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詛呪)

한글사전은 저주(詛呪)를 ‘남이 못되게 되기를 빌고 바람’이라고 풀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냥 못되길 바라는 것을 고전적 저주라고 까진 할 수 없다. 어떤 주술, 즉 기원하는 행위 등 목적 의식(儀式)이 수반돼야 저주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주술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체로 유감법칙(類感法則)이 많이 쓰인다. 저주하는 대상의 인물을 이를테면 그림으로 그린 화상이나 인형으로 만들어 바늘로 찌르고 칼침을 되풀이해 놓는 것 등이 유감법칙이다. 비록 모형물이지만 저주의 대상이 그렇게하여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만족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될 것으로 아는 의제화(疑制化) 심리를 갖는 것이다. 저주의 주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근대까지 많이 쓰였다. 그 어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초인적 힘을 개인적 보복 심리로 원용하였다. 고대사회에선 국가적인 주술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저주는 한낱 관념적 개념으로 치부하게 됐다. 이런 21세기에서 이라크 전쟁을 통해 기막힌 주술이 발견된 것은 비극 중의 희극이다. 바그다드시내 라시드 호텔 현관 바닥에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가 타일로 만들어져 투숙객들의 구둣발에 밟혀온 것이다. 후세인은 1991년 걸프전 당시의 아버지 부시를 그렇게 만들어 저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는 고통으로 이를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다가 ‘부시는 범죄자’라고 써놨다. 이에 발끈한 현 미국 대통령인 아들 부시는 아버지 초상화를 뜯어낸 자리에 후세인 초상화를 만들어 넣기로 했다고 전한다. 저주는 일종의 비합리적인 복수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선다. 현대사회에서 고전적 초상화 주술이 교차되는 것을 보면서 증오에 찬 인간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본다. /임양은 주필

판사의 고독

재판정의 법대위에서 재판해오던 판사가 그만 둔 뒤 변호사가 되어 법대를 바라보니 그렇게 높아보일 수 없었다는 얘기는 맞는 말이다. 피고인들에게는 법대 위의 판사가 또 그렇게 보여 실제의 체구와 관계없이 무척 커 보인다. 법대 위의 판사는 그만큼 외경심의 대상이다. 민사·형사사건은 물론이고 비송사건 등을 판결하고 결정하는 판사의 권능은 실로 막강하고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고독한 직업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에 제약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조심해야 할 점이 많다. 예컨대 술 자리도 가려서 나가야 하고 사람도 가려서 만나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사기꾼 같은 위인에게 팔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동건 서울지방법원장이 240여명의 소속 판사 전원에게 변호사들로부터 골프 접대를 받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다고 한다. 지금은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을 어떻게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전엔 이도 제한한 적이 있었다. 변호사로부터 골프 접대를 받지 말라는 것은 공연한 오해를 사지않기 위해서다. 판사실 출입도 이래서 제한했었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는 법정에서만 만나야 한다. 법정 밖에서 만나는 것은 직업상 좋은 모양이 아니다. 얼마전에 모경찰서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판사가 변호사로부터 골프 접대 등을 받은 사실이 구설수에 올라 스스로 법복을 벗은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판사란 직업은 권능이 지고한 것만큼 주변을 통제할줄 아는 고독이 요구된다. 이는 판사의 권위를 위하고 법원의 신뢰를 위해서다. 법정의 법대는 높아 보이고 그 위의 판사는 커보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판사도 언젠가는 그만 두면 자유로운 변호사가 되지만 판사로 있을 땐 어디까지나 고독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임양은 주필

종군기자들의 희생

이라크 전쟁에서 종군기자 사망 비율이 연합군 사망 비율보다 높다. 종군기자는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4명이 희생돼 1.4%에 이른다. 이에 비해 연합군은 30만여명 중 116명이 전사하여 0.04%에 머문다. (걸프전 땐 1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던) 종군기자의 사망이 이처럼 많은 것은 걸프전과는 달리 지상군의 활약이 컸기 때문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연합군의 부대 배속기자와는 별도로 독자적 취재기자가 많았던 탓이다. 희생된 종군기자는 대부분 이들이다. (부대 배속기자가 600여명이고 단독 취재기자가 400여명이다) 외신 기자들이 묵고있던 바그다드 팔레스타인 호텔에 대한 미군의 포격으로 3명의 종군기자가 숨진 것을 미국은 ‘오인 폭격’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국제 언론단체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국제기자연맹(IFJ)은 “이 공격은 기자들을 겨냥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부대 배속기자와 독자 취재기자의 차별대우에 항의했다. 언론인보호위원회(CPJ)와 ‘국경없는 기자회’는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에게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밖에도 스페인의 텔레비전 카메라 기자가 바그다드에서 미군 발포로 숨지는 등 연합군에 의한 종군기자의 피해가 의외로 많다. 연합군측은 독자 취재기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책임을 안지는 것은 그만 두고 되레 고의든 과실이든 쏘아죽였다. 특히 독자 취재의 종군기자들은 연합군과 이라크군 양측의 공격을 받는 가운데 사선을 넘나 들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취재에 몸을 던진 종군기자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이 존경스럽다) 이라크 전선에서 희생된 종군기자들의 명복을 빈다. /임양은 주필

