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지혜와 자비에 관하여

올해 부처님오신날 봉축 표어가 ‘지혜와 자비로 세상을 아름답게’ 였다. 불교가 추구하는 가르침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지혜와 자비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불교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緣起)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는 말로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쓰는 쉬운 말로 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로 설명 가능하다. 팥을 생산하려면 팥이라는 씨앗을 뿌려야 한다. 콩을 심어서는 팥이 나지 않는다. 씨앗을 심고 가만두면 자라지 않는다.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으려면 흙과 물 공기 바람 햇볕 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름을 주고 잘 가꿔야 한다. 그래서 팥 씨앗을 심어서 열심히 가꾸면 팥이 난다는 것이 연기다. 이처럼 세상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기고 그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이치를 배워 아는 것이 지혜다. 사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거나 사람이 아닌 절대적인 힘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등은 불교의 지혜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지혜는 불교 책 몇 권 읽고 경전을 연마한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참선해서 ‘깨우쳐’ 아는 것도 아니다.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은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자비다. 발고여락(拔苦與樂),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는 것을 자비라고 한다. 자비를 행하려면 우선 마음속으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를 사무량심(四無量心), 네 가지 한랑 없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배려하는 마음인 자(慈), 고통과 아픔을 덜어주려는 비(悲), 다른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는 희(喜),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여기는 사(捨)가 그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을 사섭법(四攝法)이라고 한다. 돈 음식 같은 물질이나 좋은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보시,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애어(愛語),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이행(利行),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누리려는 동사(同事)를 말한다. 그런데 자비는 쉽게 마음에서 생기지도 실천에 옮기지도 못한다. 하나하나 살펴보더라도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내 자식은 좋은 대학을 못 가서 속이 상한데 제 자식 좋은 대학 보낸 친구의 기쁨을 내 일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비를 행하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함부로 권할 수 없다. 그런데 자비를 행하면 다름 아닌 내가 행복해진다. 남의 자식 잘된 꼴을 시샘하고 그렇지 못한 내 자식 원망한들 내 마음만 무겁고 불편할 뿐이다. 상황은 바뀌지 않는데 나 혼자 화나고 짜증 내봐야 내 몸과 마음만 상할 뿐이다. 그럴 바에야 나도 ‘쿨 하게’ 박수치고 좋아하는 것이 내 정신 건강과 몸에도 좋다. 그래서 자비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가장 좋은 보약인 셈이다. 그렇다 해도 쉽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복지관 등에 가서 봉사하거나, 구호단체 등에 월정액을 기부하거나, 장기기증을 실천하는 등 자꾸 몸을 움직여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이 쌓이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지혜와 자비, 불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금과옥조로 여기고 실천해야 할 삶의 목표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아이들에게 최고의 꿈을 꾸게 하자

어떤 소녀가 부모와 함께 미국 전역을 여행하던 중 백악관을 구경하게 됐다. 그 소녀는 건물 외관을 찬찬히 응시하다 이렇게 말했다. “아빠 제가 백악관을 밖에서 구경해야 하는 건 피부색 때문이에요. 두고 보세요, 저는 반드시 저 안에 들어갈 거예요” 25년 후 그녀는 부시 전 대통령의 외교정책 자문관으로 당당히 백악관에 입성한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02년 그녀는 아들 부시 대통령의 최고위 참모인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재입성한 후 2004년 마침내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의 국무장관이 되어 세계무대에서 미국을 대표로 많은 활약을 했다. 그의 이름은 ‘철의 목련(Steel Magnolia)’ 콘돌리자 라이스다. 어린 시절 라이스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덴버대학 2학년 여름, 그녀는 아스펜 음악제에 갔다가 그녀의 오랜 꿈을 접게 되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11세 소녀가 그동안 라이스가 배운 모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카네기 홀에 가보지도 못하고 피아노 바에서 인생을 마칠 수도 있겠구나” 그 후 라이스의 방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아버지인 코펠 교수의 국제정치학 강의를 듣던 중 마법에 걸린 듯 ‘러시아’에 빠져들게 된다. 졸업 후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스탠퍼드 대학에 자리 잡은 그녀는 스타 교수이자 최연소 부총장, 최고의 러시아 전문가로 발돋움한다. 자기 분야에서 늘 최고가 되기를 갈망했던 흑인 소녀는 백악관 입성과 함께 그 꿈을 이룬다.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며, 어떤 꿈을 꾸게 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한국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현주소는 유감스럽게도 OECD 국가 중 74점(2014년)으로 행복지수 최하위다. 16년에도 여전히 꼴찌이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하루 공부시간은 7시간 50분으로 세계에서 제일 길고,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비율은 50.5%로 세계에서 제일 높다. ‘아이는 국가의 미래다’라는 말과는 달리 공부를 잘하라고 강요받은 다수의 아이들이 불행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탄력회복성의 저자는 “성적만을 강조하는 학부모와 학교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집단적인 불행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약하고 불행해 하며 병적인 수준의 불행감을 느끼며 집단적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과 조바심치는 학부모들의 맹신적 사교육 강요에 대해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실내화라는 죄수 신발을 신고 공부란 벌을 받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필자는 이 글을 옮기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학부모 여러분! 각양각색의 재능과 창의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생기발랄하게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를 노래하며, 바닥에 떨어지면 산산조각나는 유리공이 아니라 찰고무공 같은 회복 탄력성을 갖은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날이 오게 해달라. 멋진 경치를 보여주고 훌륭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오케스트라 공연장에도 데려가고 어느 날 부모님들이 제공한 한 번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이루어 놀라운 인물들이 되게 하는 일이 여러분 손에 달렸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언 22장 6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갈등

‘갈등’(葛藤)이라는 한자는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형상으로 집단과 집단 사이의 지나친 대립이나 적대심 또는 불화를 가리키는 단어다. 태생적으로 반대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등나무와 칡의 넝쿨이 한 나무를 타다 보면 결국에는 서로 엉켜 푸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의미다. 마르크스(Karl Max)와 베버(Max Wener), 그리고 짐멜(Georg Simmel)은 사회의 구조를 갈등에 기초하여 설명하였다. 인간의 역사를 계급 간의 갈등의 역사로 본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변화가 소유집단과 비소유집단 간의 갈등과 투쟁의 결과라고 보았고, 권력분배의 불평등에 기인하는 권력 갈등을 설명한 베버의 이론에 기초한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는 권위의 차별적 분배로 인한 갈등이론(Conflict Theory)을 성립하였다. 그리고 심리적 전제 위에서 갈등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한 짐멜은 교육이 사회계층, 계급 간 이동을 활성화시키기보다 기존의 불평등한 계층 및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여 갈등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6월 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가 갈등의 골을 깊게 파고 있다. 새삼스런 일들은 아니지만 전략적 이유로 ‘건수’를 잡아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물론 변할 수밖에 없는 사회 현상에 대한 적응의 과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이 심히 불편할 뿐이다. 거기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드러내는 대기업의 ‘귀족’(?) 갑질로 인한 갈등은 마치 국민과의 대결 국면을 형성할 정도다. 마르크스의 소유집단과 비소유집단의 갈등과 투쟁도 옳고, 막스의 권력 갈등도 옳고, 짐멜이 주장하는 불평등한 교육으로 인해 재편성되고 재생산된 갈등도 옳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미스런 사회 현상은 배운 내용을 건전하게 적용하거나 응용하지도 못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예수는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유대의 지도층을 향해 ‘독사의 새끼!’라고 욕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했다. 그 행위가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는 패륜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썩어빠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위들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고,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영위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했다. 사람은 갈등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권이 있다. 즉 사람으로서 정당하게 누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갈등을 조장하는 도구로서 사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사람을 무시하고 이용하기보다 존중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필요하겠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 살만한 정당한 사회가 될 것이다. 5월이다. 갑질 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달이다. 다른 달 다른 날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몰아두었을까? 5월이 신록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이 희망의 계절에 사람으로서 그 권리를 인정받고 희망을 보장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받을 대상으로서 존중하고 존중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정말 이 마음이라면, 이 믿음대로 서로를 배려한다면 골 깊은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갈등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60년 이상 묵은 남북의 갈등도 풀어내려는 시점에 어려운 게 뭐가 있을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자유와 정의가 없는 평화나 통일만은?

