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갑곶돈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성곽시설로, 1984년 사적 제306호로 지정됐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금오계첩은 광명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장지에 주문(朱文)으로 인찰(印札)을 두르고 의금부(金吾)의 전경과 계회 장면, 참석자들의 직함을 포함하는 명록(名錄)을 열기한 것으로 가치가 인정된다. 총 5책 규모로 지난 2010년 3월23일 도 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돼 현재 광명의 시 문화체육과에서 보관 중이다. 그동안 광명이 이원익 선생과 관련한 문화유산 이외에는 이렇다 할 유산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발견이라는 평이다. 사진에 있는 계첩은 이인복이 생전 의금부에 재직하던 당시 관원들과 함께 계를 열 때 만든 계첩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는 인천 검암동 일대에서 1011세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었던 56기의 고려 가마터이다. 가마터 주위 지세는 얕은 비탈을 이루며 바다로 이어져 있다. 현재는 발굴조사시 드러난 가마의 남은 부분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발굴 당시 가마 1기를 조사하여 많은 녹청자조각과 가마도구들을 발견했다. 가마는 자연 경사를 이용한 것으로 칸이 없는 통가마이다. 3차례에 걸쳐 다시 고쳐 쌓았는데, 경사도 20도 안팎의 가마바닥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경사진 넓적한 자기로 만든 도지미를 깔고 그릇을 구웠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에서 구운 것은 녹청색의 짙은 청자로 유약은 녹청색녹갈색으로 표면이 고르지 못하며, 문양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드물게 병의 몸통에 주름무늬가 보인다. 토기의 형태는 대접, 접시, 병류가 많다. 출토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말발굽 모양의 자기로 만든 베개(도지미)와 유사한 것으로, 중국 북방 청자가마터에서 사용된 것이고, 녹청자가 녹갈색이나 암록색을 띠는 것도 중국 북방의 청자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두 지역간의 영향관계도 앞으로 연구해 볼 문제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인 낙서 장만(15661629) 선생의 영정 2점과 진무공신 1등에 봉함을 명하는 교서이다. 그는 말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1등으로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이다. 영정은 공신도 형식의 초상화 1점과 유학 복식의 초상화 1점이다. 그 중 공신도 초상화는 인조3년(1625)에 도화서 화원에 의해 그려졌는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보이는 전형적인 공신도에 속하는 작품이다. 초상화와 함께 보관중인 교서는 장만을 진무공신 1등에 봉한다는 내용이며, 여기에는 모두 32명의 공신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인물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크기는 가로 375㎝, 세로 198㎝이다. 문화재청 제공
공화춘(共和春)은 인천 중구 선린동에 있는 상업시설로, 2006년 등록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됐다. 1908년 무렵 건립된 이 건물은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중국인이 지은 중국 요릿집이다. 중국 산동 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型)의 중국식 건물로, 현재 정면은 다양한 색깔의 타일로 마감했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 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됐다. 그러다가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의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 요릿집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문화재청 제공
문배주는 평안도에서 전승돼 오는 술로 술의 향기가 문배나무의 과실에서 풍기는 향기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문배주는 해방전에는 평양 대동강 유역의 석회암층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사용했다고 한다. 원료는 밀좁쌀수수이며 누룩의 주원료는 밀이다. 술의 색은 엷은 황갈색을 띠며 문배향이 강하고 알코올 도수는 본래 40도 정도지만 증류 및 숙성이 끝난 문배주는 48.1도에 달하므로 장기간 저장이 가능하다. 보통 반년에서 1년 동안 숙성시켜 저장하는데 문배나무의 과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문배향을 풍기는 특징이 있다. 지난 1986년 11월1일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6-1호에 지정됐으며 김포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로 자리잡았다. 문화재청 제공
분오리돈대는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유적건조물로, 1999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됐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돈대는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넓으며,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평면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4곳에 문을 설치한 외곽 포대로, 관아에서 돈장을 따로 두어 관리하게 할 정도로 중요했다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명을 동원해 쌓았다. 