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일자리 창출인가? 일하기 혁신인가?

정신문씨는 서울 인근 연수원에 강사를 모시는 렌터카 회사 운전기사였다. 연수원에 강사를 모시고 가면 강사가 강의를 하는 동안 운전기사들은 보통 그냥 쉰다. 그런데 정신문씨는 그러질 않았다. 강사를 모시고 가는 사이에 그는 “선생님은 오늘 어떤 강의를 하시는지요?” 하고 묻고는 “제가 뒷자석에 앉아서 들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청해서 그냥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듣다 보니 재미있고 유익해서 메모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니 두툼한 노트가 빼곡히 들어차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기업 연수원에 그날도 강사를 모시고 갔는데 강의진행자들이 모여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내일 오셔야 할 강사가 펑크를 냈다는 것이다. 강의 주제를 들어 보니 정신문씨가 몇 번 들은 강의였다.그는 노트를 펼치고 그 주제로 강의한 다른 강사들 강의노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용을 설명했는데...뜻밖에도 “정기사님이 직접 강의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청을 해오니 않는가.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을 가진 운전기사가 강사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직영점을 가지고 있는 미용실 거대기업 ‘준오헤어’는 1982년 성신여대 앞에서 조그만 미용실로 출발했다. 기술학교를 졸업한 강윤선씨가 시작한 것이다.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비교적 손쉬운 미용실을 열기는 했으나 그녀는 처음부터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미용이라는 직업은 왜 사회로부터 전문직업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하고 초창기 직원을 모두 데리고 영국의 비달사순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는 비달사순하고 협약을 맺어 한국에 미용사관학교 준오아카데미를 열었다. 준오아카데미는 기본과정만도 2년6개월 과정이다. 졸업할 때는 헤어쇼를 작품전으로 연다. 이 쇼는 그냥 쇼가 아니다. 작품을 만든 졸업생들에게 ‘그들의 날을 만들어주는 날’인 것이다. 미용쟁이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재탄생하는 통과의식인 것이다. 준오헤어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95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독서경영, 준오의 가족들은 매월 한권의 책을 읽는다. ‘머리 만지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지만, ‘머리를 쓰는’ 독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지만 강윤선 회장은 줄기차게 밀고 나갔다. 그렇게 해서 현재 112개의 직영 살롱이 생겼고, 2천5백개의 일자리가 마련되었다. 대학은 요즘 졸업생에 대한 취업률 통계를 정리하고 있다. 4월말을 기준으로 통계가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취업률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가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데 자기소개서를 아무리 잘쓴들, 면접을 아무리 잘 본들, 취업박람회를 자주 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자리 창출이 문제다.그런데 누가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말인가.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성장을 한다고 해도 고용 없는 성장이다. 그래서 국가 주도적으로 아무리 일자리를 만든다고 해도 임시방편이고 제대로 된 일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누가 만들어 주는 일자리를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일이라는 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는 일을 새롭게, 더 재미있게, 더 의미있게 만들면 거기서 개인이 성장잘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일자리로 창출되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 그것은 곧 일하기 혁신에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조영호 아주대 경영대 교수

[아침을 열면서] 하얀 거짓말

가정의 달 5월은 가족모임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가족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간의 정과 사랑을 나누는 기회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족모임이 종종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소중한 존재인 만큼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 간 우애의 가치는 우리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공동체적 규범이다. 그래서 제사, 어버이날 등의 가족모임 참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가치의 상승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사회의 극단적 경쟁은 가족이나 주변사람들보다 자신을 먼저 챙기게끔 유도한다. 즉 공동체적 규범과 개인적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을 우리는 무수히 경험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얀 거짓말’을 자주 사용한다. 하얀 거짓말은 그리스 신화 속 조각가 이야기를 다룬 희곡인 ‘피그말리온(Pygmalion)’에서 유래한다.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 그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자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의 사랑에 감동하여 여인상에 생명을 주게 된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그 대상에게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을 심리학 용어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한다. 불치병 환자에게 곧 나을 수 있다는 선의의 거짓말로 희망과 믿음을 주어 병을 낫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즉 하얀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로서 상대방에게 위안과 힘이 되고 부드러운 인간관계를 도모하는 배려적 소통방식이다. 그런데 하얀 거짓말은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는 기능으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종종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관철시키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친구에게 별 의도 없이 ‘밥 한번 살게’, 또는 아내에게 사실과 다르게 ‘이거 할인해서 산거야’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문제는 이런 하얀 거짓말이 가족 내에서 너무도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맞벌이 하는 며느리가 제삿날, 명절 전날 유난히 야근이 많고 아들은 외국 출장이나 회사에 중대한 일이 많은 이유이다. 하얀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들은 가족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의사표현보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가 깊숙이 깔려있다. 이런 의도가 하얀 거짓말이라는 포장을 두르고 나타난 것이다. 배려의 포장을 두른 개인의 이기심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가족구성원 간의 신뢰는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이러한 역기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선, 가족모임을 의무적 행사가 아니라, 정서적 교류를 통한 행복을 키우는 기회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가족 간의 처신에 대한 고루한 가치관도 바뀔 필요가 있다. 중요한 날이니 무조건 참석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당사자의 입장이나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해 볼 필요도 있다. 이것이 오히려 서투른 거짓말보다는 훨씬 더 큰 이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해 신뢰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가족 내에서까지 하얀 거짓말로 우리를 포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족 속에서 정신적 자양분을 찾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조용길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아침을 열면서] 웃을 일 없는데도 웃으라고?

20년간 웃음을 나누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것이다. “웃을 일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웃을 수 있나요?” 웃음을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부딪쳐야 할 장벽은 바로 ‘웃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거쳐야 한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행복이 넘쳐 나와 웃는 것이 아니라, 슬픈 일이 있든, 기쁜 일이 있든 상관하지 말고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운동이기 때문이다. 웃음은 바로 걷거나 달리는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최고의 유산소 운동이다. 억지로, 의도적으로라도 웃으면 우리 몸은 실제로 웃는 것과 똑같은 반응을 일으킨다. 웃음을 연구하면서 미국유머협회 회장을 역임한 앨런 클라인을 캐나다 웃음포럼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앨런 클라인은 ‘웃음은 삶의 태도를 바꾼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내가 죽은 후 깊은 절망감에 시달렸지만 웃음을 통해서 삶의 희망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몸에 익히는 데는 웃음만한 묘약이 없다고 설파한다. 웃는 모습에는 상대에 대한 호감과 관심이 깃들어 있다. 반대로 자연스런 웃음과 미소가 부족한 관계라면 아직 상대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지 않았거나 경계심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웃음은 굳게 닫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행복과 성공을 만들어내는 요인인 동시에 이를 측정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 의하면, 부부의 웃음 횟수는 부부간의 행복지수를 측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부의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설문지의 첫 번째 항목이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보면서 자주 웃는다’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주보고 웃는데 불행한 부부는 없을 것이다. 서로 마주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아예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 부부 간에는 이미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한마디로 웃음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평생 동안 1만3천대가 넘는 자동차를 팔아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이름을 날린 조 지라드는 ‘웃음은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지갑을 열게 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오랜 세일즈 활동을 통해 웃음은 사람의 긍정적 감정을 자극하며, 나아가 마음의 문을 열어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인간관계의 대가인 데일 카네기 역시 미소와 인사야말로 인간관계를 좌우하는 키포인트라고 역설한 바 있다. 긍정적인 사람은 마치 등불과 같다. 나방이 불을 찾아 헤매듯 사람들은 얼굴과 생각이 밝고 긍정적인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긍정적인 사람들의 얼굴은 맑고 투명하며 만면에 웃음과 미소가 가득하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또한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웃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옛말에 ‘웃으면 복이 와요’인가? 아니면 ‘복이 와야 웃어요’인가? 그냥 웃으면 복이 온다고 말한다. 지금 한 번 어깨를 활짝 펴고 씨익 웃어보면 어떨까? 이요셉 한국웃음연구소 소장