기름과 물은 같은 한 그릇에 쏟아도 하나로 융합되지 않는다. 남북통일의 근본적인 장애물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며 적대시하는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이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국가나 조직체들과의 허구 많은 정치적 대화나 국제적 평화회담의 가치와 의미와 교훈을 되돌아볼 때, 대부분이 약속 불이행으로 무효화 결과를 지난 1세기 동안 비일비재하게 보아왔다. 남북 지도자들의 이번 판문점 회담 선언으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들떠 있는 지금 온 국민은 냉엄하고 진솔하게 오늘의 우리 인류가 나아가는 길을 이탈하지 말아야 하겠다. 만일 북한이 남한처럼 자유와 정의와 진실이 살아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였다면, 지금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살 것이며, 패전국 일본 수준을 넘는 경제발전을 쉽게 이룩하여, 대만이나 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뿐 아니라, 1950년 10월에서야 정부수립을 선포한 오늘의 중국이 아직 약체를 면치 못하던 시절, 동명고강(東明故疆)의 동북 3성 회복, 관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승전국에 들어있는 남한이 패전국 일본이 자위대 3만여 명의 비무장 호기에 대마도 회복 관리를 소홀히 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만시지탄이 있으나, 지금의 몽골처럼, 자유부재 사회제도를 신속히 탈피하는 철저한 탈공산주의화(脫共産主義化) 정책 실천만이 시급한 경제발전은 물론, 북한 현대화의 연착륙이 가능할 것이다. 북한이 지금이라도 인민들의 경제활동 자유를 보장한다면, 2~3년 안에 국민소득과 국가 경제 지수가 200~300% 발전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며, 살벌한 사회 분위기도 사라지고, 훈훈한 인간 대동체(大洞)의 본 모습이 살아나, 남한과의 통일이나 세계와의 대화나 회담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 불바다니, 평양 잿더미니, 핵실험이니, 대륙 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니, 북폭이니, 하는 무력 폭언의 홍수가 일시 겨우 멈춘 지금, 우리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가 이번 판문점 회담 선언의 비핵화나 평화통일 거론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하며, 의심을 못 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니, 이 불신을 불식시켜야 하는 지금의 북한 지도자들의 고충과 노력에 우리는 이해와 동정의 협력까지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1953년 3월 초, 소련 스탈린이 죽자, 소련의 16개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는 민주화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지만, 프라하에서는 포성과 화염 속에서, 겨우 너더댓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들의 손에 등이 떠밀려서, 울면서 서로서로 고사리 같은 어린 손들을 맞잡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이 어린 아이들 앞가슴 옷자락에 붙인 헝겊 조각에 적힌 글들이 어렵게도 바깥세상, 로마에까지 전해지자, 자유 세계인들은 슬픔과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당시, 한국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14세 전후의 가난한 우리들에게까지도 알려지던 그 헝겊 조각 통신이 전하는 눈물겨운 소식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들을 만나거든, 우선 눈물을 닦아주시고, 너무 울지 않도록 울음을 그치게 달래주십시오! 허기진 배를 채우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지금 우리 국민들의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소련 공산당원들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가는 부모들이 싸움터에서 알리는 유일한 최후의 부탁입니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바람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소련의 무자비한 바르샤바 조약 공산군 20여만 명에 의하여, 피바다를 이루며 끝을 맺었으나, 1978년 10월 폴란드 공산권 출신의 보이티야(Karol Wojtyła) 추기경이,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로 즉위하면서, 폴란드를 시작으로 무신론 공산주의 소련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전 유럽이 민주화의 물결로 경제번영의 길에 매진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월남과 월맹의 동남아 10년 전쟁 말기에, 거듭 반복되던 대화와 회담에 모두가 지쳐 있을 때, ‘파리 평화 협정’ 발표는 전 세계를 환영과 기쁨으로 열광케 하였었으나, 美蘇英中佛, 5개 강대국의 입회보증도 아무 소용이 없이, 월남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나라가 되었다. 우리가 반드시 참고할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우리도 연등처럼

올해부터 정부는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변경하기로 의결하였는데, 부처님 오신 날은 불교의 연중행사 중 가장 큰 명절이라 봉축법요식, 제등행렬, 탑돌이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지만, 하이라이트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위와 땅 위에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 나는 일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없애 편안케 하리라”하여 중생들에게 광명을 준 날이라는 의미를 정성을 담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부처님께서는 무명(無明)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진리의 등불을 밝혀 주시고, 그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심으로써 중생 모두가 본래 청정하다는 것, 즉 누구나 부처님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 땅에 진리가 머물고 삶의 보람을 열어 보이기 위해서라고 우리 곁에 오심을 설하셨다. 더불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행해지는 ‘연등회’는 1천200여 년 전,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축제로 이제는 불교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등 공양은 향 공양, 차 공양, 꽃 공양, 과일 공양, 쌀 공양 등과 더불어 여섯 가지(육법) 공양 중의 하나다. 즉, 등불은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가 있어야 우리의 삶도 바르게 보며 참되게 살게 된다는 이치다. 하여 등불을 밝히는 것은 반야지혜로 어두운 무명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화경(燃火經) 등의 경전에는 등불 신앙에 대해 “일체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항상 그 몸으로 등의 대(臺)를 삼고, 마음으로 심지를 삼고, 계와 향으로 기름을 삼으라. 깨달음의 등불은 능히 일체 무명의 어둠을 퇴치한다”하였고, 보살장경에는 “만 개의 등불을 켜서 뭇 죄업을 참회한다”고 하는 만등법회(萬燈法會)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견삭경에서도 “진언(眞言)을 외면서 등불을 켜 함께 공양하면 모든 장애가 제거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무릇, 우리가 밝혀야 할 등은 지나간 삶 속에서 지었던 자기의 허물에 대한 참회의 등불, 생명의 길을 밝게 열어 주는 등불이어야 한다. 메마른 생명들이 자비와 광명 속에 포근히 젖을 수 있는 생명수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가난한 마음과 인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나누어 주는 보시의 등불이 되어야 하고, 명예와 권력에 눈먼 사람에게는 무상(無常)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시기와 투쟁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자비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보다는 남을 위해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에, 전국의 사찰에서 연등을 밝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전하고, 아기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봉축하며 이날을 기린다. 5월22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 사부대중은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을 켰으면 한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봄이 오는 길목을 지나며

