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는 월(越)나라 왕 구천의 충신이다. 춘추전국시대 동상이몽의 오월동주(吳越同舟)끝에 오(吳)나라 왕 부차에게 크게 패한 구천은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채 도망쳤다. 범여는 와신상담 설욕을 노리는 구천을 무려 17년동안 도와 마침내 오나라를 항복시켰다. 그 세력이 회하유역까지 뻗쳐 구천은 패왕을 자처했다. 범여는 마땅히 대장군에 올랐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왕이 곤궁에 처했을때는 자기가 필요 했지만 승승장구한 형세에서는 자신이 후환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諸)나라로 간 범여는 변성명하고 산업을 크게 일으켜 부호가 됐다. 이소문을 들은 왕이 그를 불러 재상의 자리에 앉혔다. 얼마후 더이상 부귀 영화를 누리는것은 재앙을 자초한다고 보고 벼슬을 그만 두었다.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는 이번엔 도(陶)나라로 갔다. 그곳에서는 장사를 하며 여생을 편히 마쳤다. 더이상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덧없음을 알고 몸을 낮춰 은둔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를 가리킨 도주공(陶朱公)이라는 별명은 훗날 속편한 부자의 대명사가 됐다. 범여의 얘기는 권력의 속성에 따른 처신을 일깨우는 고사(故事)로 전한다. 원(元)나라때 편찬된 중국의 저명한 역사책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온다. 공석중인 총리 지명을 두고 말들이 많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말이 나올수는 있지만 정가주변에서 거목(巨木)을 발견할수 없는 것이 어쩐지 허전하다. 새삼 범여의 고사가 생각나는 것은 왠일일까. /白山
퀴리부부가 우라늄의 방사능 연구로 라듐과 폴로늄을 분리하는데 성공, 원자핵 물리학의 선구자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이 1903년이다. 소르본 대학 교수인 남편 피에르가 마차사고로 숨진 뒤에도 혼자 연구를 계속해 1911년엔 방사성물질량의 측정법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또 받았다. 폴란드계 프랑스사람인 그녀의 딸 졸리오 퀴리도 역시 유명한 물리학자였다. 남편을 여의고 난 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이자 주위에서 라듐연구에 관한 특허를 받도록 권유했으나 “학문을 돈으로 타락시킬 수 없다”며 끝내 거절, 학자적 양심과 자존심을 지켰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방사능 치료반을 조직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의 구호에 진력하기도 했다. 말년엔 방사능실험연구소 소장으로 여전히 연구에 골몰했다. 퀴리부인이 세상을 뜬 것은 1934년 그때 나이 67세였다. 오랫동안 방사성물질을 다룬 관계로 악성 빈혈을 일으켜 건강을 잃었던 것이다. 핵분열성의 상대성이론 확립으로 원자탄을 만들게 한 아인슈타인이 평화운동을 주창하였고, 이에 훨씬 앞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폭약무기의 획기적 개발을 가져온 노벨이 인류평화와 복지를 위해 노벨상을 제정한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방사능 연구의 효시를 이룬 퀴리가 방사능 피해를 입은 군인들을 직접 진료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를 위한 과학연구는 엉뚱하게도 이처럼 인류를 위협하는 공포의 무기로 둔갑한다. 쿠니사격장의 우라늄탄 시비도 그렇다. 군사무기측면에서 보다 과학문명의 인류애적 양식에 비추어 판단되기를 촉구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白山
16대 총선 당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요즘 심히 괴롭고 난처한 모양이다.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이 불법선거를 폭로하겠다고 수시로 협박을 하니 그야말로 ‘사람 참 환장할 지경’일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더구나 “나도 폭로하겠다”며 찾아오는 다른 브로커들 때문에 지구당 사무실에 얼굴을 못 내민다는 것이다. 어떤 당선자 경우는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한 운동원이 “사전 선거운동 증거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다”면서 수천만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불법선거를 폭로하겠다고 돈을 요구하거나 보좌관·비서 등에 대한 자리보장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의 취업까지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당선자는 지구당 사무실에 진을 치는 10여명의 운동원들 때문에 진이 빠졌다고 한다. 매일같이 사무실로 출근해 밥값을 요구하고 술값 영수증까지 들이대기 때문이다. “돈을 안 주면 재선거를 각오하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경우도 있다. 