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雨)를 소재로한 문학작품, 특히 운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동양인, 그 중에서 우리 한국인은 비에 유난히 다정다감해서인지 자고로 비를 읊은 운문들이 많다. “한식 비온 밤에 봄빛이 다 퍼졌다/무정한 화류도 때를 알아 피었거든/어떻다 우리의 임은 가고 아니 오는고” - 신흠(1566∼1628)의 시조. “자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 조헌(1544∼1592)의 시조.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계랑(1513∼1550)의 시조. “비 내리는 봄밤에 낙숫물 소리/노자가 한 평생 사랑한 소리/베옷으로 몸 가리고 등불 돋우며/아내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네” - 권필(1569∼1612)의 한시(漢詩). “찬 비는 밤 새도록 대숲 울리고/가을이라 풀벌레는 침상곁에서 우네/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하랴/짙어 가는 백발을 막을 수 없구나” - 정철(1536∼1593)의 한시. “가만히 오는 비가/낙수져서 소리하니//오마지 않은 이가/일도 없이 기다려져//열린 듯 닫힌 문으로/눈이 자주 가더라” - 최남선(1890∼1957)의 시조 ‘혼자 앉아서’. 비를 소재로 한 시와 시조는 참으로 많은데 봄비를 노래한 작품은 ‘이별’이라고 하여도 유정하다. 그러나 가을에 듣는 빗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감에 젖게 한다. 요즘 경기북부지역이 경기남부지역에 이어 또 수해를 당해 심란스럽기 짝이 없는데 이제는 오지 않아도 될 비가 자꾸만 내린다. 수해지역에 내리는 비가 원망스럽고 빗소리가 두려운 이유는 아무리 예술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생존을 앞설 수 없기 때문인듯 싶다. /淸河

강감찬장군 동상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출생지로 전해져 왔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진 날 강감찬(948∼1031년) 장군이 태어났다 하여 낙성대라고 이름 지었는데 사리탑식(舍利塔式) 석탑이 남아 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구주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구주대첩에서 거란군은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고려 침입군 10여만명 중 생존자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낙성대에 있지 않고 왜 수원 팔달산에 건립됐느냐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였다. 강감찬 장군의 기마동상은 1971년 6월29일 애국조상건립위원회(위원장: 신범식 문화공보부 장관)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하여 기공했는데 1971년 10월 준공됐다. 제막식은 1972년 5월4일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요인과 많은 수원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남창동 산 1번지 대지 500여평에 조각가 김영준씨의 조각으로 세워진 이 동상은 원상(原像) 높이 4.5m, 좌대높이 5.7m, 전체높이 10.2m, 청동주물상 5t, 마상의 길이 5m의 거대한 기마동상으로 건립기금은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 전중윤 사장의 헌납금 1천600만원으로 건립됐다. 그런데 30년동안 팔달산을 지켜왔던 강감찬 장군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20여억원을 들여 정조대왕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 동상은 수원시 화서동 숙지산 공원과 군사훈련 장소였던 동장대 (연무대), 장안공원, 만석공원으로의 이전이 검토되고 있다는데 지금 팔달산에 가면 호국의 용장 강감찬 장군이 적진을 질타하는 듯한 호령소리가 들려온다. /淸河

가을

조상들은 계절에 대한 감각이 풍부했던 것 같다. 사계절에 쓰이는 계절 이름이 설흔여섯 가지나 된다. 봄으로는 이른봄 조춘(早春) 초춘(初春) 천춘(淺瑃) 헌춘(獻春), 한봄으로 중양(仲陽), 늦봄으로는 만춘(晩春) 잔춘(殘春) 춘말(春末) 모춘(暮春) 등이 있다. 여름은 초여름으로 초하(初夏), 한여름은 성하(盛夏) 성염(盛炎), 늦여름은 잔하(殘夏) 만하(晩夏) 등으로 불린다. 가을은 초가을을 초추(初秋), 한가을은 계추(桂秋), 늦가을로는 잔추(殘秋) 만추(晩秋) 등이 있다. 겨울은 초겨울을 초동(初冬), 한겨울을 증동(蒸冬), 늦겨울은 만동(晩冬) 잔동(殘冬)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는 개념적 철 이름으로 달마다 달에따라 부르는 계절 이름이 따로 있다. 음력으로 정월 상춘(上春) 맹춘(孟春) 2월 중춘(仲春) 3월 계춘(季春) 4월 맹하(孟夏) 5월은 계하(季夏) 라고 한다. 7월은 상추(上秋) 맹추(孟秋) 8월 중추(仲秋) 9월 계추(季秋) 10월 상동(上冬) 맹동(孟冬) 동짓달 중동(仲冬) 섣달은 계동(季冬) 이다. 흥미있는 것은 예컨대 상춘이 있었다 해서 하춘이 있는것이 아니고 철과 달마다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사계절중에도 봄과 가을 이름이 비교적 많은것은 봄 가을에 더욱 생활의 정취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오는 9월27일 백로를 앞둔 탓인지 초가을이 완연한 가운데 추석(9월12일)이 든 중추가절이 짙어가고 있다. 얼마전 까지만도 밤낮으로 쪄대든 한증막 더위가 사라지고 하늘이 높아 가면서 오히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기까지 하다. 건강에 유의해야 할 때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여 풍성한 가을을 보람있게 맞이 해야겠다. 바삐 살다보니니 어느새 중추로 접어든 한가을속에 묻혔다. /白山

