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파주나비나라박물관

우리 선조들은 나비를 길벗으로 삼았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맥을 잇는 청산가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의 꿈도 빠트릴 수 없다. 꿈에 나비가 된 장자는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장자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나로 변한 것인가? 2천년 전 장자가 던진 이 오래된 질문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아주 옛날, 작은 호랑 애벌레 한 마리가 오랫동안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던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트리나 폴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의 첫 구절이다. 1972년 처음 출간되어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애독되는 이 책의 주인공도 나비가 되는 애벌레이다. ■나비로 꿈을 꾸고 인생을 설계하다 건물 외벽에 예쁜 나비가 건물 벽 군데군데 붙어 있다. 2008년 4월에 문을 연 파주나비나라박물관(관장 박정태)은 광문각 출판사에서 설립한 박물관이다. 파주나비나라박물관은 나비를 주제로 박물관을 세울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설립자 박정태 관장은 과학 기술 분야의 도서출판 광문각북스타 대표이사다. 박 관장은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2006년 대한민국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으며 안중근 리더십과 문재인 리더십을 지은 저자이기도 하다. 나비나라박물관은 현재 문화예술경영학을 전공한 박지혜 실장을 중심으로 세 명의 학예연구사가 활동하고 있다. 2012년에 창의체험 프로그램 콘테스트 사업인 교과서 속 살아있는 곤충의 한살이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2013년에는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생활사박물관 사업운영기관으로 선정되는 등 프로그램 기획력을 인정받고 있는 박물관이다. 지난 2년의 활동내역을 살펴보면 나비나라박물관이 중심에 두는 사업이 무엇이며 활동범위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다. 2019년에 지역예술문화 플랫폼 육성 사업 우리 동네, 박물관 놀이터, 나비, 일상을 수놓다, 책장 속으로 날아든 나비, 문화가 있는 날 동화로 말하는 박물관-벅스 라이프,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내 마음으로 읽는 나비이야기, 움직이는 배움터 민화로 만나는 옛 그림 속 나비를 진행했다. 2020년에는 지역예술문화 플랫폼 육성 사업 우리 동네, 박물관 놀이터를 비롯해 어르신 문화프로그램 훨훨 날아라, 나비의 꿈,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다르니까 아름다운 우리, 모두 몇 마리일까요?를 기획 전시했다. 2021년 현재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 사업 별다줄 서비스와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꿈 크는 작은 날갯짓 그리고 문화가 있는 날 멸종위기 나비를 찾아서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디어 회의를 자주 열어요.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변화를 시도합니다.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많은 아이들이 유튜버라고 하잖아요. 이런 중학생들에게 꽃들에게 희망을은 생각을 하도록 이끄는 책이에요. 자기를 성찰하는 수업도 많이 하고 있어요.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합니다. 박 실장의 말이다. 어릴 때 다양한 진로 체험을 해보면 아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낼 수 있잖아요. 우리 박물관은 이런 사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요. 1층부터 3층까지 연결된 박물관을 둘러본다. 1층의 북카페에는 나비와 관련된 어린이 동화책, 나비백과사전 등이 전시 판매되어 있다. 책상으로 날아든 나비에 200여권의 곤충 도서가 책꽂이를 채우고 있다. 나비와 곤충에 관한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는 이곳은 매달 학예사가 추천하는 새로운 도서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층 표본전시관에는 국내외의 140여종 1천여점의 나비와 곤충 40여종이 전시되어 있다. 나비를 생각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나비박사 석주명(1908~1950)이다. 석 선생이 지은 우리 나비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본다. 봄처녀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 가락지나비, 유리창나비, 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 꼬마흰점팔랑나비, 굴뚝나비, 작은멋쟁이나비, 모시나비, 산제비나비. 한국의 나비가 모두 253종인데 이 중에서 석주명 선생이 지은 이름이 248종이다! 이름만 들어도 나비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 선생의 우리말 사랑이 놀랍다. ■나비에 미친 사람들 전시실 한켠에 아름다운 나비가 가득한 4폭의 병풍이 있다. 나비에 미쳐 남나비란 별명을 얻은 조선의 화가 남계우(1811~1888)의 그림이다. 