낙선자에게 찾아와 당선자의 불법운동을 폭로해 주겠다며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불법선거를 폭로하겠다는 단체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협박은 물론 선거관리위원회 실사결과 법정 선거비용의 2백분의 1이라도 초과 지출한 것이 확인될 경우 당선무효 가능성이 큰 현행선거법을 이용, ‘한몫’ 보자는 선거꾼들의 속셈이다. 그런데도 당선자는 벙어리 냉가슴이다. 아무리 작은 잡음이라도 불법선거의 꼬리가 밟히는 계기가 될수 있기 때문에 선거사범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는 10월까지만이라도 일단 무마하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일단 붙고 보자’고 수단 방법 안가린 당선자도 그렇고 한몫 챙기려고 계획적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참 치사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선거운동원까지 망신스러운 노릇이다. 믿을 사람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淸河
시흥시 하중동에 있는 ‘관곡지(官谷池)’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꽃(蓮花)시험 재배지로 유명한 연못이다. 200평 남짓한 이 관곡지는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강희맹선생(姜希孟·1424∼1483) 이 세조 9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연꽃씨를 채취해 처음으로 심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연꽃이 자라고 있다. 이 관곡지는 시흥이 군(郡)시절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했었는데 이 문화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하중동과 하상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시흥시가 이곳에 길이 1.3㎞의 왕복 2차로 도로를 개설하기 때문이다. 이미 도시계획 시설 결정에다 토지 보상까지 마쳤다고 한다. 이렇게 도로가 관곡지 바로 옆을 지나가게 되자 주민들과 YMCA,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앞으로 관곡지 옆을 통과하는 차량이 유발하는 진동이나 대기오염 등으로 연꽃의 생육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서 ‘관곡일대 문화유산 보호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한 이들은 500년된 연꽃연못을 없애겠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시흥시에 우회도로 개설을 촉구한 것이다. 시흥시는 우회도로를 개설할 경우 50억원 정도의 예산이 더 들어가는데다 도시계획시설 결정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 위례성지 풍납토성 유적이 우여곡절 끝에 보존하는 방향으로 결정나긴 했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을 함부로 매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200평 정도의 연못 하나 쯤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곡지 일대에는 강희맹선생의 묘소, 신도비 등 문화유적이 산재한 지역이다. 관곡지 보존은 말할 것도 없고 관곡지 일대의 지표와 학술조사도 곧바로 실시해야 한다. /淸河
1921년 5월 2일 안성에서 태어난 조병화(趙炳華)시인이 팔순을 맞이하여 50권째 시집 ‘고요한 귀향’을 상재했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내고 문단활동을 시작했으니까 1년에 한 권씩 시집을 낸 셈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 시문학사에도 유례가 없는 창작활동이다. 조병화 시인은 50권째 시집을 낸 소회를 “소감이 어떻소 당신의 물음에/담담하면서 허전합니다/팔십년 세월 나의 생애가/한꺼번에 쑥 빠져나가는 공허감을 느낍니다/절대 고독이 이뤄낸 절대허무의 희열로 충만합니다”라고 시로 썼다. 일찍이 세계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의 호칭을 받은 조병화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예술원 회장, 그리고 대학교 부총장, 대학원장도 지냈다. 그야말로 부러울 게 하나도 없을 조병화 시인은 그러나 자신의 아호 ‘편운(片雲)’이 상징하듯 인생을 한 조각 구름으로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주고 있는 명시들을 썼다. 문인들과 모일 때 비행기 안에서, 버스 안에서, 야외에서 문인들의 얼굴 옆모습을 몰래 스케치하여 슬며시 건네주며 ‘참 잘 생겼다’고 추켜 세워주는 조병화 시인의 일화는 유명하다. 1988년 문화부기자 시절 경기일보 창간 축시를 청탁하러 서울 혜화동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지지대子의 시집들 제목을 기억해준 추억도 있지만 조병화 시인은 전국 문인들의 작품집을 증정받으면 일일이 엽서로 답장해주는 따뜻한 보살핌이 있다. “나는 시를 살았지 만든 적이 없다”면서 시는 독자와 얘기해야지 평론가하고 하는 게 아니다”라는 조병화 시인이 최근 유서같은 묘비명 ‘꿈의 귀향’을 썼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 왔습니다” 지순지고한 철학이 깃든 행복한 삶의 말년(末年)이다. /청하
