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거니 오던 비 발걸음 되돌리고 우주의 불꽃놀이 천둥번개 잦아들자 구름 뒤 환한 물빛 낯 숨어서 기다린 듯. 손톱 밑 가시처럼 폐부 콕콕 찌르던 날 도사린 미움하나 꼬리 한껏 치켜들 쯤 불현 듯 다가선 말씀 강물로 출렁인다. 빛바랜 하얀 기억 시나브로 멀어지고 상흔은 으레 그렇듯 녹아내린 시간 위로 한 찰나 스쳐간 바람 혹은, 불꽃이었다.
담벼락을 보듬은 뽀얀 솜털 이엉마루에 보금틀어 달빛 먹고 영그는 곳 하 많은 낮과 밤이 기울어도 하냥 너그럽던 푸근한 뜨락 재잘대는 골목 가득 구슬같은 웃음소리 눈을 감으면 훤히 보이건만 그 하뭇함 잿빛 속에 사라진지 오래다 여태 사울지 않는 그리움 한 자락 웅 켜 쥐고 채워지지 않는 허수한 마음 가눌 길 없어 서성이는 휑한 가슴 꿋꿋한 느티할배 홀로이 서리 내린 옛사람을 반겨 주누나 아! *옛살비 : 고향 *사울지 : 사라지지 않는 김경렬충북 제천 출생. 대한문학세계으로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경기문학인협회, 대한문인협회 회원, 문학과비평 회원. 전국 순우리말 글짓기 수상. 시집 날개를 달다, 노래에
아름다운 사람아 초록이 짙은 향기를 풍기는 날 야트막한 언덕에 우리 예쁜 집을 짓고 은하수 가운데 달을 담자 작은 풀잎 사이로 지나는 바람처럼 여린 인연으로 만나 소중하지 않은 그 무엇하나도 없었음을 하늘바라기 인생은 인파 속에서 메아리를 남기고 날지 못한 새들의 술잔은 비우고 채우기를 되풀이 하지만 영원이란 우리 가슴속에 있는 것 낮의 햇살은 언제나 우릴 비추고 밤의 호흡은 멈추지 않지 않은가 아침이 되면 밤을 떠나보낸 여유로움으로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우리가 되자 김경은
보리밥을 보면 우리 엄니 생각난다. 명절날 하고, 생일날 하고, 손님 오신 날만 빼곤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리밥만 잡수셨다는 우리 엄니. 그래서인지 엄니 몸에선 보리 냄새가 난다. 눈물 같은 비릿한 보리 냄새가 난다. 보리밥은 가난의 밥 그런데도 우리 엄닌 보리밥이 좋단다. 한방에서 여러 형제들이랑 빙 둘러앉아 나눠 먹던 그 보리밥이 좋단다. 윤수천
사월의 광교산은 꽃천지였다 산수유 진달래 산나리 이름 모를 들풀꽃까지, 봄꽃 잔치 한바탕 어울어지고 산야는 온통 신록의 세상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서 있다 신록은 내 마음의 푸른 바다 끝없는 연록의 물결 위에 한 마리 어린 새가 되어 끝없이 훨훨 날고 싶다 반짝이는 햇살이며 보드라운 바람결에 마음 누이고 다람쥐, 산꿩을 친구 삼아 山 식구들의 숨은 이야기도 듣고 싶다 유월의 녹음이 짙어지기 전 나 여기 순록의 오월 속에서 눈이 부시도록 여린 푸르름을 담고 싶다. 김종두국보문학으로 등단. 구리ㆍ남양주교육장 역임.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두고 온 품속 저리 뒤척이다 잠이 들면 하늘이 불그레한 살결로 그를 맞는다 눈 뜨면 불새되고 바다가 되는 그녀 손뼉 치는 파도에 갈매기 날아오르는 아침 성질머리 궂은 바다 그의 생 꿈을 실어 오늘도 만선의 항해 투항하며 숨기척 모으다 김정해시조시학(시조), 월간문학(시)으로 등단. 시화집 좋은 그림 좋은 시, 시집 김정해 정형시집 13월의 사랑. 갤러리 운향풍경 대표.