문화재청 제공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옹진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및 분바위는 인천시 옹진군에 있는 자연유산으로, 2009년 천연기념물 제508호로 지정됐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란 바다나 호수 등에 서식하는 남조류나 남조박테리아 등의 군체들이 만든 엽층리가 잘 발달한 생퇴적구조를 갖는 화석이며 석회암의 일종으로서, 고생대 이전인 선캄브리아누대(Precambrian Eon)의 고환경과 생명의 탄생 기원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학술적, 교육적 가치를 갖고 있다. 선캄브리아누대의 스트로마톨라이트 산출은 남한에서는 소청도의 석회암 내에서만 보고되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평양 부근 등에서 산출되고 있다.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내에서는 국내 최초로 박테리아 화석이 보고되어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화석(원생대 후기; 약 6억 내지 10억년 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안산대부광산 퇴적암층은 중생대 후백악기의 응회암질 사암 내지는 이암으로 구성돼 있다. 1999년 대부광산 암석채취 중 초식공룡 케리니키리움 발자국 1족이 발견신고된 이후 총 23개의 공룡발자국 및 식물화석 클라도플레비스가 발견되었다. 이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9개는 현재 안산시에 보관중에 있다. 퇴적층을 구성하는 많은 층리의 색깔 및 두께의 변화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지역이 당시 호수지역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대부광산의 절개된 퇴적암층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두껍게 절개되어 있고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화산암체(큰딱섬 등)와 공룡 발자국 화석 등이 분포하고 있다. 대부광산 퇴적암층은 서울 근교에서 유일하게 중생대 지질층과 화산암체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고, 인근 화성의 시화호 공룡알화석지(천연기념물 제414호)와 관련되어 당시의 식생 및 환경을 판단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지질층이다. 문화재청 제공
영화초등학교 본관동은 인천 동구에 있는 대한제국시대 학교시설로, 2001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다. 선교와 신식교육을 위해 설립된 영화학교의 현교사는 1909년 우각현의 대지 1천226평을 사들이고 연면적 212평의 3층교사를 1910년 3월 30일에 착공하여 1911년 9월14일에 완공하였다. 현 위치는 동쪽 언덕 위에 여선교사합숙소(현,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과 남선교사합숙소(구, 동인천세무소청사), 아펜젤러 사택(현, 변전소) 부근에 있으며 특히 여선교사합숙소와 근접하여 건립된 이유로는 당시의 교사들이 대부분 여선교사들이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 건물은 현관부분을 돌출시킨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1954년 건물입구쪽의 돌출부분을 증축하여 흔적만 남아있다. 증축된 부분들을 제외하고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평균 22710959크기의 재래식 벽돌을 이용한 적벽돌 구조의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동두천민요는 동두천 일대에 전승되는 민요를 묶어 지난 2013년 12월31일 도 무형문화재55호로 지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논농사 소리라 불리는 노동요와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와 장례의식에 부르던 의식요, 백중놀이에 부르던 유희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요들이 총망라돼 있다. 또한 한 마을에 전승되는 민요만이 아니라 인근 마을에 전승되던 소리를 모두 한데 묶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모를 낼 때가 되어도 날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아 모를 낼 수가 없으면 마을에 첫 아들을 낳은 아낙네들이 키를 가지고 시냇물에 나가 물까부리 비나리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천지 신명님께서 비를 내려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논농사소리로 모를 심을 때에는 모심는 소리인 훠나기소리를 부르며 장례의식에서는 상여를 운상하는 상여소리를 부르는데, 옛날 상여소리와 근대 상여소리, 잦은 상여소리 등으로 나눠진다. 문화재청 제공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이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집(1569~1644)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심집은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공조예조 판서를 역임했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몽진(蒙塵)할 때 호종(扈從)해 호종공신이 됐다. 심집의 묘는 원래 시흥시에 있다가 인천시 서구 공촌동으로 이장했다.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비대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상의 영정은 소릉 이상의(李尙毅)의 초상화로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1613년(광해군 5) 위성공신 3등 녹훈 당시 그려진 영정초본이다. 17세기 전반에만 특징적으로 사용된 낮은 사모와 짧고 도톰한 운문장식 날개, 적갈색 필선의 간략한 얼굴선묘와 선염법 중심의 음양식 이중명암법이 사용됐다. 현재 단령 속에 입은 중의의 옷깃에 칠한 연백이 산화돼 검게 변색된 상태이며 족자 표장은 20세기 후반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영정은 17세기 초 영정으로는 유일한 희소성과 역사성이 분명하여 큰 가치가 있으며 현재 유일하게 알려진 위성공신상의 초본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상의 영정은 여주이씨 문중에서 가전돼 오던 것으로 지난 2011년 11월12일 후손인 이효성(李曉成)이 안산시에 기증했다. 