부엌 아궁이 불씨를 사계절 꺼뜨리지 않았다. 화롯불은 여름철에 꺼뜨려도 아궁이 불씨는 집안의 며느리 대대로 살려 내려갔다. 어쩌다 불씨를 꺼트린 며느리는 조상에 큰 죄를 진게 되어 대성통곡했다. 조선조 말 유황을 성냥개비같은 나무나 종이심지끝에 바른 유황성냥이 나오긴 했으나 이 역시 불씨에 대어야 발화되므로 불씨는 여전히 소중하였다. 1910년대 신 문물 도입에 따라 화약으로 만든 성냥이 보편화된 것은 불의 생활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성냥이 나오기전의 담뱃불은 화로를 이용할 수 없는 여름이나 야외에서는 부싯돌로 댕겼다. 부싯돌을 마주쳐 생긴 화점이 부싯돌에 댄 마른 쑥에 점화, 모락모락 타는 화기에 대고 담뱃불을 붙이곤 했다. 담배쌈지와 함께 부싯돌 쌈지 또한 필수품이었다. 이러던 것이 성냥이 대중화되면서는 아궁이 불씨도, 부싯돌도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1945년 광복후 미군이 들어오면서 퍼지기 시작한 라이터는 마침내 성냥을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군용이었던 지포라이터는 특히 인기를 끌었다. 라이터가 대중화하면서 갖가지 모형이 유행됐었다. 화목연료에서 연탄을 거쳐 가스가 널리 생활화하면서는 성냥이 완전히 필요없게 됐다. 금연풍조가 확산된 탓도 있지만 라이터마저 유행을 타는 시대가 지나 지금은 값싼 3백원짜리 플라스틱 라이터를 많이 쓴다. 그런데 이 플라스틱 라이터가 문제다. 액화가스는 그대로 있는채 고장이 잘나 쓰다 버리기가 일쑤다. 업소 선전용으로도 많이 쓰이는 플라스틱 라이터는 거의 독점상품이 되다시피하고 있다. 부실품으로 소비자들을 골탕먹이곤 하는 것은 장인정신이 없는 탓이다. “라이터 고장이 역겨워 담배를 끊겠다”는 애연가들이 더러 있다. /白山
미국의 우주장(葬)시대를 연 실레티스사가 내년에 200기의 유골을 달에 매장할 것이라는 외신보도가 얼마전에 있었다. 유골캡슐을 실은 로켓이 나흘동안 38만6천㎞를 날아 달표면에 충돌하면서 파묻히게 한다는 것이다. 유골당 1만2천500달러의 비용이 든다. 고인이 된 달 지리학자 메리트 웨스트씨 등이 예약됐다. 실레티스사는 1997년 4월 처음으로 우주장을 치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역시 유해캡슐을 실은 로켓을 지구상공 480㎞ 궤도에 쏘아올려 우주궤도를 선회케 했다. 우주정거장제안자 제타르드 오닐씨등 우주과학 관련자들과 별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뉴욕의 다섯살짜리 어린이등 24기의 유해캡슐이 쏘아졌다. 비용은 달매장 비용의 38.4%인 4천800달러였다. 그러나 1인당 평균 2.3∼3.2㎏ 나오는 유골가루를 캡슐에 다 담아 실어보내지 못한다. 3년전 지구상공으로 쏘아올린 우주장은 1인당 5.7g밖에 안된다. 내년에 달에 매장할 캡슐용량은 200g에 불과하다. 화장된 주검의 유골가루 가운데 극히 소량이나마 지구상공이나 달에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나라로 보낸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시신은 입다가 버린 옷이나 다름이 없다. 옷은 몸에 걸쳤을 때 비로소 맵시가 난다. 사람의 몸 또한 혼백의 옷이다. 입다버린 옷이 덧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백이 떠난 시신은 다만 관념적 존재일 뿐이다. 우주과학의 발달은 극성스럽게도 우주장, 달매장을 가져왔지만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한줌의 유골이 하늘나라로 가기보다는 혼백이 하늘나라로 가는 생전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본다. /白山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다/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으로 가리라” 조선시대 성종, 명종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던 송인수(宋麟壽·1487∼1547)가 남긴 시조다. 저녁놀이 어리는 맑은 강, 해질 무렵의 맑은 강에서 낚시질을 끝낸 사람이 버들의 가지에 비늘이 번쩍이는 물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 술집이 있는 마을로 걸어가는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작품이다. 곧은 낚시로 낚시질을 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강태공(姜太公) 이야기도 있지만, 낚시는 원래 사람을 명상에 잠기게 하고 때로는 시름을 물위로 떠내려 보내게 하는 운치가 있다. 낚시꾼 중에는 잡은 물고기를 도로 놔주는 사람도 있지만 낚시를 업으로 삼는 사람 조사(釣士)들도 많다. 잡은 물고기를 살려주는 사람은 낚시를 취미삼아 하지만, 조사들의 경우는 다르다. 낚시질은 삶과 직결된 어업 노동이다. 그런데 최근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 팔당댐 하류 지역인 한강에 불법 낚시꾼들이 몰려 든다고 한다. 지난해 8월 제정된 ‘한강 상수원 수질개선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일명 ‘한강법’에 따라 팔당댐부터 서울 잠실수중보까지 길이 12㎞의 한강 구간에서 낚시 등 수질을 오염시킬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하도록 규정돼 있는데도 불법 낚시꾼들이 방울낚시와 투망 등을 이용, 장어·붕어·누치 등 각종 민물고기를 남획하고 있다고 한다. 금지된 구역에서 낚시질을 하다 적발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어 좀 과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직업 낚시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몰래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직업적이건 취미생활이건 아무튼 창랑에 낚시 넣고 행화촌에 갈 생각하면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시절은 언제쯤 올까. /淸河