봄이 오는 길목을 지나며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에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유난히 추었던 긴 겨울도 지나가고 천지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위의 시는 이혜인님의 ‘봄이 오는 길목에서’의 일부이다.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했는데 식물이 봄이 오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온도를 감지하는 능력인데 개화를 담당하는 유전자가 히스톤 단백질과 결합되어 겨울 동안에는 유전자와 엉겨 붙어서 개화 기능을 막고 있다가 기온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단백질이 풀어지면서 개화 유전자가 자기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봄에 피는 꽃들은 기온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면서 동시에 낮의 길이도 길어져야 꽃을 피우는데, 이 말은 낮이 12시간 이하인 계절이 지나는 경험을 한 후 즉 일정한 시간 이상 ‘암흑’이 지속된 후에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꽃을 피우려면 오랜 기간 추위를 제대로 견뎌야 한다. 겨울에 방 안에 들여 놓은 화분은 봄이 되어도 꽃피울 생각을 하지 않으나 발코니에 방치해 놓은 화분이 봄에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 춥고 어두운 겨울 같은 시간을 보낸 인생이 아름다운 꽃과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같은 이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봄에 일찍 피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들은 공통점이 있다. 꽃들이 자잘하다는 것이다. 함께 펴야 멀리서도 잘 보이고 크고 화려한 꽃들이 피기 전에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지어 핀다. 그래야 벌들이 찾아와 종의 보전을 도와준다. 어떤 인생은 장미요, 다알리아요 글라디올러스다. 그 하나하나로 가치가 있고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무리지어 피는 개나리나 진달래 같은 삶도 있다. 평범하고 뛰어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무리지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봄에 자연에서 배우자.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잊지 말자. 꽃이 피기 위해 긴 어둠의 시간이 필요하고 적절한 온도와 일정한 양의 햇빛이 필요한 것을 개화 유전자가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개화 호르몬이 있어 인생의 겨울이 지나고 개화의 환경이 되었을 때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구약성경 전도서 3장 1절, 11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과유불급

미투운동으로 온 나라가 요란하다. 과거에는 무시되었던 여성 인권에 대한 눈뜸의 새로운 풍속도다. 눈뜨고 나면 ‘나도 그랬소!’, ‘나도 그랬다!’, ‘나도 그랬어!’의 연속이다. 그런데 두말할 필요 없는 긍정적인 사회변동의 신호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것은 왜 그럴까? 괜히 강의나 설교하다가, 아니면 지금처럼 글을 쓰다가도 조심스러운 것은 마녀 사냥하듯이 내몰려 사회변동의 역행자, 사회정의 실현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매도되어 버릴까 걱정이 앞선다. 이에 더하여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이 사회운동이 극단 세력의 반대급부로 역풍 맞을 것 같아 염려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그의 동문이었던 사(師: 子張)와 상(商: 子夏) 둘 중에 누가 더 어진 사람인지를 스승에게 물었을 때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자공이 “그러면 사가 낫다는 말입니까?” 라고 되묻자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라고 하였다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아무리 어질고, 아무리 좋은 것이고, 아무리 현명한 일이라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적당주의의 찬사가 아니라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절히 행해야 그 행하는 것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말일게다. 꼭 미투운동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선의의 결정이나 중요한 정책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뇌(無腦)한 사람처럼 책임지지 못할 선동적 구호만 외쳐대다가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발뺌하는 것도 그렇다. 또한 밝혀진 명명백백한 사실에 대하여 조작, 모함 운운하며 신성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에 사대적 성조기와 불문곡절 이스라엘 국기까지 볼모로 흔들어대는 것도 지나칠 정도다. ‘토라’라고 부르는 구약성서 처음의 다섯 책인 모세오경 안에는 613개 율법이 들어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법이다. 이 법은 248개의 계명과 365개의 금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계명에 비해 금령이 더 많은 걸까? 원죄를 안고 태어난 사람의 부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도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자신을 살피며 살아야 할 것같이 의도적으로 주어진 이 숫자는 주목하는 이로 하여금 지금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했고,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오히려 비판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마태복음 7:1-3). 남을 비난하고 고발하기에 앞서 반드시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찔러대면 아픔이 더 커지고 아물 수 없는 상처만 남게 되지만, 배려하고 격려하는 돌봄은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낫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갖게 하는 마력이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절히 행하는 것이 낫겠다. 비록 고발과 대결의 미세먼지로 뒤덮인 세상을 살고 있지만 마음이라도 쾌청했으면 좋겠다.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서로에게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배려함으로 믿어주고, 격려함으로 힘이 되어주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비핵화와 평화통일 위한 세계적 성지, 포르투갈 파티마

최근 우리는 ‘남북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매우 자주 즐겨 쓰고 있다. 특히, 종교계에서는 통일을 위해서라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정신이 매우 지배적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더욱이 정치적으로, ‘평화’를 위해서는 武力과 재력이 우선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침략군들을 막는 국가 안보나 강도로부터 개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신변안전과 최근 우리가 흔히 쉽게 즐겨 쓰는 ‘平和’라는 말의 뜻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이 자신들에게 없는 평화를 상대방에게 줄 수는 없다. 우선 양쪽 모두가 자기들끼리나 먼저 칼을 버리고,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고 있는 평화로운 동족 국가들이라야만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칼을 갈면서 평화를 외치던 소리들은 모두가 거짓이었음을 현대 인류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 평화의 뿌리와 기초는 善이다. 그래서 善은 平和의 어머니며, 평화는 善의 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평화는 칼과 돈으로 탄생되지 않고, 善에서 태어나게 마련이다. 참된 平和는 善을 기초와 원천으로 삼아, 자유와 정의와 진실의 터전에서 태어나 사랑을 먹고 마시며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는 한마디로, 터 없는 집이 세워질 수 없듯이, 또 어머니 없는 딸이 태어날 수 없듯이, 善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선한 사람과 함께 말하며 일하면서, 우리는 평화를 느끼고 배운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살면 한 집안에서도 불화가 그칠 날이 없다. 사회 단체나 국가 간에도 善한 사람들이 없으면 논쟁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다. 善하지 못한 사람들과 善이 없는 국가와 사회에는, 아무리 돈과 칼을 많이 주어도 그들과의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다. 군국주의 강대국 일본과, 부국강병을 이룬 히틀러의 독일에 평화가 있었는가? 종교인들은 설교와 기도 중에,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외치는 노력 그 이상으로, 남북 양쪽 사회와 국민 개개인들이 먼저 선한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자신들이 아직은 善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업의 受容性조차 전무하다면, 어떻게 평화통일이 가능하랴? 수천만명 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고 죽어 가던 세계 제2차 대전 말 1945년 끝까지 參戰하지 않고, 自國의 軍人 1名도 2차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는 포르투갈뿐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포르투갈은 중남미와 아프리카와 인도와 특히 마카오 점령에서 보듯이 극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양 군사 대국으로서 무수한 전쟁을 감행하며 위세를 떨치던 싸움꾼의 정복자 나라였다. 그러나 1917년 포르투갈의 빈민 지역 파티마(Fatima)에 살던 10세 미만의 시골 어린이들 3명에게 천상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6개월 동안 매월 한 차례씩 발현, 10월 중 마지막 발현 때는 전 세계에서 걸어서 모인 7만5천여 명의 풀밭 군중들에게 “인류가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또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회개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라”고 강조하셨다. 포르투갈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이 초자연적 천상 인물의 발현은 로마 교황청과 전세계, 특히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포르투갈 국민들은 1차 세계 대전이 속히 끝나도록, 모두가 회개하여 善良한 국민들이 되도록, 또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포르투갈은 전쟁불가 국가로서뿐 아니라 끔찍한 강력범죄가 거의 없는 나라로도 유명하게 되었다. 현재 파티마는 매년 60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와 세계 평화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성지로, 가난하던 포르투갈에 매년 30억불 이상의 순수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더불어 같이 살라

