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새로운 깃발

예부터 다양한 의미가 있었다. 깃발 이야기다. 특히 병영에서 그랬다. 부대의 존재를 과시했다. 장군의 지휘권도 상징했다. 전투 중에는 위치도 알렸다. 그래서 기수는 적이 최우선으로 노리는 타깃인데도 늠름하게 위치를 특정했다. 이 때문에 담대하고 용맹한 병사들이 맡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영토나 영역의 표시이기도 했다. 적군이 점유하던 곳을 점령한 후에는 아군의 깃발로 바꿔 달았다. 이때 노획한 적군의 깃발은 아군의 빛나는 전공을 상징하는 증거 중 하나로 보관됐다. 전후 적군과의 화친이 성립돼도 반환을 꺼렸다. 19세기 말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빼앗긴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힌 깃발이 대표적이다. 베트남 파병 당시 노획한 금성홍기가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해병대 제2사단(청룡부대)이 노획한 베트콩기도 보관하고 있다. 동티모르 파병 당시 상록수부대가 인도네시아 국기를 노획한 사례도 그렇다.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프랑스 ‘삼색기’는 혁명의 불꽃 상징으로 세계 곳곳의 계급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영제국의 상징인 ‘유니언 잭’은 제국주의의 확장을 촉발했다. 공산권 국가의 상징인 ‘오각별’은 거대한 이념집합체를 의미했다. 지난해 겨울부터 광화문과 여의도 등지에서도 다양한 깃발이 나부꼈다.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깃발’이 떠올랐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며칠 후면 우리 마음에 새로운 깃발이 걸린다. 어떤 형태와 내용일까.

[생각 더하기] 잊혀진 무명의병을 찾아서

118년 전 한 장의 사진이 남겨졌다. 산속에서 총을 든 조선 청년들, 그 곁에 외국인 기자 한 사람이 있었다. 1907년 가을 영국의 종군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경기 양평군 오빈리에서 의병을 만나 촬영한 사진이다. 오늘날 이 사진은 교과서, 박물관, 신문 기사 속에서 익숙하게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안의 인물들에게 묻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이름도, 나이도, 마지막 순간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얼굴들을 수없이 봐 왔지만 한 번도 그들의 삶과 죽음을 상상해보지 않았다. 왜 우리는 그들을 잊었을까.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명의병들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몫이다. 안중근,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는 기록이 남아 있기에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순국 독립운동가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싸웠지만 드러나지 않았고 그렇게 잊혔다. 기록을 남기면 일제에 체포되고 탄압당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친 진짜 독립운동가는 누구입니까.”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군이 남긴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전국에서 1만7천779명의 의병이 전사했다. 경기도 출신만도 1천288명에 이른다. 그러나 공식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름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사살된 폭도 ○○명’으로만 남아 있다. 우리는 그들을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무명의병을 찾아 떠난 3년의 여정 세계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를 기억한다. 프랑스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의 묘,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신만이 아는 병사’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명의병을 기억하지 않았다. 의병의 전투 기록은 남아 있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이름 있는 의병장 중심으로만 기억해 왔다. 2022년 몇몇 역사학자가 잊혀진 무명의병 찾는 일을 시작했다. 양평 오빈리 사진 속 의병의 흔적을 따라가며 기록을 모았고 영상과 카드뉴스, 학술포럼, 시민 행사로 확장됐다. 2023년에는 경기도의회가 ‘경기도 무명의병 기억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으며 2024년부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본격적인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에는 강연과 포럼이 열리고 무명의병에 대한 기억을 시민과 함께했다. 이는 단순한 과거 정리가 아니라 기억을 다시 세우는 윤리적 실천이다. 무명의병 기억은 우리 시대의 책임이다 무명의병은 누구의 아버지였고 이웃이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다. 그저 지워 버렸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그들을 다시 불러야 한다. 이름은 없어도 그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무명의병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곱씹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되묻는, 미래를 향한 실천이다. “산천초목만이 기억하던 이름, 이제 우리가 부르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국 내몽골 변방 도시 ‘엘렌하오터’