노동정책

근로자 4명 이하 사업장에도 퇴직(기업)연금제 도입이 의무화되고 퇴직금제도를 대체할 퇴직(기업) 연금제도가 정규직 뿐 아니라 비정규직에게도 적용된다는 노동부의 업무추진계획이 나왔다. 현행 퇴직금제도를 퇴직연금제도로 대체하기 위해 올해 상반기 중 관련법을 개정하는 등 정부안을 마련하고 내년 7월부터 퇴직금연금제도를 본격 시행한다는 게 노동부의 주요 업무 골자다. 기업, 특히 중소기업의 경영여건이 한계 상황인데 너무 이상적이며 특히 노사관계에서 정부가 공정한 심판 역할을 하지 않고 노동계 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다는 전국경제인연합회측의 지적이 있으나 노동부의 이런 계획은 언제든지 넘어야할 산과 같은 과제다. 5명 이상 사업장의 경우 현재의 퇴직금 제도를 퇴직금연금제도로 전환할지와 퇴직 연금을 선택할 경우 확정급부(DB)형과 확정갹출(DC)형 중 어느 것을 선택할 지를 노사가 자체적으로 결정토록 한 것도 적절하다. 또 정당한 쟁의행위의 범위를 조정하는 방안을 강구해 노조의 파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현행법의 정비를 검토키로 했는데 이 역시 노동계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동안 노동계가 구조조정이나 민영화, 정리해고, 해고자 복직 등을 대상으로 한 쟁의 행위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줄곧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합법적 쟁의행위에 대해 쟁의 목적이 근로조건 결정과 관련돼야 하고, 쟁의 주체가 노조여야 하며, 쟁의에 폭력과 파괴 등이 따르지 않아야 하는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부는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매우 많다. 물론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관련법 정비에 앞서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장기화할 우려가 예상되는 노사갈등에 대해서 대화를 주선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특히 병원과 철도 등 필수공익사업장의 범위를 축소하는 한편 공익 침해 정도가 심하지 않을 경우, 직권중재 회부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노동부의 이같은 계획이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노사갈등이 해소되는 가운데 근로자들이 대우받는 제도가 마련되기를 기대하여 본다./임병호 논설위원

식물이름

‘식물유래담(植物由來譚)’은 식물이 생겨나게 된 원인, 지금과 같은 특정한 모양이나 명칭을 지니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문헌설화보다는 구전설화로 널리 전해진다. 이야기 구성방식은 식물에 따라 단순 사건에서부터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본격 설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이야기의 구성은 모두 어떤 사람이 어떠한 사건 때문에 죽거나 병이 들어 식물이 되었다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에 따라 구분된다. 식물 형상이 명칭의 직접적 동기가 되는 경우 할미꽃이나 며느리밥풀꽃 등의 유래담이 대표적인 예이다. 할미꽃은 딸을 찾아가 의탁하려다가 박대 받자 쓰러져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할머니의 혼이라고 하는데 흰 털과 굽은 허리 등이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생겼다. 백일홍, 봉숭아, 동백꽃, 철쭉꽃, 상사화 등은 식물의 형상이 주는 이미지에서 명칭이 유추된다. 연인을 기다리다가 죽은 여인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백일동안 지지 않고 붉게 피어 있는 백일홍으로 설명하고 , 절개를 지키다 죽은 여인의 단심을 철쭉꽃의 붉은 빛으로 연상한다. 상사화는 꽃과 잎이 만날 수 없는 식물의 생리를 서로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연인의 사이로 설명하고, 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형상으로 된 것은 상사나무라고 부른다. 식물유래담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죽은 사람이 식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 어쩔 수 없는 일은 대개가 일상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부분 가난한 삶의 조건으로 설정된다. 때로는 사랑이나 그리움의 감정을 투사하여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생존의 문제 못지 않게 사랑의 문제도 인간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까닭이다. 강렬한 사랑과 그리움은 동백꽃, 해당화 등 붉은 꽃으로 응축시켜 표현한다. 할미꽃, 깽깽이풀, 제비꽃, 양지꽃 등이 피어나는 4월이다. 산에 들에 나가면 온갖 식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제비꽃은 강남 갔던 제비가 올때 핀다고 붙은 이름이라는데 요즘은 제비꽃이 피어도 제비가 오지 않는다 .언제쯤 제비가 찾아올까./임병호 논설위원

황금수의?