봄은 우리 중생들에게 새로운 시작이요, 희망이다. 더욱이 인생에 있어 신록의 시기에 해당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새 봄은 졸업과 입학의 관문을 맞이하게 되므로 한층 각별한 의미가 있다.졸업은 말 그대로 하나의 업(業)에 해당하는 시기를 마치고(卒), 또 다른 업을 향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고, 졸업은 성취해야 할 업을 마치고 새로운 업을 향하는 출발이며, 아울러 입학은 새로운 과업에 도전함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렇게 우리들이 졸업과 입학의 의미를 반복하여 되새기고 준비할 때, 학계와 언론에서는 분주하게 우리 인간들의 업을 정리 평가하고, 네트워크 사회를 향한 우리들의 업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전망하는 지표들을 쏟아낸다. 그래서 향후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네트워크 사회는 ‘지구화’라는 명제를 던져준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니며 서로 그물처럼 상대방과 얽혀서 서로 의존하고 존재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가장 중추적인 방식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부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은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명에 의해 비롯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행복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 다시 말하면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아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더불어 잘 살도록 선업을 닦는 불교적인 삶의 실천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에서는 새로운 지구화 시대를 준비하며, 지난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강대국들이 이제 약소국들의 발전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물론 이는 약소국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빈곤과 굶주림이 자국의 풍요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는 강대국만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사실과, 약소국들의 희생 위에 그들이 풍요를 누려 왔으며, 약소국들의 발전이 없는 그들만의 풍요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강대국들의 생산품을 소비하고, 재생산을 위한 재화를 공급하는 약소국들의 역할이 비로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법에 잘 설명되어 있다. 연기법은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존재하고, 서로 의존하여 발전하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지구화 시대를 이끌어 갈 방향이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이미 전파하셨던 가르침이라는 사실은 감탄스러운 것인 동시에 놀라운 일이다. 연기법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평화를 구현하는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동방의 빛이라고 찬탄했듯이, 새 봄에 졸업과 입학을 맞이하는 우리 청소년들이 연기법을 가슴에 새기고 몸소 실천하여 사회의 진정한 ‘동녘의 찬란한 빛’으로 거듭 성장해 나가길 기원해 본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며

2018년 부활주일은 4월1일입니다. 왜 부활주일은 해마다 바뀌는지 궁금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부활주일은 매해 춘분 후 첫 보름 발생 후의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사순절(Lent)은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 결정됐습니다. 사순절 기간은 개인적으로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된 시간입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에 해당하는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 전 토요일까지를 말하는데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심을 기리는 사순절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장사 되신 것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절정기인 고난주간에 교회에서는 새벽기도와 금식이 시행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경건의 유익을 위해 금식하며, 마태의 수난곡 같은 경건한 음악을 들으며 각자가 좋아하는 커피나 초콜릿을 먹지 않는다든지 오락을 자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순절 동안 특별히 금요일에 붉은색 육류 섭취를 피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서양에서는 이 기간에 생선과 감자튀김(Fish & Chips) 가게들이 호황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무엇을 안 먹거나 무엇을 안 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낮아지심과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신 헌신을 기억하며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2018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통해 어떤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인지 올해도 기대가 됩니다. 제 막내아들이 어렸을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 저녁에 TV 화면에 ‘NO TV, NO GAME’이라고 써 붙여놓고는 일주일 동안 보고싶은 만화영화와 닌텐도 게임을 하지 않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요즘 우리는 핸드폰과 인터넷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미디어가 공급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고난주간이 되면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 미디어 금식을 선포하는 친구들을 보게 됩니다. 눈 뜨면서 핸드폰 켜고 E-메일 체크하고 인터넷 신문 검색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위해 단 며칠이라도 미디어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은혜가 이번 사순절과 고난주간 중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태복음 28장 6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소음(騷音)

3월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아침에 요란한 드릴 소리에 잠을 깼다. 늘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의 굉음, 술 먹고 질러대는 주정들에 익숙한 터라 별스럽지 않은 소리였겠지만 습관적으로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중얼거리다가 몇 달 전 교회 내부 공사한다고 민폐 끼친 것이 생각이 나 얼른 꼬리 내려 버렸다. 하필이면 그날이 새 학기 개강하기 전에 척추 디스크 시술하겠다고 예약한 터여서 MRI 검사를 하는데 그 소리는 또한 얼마나 요란했던지 아예 귀마개를 끼워 들이더라. 세상은 온갖 소리로 뒤덮여 있다. 들을만한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듣기에 불편하고 심히 민망한 소리도 있다. 아름다워 감탄하는 소리가 있고, 괴상망측하여 괴로움을 주는 소리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의 귀는 적당한 한계까지만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더 이상 허용했다간 감당하지 못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창조의 신비이고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이며 은혜라고 하겠다. 그러니 세상에는 듣지 못할 소리는 없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살 수 없기에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면 넘어갈 수 있고, 과거 행적을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서라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소리들이다. 아파트 문화로 인해 생겨난 층간소음이 심각하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목회를 하다 보니 가끔 불편을 하소연하는 교우들이 있다. 그런데 아랫집이 불편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윗집에서 아랫집을 향해 항의하는 사례를 들을 때는 괜히 시비하기 위해 시비하는 것 같아 실소(失笑)하기도 하지만 참으라 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들면 교회에 나와서 마음껏 소리 질러보라고 권면한다. 우리 사회는 마치 아파트 생활과 같아서 층간소음 시비처럼 시비가 끊일 새가 없다. 자기는 아닌 것처럼 타인의 소리와 행동에 극도로 민감하다. 돌아보면 윗집에 살 때도 있었고 아랫집에 살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자기들은 뒤꿈치도 들지 않고 쿵쿵거리면서, 심지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도 요란하면서 자비라고는 조금도 베풀 수 없듯이 살벌하다. 예수는 종종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경고하였다. 2000년 전 유대 사회에서 기득권 세력이었던 바리새인(Pharises)들은 ‘분리주의자’라는 뜻에 어울리게 율법의 규칙을 내세우면서 세속과 차별하며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의(義)를 내세웠다. 이로 인해 예수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고 경고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원하는 ‘의’는 배려하지 않고 분리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과 불통(不通)하고 자신의 목소리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세상은 온갖 소리로 뒤덮여있다. 화음(和音)이 아니라 불협화음(不協和音)이어서 소음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극복하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내 소리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의 소리에 한 번 더 귀 기울여 행동할 때 더불어 평화하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신축 모스크바 주교좌대성당 낙성식과 한국의 헌법개정 방향