판단의 오류

1997년 8월30일 자정이 넘어서다. 미국의 3대 공중파 방송중 하나인 CBS에 지방가맹사들의 비난 전화가 빗발쳤다. CNN, NBC등은 정규프로그램을 중단, 영국의 다이애나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 당한 참혹한 장면과 함께 현장뉴스가 중계되고 있는 시간에 CBS는 한가롭게 프로레슬링 중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CBS가 다이애나비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다루기 시작한 것은 한시간이 지난 뒤였다. 헤이워드 CBS 사장은 멍청했던 한시간을 ‘악몽의 시간’으로 규정, 베나르도스 뉴스담당 부사장을 특집담당으로 좌천시키고 맥기니스 런던 지국장을 승진 발령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때의 일이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해 오고 있는 시간에 신모국방부장관은 이승만대통령에게 ‘각하, 용맹무쌍한 국군이 일제히 반격을 가해 격퇴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육군수뇌부는 전날(토요일) 밤 육군회관 준공파티에서 만취한 술이 덜깬 작취미성의 상태였다. 푸틴러시아 대통령이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참사로 국민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는 것은 늑장 대처한 탓이다. 조난 보고를 받고도 흑해 별장에서 계속 휴가를 즐기다가 사태가 심각해진 이틀날 마지못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서구에 구조지원 요청을 한 것은 또 이틀이 지나서 였다. 푸틴은 118명의 목숨을 앗아간 쿠르스크호 참사와 관련, 지난 23일을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유족들에게는 10년분 봉급, 아파트 제공등을 약속하는 등 뒤늦게나마 수습에 나섰으나 이반된 민심은 좀처럼 돌아서지 않고 있다. “러시아에 태어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다. 모든일은 이처럼 대처하는데 시기가 있다. 시기를 놓치는 것은 판단의 오류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 주변에 판단의 오류로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는지 정부는 다각적인 성찰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白山

작물수해

‘농사는 곡식을 가마니에 담아 곳간에 재워야 안다’는 옛말이 있다. 씨앗을 싹틔워 이앙하고 김을 매어 수확하기까지 여간한 공력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아기 키우듯이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한다. 자연의 변덕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아무리 과학영농을 말해도 대자연의 심술은 인간이 당할 재간이 없다. 날벼락같은 한여름 우박은 순식간에 모든 작물을 망친다. 철이른 무서리 또한 생떼같은 농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 비가 안와도 걱정인 것이 농사일이다. 보통 너댓번씩 위협받는 태풍 역시 무서운 복병이다. 농사를 짓는데는 이처럼 일일이 말 못할 걱정거리가 많다. 올 농사가 근래 보기드문 대풍이라더니 지난 며칠동안 내린 아무 쓸모 없는 비로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닌것 같다. 산사태가 나 인명이 다치고 철도 도로 등이 끊긴 전국적인 피해속에 누런 들판을 휩쓴 흙탕물 홍수를 보노라면 정말 마음 아프다. 늦더위 햇볕속에 하루가 다르게 여물어야 할 벼가 일조량이 모자라 지장을 받는 것도 뭐한데 홍수에 할퀴어 무더기 무더기로 쓰러졌으니 한시바삐 일으켜 세워야 할 일이 큰 걱정이다. 벼와 함께 논이 유실돼버린 것은 또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풍년을 눈앞에 두고 삽시간에 폐농을 당하다시피한 농가가 있을 것이니…. 가을 과일 농사도 치명적일테고. 수해가 남부지방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도내에도 적잖은 피해가 났다. 쓰러진 벼 일으켜 세우는데 대한 당국의 인력지원대책이 시급하다. 가을비는 반갑지 않다는데 이달말쯤 또 한차례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한다. 올 추석엔 햅쌀밥을 먹을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白山