명재상으로 유명한 남구만의 5대손인 그는 예쁜 나비를 보고 갓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10리를 쫓아가 잡아온 적도 있다는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나비박사 석주명 이전에 나비를 가장 사랑한 한국인은 분명 남계우일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남계우도 나비가 깃털 모양의 더듬이로 냄새를 맡는다는 사실, 입속에 귀가 있는 나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나비나라박물관에는 또 한 사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분은 김용식 선생님인데, 전시된 나비 표본의 상당수를 기증한 분입니다. 생물교사 출신으로 한국나비학회장을 지낸 분이죠. 가끔 박물관에 들러 나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시지요. 나비 종류마다 암수 한 쌍씩 전시해 크기나 색 등 차이점을 쉽게 구분할 수 있고, 10종류의 나방도 함께 전시되어 나방과 나비를 어떻게 구별하는지도 배울 수 있다. 가장 아끼는 나비가 어떤 것인지 묻자 박 실장이 검은 빛깔의 나비를 가리킨다. 이 산굴뚝나비는 한라산에만 서식하는 나비인데 멸종위기 1급이라 절로 마음이 갑니다. 등껍질이 반짝이는 곤충이 궁금하다. 살펴보니 일찍부터 장식으로 사용했던 비단벌레다.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대벌레, 얼핏 보면 나뭇잎과 구별하기 어려운 나뭇잎벌레를 보며 곤충들의 진화와 생존 기술에 감탄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나비는 무엇일까? 암컷의 날개 길이가 무려 28센티미터가 넘는다는 알렉산드라비단제비나비랍니다. 우리 박물관은 나비를 테마로 하고 있지만 생물을 보여 주기보다는 나비를 모티브로 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합니다. 예컨대 나비를 표본 할 때도 아이들에게 엄숙하게 진행하도록 지도하지요. 나비의 죽음을 알리면서 표본을 통한 재탄생의 의미를 느끼게 해 주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3층 체험실에서 날개 모양을 보고 나비를 맞춰보고, 멸종 위기종이 몇 종이나 있을까 문제를 풀어보기도 하며 건강한 생태계의 소중함을 배운다. 여기 전시된 15종 나비 중에서 9종이 멸종위기 종입니다. 환경부에서 지정한 것이 9종인데, 1급이 셋, 2종이 여섯이지요. ■훨훨 날아라, 나비의 꿈 지난해에는 어르신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제까지 저학년들이 교육의 주 대상이었는데 지난해에 코로나 때문에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전통 채색 기법을 활용한 온라인 민화 수업을 진행했지요. 예술전문 강사의 지도로 꽃과 나비가 주제인 화접도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인데 반응이 좋았어요. 앞으로도 어르신들이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누리도록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어르신들을 응원할 계획입니다. 주제가 훨훨 날아라, 나비의 꿈이다. 그렇다. 21세기는 평생교육의 시대다. 나비가 돌아왔다.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곳이다. 나비가 날아드는 생생한 영상이 멋지다. 아이들이 적은 감상문에 적힌 나비들아, 어서 돌아와! 우리가 나비를 살려야 해 이런 문구를 볼 때 뿌듯해요. 파주나비나라박물관은 아이들이 꿈을 발견하고 장년들이 후반생을 설계하는 배움터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9.여주곤충박물관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빠지지 않던 과제가 곤충채집이다. 다른 숙제는 뒤로 미루지만 곤충채집은 서둘렀다. 재미난 놀이였기 때문이리라. 기다란 삼 속대 끝부분을 꺾어 삼각형을 만들어 묶고 거미집을 찾아 나선다. 삼각형 부분에 거미집을 서너 개 감으면 준비 끝. 높다란 나뭇가지에 앉은 참매미나 눈치 빠른 고추잠자리도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잡는다. 참나무 줄기를 뒤져 사슴벌레를 찾아내고,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에 누워 별을 세다가 불빛을 보고 날아든 하늘소를 잡고 기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곤충을 잡으러 산으로 들로 쏘다니다보면 어느새 방학은 끝나고 저물녘이면 귀뚜라미가 우는 초가을이 시작된다. 매미, 잠자리, 사슴벌레, 하늘소, 귀뚜라미는 모두 다리 여섯에 날개가 넷이다. 물론 독자들도 알 것이다. 다리 여덟 개를 가진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는 사실을. ■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곤충의 신비로운 세계 곤충은 사람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최근, 호주에서 배에 공기 방울을 안고 물 표면 아래서 자유자재로 걷는 딱정벌레가 발견되었다. 물의 표면장력을 이용해 물 표면을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져 다니는 소금쟁이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 듯 물속에서 물 표면을 거꾸로 선 자세로 자유롭게 다니는 물땡땡이과 딱정벌레다. 소금쟁이를 흉내 낸 소형 로봇은 이미 개발되었으니 딱정벌레를 닮은 새로운 로봇도 머잖아 개발될 것이다. 중력에 구애 받지 않고 천장을 걸어 다니는 파리나 자유자재로 비행방향과 고도를 바꾸는 잠자리처럼 곤충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신기하고 놀랍다. 진화하며 다듬어진 몸매도 환상적인 곤충들의 생태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호기심을 일깨우는데 최고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거의 모두가 곤충기(bug period)를 거친다고 한다. 그만큼 곤충은 매력적인 생명체다. 여주시 능현동 162번지에 자리한 여주곤충박물관(관장 조미숙, 김건우)은 어른들에게는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고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생태박물관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여주곤충박물관 김건우 관장은 경북대학교 생물응용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다. 