1931년 스탈린은 소련의 종교말살 정책으로 모스크바 주교좌대성당을 폭파하고 그 자리에 450m 높이 탑을 신축, 레닌의 초대형 동상 건립 장기계획을 착수시켰으나, 당시는 인력도 재력도 여의치 않았다.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등 새 대통령들의 개혁정책으로 모스크바 대성당 복원 운동이 구체화되어 새 대성당 건축은 매우 신속하게 진척되었고, 폭파 전에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유럽 교회들의 지원으로 약 5억 달러의 큰 예산을 들여 완공하였고, 마침내 지난 2000년 연말에 전 유럽 교계의 감탄과 경탄을 받으며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모스크바의 신축 대성당은 첨탑 높이 103.5m, 내부 평면 2만7천㎡, 천정높이 79m, 벽 두께 평균 3.5m, 천정 중앙 돔 직경 30m, 천정과 벽 내면과 외부 돔 지붕은 1㎜ 두께의 합금으로 입혀졌다. 모스크바의 루즈코푸 시장은 새 대성당 축성식 기념사에서 “과거 스탈린 공산주의 집단(regime)이 파괴한 새 대성당 복원은 우리 소련 인민의 정교회 정신 부흥운동의 출발이요, 표상”임을 강조했고,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Leningrade) 역시, 거의 1세기 만에 페테르스부룩(Petersburg)이라는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현재 사용 중). 신권(神權)이 무시되는 무신론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인권(人權)도 존중될 수 없었다. 고려말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고민하던 왕권(王權) 수호 통치와 신권(臣權)의 개혁 정치 시도, 나아가 민권(民權) 신장이 공산주의 체제하의 자유부재 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의 기적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신앙인, 지성인, 부자를 모두 숙청하고 나면 노동자농민들이 기업가와 부자가 될 줄로 알았으나, 기업가들과 부자들만 없어지고, 노동자농민들은 가난한 채 그대로 남아서 1세기를 두고 대를 이어가며 변함이 없었다. 유럽 다른 나라 국민들의 삶에 비하여 소련 인민의 상대적 가난은 절대적 가난으로까지 심화되어 가는 듯하였다. 더군다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하려는 소련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대량 생산 노력은, 마치 오늘의 북한처럼 인민들의 복지에 정신 쓸 겨를이 없게 하여, 복지는 고사하고 국가 유지 자체도 어려워져서 1980년대 말, 결국 국방과 체제유지에 무용지물이 된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대량으로 제조보유한 상태에서 구 소련의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 붕괴는 속수무책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 헌법 개정이 거론되고 있다. 민주(民主)니, 민족(民族)이니, 통일(統一)이니 하며 현행 헌법 개정 방향을 1세기 전 소련이 실패한 무신론 사회주의를 추종하려는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공산주의 망령들이 복장만 바꾸어 입고, 명찰만 새로 만들어 가슴에 붙이고 출현하여, 광란의 괴성으로 진실을 파괴하고, 일부 사이비 언론들은 괴변으로 정의를 거부하고 조작된 다수의 폭력으로 문화와 역사의 개조를 시도하지만, 진리와 정의를 부정하는 허위와 불의로 무신론 공산주의로 가는 헌법 개정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안반이 글러서 떡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떡메질이 서투른 새 일꾼이 떡 찧는 판이 잘못 생겨서 떡이 잘 안 된다고 탓한다는 말인데, 기름 한 방울도 안 나오고 지하자원도 별로 신통치 않은 우리가 분단의 상처와 전란의 잿더미에서 단기간에 ‘세계 10대 경제대국’ ‘7대 무역 대국’ 하는 소리를 들으며, 중국에 앞서는 서울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문화행사를 계속 거뜬히 흑자 거행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 적지 않은 원조를 보내주고 있다. 이 한강 기적의 토대가 된 현행 헌법도 잘 안 지키고 제대로 못 지키는 마당에, 헌법개정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기존 헌법의 일부 조항에 대한 추가 보완 정도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국권(國體)까지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모험은 개헌이 아니라, 미지의 불안한 공산주의 혁명같은 개악(改惡)이 될까 걱정이다. 더구나 국가 100년 대계의 개헌작업에는 반드시 헌법학 전문 원로학자들이 참여하는 분명한 몫이 보장되어야 하겠다. 결국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남한 사회에까지 전염된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과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유혈참극을 피하며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도 일본영국태국벨지움 등 나라들처럼 먼저 입헌군주제로 가는 것이 합당한 차선책이 아닐까 한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정월 보름을 맞는 마음

3월2일은 정월 대보름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 해의 시작을 정월 초하루 하루에 한정하지 않고 보름까지 즐겼다. 그러므로 정월 보름에 명절이 끝나는 것이다. 조상들은 새해를 조심스럽게 맞이했다. 정월 초하루에는 금지하는 것이 많았다. 정월 초하루 일하면 1년 내내 일만한다 해서 쉬게 했다. 욕설이나 거친 말, 찡그린 얼굴도 금지했다. 1년 내내 재수 없다고 여겼다. 친척이 아니면 초하루에는 남의 집에 가는 것도 금지했다. 어른들을 찾아 인사하는 것도 정월 풍경이다. 함께 맞대고 농사짓고 살다보면 싸울 일도 많았다. 1년 내내 말도 하지 않던 사람들도 정월에는 화해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정월 78건의 세시풍속 중에서 대보름날 하루에 관계된 풍속이 40여 건으로 정월 전체의 반수를 넘고, 1년 365일과 비교해도 정월 대보름 하루 행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5분의 1이 넘는다고 한다. 정월과 보름을 중시 여기는 것은 한 해를 시작하는 상징에다 농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명절 앞에 큰 대(大)자가 붙는 정월과 8월은 달과 관련 있다. 보름달은 풍요를 상징한다. 한 해 첫 보름이 떠오르는 정월대보름에 남성과 여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줄을 놓고 겨루는 줄다리기,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등은 풍작을 기원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같은 농경국가였던 일본도 대보름을 ‘소정월(小正月)’이라 부르고 근대 들면서 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이 날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니 정월 보름이 갖는 위상이 아주 막강하다. 지신밟기더위팔기귀밝이술부럼 등은 액을 쫓는 의식이니 이 역시 한 해 동안 아무런 탈 없이 보내게 해달라는 기원이 담겨있다. 절에서도 정월은 아주 중요한 달로 여긴다. 절에서는 매달 음력 초삼일부터 기도를 올리는데 그 중에서도 정월 기도를 중시 여기고 신도들도 많다. 요즘은 절에 제사를 모시는 가정이 많아져 설날 합동 차례가 분주하다. 사찰 역시 절정은 정월 보름이다. 선원에서는 3개월간의 겨울 안거를 이날 회향하고 사찰에서는 신도들과 방생을 한다. 물고기뿐만 아니라 우리에 갇힌 새를 풀어주기도 하고 복지관이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봉사하는 등 방생의 의미가 넓어졌다. 보름까지 적멸보궁이나 영험있다는 기도처를 찾는 것도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풍습이다. 설날에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하는 세배도 절집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다. 절에서는 이를 통알(通謁)이라고 하는데 설날 새벽 예불을 마치고 전 대중스님들이 법당에 모여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산중 어른 스님들을 찾아 인사한다. 그런데 민가의 정월 풍습과 사찰 풍습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기원하는 대상과 내용이다. 민가는 가족과 친척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모든 의식이 이와 관련돼 있다. 사찰을 찾아 정월 기도를 하고 방생을 하는 신도들 역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스님들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은혜에 감사를 올리고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받아 행복하기를 빈다. 중생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목숨을 잃은 고인(故人)과 미물까지 들어간다. 나와 관련이 있든 없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모두 챙긴다. ‘춘색무고하(春色無高下)’. 차별 없이 두루 세상을 비추는 봄빛처럼 수행자의 기도에는 높고 낮음도 차별도 없다. 정월 새해 밝고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김퍼(Gimper)가 되라