북한 가족법

북한의 결혼은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다. 그러나 ‘혁명적 이념에 기초한 동지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남자 만 18세, 여자 만 17세면 결혼을 할 수 있으나 ‘국가는 청년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사회와 집단을 위해 보람있게 일한 다음 결혼하는 사회적 기풍을 장려한다’고 규정, 중국처럼 만혼만육(晩婚晩育)을 장려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혼인은 국가의 ‘심사’후 ‘등록’되며 약혼의 법적 효력은 없다. 8촌까지의 혈족, 4촌이내의 인척은 ‘근친혼’에 해당돼 결혼을 할 수 없지만 우리처럼 동성동본금혼제도는 없다. 북한의 이혼제도도 우리와는 좀 다르다. 초기에는 남녀평등사상에 입각해 자유 이혼을 강조했으나 1956년부터 ‘협의이혼’제도를 폐지해 이혼하려면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 잦은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 두번 이상 이혼하려면 수수료 외에 ‘벌금’ 성격의 돈을 내야 하고 재판에서 부도덕한 행위가 발견되면 거주지에서 추방되거나 형사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1958년의 ‘조선가족법’ 141쪽에는 ‘임신중에 있거나 산후 1년 미만의 자녀를 보육하는 여성, 인민군대의 전사나 하사관, 또는 전투상태에 있는 군관을 피고로 하여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초기 북한정부의 여성과 아동보호주의, 군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리의 민법 ‘가족편’에 해당하는 북한의 가족법은 1946년 제정된 ‘남녀 평등권에 대한 법령’으로 시작해 1990년 10월 제정된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가족법’으로 완성됐다고 한다. 호적제와 호주제가 폐지되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친권은 ‘권리’의 개념이 아니라 ‘의무’의 개념이라는 북한 가족법이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淸河

남한신문이 북쪽에 가면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한신문 10여종이 이르면 이달중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전달되고 북한도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 3∼4종의 중앙지를 보내올 전망이라고 한다. 지난 12일 평양을 방문한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한 신문을 보고 싶다’고 말한 후속조치인 셈이다. 남한신문을 판문점 자유의 집(남측)으로 보내면 판문점 남측 연락관이 외교행낭(파우치)에 준하는 절차로 밀봉, 북측 연락관에게 보내는 형태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북한도 조간인 로동신문 등을 아침 일찍 판문점으로 보내 맞바꾸는 형식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달된 남한신문은 차량편이나 헬기를 이용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무실에 들어가겠지만 서울에 온 북한신문은 통일부 자료센터에 비치해 북한연구자나 학생 등이 신속하게 북한자료를 접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그동안 로동신문 구독은 홍콩·일본의 중개상을 통해 7일에서 15일 정도 걸렸는데 판문점에서의 직접 교환은 서로 구독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남북교류협력법상 ‘반입과 반출’ 승인절차를 밟는다. “달러가 없어서 돈 내고는 못 본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 마디에 남한신문이 북한에 즉시 전달될 것 같은 사실 앞에서 마치 남한은 짝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오금을 못펴는 것 같아 좀 뭣하기는 하다. 북한 주민사회는 지금 어떠한지 모르지만 남한신문의 기사 중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판은 그렇다치고 친딸 성폭행과 원조교제, 존속살인 등 부도덕스럽고 사악한 사건들은 참으로 큰 걱정거리이다. /淸河

매미소리

매미는 현재 18여종으로 보고돼 있는데 이들 중 참깽깽매미·말매미·봄매미·소요산매매·두눈박이좀매미는 우리나라 고유종으로 알려져 있다. 수컷의 복부에는 훌륭한 발음기관이 있어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다른 곤충과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이다. 매미는 생태적으로 매우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다. 유충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땅 속에서 보통 2∼5년을 살며, 성충이 되기 위해 지상에 나와서는 나무에 올라 마지막 탈피를 한 뒤 약 한달정도 살다 알을 낳고 죽는다. 유충은 나무의 뿌리에서 수액을 빨아먹고, 성충은 햇가지 속에 알을 낳아 나무를 말라 죽게 하므로 식물에 피해를 많이 주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매미의 울음소리는 가곡이나 동요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를 여름날에 들으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처럼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그러나 요즘의 매미소리는 아마 소음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매미는 원래 낮에만 우는 곤충인데 요즘 매미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기 때문이다. 주서식지도 야산이나 숲속으로 알려져 왔지만 지금은 아파트단지나 빌딩 숲 한가운데 까지 점령해 버렸다. 더욱이 수컷이 암컷을 유인할 때 내는 울음소리는 건설현장을 능가한다. 이처럼 도심에 매미가 부쩍 늘어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원인이 규명된 것은 없다. 다만 천적인 말벌과 조류 등이 공해로 감소함에 따른 것이고 매미가 밤에 우는 것은 도심의 불빛을 보고 낮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추정은 한다. 수년간을 땅 속에서 지내고 겨우 지상에 나와 한달 정도 살다가 숨지는 매미의 생애를 생각하면 매미의 울음소리를 소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매정하지 않나 싶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다. /淸河