■ 중국 입국의 복잡한 행정절차 중국 최변방 고비사막 국경도시 ‘엘렌하오터’에서 중국 통과를 위한 복잡한 행정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외국인의 자동차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경우 제한적으로 허가한다. 우리는 서울에서 출발 전에 중국 컨설팅회사와 접촉, 우리 자동차의 중국 입국 허가 절차를 미리 마쳤다. 중국 컨설팅회사를 통해 5개 중앙부처(총참모부, 공안, 해관총서, 외교부, 문화관광부)의 허가를 받아 놨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자동차 번호판 발급, 자동차 등록, 자동차보험 가입 등 여러 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국제운전면허증’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여행 준비 과정에서 국가 간 자동차의 자유로운 여행을 지원하는 ‘제네바국제조약’이 있고 우리는 ‘가입국’, 중국은 ‘미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은 외국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와 소수민족 인권 및 환경 문제 등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의 자유로운 자동차 여행을 통제한다. 입국허가 당시 사전에 우리 차가 지나갈 코스를 중국 정부에 신고했다. 우리 차량이 신고 지역을 벗어나는지 감독하는 감독관 한 명이 내몽골 국경부터 탑승해 함께 여행해야 한다. 이 사람은 ‘류 선생’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조선족이라 의사소통이 자유롭다. 중국 영토를 벗어날 때까지 류 선생의 급여, 숙식비 등 제반 비용도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입국허가, 운전면허증 발급 등 중국 입국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거액이다. 옛날 실크로드 상인이 오아시스를 통과할 때 통행세를 냈던 것처럼 중국에 통행세를 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엘렌하오터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부품 ‘터보’를 가져온 조선족 박씨를 만났다. 이미 울란바토르에서 중고 부품을 교체했기 때문에 터보는 예비용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박씨의 ‘터보’ 부품 공수 여비를 우리가 부담한다. 중국 입국 다음 날 중국 세관에서 자동차를 찾아왔다. ‘자동차 번호판’, ‘운전면허증’도 나왔다. 이틀 동안 쉬면서 빨래도 하고 시내에서 발 마사지도 받는다. 컨설팅회사의 한 사장이 베이징에서 이곳으로 와 통관 업무를 대행해 줬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오랜만에 푸짐한 중국 요리와 바이주를 먹는다. 컨설팅회사 사장에게 “한국은 여러 명의 남자 중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여자를 ‘홍일점’이라고 한다. 중국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을 어떻게 부르나”라고 질문하자 ‘봉황’이라 한다고 했다. 사장은 오랫동안 외국인 자동차 여행 업무를 해 왔는데 여성 입국자는 내 아내가 처음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험난한 장거리 자동차 여행 참가에 존경한다고 말한다. ■ 공룡화석 보고 ‘고비사막’ 고비사막은 공룡화석의 보고다. 지금은 척박한 사막이지만 아마 2억~3억년 전에는 초목이 우거지고 많은 공룡이 살았던 지형으로 추정된다. 엘렌하오터 외곽의 ‘공룡 지질학박물관’은 1920년대 러시아 지질학자들이 공룡화석을 발굴했던 장소인데 중국이 대규모 야외 공룡 박물관을 만들었다. 수십마리의 공룡뼈가 뒤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공룡화석 매장지와 공룡알 화석이 인상적이다. 변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고비사막의 오지여서 평일 관람객은 필자와 아내뿐이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서울에 있는 어린 손자들이 생각난다. ■ 내몽골(중국)과 외몽골(몽골)의 차이점 몽골이 독립하기 전인 100년 전 ‘자민우드’와 ‘엘렌하오터’는 같은 몽골족 마을이다. 현재 두 지역은 국경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다. 중국 땅은 나무를 많이 심어 녹음이 울창하고 시내 도로가 6차선 뻥뻥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도시의 가로수, 공원의 나무는 고무 호스로 하루에 몇 번씩 물을 흠뻑 준다. 400㎞ 이상 멀리서 물을 끌어와 변방의 고비사막에 초현대식 오아시스 도시를 건설해 놓아 두 도시가 비교된다. 시내에서 대낮에도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가 자주 난다. 처음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결혼식, 생일날, 개업일 등 번성하라는 의미로 밤낮으로 폭죽을 터뜨린다. 주민들은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 씨앗을 잘도 까먹는다. 몇 사람만 있어도 목청이 크고 소란스럽다. 언어가 ‘사성 구조’여서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 군대가 많은 당나라 군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랍인들은 중국인 포로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처음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구글, 카카오톡, 네이버 등 외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서울에서 가져간 무전기 ‘워키토키’는 반경 5㎞까지 통신이 된다. 워키토키로 서로 간 연락을 하기로 했다. 간첩죄가 엄하게 적용된다는 소문에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SNS는 적게 사용할 생각이다. 중국 여행을 동행하는 감독관 류 선생은 지린성 출신 51세의 조선족 남자다. 류 감독관은 우리들 여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부 당국에 보고한다고 한다. 류씨 앞에서 중국 정치 얘기, 시진핑 주석 얘기 등 예민한 것은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 여행하면서 남의 감시를 받는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심리적 스트레스다. 아내는 중국의 심한 감시에 신경이 날카롭다.