수원 관내 M초등학교 학부모라는 한 독자가 전화를 했다. M초등학교 교장의 그릇된 인식을 고발한다는 것이었다. 50대 초반이라는 교장이 너무 권위적이고 제왕적이라고 했다. 교직원이 복도에서 마주칠 때 목례를 하면 반드시 ‘교장 선생님’, 이라고 호칭하고 얼굴을 확인한 뒤 인사를 하란다고 했다. 학생들이 10분간 노는 시간에 교실이나 복도에서 떠들면 조용히 하게 하라고 교사들에게 호령한다고 했다. 수업시간에도 떠드는 게 어린이들인데 쉬는 시간까지 통제한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학부모는 강조했다. 교장실 맞은 편에 화장실이 있는데 직원들이 볼일을 본뒤 물 내리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여간 신경질을 내는게 아니라고 했다. 새벽에 일찍 나와 남몰래 학생 화장실을 청소하는 어느 교장선생님도 계시다는데 해도 너무한다는 것이었다. 교무실이나 행정실에서 사용할 복사기나 팩시밀리기 등을 구입하면, 새것을 교장실에 설치토록 하고, 쓰던 것은 교무실, 행정실에 내려 보낸다고 했다. 활용이 가능한 멀쩡한 사물함 등 학교비품과 교실의 알루미늄 새시 이중유리창문틀을 하이새시로 교체하여 학교재정을 낭비하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기가 먹을 음식은 직접 가져가야 하는 교내 뷔페식 급식소에서 영양사가 밥그릇을 가져다 바쳐야만 식사를 하는 모습은 점입가경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교직자들은 M초등학교가 아니라 M왕국으로 부르고 교장은 왕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교사로서 한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면 족하지, 무슨 출세를 어떻게 더 하려고 아랫사람들은 짓밟고 위에는 그렇게 아부를 하느냐면서 학부모는 전화를 끊었다. 이 학부모의 호소가 오해이거나 인신공격이라면 다행이지만, 정말 사실이라면 참으로 통탄스러운 교직자이다. /淸河
신라 24대 왕 진흥왕 12년인 551년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열리게 된 연등회(燃燈會)는 본래 부처님전에 등을 밝혀서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한 부처에게 귀의하려는 의미를 지닌다. ‘법화경’ ‘삼국유사’ ‘삼국사기’ ‘동국세시기’ 등 옛 문헌에 따르면 정월 대보름에 연등으로 밤새 불을 밝히며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던 풍습이 있었다. 이 시기의 연등은 대나무와 싸리나무, 그리고 칡넝쿨을 이용해 질 좋은 한지에 기름을 먹여 각종 꽃잎이나 나뭇잎으로 장식을 했는데 종류도 50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연등행사는 국가행사로 발전했는데 지금처럼 부처님 오신 날의 행사가 아니라 정월, 2월에 행해졌다. 사월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의종 때 나오는데 그 이후 궁중에서도 사월초파일 연등이 행하여졌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 연등회를 열었다. 이때부터 초파일 연등은 서민층에까지 확산돼 부처님 오신 며칠 전부터 집안의 자녀수대로 많게는 10개 이상을 주렁주렁 단 집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연등회는 거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를 “인민들을 기만하며 억압, 착취하기 위한 사상적 도구의 하나”로 까지 보던 북한에서도 지금은 각지의 사찰에 연등을 단다는 것이다. 북한의 지난해 연등에는 ‘영생’ ‘충성’ 등 김일성 주석의 영생을 기원하고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새긴 것이 많다. 또 ‘강성대국’ ‘군사대국’ ‘경제대국’ ‘자폭정신’ ‘결사옹위’ 등의 글귀도 새긴 연등도 있다고 한다. 1988년 5월 묘향산 보현사에서 석탄절 법회를 처음 개최한 북한이 불교의식을 40여년만에 재개한 것은 ‘북한은 종교가 없는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려는 데 있는 것 같다. 북한도 이제는 서서히 변해가는 모양이다. /淸河
