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심성과 시민의식

최근 청도에서 벌어진 지자체 단체장 선거와 관련된 사건들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주민 5천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 위기에 처해 있고, 벌써 몇명이 자살을 했다. 뽑는 단체장들마다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 탈락하고 해마다 선거를 하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산과 물과 인간 심성이 모두 맑아 삼청(三淸)이라고 불린다던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하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 맑은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사람 좋다”고 말하는 경우는 대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도덕성 등과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술 먹고 말썽 피우는 짓을 자주 하는 사람, 그래서 결코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사람도, 주변인들로부터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라는 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사람이 좋아 술도 잘 마시고 말썽도 피우게 된다는 생각조차 강하다. 그에 비해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사는 사람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도덕성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심성’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연적 가치에 관련되어 있는 도덕과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나아가 이성과 계약 관계로 움직여지는 근대 이후 사회의 ‘시민의식’이란 것과 ‘착한 심성’의 거리는 더더욱 멀 수 있다. 올바른 시민의식을 그저 모든 인간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인간관계를 떠나 좀 더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지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근거는 내 주변의 있는 사람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아니라, 더 넓은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고려한 공공의 이익이나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 같은 거시적인 시야를 요구한다. 아무리 주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해도 이런 가치에 배치된다 싶으면 매몰차게 거절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의식이 바로 시민의식이다. 원만한 인간관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은 참으로 강하다. 아마 우리는 오랫 동안 소공동체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공동체에서는 주변 사람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만 생각해도 된다. 그것이 도덕성이나 국가 발전과 배치되는 결정적 순간이 되면 대개 좀 더 냉철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소공동체의 지식인 좌장이 판단을 내리고, 공동체 성원들은 그 좌장을 어른으로 모시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근대사회는 이러한 소공동체보다 훨씬 큰 단위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사회이다. 각 개인과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인간적 관계로 맺어진 소공동체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근대사회에서 이들은 이익집단이 된다. 그들 사이에서 ‘사람 좋다’는 것이 사회 전체의 발전과는 완전히 배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청도처럼 덜 도시화된 지역은, 게다가 부근의 대도시조차 오랫 동안 연고주의로 움직여왔던 관행을 떨쳐버리지 못한 지역이니 인간은 참 따뜻하고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선거는 늘 연줄이나 관계로 움직이고, 돈은 다시 연줄과 관계를 만들고 강화시킨다. 그야말로 부패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요즘 애들 말처럼 ‘까칠’하게 원칙을 따지고,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그래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싸가지’가 없거나 ‘너무 맑아 고기가 놀 수 없는 물’ 등으로 치부되는 사람이 오히려 근대적 시민의식에 가까운 인물일 수 있다. “사람 좋은 게 다”라고 이야기하지 말자.

신의 고향, 인간

청소 일로 두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킨 또순이, 막노동 일을 하는 남편과 둘이서 팔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을순 언니. 대학생이 된 아들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던 한을 남기고 코리안 드림을 접은 중국 동포 임씨 일가. 새해 새 아침 화재로 열심히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보면서 오늘 다시 신을 생각한다. 왜 하필 신인가? 먼저 중세의 신 앞에 맞섰던 빛나는 근대 이성의 과학이 이 사태를 설명하는 데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는 예술적 감성으로도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설명해서는 안 되는 전지전능한 종교의 힘에서 구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지막 구원처, 신은 왜 이들을 외면했는가? 아니 신은 진정 구원자인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기실 중세의 관념적 신, 토마스 아퀴나스, 성리학, 선불교가 제시한 하나님, 천, 태극, 부처 등 절대적, 극상대적 존재와 맞섰던 근대 이성은 그 다른 극의 물질적 신, 물신인 상품, 화폐를 낳았다. 신은 죽지 않았다. 관념신이 비정한 물질신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물신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야말로 근대 종교와 다름없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그것에 맛들이고 마침내 무기력한 신도로 만들어왔다. 가난한 이웃들의 죽음이 어찌 한갓 우연한 사고이겠는가! 과학도 예술도 아닌 종교만이 유일하게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하여 오늘 다시 신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 신은 저렇게 그 죽음의 원인은 해명했지만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그 생명 샘을 과학이나 예술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종교, 신은 있는가? 있다. 그것은 신의 고향인 인간에게로 신을 귀환시키는 것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그가 만든 신으로부터 거꾸로 소외당하고 있지만, 그 신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신은 ‘신도 아니면서, 신이 아닌 것도 아닌’, 인간이면서 초인인, 비-신(非神)이다. 이것이 열린 종교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 위에 선 종교라면 나는 이를 ‘절로’교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의 첫 번째 의미는 ‘저절로’, 자연적으로 이다. 두 번째 의미는 ‘저로부터’, 주체적으로 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의미는 ‘절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섬김으로 이다. 나로부터 비롯하여 너를 섬기고 마침내 자연과 어우러지는 ‘절로’, 생명의 종교이다. 이러한 원리를 실현시키는 두 상징을 바다와 숲이라 상상해 본다. 바다는 ‘받아들이는’ 관용, ‘바닥’에 침잠하는 명상, ‘바람’을 싣는 기도이며, ‘바탕’이며, ‘바로 보는’ 곳이다. 숲은 개개의 나무가 자기의 다양한 개성을 가지면서 모두가 아울러 하나를 이루는 보편성이 실현되는 곳이다. 이렇게 바다에 이르러 숲을 그리며 신을 바라는 인간 곁으로 다가와 그들과 더불어 같이 하는 것, 이것만이 억울한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예술에 광기가 없다!

음악의 거장을 인터뷰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물어보면 어김없이 “광기로 치달려온 인생인 것 같다”는 답이 돌아온다. 최고의 록 밴드 ‘사랑과 평화’에서 기타를 친 최이철은 “시끄럽다고 동네 사람들의 항의를 받으면서도 미쳐라하고 기타를 치던 어렸을 때나 나이든 지금이나 마음은 같다”고 했다. 가수 조관우도 음악 때문에 학창시절 친구들한테 들은 얘기라곤 미쳤다는 말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이는 식으로는 기타를 연주하고 곡을 써내려갈 수 없다. 남들의 눈치에 아랑곳없이 몇 시간이고 매진하는 광기가 있어야 예술은 창조된다. 그림 한 장이 팔리지 않아도 피땀을 흘리며 계속 캔버스를 채우고, 심지어 완벽한 자신의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귀를 자르는 빈센트 반 고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위대한 천재는 다소의 광기를 지니고 있다”는 세네카의 말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시인 볼테르 또한 “미쳐버리지 않고서는 어떤 예술에 있어서도 성공할 수가 없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비단 천재들뿐인가. 천재 소리를 듣지 못하는 평범한 예술인도 일반인 기준에서 볼 때는 비상식적인 행위와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상당수 예술계 종사자들은 직장인을 비롯한 일반 사회인과 대화를 나눌 때 말수가 적고 스스럼없이 어울리질 못한다. 공연장 무대 뒤에서는 말없이 조용히 있다가 무대에만 올라가면 미친 듯 열정을 발산하는 뮤지션들이 태반이다. 지금 우리 음악계가 필요한 것은 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광기는 정신이상이 아니라 단지 정상의 궤도에서 일탈하는 비정상을 의미한다. 지극히 정상인 사람이 예술을 할 이유가 없으며 너무도 뻔한 것, 정상적인 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공연장이나 갤러리로 향하지 않는다. 예술은 하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한결같은 기본은 비정상, 바로 광기인 것이다. 대중문화의 접근방식이 과거와 차이를 보이면서 이제 대중예술분야에는 자본과 기획에 의한 기업적이고 산업적인 산물들로 가득하다. 음악계만 해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예술가가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시장을 읽는 눈이 빠른 비즈니스 마인드가 지배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예술가, 그리고 그들의 바탕인 광기다. 예술가의 광기가 부재하면 음악은 긴장과 상상의 확장을 상실한다.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소비품으로 전락한다. 결국은 소비되어 사라져버려도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제히 발라드를 부르고, 우후죽순 아이돌 그룹이 출현하는 국내 음악계에 만연한 ‘너도나도 우르르’ 질병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시장동향 파악, 기획, 홍보와 마케팅은 대중예술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들이지만 이것들 모두는 광기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 밑에 위치해야 한다. 미친 듯 곡을 쓰고 연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머물러야지 그러한 산업적 요소들이 위에서 군림하면 예술의 광기는 죽고 참다운 작품은 볼 수가 없게 된다. 지금 우리의 음악계가 이렇다. 2008년은 대중예술의 광기가 부활하는 해가 됐으면 한다. 우리는 가수의 재롱을 원하는 게 아니라 광기가 빚어내는 감동을 기다린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문화서비스의 표준화 시급