사람이 죽어 염습(殮襲)할 때 시신에게 입히는 수의(壽衣)는 상고시대부터 있어왔으나 보통은 ‘주자가례’의 습용으로 시작된 습속으로 계급과 신분, 빈부의 차이에 따라 그 형태에 차이가 있었다. 부모의 환갑·진갑이 가까워지면 가정형편에 따라 수의를 지어두는 게 상례이다. 3년마다 돌아오는 윤달에 수의를 짓는 관습이 있는데 윤달은 공달이라 하여 죽는 사람의 평안을 축복하는 뜻에서 지어지며 그 풍속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도 가풍이 엄격한 집안에서는 과거의 ‘주자가례’의 격식을 지키고 있다. 옷감은 공단(貢緞), 나단(羅緞), 명주(明紬),능(綾), 초(?), 은조사(銀條紗), 생고사(生庫紗), 생수, 삼팔, 모시, 삼베(麻) 등을 사용하는데 빨리 썩는 것이 좋다고 하여 민가에서는 모시나 삼베(麻布)를 많이 사용한다. 부모의 수의를 만들 때는 효를 다하기 위하여 윤달 가운데 길일을 택할 뿐만 아니라, 팔자 좋고 장수한 노인들을 모셔다가 바느질을 하였다. 솔기 중간에 실매듭을 짓지 않게 하는 것은 저승길에 갈 때 걸리지 않고 편안하게 가기를 염원하는 마음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슬람문화권이나 싱가포르는 시신을 흰 천으로 감싼다. 동남아 내륙에선 시신을 깨끗이 씻어 그대로 묻거나 풍장(風葬)하기도 한다. 기독교와 불교 문화권은 대체로 고인이 입던 평상복을 입히기 때문에 별도의 수의를 마련하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고인이 즐겨 입던 단정한 예복을 입힌다. 미국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정형보존’ 차원에서 평상복을 쓴다. 태국도 평소에 입던 깨끗한 옷을 입히고 화장한다. 다만 중국과 일본이 우리처럼 흰색계통의 정결한 옷을 입힌다. 그런데 최근 1천만원 ~ 1억원대의 황금 수의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승에서 못다 누린 호사를 저승에서나마 누리시라는 자녀의 효심과 노인의 장수, 발복(發福)을 겨냥한 ‘효도마케팅’에 상주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수의에 황금가루를 뿌린다는 것이다.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중국은 화장률이 70%, 일본은 99%에 이르러 값비싼 수의를 입히지는 않는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황금수의보다는 살아 생전의 효도가 훨씬 낫겠다./임병호 논설위원

산불과 시장.군수

산불 폐해가 얼마나 막심한 것인지는 새삼 말할 게 없다. 한번 난 산불로 망가진 생태계가 회복되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린다. 수년, 수십년 걸려 산에 아무리 나무를 많이 심어도 산불을 내면 한 순간에 다 잿더미가 된다. 지난 식목일에도 산불이 적잖게 나더니 잇따라 나고 있다. 도내뿐만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산불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새 풀이 돋아나기 전인 지금같은 건조상태에선 산불이 잘 날 수 있는 계절이긴 하다. 산불도 잘 날 수 있지만 한번 불붙으면 바싹 마른 초목을 태우는 불길이 걷잡기 어렵게 번진다. 밀림 같은데서는 나무와 나무끼리 바람 등으로 마찰을 일으켜 산불이 나는 자연발화가 있지만 국내 산야의 산불은 100%가 인재다. 산불이 올해뿐만이 아니고 거슬러 올라가 근년에도 10여년 전에 비해 훨씬 더 잦은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장·군수가 관선이던 시절엔 봄철만 되면 시장·군수들이 산불예방에 발 벗고 나섰다. 산불을 내면 인사조치로 문책하는 것이 그 무렵 역대 정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군수마다 인력을 총동원, 입산로 입구에 지켜서 입산객의 발화물질은 아예 일시 보관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군 산불예방 캠페인은 가히 시장·군수들이 관운을 걸다시피하여 온갖 심혈을 다 쏟았다. 그러나 지금의 민선 시장·군수는 그게 아니다. 산불을 내어도 누가 문책할 사람이 없다. 인사조치할 사람도 없다. 또 산불예방운동은 해봐야 무슨 생색나는 사업이 아니다. 생색내는 사업만 선호하는 민선 시장·군수에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게 산불예방이다. 그저 적당히 시늉만 해 넘기면 되는 것이다. 지방자치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좋은 순기능이 있는 반면에 이런 나쁜 역기능이 있다. 역기능은 제도개선보다는 시장·군수들 스스로의 의식개혁이 앞서야 고쳐진다. /임양은 주필