[사설] 공약 관리 엉망, 선거법 바꿔 개선해야 한다

이런 대선은 없었다. ‘지각 공약집’ 얘기다. 선거 공약이 조각조각 제시되고 있다. 드라마 ‘쪽대본’을 보는 듯하다. 찾아보려면 일일이 언론을 들춰야 한다. 진작 배포됐어야 할 공약집이 없어서다. 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는 오늘 시작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공약집은 26일 공개됐다. 그나마 책자 발간은 더 늦었다. 민주당은 더 심하다. 28일 오후에 공개했다. 사전투표를 반나절 앞두고 나온 것이다. ‘탄핵 대선’의 촉박함만 탓할 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대선에서 공약은 늘 경시됐다. 선거 공약을 관리·공개하는 곳이 선관위다. 역대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공약도 선관위 홈페이지에 있다. 그런데 이게 뒤죽박죽이고 엉망이다. 경실련이 1987년 이후 대선 공약서 공개를 살폈다. 76명의 후보 중 32명은 벽보만 공개하고 있다. 2명은 공보만, 1명은 공약서만 공개했다. 공약 자료가 온전히 공개된 후보는 17명에 불과하다. 백년대계 국가 경영 약속이다. 그 자료가 이렇다. 대선 공약이 이 정도면 지방선거는 어떻겠나. 때마침 본보가 그 실태를 추적해 보도하고 있다. 기획 시리즈 ‘의원님 뭐하세요-광역의원 공약 추적기’다. 지역 맞춤형 공약의 현재 이행률을 봤다. 23.6%였다. 2013년 조사했을 때는 21%였다. 나아진 게 거의 없다. 그나마 경기도의회는 나은 편이다. 공개된 공약이 꽤나 많다. 다른 광역의회는 공개 자체가 없다. 이행 여부를 대조할 근거가 사라진 셈이다. 저마다 지역맞춤형 공약이라며 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근본 문제는 법률에 있다. 공약 관련 규정은 공직선거법 제66조(선거공약서) 제7항이다. ‘관할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공약서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등 선거구민이 알 수 있도록 이를 공개할 수 있으며, 당선인 결정 후에는 그 임기 만료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할 수 있다.’ 문구만 그럴듯하다. 여기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다. 강제규정이 아니다. 임의규정이다. 후보자가 공개 않겠다고 버티면 그걸로 끝이다. 경실련도 문제를 지적했다. 법 개정 요구다. ‘공개해야 한다’는 강행규정으로 바꿔야 한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 공개는 일상이다. 아주 간단한 절차만으로 공약 공개는 실현될 수 있다. 이걸 왜 ‘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으로 풀어놨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시대에 안 맞고 유권자 요구에도 반한다. 이번에는 동기까지 부여됐다. 공약집 없는 대선을 국민이 비난하고, 경기일보를 통해 허술한 공약 관리가 확인됐고, 경실련이 성명으로 법 개정을 촉구했다. 모든 유권자가 원한다.