중국산 공세

어렸을적 가을논에 새를 보면서 메뚜기를 잡았다. 논엔 (지금은 농약과 비료바람에 다 없어진 메뚜기뿐 아니라) 미꾸라지도 있고 우렁도 있었다. 며칠전 어느 자리의 뷔페음식 가운데 메뚜기볶음이 있어 반가워했더니 누군가가 “아마 냉동된 중국산일 것”이라고 말해 듣고보니 아직은 메뚜기 철이 좀 이른 것으로 미루어 그럴것 같았다.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 줄기를 빼 꿰어 매거나 사이다병에 담았다가 참기름과 소금에 볶은 맛이란 일품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겐 이런 자연친화적 놀이와 맛을 안겨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그러고 보니 저임금을 무기삼아 밀물처럼 쳐 들어오는 중국산 공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농산물로는 참깨 땅콩을 비롯해 수산물엔 꽃게 조기등 민물의 미꾸라지까지 중국산 투성이다. 심지어는 뱀(보신용)까지 별의 별것이 밀수입되기도 한다. 우리 농촌에서는 고사리나 도라지를 캐어 팔아봐야 품삯도 나오지 않는 틈새를 타 산채도 중국산이 판친다. 이런 중국산이 신토불이어서 아무래도 토종과는 달라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기도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공해오염이다. 우리가 6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고도성장을 지향하고 있는 중국은 환경보다는 경제가 우선이어서 수질오염 대기오염이 심각하다. 또 우리의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농수산물 수입이 불가피한 입장이다. 이바람에 지난 봄엔 마늘수입으로 국산 마늘값이 떨어져 농민들을 울상짓게 하더니 이젠 가을 고추값의 폭락조짐이 벌써부터 나타나 농가들을 애태우게 하고 있다. 농업인들에 대한 이같은 피해는 정부의 적정가격 수매가 요구되지만 참 걱정이 많다. 올 추석 차례상에 자칫 잘못하면 조상이 잡수어보시지 않은 중국산 제수가 오를 판이니. /白山

평양가기

세상 많이 달라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하고 찍은 사진을 집 거실에 걸어두는게 자랑이 된 세상이 됐으니. 불과 몇달 전만 같아도 혼쭐 날 일이었던 것이. 북측에선 “누구든 와서 보고싶은 사람은 와서 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갈수 없지만) “뿔달린 사람 없으니 와서 보라”는 것이다. (남측도 뿔달린 사람 없기는 마찬가지인 동족 …) 초청이란 것이 참 묘하다. 방북초청을 받으면 굳이 안간다고 우기는 것도 그렇고 오라 한다고 냉큼 달려가는 것도 그렇다. 두가지 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모양새가 좀 그렇다. (남북간에 왕래는 많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평양에가면 대접 잘받고 구경 잘하고 사진찍고 통큰말 들으면서 ‘아 그게 아니었구나?!’하고 종전의 인식이 흐물흐물해진 가운데 돌아 오는것이 아닌지? 새로운 인식이 꼭 나쁜건 아니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평양 가기를 미룬것은 잘한 일이다. 야당총재로서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지금은 적절한 시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집권자인 여당총재의 방북이 있었으면 야당총재의 방북이 있어야 하는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야당과는 사전 양해 한마디 없이 이총재 방북요청을 발표(북측의 응낙 및 초청여부는 알수 없으나)한것은 경솔한 처사임이 맞다. 입장을 바꾸어 서울을 다녀간 북한 민간인이 청와대에서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 놓을수 있을 것이라는 가상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럴만하게 다녀간 북측 민간인도 아직은 없지만, 세상 달라진것은 이쪽만 달라졌을뿐 저쪽은 달라진것이 없지 않겠는가 싶다. /白山