문화산업은 문화 관련 소재를 활용, 산업화한 것이다. 순수 문화활동이나 생활예술 등과는 생산과 소비측면에서 사뭇 다르다. 경제적 동기가 보다 더 강하고 다른 문화활동에 비해 시장원리를 적용하기 쉽다. 그래서 표준화를 적용하기는 일반 문화예술보다 훨씬 더 필요하고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문화산업의 경제적 특징을 보면 이점이 명확하다. 문화 관련 산업은 국가도약을 위한 비전 있는 사업으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따라 문화 관련 산업 서비스의 경제화가 급진전되고 있으며, 국내총생산 구성비나 인력고용 구성비 등도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되는 추이이다. 특히 문화 관련 산업의 신장률은 제조업 등에 비해 매우 높으며 최근 10년 사이에 급증하는 추세이다. 아울러 디지털기술의 발달과 함께 디지털 TV방송의 전망이 매우 밝아 세계 시장의 2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디지털콘텐츠 소프트웨어(SW)가 도약해 디지털콘텐츠 강국과 동북아 e-비즈니스 허브 등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 관련 산업이 국제화에는 국제표준의 미비로 해외진출 및 해외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문화산업을 표준화할 경우 어떠한 이점이 생길 것인가? 문화 관련 산업 중 가능한 부분을 표준화한다면 우선 국제적 표준규격에 맞춰지게 되므로 국제화가 쉬워질 것이다. 공연예술의 경우도 전통문화의 표준화가 국제화를 앞당긴 사례로 일본의 가부키를 들 수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문화의 대중화를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예술 서비스를 실시하면서 이러한 표준화에 따라 문화소비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산업의 경우는 창작품에 대한 복제가 쉬워 흔히 저작권을 침해당하기 쉽다. 그러나 가능한 부분을 적절하게 표준화할 경우 창작품에 대한 저작권 관리가 쉬워 저작권과 저작인접권 등을 보호해 창작자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표준화에 의해 창의성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보지만 오히려 문화의 가치와 특징을 드높일 수 있다. 이는 표준화의 성격상 문화산업 시장화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여줄 수도 있다. 문화산업에서 관련 프로그램간의 호환성도 높이고 매뉴얼화가 가능해 복제와는 다른 측면에서 문화산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줄 통로가 보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어떻게 문화정책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선 게임, 영상, 모바일 등의 디지털문화 콘텐츠산업에서 필수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표준화해야 한다. 아날로그 산업에서 디지털산업으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는 사진분야에서도 표준화를 추진해야한다. EduMart 교육용 콘텐츠 유통 플랫폼의 실험 및 개발에도 우선 적용할 수 있다. 아울러 휴대전화나 PDA 등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하드웨어에 유통되는 모바일콘텐츠의 제작·유통·서비스 등에 관한 표준화기술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문화상품인 캐릭터 관련 장난감, 문구, 공예품 등의 안전성이나 우수상품 인증 등에도 이 표준화를 적용해야 한다. 문화산업 중 시장점유율이 높은 출판물 분류체계나 규격표준화, 양식 표준화 등을 적용해야 한다. 최근 관심을 갖는 문화정보 생산·유통부문에서도 표준화를 적용할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성공이 아니라 그 뒤가 문제다

어느 해인가 “부자 되세요!”라는 카드회사 광고가 대유행을 하면서, 모든 새해 인사를 싹쓸이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역시 가장 무난한 인사는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기를”, 혹은 “만사형통(萬事亨通)하시길” 등의 축원들이 최고일 듯하다. 말 그대로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다 잘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게 바로 성공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성공의 그 뒤편이 허전한 감이 있다. 이른바 ‘성공’이라고 일컫는 지위나 재산 등을 얻고 나서, 현격하게 삶의 긴장이 떨어지고 그 이후의 성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람들을 유난히 많이 보게 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계만 봐도 그렇다. 학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학문적 성과를 내는 것이겠지만,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남다른 명예욕 때문이 아니라, 연구자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교수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이다. 연구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리저리 시간강사로 뛰면서도 100만원 벌기도 힘든 시간강사에서 벗어나, 좀 더 안정된 조건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구자들 중 태반은, 평생 소원이던 교수가 되고 나면 정작 연구성과의 양과 질 모두가 형편없이 떨어진다. 월급도 넉넉하고 연구실도 있는데, 연구의 열의와 아이디어 등이 사라지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비슷하다. 승진 전까지는 부지런하고 열의가 있던 사람이, 일단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오르고 나면 현격하게 나태해지거나 부하 직원들만 달달 볶아 성과를 쥐어짜는 현상 또한 비일비재하다. 누구나 성공을 하고 나면 나태해지게 마련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한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이제 드디어 자신이 아래 직위에선 해보고 싶어도 해볼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태껏 그것을 해보고 싶어 일을 해왔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드디어 제대로 일다운 일을 할 수 있게 됐는데, 왜 푹 퍼져 버리는 걸까? 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이 좋아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지위에 오르기 위해 일을 하는 버릇이 고질화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즉 연구를 하기 위해 교수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수라는 지위를 위해 연구를 하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지위에 오르느냐이고, 일은 그저 그것을 위해 괴롭지만 견뎌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대학입시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20세가 되도록 공부가 재미있고 좋아서 해본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일도 공부도 모두 어떤 지위나 자격을 얻기 위한 방편이고 고통스럽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 지위나 자격 등이 생긴 후에는 공부도 일도 그만 둔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평생 지속된다. 취직을 위해 공부하고 승진을 위해 일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얼추 이룬 나이가 되면, 맥이 풀려버려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몸은 생생하나, 정신이나 태도 등은 벌써 조로증세가 보인다. 이는 개인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나쁜 일이다. 개인은 성공과 더불어 삶의 목표와 보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이제 막 일을 할 수 있을 원숙한 나이에서 성과가 멈춰버리니 그런 큰 손실이 없다.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가 새해에 축원해야 할 것은, 성공이 아닐 수 있다. 성공 그 이후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호란이 수상하다

참여정부가 지고 실용정부가 떠오르고 있다. 실용은 참여에게 권위주의 청산이란 혜택을 받았다는 덕담으로 바통 터치하며 5년의 레이스에 진입하려 한다. 이 코스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길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철 지난 왕조시대를 넌지시 끌어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조선왕조사 연구학자들 사이에서 참여정부를 광해군 정권에 대입해 해석해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우연찮게도 참여의 대통령과 실용의 대통령 당선자는 스스로 태종-세종 계보를 그려 호사가들에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참여정부가 광해군 정권과 닮은 점은 무엇인가? 이른바 민주화세력과 북인의 형성 과정 등을 볼 때 동일한 소수파 정권이라는 것과 이에 따른 개혁적 성격이 우선 고려됐을 것이다. 이 두 정권은 또한 똑 같이 해양세력으로부터 비롯된 가공할 국난인 구제금융체제와 임진왜란 등을 겪은 위에서 성립됐다. 뿐만 아니라 이 둘은 동북아균형자론과 청나라와의 실리외교에서 보듯 북방의 대륙세력과도 동일한 친연성을 보여 줬다. 그리하여 북인 소수파 광해군 정권이 서인 다수파 인조반정으로 이어졌듯 참여정부는 실용정부에 바통을 넘겨주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다수파가 정계에 복귀해 외형적 세력을 과시했지만, 그들은 또 한번의 국난인 호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후 더욱 심한 정파의 분열을 초래해 당쟁을 심화시키고 백성들을 도탄으로 몰아넣으면서, 급기야 해양세력에게 나라를 넘기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니 7·4·7로 표방되는 신보수주의 성장정책이 가져올 양극화의 심화가 대북정책의 경직화, 중국의 패권주의 등과 맞물려 새로운 호란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가상에 그침이 마땅할 터이다. 참여정부의 지도자는 구 시대를 정리하고 새 시대를 열고 싶다며 스스로를 태종에 비유했지만 잘못하면 구시대의 막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다. 한편 실용정부 당선자는 세종의 ‘생생지락(生生之樂)’의 뜻을 이어받아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편안한 세상, 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한다. 이런 사실들을 버무려 다 잘 사는 나라의 터를 닦기 위해 ‘권위를 청산한’구 시대의 막내를 끌어 안고 진정한 새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 왕조 역사의 계보에 빗대는 뜻이리라. 그렇지만 “시골마을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지도록 해 살아가는 즐거움을 이루도록 할 것”이라는 세종대왕의 말과 달리, ‘세종실록’은 해마다 빠짐없이 유망하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발 빠르게 방영될 TV 드라마 ‘대왕 세종’이 용비어천가의 속삭임에 그치고 말기를 비겁한 호사가들은 느긋하게 즐기면서 바라고 있을 테니까. 덧붙여 논평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도 한 마디 해 두자. 이들은 올해를 ‘자기기인(自欺欺人)’이라 명명하며 참여도 실용도 도덕적 해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듯 양비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 도덕적 결벽은 ‘관음증’에 불과하지 않을까. 진정으로 비판하고자 한다면 공황과 전쟁의 체제를 가장 낮은 곳에서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정한 상생의 숲을 향해 자신을 풀어헤쳐야 할 일이다.