[사설] 대법원 가는 화물차 주차장... 자치행정의 실종이다

인천 송도국제도시 9공구에 대규모 주차장이 있다. 송도 화물차 주차장이다. 5만㎡(1만5천여평) 크기라 대형 화물차 402대가 주차할 수 있다. 인천항만공사가 금싸라기 송도 땅에 50억원을 들여 2022년 12월 완공했다. 그러나 3년째 텅 비어 있다. 인천시가 주차관제시설 등 주차장 필수 시설물 공사를 불허해서다. 불허 명분은 주민 반대다. 지난주 이 주차장을 둘러싼 행정소송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인천항만공사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인천경제청)을 상대로 낸 소송이다. 주차장 가설건축물 축조 신고 반려처분 취소 청구다. 서울고등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인천경제청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반려처분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건축법에서 정하는 요건만 확인해 신고 수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민 민원 등 다른 사유로 수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인천항만공사나 인천경제청 모두 인천을 위한 기관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시민 세금과 시간을 들여 법정 다툼을 이어가게 된 것인가. 화물차 전용 주차장은 인천의 해묵은 숙제다. 공항 항만의 물류도시라면서 변변한 화물차 주차장 하나 갖추지 못했다. 물류업계는 차 둘 곳을 못찾아 헤맸다. 시민들은 주택가 이면도로 화물차 불법주차에 시달렸다. 인천항만공사가 먼저 나섰다. 2021년 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 인근에 부지를 잡아 인천시에 사업계획서를 냈다. 인천시도 군말 없이 승인했다. 앞서 인천시가 ‘화물차 주차장 입지 선정 용역’을 해보니 이곳이 최적지로 나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넓고 번듯한 화물차 전용 주차장이 탄생했다. 그러나 공사를 끝내고 나니 인천시가 입장을 바꿨다. 지역 주민단체 등이 반대하니 주차장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다른 부지를 찾아보자고 인천항만공사에 제안했다. 그러면서 이 주차장의 시설물 설치 신청을 모두 반려했다. 무인주차 관제시스템 운영시설은 물론 간이화장실 설치도 못하게 했다. 이런 갈등에 국민권익위원회나 행정심판까지 동원됐다. 인천시는 다른 부지를 찾아 화물차 주차장을 다시 짓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인천항만공사는 기껏 완공한 주차장도 쓰지 못하면서 대체부지는 어디서 찾겠느냐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 텅 빈 송도 화물차 주차장 주변 도로는 화물차 불법주차 장소로 변했다. 이제 와서 인천시는 화물차 주차장이 인천경제청 소관이라며 떠민다. 인천경제청은 이번 판결을 받고서도 대법원에 상고할 방침이라 한다. 이러면 자치며 행정이 무슨 소용인가.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을 법원이나 주민단체에 떠넘기는 풍경을 보고 있다.