자유왕래

지난주는 온통 이산가족 교환방문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마치 이밖의 일은 일도 아닌 것처럼. 텔레비전은 종일 상봉장면으로 장식했고 신문도 거의 전지면을 상봉기사로 메웠다. 남쪽아내 북쪽아내 상면등 정말 기막힌 사연이 많았다. 지난 50년의 단절은 기구한 인생유전의 세월이었다. 텔레비전 시청자나 신문독자나 보는이들조차 가슴 뭉클한 사연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언론이 매달리다시피 할만한 세기적 이벤트였다. 외국의 주요언론들도 연일 대서특필했으니. 서울도 울고 평양도 울린 교환방문이 끝난 지금 가슴찡한 여운속에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듯한 허탈감이 감돈다. 이런 가운데 이산가족상봉이 이대로는 안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간단한 절차로 만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방문으로 든 비용이 30억원이라고 한다. 이 돈이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방문비 부담이 무한정일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상시면회소 설치가 시급하다는 얘기가 이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교환방문의 정례화, 상시면회소 설치도 좋으나 더 좋은 것은 자유방문이다. 남북을 왕래하고 싶은 이산가족은 어느때든 마음대로 집까지 찾아갈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내년 가을쯤 개통될 경의선은 이산가족 왕래에 아주 좋은 교통편이 될수 있다. 집까지 찾아가는 자유왕래의 길이 트이면 이산가족 교환방문도 차츰 보편화돼 언론의 관심 또한 점차 지금같진 않게 될 것이다. 자유왕래가 일상화되어 웬만한 사연은 보도가치가 없는 개방된 이산가족방문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다만 대남요원화는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白山

사형제도

총 3만647명이 혜택을 받은 올해 8·15 특별사면 중 이례적인 것은 사형수 2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점이다. 사형수 감형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때여서 감형배경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 현재 세계 180여개 국가 중에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40여개국이고 사형제를 두고서도 10년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나라가 60여개국이다. 우리나라는 헌법재판소가 7대2로 사형제도의 합헌론을 유지하고 있는데 사형제도 폐지 쪽으로 여론이 확산돼 가는 추세다. 특히 종교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죽어 마땅한’ 극악죄인이라 하더라도 살려두고 업을 녹이게 한다. 중죄인에 대해서 불교는 법적윤리적 무원칙주의라고 의심받을 정도로 관대하다. 죄를 짓기 전에는 엄하게 경계하지만 일단 일을 저지른 후에는 참회시키고 용서한다. 모든 성명은 죄에 관계없이 똑같이 귀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사형은 죄를 다스리는 벌이 아닌 관제살인행위’라고 말한다. 보복이나 응징이 아닌 범죄인의 교화라는 형벌의 목적에 비춰볼 때도 사형은 더 이상 범죄 억지책이 될수 없다고 강조한다. 만일 잘못 집행될 경우 비인도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형벌인 사형제도를 폐지할 시점에 와 있다. 미국도 사형수의 3분의1이 정말 억울하게 죽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을 정도라니 사형제도의 그 피해가 짐작이 간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었다. 김대통령 취임 이후 2년여동안 단 한명도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사형제도의 존폐여부가 윤곽이 잡히는 것 같다. 사형은 관제살인이라는 주장이 점점 설득력이 커진다. /淸河

가을 수원팔경

삼한시대의 수원(水原)이름은 모수국(牟水國)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매홀(買忽),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성(水城), 고려시대 초기에는 수주(水州)였고 고려시대인 1217년부터 수원이라는 지명이 등장했다. 모두 물과 관련있는 이름이었다. 옛날의 수원은 지금의 수원 중심가에서 훨씬 서쪽지역에 있었다. 원래 수원이 자리잡고 있던 현재의 화성군 서쪽은 대부분이 바다였으며 지형이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로 호수나 저수지 같은 물이 많기로 유명했다. 조선조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화성을 축성(1794∼1796년)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팔달산 아래에 건설했는데 바로 오늘의 수원이다. 수원은 예로부터 산자수명하여 아름다운 경치가 많아 광교적설(光敎積雪), 북지상연(北池賞蓮), 화홍관창(華虹觀漲), 용지대월(龍池待月), 남제장류(南堤長柳), 팔달청람(八達晴嵐), 서호낙조(西湖落照), 화산두견(花山杜鵑) 등 아름다운 수원팔경과 수원춘(春)팔경, 수원추(秋)팔경을 자랑했다. 그런데 가을의 수원팔경은 홍저소련(弘渚素練:흰 비단을 펼친 듯, 물살이 장쾌하게 쏟아지는 화홍문의 경관), 석거황운(石渠黃雲:만석거 주변에 누렇게 익은 벼들의 황금물결같은 풍경), 용연제월(龍淵霽月:맑은 하늘 달 밝은 가을밤의 용연 풍경), 구암반조(龜巖返照:저녁볕이 찬란하게 비치는 구암의 경치), 그리고 서성우렵(西城羽獵:가을사냥이 한창인 화서문 밖의 풍경), 동대화곡(東臺畵鵠:활쏘기가 벌어진 동장대 정경), 한정품국(閒亭品菊:미로한정에서 국화꽃을 앞에 놓고 감상하는 정경), 양루상설(陽樓賞雪:화양루에서 늦게 내리는 눈을 감상하는 정경)이다. 요즘 낮에는 더위가 한창이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가을 팔경의 옛 수원산천을 상상해 보면 운치가 넘친다. /淸河