졸업 시즌이 되어서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육기관들이 그동안 지도해온 학생들을 떠나보내는 졸업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예외 없이 식순에 들어있는 것은 교육책임자의 권면 순서입니다. 졸업생들에게 그동안에 배운 것을 가지고 상급교육 기관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해서 잘 살아달라는 당부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미국에서 졸업생에게 주는 교수님의 권면이 계기가 되어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김퍼(gimper)가 되라는 학장님의 도전에 반응하고 그 비전을 품고 살게 되면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써서 1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는 유명 저자가 되었습니다. 김퍼란 어떤 요청을 받았을 때 요청하거나 기대한 것보다 항상 조금 더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 해 전에 이태리를 여행하다 프로방스에서 구찌백 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장 안내자가 똑같은 모양의 가방 여섯 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방의 가격이 각각 달랐습니다. 이유는 약간의 마감 방식의 차이로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 것입니다. 김퍼란 특별히 가구를 만들 때, 가구를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특별한 장식이나 문양을 새겨 넣어서 마감을 함으로써 그 물건의 가치를 더 나가게 하는 기능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가 일하는 협회에서 직원 채용 면접을 종종 주관하게 됩니다. 지원한 사람들을 보면 커다란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면접을 실제로 해보면 작은 차이가 합격과 불합격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채용된 직원들도 실무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을 보면 어떤 직원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일을 잘하는 반면 어떤 직원은 일을 잘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김퍼이고 또 한 사람은 김퍼가 아닌 것이지요. 신약성서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장 23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와 같은 태도를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으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주목받는 교회인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인 빌 하이블스는 그의 저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책에서 특별히 크리스천들의 사회생활의 태도에 대하여 도전합니다. 우리는 좌우를 살피고 사방을 둘러보는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 잘 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밀실에서 모든 일들이 성공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행됩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줄을 잘 서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처세술의 달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특별히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위에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시선을 잊지 말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으며 정직한 김퍼의 삶을 사는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도전합니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삼세번

얼마 전 동기 몇 명과 구세군 미 서 군국 비전 트립을 다녀왔다. 구세군의 조직적 특성상 부부가 모두 사역자여서 부부 동반이었다. 가고 오는 길에 갈아타는 여정이라 나리타에서 기다리는 동안 여자 동료 한 명이 초콜릿을 사기 위해 매장에 갔다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여권을 가져가지 않아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권을 가지고 갔던 그녀가 이번에도 빈손으로 왔다. 비행기 티켓을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갔던 그녀가 여전히 빈손으로 돌아왔다.이번에는 신용카드가 자기 이름이 아니어서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료들이 한바탕 웃는 동안에 세 차례 헛걸음을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주저앉아 버렸다. 현금을 가져가든지, 남편과 다녀오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갈아탈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함께 갔던 그녀가 이번에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초콜릿을 두 손 가득 들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당당히 걸어왔다. 우리 문화에는 ‘삼세번’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패자라 할지라도 세 번까지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가위바위보를 해도 패자는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승자는 패자를 위해 삼세번을 요청하고 문제없이 받아들인다.심지어 상대방이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세 번 만의’ 여유를 주고 하나, 둘 수를 헤아리지만 셋으로 넘어가기 위해 ‘둘 반’, ‘둘 반의 반’, ‘둘 반의 반의 반’이라고 억지로 헤아리기도 하는 것은 생각할 여유를 더 주려는 의미라고 볼 때 삼세번은 아름다운 배려의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 두 번, 세 번에서 끝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석삼년’, 즉 노력하는 자를 위해 삼년씩 세 번이라도 오래토록 기회를 주고 기다려 줄 수 있다는 기다림 정서의 발로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세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당당히 자기가 원하는 것을 두 손 가득 들고 돌아온 동료에게 무한의 박수를 보내는 것도 이런 의미이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있다(마태복음 18:22).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는지 질문했던 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일곱 번도 많은데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는 것은 숫자에 제한받지 말고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이다. 삼세번 배려의 절정이라 하겠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수 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겨우 한 길을 열어가는 존재다. 그렇다고 인간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도상(途上)에 있는 존재’로서 비록 미완성이지만 가능성의 존재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는 인간을 ‘되어감’(becoming)의 존재로서 측정할 수 없게 열려 있는 신비스러운 존재라고 하였다. 삼세번은 이와 같이 가능성 있고 되어가는 인간을 위해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베푸는 배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꼬여 있는 것처럼 부정적이고 시비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마음 씀의 문제가 아닐까?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분명히 시행착오하는 경험 위에 세워지고 발전해 온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