담배전쟁

이라크 반전운동으로 미국과 등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이번엔 전쟁을 선포했다. ‘담배와의 전쟁’이다.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을 예외없이 규제하고 올 1월에 15% 올린 담뱃값을 또 15% 올릴 것을 추진하면서 담뱃값 인상은 더 계속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공개했다. 시라크의 담배전쟁은 보건성의 보고가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에서 해마다 암으로 사망하는 15만명 가운데 3만명이 흡연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하였다. 직접흡연뿐만 아니라 흡연으로 인한 간접흡연까지 규제화하면서, 담뱃값을 턱없이 올리는데도 사피우는데서 나오는 재원은 암 투쟁 등 공중보건 사업의 기금으로 쓴다는 것이 담배전쟁의 배경이다. 아울러 암 치료와 예방 등 연구에 획기적인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도 담배전쟁을 벌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보다는 피울 수 없는 공간이 훨씬 많은 가운데 더 확대될 전망이다. 직장이나 사교장이나 접객업소 등 어디를 가든 끽연권보다는 혐연권이 우선이다.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방에선 가족들 눈치때문에 담배를 못피우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는 가장들이 적잖다. 담배가 이토록 괄시받는 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 문제는 시책의 빈곤이다. 예컨대 걸핏하면 올리는 담뱃값만 해도 뭣 땜에 오르는 건지 알지 못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프랑스의 담배전쟁엔 보람이 예견되는데 비해 우리의 담배전쟁은 그같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담배전쟁도 희망이 제시되어, 단연에 참여하는 층의 사회적 보람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임양은 주필

靑海臺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북단 1.5㎞ 지점의 ‘저도’ 안에 있는 세칭 ‘청해대(靑海臺)’는 1954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하계 휴양지로 사용했었는데 1972년 대통령 별장으로 공식 지정됐다. 그러나 1993년 대통령 별장에서 해제됐고 그해 12월 행정구역도 진해시 안곡동에서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로 18년만에 환원됐다. 원래 국가 소유였던 저도는 1949년 국방부로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1954년부터 해군이 관리권을 행사하고 있다. 13만1천300여평의 섬 전체가 동백과 해송, 팽나무 군락으로 뒤덮였고 200여m의 백사장이 있어 별장지역으로 뿐 아니라 훌륭한 관광자원으로도 손 꼽힌다. 지상 2층, 연면적 171평 규모의 청해대 건물과 경호원 및 경비원 숙소, 전망대, 9홀 규모의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청해대가 대통령 별장 시설에서 해제된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한번도 이곳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9년 7월 여름휴가 기간 중 하룻밤을 머물렀다. 대통령 별장에서는 해제됐지만 청해대는 그동안 군 간부들의 휴양시설로 이용돼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 주민들은 ‘베일 속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다. 저도 관리권을 거제시로 이양해 달라고 1997년, 2000년 두 차례 국방부에 건의했던 거제시의회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섬을 군 간부들만의 휴양시설로 묶어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해군은 대통령 별장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저도는 넓은 의미의 ‘해군기지구역’에 포함된 요충지이며 군사 시설물도 있어 관리권을 이양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10년 완공 예정으로 부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거가대교’가 저도를 통과하도록 설계돼 있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도 주변의 조업이 통제되는 일은 없는 만큼 저도를 개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청해대’ 역시 ‘청남대’ 개방처럼 대통령의 지시가 필요한 일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의 ‘한 마디’면 해결될 것 같기도 하다. 대통령과 연관된 건물은 ‘청와대’ ‘청남대’ ‘청해대’ 등 ‘靑’자를 쓰는데 혹시 ‘청산대(靑山臺)’는 없는지 모르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事大曲筆

신라말 대표적인 학자 최치원, 고려말의 정몽주, 조선중기의 퇴계 이황, 율곡 이이가 쓴 대중국 사대곡필은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다. 최치원은 고구려와 백제를 중국의 ‘큰 벌레’ 라 비하하면서 당나라에 글을 바쳤다. “엎드려 아룁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돼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했고, 북쪽으로는 유주와 연나라와 제나라, 노나라를 침범해 중국의 큰 좀벌레가 수황(隋皇·수나라 양제)의 실어(失馭·나라를 잘못 다스려 패망함)한 것이 요동의 정벌로 말미암케까지 됐습니다” ‘삼국사기’ 본전에 기록된 ‘상대사시중장(上大師時中狀)’에 나온다. 정몽주는 우왕에게 ‘절원귀명(絶元歸明)’이란 상소를 올렸는데 명나라 사신을 천사(天使)라고 호칭한 낯 부끄러운 글을 남겼다. 퇴계는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일본 좌우위장군 미나모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인류에 두 임금이 없다. 춘추전국이 통일된 것은 천지의 법칙이고 고금에 변치 않는 대의인 것이다. 큰 명나라는 천하의 종주국이므로 해돋는 동방에 처한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신복(臣服)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이어 “단군에 대한 기록은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고 기자가 와서 조선을 통치하게 돼 비로소 문자를 알게 됐다”고 했다. 율곡은 ‘공로책(貢路策)’에서 “중국과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중국에 조공해 왔습니다. 사대의 대의에 따라 중국은 상국이고 조선은 하국으로서 군신의 분이 이미 전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세의 이해를 떠나 중국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충성을 다해 중국을 잘 받들기를 바랍니다”라고 진언했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예우하며 살았던 시대였고 국익을 위한 방법이었다 해도 이들은 자신과 국가를 너무 낮췄다. 엊그제는 국회에서 한·미동맹 결속과 국익 차원에서 이라크전에 전투병은 아니지만 한국군을 파병키로 결정했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한국군은 이라크 바그다드로 떠나려는 것인가./ 임병호 논설위원

외국인 농부?