북한신문

북한에는 남한과 같이 사기업 형태의 신문사는 없고 노동당, 내각, 사회단체들이 발행하는 기관지만 있다고 한다.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 내각기관지인 ‘민주조선’, 김일성 사회주의청년동맹 기관지인 ‘청년전위’ 등 3개의 중앙지와 각 도당위원회가 발행하는 황남일보, 황북일보, 함북일보, 함남일보, 평북일보, 강원일보, 자강일보, 평남일보, 개성신문, 량강일보, 평양신문 등 11개 지방지가 있다. 이 14개 일간지 외에 해외홍보용 주간지인 ‘The Pyong Yang Times’와 내각의 각 성에서 발간하는 ‘교통신문’‘건설신문’, 각 대학이 발행하는 ‘대학신문’ 등이 있다. 1946년 창간된 ‘로동신문’은 연중무휴 발간되는 조간지로 간지(間紙) 2면을 포함해 하루 6면으로 150만부 정도 발행된다. ‘민주조선’도 1946년 창간됐는데 4면으로 제작되지만 매주 화·금요일과 특별한 날에는 6면으로 증면된다고 한다. ‘청년전위’는 1946년 ‘민주청년’으로 창간돼 1996년 현재의 제호로 바꿨으며 45만부쯤 발행된다. 신문구독료는 6개월치를 한꺼번에 내는데 3∼9원(남한돈 1천500∼4천600원)이다. 한국언론재단이 최근 발간한 ‘북한언론’에 따르면 평양 가판대에서 파는 신문 1부 가격은 30전이다. 북한의 이러한 신문현황에 비하면 남한은 가히 신문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수 많은 중앙지와 스포츠, 경제 등 특수일간지를 비롯 각 시·도에서 발행되고 있는 지방지와 주간지는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중앙지는 면수가 너무 많고 지방지는 지면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 12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 목란관에서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의 오찬자리에서 “판문점 연락사무소로 매일 (남한의)신문을 넣어 주십시오. 우리가 신문을 일본을 통해서 돌아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신문도 연락사무소를 통해서 다 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남한신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어서 의미심장하다. 북한신문과 남한신문을 서로 자유롭게 읽고 비교해 볼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淸河

이산가족방문

미국의 닉슨행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국제정치사에서 유명한 핑퐁외교가 계기였다. 1971년 일본의 나고야서 열린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미국 선수단과 기자들이 중공을 방문해 가진 친선경기를 출발점으로 접촉이 시작돼 결국 국교수립까지 발전하였다. 이때까지 두 나라는 1949년에 수립된 중공을 미국은 승인도 안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에 참가한 중국의용군(중공군) 등에 의해 미군 3만여명이 전사(물론 중공군 등의 희생도 컸다)하는 등 묵은 원한이 있어 매우 껄끄로운 사이였다. 그같은 20여년의 구원을 넘어선 것이 핑퐁외교가 계기였던 것이다. 인간사회나 국제사회나 따질 것은 따져야 하는 것이 사리지만 지난 일을 따지다가 앞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이 또한 국제사회며 인간사회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제때 중국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도움을 받고 지금은 대만에 가 있는 중화민국(대만정부)과 단교까지 해가며, 6·25때 총부리를 겨눈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보단 장래를 위해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때문인 것이다. 베트남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개선에서도 우리의 월남전 참전을 거론하는 것은 서로 무익한 것으로 돼 있다. 북측과의 관계개선에서 따져야 할 과거사를 묻어두는 것은 참다운 관계개선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따지기로 말하자면 정말 따질 것이 많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지면 서로 얼굴만 붉힐뿐 민족화해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져도 화해와 협력이 성숙된 다음에 따지는 것이 순리다. 남북이산가족의 교환방문으로 반세기만에 체제를 초월한 꿈같은 재회의 감격이 남북에서 넘치고 있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 이산가족의 교환방문은 남북관계 개선의 상징적이면서 실제적 창구인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白山