아시아 국가들의 지각 변동으로 국경 이동이 임박함을 알리는 국제 정치 기상특보 같은 현상에 우리는 이목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최근 열강들의 초현대적인 무기 집결과 증강 및 대규모로 계속되는 합동군사훈련은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직전 평양에서 거행한다는 대규모 열병식 등으로 급박해지는 충돌 위험이 올림픽 후 전쟁 발발 일보 전의 최고조에까지 달하지 않을까 걱정이다.평창 올림픽 이후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우리 국경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진지하게 예상해 보는 것이 필요 이상의 최우선 급선무다. 한일 불법합방 때처럼, 아무한테라도 달려가 매달리거나, 정신없이 끌려가서는 안 될 것이다.혹자들은 지금 우리나라와 가까운 대국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절대 불가한 것이니, 명·청과 그 이전의 고대와 중세사를 제쳐 놓고라도, 6·25 동란 때 중국은 100만 대군을 투입하여, 3년간이나 우리와 혈투를 벌이며, 수십만 명씩을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싸웠다.압록강과 백두산까지 진격한 한국군과 UN군을 후퇴시켜, 다 된 남북통일을 훼방하며, 오늘의 휴전선을 만들었다. 우리 국민들 절대다수는 중국에 의존함을 꺼려한다. 이번 사드 배치 문제만 해도, 중국은 우리를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동시에 자기네 속국처럼 여기려는 태도에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매우 불쾌해 하며 분개하고 있다. 무법천지의 대국 행세하는 횡포가 과도하지 않은가?절대다수의 국민들은 지난 70여 년간 우리와 고락을 같이한 혈맹, 미국과의 보다 견고한 단합으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남북통일과 나아가, 동명고강(東明故疆)의 고토회복(故土回復)까지도, 미·중간의 평화적 경제외교로 해결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지각변동이 명실 공히, 온전한 ‘大韓國’ 건설 절호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으며, 이는 중국의 영구적인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특히,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 안에서의 남북통일을 염두에 둘 때, 혈맹 미국과의 철통같은 단결 외에는 현 시국의 위기극복에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결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중국도 이제는 동북 3성을 대한민국에 돌려주는 것이 대국으로서의 할 일이다.연길과 북만주 지역을 지나면서, 한글 간판을 써 붙이고 있는 상점들을 무수히 보았다. 얼마나 많은 우리겨레들이 그곳에서 자자손손이 원주민으로 살면서도 지금은 중국에 체류하는 교포들의 신세로 살고 있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지금 우리는 꿈의 대한민국을 빛내며, 그동안 미국의 안보 그늘 아래에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세계적 문화행사들도 거뜬히 거행하는 국력이니, 미국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미국과 하느님께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자유의 용사로서 미국 사회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 북한이나 중국이 핵무기나 미사일로 우리를 협박하며 속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겠지만 이길 수는 없으며, 통일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이제는 중국·일본·러시아도 주변 약소민족들에 대하여 정직해야 한다. 국토와 인구와 경제력과 무력으로 큰 나라라는 것을 근거로 과거의 향수에 젖어, 점령 위주의 욕망은 버려야 하는 시대다. 단군성조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동양삼국이 정치 대강령으로 삼도록 하자.따라서, 우리는 핵무기와 미사일 대신 자유와 정의와 진리의 깃발을 들고, 정의를 위한 용사로서 진리를 선포하며, 자유를 위한 순교자로서 진리를 수호하며,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살아가는 백의민족의 후예로서, 지축이 요동치는 핵무기 앞에서도 태산의 무게를 가진 용사들의 거룩한 표지(標識)가 되어, 용맹히 싸우고 자랑스럽게 이기는, 자유의 용사들이 걷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자유가 없는 사람들의 말과 글에는 진리와 진실이 있을 수 없고, 自由가 없는 곳에는 正義가 없다.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정의와 진리의 길이다. 자유와 정의와 진실은 모든 국제협약이나 모든 나라의 헌법보다도, 모든 종교들의 규정보다도 더 우선하는 母法이며, 源泉이오, 基本이기에, 우리는 그 길로만 나아가야 한다.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건강할 때 지키는 건강

연일 계속되는 맹추위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꼭 한파 때문은 아니겠으나 연말연시 때면 회자되곤 하던 훈훈한 미담도 예전 같질 않고, 필자와 더불어 종단정화(宗團淨化)의 선봉에 섰던 스님들도 기차 앞 칸에 머물던 햇살이 뒷 칸으로 슬쩍 옮겨 가듯 내 곁을 떠나갔다. 혹한 속에 한 해가 저물어 가던 몇 해 전, 특별한 분이 생명나눔실천본부에 찾아왔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회원님이었는데,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1억 원의 고액 기부금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필자 또한 간이식 수술로 새 생명을 얻은 한 사람으로 그 마음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필자는 2000년 1월 8일,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문턱까지 간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것에도, 죽는 것에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저승에 가면 언제 죽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간을 보니 밤 10시 5분. 그 뒤로는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시각이 새벽 2시쯤. 어디선가 염불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평소 내가 잘 아는 염불 잘 하시는 스님의 음성이었다. 수술 후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이었지만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죽었길래 저 스님이 오셔서 염불을 할까’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가만히 염불을 따라 하고 있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마도 내 일생 가운데 가장 깊고 간절한 염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깨어나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지나다, 내가 ‘간 이식수술’ 받은 날 누가 죽어 영안실에서 염불을 했냐고 간호사에게 물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며 더군다나 영안실에서 나는 소리가 중환자실까지 들릴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그렇게 세상 밖으로 다시 살아나왔다. 그렇게 나온 세상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감사하기만 했고, 내가 숨 쉬는 공기, 내가 바라보는 모든 세상이 고맙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청년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아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었다. 그 당시 장기기증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이생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그 은덕을 갚으리라는 서원을 세우고 생명나눔실천운동에 진력해오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건강할 때, 건강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건강이 비켜가고 나서야 건강한 삶과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뒤늦게 알게 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한 삶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생명나눔을 통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고자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뜻이 바르게 잘 반영되기 위해서라도 건강은 지켜져야 한다. 사후나 뇌사 시 실제로 장기기증을 할 때는 스스로의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대 선사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혜국스님(충주 석종사 조실)은 건강하고 쓸모 있는 눈을 남에게 주기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눈 운동을 한다고 하니, 생명나눔을 실천하고자 스스로를 돌보는 스님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다. 우리 격언에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며,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진부한 얘기 같지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말인지를 실감케 한다. 봄의 길목 입춘이 코앞이다. 이제 2000년 이후 가장 춥다는 한파도 그 위세가 점점 꺾여 갈 것이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지 않도록,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는 지혜로움을 발휘하시길 바라며, 모든 이들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해본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구정을 맞으며 다시 한번 새 결심

지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무술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어떤 특별한 차이가 있습니까? 해가 지고 다음날 아침 해가 뜨고 새 날이 시작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인데 신년 초의 첫날은 왜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새롭게 시작되는 새해의 첫날이 주는 기대와 설렘, 새해 새벽에 다시 일 년을 달려가기 위해 힘차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기운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가져다주는지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사생대회에 나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 장의 종이에 모든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은 한번 망치면 회복이 불가능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일 년이라는 주기로 우리에게 매년 새 도화지를 한 장씩 주시는 은혜가 감사하기만 합니다. 지난해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러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올해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지고 도전해 보라는 격려가 새해가 주어지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래된 뮤지컬 애니- 내일아 사랑해(I love yah tomorrow)의 가사를 보면 내일은 태양이 뜰 거예요. 내일 해가 뜬다는데 전 재산을 걸어도 좋아요. 그냥 내일을 생각해봐요. 슬픔과 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우울하고 외로운 날이면 나는 턱을 치켜들고 활짝 웃으며 말해요. 내일은 태양이 뜰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까지 버텨봐요. 내일, 내일, 나는 내일을 사랑해요. 단 하루만 기다려도 되는 내일! 어린 애니는 불우한 환경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늘 “내일이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야” 하면서 하루하루 견디며 내일에 대한 기대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현실 도피적으로 느껴지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 같지만 성서에 보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마태복음 6장 34절)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루를 사람답게 살아 내는 것이 쉽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오늘을 이겨내는 사람이 내일도 승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작심삼일이 새해의 화두인데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특별한 혜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새해를 맞으며 작심삼일을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새 결심을 할 수 있는 구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큰 결심은 그것을 실행하지 못할 때 큰 좌절을 맛보게 되지만 실패했더라도 다시 결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술년을 맞이하여 위대한 결심을 했다가 이미 실패를 맛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며칠 있으면 새로운 설이 돌아옵니다. 심기일전하여 실행이 가능한 계획을 세웠는지, 또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점검해 보시고 오늘 하루를 승리하면 내일도 승리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함께 살아가기