과잉충성이란 말이 있었다. 자유당때 시작해서 군사정권시절에 많이 쓰였다. 주로 공직사회에서 성행했다. 정권이 의도하는 바를 알아 그에 영합하는 일종의 위법행위인 것이다. 선거나 고문에서 많이 행해졌다. 선거선심이란 것도 이때 생긴 것이다. 고의로 정전을 시켜놓고 촛불로 개표작업을 하는 올빼미개표, 손가락에 깍지를 끼어 야당후보표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드는 피아노개표가 이 무렵에 있었다. 기권자를 투표한 것처럼 꾸며 여당후보의 몰표를 투표함 이송직전에 넣기도 했다. 고문도 그랬다. 민주화운동의 시국사범을 다루면서 혹독한 고문으로 엉뚱한 사람에게까지 혐의를 옭아매곤 하였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과 관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2억4000만원, 손배승소 확정판결에 따라 국가가 청구한 구상금 소송이 승소했다. 국가가 박씨 유족들에게 지급하는 돈을 물어내야 할 사람들은 당시 치안본부장 K씨등 관련자 9명이다. K씨는 고문을 직접 지시하진 않았으나 고문경찰관을 도피시키는 등 직무유기등 불법행위가 인정된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전에는 과잉충성을 하면 위에서 기특하게 여겨 출세시켜주는 예가 많았다.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민도가 깨어 이심전심의 과잉충성도 벼락출세도 용납지 않는 세상이 됐다. 재판중인 고문기술자 L씨도 자업자득이지만 그같은 과잉충성의 피해자인 셈이다. 정권은 유한하다. 공무원의 과잉충성은 자신도 망치고 자칫 잘못하면 가산도 탕진하는 패가망신의 길이다. 아직도 과잉충성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 공직자가 있으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白山
올 어버이날에도 그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카네이션 대신에 무궁화를 어버이들 가슴에 달아주자는 수원 영복여고 학생들의 나라꽃사랑 캠페인이 해마다 있었다. 벌써 10여년째다. 학생들은 이같은 캠페인을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수원시내 직장단체를 찾아다니며 벌여왔다. 카네이션 달아주기는 1908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살던 한 처녀가 어머니추도회에서 한상자의 카네이션을 바친데서 비롯됐다. 안나 져비즈라는 이 처녀는 그후에도 어머니의 은공을 기리는 어머니날 제정을 주창, 자신이 지닌 유산을 다 쏟아부었다. 헌신적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윌슨대통령의 감복으로 매년 5월 두번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공인된 것이 1914년이다. 이어 1934년에 아버지날이 정해졌다. 우리나라도 처음엔 어머니날만 있었던 것을 아버지를 포함한 어버이날이 제정된 것은 1974년이다. 이를테면 아버지들은 어머니들 덕분에 덤으로 어버이날을 갖게 된 것이다. 훈화초, 근화(槿花)라고도 불리는 무궁화는 반만년동안 국내에 많이 자생해온 대표적인 꽃이다. 단군이 개국할때부터 목근화가 나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후에도 중국에서 우리나를 지칭할때는 근역(槿域), 즉 ‘무궁화의 나라’라고 지칭한 문헌이 많이 남아 있다. 이처럼 유서깊은 무궁화가 드디어 국화로 지정된 것은 조선조말 개화기에 윤치호등의 발의로 애국가가 창작될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구절이 들어간데서 비롯됐다. 어버이날에 미국식의 카네이션보다는 국화꽃인 무궁화를 달아주자는 영복여고 학생들의 나라꽃사랑 캠페인은 의미가 깊다. 경로효친의 전래사상을 전래의 나라꽃으로 상징하는 것은 곧 우리의 혼을 지킨다 할 것이다. /白山
죽음 앞에는 장사가 없다. 그러나 더러는 이에 초연한 삶이 있다. 이러한 당자가 개인업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우러러 존경심을 갖게 된다. 하물며 국가대사에 관여하는 사람의 그같은 초인적 노력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고(故) 엄익준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이런 분이다.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도 이를 숨긴채 남북정상회담 관련의 중대사를 음지에서 도우며 진통제로 고통을 견뎠다. 사표를 낸 것은 회담성사가 확정된 뒤인 지난달 8일, 일이 잘된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마음놓고 물러난 것이다. 뒤늦게 현대 중앙병원에 입원했으나 3일 오후 3시15분께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고인과 비슷한 분으로 약10년전 배석대법관이 있었다. 그 역시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 미제사건을 줄이기 위해 밤새워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작고하기 보름전 사표를 쓸때 비로소 알았다. ‘현직에서 죽으면 조직에 누를 끼친다’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사표를 냈다. 배대법관 역시 그때의 나이가 고인과 같은 57세로 아까운 나이였다. 두분의 성품이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히 순국의 공직자 상이다. 간암말기는 견디기 힘든 통증이 괴롭힌다. 고인이 회담 성사를 위해 남모를 뒷바라지를 하면서 겪었을 그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 쓰리다. 평생이라 할 34년동안 몸담았던 국가정보원葬으로 지난 6일 삼성의료원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미망인 임미대자씨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퇴직금은 장학금으로 기증하고 조의금조차 정중히 사절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숙연케 했다. 삼가 명복을 비옵나니 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白山
