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수정화경사증류비용본초 권17은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보물 제1716호이다. 『증류비용본초(證類備用本草)』,『정화본초(政和本草)』등으로 약칭하기도 하며 전 30권이다. 당신미(唐愼微)의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와 구종석(寇宗奭)의 『본초연의(本草衍義)』를 합편한 형태로 편찬된 것으로 본초학의 명저로 불린다. 총30권 가운데 1권(권17) 1책(45장)이 잔존하는 영본으로 활자로 인행한 판본이다. 비록 1권 1책(권17)에 지나지 않는 잔본이기는 하지만 표지를 개장한 이외에는 낙장이 없이 완전하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조선전기 한의학과 본초학의 연구는 물론 서지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나만갑(1592~1642)의 행적을 기록한 비다. 본관은 안정이고 호는 구포다. 인목 대비의 서궁 유폐 사건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관향사가 돼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신도비는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ㆍ글씨를 새기는 부분)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방부개석 양식을 갖추고 있다. 비문은 김상헌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ㆍ전서체로 비석의 이름을 새긴 부분)은 김수항이 썼다. 비문에는 가계와 청년 시절, 관직 생활, 교유 관계, 자손 현황 등을 기록했다. 1658년(효종 9)에 건립했다. 현재는 구리 사노동 산163번지에 위치했으며 지난 1985년 6월28일 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세의득효방 권10~11(世醫得效方 卷十~十一)은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보물 제1250호이다. 13281337년에 원나라 남풍의 의학교수 위역림(危亦林)이 조상인 고조할아버지부터 이후 5대 동안 치료했던 경험방을 모아 편찬한 의학책을 조선 세종 7년(1425)에 활자로 다시 새겨 찍은 것으로 총 20권 22책 가운데 2권 1책이다. 『세의득효방』은 조선 세종 7년(1425) 2월에 춘천부사에 의해 원나라판을 모방해 총 20권 22책으로 간행됐는데, 의학시험을 위한 교재와 강의서적으로 널리 읽혔다. 이것은 권 제1011의 영본(零本:여러 권으로 1질이 되는 책에서 빠진 책이 많아 남아있는 부분이 적은 책)으로 권 10은 두통, 면병 등 10항목, 권 11은 활유론(活幼論), 초생(初生) 등 22항목이 수록되었다. 비록 20권 가운데 2권 1책이긴 하지만, 국내에 희귀한 의학책으로 의학연구자료 및 서지학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덮개돌이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 묘역시설, 무덤방 등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금현리 지석묘는 북쪽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국사봉과 죽엽산이 있으며, 국사봉에서 흘러내린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 포천천과 합류된다. 이곳의 지석묘는 고임돌 3매가 남아 있는 탁자식 지석묘로 장축 방향이 주변에 흐르는 우금천의 물 흐름과 같은 남북 방향이다. 덮개돌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판석형이며, 그 아래의 고임돌이 기울어져 있지 않아 안정감이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5.5m, 너비 4.8m이며, 마름모꼴의 형태다. 현재 포천 가산면 금현리 304-10번지에 위치해있으며 1983년 9월19일에 도 문화재자료 제47호에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우주두율(虞註杜律)은 인천 연수구 옥련동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우리나라 보물 제1209호이다. 이 책은 중국 당나라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칠언율시를 중국 원나라의 학자 우집(虞集)이 주(註)를 붙이고 해설을 한 것을 성종 1년(1470)에 당시 청주목사 권지가 청주목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의 글씨는 괴산군수 박병덕이 썼고 교정은 이경방이 보았다. 또한 책을 간행한 연월이 발문을 쓴 연월보다 1년 앞서며, 서(序)발(跋) 및 간기 등이 완전하여 서지학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재조본 유가사지론 권42는 지난 2010년 8월25일 보물 제1658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고려 고종34년(1247)에 판각돼 그 무렵에 인출된 것으로 보이는 고려대장경 재조본이다. 현재 보물 제969호(유가사지론 권64) 및 보물 제972호(유가사지론 권55) 지정본과 동일본으로 판단되나 권42는 현재 유일본이다. 최근 이 유가사지론의 경문에서 고려시대에 각필로 구결을 표시한 현상들이 밝혀지고 있어, 국어학계에서도 주목받는 판본 중에 하나다.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직후인 13세기 중후기에 인출한 초기간본으로 인쇄상태가 선명하다. 현전하는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 간본 중에서 고려 때 간인한 것이 드문데다 상태가 비교적 온전해 그 가치가 높다. 현재는 고양 일산동구 동국로 137-48 소재 원각사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 좌상은 평택 약사사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조선시대 보살상이다. 31㎝의 작은 상으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를 받들고 있는 지장보살상이다. 경기도에서 흔하지 않은 경주 불석으로 제작했으며 전체적으로 호분을 발라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불석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산출되는 무른 돌로 조각하기 용이하며 17세기경부터 불상의 재료로 사용됐다. 