해풍의 난도질에 키 낮추고 짧은 햇살 아낌없이 옆옆으로 나누며 섬땅 깊이 박은 붉은 심지, 남녘이어도 밤별마저 얼음 설컹하면 뿌리로 받아낸 동상의 흔적 짠바람으로 오래 익혀 아삭하게 달큰하게 섬초는 빈 겨울의 영토에서 홀로 당당하다
잡초 밭에서 혹은 황량한 사막에서 참신한 글 한 꼭지 얻으려 불면의 밤 지새운 지 얼마이던가. 젖은 낙엽으로 복지부동해도 눈귀도 세우지 않는 이 쓸쓸함을 위해 기껏 해 봐야 국밥 한 그릇 값이라고? 겨우 박아놓은 완성의 집 수 만 번의 피돌기가 하얘지도록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들락거리며 길어 올린 한 톨의 시혼 그 빛나는 보석 앞에선 참 놓을 수 없는 얄궂은 운명. 고은영
열 세평 작은 가게 어쩔 수 없이 앉아있네 먹을거리, 마실거리, 놀거리 넘쳐나지만 바라다 보이는 창밖에는 분홍빛 바람 바람 봄바람 낭창한 버들개지 새순 어루만지는 초록 바람은 휘파람을 불고 살포시 눈 감은 여인은 어느새 꽃다지 달박하게 피어있는 들녘에 서있어 따사로운 봄바람은 살랑이는데 열 세평 작은 가게 어쩔 수 없이 앉아있네 고요속에 화들짝 깨버린 봄 꿈 여인의 바람은 봄바람이 아닌 간절한 바람으로 끝나버리나. 전숙녀
흘러가는 구름 뉘 그리워 꽃샘바람 시린 나뭇가지에 밤새워 울음 우는 두견새 울음 붉디붉은 그리움 봄비에 젖어 두견화 피는 저 어디메 두견주 한잔에 旅毒을 푸네. 정순영
바람 같이 왔다 물소리처럼 살다가는 허망이요 푸념이었다. 짧지 않은 생애의 거울 속으로, 걸어가면 허수아비보다 작아지는 자화상이여 삶이란 이런 것인가. 내 영혼 흔들며 산 넘고 물 밟고 온 바람 그 소리에 맴돈 어둠이 내려 앉으면 이제 바람은 또 어디로 가는가. 김석규화성 출생. 문예비전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나 너 기다릴 때 설레던 것처럼 너 나 만날 때 수줍던 것처럼 너 나 탐낼 때 흥분했던 것처럼 나 너 원할 때 냉정했던 것처럼 나 너 맞을 때 신중했던 것처럼 너 나 느낄 때 뜨거웠던 것처럼 너는 나의 존재의 이유가 되고, 나는 너의 삶의 의미가 되리! (부적절한 관계의 우리, 그래도 물은 언제나 제자리에 뿌렸다, 처음처럼) 이봉영
대지의 심장을 두드리며 이슬비 내리고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봄 술렁이는 삼월은 가끔 얼얼한 시샘바람이 불어도 푸른 잎들이 돋을 것이네 환한 꽃잎 그 향기 온 누리에 날리우듯 만국기가 봄바람에 휘날리네 가끔 톱니바퀴 같은 시간을 툭 던져버리고 싶을 때 꽃 몽오리 환하게 폭죽처럼 피어나고 그에 취한 봄을 단장하네 시리게 빛나는 무리 속으로 37.6°씨는 우리를 단장하고 몸을 푼 대지의 태반은 에메랄드 영롱한 몸짓으로 빛나고 있네 이승남
저녁 무렵 아차산이 붉게 타는 홍옥을 물고 있었다 황홀하여 숲길 따라 오른 정상, 아차산이 사념에 잠겨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산의 시선 따라 한강을 굽어 보았다 광나루가 홍옥보다 현란하게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하산 길 아차산 봄 숨결이 어제보다 향기로웠다.
눈시린 얼음장 밑으로 연둣빛 냇물이 흐른다. 들풀도 오롯이 새싹을 밀어 올린다. 들녘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산뻐꾸기 소리 들려오고 뒤란에서 조잘거리는 앵두꽃, 앙다문 매화꽃봉오리도 피어난다. 겨우내 찬바람에 맞선 다정한 이웃들 봄마중 가나보다 이른 새벽부터 수런거린다. 사부작사부작 나도 마을 어귀로 봄마중을 가야겠다. 그리운 사람도 만날 일이다. 박남례
인생은 한바탕 봄 소풍 속에서 피어난다 초록 잎에 은방울 굴러 쨍그렁 울리는 스물 불꽃같이 하얗게 태우는 서른 즈음 사피오 섹슈얼의 매력 속으로 헤엄치는 사십 하루하루 주름살같이 접히는 구름자락에 울먹울먹 건너는 오십 연일 파란 하늘 풀어놓고 목 놓아 토해놓는 바람 숲으로 꽃밭에 숨어있는 자연의 향내 나무 나이테처럼 깊이 새기는 지혜의 뿌리로 걸어가는 길 김성기
새떼들이 저무는 빛을 휘감고 날아든다 횡으로, 종으로 다시 횡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하늘의 살구 빛과 오렌지 빛이 섞인다 야트막한 산등성이가 무리되어 날아오고, 기울어진 등대가 되어 번져오고, 다시 어부들로 날개를 퍼득이며 생이 한꺼번에 안겨올 때가 있다 살구 빛이 사라지기 전에 어둠이 밀려오고 오렌지 빛이 채워지기 전에 태양이 죽어가고 물 위를 떠가는 그림자들, 어디론가 떼를 지어 가는 것들을 보면 근원을 찾아가는 비장함 같은 게 있다 말들이 뛰어다니던 야트막한 능선을 지나 바람이 숨바꼭질하던 소나무 숲을 지나 어둠 속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던 동굴 서쪽 하늘의 살구 빛과 오렌지 빛이 섞여서 새떼들이 날아오는 곳에 서 있다 하늘은 내 심장의 보랏빛이 더해져서 생을 비관하던 두 눈에 영롱하게 담긴다 박현솔
따스한 햇살 버들개지 우듬지에 빗질 하고 실눈 뜨는 덤불 속 꽃다지 냉가슴 연둣빛 물이 든다 윤슬이 펼쳐놓은 물 주름 위 얼음장 밑 숨죽이던 발그림자 끌고 자맥질하는 물오리 떼 동심원 그리며 번져가는 파문 따라 겨울이 다녀간 그녀의 가슴에도 봄이 날렵한 버선코 세우고 기지개 켠다 조은미
곤줄박이 한 마리 슬픈 로라를 연주하듯 노래 부른다 그리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병실 창문을 보듬던 곤줄박이 자작나무 숲속 싱싱한 공기 한 모금 물고와 창가에 살짝 뿌리고 있다 햇볕 가득한 창문사이로 푸른 웃음이 공명처럼 번져나간다 아픔이 빛이 되어 은하별이 되는 이곳 착한 새들이 창공을 향해 날고 있다 고요한 눈빛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