농촌의 인력난을 덜어주기 위해 올 한해동안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몽골 등 5개국에서 5천명을 받아들여 농가에 배정할 계획으로 마련한 ‘외국인 농업연수제도’가 농민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이유는 고용조건이 까다로워서다. 외국인 농부를 고용할 경우 최저 임금 52만원에 잔업, 특근수당 8만원, 산재·건강·국민연금 보험 및 퇴직금·연월차 보상 15만원, 숙식비 30만원을 합하면 최소 1백5만원 이상이 든다. 여기에다 외국인 농업연수생은 농가 사정과는 관계없이 3년동안 취업을 보장해 줘야 되기 때문에 언어 소통이 힘든 외국인 농부를 쓰느니 일당만 주면 되는 내국인을 고용하겠다는 것이 농민들 생각이다. 외국인 농부제 도입은 농촌 인력난 해소만을 생각한 나머지 너무 성급하게 도입했다는 지적이 그래서 제기된다. 이 제도를 실시하려면 우선 시설원예와 축산(양계·양돈·소사육) 분야에만 한정돼 있는 대상을 과수원 농가나 쌀 전업농가에게까지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 시설원예의 경우 경지면적이 4천㎡이상, 양돈농가는 1천㎡, 한우사육 농가는 3천㎡ 이상의 초대형 농가에만 고용 자격을 부여한 것도 적절치 않다. 중소규모 축산농장이 대규모 농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건비 비중이 높아 외국인 노동자에 관심이 많지만 이들에게 외국인 농부제도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엄격한 숙박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도 우리 농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쾌적한 숙박시설이 완비된다면야 농가는 물론이고 외국인 농부에게도 좋은 조건이 되겠지만 아직은 실정이 따라주지 않는다. 기업체의 외국인 산업연수생 도입 규정을 농가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농업연수생 제도를 굳이 실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농촌실정에 맞게 대폭 수정돼야 한다. 우리 농가가 농사일을 하면서 기업체를 운영하 듯 농부의 퇴직금, 산재보장까지 신경쓴다는 것은 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든다. 농사 짓고 살다가 빚만 지고 울며 떠나는 농촌은 지금 비상시국이다. 이 판국에 그 이농인들을 붙잡을 대책은 세우지 않고 외국인에게 퇴직금까지 주며 농사를 지으라니 황당스럽다. 몇 마리 남지 않은 황소가 망가진 농기계 옆에서 웃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경기도청 벚꽃축제

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이다. 흔히 벚꽃을 일본의 국화로 알고 있으나 일본의 국화가 아니다. 한꺼번에 꽃을 만개했다가 한꺼번에 낙화하는 게 마치 일본의 국민성과 비슷하다 하여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일본의 국화는 그들의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꽃이다. 벚나무는 예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 널리 분포돼 수피는 진해·해독 등 약재로 사용되고 목재는 재질이 좋아 고급 가구재나 악기재 또는 정밀기계의 목재부분으로 사용돼 왔다. 벚꽃은 연한 홍색 또는 백색으로 가지마다 나무마다 활짝 피운 모습은 가히 장관을 이른다. 벚나무가 많기로 유명하기도 하고 군항도시인 경남 진해는 벚꽃철에 갖는 군항제가 벌써 열렸다. 수원시와 자매결연 한 진해 군항의 수원함 위문 방문도 지난해까지 해온 10월보다는 군항제에 맞춰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벚꽃 개화가 점차 북상하여 드디어 수원의 명물이며 명소인 도청 벚꽃축제가 4일부터 9일까지 열린다. 경기도청 벚꽃축제는 특히 전깃불 빛에 비치우는 야간 광경은 더 할 수 없는 정경으로 이름 나 있다. 수원의 명산 팔달산 허리에 자리 잡은 수도권의 중핵인 경기도청, 그리고 도청주변의 팔달산 허리의 가로에 줄지어 꽃피운 벚꽃축제는 우리 경기도가 상징하는 새 봄의 약동이다. 도민 모두가 힘찬 새 봄의 웅비를 기약하면서 벚꽃축제의 야경을 감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목관 및 현악 앙상블, 금관 앙상블, 남사당 놀이마당, 묘기시범, 수원 여성합창단 공연, 경기도립오케스트라 공연, 월드컵 기념사진 등이 펼쳐지는 팔달산록의 경기도청 벚꽃축제는 다 수원시민, 경기도민을 위하는 행사다. 가족과 함께 참관하는 것도 평생 남는 뜻 깊은 추억이 될 것이다./임양은 주필