현재는 안산 상록구 성호로 131 이동 소재 성호(이익)기념관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청련사 원통암 감로왕탱(靑蓮寺 圓通庵 甘露王幀)은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일제강점기 불교회화로, 2004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됐다. 감로탱은 망인의 천도를 위해 우란분경(盂蘭盆經)의 내용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화면 가운데 커다란 상에 성반(盛飯)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는 광경을 중심으로 위에는 7불이 나란히 서 있고 좌측편에는 아미타삼존불이 우측편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이 묘사되어 있다. 성반 아래에는 두 마리 굶주린 아귀가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로 지옥과 현세의 여러 생활상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대정(大正)5년(1916)에 제작된 것으로 전반적으로 색이 둔탁하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166.5㎝, 세로 146㎝이다. 문화재청 제공
본 건물은 1914년 과천군 서이면의 면사무소로 세워졌던 건물로 1917년 현 위치(안양 만안구 장내로143번길 8)로 이건되어 존치되어 왔다. 현존 건물은 안양시의 상업중심지구에 위치하며, 전면으로 도로를 접하고 향우측 및 맞은편에는 상업시설, 향좌측에는 안양1동사무소가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6.5칸, 측면 2칸의 몸체에 우측으로 꺾여 2칸이 덧붙은 ㄱ자형으로 구성되었고, 구조는 전퇴5량가로 구성되는 일반 살림집과 달리 후퇴5량가로 구성되고 전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각주를 사용한 소로수장집으로 지붕은 홑처마팔작으로 구성되었다. 창호 등 부분적으로 변형이 있으나 전체 가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부재의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본 건물은 20세기 초반의 치목 및 가구 기법과 의장 수법을 간직하고 있으며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문화재청 제공
연수구 흥륜사 소장 자치통감강목 제23 상권(延壽區 興輪寺 所藏 資治通鑑綱目 第二十三 上券)은 인천시 연수구 흥륜사에 있는 조선시대 기록유산으로, 2004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됐다. 세종은 이 자치통감강목의 인출을 위해 필요한 방대한 용지를 중앙과 지방관서에 만들게 하는 한편, 강(綱)의 본문은 진양대군에게 큰 글자를 쓰게 하여 1436년 연(鉛)으로 주조하고 병진자(丙辰字)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목의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는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甲寅字)를 사용하여 1438년에 찍어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시대 정조(17761800)가 수원에 있는 장릉에 가는 길에 머무르던 객사이다. 객사는 외부 관리들이 그 마을에 들렀을 때 숙소로 이용하던 곳으로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다. 현재 객사 건물은 인조 27년(1649)에 세운 것으로 원래 자리는 지금의 중앙동사무소가 있던 자리인데 1986년에 과천시 관악산길 58(관문동)로 옮겨 현재에 이르렀다. 온온사란 정조가 이곳에서 쉬는 동안 매우 편안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지방장관이 일을 처리하는 동헌은 부림헌이라 했다. 이 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고 한다. 건물은 지붕의 가운데를 양쪽보다 약간 높게한 전형적인 객사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신간소문입식운기론오는 조선시대 기록유산으로, 201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됐다. 가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간소문입식운기론오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의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에 근원하여 운기(運氣)가 질병의 발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정리한 의학전문서이다. 16세기에 간행된 초창기 목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조선에서 갑진자본 금속활자로 번각한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전래인본이 드물고 그 내용 또한 한의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특히 간행시기가 16세기로 국내에 희귀하게 남은 조선전기 간행 의서로서 가치가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한의서 중에 동일한 인본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도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경국대전은 최항ㆍ노사신ㆍ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들어 세조 때 편찬에 착수해서 몇 차례의 수정과 증보를 거쳐 1485년(성종 16)에 완성하여 반포한 조선조의 통치체제의 대강을 규정한 기본법전이다. 경국대전은 처음 찬집이 시작된 이래 4차의 편찬과 수정을 거쳐 1485년 을사대전으로 완성을 보았으며, 이후부터는 수정과 증보를 가하지 않고 영세불변의 법전으로 준행하도록 했다. 그 결과 현전하는 경국대전은 판본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을사대전을 모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1470년(성종 1) 11월에 인반하고 1471년 신묘(성종 2) 정월부터 준행된 신묘대전을 초주갑인자로 인출한 권3의 예전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현존하는 경국대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법제사 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하겠다. 지난 2007년 7월 보물 제1521호에 지정돼 현재는 안양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