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교실에서 음악을 잘 아는 학생은 급우들 사이에서 으스댈 정도로 음악의 존재감은 컸다. 최신 유행의 가요와 팝송을 꿰고 있거나 한 가수의 노래를 압도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친구가 있으면 다른 학생은 그 앞에 맥을 못 추었다. 모의고사 성적 못지않게 음악의 능통 여부도 학급 내 계급 혹은 서열을 재는 척도 역할을 한 셈이다.
이제 이런 얘기는 저 고리짝 시절의 추억담을 벗어나지 못한다. 얼마 전 음악계 진출을 꿈꾸는 한 대학생의 전언은 음악계 종사자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친구들끼리 만난 사석에서 이런저런 얘기로 흥이 올라 잠깐 음악얘기를 건넸더니 순식간에 자리가 썰렁해지더라는 것이다. 그는 옆에 앉은 친구로부터 “아니, 좋은 자리에서 왜 재미없는 음악 얘기를 꺼내느냐?”며 구박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음악 공부를 계속해야 되는 건지 꽤나 걱정스럽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사회로 진출하기 전에 학생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문화분야는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이다. 입시든 입사시험이든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그들에게 라디오를 통해서든 음반을 통해서든 음악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핸드폰이나 인터넷 게임 아니면 무수한 영상예술들이 대신하는 시대가 됐다. 음악은 영상의 부속물 아니면 정말 할 게 없을 때 한번 기대보는 정도의 부차적인 놀이로 전락해버렸다.
물론 이러한 얘기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음악이 과거의 위세에 비해 떨어진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은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철이나 버스, 아니 길거리에 Mp3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뭐냐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다운로딩해 많은 음원들을 접한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 음악팬들처럼 긴장과 재생산의 개념으로 음악과 소통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단순히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당사자인 그들 자신도 인정한다. 수백곡을 컴퓨터에서 다운로딩해 듣다 지겨우면 여지없이 삭제한다.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그냥 듣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음악은 결코 ‘삶의 예술’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된 데는 음악계, 특히 음악미디어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신세대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어떤 TV와 라디오 프로그램도 자신들에게 음악에 입문하기 위한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음악전문프로도 거의 없거니와 출연자들은 나와 잡담으로 일관하고 음악은 그 사이 시간을 메우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미디어가 스스로 음악의 고전적 긴장과 재생산 기능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청년기에 음악을 접하지 않으면 감성의 부재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허점을 드러낸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건 단지 무음(無音)이 아닌 무감(無感)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국가의 기(氣)와도 관련을 갖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음악이 흥할 때 국가도 흥한다는 점을 역사는 말해준다.
음악이 이토록 버림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만약 현재 음악에 대한 불감증이 퍼지고 있다면, 젊은이들이 음악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유사 국가적 재앙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음원제작자, 수요자, 정부 모두가 바짝 긴장의 끈을 조여야겠지만 음악미디어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한 개인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처럼 한 사회도 음악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임 진 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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