화성행궁 수문장 교대식

영국의 런던시 웨스트 민스터구 제임스 공원엔 날마다 남녀 경찰관이 산책하듯이 진종일 순찰한다. 공원 서쪽 끝에는 버킹검 궁전이 있다. 1703년 버킹검공(公)이 공관으로 건축한 것을 1762년 조지 3세가 사들임으로써 왕실 소유가 됐다. 이 무렵만 해도 인근은 뽕나무 밭 투성이었다. 대대적인 개수작업이 있었던 것은 1852년 빅토리아 여왕 때다. 대내적으로는 자유주의적 개혁으로 산업을 발달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시장 개척으로 영국의 최전성 시기를 이룩했던 여왕이다. 버킹검 궁전이 영국 국왕의 상주처가 된 게 바로 이 빅토리아 여왕부터다. 궁중에 왕이 있을 때는 왕기가 게양된다. 이밖의 근위병 교대 의식은 또 하나의 전통적 명물이다.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12시 사이 거행되는 근위병 교대 의식은 빅토리아 여왕 이래의 궁중 전례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 각지의 관광객이 이를 보기 위해 시각을 맞추어 모여들곤 한다. 수원의 명소 화성행궁의 수문장 교대식이 있게 된다. 수원시 남창동 화성행궁 신풍루 광장이 현장이다. 4월6일부터 10월말까지 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오후 1시30분에 시작하여 1시간30분동안 정조대왕이 참관하는 가운데 재연하게 된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를 지키는 수문장·병사·기수·취타대 등 50여명이 참여하는 교대식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옛모습을 되살린다.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인 융릉을 배알할 때마다 들러 민생을 보살피곤 했던 이를테면 지방 별궁이다. 화성행궁의 수문장 교대식이 전통적 행사가 되어 수원의 관광 명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버킹검 궁전의 근위병 교대 의식이나 화성행궁의 수문장 교대 의식이나 다 왕을 호위하는 점에서 행사의 성격은 같다./임양은 주필

돌고래 작전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물영화의 효시는 1921년작 ‘사이런트 콜’이 꼽힌다. 셰퍼드 개가 주인공이었다. 이 이후 동물영화의 소재가 되는 개는 자신의 주인인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조하고 악한 퇴치에 기여하는 등 모험과 휴머니스틱한 활약을 해보이곤 하였다. 동물영화의 주인공이 개에 국한하지 않고 말, 고양이, 돌고래 등으로 확대된 것은 1950년대다. 침팬지가 타잔 시리즈에서 ‘치타’로 등장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동물영화는 계속 발달하여 1995년의 미국·호주 합작인 ‘꼬마돼지 베이브’에서 돼지 등 가축들의 자연스런(카메라 트릭이지만) 연기에 힘입어 1998년엔 ‘베이브 2’가 나오기도 했다. 동물배우에 주는 상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비공식으로 시상하는 패치(paresy)상은 그 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최우수 동물배우를 선정, 영화제작의 공헌도를 위로해주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서 화학무기 탐지를 위한 동물로 닭이 나선다더니, 돌고래가 이라크 해안의 기뢰 수색작전에 투입된다고 한다. 미 해군 소속의 이 돌고래들은 연간 2천만달러의 훈련비용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동물보호단체 등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미국의 ‘고래 및 돌고래보호협회’는 “잔인하고 부도덕한 만행”이라 말하고, 프랑스 해양동물학자 방카네 교수는 “돌고래에 위험할 뿐 실효가 없다”면서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인간과 가까운 동물에 인간이 저지른 전쟁 위험을 대신 떠맡기는 잔인성을 이라크 전쟁의 돌고래 작전에서 보는 것 같다. 돌고래 기뢰 수색작전이 영화의 장면이 아니고 실화란 사실이 좀 씁쓸하다. 돌고래보다 비할 수 없이 소중한 인명이 이라크 전쟁으로 죽어가고는 있지만 말이다. /임양은 주필

三不去

예전에는 불순구고(不順舅姑·시부모와의 사이가 나쁘고), 무자(無子·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음행(淫行외간남자와 통정하고), 질투(嫉妬·투기가 심하고), 악질(惡疾·몹쓸 병이 있고), 구설(口舌·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도절(盜竊·도둑질)을 하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고 하였다. 이중에서 한 가지 사유에만 해당돼도 아내는 남편에게 버림 받았다. 그러나 ‘삼불거(三不去)’가 있어 칠거지악에 해당돼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 첫째, 혼인할 때는 가난했지만 그 뒤에 부귀하게 되었으면 내치지 못했다. 이는 여성의 노고와 재산권을 인정하는 항목이다. 결혼 후에 부귀를 얻었다면 아내의 노고와 내조가 그 원동력임을 명백히 하고 있음이다. 둘째, 부모의 삼년상(三年喪)을 함께 치른 아내는 내치지 못했다. 이 항목은 효행을 강조하고 있다. 예전엔 부모의 삼년상 치르는 것이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혼백이 모셔진 제청에 하루에 세번씩 상식을 올려야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제를 지내야 한다. 또 소상과 대상도 장례식 못지 않게 번거로웠다. 그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 이루어진 효행이 아내의 권리를 보장받게 하였다. 셋째, 쫓겨나도 갈 곳이 없는 여인은 내치지 못했다. 여기서는 휴머니즘의 경지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칠거지악’에 해당됐다고 하더라도 ‘삼불거’에 의해 대부분 구제가 됐을 법 하다. ‘칠거지악’은 경계의 의미에 중점을 두었을 뿐,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여성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여성들은 법도와 관행에 억눌려 대단히 조심스럽게 살았다. 오늘날 이혼이 늘어나는 것은 칠거지악에 없는 성격차이가 주종을 이룬다고 한다. 수십년을 살을 맞대고 살던 부부도 언젠가부터 느끼기 시작한 성격차이나 가치관 차이로 인해 갈라 서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나는 완벽한 부부생활을 한다’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 현대판 칠거지악을 저질렀다면 현대판 삼불거도 적용돼야 할 것 같다. 무릇 용서하는 자, 용서를 받는 것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4.3사건