광복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삼각산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그날이 오면’의 시 한구절이다. 민족소설가이며 시인인 심훈은 이토록 간절히 ‘그날’을 염원했으나 끝내 광복을 못본 채 1936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요절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조선조)이 강제 병합된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보기까지의 36년은 끝없는 광복운동의 연속이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삼국동맹국과 싸웠던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연합국의 승리가 안겨준 선물이 광복으로 알려졌으나 광복운동의 주체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강제합병 직후 대한제국의 해산된 군대가 중심이 되어 한동안 제국회복운동을 벌인 복벽운동을 비롯해 1919년에는 마침내 200만 민중이 들고 일어선 3·1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국내인사의 해외망명, 해외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하여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따라 그해 4월 10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시영의 신흥무관학교, 이동휘, 김좌진, 홍범도 등의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맹활약을 보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세력이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혁명노선으로 양분되면서 공산주의자들도 크게 활약한 이 무렵의 광복운동은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끼리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광복의 기쁨속에 비운의 38도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미·소 점령군의 군사편의에 의했던 것이 그대로 굳어져 무려 55년이 흘렀다. 이로인해 6·25 전쟁을 치르는 등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 설움을 안고 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산가족상봉도 한반도에서만이 볼 수 있는 세기적 비극이다. 통일의 제2 광복절을 맞이할 날은 과연 언제쯤일는지. /白山

대통령의 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딸인 첼시(29세)가 지난 7월, 15일간 계속된 캠프 데이비드 중동 평화회담에서 아버지의 자문역할을 했다고 인터넷 신문 ‘드러지 리포트’가 보도한 적이 있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데니스 로스 중동 특사 등 사이에 서류철을 든 채 앉아 있는 첼시의 사진도 게재됐는데 백악관은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일단은 부인했다. 대통령의 딸이 ‘국정에 개입’한 것은 첼시가 처음이 아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막내딸 에이미(32세) 역시 아버지가 개최한 국가 공식 만찬 등에 참석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딸 패티 데이비스(28세)는 엉뚱한 언행으로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렸다. 엄격한 아버지와 남편 밖에 모르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았던 그녀는 돈에 쪼들린다는 이유로 플레이보이지 나체 모델을 자원해 포르노에 가까운 비디오를 찍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41세)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이래 스폿라이트를 피해 조용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달 1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막되는 민주당 전당대회 둘쨋날 연사로 나서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어머니 육영수여사가 비운으로 타계한 뒤 20대 때 퍼스트 레이디 대역을 5년간 했다. 1998년 4·2 보궐선거(대구달성)에 당선, 국회의원이 된 이래 짧은 기간이지만 정치적으로도 고도성장을 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놓고 찬반이 분분하고 있어 지금 딸의 입장에서 세상 인심을 야속해하고 있을 것이다. 박 부총재는 “이젠 여성대통령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부통령제 개헌이 이뤄진다면 박 부총재는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여권이 전망하고 있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과 같다”는 박 부총재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제는 ‘전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서마는 아닌 듯 싶다. /淸河

용두각

수원의 화성(華城)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벼랑 아래에는 물 맑은 연못이 있는데 이러한 전설이 있다. 조선조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성(1794∼1796년)할 무렵 방화수류정을 짓기 전 이곳은 광교산에서 흘러 내려온 망천(忘川·수원천)이 휘돌아 나가는 깊은 연못이 있었다. 승천을 위하여 천년 수양을 쌓는 용이 산다는 전설이 서린 연못이었다. 이 용은 연못가에 놀러 나오는 나이어린 한 처자를 바라보는 낙으로 하루 하루를 지냈다. 어느 날은 발이 미끄러져 연못에 빠진 처자를 아무도 몰래 건져주기도 했다. 어쩌다 처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은 인간이 아닌 처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아름다운 처자는 혼기를 앞두게 되었고 용은 승천할 날이 가까워졌는데 시름거리가 생겼다. 용이 어느새 처자를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용은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에게 고민을 털어 놨다. 옥황상제는 용에게 인간이 되어 처자와 살든지, 아니면 처자를 잊고 승천을 하든지 택일할 것을 명했다. 승천을 택한 용이 어느 날 공중으로 떠오르며 연모했던 처자를 아주 잊을 수 없어 잠시 멈춰 처자가 사는 집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처자도 용이 승천하는 하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용은 가슴과 온몸이 굳어져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천년간의 노력이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용의 몸은 연못 옆으로 떨어져 내려 언덕이 되었고, 머리부분은 바위가 되었다. 후일 수원사람들은 용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를 용두암, 용이 살던 연못을 용지, 또는 용연이라고 불렀다. 화성을 쌓을 때 용두암 언덕에 지은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누각이 벼랑 아래 용지 수면에 비치는 일명 용두각으로도 불려지는 방화수류정 난간에 기대어 전설을 떠올리면 수원팔경 중 하나인 ‘용지대월(龍池待月)’이 더욱 신비로워진다. /淸河