김 관장은 올해부터 모교인 경북대학교 학보에 충황제의 곤충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김곤충이던 별명이 대학생이 되면서 충황제로 진화한 것이다. 곤충기로 유명한 장 앙리 파브르나 통섭학을 개척한 한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빼어난 필력은 생명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김 관장의 문장도 맛깔나다. 식용곤충의 산업화의 가능성을 살펴 본 바퀴벌레에서 새우 맛이 난다면을 비롯해 이름과 생태가 특별한 가뢰, 이름은 익숙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마귀와 장수말벌은 물론 모기나 파리처럼 인간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고 귀찮은 존재 해충에 대해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이는 스물 둘이지만 곤충박물관 관장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전화로 취재 약속을 잡을 때 김 관장의 아버지 김용평씨가 강조한 말뜻을 이제야 알겠다. ■ 곤충을 사랑한 소년, 최연소 곤충박물관 관장이 되다 우리나라엔 벌레를 하찮게 여기는 사상이 있는 것 같아요. 벌레 같은 놈이 상대방을 나쁜 의미로 빗대는 말인 데서도 알 수 있죠. 하지만 전 벌레 같은 놈이 되고 싶어요. 벌레는 정말 위대하거든요. 장수풍뎅이는 자기 몸의 850배를 들 수 있답니다. 전 다시 태어난다면 사슴벌레로 태어나고 싶어요!(2012년 8월 소년조선) 초등 6학년 13세에 여주곤충박물관 교육팀장을 맡아 관람객들에게 곤충의 세계를 설명하던 김건우 군의 선언이다. 어언 9년이 흘러 22세 청년으로 성장한 김건우군은 올봄에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관장에 취임한다. 짐작하듯이 곤충에 대한 김 관장의 지식은 국내 최고수준이다. 김 관장이 곤충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6세 때, 엄마를 따라 꽃집에 갔다가 사슴벌레 한 쌍을 받아 기르면서 시작되었다. 온종일 사슴벌레를 관찰하다 반해버린 아이의 머릿속은 이때부터 곤충 생각으로 가득 찼다. 곤충 관련 책들을 사 탐독하고 곤충들을 기르던 소년은 중학생이 되면서 곤충연구의 선진국인 일본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전문서적을 구해 읽는다. 그런 오빠를 지켜보며 자란 여동생도 곤충 전문가로 성장한다.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일을 하면서 살게 하고 싶었던 어머니는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다가 여주곤충박물관 이지윤 관장을 알게 된다. 이 관장은 곤충박사인 13세 건우에게 교육팀장을 맡긴다. 주말이면 여주로 내려와 교육팀장으로 활동하던 소년은 곤충박물관을 직접 운영해보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소년의 꿈은 곧 이뤄진다. 건강이 나빠진 이 관장을 대신해 건우네 가족이 박물관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인수 초기에 적잖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지만 한마음으로 뭉친 가족들은 이를 이겨내고 현재의 터에 자리를 잡는다. ■ 인류의 미래를 열어갈 곤충들의 세상 가장 유심히 살펴야할 공간은 1관 표본관이다. 입구에 아버지 김용평, 어머니 조미숙 관장, 김건우 관장, 여동생 가족사진이 반긴다. 전시된 표본은 모두 제가 만든 것입니다. 표본 전시된 곤충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외국산이다. 콜롬비아, 말레이시아 반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남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곤충들이다. 대벌레는 너무 커서 액자에 넣지 못한 것입니다. 제비나비와 큰줄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모시나비는 언젠가 보았던 한국산이다. 아틀라스산누에나방의 두 날개 끝은 영락없는 뱀의 머리다. 생존을 위한 진화의 흔적일 것이다. 이 많은 곤충들을 구입하고 약품처리 하여 표본을 만든 김 관장의 표정과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쳐난다. 딱정벌레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지요. 그중에서도 장수풍뎅이를 가장 좋아합니다. 애는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놈이에요. 남아메리카에 서식하는 헤라클레스 원명아종을 소개하는 김 관장의 목소리가 노래하듯 운율이 실린다. 김 관장의 연구실은 새로운 표본이 만들어지는 곳이자 놀이터다. 곤충탐구관인 2관에 들어서면 표본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곤충을 볼 수 있다. 특별전시관(3관)을 보고 계단으로 통해 2층으로 이동하면 정글탐험실(4관)이 기다린다. 곤충체험관(5관)은 손으로 곤충을 만져 볼 수 있는 곳. 6관과 7관은 파충류전시관과 파충류체험관으로 꾸며놓았다. 1층에 유료체험실도 마련되어 있으니 아이들과 한나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현재 지구에 인구 한 사람당 2억 마리가 넘는 곤충이 살고 있다니 지구는 말 그대로 곤충의 행성이다. 동식물 사체와 배설물을 유기물로 분해해 토양의 순환을 돕고, 식물의 수분을 옮기고 종자를 퍼뜨리며, 인간에게 꿀과 잉크, 항생제와 방부제, 광택제와 접착제를 제공한다. 오래 전부터 곤충의 습성과 생태를 산업에 활용했다. 첨단 산업인 드론 비행도 곤충을 모방한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플라스틱을 처리하는 놀라운 곤충도 있다. 갈색거저리 유충인 밀웜과 꿀벌부채명나방은 자연 상태에서 분해되는 데 500년이나 걸리는 플라스틱을 먹어 치운다. 곤충은 오래 전부터 로봇 산업이나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활용되고 있다. 식량부터 로봇까지 여러 분야에서 곤충의 남다른 능력을 응용하고 있다. 여주곤충박물관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곤충산업에 종사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과정도 진행하고 있다. 곤충으로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실을 보여주는 김 관장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 있다. 저의 책임이 너무나 막중합니다. 이곳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뿐이거든요.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8.여주시립 폰박물관