2017년 말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선정하였다. “간사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내자”는 의미이다. 적폐청산으로 어수선했던 한 해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책상에 새겨두고 생활신조로 삼는 글이었기에 친근함이 더해지는 글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초등학교에서 슬기로운 생활을 배우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바른 생활을 가르치던 국민학교 시절이 있었다. 착한 일을 권면하고 악한 일은 반드시 징계 받는다(勸善懲惡)는 바른 생활을 배우면서 그 시절을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의 삶과 바른 생활이 괴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정한다. ‘파사현정’이 무의미했던 시절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적폐청산’에 반발이 너무 심한가 보다. 사실 적폐청산의 목적은 보복이 아니라 함께 살자는 의미일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서로서로 어울 거리며 살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쌓여온 잘못된 폐단을 바로잡아보자는 ‘적폐(積弊)’를 빨갱이가 짖는 소리인 ‘적폐(赤吠)’ 정도로만 여겨버리니 파사현정이 소원(疏遠)할 뿐이다. 개가 토한 것을 먹듯이 과거의 폐습을 차단하지 못하고 계속 되풀이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가복음 2:22)는 예수의 가르침이 새삼 새롭다. 새로 담은 술을 낡은 가죽부대에 담아 발효 숙성하다가 만일 그 가죽부대가 터져버리면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새 술은 새로운 가죽부대에 담아 보관하고 숙성해야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악습과 폐단을 고치려 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시빗거리 삼고 거부하면서 고집을 부리기만 한다면 누가 그 현재를 희망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만 도는 세상살이를 재미있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성경의 시간관념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생긴 동그란 시계가 아니라, 사인곡선을 이룬다. 그래서 현재는 과거의 연속선상에서 현재이기는 하지만, 과거와는 완전히 구분된 새로운 현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고 강조하였다. 과거의 율법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새로운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과거를 무시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현재’, ‘새로운 창조’는 함께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의미들이 아닐까? 이렇게 볼 때 파사현정도 적폐청산도 살벌한 숙정(肅正)의 의미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의 이정표로 여길 수 있는 시각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때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마당에 우리끼리 못할 일도 없지 않을까? 특히 희망을 품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 우리 모두에게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화합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다원사회와 유일체제 그리고 빙상 화합장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 1974년 북경에서 이른바 미중 탁구 외교(ping-pong diplomacy)가 시작되어 서방사회가 ‘철의 장막’이라 부르던 공산권 중국과의 숨통을 트는데 다소간 도움이 되었다고 외교가에서는 흔히 말하고 있다. 강원도민들의 꿈같은 숙원사업을 국책사업화하여 평창 동계올림픽이 마침내 열리게 되었다. 이에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추진한 지사들과 정부의 몇몇 대통령들 이하 실무 담당관들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리자. 새 사업은 오해와 반대와 방해와 공격적인 최대의 비협조를 극복하면서 결실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번 축제의 씨앗를 뿌리며 가꾸고 추수하여 세계적인 감사제를 올리는 마당에, 지금까지 고락을 같이한 모든 이가 참여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수만을 취하려는 이들의 낯뜨거움이 역사에 길이 남아, 어린이들의 윤리 교육에 점박이가 될 것이다. 남의 팔매에 밤 주워 먹기는 그만하자. 그동안 몇 차례 남북한 체육인들이 함께 참가하는 대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번 대회에만 주어진 여건이 있으니, 남북한의 정치 현실과 열강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현장이 아직도 전운이 짙어지는 공간인데, 북한 핵과 장거리 미사일 시국이라는 시간의 제약이 개최지의 지정학적 요소들로 가일층 불안함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원사회와 유일체제의 만남과 충돌이 빙상 화합장을 이루려면 어느 한 쪽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거나 보장될 수 없고, 남북한과 전 세계가 공동사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세계 인류의 상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핵무장은 전 세계가 불가피하게 관여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러한 대회를 계기로 정치적 대목장을 보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反(반) 올림픽 정신은 히틀러의 뒤를 따르는 처신으로, 그 말로가 우려되며 경제적 대목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부 기업인들의 脫(탈) 올림픽 투기정신 역시, 경제 대박은커녕 빚더미에 올라앉게 하였다는 바르셀로나 시의 경우를 우리가 남의 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더구나 선수들의 집단 약물복용으로 문제시된 소련처럼, 과도한 명예욕이나 승부욕도 예외는 아니다. 스포츠와 체육의 순수 올림픽 정신을 손상치 않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되기를 기원하자. 더구나 정신적으로 북쪽의 험산준령을 넘어, 빙판 길로 썰매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썰매를 끌면서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가깝고도 머나먼 길을 마침내 평창까지 와서 세계대회를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입장을 좀 바꾸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남한의 친북인사들 일부 몇몇 사람들의 외교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북한 지도층 인사들의 냉엄한 손익 계산에 따라 불가피한 차선책으로 참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한 예의라고 하겠다. 체육대회는 체육대회로만 마쳐야 한다. 한마디로, 전 세계 청소년들이, 북한의 젊은이들도 모두 와서 썰매를 함께 타며 자유롭고 즐겁게 실컷 놀다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와 명예와 체면에 환장한 어른들이 훼방을 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방해꾼들의 심보가 이성을 잃을 때, 즉시 상상 외의 전란의 구실까지 될 수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외 동포들과 세계 만민이 화면으로라도 함께 하는 시대의 빙상 축제에 박근혜 대통령도 석방하여 함께하게 해야 빙상에서도 모든 이가 추위를 덜 느끼게 될 것이고, 빙판은 녹아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북한 선수단 참석 이상으로 현 집권자들에게도 실정 복구의 최종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혹시라도 평창의 부족함이 있다면, 이를 보완하는 유일한 역사적 저력이 될 것이다. 외교와 종교와 경제는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동계올림픽 축제를 계기로 경제는 빙판도 녹아서 물처럼 흐르게 하고, 종교는 연기와 구름처럼 자유로이 피어오르게 하며, 외교는 바람처럼 상처나 흔적을 내지 말고, 부드럽게 지나가며 자유의 꽃을 피우게 하라.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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