[아침을 열면서] ‘장애인 정보격차 해소’ 실천해야 할 때

20대 총선이 막을 내린지 며칠 지났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 때문인지 엄중한 민심의 향배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등 총선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을 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총선이 치러진 지 이틀째 날인 지난 15일 장애인단체 등으로 구성된 ‘2016총선장애인연대’는 ‘새로운 국회는 소외계층, 특히 사회의 편견과 차별, 빈곤과 절망에 놓여 있는 장애인계층을 위한 관심을 갖기 바란다’는 논평을 내놨다. 서민과 소외계층은 오간데 없고, 정치인 자신들만을 위한 정치쇼 판처럼 보였던 이번 총선 과정을 국민 모두 지켜본 터라 20대 국회를 겨냥한 소외계층 관심 촉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201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등록된 장애인 수는 249만4천460명이다. 등록되지 않은 장애인과 노약자를 포함한 소외계층의 실제 수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들어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과거에 비해 높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이점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와 이들의 정보 접근실태는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 복지 지출 비율은 꼴찌에서 세 번째이다. 장애인의 고용률은 37%로 이들의 낮은 경제 활동도 문제이지만 정보의 접근이 쉽지 않다 보니 정보격차(digitaldivide)로 인한 문제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소외계층에 대한 정보격차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주요 이슈로 거론된다. 2013년 미국에서는 정보 취약계층 중 발달장애인의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선언문을 통해 이들의 정보접근 권리를 밝힌 바 있고, 현재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고 한다. 선언문의 목표는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을 통해서 장애인들의 인터넷 이용을 쉽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들의 장보격차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애인 각자에 맞는 인터넷 사용 프로파일을 만들고, 그가 인터넷에 접속하면 자동적으로 자기에게 맞도록 꾸며진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기 프로파일을 표시 한 뒤 인터넷에 접속할 경우, 그가 이해하고 쉬운 형태의 언어로 바뀌거나 알기 쉬운 단어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텍스트를 읽어 주거나, 글자크기와 배경색깔 등이 접속하는 사람의 장애 유형에 맞춰서 사용하기 쉽게 바뀐다고 한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는 정보격차 문제 해소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참 부족해 보인다. 장애인 정보격차 해소를 위해 해당 단체가 발표한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우리나라 장애인 가구의 컴퓨터 보유율 격차(6.6%p)는 감소하는 반면, 전체 국민 대비 인터넷 이용률 격차(25.4%p)와 스마트폰 보유율 격차(34.4%p)는 여전히 크게 나타나는 추세다. 정보통신 보조기기 지원 등 장애인 정보격차를 줄이기 위한 실질적인 지원책 마련도 절실하다. 해마다 4월20일이면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여러 단체와 기관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장애인의 날은 올해로 서른여섯 번째다. 사람의 나이로 보자면 성숙해질 수 있는 시기다. 며칠간의 반짝 행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하는 실천, 정보격차를 해소할만한 실효성 있는 해법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김정순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겸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감사일기의 기적

시베리아가 고향인 복수초가 앙상한 가시덤불 속에서 노란색의 꽃을 수줍게 갓난아이처럼 내민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노란 꽃의 황제라 할 수 있는 개나리가 온 동네 벽을 장식하고 있다. 화려한 이 봄날을 보면서 자연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이런 계절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마음이 솟구친다. 하기는 우리가 감사할 일이 어디 봄꽃뿐이겠는가. 따뜻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고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해주는 직장이 있고, 매일 매일 나를 이동시켜주는 자동차가 있고...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좀 더 여유가 있어 골프를 칠 수 있고,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음 더욱 감사의 마음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감사할 일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해서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 나의 신체 기관 하나하나 그리고 나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 나의 조상과 역사, 온 우주 이런 것이 진짜 고마운 것들이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감사의 마음은 잠시뿐, 대부분 불만과 원망으로 산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듯이 현재 수준에 만족하지 말고 질적으로 더 낳은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심리학은 미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과거와 현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 자세는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고 다양성과 변화를 수용하고 그리고 모험을 추구하고 창의력을 높이는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감사일기 쓰기’다. 필자가 지도하는 박사과정 학생 중에 보진드라(Bojindra)라는 네팔 학생이 감사일기가 정말 효과가 있는지 네팔에서 실험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 왔다. 2015년 4월 큰 지진피해를 겪었고 지금도 그 여진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감사일기 쓰기가 도움을 주는지 알아보자는 제안이었다. 네팔에서 호텔 세 군데를 섭외하고 각 호텔에서 직원 60명씩 선발했다. 첫 번째 호텔에서는 매일 감사일기를 쓰게 했고, 두 번째 호텔에서는 업무일지를 쓰게 했으며, 세 번째 호텔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실험 시작 직전 참가자들에게 심리측정을 하고 감사일기와 업무일지를 2주 동안 쓰게 한 후 같은 심리측정을 하고 그리고 또 한 달 후 같은 심리 측정을 또 했다.결과는 놀라웠다. 실험참가자들의 안녕감과 일에 대한 몰입도가 처음에는 세 호텔이 비슷했다. 그런데 2주 후 감사일기를 쓴 집단은 그 값이 3.5수준에서 5점 수준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그 효과가 한 달 후에도 그대로 유지된 것이 아닌가. 다른 두 호텔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매사에 감사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지족(知足)을 가르치는 불교유교의 원리가 바로 오늘의 심리학이고 경영학임이 입증된 것이다. 조영호 아주대 경영대 교수