6월29일 오전 9시 여주행 버스에서 반가운 뉴스를 본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시기에 제작한 금속활자 실물을 찾았다는 소식이다. 세종의 영릉이 있는 역사의 고장 여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런 소식을 접하니 기분이 묘하다. 초여름 여강의 풍경이 평화롭다. 휴대폰을 꺼내 황포돗배와 강 건너 천 년 고찰 신륵사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다가 문득 폰이란 단어를 검색한다. 폰은 목소리를 뜻하는 그리스어이고, 1876년에 전화기가 발명되면서 멀리 가는 목소리를 뜻하는 텔레폰(telephone)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여강을 사이에 두고 천 년 고찰 신륵사와 마주한 여주시립 폰박물관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본다. 안테나를 세운 거대한 폰 왼편에는 스티브 잡스가 디자인한 아이폰이 있고, 오른편에는 삼성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의 역사는 아직 20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 사연은 너무나 풍성하다. 폰박물관은 2008년 설립자 이병철 관장이 여주시 점동면 당진리에 세운 사립박물관이었으나 이 관장이 유물을 여주시에 기증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터전을 옮기고 시립박물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여주시립 폰박물관은 4천점에 이르는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우은경 씨와 함께 개관 때부터 안내와 전시해설을 맡고 있는 도슨트 정지혜씨가 해설을 맡아준다. ■백범 선생을 살린 전화부터 세계 최정상의 국산 스마트폰까지 19세기 말 그레이엄 벨이 만든 액체전화기 앞에 선다. 액체전화기는 폰 역사의 출발점이다. 전화기가 처음 만들어진 1876년 3월10일, 벨이 전화기를 만들어 최초로 한 말은 왓슨,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줘!였어요. 벨이 전화를 걸다가 황산병을 엎질러 옷에 불이 붙자 다급하게 외친 말이라고 해요. 멋진 말을 준비했을 것인데 좀 아쉽죠? 액체전화기로 시작한 전화기는 자석을 사용하면서 성능이 크게 향상된다. 전시관에는 1800년대 후반 스웨덴 에릭슨사에서 만든 전화기, 1877년 미국에서 생산된 벽걸이형 전화 교환기 등 희귀 통신장비 4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인 중에서 전화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고종이다. 최초의 전화기에 얽힌 감동적인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교를 죽인 후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 갇혀 있었죠.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이 급히 전화를 걸어 김구 선생의 목숨을 살렸다고 해요. 창덕궁과 인천에 전화선이 가설된 날짜가 사형 선고 사흘 전이라는 일화는 한편의 사극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고종이 사용했다는 벽걸이형 전화기는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손이 만든 것인데 아름다운 공예품 같다. 두 분의 도슨트도 이 전화기를 박물관의 대표 유물로 소개한다. 1897년 12월 독립신문에 한성 여덟 마을에 전어기를 가설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전화기의 보급은 빠르게 진행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일본에서 제작한 것인데 임시정부에서 사용했던 모델이라고 해요. 손때 묻은 검정색의 투박한 전화기 아래 김구 선생 전화기란 이름표가 붙어 있다. 백범 선생이 전화기의 역사 초반에 두 번이나 등장하다니, 뜻밖이다. 4ㆍ19가 일어난 1961년에 태흥정밀이란 기업이 한국 최초의 국산전화기를 생산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안테나가 사람 키보다 큰 무전기가 눈길을 끈다. 군용 무선전화기는 휴대전화의 진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지요. 1950년 한국전쟁 때 사용했던 무전기랍니다. 휴대폰 등장 이전인 1982년에 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기가 등장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일이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휴대폰인 삼성의 SH-100입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 선보인 것인데 몇 대밖에 생산하지 않아 전 박물관장님이 몹시 어렵게 구했다고 합니다. 후발기업 삼성전자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보고 들으니 더욱 실감 난다. 세계 최초로 휴대폰을 생산한 모토로라,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을 제작한 노키아조차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했는데, 참 놀라워요. 