두건 형식이나 법의를 입은 방식과 넓은 면으로 처리한 옷주름 표현, 손모양 등에서 경북 청송의 대전사 명부전 석조지장보살상의 약화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약사사 보살상 역시 이러한 계보의 상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된 18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지난 2013년 11월12일 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춘추경좌씨전구해 권60~70(春秋經左氏傳句解 卷六十~七十)은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1208-1호이다. 이 책은 조선 세종 13년(1431)에 경상도관찰출척사 조치와 도사 안질의 주선으로 참의 박분의 가장 선본인 좌씨전(左氏傳)을 구해서 청도지군사 주소의 책임하에 청도에서 출간한 것이다. 발문 뒤에 선덕육년 십일월 청도개판이란 간기가 있고 그 다음에 간행제원의 관명성명이 10행에 걸쳐 기록되었는데 교정도색색기관각수 등의 이름도 열기되었다. 위의 발문에 의하면 좌씨전은 우리나라에서 이때 처음으로 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좌씨전이 낙질(落帙)이기는 하나 조선초기 간본 좌씨전으로 발문간기간행제원의 성명이 열기되어 있어 서지학연구는 물론, 경서 특히 좌씨전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제공
대목장은 집짓는 장인을 일컫는다. 목수 또는 목장으로도 불렸다. 이들 가운데 전체 일을 주관해 이끄는 장인을 도편수 또는 도대목으로 지칭했다. 경국대전에는 대목장과 소목장의 구별 없이 목장으로만 기록됐으나 고려시대에도 집을 짓고 가구를 짜는 두 분야의 영역은 따로 있었다. 목수의 일은 과정이 복잡한 만큼 소임에 따라 여러분야로 체계화된 조직을 구성해 활동했다. 대목장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일찍이 지정받은 고(故) 배희한, 고(故) 이광규, 고(故) 고택영과 신응수, 전흥수, 최기영 등이 있다. 지방에도 여러 장인이 각기의 전승체계를 통해 기능을 잇고 있다. 경기도는 대목장 보유자로 2001년 제36호 장효순(1939~)을 지정해 활발히 전승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산거사요(山居四要)는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보물 제1207호이다. 태사령 양우의 산거사요(山居四要)를 원나라 학자 왕여무가 증보편집한 것으로, 4권 1책이다. 이 책에서는 산촌(山村)에 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알아야 할 네 가지 요결을 사항별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즉 총 4요결을 74항목으로 나누고 각 항목 아래에 해당사례 및 대증(對證: 증거 조사를 하는 것), 처방 등을 서술하고 있다. 간행된 때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머리글이나 맺음말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보존 상태로 보아 조선 성종대로 보인다. 이 책은 건강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의약서적으로, 조선 전기 의학서적간행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무덤으로 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학동 지석묘는 광명 벌말의 뒷산 경사면에 위치하며 1997년 한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지석묘 덮개돌로 추정되는 석재 11기가 확인됐다. 이 중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지석묘는 덮개돌 길이가 2.9m이며 4개의 받침돌 중 3개는 무너졌다. 주변 지역의 지석묘에서 가락바퀴돌화살촉반달돌칼 등과 청동기시대의 집터 1기가 조사됐다. 가학동 지석묘는 탁자식 지석묘이지만 돌방의 벽석인 받침돌의 크기가 작고, 덮개돌들이 두꺼운 형태인 것으로 보아 한반도 중부지역 탁자식 지석묘의 지역적 특징이 잘 나타난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의 번영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난 1985년 6월28일에 도 문화재자료 제58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초조본 십주비바사론 권17(初雕本 十住毗婆沙論 卷十七)은 인천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보물 제1206호이다. 십주비바사론은 보살이 수행하는 데 있어 계율을 지키는 방법과 보살의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 화엄경에 포함돼 있다. 이 책은 고려 현종 때(재위 10111031)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십주비바사론 17권 가운데 마지막권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종이를 길게 이어붙여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세로 30㎝ 가로 47.3㎝의 종이를 28장 이어 붙인 것이다. 인쇄상태와 종이질 등을 고려해 볼 때 11세기에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건륭59년5월3일군호재가문서는 조선 정조 18년(1794) 5월3일 병조에서 야간경비를 볼 때 사용한 군호문서(군중에서 사용하는 암호를 전달하는 문서)다. 문서는 당시 병조시랑이던 윤장렬이 정조에게 군호를 재가받고자 두 글자를 써서 올리자 왕자였던 순조가 두 글자와 함께 군호 밑에 가(可)자를 쓰고 서명을 놔 재가했다. 문서에는 병조의 도장 7개가 찍혀있다. 이 문서는 당시 병조의 야간경비 때 사용하던 군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현재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386번지에서 소장 중이며 지난 1994년 10월29일 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향약제생집성방 권6(鄕藥濟生集成方 卷六)은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보물 제1178호이다. 향액제생집성방은 고려시대 김희선 등이 모은 『삼화자향약방』과 조선시대 권중화가 펴낸 『향약간역방』을 중심으로, 당시의 의료경험과 의학서적을 참고, 보충해 태조 7년(1398)에 펴내고, 이듬해 김희선이 강원감영에서 간행한 의학과 약학에 관한 서적이다. 『향약제생집성방』총 30권 가운데 제6권으로 완질이 아니며, 간행경위와 약방문 수록 범위 등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특히 이『향약제생집성방』은 세종 15년(1433)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체질에 맞는 향약을 개발,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문화재청 제공