우리의 공연은 허술하다

연말 특수를 겨냥해 가수들의 콘서트와 뮤지컬 공연 등이 폭발 상황이다. 가수들 저마다 연말 공연과 디너쇼 스케줄에 분주하고, 수년 전만해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뮤지컬도 서울에서만 수십편이 일시에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물에 콩 나듯 몇몇의 스타 공연에 만족해야 했던 과거와 견주면 양적인 면에서 장족의 발전이라 할만하다. 때로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공연을 즐겼나”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문화 소비태도와 마인드가 정착돼 간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전혀 다르다. 얼마 전 뮤지컬 ‘맘마미아’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공연 중 사고로 환불사태가 터졌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공연이 개막도 하지 못하고 취소되는 불상사도 속출하고 있다. 공연 관람으로 연말의 친목 분위기를 만끽하려던 관객들 입장에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도 불만스럽기는 한가지다. 공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향이다. 객석 어느 쪽에 앉아도 소리가 잘 들려야 한다. 하지만 국내 가수 공연이나 뮤지컬은 음향수준에 있어서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자리냐에 따라 사운드가 천양지차다. “반주에 묻혀 가수 노래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거나 “꽝꽝 울리기만 하지 전혀 사운드의 맛이 없다”거나 하는 불평들이 늘 공연후기에 따라붙는다. 기획을 봐도 그렇다. 대중가수 공연이든 뮤지컬이든 재탕 삼탕이 너무나 많다. 해외 팝가수나 클래식 공연의 경우도 내한이 벌써 수차례인 경우가 허다하다. 외국 가수나 오케스트라를 데려와 한번 흥행에 성공하면 한사코 그 가수와 팀에 집착한다. 흥행이 충분히 검증된 뮤지션과 콘텐츠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상기한 ‘맘마미아’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도 여기에 속한다. 웬만해서 처음 시도하는 공연에는 겁을 낸다. 그러니 좀처럼 참신한 공연물을 접하기가 어렵다. 새로운 공연, 좋은 공연, 본고장에서 화제를 모은 공연의 유치를 기대하는 관객수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공연이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질적으로는 여전히 답보상태라는 유서 깊은 비판이 왜 지금도 계속되는 것인가. 한마디로 이것은 공연기획사의 철저한 수익중심의 상업논리 때문이다. 공연무대는 거액이 오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사고 없이는 곤란하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무대예술 행위가 철저히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획사들은 자사의 매출만을 생각하지, 정말 중요한 관객들의 예술적 만족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실상 일방통행이다. 그래서 티켓판매가 부진해 공연이 취소되고 공연장 관리에 만전을 기하지 못하며, 음향에 허술하고, 내한했던 외국 가수가 지겹게 또 오는 안타까운 상황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문화계 전체가 바탕을 이루는 두 축인 예술과 산업 가운데 급속히 산업 쪽으로 중력을 옮기고 있다. 이를테면 돈을 최우선시하는 것이다. 예술과 비즈니스 상호균형이 깨지면서 그에 따른 피해를 보는 측은 소비자와 수용자들이다. 돈 되는 공연, 많은 공연보다 절실한 것은 좋은 공연이다. 기획이든 내용이든 우리의 공연은 너무나 허술하다. 임 진 모 대중문화평론가

문화 프로슈머들

오페라가 좋아 공연 관람에 빠져들다가 동호인 카페를 만든 젊은이가 있다. 이 똑똑한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동호인들의 뜻을 기획으로 옮기고 싶어해 기획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급기야 오페라 기획자로 성공했다.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전환된 이 젊은이는 자기가 오늘날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프로슈머라고 부른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그 하나는 소비와 생산을 병행하는 생비자(Producer+Consumer)라는 뜻이다. 또 하나는 똑똑한 소비자(Professional Consumer)를 일컫는다. 생비자가 만든 성공신화는 문화예술계에서 심심찮게 떠오른다. 한켠에선 똑똑한 소비자는 끊임 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일에도 앞장선다. 이는 다른 쪽에서 보면 예술의 질을 높여주기까지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침부터 밤낮으로 드라마만 보여 준다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축적된 노하우로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한류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시청자들의 입김 덕분에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어렵다고 푸념하는 작가도 있지만, 재미에 재미를 더하는 드라마로 결말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도 열성 시청자들이다. 프로그램 속에서 관객들은 주체이자 대상이며, 관람객이자 행위자 등으로 커나간다. 이런 것들을 아울러 ‘문화소비와 생산의 공진화’라고 부를 수 있다. 높은 향유능력을 갖는 소비자의 존재가 생산자에게 질 높은 문화적 재화의 공급을 촉진하기 때문에 함께 발전하는 공진화가 이뤄진다. 질 높은 문화적 재화가 존재함에 따라 소비자들의 향유능력도 다시 함께 높아져 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선은 교육으로 소비자의 눈높이를 키우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감수성이 활발할 때부터 정규·비정규 프로그램을 통해 감수성 교육을 시켜야 한다. 청소년시절의 감수성 터치교육이 21세기 소프트강국으로 나가는 길목이고, 문화생산을 늘리는 핵심정책이다. 그 다음은 문화소비자를 귀하게 여기는 문화정책이다. 문화활동의 끊임없는 과정에서 문화소비와 생산의 공진화가 이뤄진다. 이를 위해 생활 속에서 소비자들이 문화를 즐기도록 해야 한다. 소비에 필요한 돈, 시간, 분위기 등을 만들어 주는 것이 문화소비자를 늘리고 생산 증대로 연결시켜주는 정책이다. 문화기관들이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대폭 늘려야 한다. 최근 이런 문제를 프로그램으로 접근하는 사례들이 체험학습이다. 그래서 단순히 한번 찾아와 본 관객을 계속 와보고 싶도록 붙잡아 둬야 한다.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문화공간을 찾지 않던 인지고객을 깨워줘야 한다. 이러한 인지고객은 지속적인 관리로 충성고객으로 바뀌게 된다. 그들이 결국은 생산에 자극을 주는 양질의 문화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지고객을 충성고객으로 전환하는데 힘을 쏟는 것이 최근 문화기관의 실적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이런 기관들이 좀 더 나아가 여러 예술분야를 결합해 흥미를 돋우고, 창작공간도 차별화하고,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이른바 공진화를 위한 단계적 접근이다. 이제는 자발적 소비자가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들의 문화소비능력을 키워주고 문화적 재화의 소비를 증가시킬 것인가가 관심거리다. 한걸음 더 나아가 소비를 증가시켜 새로운 동기와 한단계 높은 학습으로 시킬 것인가. 또 다른 소비유발의 선순환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전략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이른바 ‘모두를 위한 문화정책’, ‘찾아가는 문화정책’, ‘소비자중심의 문화정책’ 등으로 불리며 문화정책의 중심을 차지한다.