부동산중개료

고려시대부터 쓰인 객주(客主)란 말은 객상주인(客商主人)의 준말로 거래를 알선하는 위탁매매업자를 뜻한다. 거간(居間)은 객주밑에서 흥정을 붙이는 것으로 전업자를 거간꾼이라 하였다.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포목(布木)거간, 양사(洋絲)거간, 우(牛)거간, 금전(金錢)거간, 가(家)거간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가거간은 가쾌(家쾌)라고도 하며 집주름이라고도 했다. 집뿐만이 아니고 토지등 부동산거래를 알선해 전 근대적 복덕방의 원조라 할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말기에 100여개의 복덕방이 있어 500여명의 가쾌들이 활동하던 것이 서구문물이 들어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난립하기 시작했다. 1890년 이를 규제하기 위한 ‘객주거간규칙’이 제정됐다. 이에따라 한성부(서울)에 한해 허가제가 실시되었으나 1910년 이후엔 다시 자유화 됐다. 누런 삼베에 ‘복덕방’이라고 쓴 초기의 복덕방은 노인들이 소일삼아 거간노릇을 해주고 중개수수료로 선물이나 인사치레의 구전을 받았다. 복덕방이 신고제가 된 것은 1961년 제정된 소개영업법에 의해서였고 중개업자가 중개사 자격시험에 의한 면허제가 된 것은 1984년 제정된 부동산 중개업법에 의해서였다. 부동산 중개업은 점차 기업화되면서 이젠 전문직종이 됐다. 건설교통부가 중개료 현실화를 위해 만든 관련 규칙이 중개사 업계에서 비현실적이라며 세찬 반발을 하고 있다. 중개료 규칙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기는 신·구규칙 모두가 마찬가지다. 지켜지지 않는 규칙은 없는 것만 못하다. 정부가 부동산 중개료까지 관여하기보단 차라리 자율화하거나 자유화해 업자끼리 자유경쟁에 의한 시장원리에 맡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白山

長官學

중폭 개각(8개부처 장관·3개부서 장관급)이 어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일까. ‘기술의 기(技)자도 모르면서 권력으로 다스리려는 장관이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지 않는 장관이 돼야 한다. 개혁성, 전문성, 참신성을 바탕으로 기용했다고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장관이 돼야 한다. 거짓말하는 장관이 있다. 그런 장관이 돼지 않아야 한다. 무책임한 장관이 있다. 자신의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장관이 돼야 한다. 대통령의 얼굴만 살피는 장관이 있다. 이런 장관은 장관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직언할줄 아는 장관이 돼야 한다. 장관이 자리에 연연하면 사람이 추해진다. 일은 장관노릇 십년할 의욕으로 하면서, 마음은 오늘이라도 당장 그만 둘수 있는 신념있는 장관이 장관다운 장관이다. 부처할거주의를 일삼는 장관은 장관재목이랄 수 없다. 장관은 부처업무를 장악, 부처공무원들의 존경을 받아야 제대로 일을 해낸다. 장관따로 부처공무원따로의 따따로가 된 실패한 장관들의 전철이 그런 교훈을 일깨워준다. 장관은 윗사람을 면종복배해서도 안되고 아랫사람들로부터 면종복배의 대상이 돼서도 안된다. 장관은 미래가치의 개척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장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형안이 요구된다. 장관은 정치인이 아니다.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장관의 품위를 스스로가 떨어뜨린다. 장관이 사심을 가지면 판단과 선택에 오류를 범한다. 장관을 그만 두어도 국민이 좋게 기억할 수 있는 장관이 돼야 한다. 장관이 장관답지들 못하면 나라 살림이 흔들리고 장관이 장관들다우면 국정이 편안해진다. 8·7개각의 장관들은 어떤 장관일는지?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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