신립장군묘는 광주 곤지암읍 신대리 산 1-1번지에 위치한 문화유산으로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장공 신립 장군의 묘다. 신립 장군은 선조 즉위년(1567)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전라경상의 3도 순변사로 임명됐다.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했으며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남한강에 투신 자결했다. 죽은 후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묘는 부인 전주 최씨와의 합장묘로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돼 있다. 묘비는 묘의 왼쪽에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다. 문화재청 제공
재조본 경률이상 권1(再雕本 經律異相 卷一)은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보물 제1155호이다. 경률이상은 경(經)과 율(律)에서 요점을 주제별로 뽑아 출전을 표시하여 학습하는데 편리하게 엮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목판을 새기고 제본한 것으로 짐작하여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체 50권 중 제1권에 해당된다. 또한 새긴 사람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새긴 사람의 솜씨에 따라 정교하고 조밀함의 차이를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양주 소놀이굿은 설과 입춘을 맞아 가족의 번창과 풍년을 기원하는 굿으로, 소굿쇠굿소놀음굿마부타령굿이라고도 한다. 양주소놀이굿의 유래는 양주지방에서 산신으로 여기는 감악사에서 나왔다는 설과 농경의례의 하나로 풍년을 비는 데서 나왔다는 설, 소장수가 잘 되기를 바라는 데서 나왔다는 설, 궁중의례에서 나왔다는 설, 굿의 여흥으로 이뤄졌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소와 말, 하늘을 숭배하는 소멕놀이에 기원을 두고 무속의 제석거리와 마마배송굿 등에서 자극을 받아 형성된 놀이로 보고 있으며, 양주지역에서만이 아니라 서울과 경기강원충청황해평안남도에서도 행해져 왔다. 소놀이굿은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석거리에 이어서 놀이를 시작한다. 소를 위하고 자손번창과 장수를 비는 농경의례적인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굿의 가사가 세련된 평민 가사체로 돼 있고 다른 굿에 딸려 노는 굿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놀이이다. 지난 1980년 11월1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전등사 대웅보전 후불탱(傳燈寺 大雄寶殿 後佛幀)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에 있는 유물로,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1호이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삼존불좌상의 후불탱으로,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1916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한 폭에 석가와 약사, 아미타를 그린 일폭삼세불화(一幅三世佛畵)이다. 전체적으로 황토색과 진한 녹색, 밝은 벽돌색의 색 배합을 보이고 있으며, 얼굴이나 의습에는 20세기 초기에 경기도 일대에서 유행했던 서양화식 음영법이 가해진 그림이다. 문화재청 제공
평택 팽성읍 동서촌로 101-3(객사리)에 위치한 팽성객사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지어졌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일제시대에는 양조장과 주택으로 사용되다 1994년 해체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양 옆에 동ㆍ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달에 두번 절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붕도 동ㆍ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ㆍ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됐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난 1989년 6월1일 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仁川 舊 大和組 事務所)는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7번길 96-2에 있는 109.9㎡ 규모의 건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567호이다. 대화조(大和組) 사무소는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인천항에서 조운업(하역업)을 하던 하역회사 사무소 건물로 근대 일본 점포겸용주택의 하나인 정가(町家, 마찌야) 유형의 건물이다. 인천 일본조계지에 현존하는 유일한 정가 양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인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역노동자의 노동력착취의 현장으로써 역사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