드라마, 얼마나 더 극악해질까?

어른들은 아이들이 TV 드라마를 보고 나쁜 짓을 배울까 걱정이라지만, 사실 드라마는 현실을 보고 인물과 사건 등을 만든다. 어떤 작가가 자신이 만드는 인물을 독하고 나쁜 인물로 만들고 싶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드라마를 착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가끔 1950년대나 1960년대 야담이나 라디오 드라마 자료들을 뒤적거리고 있노라면, 참 그 시대 인간들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 ‘이서구 극본’으로 되어 있는 그 시절 사극들은 기껏해야 기생의 사랑을 얻지 못해 연적인 사내를 모함, 하옥시키고 귀양 보내는 정도의 악한에 그치고 있다. 뇌물도 받고 매관매직도 하지만 아직 그 시대 사극 인물은 복잡하고 논리적인 음모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일 능력은 없어 보인다. 그에 비해 이 겨울 ‘사극의 전성시대’의 악한들은 임금의 폐위와 암살을 기도하는 수준에 이른다. 전제군주시대 왕을 암살하는 건 절대로 공공연한 일일 수 없을 테니, 그것은 고도로 복잡하고 체계적인 음모와 거짓으로만 움직여질 수 있다. 이제는 아시아를 주름 잡는 문화상품이 된 ‘대장금’은 벼슬자리와 특정 상인의 이득을 위해 고위직부터 하급직까지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는 엄청난 수준의 음모를 보여준 바 있다. 1990년대 중반 ‘모래시계’가 카지노와 조폭, 정치 등과의 유착관계를 형상화해 충격을 준 지 불과 5~6년 후 정경유착과 권력형 비리는 드라마의 단골 소재들로 떠올랐다. 최근 몇년 동안 방영된 추리적 방식의 작품들은 (‘변호사들’과 ‘부활’, 심지어 코믹 터치의 ‘내 인생의 스페셜’까지) 태반이 이러했다. 그런데 올해의 드라마 ‘이산’에 이르면 악의 무리들은 더 더욱 교묘해진다. 어전회의에서 결정되는 국가의 경제정책은 상권을 독과점한 시전상인들의 힘에 의해 좌우되고 정조를 폐위시켜 죽이려는 정순왕후는 세손이 비단 사도세자(자기네들이 죽인)의 아들이어서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정책으로 자신들의 목줄을 죄는 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한다. 즉 원수의 아들이니 죽여야 한다는 수준에 그치는, 순진한 시대가 아닌 것이다. 정책이 달라 정적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독점이 깨질 위기에 처한 시전상인들은 위장폐업으로 정부에게 으름장을 놓고 시전에서 뇌물을 상납받는 중신들은 백성들에게 돈 몇푼씩을 쥐어주며 항의시위를 조직하며 경찰의 폭력 진압을 유도해 일부러 사건을 키운다. 위장 폐업이나 돈으로 동원된 시위, 폭력 진압과 여론 조작 등 그동안 우리 드라마들이 사회로부터 ‘나쁜 짓’을 참 많이도 배운 셈이다. 삼성 비자금 사건의 폭로를 들으면서 드라마를 연구하는 직업을 가진 필자는 내후년쯤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논리적인 재미있는 드라마가 생산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폭로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 사회가 상상 혹은 실행하는 정·경·언 유착 수준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들은 기업의 정부 정책 조정, 정부 내 감찰기관과 판·검사와 언론기관의 통제, 차명계좌와 불법 계좌추적과 핸드폰 추적, 책을 가장한 돈다발 택배, 미행과 킬러의 고용 등과 같은 내용들을 논리적이고 교묘하게 짜나가지 못하면 아마 시시하다고 채널을 돌려버릴지 모른다. 논리적이고 정교해진 드라마. 필자는 이러한 발전을 기뻐해야 할 것인가, 슬퍼해야 할 것인가.

신구세대가 함께하는 음악

얼마 전 아일랜드를 4박5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아일랜드 더블린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등지의 음악현장을 보고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우리와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는 점을 포착하게 됐다. 사실 음악관계자로서 여러 측면에서 닮은 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아일랜드와 과연 우리와 어떤 점이 다를까하는 궁금증을 갖고 떠났다. 아일랜드는 외세의 침공과 종교 갈등 등으로 점철된 고통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와 거의 닮아 있다. 무엇보다 우리처럼 나라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등으로 갈려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록그룹 유투(U2)가 세계적인 존재로 비상한 것은 활동 초기부터 아일랜드의 통일을 부르짖으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IT의 신흥강국으로 근래 국민소득이 5만달러에 이를만큼 경제가 급성장한 것도 유사하며 아일랜드 역시 우리처럼 그에 따른 후유증을 경험하고 있는듯 했다. 아일랜드는 앞서 설명한 유투처럼 세계적인 명성의 가수들을 다수 배출했다. 밴 모리슨, 시네드 오코너, 엔야, 크랜베리스 그리고 치프턴스 등등. 독특한 켈트족 정서, 이른바 켈틱 정서를 바탕으로 한 그들의 음악은 영·미 팝과 록 등과는 달라 국내 음악계에 한때 켈틱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양상과 범위는 다르지만 최근 우리에게도 한류라고 하는 문화상품 수출의 흐름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달랐을까. 퍼브(Pub)라는 이름의 그다지 크지 않은 공공 유흥업소는 영국과 아일랜드 등을 비롯한 유럽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꼭 들러보는 명소다. 주말이 되면 많은 더블린 사람들이 도심의 퍼브를 찾아 새벽까지 술과 음악 등을 즐긴다. 퍼브들마다 손님들이 꽉꽉 들어차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밖에서 웅성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여유 있게 음악을 즐기고 술을 마시기에 퍼브는 너무 비좁았지만 그런데도 접촉이나 추행사고가 일절 없다고 안내자는 귀띔해준다. 놀라운 사실은 60대 노부부와 20대 새파란 청년들이 함께 어우러져 스스럼 없이 음악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가족과 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세대와 기성세대는 조금의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고 생음악 연주와 노래에 맞춰 함께 합창하며 흥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 젊은이에게 물으니 “어른들이 옆에 있어 더 즐겁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로선 좀처럼 목격하기 힘든 광경이다. 우리 같으면 젊은이들이 출입하는 업소에 어른들은 들어가기가 어렵다. 홍대 앞의 댄스클럽들은 기성세대 출입을 원천 봉쇄하는 곳도 있다. 반대로 청춘들은 물이 다르다는 이유로 기성세대가 가는 업소들 출입을 꺼린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문화공간이 엄격히 나뉘어 있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음악도 신세대 음악과 ‘7080음악’으로 분리의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대중문화는 세대간의 상호작용으로 내공과 몸집 등을 불린다. 대물림은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음악과 음악인의 장수는 보장받기 어렵다. 우리처럼 세대간 문화적 단절이 두드러지면 음악은 짧은 유통기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문화가 출현하더라도 기존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을 아일랜드 방문을 통해 절감했다. 우리 대중문화의 취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신·구세대가 같이 어울리는 공존의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대중문화는 부피가 커진 대신 내실을 다지지 못해 변화에 너무도 취약하다.