[지지대] 푸른 제복의 공직자

흉기를 든 범인을 만났을 때 효과적인 호신술로 소개되는 기술이 있다. ‘기회를 포착해 신속히 도망가는 것’. 이런 돌발적이고 경악할 만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위에서 제시한 호신술(?)과 정반대로 날카로운 흉기와 맞서야 하는 직업군이 있다. 바로 푸른 제복의 공직자 ‘경찰’이다. 지난 22일 오후 9시50분께 파주시 한 아파트에서 가정폭력 의심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3명이 40대 남성으로부터 흉기 피습을 당했다. 조사 결과 중상을 입은 경찰관 2명이 방검복 등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현장으로 출동한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이들 경찰관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인식하고 상황을 회피했다면? 2021년 인천 남동구 빌라에서 층간소음으로 인해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 현장. 혈흔이 낭자한 범행 장면을 목격한 여경이 도망쳐 계단 아래로 피신했다. 현장으로 향하던 남경도 여경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 함께 빌라를 빠져나갔다. 이후 이들은 사회적 지탄을 받은 뒤 해임됐고 형사재판에서도 실형이 선고됐다. 다시 파주 흉기 사건과 관련, 경찰 고위 관계자의 “출동 지령에 안전장구 착용 지시가 있었으나 출동 경찰들은 착용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발언이 보도되면서 경찰 내부에선 지휘부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위급한 신고 상황에 방검복을 다 챙겨가지 못한 현장 경찰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직장인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 등에선 “권한은 지휘부에 있고, 책임은 현장에만 있느냐”는 볼멘소리도 이어졌다. ‘본인은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위해와 불법과 불의에 대결하며....’ 경찰의 복무선서 중 일부 내용이다. 심각한 인력난 속에서 최소한의 안전 확보를 위해 명시된 매뉴얼 규정조차 지키지 못한 채 참사의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경찰들. 이들이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 다짐하고 외쳤던 선서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도록 특단의 조치가 시급하다.

[함께하는 미래] 부고: 일자리 (RIP Jobs)

오픈 AI의 영상 생성 서비스 ‘소라’의 새 버전으로 ‘지브리 프사’ 열풍이 번지자 해외 소셜 미디어에는 ‘RIP Animator(부고: 애니메이터)’라는 문구가 떠돌았다. 그리고 지난주 구글이 동영상 생성 프로그램 ‘VEO 3’와 ‘FLOW’를 선보이면서 그 부고장은 곧 ‘RIP Filmmaker(부고: 영화감독)’으로 바뀌었다. 구글이 유튜브와 구글 포토의 막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보인 이 서비스는 창작의 민주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2차 대전의 전장, 신비한 우주 탐험, 서울의 거리를 거니는 연인들까지—상상하는 모든 장면이 전문적 영상 지식 없이도 구현된다. 영화 제작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조차 텍스트 몇 줄만으로 편집과 대사, 음향까지 완비된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은 영상 길이가 짧고 완성도 또한 방송 수준에 못 미치지만 생성형 동영상 기술이 대중에 공개된 지 1년 조금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술의 발전 속도는 경이롭다. 누구나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 그리고 기존 감독들은 대규모 제작진 없이 상상력만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분명 창작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변화다. 자본과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순수한 창의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스태프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전문 인력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의미이고 모두가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창작자들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 초 마이크로소프트는 인공지능(AI) 투자에 집중하기 위해 전 세계 직원의 3%에 해당하는 6천여명을 해고했으며 놀랍게도 해고자 중에는 AI 부문 관리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의 한 시장 조사에 따르면 2026년까지 영화, TV, 애니메이션 분야의 10만개 이상 일자리가 AI의 직접적 영향권에 놓일 것으로 예측된다. 많은 이들이 AI 시대에도 과거 산업혁명 때처럼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AI 혁명의 속도와 규모는 과거와는 그 성격과 차원이 다르다. 마부는 운전 기술을 배워 새로운 운송 수단인 자동차 운전기사가 될 수 있었지만 AI 시대에는 하나의 알고리즘이 수많은 운전기사를 대체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의 예언처럼 인간보다 뛰어난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용 계급’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직업은 단순한 경제적 수단을 넘어 자아 실현의 통로, 인간 존재의 증명이다. 한 평론가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가’는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와 연결돼 있는데 AI 기술이 이런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던 근본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AI가 열어가는 신기한 가능성과 놀라운 효율성에 감탄하는 사이 누군가의 생계와 정체성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AI 시대의 개인적 경쟁력 확보 방안과 함께 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혁신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신의 일자리 앞에, 그리고 국가 경쟁력 앞에 부고장이 날아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강성곤의 말글풍경] 남발하는 ‘앵커’ 호칭, 불편하다