[아침을 열면서] 프랑스와 벨기에의 테러사태를 보며

최근 유럽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사태를 보면서 그 주도세력이라고 여겨지는 소위 ‘이슬람 국가(IS)’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최고조로 달하고 있다.무엇보다도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이 두 나라가 그동안 무슬림을 비롯한 타문화에 대해 열려 있는, 포용하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심장부를 공격했으니 두 나라의 국민들이 느꼈을 배신감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슬람 급진세력인 IS를 단순히 사악한 집단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유럽에서의 테러사태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유럽인들을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감행했을까? 필자는 그동안 유럽에서의 다문화 포용정책이 상징적 수준에 머물렀던 점이 테러문제를 키웠던 하나의 요인이라고 본다. 필자가 유학을 했던 독일의 사례를 들어보자.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기존의 자민족 중심의 가치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적 가치들을 수용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외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 노동자, 유학생들을 수용하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다양성의 추구는 ‘톨레랑스’ 즉 관용의 가치와 맞물려 다름과 차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확산시켰다. 하지만 독일인과 외국 이민자 간의 벽은 여전히 철옹성처럼 느껴진다. 그들 간의 융화를 방해하는 사회제도적, 심리적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제도적 장벽은 톨레랑스에 기반한 왜곡된 문화정책이라고 본다. 관용의 태도로 타문화들을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이들을 ‘소수자 문화’, ‘주변문화’로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자기문화 우월주의, 타문화에 대한 차별은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공존하며 소통하는 통로를 막는다. 외형적으로는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공존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비주류 문화에 대한 차별과 이로 인한 불통이 테러의 가능성을 키웠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유럽의 테러사태는 우리사회에 큰 시사점을 준다. 우리사회도 늘어나는 다문화 가정에 비례해 다문화 정책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 이민자들로부터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배우고 우리사회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다문화 정책이 획일적으로 주류문화에 동화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는 그들을 대한민국이라는 운명공동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인 것이다. 이런 심리는 차별을 낳고 깊이 있는 소통을 차단시킨다. 겉으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건강한’ 사회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차별과 갈등으로 앓고 있는 우리의 모습 아닐까 싶다.프랑스나 벨기에의 테러사태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 안의 폐쇄적 문화우월주의와 차별을 없애고 이를 통해 이민자들이 자신들을 더 이상 이방인으로 느끼지 않고 우리와 공통의 운명을 지닌 가족구성원으로서 느끼게 하는 것이다. 획일적 문화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과의 진심어린 소통으로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잉태된 갈등과 폭력을 예방하는 길이다. 조용길 숙명여대 교수

[아침을 열면서] 80평생에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

올해로 웃음을 배우고 나눈 시간이 벌써 20년째가 되었다. 웃음을 배우기 위해 캐나다에서 세계웃음협회장인 스티브 윌슨을 만났다. 스티브 윌슨의 좌우명은 “기쁨을 뒤로 미루지 마라”이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는 즐거움이자 행복이며, 그 증거가 바로 웃음이다. 뿐만 아니라 웃음은 건강과 행복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웃으면서 사는 인생은 누구나 꿈꾸는 것이다. 행복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역시 웃음이 있는 풍경이다. 웃음은 행복의 여정을 만드는 첫 번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멋진 본능, 웃음. 하지만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웃었을까?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은 하루에 열 다섯 번 정도 웃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과연 몇 번 웃을까? 이것이 궁금해서 한국웃음연구소에서 실제적으로 설문조사를 직접 해 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성인들이 하루에 웃는 횟수는 여섯 번 정도에서 일곱 번 정도 웃는다고 나왔다. 미국인에 비하면 우리는 절반도 채 못 미치는 횟수다. 실제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한다고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무뚝뚝하고 화난 듯한 인상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외국인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벼운 눈인사는커녕 투명인간이라도 대하듯 시선을 돌려버리기 일쑤다. 그나마 웃을 때도 길게 웃지 않는다. 넉넉히 쳐서 한 번 웃을 때 10초 정도 웃는다고 가정해도 하루에 1분 정도 웃는 셈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우리가 80년을 산다고 봤을 때 웃고 즐기는 시간이 20일도 안 된다는 애기가 된다. 계산해보니 정말 놀랄만한 숫자다. 하루에 5분을 웃는다고 해도 80년 동안 웃는 시간은 고작 101일에 불과하다. 이는 일하는데 26년, 잠자는데 22년, 근심 걱정하는데 6년 7개월, 화장실에서 3년 반의 시간을 보내는데 비해 턱없이 적은 시간이다. 게다가 하루 5분을 웃는 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얼굴은 7천~8천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평균 서너 가지의 표정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하루 5분 웃음’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최근 몇 년 새 우리는 웃음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많이 들어왔다. 웃음이 기분이나 좋게 만들어주는 것 외에 실제로도 인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웃음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완벽한 ‘한국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체면과 위신을 중요시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굴과 몸이 뻣뻣해져버린 표준 한국어른.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젠 웃고 싶을 때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어른 말이다. ‘아이가 체면을 차리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체면’에는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버리는 속성이 있다. 이 체면과 위신의 가면은 일단 뒤집어쓰면 쉽게 벗어버릴 수가 없어 아무 거리낌 없이 맘껏 웃고 싶을 때조차 웃음을 방해하곤 한다. 이제 우리는 그 뻣뻣한 가면을 벗어버리고 웃고 싶을 때 마음대로 웃을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오늘 만큼이라도 기쁨을 뒤로 미루지 말자. 한국웃음연구소 소장