죽음 앞에는 장사가 없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대개는 의욕이 꺾여 자포자기할 것이다. 살아도 이미 사는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이에 초연한 삶이 있다. 이러한 당자가 개인업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우러러 존경심을 갖게 된다. 하물며 국가대사에 관여하는 사람의 그같은 초인적 노력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고(故) 엄익준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이런 분이다.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도 이를 숨긴채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중대사를 음지에서 도우며 진통제로 고통을 견뎠다. 사표를 낸 것은 회담성사가 확정된 뒤인 지난달 8일, 일이 잘된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마음놓고 물러난 것이다. 뒤늦게 현대 중앙병원에 입원했으나 3일 오후 3시15분께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고인과 비슷한 분으로 약10년전 배석대법관이 있었다. 그 역시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 미제사건을 줄이기 위해 밤새워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작고하기 보름전 사표를 쓸때 비로소 알았다. ‘현직에서 죽으면 조직에 누를 끼친다’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사표를 냈다. 배대법관 역시 그때의 나이가 고인과 같은 57세로 아까운 나이였다. 두분의 성품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히 순국의 공직자 상이다. 간암말기는 견디기 힘든 통증이 괴롭힌다. 고인이 회담 성사를 위해 남모른 뒷바라지를 하면서 겪었을 그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 쓰리다. 평생이라 할 34년동안 몸담았던 국가정보원葬으로 오늘 삼성의료원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삼가 명복을 비옵나니 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白山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지난 2일 김영배 민주당 상임고문이 김대중 대통령의 역대 보좌진 모임인 인동회(忍冬會)의 모임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인동회의 4·13총선 당선자 축하 오찬에서 김 고문은 당선자 대표 답사 말미에서 “김 대통령이 자신의 임무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완수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음 정권의 창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야당시절 보좌진 출신들이 모인 인동회 회원으로서 지극히 당연하고 충성스러운 발언이다. 그러나 “자칫(정권재창출) 실패하면 이 나라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휘몰아칠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이날 모임에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과 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 김옥두 민주당 사무총장을 비롯, 4·13총선에서 살아난 20명의 당선자와 200여명의 회원이 참석했었다. ‘피바람’은 국어사전에는 아직 없지만, 온통 피가 낭자한 곳을 형용하여 일컫는 ‘피바다’와 비슷한 말이다. 그러니까 김 고문은 민주당에 소속된 인물이 DJ에 이어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피바다에 빠져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셈이다. 차기정권을 잡지 못하면 ‘정치보복’을 당할지 모르니 합심하자는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 고문은 발언 후 말썽이 나자 ‘별다른 정치적 의미없이 차기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열심히 하자는 의미로 한 얘기’라면서 발언을 취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고문은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설화라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가 못하다. 속된 말로 경종을 울리기 위해 ‘미친 척’하고 총대를 멘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김성재 청와대수석이 “다수(영남)의 단결은 불의이고 소수(호남)의 단결은 정의”라고 하더니 이번엔 민주당 총재대행까지 지낸 사람이 ‘피바람’을 몰고 왔다. 추종자들이 무얼 믿고 큰소리 치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래 저래 DJ는 골치 아프겠다./청하