더부살이와 서로살기

인류 역사는 ‘□’의 역사이다. 박정희를 존경한다던 파키스탄 무샤라프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반정부인사를 체포하고 부토를 가택 연금한다. 이 소식을 전하는 텔레비전 모니터 위로 그렇게 무겁던 거대담론이 얄궂게도 개그 프로의 퀴즈처럼 떠오른다. 연이어 빛바랜 흑백 필름을 타고 최루탄과 물대포 등이 난무하는 로터리에서 후미진 골목으로 쫓겨 가던 가두 시위대 군중이 오버랩된다. 그들의 이마에는 천형처럼 아로 새겨진 글자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념 서클, 교회, 노동현장 등을 누비며 누에처럼 토해낸 명주실로 ‘계급투쟁’이라고 꼼꼼하게 박아 넣었다. 이어 오일쇼크를 모면하려는 동서진영의 데탕트 무드 속에서 유신 겨울공화국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그 거대한 뇌관 광주가 터진다. 요술처럼 신군부가 똬리를 틀던 어느날 노동쟁의를 조직하다 수배된 한 젊은이가 불고지죄를 강요하며 도바리로 흘러 들어온다. 그는 어깨에 여전히 낡은 계급투쟁의 견장을 달고 날마다 부지런히 어딘가를 쏘다니다 덜컥 잡혀 들어가 한 1년 콩밥을 먹고 다시 돌아온다. 그날 그는 사뭇 달라진 사상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대뜸 무슨 정교한 이론이 필요하냐며, 무조건 감방 문을 발로 걷어차고 쟁취한 눈부신 ‘실천’행위의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그들은 미심쩍은 손으로 그걸 나눠가지며 그날 밤을 꼬박 새운다. 그의 그런 영웅적 투쟁 뒤에는 인류 역사가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확대’의 역사라는 새로운 금과옥조의 ‘시대정신’이 모범답안처럼 금박돼 있다. ‘강철서신’의 유려하고 원숙한 문체는 먹물의 강단을 비웃으며 실천 공간을 샅샅이 누빈다. 어느새 꿈결처럼 페레스트로이카와 그라스노스치 등과 함께 문민정부가 들판의 살얼음을 녹인다. 그 위를 전설처럼 국제금융자본에 의한 무자비한 구제금융의 홍역이 지나간다. 이제 이 땅에도 황금의 가치가 권력의 그림자를 뚫고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적색 일색의 깃발들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분홍색을 거쳐 이내 녹색으로 얼굴을 바꿔 나간다. 이제 식자가 평화로운 식물성으로 물이 드느냐, 야수 같은 동물성으로 남을 것이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 되어간다. 이렇게 식자 사이에 환경이, 생태가, 생명이, 상생이 난무하는데 비례해 패권에 의한 무한경쟁의 정글도 함께 더욱 깊어간다. 이 사태를 어찌하랴? 우선 눈에 보이는 객관적 특수상황으로서의 살벌한 계급투쟁과 심각한 혁명 등을 좀 더 차분하게 생존의 문제로 가라앉힐 필요가 떠오른다. 착취와 수탈이란 기생자의 입장과 기여라는 숙주의 입장을 하나로 묶는 기생, 더부살이라는 개념이 벼려진다. 다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 보편상황의 모델로서 모든 식물의 다양성과 조화의 표현인 상생, 서로 살기의 완벽한 실현체, 극상림의 존재 등이 모색된다. 일부 녹색주의자의 타락, 맥 빠짐의 예외도 인정된다. 마침내 식물성이 무위의 자연적 결정에 갇히지 않고 동물성보다 더 치열한 구도를 지향한다는 확신이 선다. 또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며 이제 어깨를 잠시 내려놓는다. ‘더부살이와 서로 살기’의 간이역에서.

문화직 공무원, 비즈니스 네트워크 코치

문화예술과 행정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활동한다. 서로의 차이에서 생겨나겠지만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은 행정인에 대해 냉정하고 감수성이 없으며 무지하다고 까지 말한다. 행정공무원들은 예술인이 너무 단순하며 절차와 규정 같은 형식합리성을 우습게 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간극을 메워 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 예술행정이며 이 맥락에서 서로가 이해하고 접근하는 통로가 마련된다. 요즘 공무원들에게 비즈니스마인드를 주문하고 있어 문화직 공무원들도 이를 외면하기 어렵다. 문화예술 자체가 비즈니스 대상으로 성립되기 힘든데 창작의 세계를 이해조차 못하는 공무원이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더구나 서로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빌려 쓰기는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문화직 공무원이 먼저 서둘러 비즈니스마인드를 가져야 할 것이고 일반 행정이나 기업의 것과는 다르게 자리를 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시장과 공공의 영역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좁혀갈 것인가가 관건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인맥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형성되지 않겠는가. 예술행정, 또는 예술경영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네트워크를 펼칠 수 있을까. 공공기관을 대행하는 문화재단의 지원활동도 단지 돈 얼마를 대주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네트워크형성에 기대한다. 네트워크는 문화행정의 역할을 확산시키고 그를 통해 정책을 펼치는 전략이다. 그런 만큼 문화정책에서 정책의 혁신과 그의 확산은 매우 중요하다.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감대를 갖는 사람이나 집단 등을 그룹으로 나눠야 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용이한 집단을 의도하는 바를 확산시키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이는 단지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이원적 접근전략은 아니다. 보다 용이하게 이해되는 집단을 통해 이해되기 어려운 집단의 준거기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비즈니스라는 어려운 작업은 이러한 접근이 보다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나아가 관련 분야 확산에 도움을 주는 리더와 서포터 등을 구분해 역할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래서 리더의 발굴과 활동 등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합리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문화리더들의 역할은 좋은 기획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점차 커지게 된다. 더구나 리더십 못지않게 팰로우십이 중요한 세상에 걸맞게 서포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정말 중요하게 된다. 끝으로 성공담을 널리 알리는 홍보나 정보 제공이 중요하다. 더 말할 것 없이 이는 훌륭한 사례를 확산시키는 촉매가 된다. 홍보나 정보 제공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교육을 시키는 확산전략이다.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스타사업이나 업체 등을 발굴해 그 성과를 홍보하고 벤치마킹을 통해 후발자들이 활용하도록 하는 전략적인 접근이 도움이 된다. 최근 문화직 공무원은 시장에 관여하지 않되, 비즈니스 코치로서의 역할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먼저 스스로 변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자기 전개노력이 필요하다. 겨우 업무를 파악하고 나면 순환 보직하는 공직풍토에서 문화직 공무원은 차별적인 인력정책으로 관리돼야 한다. 이흥재 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

가을 나무 앞에서 깨닫는 인간의 허위

내가 사는 곳은 이천의 시골 마을이다. 집의 양 옆이 모두 나지막한 야산이라 요즘 같은 때는 그저 눈만 돌려도 붉게 물든 나뭇잎을 볼 수 있다. 한편 경기도의 태반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하루가 다르게 새 집들이 세워진다. 집을 하도 속전속결 식으로 짓다 보니, 늘 다니던 길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우뚝 서 있는 새 집을 만나게 되는 때도 많다. 어제 본 통나무 무늬의 집도 그렇게 갑자기 만난 집이었다. 한달 전만 해도 이런 집을 본 기억이 없는데, 아마 몇 주일 사이에 지은 모양이다. 그 집은 ‘무늬만 나무’인 가짜 통나무집이었다. 통나무의 볼륨과 무늬, 색깔을 고스란히 본 뜬 건축자재를 쓴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터인데, 이날 따라 유달리 그 옆에서 이파리를 뚝뚝 떨구고 있는 나무들과 크게 대조가 됐다. 여름의 푸르고 무성한 이파리들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더라면 그 가짜 통나무 색깔도 그 기운에 그럭저럭 묻혀버려 그렇게까지 생경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제 나무들이 스스로 물기를 말리며 팽팽한 피부를 스스로 버리고 줄기마저 바삭한 느낌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에, 이런 계절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 가짜 나무는 아무리 나무인 척을 해도 존재만으로도 “나 짝퉁이요”하고 티를 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척’을 하면서 사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인 척하는 합성수지 장판을 깔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합성수지 냄새는 꽃향기인 척하는 인공향료를 뿜어 가려버린다. 유리인 척하는 물병으로 물을 받아 쇠고기인 척하는 조미료를 넣어 국을 끓인다. 석류인 척, 레몬인 척하는 향료와 색소를 섞은 자칭 웰빙 음료로 목을 축이며, 자연세제인 척하는 자칭 웰빙 합성세제로 빨래를 한다. 그뿐이랴. 명품인 척하는 짝퉁 옷을 입고, 키 큰 척하는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며, 젊은 척 염색을 한다. 사람을 만나서는 고상한 척, 유식한 척을 하며, 이런 ‘척’도 못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긴다. 착한 척하는 위선적 인간들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그러한 고백조차 솔직한 척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인간은 무언가 ‘척’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면서도, 아니 그것 때문에 늘 허망하다. 그래서 아무런 ‘척’을 하지 않는 자연에 가까이 가려고 무진 노력을 한다. 아무리 인간이 재주를 피워 만든 인조의 것도, 그것이 모델로 삼은 자연 재료에 비하자면 늘 싸구려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인조의 것을 만드는 재주를 부림으로써, 돈 없는 사람들도 그럭저럭 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너무 쉽게 소비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자연을 죽이고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통나무인 척하는 가짜 통나무집은 몇 십 년 못 가서 수명을 다하고는 땅에 묻힐 것이고, 그것이 묻힌 땅에서는 정작 통나무가 자랄 수 없을 것이다. 해마다 계절이 바뀌면, ‘척’을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통하지 않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늘 부끄럽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척’을 하면서 살 것인가.