호칭의 문제는 범주상 언어예절에 속하며 크게 보면 표준화법 테두리 안에 있다. 여기서 표준이라는 것은 절대적 구속력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실효적인 교집합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근사하고 세련된 화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 지칭·호칭에 있어 지향점은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의 실현에 있다. 물론 오만과 무례는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혁신과 창의성을 탑재해야 할 것이다. 방송미디어는 어떨까. 뉴스 프로그램에서의 호칭을 다뤄본다. 우선 앵커(맨)다. 1960~70년대 종합뉴스 시대를 연 미국의 월터 크롱카이트가 효시다. 1980~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CBS의 댄 래더, NBC 톰 브로코, ABC 피터 제닝스는 소위 3대 앵커맨으로 불렸다. 본디 닻(anchor)을 내리는 사람, 중심을 잡아준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카리스마 시대가 아니며 뉴스 아이템의 신속성과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 영국은 프리젠터(presenter)라고 하지 앵커라고 하지 않는다. 독일 및 프랑스도 모데라토어(moderator), 프레상테퇴르(présentateur), 즉 진행자 개념이다. 일본은 앵커 대신 게스다(캐스터·キャスタ)를 쓴다. 중국은 주츠런(主持人), 즉 뉴스를 주되게 이끈 사람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요컨대 앵커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며 특히 호칭의 쓰임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독 앵커에 부질없는 애정을 부여잡고 남발하는 우물 안 개구리는 대한민국 방송사들 뿐이다. 사회의 큰 이슈, 이벤트가 있으면 앵커 명칭의 난장이 TV에서 펼쳐진다. “광화문광장에 나가 있는 이지연 앵커를 불러봅니다. 이지연 앵커!”, “예. 이지연입니다.”, “이 앵커, 지금 그곳 분위기 어떻습니까?”(자막에 ‘이지연 앵커’) / “이번엔 인천공항, 김영호 앵커를 연결합니다. 김영호 앵커!”, “네, 김영홉니다. 공항이 꽤 붐비네요.”, “김 앵커, 상황 전해주시죠.”(자막 ‘김영호 앵커’) 무신경에다 군더더기 투성이다. 때론 아무개 정치부장, 아무개 경제부 차장이라며 사내 직위를 자막에 띄우고 호칭으로 쓰기도 한다. 직함·직책·보직 추종 사회 습속이 적나라하게 발현되는 모습이다. 위계·서열·귄위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하다는 징표 아닌가. 호칭이 소거되면 왠지 어색하고 불완전한 느낌의 불안심리와도 맥이 같다. 대안은 무엇일까. 비우고 덜어냄의 알고리즘이다. “워싱턴의 볼프강 뮐러 연결합니다. 볼프강, 이번 사건이 테러와 연관이 있나요?” / “작센주 청사에 동료 에바가 나가 있습니다. 극우 시위가 다시 불붙는 모양새군요?”(자막 ‘에바 리히터’) 독일 공영방송 메인뉴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앵커나 기자를 호칭으로 안 쓴다. 어지간하면 이름만 부르며 간혹 베테랑급 시니어가 현장에 있을 때 성(性)과 이름을 함께 불러준다. 미국 영국 프랑스도 마찬가지. 일본 중국만 우리처럼 기자 호칭을 사용한다. “경제·금융 담당하는 박상민, 나와 있습니다. 상민(씨)?” / “다음은 수원컨벤션센터 연결합니다. 예진! 외국 기업이 얼마나 왔나요?”(자막 ‘최예진’) / “일산 킨텍스에 나가 있는 동료를 불러볼까요? 희선, 관람객이 많이 보이네요.”(자막 ‘정희선’) 깔끔하고 산뜻하지 않은가. 초기엔 어색할 수 있지만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불러튼 뉴스(Bulletin News·단신 위주 스트레이트 뉴스)의 리드(lead)도 개선이 필요하다. “한명준이 보도합니다.”, “강수영의 보돕니다.”, “보도에 윤기줍니다.”, “신지은이 취재했습니다.”, “취재에 임서진입니다.”, “조연아가 전합니다.”, “윤종혁입니다.” 이런 식이 세련되고 겸허하며 글로벌 트렌드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쾨쾨한 인정 욕망을 내려놓고 담박하게 뉴스에 임하면 시청자도 환영할 터. 차제에 그 비장감 그득한 장엄서곡풍의 시그널 음악도 소박·담박해지면 좋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그토록 표나게 드러내야만 하는가. 되레 진부하고 식상하다. 모름지기 익숙한 것과의 결별 없이 진화와 발전은 난망한 법이다. 미니멀리즘과 스칸디나비아 노르딕 스타일이 각광 받듯 단순⸱간결의 가치와 미덕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한중일의 동양적 친연성에 안주할 일이 아니다. K-컬처 당사국답게 앞서 나가야 한다.