오늘 한국의 국회는 의사당만 있고 국회의원은 실종됐다. 4·13총선 전에는 선거 때라 해서 ‘개점휴업’상태였고, 지금은 선거가 끝나니 낙선자들이 너무 많아 국회를 열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계속 놀고 있다. 제210회 국회가 지난 2월9일 종료된 후 벌써 석달 가까이 ‘놀고 먹는’ 것이다. 과외대책, 금융시장 안정대책, 남북 정상회담 지원책 등 시급한 국정이 막중한데 국회가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5대 국회의원중 절반에 가까운 낙선자들에게 임시국회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인정상으로나 정치현실적으로 무리라며 임시국회 소집에 난색을 보이는 여야 지도부의 입장표명도 한심스럽다. 어차피 6월에 소집될 16대 국회가 개원하면 곧 바로 임시국회가 소집될 예정이기 때문에 현안들은 그때 다루면 된다는 논리까지 펴고 있어 그동안의 행적이 더욱 의심스럽다. 15대 국회는 분명히 5월29일까지 일을 해야 한다. 그때까지는 제16대 선거의 당선자든 낙선자든 국민의 세금으로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이다. 그런데 선거 후 무려 한달 반 동안이나 놀게 된다면 ‘무노동 유임금’에 해당된다. 입법부의 직무유기인 것이다. 낙선자들이 안나오거나 참석시키기가 정 어렵다면 4·13총선에서 당선된 15대 의원들만으로 주요현안이 관련돼 있는 상임위를 재구성해 의사를 진행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제15대 국회는 아직 3주일 정도의 임기가 남아 있다. 성의와 의지만 있다면 당장 임시국회를 열어 국정현안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벌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다. 하루 빨리 임시국회를 열어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낙선한 국회의원들이 의연하게 등원하여 국정을 논한다면 유권자들이 두터운 신뢰를 보낼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임기끝까지 국정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淸河
쿠바의 유명관광지 바라데로 해변은 해외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춘단지다. 달러박스인 것이다. 지난 1995년 처음 번창할 무렵 단속이냐 방관이냐를 놓고 고민한 쿠바정부는 유감스럽지만 달러 획득을위해 어쩔수 없는 관광산업의 부산물로 단정지었다. “쿠바엔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매춘여성들이 있어야 한다”고 카스트로는 말했다. 수년전, 정치인과 귀족 억만장자들을 상대로 해온 고급 매춘조직이 파리당국에 의해 적발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젊은 여성의 모델 가수 배우 등과 관계를 가진 남성은 거의가 저명인사들 이었다. 프랑스 국내는 말할것 없고 아랍왕자, 영국의 거물언론인, 스페인 멕시코의 실업인 등 외국인들도 많았다. 이들의 대가지불은 시간당 1만2천프랑(160만원), 하룻밤을 지내는데는 12만프랑(1천600만원), 주말을 같이 지내는데는 50만프랑(7천만원)이었다. 엄청난 화대에도 불구하고 예약이 밀려 캐나다 스페인 스웨덴 이스라엘 러시아등지의 모델이며 연예인들을 고용할 정도였다. 고객 가운데는 18개월 동안에 무려 150만프랑(2억원)을 탕진한 인사가 있었다. ‘싱클레이 남작’ ‘마담질’로 통한 두 조직의 50대 포주들은 고객 관리에 철저한 신변 보호로 번창을 누렸으나 결국 철창을 면치 못했다. SBS-TV가 어젯밤 11시, ‘뉴스추적’ 프로를 통해 폭로한 일부 여성 연예인 매춘 실태는 충격이었다. 하룻밤 꽃값이 1천만원이고 백지수표까지 거래한다니 연기가 본업인지 매춘이 본업인지 구분이 안된다. 매춘은 구약성서에도 나온다. 쿠바같은 사회주의 국가조차 직업아닌 직업으로 인정할 만큼 오랜 직업이지만 오랜 지탄의 대상이 되어온 사회악 이다. 파리의 거액 매춘파동의 한국판이라 할 서울의 거액 매춘파동에 관련된 손 큰 위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白山
1957년에서 63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맥밀란은 아내 도로시의 간통을 30년동안 감쌌다. 도로시가 정부 부스비와 놀아나 낳은 딸아이를 자신의 딸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맥밀란은 도로시의 이혼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먼훗날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이혼요구를 거부한 것은 정치생명에 가해질 치명적 타격도 타격이지만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미국사회에서도 대통령후보의 이혼경력은 치명적이다. 다만 레이건은 이를 극복하고 재선에까지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다. 