대중음악은 화제를 필요로 한다

귀여운 다섯 여성으로 이뤄진 ‘원더 걸스’의 복고풍 노래 ‘텔 미’가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에게마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연신 곡의 후렴구를 중얼거린다. 가히 전국이 ‘텔 미’ 열풍이다. 원더 걸스의 폭발적 부상을 보면서 대중음악은 역시 대중의 관심과 화제를 먹고사는 분야임을 절감한다. 음악성을 내세운 질적인 음악도 필요하지만 대중음악은 일단 재미로 다수를 포획하는 흡수력을 띠어야 하는 것 같다. 원더 걸스의 사례를 보면서 음악 관계자들 한편에서는 좋은 음악이 먼저냐, 히트 음악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성 음악과 시장성 음악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 좋은가의 문제다. 예술과 시장에 대한 왈가왈부는 문화계에서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다. 지금처럼 음악시장이 붕괴된 시점에서 과연 어디의 손을 들어 줘야할지 난감하다. 음악이 질적으로 피폐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은 당연히 무작정의 성공을 노릴 것이 아니라 좋은 음악, 예술적인 음악이 나오는 것이 음악계의 살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대중음악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뚝 떨어진 현실에서 음악성과 질(質)만을 따지면 침체의 골은 더 깊어간다면서 다수 대중을 장악하고 아우르는 히트 음악이 우선이라는 게 시장성 음악 쪽 사람들의 시각이다. 한쪽은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스타’가 필요하다는 주장과도 같다. 말할 필요도 없이 대중음악은 예술과 시장, 음악과 스타 그 둘이 평행선을 그리며 나란히 달려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술과 시장 어느 쪽도 놓쳐서는 곤란하다. 가슴에 울림을 가져오는 감동의 음악이 있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장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예술과 시장은 적어도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대립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 동행하는 성질인 것이다. 하지만 막막한 지금의 현실에서 둘 가운데 굳이 우선시되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시장 쪽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음악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음악, 재미있는 음악이 먼저라는 얘기다. 그래야 음반이든 음원이든 지지부진한 음악계 상황을 벗어날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실한 음악이 받쳐주게 된다고 본다. 지금 우리 대중음악계의 문제는 마치 음악시장이 없는 것 같은 불안과 좌절이 팽배해 있다. 근래 원더 걸스, 빅 뱅,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FT아일랜드와 같은 가수들의 출현은 그런 무망(無望)의 늪에서 탈출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이들이 모두 10대를 겨냥한 아이돌 가수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음반이 팔리지 않고, 음원도 상승세가 꺾여 도무지 재정적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그나마 ‘돈이 되는’ 행사와 이벤트에 강하기 때문에 아이돌 가수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상업적인 고육책이라는 혐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회의론을 펴는 사람들은 “행여 아이돌 가수가 시장을 부활시킨다고 해도 이후 좋은 음악이 나온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고 반박한다. 옳은 얘기들이지만 지금 우리 음악계는 많은 사람들 간의 화제와 관심이 너무도 절실하다. 그래서 음악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다수 대중들이 음악을 즐기고 가수에 대한 얘기꽃을 피우면서 활기를 띠게 되면 좋은 음악도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본다. 큰 스타가 나와 주기를 기대한다. 아이돌 가수라도 괜찮다.

콘텐츠 인재가 왕이다

콘텐츠시대의 핵심은 콘텐츠의 질과 양이다. 그렇지만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고 생명력을 불어 주는 콘텐츠 관련 인재도 소중하다. 어떤 사람들을 콘텐츠 인재라고 할 수 있을까. 흔히 콘텐츠를 창출하는 창조자, 엔지니어만 생각하기 쉽다. 최근 들어 이에 덧붙여 콘텐츠의 보호 활용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콘텐츠 전문 인재로서 지적재산권 전문변호사나 기업 내 지적재산 담당자 등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콘텐츠 생산 경영을 맡는 콘텐츠 매니지먼트 인재로서 프로듀서나 콘텐츠기업 경영자 등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콘텐츠와 관련된 소비자나 장래가 기대되는 인재까지도 우리 사회의 소중한 콘텐츠 인재에 포함시킬 수 있다. 콘텐츠 인재는 어떠한 모습을 지니는가. 앞으로 콘텐츠시대를 이끌어 갈 바람직한 콘텐츠 인재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어디까지나 숙련된 전문가가 아닌 ‘창조적 전문가’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콘텐츠의 국제성을 감안해 볼 때 국제적인 전략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아울러 첨단 기술에 대한 이해가 높고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이 있으며 지적재산 경쟁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하고 중소 기업이나 지역에 도움이 되는 벤처형 인재이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늘 신선하게 상상력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크리에이터가 되려면 창작자로서의 창작력이나 디지털콘텐츠를 둘러싼 최신의 기술동향이나 업계· 저작권법상의 지식을 갖추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더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새로운 표현수법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하며,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창조할 능력이 넘쳐야 한다. 특히 콘텐츠프로듀서는 시대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업계실태에 관한 기초지식은 물론 최신기술, 저작권이나 계약, 자금조달시스템 등에 관한 지식을 비즈니스에 활용해야한다. 미디어의 변화에 민감하고 비즈니스 전개에 필요한 자금조달, 예산·시간관리, 협상교섭 등의 능력을 갖춰 비즈니스에 활용해야한다. 이러한 콘텐츠 인력을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발견·육성할 것인가. 정책으로 뒷받침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새로운 지역경영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이 부분이 아직 정책의제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우선 양적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인력시장의 기본요건을 파악해야한다. 이 분야 전문인력 통계 파악의 기준과 어려움을 해소해야한다. 특히 미디어콘텐츠산업의 정의나 기술급변 등을 감안해 산업구조적인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콘텐츠인재의 시장규모, 미디어콘텐츠산업 이외의 콘텐츠인재 수요도 추스려야 한다. 물론 다양한 수급상의 갭이나 업계 기대 사이의 갭이나 업계 비즈니즈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공급기관인 교육기관 그 자체의 문제도 시대적 수요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고 충분히 커버되지 않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접근전략도 마련돼야 한다. 인력이 재산인 지식경쟁시대이다. 인력의 외지유출이 심한 지방시대에 지역의 새로운 경쟁력은 인재확보이다. 인재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새로운 전략개발이 지역의 미래를 담보한다. 새롭게 떠오르는 콘텐츠 인재를 귀하게 섬겨야 한다. 이흥재 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

우리말 파괴의 주범이 인터넷 신조어?