최초의 스마트폰은 IBM 사이먼이다. 1996년에 스마트폰을 선보였던 노키아의 역사가 흥미롭다. 와이파이와 카메라를 장착하며 스마트폰을 선도하던 노키아는 2007년부터 애플의 등장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에 넘어간다. 스티브 잡스가 설립한 애플은 스마트폰의 역사를 다시 쓴다. 2007년에 휴대전화, 아이팟, 인터넷 기능을 합친 아이폰을 출시한 애플은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한다. LG전자와 삼성전자도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다. 삼성이 2009년에 안드로이드를 내장한 갤럭시를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강자로 성장한다. 반면 가전업계의 최강자인 LG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2021년 4월, 스마트폰 사업을 접었다. 첨단 산업의 세계는 이처럼 극적이다. 3천대나 된다는 휴대폰 중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어떤 것일까? 소 학예연구사는 1983년 미국 모토로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다이나텍(Dynatac) 8000과 삼성전자가 2000년에 만든 세계 최초의 카메라폰 SCH-V2000은 주목할 유물로 소개한다. 1988년에 생산한 최초의 모델 SH-100은 삼성전자가 서울올림픽을 찾은 외국 귀빈들에게 주기 위해 개발한 것인데, 무게가 700g이나 나간다. 폰박물관을 설립한 이병철 전 관장은 SH-100A를 2007년에 입수한다. 한국에 없는, 외국에 수출한 국산 휴대전화와 외국산 전화도 빠뜨리지 않고 수집한다. 지금은 너무 흔해, 쉽게 버리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물시계나 해시계처럼 보물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런 집념과 정성이 세계 최초이자 세계에서 유일한 폰박물관을 만들어낸 힘이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란 일곱 글자가 이루어낸 기적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린 스마트폰의 역사만큼 흥미진진한 것이 달리 있을까. 휴대전화 원조로 꼽히는 무선 송수신기 SCR-536을 미국이 선보인 건 1941년이다. 국내에 휴대전화가 첫선을 보인 것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다. 이전에는 간첩이 사용할까 두려워 이동통신을 민간에 개방하지 않았다고 해요. 안보를 앞세우던 시절의 풍속이죠. 1988년에 국내에서 처음 사용된 외국 휴대전화의 가격이 500만원 대였는데, 국산 첫 휴대전화는 165만원이었다고 한다. 삼성 폴더형 휴대전화 회로기판에 할 수 있다는 믿음이란 글이 써져 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나온 제품이다. 1996년에 출시해 대박을 터트린 모토로라 제품을 뛰어넘겠다는 한국 엔지니어들의 각오를 새긴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의 열정과 믿음이 오늘날 휴대전화 강국을 만들어낸 동력이다. 이후 한국은 꿈을 이룬다. 최소형 폴더, 듀얼 폴더, MP3 뮤직폰, 카메라 내장폰, 손목시계형 전화, TV폰 등 최초의 제품을 잇달아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 스마트폰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현재 폰 박물관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전시된 휴대전화 소개는 2018년에 멈춰 서 있다. 이 관장이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휴대전화에는 한국 전자통신 산업의 성장과 당시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포노 사피엔스라는 신조어에서 짐작되듯 스마트폰은 세상을 확 바꾸었다. 오는 주말에는 여주폰박물관을 찾아보자. 영릉을 찾아 소나무숲 길을 걸으며 15세기 조선의 문화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세종의 리더십을 이야기해 보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7.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예술공원은 참 아름답다. 하얀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2014년에 개관한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박물관 경내에 들어서면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종합안내판을 살펴본다. 박물관 부지는 827년에 조성된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4호), 고려시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과 안양사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또한 박물관의 건물 일부는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1922~1988)이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안양의 뿌리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자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다. 유유산업은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막냇동생 유특한 회장이 설립한 기업이다. 멀리서 건축박물관을 바라보며 김중업에게 설계를 맡긴 기업인 유특한의 안목과 결정이 놀랍다.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입니다 참다운 건축이란 인간에게 짜릿한 감동을 주어 끝없는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건축가란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는 이들입니다. 건축박물관 앞에 있는 비문의 일부다. 