[아침을 열면서] 남한산초등학교의 교훈

필자가 이 학교를 찾았을 때는 봄방학 중이었다. 게다가 금요일 오후 5시여서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 교실문을 열어보니 스르르 열리는 것이 아닌가. 교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습준비실도 그리고 심지어는 교무실문도 잠겨있지 않았다. 이 학교는 예사학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금시 알 수 있었다. 1912년 5월에 개교하여 역사가 100년이 넘은 학교.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이 1회로 졸업하여 자부심이 높은 초등학교다. 아름다운 남한산성 도립공원에 위치한 ‘남한산초등학교’에는 특별한 일이 있었다. 경치 좋고 환경은 좋지만,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주거 환경이 제한되는 바람에 인구가 줄고 급기야 2000년에는 전교생이 26명이 되어 폐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우연히 인근지역에서 시민모임을 하는 학부모들이 여름방학 연수로 이 학교에 왔다가 당시 교장으로 부임한 정연탁 선생님으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해 보자는데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이들은 ‘전입학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새 학교를 만들어줄 교사를 초빙했다. 그리고 동문, 지역사회 인사들을 만나 동참을 호소했다. 이들은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지금까지 공교육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하는 새로운 학교, 그것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관행화된 40분 수업을 바꿨다. 실제로 40분 동안의 수업으로 할 수 있는 학습은 극히 제한적이다. 교사가 설명하면 아이들은 듣고, 그런 뒤 숙제를 검사하고 다음 숙제를 내주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강의와 함께 그룹별 토론과 발표가 이뤄지는 유연성 있고 생산적인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교과간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하며 학습시간의 단위도 최소한 80분 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래서 80분 블록제를 도입했다. 쉬는 시간도 30분으로 늘려 학생들이 제대로 놀이를 즐길 수 있게 했다. 또 주변 환경조건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에 걸맞게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쓰이던 땅을 농장으로 일구어 농사체험 공간으로 조성했고, 교정의 시멘트 스탠드를 전교생이 벽화작업을 하여 미술작품으로 꾸몄으며, 뒷산에 산책로를 만들고 숲속 놀이터를 조성했다. 이런 일을 추진하는 사이 학교와 학부형, 그리고 지역사회와는 벽이 완전히 무너졌고, 교사들도 온전히 한가족이 되었다. 교무회의도 일방적인 정보전달이 아니라 모두가 이야기하는 화롯가 모임 같았고, 수업도 서로 공개하고 공유하였으며, 학생들도 언제나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아이들끼리 생기는 문제는 다모임이라 부르는 자치회가 처리했다. 이런 일을 시작하자 10명, 20명 전입생이 늘었고, 2001년 8월엔 학생이 103명이나 되어 6개 반을 편성할 수 있었다. 2016년 3월 현재 남한산초등학교 학생수는 166명이나 된다.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패함에 따라 ‘인간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인간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엄청나게 변하게 될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떤 역량을 가져야 하나? 단지 시험점수나 올리고, 대학입시나 대비하고 대기업 취직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창의적인 역량이 필요하고,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배려하고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 이야기가 온통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는 이때 작은 배움공동체 남한산초등학교의 시도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조영호 아주대학교 경영대 교수

[아침을 열면서] 31운동의 경제적 의의

97주년 3ㆍ1절을 보냈다. 곧 100주년이다. 삼일운동의 경제적 의의는 무엇일까? 경제학자의 호기심이다. 마음은 급하지만 손익에 앞서 사실관계를 확인하자.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중순까지 지역과 계층의 구별 없이 약 200만 명이 참여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그것도 비폭력 무저항으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것이 삼일운동이다. 이제 손익을 따져보자. 삼일운동의 손해는 무엇일까? 200만 명을 넘어서는 생명이 누란지위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음이 손해일 것이다. 삼일운동의 편익은 무엇일까? 역사는 현재의 문제를 기준으로 늘 재해석돼야 한다. 경제적 측면만 본다면 경제발전일 것이다. 경제발전의 요인을 따진다면 “바보야 문제는 바로 제도야”라는데 합의가 모이고 있다. 사람들의 선택은 손익에 의존하고, 게임규칙(즉, 제도)이 손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혁신이 필요하다면 혁신에 유리한 게임규칙을 만들 일이다. 삼일운동은 이렇게 중요한 제도와 어떻게 관련될까? 삼일운동이 유별난 점은 ‘독립을 목표로 설정’하기보다는 ‘독립을 기정사실로서 공표’하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삼일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독립국가에 필요한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첫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한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삼일운동의 가장 큰 성취는 임시헌장의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다. 마침내 4천년 넘는 군주 또는 귀족국은 부정되고 주권재민과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 선언된 것이다. 이 점이 왜 그리 중요할까?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간의 현학적 관계 규명은 뒤로 하고 모두 아는 바를 정리해보자. 세계 각국을 살펴보면 저소득 국가와 하위 중소득 국가에는 민주정과 비민주정이 대체로 비슷한 수만큼 존재한다. 상위 중소득 국가로 넘어가면 민주정이 지배적이며, 고소득 국가(석유수출국 및 도시국가 제외)는 모두 다 민주주의 국가이다. 한편 하위 중소득국이 상위 중소득국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중소득국이 고소득국이 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이를 보통 ‘중소득국의 함정’이라 부르는데, IMF,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실제로 1960년의 중소득국 중에서 2008년에 고소득국의 반열에 오른 국가는 한국을 포함한 13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은 석유수출국과 도시국가를 제외하곤 모두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정리하면 헌법전문이 말해주듯 삼일운동의 편익은 바로 오늘날의 경제적 성취이자, 이를 가능하게 한 제도의 창출로 보아야 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임시헌장으로 대변되는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당시 한국인들의 지적 성취이다. “구황실을 우대(제 8조)”하는 것으로 늘 그랬듯이 평화적으로 과거를 마무리하고, “민주공화제”로 한 문구로 새 시대를 여는데 합의를 이루어낸 연고가 궁금한 것이다. 일본의 경제적 성취를 그리도 무시할 정도로 성리학에 체화된 유인(孺人)들이 서구의 물밀듯이 밀려오는 사상 조류와 이웃 러시아의 기세 등등한 혁명을 ‘민주공화국’ 이 다섯 자로 정리한 것이다. 다가오는 100주년에는 선대의 지적 성취에 한껏 머리를 조아려 보고자 한다. 최희갑 아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관계적 사고와 경청

최근 신문에서 현대인의 행복에 대한 칼럼을 읽었다. 칼럼의 요지는 행복은 부나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 칼럼은 사회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정말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의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은 인성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할 아동 및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풍조를 만연시켰고 남들보다 우월하게 보이기 위한 기술과 스펙을 쌓는데 에너지를 쏟도록 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상호 협력하여 무엇인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관계적 사고’는 무시된다. 실제로 많은 학교들은 발표나 토론수업을 할 때 합리적, 논리적 사고에 기초하여 대화를 주도하며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설득력은 단순히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다. 타인의 입장과 배후에 있는 그의 감성을 살피는 관계적 사고에서도 나올 수 있다.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이 단순히 논리적 타당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을 얻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청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면 경청교육을 어떤 식으로 실행할 것인가? 우선 경청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경청은 타인의 말을 단순히 듣는 소극적이고 보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대화를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는 핵심적 토대이다. 경청은 우선 타인의 말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나아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표현함으로써 관계유지에도 기여하는 대화의 핵심행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겠다. 대화의 핵심행위로서 경청은 언어와 비언어 유형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비언어적 경청은 ‘시선집중하기’ 나 ‘고개 끄덕이기’, ‘메모하기’, ‘가볍게 미소 짓기’ 등으로 나타난다. 경청교육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상황에 적절하게 경청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진정성 없이 형식적으로 취하는 경청은 문제가 된다.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도록 구체적 표현법을 제시하고 실습하도록 해야 한다. 언어적 경청은 타인의 말에 대해 언어적으로 반응하는 행위를 나타내며, ‘맞장구’, ‘질문하기’, ‘지지하기’, ‘조언하기’ 등이 있다. 언어나 혹은 비언어 경청을 선택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이루어져야 한다. 경청교육의 핵심은 타인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그의 감성을 살피고 반영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를 키우는 교육이 자신에게 집중했다면, 관계적 사고를 키우는 경청교육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교육이다. 설득력과 소통능력은 타인의 말을 많이 듣고 핵심만 적게 말하는 행동에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은 대화를 지배하는 데만 가치를 두고 경청에 대해 무관심하다. 성숙한 사회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다. 높은 산의 정기와 수려함은 깊은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계곡이 없으면 높은 산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다. 경청교육을 통해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살피는, 그런 계곡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으면 한다. 조용길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아침을 열면서] 웃음은 최고의 유산소 운동이다