건국한지 일천했던 1950년대에 군·관계에서 벼락출세한 이들이 미모의 지식층 여성들과 재혼하기 위해 조강지처와 이혼하는게 유행이 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이상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선 지도층의 이혼경력이 별 흠으로 여기지 않는 그릇된 풍조가 아마 이에 연유하지 않았는가 싶다. 이혼은 무명의 서민층에서도 점점 더 심화하는 것 같다. ‘경기도 2000년 도정 주요통계’에 의하면 95년 한해동안 1만2천66쌍에서 97년 1만6천658쌍, 99년 2만1천938쌍으로 해마다 2천2백여쌍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혼을 대수롭지 않게 아는 잘못된 생각은 가정의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를 병들게 한다. 요즘 부부들은 중매도 아니고 연애 끝에 결혼한다. 부부로 만난데 대한 서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아무리 상대를 잘 알았다해도 결혼하고 나서는 미쳐 몰랐던 단점을 서로가 알게 되는 것이 부부다. 그렇긴 하나, 선택한 책임감속에 세파에 시달리며 미운정 고운정 들면서 살게 마련인 것이 또한 부부이기도 하다. 이혼의 유혹은 악마의 속삭임이다. 이혼은 지도층뿐만이 아니고 민초들에게도 품성의 도덕적 가치기준이 된다. 서로가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상의 마음가짐이 부부의 참 사랑이다. /白山
각 부처 장관들 이름을 아는게 상식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장관이름은 고사하고 부처 명칭마저 정확하게 아는 이들이 드물 것이다. 아마 전 부처의 명칭과 장관들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국민이 백명이면 한명이나 있을지. 오히려 장관 이름보다 청와대 비서들 이름이 더 귀에 익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비서실을 줄이고 직급도 낮추었다. 국정의 중심을 내각에 둔다고도 했다. 비서실운영의 폐단을 막는 것으로 환영받았던 군살빼기가 2년여가 지나면서 다시 군살이 배겨 비대해졌다. 국정의 중심 또한 내각보다는 비서실에 있는 인상이 다분하다. 대통령 비서실은 정책결정기관이 아니다. 대외적으로 공표능력이 있는 기관장도 아니다. 그저 대통령을 음지에서 묵묵히 보필해야 하는 보조기관이다. 음지에서 말없이 일해야 할 비서들이 양지로 뛰쳐나와 설치는 것은 대통령을 지근에 둔 위세로 보이기 십상이다. 관련부처에 앞에 무슨 시책을 청와대 비서가 먼저 밝히는 것은 국정의 난맥이다. 말도 많다. 말이 많다보니 엉뚱한 소리가 나오곤 한다. ‘소수의 단결은 정의이나 다수의 단결은 불의’라는 말을 한 김성재 정책기획수석이 구설수에 올라있다. 민주당의 호남 싹쓸이는 정의이고 한나라당의 영남 싹쓸이는 불의라는 뜻의 ‘정의·불의론’은 소피스트적 궤변이라는 지탄이 높다. 대통령 비서실은 옛날 왕명의 출납을 맡고 있었던 승정원과 같다. 승정원의 승지들이 설쳐대서 잘된 때가 없었다. 비서실의 비서들은 직급이 고하간에 어디까지는 비서다. 자유당 시절에는 경무대(당시 청와대 명칭) ‘비서정치’란 말이 있었다. 자고로 승지나 비서는 모름지기 몸을 낮추어 말을 조심해야 한다. 자중해야 하는 것이다. /白山
요즘 방영되고 있는 KBS-TV의 주말사극 ‘태조 왕건’을 보면 신라 제51대 임금 진성여왕(재위 887∼897년)과 진성여왕의 삼촌이며 각간(角干·진성여왕 당시 가장 높은 벼슬)인 김위홍(金魏弘)의 통정(通情)이야기가 나온다. 진성여왕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사극 ‘태조 왕건’은 위홍과 진성여왕의 관계를 다루면서 이들이 삼촌과 조카 사이라 해서 이를 불륜으로 몰아갔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삼촌과 조카가 몸을 섞었다면 불륜을 넘어 패륜이지만 역사를 1천년 이상 거슬러 신라사회로 들어가보면 이들 사이는 불륜이 아니라 로맨스다. 왕을 중심으로 한 신라 지배층 사이는 근친혼이 대단히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들, 같은 어머니 밑에서 난 형제자매가 아니면 친인척 누구와도 혼인이 가능했고 그래야만 했던 사회가 바로 신라였다. 예컨대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년)의 동생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딸, 즉 조카인 지소부인과 결혼을 해서 제24대 진흥왕을 낳았다. 또 김유신은 여동생인 문희와 김춘추 사이에서 난 딸과 혼인을 했다. 그러니까 김춘추는 김유신의 처남이면서 장인이고 문희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면서 장모인 것이다. 신라는 이처럼 근친혼이 성했다. 오히려 지배층에서는 근친혼을 해야만 했다. 이런 전통은 고려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 위홍과 진성여왕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한 것은 현대 유교적 도덕기준에 따른 것이지 신라인의 눈으로 본다면 귀족사회의 로맨스다. 위홍은 서기888년 대구화상이라는 스님과 함께 신라 향가를 모은 ‘三代目’이라는 시가집을 편찬한 인물이다. 그 ‘삼대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면 이런 시가집 편찬을 명령한 진성여왕이나 그것을 직접 만든 위홍이 색욕으로 가득한 인물들로만 혹독한 평가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淸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