해마다 명절 때마다 늘 꼭 같은 식단으로 음식을 먹듯, 해마다 한글날 관련 기사는 늘 비슷비슷하다. 올해는 남북정상회담 덕분에 남북 언어에 대한 기사의 비중이 높아졌지만, 최근 4~5년 사이 한글날의 고정 레퍼토리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칭송과,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말이 파괴되는 최근의 현상에 대한 우려로 늘 채워지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말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은,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들이다. 사실 나도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에 당혹스러운 때가 종종 있다. ‘열공’(열심히 공부하다)이나 ‘넷심’(네티즌의 마음) 같은 단어들이 그랬고, 뭐라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외계어’(인터넷에서만 쓰이는, 문자와 기호를 뒤섞은 상당히 어려운 은어적 표현들)는 더더욱 그랬다. 소통이 안 될 때, 그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일단 당혹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그러나 나는 몇 년 내내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들이 우리말 파괴의 주범으로 지탄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끔 반감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지금 우리말에 닥친 위기의 가장 큰 가해자가 신조어를 남발하는 청소년들일까? 그저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보다는 어른이 수시로 섞어 쓰는 영어들이 훨씬 더 우리말을 훼손시킨다고 보인다. 생각해 보라.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는, 비교적 한국어적 상상력을 동원한 말들이다. ‘열공’이나 ‘얼짱’, ‘쌩얼’ 같은 줄임말도 모두 우리말을 바탕으로 줄인 것이니, UCC니 OSMU 같은 영어를 바탕으로 한 신조 용어들과는 비교될 수도 없을 만큼 쉽게 이해된다. 게다가 ‘된장녀’ 같은 단어들은 그 발상에서 우리말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연상을 동원해야만 이해되는 말이다. ‘머리에 X만 들었다’는 말과, ’X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한다’라는 표현들을 다 이해해야만, 허영기 넘치는 여자를 지칭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재미있는가.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와 은어들은, 언어 사용자 스스로 이를 은어나 속어라고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어사전에 등재될 단어가 아니고 점잖은 공식석상에서 쓸 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50, 60대들도 젊은 시절 ‘아더메치’나 ‘짜가’ 같은 은어를 썼지만 그것이 우리말을 그리 심각하게 파괴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들의 은어와 속어 사용은, 늘 있게 마련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영어 사용은 다르다.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신조어 창출은 불가피하다고 치자. 그러나 공식적인 발표문이나 뉴스에까지 나오는 ‘어젠더’, ‘로드맵’, ‘블루오션’ 같은 말들을 이토록 남발해야 할까 싶다. 이런 말의 남발에는 우리말 표현이 없다기보다는, 새로운 흐름에 뒤쳐지지 않았다는 과시의 측면이 훨씬 커 보인다. 그뿐 아니다. 아예 조사와 접사를 빼놓고는 모두 영어로 바꾸어 쓰는 현상도 늘어나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그쪽 어젠더를 억셉트해줬는데, 그쪽에서는 자꾸 아규하는 거야. 모두 오픈 마인드해야 프로세스가 되지, 안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쁜 말버릇이라고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때만 되면 청소년의 인터넷 언어가 우리말을 망친다고 성토하는 어른들이 바로 이들이다. 과연 누가 더 우리말 파괴의 주범일까? 청소년들이 지탄당하는 것은 정말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만만해서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절로, 주역

선생님, 추석은 잘 쇠셨습니까? 저희들을 항상 물가에 세워놓은 아이처럼 걱정하다가 한 마리의 학처럼 훨훨 날아가시더니 지금은 혹시 묘향산 보현사 골짜기 측백나무 위에 살포시 깃들고 계십니까? 근데 이게 웬 일입니까? 생전에 그렇게 조심스러워하시던 4대 모 일간지에 그것도 구설수에 덜컥 오르셨습니다. 청명 선생님께서 자식 관련 폭행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화그룹 사옥 앞에 풍수를 고려해 세운 ‘붕비용약(鵬飛龍躍)’이란 전각 글자를 구성해주시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군사정권의 마지막 꼬리를 잡고 있던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 관사 선정 때 풍수를 봐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제가 민중사니 바보사니 하며 철없이 껍적대다가 지레 겁먹고 도바리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인사차 들른 물골안 청명대를 나설 때 만원짜리 지폐 여러장 고이고이 접어 계면쩍게 손에 쥐어주셨지요. “제겐 글자만 가르쳐주십시오. 사상을 주입하려 하지 마십시오”라며 건방지게 대들던 저를 잔잔한 웃음으로 품어주시고, 근대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주역’읽기를 권하지 않던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벽장에 고이 감춰두었던 양주병을 선뜻 내놓고 술판 거나하게 벌이다가 흥이 오르지 않으면, “이 녀석들아, 어디 그래 가지고 동냥 한 푼이라도 얻겠냐!”며, 각설이타령을 멋들어지게 풀면서도 술 한 잔 안 하던 분이셨는데도, ‘권불이십년’을 증명하던 10·26의 그날 청류헌에서 저희들의 권유에 소주 한 잔 기꺼이 들이키던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하긴 선생님께서 살포시 날아가신 뒤 한 세기가 가고 오고, ‘유물론’의 해체 이후 우리들 믿음의 끝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던 ‘변증법’도 그 수명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테제-안티테제-신테제는 우리에게 어떤 가시적인 전망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러는 종로 5가 방하수련원으로 몰려가 ‘기 수련’에 몰입하였고, 또 더러는 불연·기연(그렇다 아니다)의 증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기독교로, 천주교로, 불교로 돌고 돌아 ‘천불교’로, 드디어 ‘두루만신교’로 풀어헤치고 유학에서 이 지점에 놓인 ‘주역’에 이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4서와 3경을 잇는 가교, 이성(지)과 감성(덕)의 중간 통로, 인간·사회와 자연과의 연결 고리, 세속계에서 탈속계로의 통로. 이 지점이 공자가 가죽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지도록 읽게 했던 주역의 비밀이었고, 그 설명할 수 없는 경계가 선생님께서 함구하셨던 곳입니까? 그리하여 드디어 정-반-합을 넘어 합-불-비로, 기연-불연을 넘어 기연-불연/ 비연-자연으로, 그렇다-아니다/ 아닌 게 아니다-절로로의 길을 배꼽 속에 감추어두셨습니까? 선뜻 권하기에 마뜩찮은 비합법의 가시밭길. 그러나 그 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저절로’ 그리고 ‘저로부터’를 아우르며 자연과 객·주관적으로 하나 되는 ‘절로’의 그 경지에 이룰 수 없음을 이번 구설수로 들통 내신 것이리라 미루어 짐작해보겠습니다. 윤 한 택 기전문화재연구원 전통문화실장

음악이 버림받는 시대

과거 교실에서 음악을 잘 아는 학생은 급우들 사이에서 으스댈 정도로 음악의 존재감은 컸다. 최신 유행의 가요와 팝송을 꿰고 있거나 한 가수의 노래를 압도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친구가 있으면 다른 학생은 그 앞에 맥을 못 추었다. 모의고사 성적 못지않게 음악의 능통 여부도 학급 내 계급 혹은 서열을 재는 척도 역할을 한 셈이다. 이제 이런 얘기는 저 고리짝 시절의 추억담을 벗어나지 못한다. 얼마 전 음악계 진출을 꿈꾸는 한 대학생의 전언은 음악계 종사자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친구들끼리 만난 사석에서 이런저런 얘기로 흥이 올라 잠깐 음악얘기를 건넸더니 순식간에 자리가 썰렁해지더라는 것이다. 그는 옆에 앉은 친구로부터 “아니, 좋은 자리에서 왜 재미없는 음악 얘기를 꺼내느냐?”며 구박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음악 공부를 계속해야 되는 건지 꽤나 걱정스럽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사회로 진출하기 전에 학생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문화분야는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이다. 입시든 입사시험이든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그들에게 라디오를 통해서든 음반을 통해서든 음악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핸드폰이나 인터넷 게임 아니면 무수한 영상예술들이 대신하는 시대가 됐다. 음악은 영상의 부속물 아니면 정말 할 게 없을 때 한번 기대보는 정도의 부차적인 놀이로 전락해버렸다. 물론 이러한 얘기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음악이 과거의 위세에 비해 떨어진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은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철이나 버스, 아니 길거리에 Mp3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뭐냐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다운로딩해 많은 음원들을 접한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 음악팬들처럼 긴장과 재생산의 개념으로 음악과 소통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단순히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당사자인 그들 자신도 인정한다. 수백곡을 컴퓨터에서 다운로딩해 듣다 지겨우면 여지없이 삭제한다.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그냥 듣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음악은 결코 ‘삶의 예술’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된 데는 음악계, 특히 음악미디어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신세대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어떤 TV와 라디오 프로그램도 자신들에게 음악에 입문하기 위한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음악전문프로도 거의 없거니와 출연자들은 나와 잡담으로 일관하고 음악은 그 사이 시간을 메우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미디어가 스스로 음악의 고전적 긴장과 재생산 기능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청년기에 음악을 접하지 않으면 감성의 부재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허점을 드러낸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건 단지 무음(無音)이 아닌 무감(無感)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국가의 기(氣)와도 관련을 갖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음악이 흥할 때 국가도 흥한다는 점을 역사는 말해준다. 음악이 이토록 버림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만약 현재 음악에 대한 불감증이 퍼지고 있다면, 젊은이들이 음악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유사 국가적 재앙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음원제작자, 수요자, 정부 모두가 바짝 긴장의 끈을 조여야겠지만 음악미디어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한 개인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처럼 한 사회도 음악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임 진 모 대중음악평론가

