시를 남긴 연산군의 시 구절들이다. 초기시는 평온한 성정(性情)을 담고 있어 폭정을 예감할 수 없을 정도이나 생모의 폐비·사사(賜死)사건을 알고난 뒤에는 “임금을 가벼이 여기면/그는 간신이라/어찌 망령되이/제 몸 중함을 생각하랴/(…)/부월(斧鉞·작은 도끼와 큰 도끼)이 우레처럼 진노함을/면하기 어려우리”라고 써 섬뜩해진다. 연산군의 폭정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시적인 감수성을 풍부하게 가진 인간이었으며, 그런 감수성에 바탕을 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이 그의 성품을 포악하게 이끌었다는 것이다. TV드라마 ‘왕과 비’의 인기 탓인가. 양주군 해등촌, 지금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의 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청하

잠 안깬 영한사전

영어 구사능력이 좀 뒤떨어지는 한국과 일본 공직자들을 빗대 시중에 나돌고 있는 우스갯소리 가운데 ‘3S’라는 게 있다. 국제회의석상에서 한국대표단과 일본대표단은 세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첫번째는 조용하다는 것(Silent)이고 두번째는 틈만 나면 존다는 것(Sleep), 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양국 대표단이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멋쩍어서 잘 웃는다는 것(Smile)이다. 물론 국제회의석상에서의 한국대표단 영어실력이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오명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최근 공무원사이에 어학공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고 한다. 행정자치부 등 중앙정부는 물론 전국 지방자치단체도 예외는 아니다. 경기도의 경우 도청소속 공무원을 상대로 영어·중국어·일어 등 3개 외국 외국어교육 수강생을 모집한 결과 예년에 비해 47%가 증가했고, 수원시는 직원들의 영어능력 배양을 위해 각 실·과별로 업무보고서와 기안문 각 1건씩을 영어로 작성해 보고 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공직사회와 일반 기업들이 이렇게 영어에 열성인데 비해 영한사전은 너무나 부족하다. 영어교육 인프라중 첫손으로 꼽힐만한 게 영어와 모국어의 다리를 놓는 영한사전인데, 현재 영한사전은 잠을 자고 있다. 1949년 이양하·권중휘의 일본 ‘포켓용 리틀 딕셔너리’번역본 ‘스쿨 영한사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King에 대한 시중의 영한사전을 들춰보면 왕·국왕·군주는 나와도 임금은 없고 temple은 신전(神殿), 사원이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우리말 절, 절간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우리말이나 시중에서 쓰이는 말보다 일본식 한자어 투성인 학습용 영어사전인 것이다. 영어가 국가 경쟁력 도구라면 사전은 도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한국식 영한사전 편찬작업이 너무 늦다. /청하

여의도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경우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장이 지방의회 의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국회의원을 겸임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국이나 일본은 단체장과 의회의장을 따로 선출하지만 단체장의 국회의원 출마를 제한하는 법규정은 없다. 그러나 자치단체장이 임기중 국회의원 등으로 나가는 사례는 거의 없다. 보통 3, 4 차례 이상 단체장을 연임한 뒤 ‘믿을만한 정치인’으로 여론이 형성되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임기중인데도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행을 꿈꾸며 사직서를 쓴다. 자치단체장의 임기중 선거 출마 논란은 97년 조순 서울시장과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대통령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하면서 비롯됐다. 이에 따라 국회는 98년 신기하게도 여야 만장일치로 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중 대선 또는 총선 출마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서울시내 23개 구청장이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결국 헌법재판소가 “단체장의 피선거권 제한은 단체장은 물론 유능한 후보를 뽑을 수 있는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현직 단체장의 임기중 선거 출마 제한이 없어진 것이다. 4·13 총선을 앞두고 경기·인천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 시·도에서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줄줄이 사퇴했다. 헌법재판소가 인정한 국민의 참정권 행사로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까지 하면서 선출된지 1년 반밖에 안된 지자체장과 의원들이 주민과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사퇴하는 것은 그들을 뽑아준 주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2년마다 엇갈려 실시하고 있는 국회의원 선거와 자치단체장 선거를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거의가 배반의 천재, 권모술수의 달인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여의도’가 그렇게 좋은가.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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