‘4·3사건’은 1948년 제주도에서 좌익세력에 의한 집단소요가 발생하자 당시 이승만 정부가 군과 경찰을 투입, 1954년까지 6년간 좌익세력뿐만 아니라 무고한 양민들도 함께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수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은 남로당원이었는 지 좌익혐의를 받았는 지 등과 관계 없이 전원 좌익분자로 몰렸으며 유족들은 2000년1월12일 이른바 ‘4·3사건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거의 반세기동안 무형 유형의 피해를 받아 왔다. 김대중 정부는 희생자 유족들중 많은 사람이 누명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고 집권 초기인 1999년 1월 국민화합 차원에서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즉 4·3사건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으며 이듬해 여야합의에 의해 공포되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는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현재 진상규명위원회가 희생자로 결정한 사람은 2천778명에 이르며 앞으로도 신고된 1만4천여명중 상당수가 희생자로 판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최근 4·3사건의 성격규정을 놓고 군·경 및 민간인측 사이에 의견대립이 나타났다. 문제의 발단은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 내부기구인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 변호사)이 지난달 27일 완성한 600여쪽짜리 진상조사 보고서안 때문이었다. 기획단의 인적 구성이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측 위원과 군측 전문위위원, 중립적인 인사 등 5명으로 구성됐음에도 이 보고서안에는 공산세력에 의해 야기된 당시 무장폭동 성격, 공권력 투입 불가피성 등 군·경측이 제시한 사료들이 전혀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해 발간하는 보고서에 당시 정부가 무조건 잘못됐다는 식으로만 기술한 채 무력진압의 원인이 된 사건 발생 배경을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오는 4월3일 이 사건 55주년을 기해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표명할는 지 주목되지만 좌우익 이념갈등이 상존하는 것이 씁쓸하다./임병호 논설위원

三月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1493)은 조선시대 ‘신동(神童)’으로 전해진다. 과장된 표현같지만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달에 글을 알았으며 세 살에 시를 지었다고 한다. “주관청침송엽로(珠貫靑針松葉露·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였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무우뇌성하처동(無雨雷聲何處動·비도 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울리나) 황운편편사방분(黃雲片片四方分·누런 구름 점점이 사방으로 흩어지네)” 이 두 편의 시가 김시습이 세 살 때 지은 것인데 마지막 두 줄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광경을 보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 착상과 비유가 실로 놀랍다. 다섯 살에 ‘대학’을 깨치고 글을 짓는데 막힘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하자 세종조(世宗祖)의 명신 허조(許稠)가 몸소 김시습의 집을 찾아왔다.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자를 넣어 시를 지어 보아라.” 김시습이 “노목개화심불노(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시를 지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대왕이 지신사(知申事·승지의 별칭)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어린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렀다.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에 앉히고 먼저 시 한 귀절을 읊으며 대구(對句)케 하였다. “박이창 : 동자지학백학무청공지말(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동자의 공부가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 하도다.” 김시습 : 성주지덕황용번벽해지중(聖主之德黃龍飜碧海之中·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뒤집으며 노는 듯 하도다) 놀란 박이창이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며 “저 그림을 두고도 시를 지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강가에 작은 정자가 있고 그 밑에 빈 배가 매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김시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소리내어 읊었다. “소정주택하인재(小亭舟宅何人在·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나뭇가지에 연두빛 물이 오른 지금은 봄이다. 김시습은 세 살때 “도홍류녹삼월모(桃紅柳綠三月慕)”라고 읊었다.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무는구나” /임병호 논설위원

이라트전쟁 이후?