창조산업과 창조리더들

지방자치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지방도시들이 창조도시, 창조산업도시 등을 내걸고 있다. 창조산업이란 개인의 창조성, 기술, 재능 등을 원천으로 지적재산권 활용을 통해 부와 고용 등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는 산업이다. 이를 지향하는 도시가 바로 창조산업도시이다. 영국, 호주, 이탈리아, 일본 등이 이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 비해 미국은 좀 다르게 창조산업을 보고 있다. 미국은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연구개발, 즉 지적 재산 비즈니스라고 하는 분야를 이에 포함해 말한다. 어떻게 사용하든 창조산업이라는 말에는 지식경제라든지 창조경제 등과 같은 탈공업화시대의 새로운 경제의 바람직한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최근 많이 쓰고 있는 창조산업에는 음악과 연극 등과 같은 전통적인 문화산업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덧붙여 애니메이션이나 소프트웨어 등과 같은 디지털콘텐츠산업, 방송을 포함한 미디어계통의 산업이나 광고산업 등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면 공예나 디자인 브랜드 등과 같은 패션산업들을 포함한 문화예술 오락계통의 산업 등을 포함해 창조산업이라고 부른다. 영국은 더 넓게 고미술이나 도자기 등을 포함하고 이탈리아는 관광을 문화관광으로 포함한다. 이처럼 폭넓게 개념을 잡다 보니 창조산업이 대부분 나라들의 시장규모에서 매우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장률은 그간의 제조업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 나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국가경제나 지방자치단체 경영에서 창조산업이 미칠 파급력을 우선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창조산업들을 이끌어가는 창조계층, 창조계급, 창조적 노동자 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필자는 이들을 모두 아울러 창조산업시대의 창조리더라고 부르고 싶다. 이 시대의 새로운 경제흐름을 이끌어갈 창조리더는 누구인가. 우선 아티스트나 크리에이터계통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예술,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미디어 등의 각 전문 직종에서 일한다. 미국적 관점에서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나 엔지니어, 또는 변호사나 국제적 회계업무를 하는 전문직 등도 포함한다. 이들은 컴퓨터, 수학, 건축, 엔지니어, 생명, 자연과학, 또는 사회과학, 교육, 훈련, 도서관 등의 직종에 포진하고 있다. 창조산업과 창조리더를 육성하는 게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과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상하이(上海)의 창조시스템건설 임무를 주목해야 한다. 물론 과학기술측면에 치우쳐 있지만 다음과 같은 10대 전략을 표명한 바 있다. “정부가 거시적 조정능력을 키운다. 과학기술면의 창신(창조) 환경을 개선한다. 기술측면과 지식측면 등의 창조능력을 높인다. 인재를 모아 능력을 키운다. 자금조달능력을 키운다. 과학기술측면의 창조수단을 개선한다. 기술이전 속도를 높인다. 창조의 통합과 집적을 높인다. 과학기술면의 창조관련 협력을 강화한다.” 바야흐로 세계는 창조산업과 창조능력 등을 키우는 전쟁을 하고 있다. 창조리더들을 일정 수준 확보하는 사회가 유리하다. 창조력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창조확산혁명에 성공하는 자치단체들이 발전역량을 선점하지 않겠는가. 이 흥 재 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

대동의 바다, 단골

‘단골’이란 말을 아시나요? 신세대들은 좀 생소하다고요. 그러면 신자, 신도, 교도라는 용어는 어떤가요. 앞에 수식어를 붙여 더 확실하게 기독교 신자, 불교 신도, 이슬람교도라면 당장 확 감이 오지요. 단골 앞에는 어떤 말이 붙어야 익숙하게 들릴까요. 혹시 ‘단골집’하면 무슨 말이 떠오르세요. 막걸리 좋아하는 늙다리인 필자는 바로 유행가 가사 ‘빈대떡 신사’를 떠올리는데, 제 비슷한 세대 여러분들도 대략 그러신가요. 빈대떡 신사의 단골집은 물론 수더분한 색시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막걸리 따라주던 빈대떡집이 되겠지요. 단골은 으리으리한 요리집에서 치도곤을 맞고 쫓겨 나와 그집 색시, 막걸리, 빈대떡, 그 싼 맛, 인간적인 마음씨, 목가적인 풍경에 쏙 빠져버린 신사 그 자신이고요. 빈대떡 단골, 그야말로 빈대떡 신자, 신도, 교도지요. 우리 젊은 친구들은 어떤 단골집을 가지고 있나요? 머리하는 데, 옷 사는 데, 신발 사는 데, 밥 먹는 데, 차 마시는 데, 노래 듣는 데, 그림 보는 데, 사주 보는 데 등등에서 확 끌려 쏙 빠져버린 곳이 있나요. 내친 김에 더 물어 볼게요. 사주 관상, 운세 보러 가 본 적 있나요? 단골 점집 말이에요. 거기서 용한 점쟁이, 박수무당 만나보셨나요. 근데 말예요. 이거 아세요? 단골이란 말은 ‘당골’에서 나왔다고 그래요. 그리고 당골은 바로 굿하는 무당을 가리키는 우리말이고요. 그러니까 단골의 원조는 빈대떡도, 옷도, 신발도, 차도, 노래도, 그림도 아니고 바로 ‘굿’이었던 셈이지요. 이 굿을 진행하는 사람인 무당이 당골이었는데, 이 당골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곧 당골, 단골이 된 것으로 봐야지요. 제가 아주 잘 아는 수원 출신 철학박사 한 친구는 자기 집이 부모대로부터 경기도당굿 오수복 만신의 단골이었데요. 그건 그렇고. 확 끌려 쏙 빠질 만큼 용하다는 게 어떤 경지를 말하는 건가요? 앞 일을 기가 막히게 잘 맞힌다는 것일 텐데, 그 ‘신빨’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이건 학자들도 모르는 건데요, 제가 살며시 알려 드릴게요. 그 조건은요, 먼저, 무슨 대단한 권위가 있는 듯이 ‘반말’ 찍찍해대는 건방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력이 있어야 해요. 다음으로 높은 산 위의 고고한 낙락장송이 아니라, 모든 골짜기, 들판, 마을 등을 끌어안는 가장 낮은 ‘바닥’의 겸허함이 있어야 해요. 또한 그 바닥에 살며시 내려와 깊고 오래 침잠하는 ‘명상’이 있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무변광대한 넓이로 존재하는 빛을 받아 자신을 바람으로 구름으로 풀어헤치고 마침내 비가 돼 만물을 적시고자 하는 ‘바람’, 기도가 있어야 해요.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게 바로 ‘바다’예요. 바다는 받아들이는 곳이며 침잠하는 바닥이며, 바?이에요. 포용, 겸허, 명상, 기도 그 자체지요. 또한 바다가 간절하게 기도하며 바람, 구름으로 기화하고자 할 때 도움을 받는 게 빛을 쏘는 하늘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중요한 일 결정의 마지막을 하늘에 맡겼지요. 왕이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 그랬대요. 자신이 혼자 결정할 일이 있고요. 자신의 지혜로 안 되면 다음으로 대신에게 물었대요, 그래도 안 되면 백성들에게 물었고요.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하늘에 물었대요. 그게 ‘대동’이라는 거지요. 황해바다가 가까운 수원에서 경기문화재단 창립 제10주년 기념 운수맞이 대동굿이 열린대요. 기독교 신자 배 목사도, 이슬람교도 빈 라덴도, 불교도 달라이 라마도 대동의 바다에서 단골로 어울려 한 판 신나게 놀아봄이 어떠하신지요? 윤 한 택 기전문화재연구원 전통문화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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