스포츠, 레저, 취미생활, 건강식품·····. 누구나 웰빙과 건강이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운동과 웰빙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다닙니다.그러나 필자는 웃음이야말로 탁월한 운동이자 가장 기본적인 웰빙의 수단이라 믿고 있습니다. 웃음이 운동이라고 하면 더러 웃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는 웃음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웃음의 운동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속속 입증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15초 동안 깔깔 웃으면 5분 동안 에어로빅을 하는 것과 비슷한 양의 에너지가 소모되며, 1분여 동안 크게 웃으면 10분 동안 조깅을 한 것과 유사한 운동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볼 메모리얼 병원이 다년간 환자들을 관찰하여 발표한 바에 따르면 15초 동안 크게 웃으면 수명이 이틀씩 연장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교수는 10초 동안 배꼽을 잡고 깔깔 웃으면 3분 동안 힘차게 노를 젓는 것과 비슷한 운동효과가 있으며, 한번 웃을 때마다 우리 몸에 있는 660개 근육들 가운데 231개의 근육들이 움직이고 얼굴근육만도 15개가 운동을 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크게 웃으면 심장이 활발하게 작동함은 물론 상체, 가슴, 위장의 근육들까지 함께 움직이게 되므로 웃음에는 탁월한 운동효과가 수반된다는 분석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웃음은 단순한 생리현상이 아니라 탁월한 운동입니다. 효과가 뛰어나며, 언제 어디서나 간단히 할 수 있고, 돈도 들지 않는 운동이 바로 웃음입니다. 억지 운동도 효과는 같다. 미국의 폴 에크먼 박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특정한 행동이나 감정 표현을 흉내 내면 실제로 그런 행동이나 감정표현을 할 때 수반되는 느낌이 뇌를 움직여 우리의 몸이 거기에 적합한 반응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고 합니다.가령 빈손을 입에 대고 오렌지를 깨물어 먹는 시늉을 하면 오렌지의 신 맛이 뇌를 자극하여 실제로 입안에 침이 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또 배우들이 슬픔에 젖은 극중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을 진지하게 흉내 내면 실제로 눈물이 솟아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웃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웃으려고 마음먹고 억지로라도 깔깔 웃으면 웃고 있다는 느낌이 뇌를 자극하여 우리몸이 실제로 웃는 것과 거의 비슷한 반응을 유도합니다. 일부러 웃으려고 웃더라도 얼굴과 가슴과 위장의 근육들이 똑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크게 소리내어 억지로 웃더라도 실제로 웃는 것과 비슷한 운동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필자는 매일 아침 웃음운동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1분 이상을 크게 웃으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데도 그만입니다. 또한 동의보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웃는 웃음은 보약 열 첩 보다 낫다. 또한 사람을 만나기 전이나 강의 전에도 한바탕 크게 웃음운동을 합니다. 한 바탕 크게 웃으면 배에서부터 기분 좋은 자신감이 올라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뿐만 아니라 삶의 여유를 가져다줘 대인관계에 매우 효과적인 영향을 가져다줍니다. 지금 이시간 웃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보십시오. 웃음은 탁월한 운동입니다. 지금 당장 15초씩 몇 차례만 박장대소해 보십시오. 곧장 전신으로부터 상당량의 운동감이 기분 좋게 전해져올 것입니다. 웃으면 틀림없이 복이 옵니다. 이요셉 한국웃음연구소 소장

[아침을 열면서] ‘전에 없던 식탐 경쟁’ 쿡방이 불편한 몇가지 이유

말 그대로 ‘쿡방 전성시대’다. TV 프로그램에는 요리프로그램(쿡방)이나 먹는 방송(먹방)이 넘쳐난다.지상파 3사는 물론 종편이나 케이블 채널까지 서로 경쟁하듯 요리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현재 약 10개 곳 이상의 채널에서 비슷한 양상의 먹방과 쿡방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요리 프로그램의 가치와 효과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어머니의 공간인 부엌에서 이들과 함께 밥상 차리는 남자들, 얼마나 흐뭇한 모습인가. 어디 그뿐인가, 며칠 전 설 연휴 동안에는 쿡방 때문에 차례 음식준비에 남자들이 동참해 설 풍속도까지 달라졌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도되곤 했다. 이처럼 쿡방 열풍은 요리와 거리가 멀었던 남성을 주방으로 끌어들이고,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도한 쿡방 열풍으로 인한 사회 문제도 심심찮게 야기된다. 요리 프로그램이 방송가를 점령한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찮게 제기된다. 방송사들은 스타 세프들을 앞 다투어 양산하고 있고, 심지어 셰프와 아이돌의 합성어인 ‘셰프돌’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셰프 풍년’이다. 쿡방 열풍을 ‘푸드 포르노(Food Porno)’ 관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푸드 포르노’라는 용어는 미국의 여성학자 로잘린 카워드가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데, 음식이나 먹는 영상, 먹방이나 쿡방을 보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뜻한다고 한다. 과도한 요리 프로그램이 국민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요리 프로그램이 식탐 문화를 조장하고 비만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초고도비만 인구 비율이 특히 20~30대 사이에서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방송 프로그램의 획일성이다. 프로를 다양하게 제작하지 않고 오로지 시청률과 트렌드에 따라 유사한 프로그램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획일적으로 주어지면 싫어지게 마련이다. 요즘 요리 방송이 그런 것 같다. 갈수록 재미없어지고, 심지어 약이 오르기도 한다. 왜 우리는 타인이 먹고 있는 모습, 그것도 과장되게 먹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프로그램 편성 관련 분들에게 묻고 싶다. ‘넘쳐나는 쿡방 때문에 누군가가 매번 먹고 있는 모습을 보는 당신 기분은 어떠십니까’라고. 언론학을 가르치는 필자 입장에서 시청률, 제작비 등 방송 속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시청률에 얽매여 비슷한 인기 프로만 고집하면, 시청자의 시청 선택권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TV를 보면서 하루 동안의 피로를 풀고 싶은 시청자들의 소박한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가족 간 소통에 도움이 되고,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따스한 가족관을 심어 줄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 그립다. 김정순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겸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교실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 인턴십(현장실습)이 본격 도입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마이크로 소프트에서는 산학협력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는 캐나다의 워털루 대학 학생들을 선호한다는 보도가 화제가 된 때였다. 물론 의대와 같은 특수 분야에서는 인턴십이 애초부터 교육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공학이나 경영학 같은 전공에서도 인턴십을 학점과목으로 운영하도록 권장하는 정부의 정책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수 입장에서는 기업체에서 학습하는 인턴십을 선뜻 학점과목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학교에서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과는 달리 기업체에 나가 현장업무를 익히는 것이 과연 ‘공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기야 현장에서는 마지못해 대학생을 인턴으로 받아 놓고는 잡일이나 시키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 학기 기업에서 연수를 하면 4과목을 이수하는 것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취업으로 바로 연결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인턴십은 좋은 교육과정으로 자리를 잡았고, 일반 기업체 인턴십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이나 NGO, 나아가서는 해외 인턴십으로 확대되고 있다.최근에는 창업열기가 대학가에 번지고 있다. 특히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세운 현 정부는 3년 전부터 대학에 창업교육을 강하게 주문하고 나섰다. 창업관련 과목을 다수 개설하게 하고 또 창업실습이나 캠프를 열게 하며 또 창업을 지원하는 재정이나 공간 그리고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여기에 대해서도 교수들의 불만은 크다. 창업교육이라 해봤자 학문적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아이디어를 찾고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하는 것이 고작 아니냐고 보는 것이다. 교수들의 이러한 우려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창업교육은 대학교육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창업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급기야, 학생이 스스로 학습프로그램을 설계하여 학점을 받는 자유학기제가 중학교뿐만 아니라 대학에도 도입되고 있다. 필자가 알기에는 이화여대, 한동대 그리고 필자의 학교인 아주대학이 내년 1학기부터 실시한다고 한다. 아주대학에서는 ‘도전학기’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데 학생들로부터 신청을 받아보니 65개 팀 164명이 지원을 했다. 그 중 심사를 거쳐 39개 팀 118명이 허가를 받았다. 이 중에는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팀도 있고,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하겠다는 팀도 있고, 해외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팀도 있다. 학생들은 교수나 전문가로부터 지도를 받고 또 활동비도 일부 지원을 받는다. 이것도 교수들은 걱정이 많다. “아니 과외활동으로 해야 할 일들에 학점을 준다는 말인가” 하며 볼멘소리다. 교육과 사회요구와의 괴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는 교육자들이 그리고 있는 인재상과 많이 다른 것이다. 사회는 단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인재를 원하고 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 아니 우리 산업화 초창기의 정주영, 이병철 같은 인재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교실파괴, 교수파괴 나아가서 교육과정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안정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에서 교육은 조직중심, 교사나 교수 중심, 교실중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가속되고 수평화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개인중심, 학습자 중심, 현장중심으로 교육이 바뀌어 나갈 수밖에 없다. 이제 교수도 ‘갑’의 위치를 포기해야 하나 보다. 조영호아주대학교 경영대 교수