[삶, 오디세이] 가족의 소중함 되새기며

난 내 부모를 잘 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익숙한 말투, 즐기는 음식, 반복하는 농담이며 과거 에피소드까지 줄줄 꿸 정도였던 터라 오랜 세월 함께했으니 당연하다 믿었다. 그러나 요즘 연로하신 부모님을 뵐 때마다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이런 나의 심리는 최근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질문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나는 정말 이 두 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정말 이 두 분이 내가 알고 있는 그분들이 맞는가. 이래서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나 보다. 그만큼 나는 내 부모를 충분히 안다고 착각했다는 것인데 돌아보면 그렇게 믿는 순간부터 오히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게 됐던 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이런 사유는 어느 날 치매안심센터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 순간부터 시작됐다. 기억력 감퇴로 불안해하는 어머니의 팔을 잡고 센터 입구에서 ‘너는 곧 치매로 판명될 거다’라고 무언의 압박이라도 하는 듯 큼직하게 세워져 있는 입간판을 지나 조심스럽게 센터의 문을 여는 순간 뭔지 모를 애석함이 밀려 왔다. 어릴 적 나를 이끌던 든든한 그 손이 어느새 바싹 마른 고목처럼 야윈 모습으로 내 한쪽 팔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흐려지고 몸은 쇠약해지며 존재는 조금씩 빛을 잃는 것, 그것이 생의 순리임을 잘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뼈아픈 순간이었다. 사실 부모님을 병원이나 센터로 모시는 것도 쉽고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미루시거나 의사의 말을 흘려듣는 두 분을 볼 때면 정말이지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 옛날 나 역시 비슷하게 투정을 부렸을 텐데, 이젠 상황이 역전되다 보니 늙음이란 나에게 더 이상 막연한 그 무엇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이 돼 나를 흔들었다. 그렇게 보면 계절마다 피고 지는 식물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제 몫의 생만을 살아야 하는 순리에 순응하는 태도는 인간보다 더 단단하니 말이다. 한때 부모는 나의 전부였다.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기준을 세웠다. 그러다 사춘기엔 그들을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성인이 된 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졌다. 그러다 이제야 약해진 부모를 바라보며 그들도 나처럼 흔들리며 사랑했던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두 분의 고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였고 어설픈 조언은 마음 깊은 곳의 애정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식들은 늘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뒤늦은 후회만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매일 낯선 가족을 마주하고 변해 가는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산다. 그래서 결국 가족을 안다는 믿음은 때로는 착각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쉽지만 바로 그 익숙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서로를 완벽히 알 수 없어도 함께 걷는다는 것, 이해가 부족해도 끝내 품는다는 것. 그 따뜻한 반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이 가벼운 듯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내일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나의 부모도, 형제들도 다들 그러하겠지 하고 위안을 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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