이라크 전쟁이 얼마나 갈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또 이라크전의 종전이 후세인 제거와 일치되는 건지 아닌지도 잘 알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라크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나든 간에 전후의 일이 범상치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부시는 유엔을 무시하였다. 안보리의 표결에서 프랑스 등의 반대로 통과가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아예 표결을 기다리지 않고 전쟁을 시작했다. 유엔의 승인이 없는 전쟁은 국제법상의 공전(公戰)이 아닌 사전(私戰)이다. 전후의 미·영 블록과 비 미·영 블록 간의 갈등은 신냉전 양상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은 가장 많은 유엔 분담금을 무기화 한 유엔의 무력화(無力化)로 안보리의 외면에 보복을 시도할 공산이 크다. 1945년 10월 24일 유엔이 창설된 이후 58년만에 가장 큰 난관을 겪을 것이다. 어떻든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전같은 지위를 유지하긴 어렵다. 부시의 이라크 공격은 미국의 자존심을 살리는 게 아니고 되레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부시는 후세인에게 건 졸렬한 자존심 싸움으로 미국의 진짜 자존심에 속하는 국제사회에서의 지도력 약화를 가져왔다. 미국이 2차대전 후 지구촌 곳곳에서 성조기까지 불태우며 오늘과 같은 반전·반미 시위를 당하기는 처음이다. 이에 부시가 만약 열세 만회책으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의도적 충돌을 일삼는다면 세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미군이 쏜 미사일에 맞아 영국 토네이도 전투기가 격추돼 조종사 2명이 숨진 것은 전자장비의 오류로, 피아 식별용 장치가 오작동된 탓으로 공표됐다. 사이버 인간 같은 부시의 오작동으로 뭐가 뒤죽박죽 되어가는 세기적 조짐이 아닌가 싶어 심히 걱정된다. 부시는 단 하루도 ‘전쟁’을 입에 담지 않은 적이 없을만큼 머리 속이 ‘전쟁’으로 꽉찬 인물이다./임양은 주필

이라크전 종군기자들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 보도에 텔레비전 방송이 여전히 인기를 끈다. 속보성과 현장성 때문이다. 화염에 휩싸인 바그다드의 밤 장면이 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별로 신통치 못하다는 시청자들이 있다. “걸프전 때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박처럼 쏟는 폭탄투하, 탄우가 빗발치듯 하는 야간교전 등 대체로 리얼리티한 장면을 이번에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시가 국방성을 통해 전쟁 보도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전 여론의 화살이 될 요소는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어떤 장면이 미국에 필요한 것이 아닌 이상, 생동감 있는 텔레비전 화면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쟁 참화의 실상이 보도되지 않는다 하여 전쟁 참화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셈이다. 이번 이라크전쟁 보도엔 유난히 오보가 많다. 미군측 피해를 줄이거나 항복하지도 않은 이라크 군이 무더기로 항복한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이라크 군부를 향한 심리전인지 모르지만 진실이 왜곡되고 있다. 전쟁 참화의 접근이 제한되고 오보가 많은 덴 이유가 있다. 미군의 미디어 센터가 제공하는 자료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종군 기자들의 자유취재 지원 역시 미군 편익에 따라 좌우되곤 한다. 미 항공모함 트루먼에 승선한 ARD 특파원은 “정보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데다 그나마 제공된 내용도 전혀 검증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러므로 하여 작전 지역에 임의로 뛰어드는 기자들과 이를 제지하는 미군 간에 승강이가 벌어지곤 한다. 지난 22일 영국 기자 3명이 바스라로 가다가 총격을 받은 뒤 실종되고 호주 기자 1명이 죽은 것도 단독취재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번 이라크전쟁의 종군기자들 희생이 초장부터 유별나게 많다. 그 이유가 미 국익 위주의 뉴스 공급에 식상한 기자들이 독자취재에 나서는 위험을 전쟁이 격화할수록이 더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바그다드

서남 아시아 이라크 공화국의 수도 바그다드가 불타고 있다. BC 300년대 것으로 보이는 시가지의 흔적이 남아있긴 하였으나 줄곧 한적했던 곳이다. AD 762년 사라센제국의 신수도로 건설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하천을 잇는 운하의 도시를 조성하고 삼중의 성벽을 쌓은 둘레 6.4km의 왕성이 축성됐다. 9세기 초엔 당(唐)나라 장안(長安),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도시로 동서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북유럽 등지 물자의 집산지가 되어 생활문화가 극도로 발달하였다. 이러다가 125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시가지 태반이 폐허화하면서 아바스 왕조가 멸망했다. 1401년 티무르군의 공격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도시가 그나마 파괴됐다. 이어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투루크의 영토로 있다가 1917년 영국군의 점령지가 됐다. 이라크의 수도가 된 것은 1921년 왕국으로 독립하면서였다. 1958년 카셈의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되었으나 정정(政情)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후세인이 권력의 정면에 드러낸 것은 1968년 바트당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부통령이 되면서 부터다. 바르크 대통령이 1979년 사임하자 후세인은 그 뒤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1980년 후세인이 집권초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을 공격할 당시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90년 8월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이듬해 1월 다국적군의 반격으로 철수했다. 오늘날 부시 부자(父子)의 미국 대통령에 의해 ‘불의 세례’를 받고 있는 후세인은 이번엔 아들 부시에 의해 더욱 철저히 당하고 있다. ‘충격의 공포’ 작전은 바그다드를 온통 불바다로 뒤덮었다. 바그다드는 부시의 침공으로 인해 다시 폐허화하고 있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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