[아침을 열면서] 타문화를 배운다는 것

오늘날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의 발달은 타문화를 접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기업에서는 화상회의를 통해 국제적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다. 대학에서도 외국 석학을 사이버수업을 통해 쉽게 만나는 시대이다. 즉 급속한 글로벌화에 따른 문화 접촉으로 인해 타문화를 배울 기회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실제로 기업에서는 정기적으로 사원들에게 해외연수를 통해 타문화 탐방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지만 대개는 몇몇 문화경관을 방문하고 배우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현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 타문화를 배우는 목적이 단순히 실용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타문화를 배우는 본질적인 목적은 타문화와 고유문화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즉 타문화 학습은 우리를 잘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용적 도구만을 전수하는 영어교육, 단편적 문화지식만을 가르치는 문화교육은 제고될 필요가 있다. 외국어 교육현장과 일부 미디어에 소개되는 타문화 관련 프로그램에 그치지 말고 현장 체험을 통해서 타문화의 숨결을 온전히 느낄 수 방법도 강구되어야 한다. 둘째, 타문화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도 지양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부 미디어에 나타난 정보에만 의존하여 타문화 전체를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타문화에 대한 편견, 왜곡된 이해를 야기하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한 사회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또한 한 문화권 내에서도 계층적, 지역적 분포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하나의 고정된 문화해석의 틀을 갖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타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고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아울러 타문화에 대한 성급한 가치판단도 문제다. 우리는 종종 문화적 우월성에 사로잡혀 타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평가절하 하곤 한다. 실제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무시한다. 문화에 있어서 우열은 없다. 다만 배경이나 존재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문화를 배우는 궁극적 목적은 우리를 알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문화와 타문화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서로 다른 문화를 배우려는 개방적 자세가 요구된다. 또한, 타문화와 고유문화 어디에도 경도되지 않고 두문화의 장단점 및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것이 우리를 아는 길이다.즉 타문화에 대한 현장 체험, 비판적 논의를 통한 편견극복 나아가 고유문화와 타문화의 객관적 비교분석을 통해 타문화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우리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우리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단점을 극복해나가는 국가경쟁력의 토대가 아닌가? 타문화를 배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용길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아침을 열면서] 웃으면 기회가 온다

그리스에 가면 재미있는 동상이 하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사람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짐승같기도 한 애매한 형상의 동상입니다.“뭐야? 야릇하게도 생겼군”하며 지나치는 사람에게는 별의미 없이 스쳐가지만 가까이 다가가 거기에 새겨진 글귀를 읽어보면 깊은 감명을 받을 수도 있는 동상입니다. 앞머리의 머리카락은 숱은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며 발에는 날개가 달려있는 동상 아래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앞머리의 머리카락 숱이 무성한 이유는 나를 보았을 때 잡기 쉬우라는 뜻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까닭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건 최대한 빨리 달아나기 위해서지요.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랍니다” 이 글귀를 읽으면서 필자는 어느 기자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에게 던지던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평생에 기회는 몇 번이나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기회는 와이키키의 파도처럼 계속해서 우리 앞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오나시스의 인상적인 해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웃음을 선택하기 전에는 필자도 여느 사람들처럼 기회란 일생에 딱 세 번밖에는 안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혹여 그토록 귀한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스쳐보내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싶으면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고 그런 일이 연이어 일어나면 일생의 기회가 다 지나가버린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웃음의 힘을 체험한 뒤로는 “기회란 웃음을 동시에 선택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언젠가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분이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바이어를 만날 때마다 너무나 떨리고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데 웃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겠습니까? “네 잘 오셨습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웃음을 선택하면 기회는 언제든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필자는 그렇게 대답한 뒤 그분에게 ‘최불암 웃음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파하아아아아…’ 출장 중에 크게 웃기가 힘들 것 같아서 어디서든 혼자서 비교적 조용하게 웃을 수 있는 웃음법을 추천했던 거지요. 1주일 후에 그분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소장님 덕분에 웃음을 통하여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되어 너무너무 기쁩니다” “사업을 성공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면 우리의 뇌는 엄청나게 긴장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많이 웃어주면 신경과 근육이 이완되면서 마음이 안정을 찾고 하고 싶은 말도 쉽게 할 수 있는 법이지요. 어쨌든 성공하셨다니 저도 참 기쁩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한바탕 신나게 최불암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통화를 끝냈습니다. 필자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공할 기회를 잡고 싶다면 열심히 웃으십시오. 웃으면 성공의 기회를 훨씬 많이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요셉 한국웃음연구소 소장