김중업의 건축에 대한 예찬이자 철학인 셈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정재은 학예연구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이명희 학예연구사가 안내를 맡아준다. 김중업건축박물관 옆 동은 안양박물관이다. 안양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조각을 비롯해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안양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 2층 모서리에 설치된 모자상이 다정하다. 이 건물이 본래 공장이었으며, 1959년에 지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파격과 참신함에 전율한다. 당시 김중업은 35세, 유특한은 38세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빚어낸 작품인 셈이다. 박물관 입구와 로비에 김중업 건축모형 순회전시-주한 프랑스 대사관-부산대학교 본관이라 새겨진 입간판이 서 있다. 시민들에게 찾아가 김중업의 건축세계를 알리고 박물관을 알리는 기획입니다. 시민들에게 한발 다가가려는 박물관의 성실한 자세가 고맙다. 1층 전시실 바닥에 인상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울 을지로 7가에 가면 볼 수 있는 서산부인과의 평면도다. 건물의 구조가 태아가 자라는 엄마의 뱃속을 표현하고 있다! 설계도면을 해설하는 글 제목도 생명의 숭고함을 담아낸 서산부인과이다. 건물의 외관도 엄마와 가슴처럼 둥글고 부드럽다. 건축은 인체와도 같다고 강조했던 김중업다운 건축물이다. 전시실에 몇 장의 흑백사진을 만난다. 젊은 김중업이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건물의 모형을 앞에 두고 찍은 사진도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왼손에 담배가 있다. 그가 1986년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86년 KBS 일요방담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홍익대 총장 이대원과 대담할 때도 내내 담배를 피워대던 골초였다. 그는 한국의 전통건축물 중에서 세계에 자랑할 건축물로 종묘를 꼽았다.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던 모양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서른한 살의 김중업은 한국 건축계를 대표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참석한다. 그는 이때 세계적인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를 만나 세계 건축의 경향과 흐름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된다. 기존의 건축 개념을 깨고 오늘날 현대 건축에 적용되는 많은 이론과 기법을 만들어낸 스승이 운영하는 건축연구소에서 3년 2개월을 일했던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샹디가르의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고등법원, 낭뜨아파트, 롱샹예배당 등을 밤새워 그리고 지우고 야단맞고, 물고 늘어지는 엄청난 시간의 축적이 나를 크게 성장시켜 주었다.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작업들의 연속이었다. 김중업은 부산대학교 본관, 제주대학교 본관, 서강대학교 본관 등 대학건물을 여럿 설계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사진으로 그가 설계한 건물의 모양을 살핀다. 2층 전시실은 김중업의 대표 건축물들을 평면의 설계도와 모형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건물을 유지하기 어려워 철거했다는 제주대학교 본관은 모형을 통해 만난다. 서강대학교 본관 모형이 산뜻하다. 그는 이 작품에 이런 소감을 남겼다. 58년, 서울대 관사에서 제자들과 작업한 작품이다. 아직 르 코르뷔지에의 체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의 영향에서 한시바삐 벗어나 혼자의 힘으로 걷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다. 김중업에게 스승 르 코르뷔지에는 딛고 넘어서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김중업이 프랑스에 있을 때 사용한 수첩이 있다. 불어로 깨알 같은 글이 가득 적힌 수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삼십 대의 김중업은 건축전문잡지 PA와 주간전망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로 주목받던 건축계의 기린아였다. 사진 아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김중업씨라는 글이 보이고, 록큰롤의 유죄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낡은 잡지에서 그가 활동하던 19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김중업의 이름을 국내외에 널리 작품은 역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다. 한옥의 부드러운 지붕선을 살린 대사집무실을 보면 그의 동서양을 융합하려는 의지와 감각이 느껴진다. 건물의 조형과 배치가 한국의 정서와 프랑스의 우아한 품위를 잘 접목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으로 김중업은 1965년 드골 대통령에게 프랑스 국가공로훈장을 받는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는 공간 건축가의 방에 들어선다. 김중업이 생전에 썼던 안경과 손때가 묻은 자와 펜, 연필, 지우개 같은 물건들이 말을 건넨다. 그의 생각이 어떻게 입체화되는지를 그려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중업은 글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성남시(당시의 광주) 개발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고국에서 쫓겨난 김중업은 부인 김병례와 파리에서 생활한다. 9년이나 이어진 고난의 시기에도 그는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홍명조 주택, 외환은행 본점 계획안, 성공회회관 등은 이 시기에 설계한 것이다. 