[아침을 열면서] 물 들어왔으니 노 저으랴

최근 대학가가 또다시 긴장하고 있다. 학과 구조조정의 거센 조류에 일부 경기도 내 대학에서는 총학생회까지 단식으로 맞서고 있다. 이번의 조류는 교육부의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사업’(이른바 프라임 사업)으로 대표된다. 정부가 밝히고 있듯이 ‘사회수요 중심의 자율적인 대학 체질개선’을 위해 사회적 요구와 산업수요에 맞춰 학과를 통폐합하는 조류를 부정하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물이 정말 들어오긴 왔느냐이다. 지난 15일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은 사업 추진의 근간으로 ‘2014~2024 대학 전공별 인력수급전망’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자료를 보면 물이 들어오긴 온 것 같아 보인다.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향후 10년간 문과는 일자리가 모자라고, 반면 이과는 일자리가 남는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친절하게 숫자까지 꼼꼼히 제시하고 있다. 4년제 대학 졸업자 기준으로 인용해보면 앞으로 10년간 인문계열 10만 여명, 사범계열 12만 여명, 사회계열 21만 여명이 취업난에 허덕이고 공학계열은 졸업자 21만5천 명가량이 더 필요하다.더불어 앞으로 10년간 자연계열은 6만 명 가까이가 초과 공급되고, 의약계열은 4천여 명이 초과 수요된다.이 전망치를 만들기 위해 정부는 6월에 협의체를 구성한 뒤 전문가 의견, 설문조사, 인터뷰, 전문가 포럼, 전문가 T/F회의를 거쳤다. 보고서에는 대학전공별 인력수급전망은 최초로 이루어진 만큼 한계점이 있고, 또 예측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애써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정말 물이 들어왔을까? 언론에 발표된 전망치를 보면서 필자는 고개가 갸우뚱했다. 기존에 필자가 접했던 자료들과 작지 않은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필자가 대학에서 한국경제론을 다룰 때 자주 사용하는 자료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2012 국제지표로 본 한국교육’이다. OECD에서 매년 회원국의 교육상황을 비교분석한 ‘Education At a Glance’라는 자료를 발표하는데, 이들 연간 자료들을 일일이 보기에는 어렵기에 요령 있게 요약된 교육개발원의 책자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료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 대학의 전공별 입학생 분포를 보면) 사회과학, 경영 법학에 대한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며 과학과 같이 순수 학문 분야를 전공한 학생 비율도 OECD평균이나 주요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국가과학 기술 발전을 취약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순수 학문분야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자료를 좀 더 자세히 보면 한국의 공학계열 비중은 35.4%(남성 기준)로 OECD 평균(25.0%)이나 제조 강국인 독일(29.9%)과 일본(25.2%)을 이미 크게 앞서고 있다. 반면 한국의 사회과학, 경영, 법학계열 비중은 20.5%로 OECD평균인 31.4%나 독일의 23.7%, 일본의 33.9%를 하회하고 있으며, 과학계열 비중(9.2%)은 일본(3.1%)을 앞서나 OECD평균인 13.3%, 독일의 15.5%를 크게 밑돌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분석은 OECD가 우리나라의 대학교육을 설명할 때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기에 한국교육개발원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필자만의 상식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부에 보고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2010년 분석 자료에는 이런 표현도 있다. “(전망해보면 2008~2018년 중 대학) 전공별로 공학계열 초과공급(12.0천명), 인문계열 초과수요(-7.6천명) 등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기술혁신 문제를 다루며 한국의 대학졸업 인력의 수급불일치와 관련하여 OECD에서 자주 지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급기술 분야에서 학사 학위자가 지나치게 많고 석사나 박사 학위자가 지나치게 적다는 점이라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쯤 되면 물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아니 오히려 물이 들어왔느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장소를 제대로 잡기는 한 것이냐는 생각에 미친다. 지금 배를 띠우는 곳은 우리가 추격자(follower)로서 늘 노를 저어왔던 바로 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도 들지 않을 곳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최희갑 아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토론교육의 패러다임 바뀌어야

최근 중ㆍ고등학교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토론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과거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경험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교육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기존 지식을 수동적으로 암기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 지식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회의 다양한 쟁점에 대해 찬반으로 나누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조율하는 행위를 통해서 민주사회의 성숙한 일원으로 훈련시킬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토론교육의 실상을 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지나치게 논쟁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대측을 허물기 위한 비판일변도의 편향적 토론교육이 실행되고 있다. 물론 비판이 토론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해 문제를 최소화시켜 보다 나은 대안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교육이 오로지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술을 익히게 하는데 매몰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러한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토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얼마 전 필자는 학생들에게 토론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대부분은 논리적으로 싸우는 행위라고 대답한다. 토론을 잘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논리로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 된다. 토론은 사안에 대한 의견의 다름을 극복하여 공통의 합의나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실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논증하는 능력, 상대방 논거의 허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비판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면밀히 분석하는 경청능력일 것이다. 토론은 일방적인 설득과정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경청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는 행위(hearing)가 아니라, 상대방 말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나아가 ‘공감적 경청’도 토론에서 중요하다. 말 속에 존재하는 상대방 마음을 정확히 읽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은 토론을 ‘건설적’으로 만드는 한 방법이다. 실제로 토론에서 자주 나타나는 갈등의 원인은 ‘말 자르기’, ‘상대방 주장 무시하기’, ‘인신공격하기’ 등이다. 이런 폭력적 언어 대신에 존중받기를 원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 반영하는 언어를 사용할 때 불필요한 갈등으로 인한 소모적 토론을 피할 수 있다. 주지하디시피, 최근 한국사회에서 소통과 토론의 중요성이 매우 크게 대두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의 지나친 경쟁주의, 나만 옳다는 독선적 사고방식의 팽배가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논쟁위주의 토론에서 ‘대화적’, ‘건설적’ 토론으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상응하는 적절한 토론교육이 이루어질 때 일방적인 설득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가치의 중요성이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조용길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아침을 열면서] 과거제도, 사법고시와 로스쿨 제도

최근 사법고시와 로스쿨 제도의 문제로 우리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둘 사이의 문제는 최종적으로 우리사회가 어느 제도를 통하여 우리의 능력 있는 사람들을 뽑을 수 있는데 있다.둘 다 우리가 모두 ‘성과주의(meritocracy)’를 잘 해보자는데 뜻이 있다. 이런 제도는 우리의 동서양을 통하여 최대한의 문화적 유산인 과거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 한(漢)나라에서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수(隋) 양제 (569~618)에서 본격적으로 전 국가를 상대로 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당시에는 귀족제도, 군벌제도를 멀리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의 힘을 키우고자 하는 때였다. 그런데 이러한 힘이 소수의 귀족제도나 군벌제도를 멀리하고 전 국가를 상대로 하는 선정(善政) 제도와 결합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제도는 황권의 신장과 선정사상의 결합으로 훌륭한 동양사상의 장점으로 꼽히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삼국시대부터 영향을 주어, 이조 500년에 본격적으로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단순히 능력 있는 사람을 키워내는 중요한 제도를 넘어 전 국민을 상대로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문명제도를 창안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귀족중심의 부모의 영향력을 벗어난 일반인의 사회 진출제도를 과거를 통하여 시행하는 것은 사회 변혁기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시사한다. 동양의 ‘성과주의’에 입각한 과거제도는 서양의 법치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서양의 계몽사상가들에게 동양의 과거제도가 소개될 때 이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영국의 새무엘 죤슨은 “동양의 관료들이 학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당시에 영국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자리는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중요성은 오늘날의 동양에서 특히 중요하다. 모든 나라 사람들은 자식들을 교육 시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성과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성과주의는 교육열을 중심으로 근검, 절약, 미래의 커다란 성과를 기대하기 위하여 현재의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노력하는 제도(deferred gratification), 끝까지 노력하는 태도 같은 것이 공존해 있다. 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재산이다. 성과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교육열은 죽고 만다.성과주의가 없으면 돈이나 권력의 배경이 없는 인재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러면 실력 없는 자들이 득세하고 실력 있는 자들이 음지에서 고생하는 부절적 한 사회구조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를 음서제도라고 표현하였다. 음서제도(蔭敍)는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에 의지하여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敍用)하는 제도이다. 지나간 과거제도의 좋은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그리고 현재 사법고시제도와 로스쿨제도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을 하고 있다. 그 내막은 잘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선택하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성과주의와 음서제도 사이에서 분명히 성과주의를 택하여야 한다. 최영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유머없는 사람은 스프링마차

어느 날 카톡에 배꼽을 잡고 웃을 만한 유머가 날아왔다. 함께 읽고 난 후 아내는 속까지 후련하다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왠지 나에게 아내의 콧노래가 거슬리기만 하다.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한 통 속으로 남자를 몰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만가지 감정에 휘둘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다시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일 텐데.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이 키워야 하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이것을 나는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회복탄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그냥 웃어버리면 다시 원위치에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자. 불쌍한 남편의 일기0월0일. 아내가 애를 보라고 해서 열심히 애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아내에게 머리통을 맞았다. 너무 아팠다. 0월0일. 아내가 커튼을 치라고 해서 커튼을 툭툭 계속 치고 있는데 아내가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다. 왜 할퀴는지 모르지만 아마 사랑의 표현인가 보다. 얼굴에 생채기가 났지만 스치고 지나간 아내의 로션냄새가 참 좋았다. 0월0일. 아내가 분유를 타라고 했다. 그래서 이건 좀 힘든 부탁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이므로 열심히 힘을 다해서 분유통 위에 앉아 끼랴끼랴하고 열심히 탔다. 아내가 내게 걸레를 던졌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 팬들이 손수건을 던지기도 한다는데. 0월0일. 아침에 일찍 회사를 가는데 아내가 문 닫고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문을 닫은 다음 나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30분 헤매고 있다가 아내에게 엉덩이를 발로 채여서 밖으로 나왔다. 역시 우리 아내는 못하는 게 없다. 이글을 보여주면 남녀가 각각 다르게 반응을 한다. 여성이라면 박수치며 웃는다. 공감 백배인 것이다. 거기다가 통쾌 상쾌 유쾌하단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 유머가 10년 묶은 증까지 가시게 한단다. 그런데 남성은 다르게 반응한다. 나처럼 씁쓸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단다. 나이 들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아내에게 체 듣는 것이 더 서럽단다. 한낱 우스갯소리지만 이처럼 한 글을 읽고서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다른 것이다. 감정에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는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삐걱거리지 않는 감정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힘들고 약해질수록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에 휘청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헨리 와이드비처는 말한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스프링 없는 마차와 같다. 길 위의 모든 돌멩이들을 스칠 때마다 삐걱거린다’. 참으로 공감가는 말이다.2015년을 잘 보내고 2016년은 활기차게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은 웃어버릴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첫째 일어나자마자 웃어라. 아침에 웃는 웃음은 10첩의 보약과 같다. 둘째 한 번 웃고 또 웃어라. 지속적인 습관이 인생을 만들어 낸다. 셋째 시간을 정해 좋고 웃어라. 무릇 지킬 만한 것은 생각과 마음이다. 오늘도 행복하게 오늘도 건강하게 유머로 이겨내자. 이요셉한국웃음연구소 소장

[아침을 열면서] 말보다는 마음을 나누는 소통

언론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소통일 것이다. 정치권 및 사회 각계각층에서 중요시하는 덕목 중에 소통이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지도자의 소통능력은 한 집단을 이끌 수 있는 자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소통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결코 지도층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스스로 소통을 잘하고 있다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자식들과, 남편이나 아내와 소통을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런가? 아마도 소통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통을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과정으로 이해한다.하지만 이것은 소통의 피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진정한’ 소통은 상호 간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쌓는데 기여해야 한다.따라서 소통은 단순히 두 사람이 만나서 말을 주고받는 과정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소통은 자기기만이자 불신의 원천이다. 마음을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자기를 상대방에게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마음이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죄책감, 미움, 분노, 현실 불만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과 존중, 이해, 감사가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마음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때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때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갖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사피어-워프Sapir-Whorf에 의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즉 자신의 마음을 긍정적인 것으로 채우기 원한다면 긍정적인 언어를 자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예컨대 일상의 삶,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남의 작은 친절에 대해서 늘 감사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긍정적 마음을 위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아울러 마음을 연다는 것은 사안에 대한 열린 관점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개인적인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이러한 평가나 판단은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것을 절대시여기면서 자신의 기준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하고 평가 절하해 버리곤 한다. 그러면 열린 관점, 즉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어가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수용한다면 이 역시 언어사용의 변화로 실현될 수 있겠다. 예컨대 상대방을 평가, 비판하는 언어 대신에 상대방의 마음을 관찰하고 그가 원하는 것에 주목하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다른 의견을 포용하는 열린 마음을 기를 수 있다(마셜 로젠버그 Rosenberg, M. 2003). 소통은 상호이해와 협력, 합의도출의 목표를 위해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목표를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진실로 상대방을 대화의 파트너로 존중하며 그의 의견을 포용하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상대방도 마음을 연다는 기본적 원칙에 따라서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앞서 강조했듯이 자기의 마음을 개방하는 것이 상호 신뢰와 소통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조용길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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