홍명조씨 주택 설계도에 적어 놓은 그의 쓸쓸한 독백이 가슴에 파고든다. 이 속에는 그지없이 파아란 하늘이 바람 속에 휘우적거리는 대밭이, 빗물에 젖은 청오동나무잎이, 그리고 빨갛게 피어오르는 연꽃들이 한국의 어질고 티 없이 맑은 어린이들의 까아만 또릿한 눈동자 속에 새겨진 새로운 삶의 찬가이기를 빌며 1973년의 해를 넘기면서 성심껏 제작한 작품이다. 빛과 그림자란 전시실에 들어서니 유치원 아이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관람하고 있다. 다시 김중업의 건축학 개론에 귀를 기울인다. 집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 집이 매력에 넘치는 것은 우리들을 희열 속에 끌어올리기 때문이요, 쓸모를 넘어 미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집은 아름다워야 하고 정성어린 공간으로 꾸며져야 하며, 그러기에 예술로 이어야 한다. 현대인의 생활이 기계화하면 할수록 삶의 보금자리인 집은 개성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서 인간을 감싸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건축이란 무엇일까? 김중업은 건축을 첨단을 걷는 기술을 구사하여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건축박물관을 나와 안양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을 다시 둘러본다. 지금 봐도 멋진데, 60년 전 이곳을 드나들었던 직원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이 학예연구사와 박물관에 딸린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박물관의 향후 계획을 들어본다. 내년이 김중업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기념하는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지요. 재개발이란 미명하에 천 년의 세월을 지킨 마을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공장 건물을 박물관으로 살려낸 안양시민들의 마음이 빛나는 까닭이다. 내년에 다시 찾아야겠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6.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초여름 강바람을 쐬며 여유롭게 찾으리라. 양수역 근처 자전거포도 미리 확인해 두었던 터라 떨어지는 빗방울이 야속하다. 자전거 대신 택시를 타고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 자리 잡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 도착한다. 우산을 쓰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만난 보리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요즘은 고향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가 없다. 황순원(1915~2000)의 소설 소나기의 무대를 재현한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촌장 김종회)은 지난 13일에 개관 12주년을 맞았다. 소나기마을이 만들어진 사연은 다시 들어도 흥미롭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을 근거로 양평군과 황순원이 재직했던 경희대가 2003년부터 소나기마을 사업을 추진해 2009년 문을 연 것이다. 개관 이후 소나기마을이 거둔 성과는 더욱 놀랍다. 전국에 있는 100여개의 문학관 중에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덕에 자리 잡은 문학관 건물은 수숫대 움집 형상이다. 황순원문학관이라 새긴 벽면의 보랏빛 장식이 초가을의 해바라기를 연상시킨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글 자음과 모음을 꽃술처럼 채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학 속에 깃든 두 개의 별 최형숙 운영팀장의 안내를 받아 문학관부터 둘러본다.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같은 책들을 들여다본다. 60여년이 지났지만 표지디자인이 산뜻하다. 표지를 서양화가 김환기가 그렸다고 해요. 수필가이기도 한 윤난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시관 안쪽에 마련된 작가의 집필실 앞에서 오래 머무른다. 작가의 일상과 정신세계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왼편 벽에는 작가가 쓰던 모자와 두루마기, 바바리코트는 물론 아내의 분홍색 치마저고리도 걸려 있다. 가운데 펼쳐진 한글 병풍은 황순원의 작품 제목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중앙을 차지한 원목 책상이다. 가난하진 않았지만 매우 검소했다고 해요. 황순원 선생이 다리가 부러진 책상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제자들이 구해준 책상이랍니다. 모퉁이를 돌자 얼핏 보면 낙서장 같은 낡은 노트가 펼쳐져 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깁고 지우고 고친 흔적이 가득한 창작노트다. 대가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빚어내는 것이다! 황순원에게 아버지 황찬영은 별이었다. 평양에서 교사로 일했던 황찬영은 3ㆍ1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살이한 독립지사였다. 부친은 1929년 열다섯 살이 된 아들을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오산중학교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한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사학으로 김소월, 백석, 함석헌 같은 문인과 사상가를 길러냈다. 한 학기만 다니고 건강 때문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지만 오산학교는 소년 황순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때 만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보고 소년은 감탄한다. 남자도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황순원은 성장한 후에도 늙을수록 아름다운 한 사람의 남자를 발견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온 부친 황찬영이다. 마음의 두 별, 남강 이승훈과 부친 황찬영을 소개하던 윤 해설사가 황순원의 시 아버지를 들려준다. 황순원이 평생 견지한 자세는 바로 아버지에게서 내림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황순원은 단편소설 104편과 시 104편을 남겼다. 황순원은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작가의 고집은 작품을 구상하고 취재하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같은 대학에 재직하며 친하게 지내던 서정범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작품 속에서 길이 어디로 난 것인지 단 한 줄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하루를 허비한 적이 있었다고 해요. 다시 계단을 올라 시시각각 조명이 바뀌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앙홀을 굽어본다. 빛깔이 참 예쁘다! 문학관 해설을 듣다가 인사를 나누고 동행하게 된 중년의 두 여성이 감탄한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들과 수숫단 강당에서 열리는 문인의 엽서전을 둘러본다. 문학평론가 김종회 촌장과 시인 신달자, 소설가 윤대녕을 비롯한 31명의 저명한 문인들이 코로나19로 지치고 상한 관람객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마련한 이 기획전은 8월 말까지 열린다. 엽서전이 열리는 3층에는 쉼터가 두 개나 있다. 두 사람을 따라 쪽빛구름 쉼터부터 들러본다. 이 예쁜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보였다. 물론 소나기의 한 구절이다. 이름처럼 공간 구성이 아기자기한 갈밭머리 쉼터에서 녹음이 짙은 소나기마을의 싱그런 풍경을 담는다. ■첨단의 설비와 콘텐츠로 순수와 서정의 동심을 유혹하는 소나기마을 마당에 나선다. 그새 비가 그쳤다. 마당가에 속이 빈 여러 개의 수숫단 움집이 서 있다. 맑은 날에는 인공 소나기를 내리게 한다니, 소년과 소녀처럼 수숫단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겠다. 산책길로 들어선다. 땅이 젖었지만 길이 잘 관리되어 산책하는데 별문제가 없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소설 소나기의 배경을 떠올리게 누렁소와 붉은 송아지 조각, 징검다리, 섶다리 개울, 수숫단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소나기마을은 공사가 한창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20년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사업 공모에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인터랙티브 소나기 산책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 사업(10억원)이 선정되고 올해 다시 스마트 박물관 구축사업(2억원)에 선정된 것이다. 첨단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관람객에게 색다른 문화체험을 제공할 것이다. 문학촌은 10억원의 사업비로 실감콘텐츠를 제작하고 체험프로그램과 스마트 박물관 구축 사업을 실행한다. 앞으로 소나기를 8가지 테마로 나누어 관람객이 이동하며 소설 소나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가상현실세계를 체험하고, 앱을 매개로 한 체험프로그램도 진행하게 된다. AI로봇, VR,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의 첨단 디지털 기술로 소나기의 감성과 정서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할 것이니 김 촌장의 말처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소나기마을은 연평균 10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국내 최고 수준의 문학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53년에 발표한 단편 소나기가 7080세대는 물론 첨단기기에 익숙한 청소년들의 마음까지 빼앗는 매력이 궁금하다. 김 촌장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황순원과 소나기라는 이름이 갖는 힘이고, 둘째는 문학관의 위치 즉 근접성이며, 셋째는 우리 문학관만의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일 것이다. 문학관 바로 옆에 자리한 황순원 선생 부부의 묘를 찾아 묘비명을 읽어본다. 20세기 격동기의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의 이룬 작가 황순원, 일생을 아름답게 내조한 부인 양정길 여사 여기 소나기마을에 함께 잠들다. 국민작가로 불리는 황순원은 제자복도 많았다. 전상국, 조세희, 조해일, 한수산,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의 소설가와 이성부, 조태일, 정호승, 하재봉, 박주택, 류시화, 이산하 등의 시인, 그리고 신봉승, 김정수 같은 극작가도 그의 제자다. 물론 아들 황동규 시인도 제자에 포함할 수 있겠다. 김종회 촌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황순원의 소나기 주제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차마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도 조심스러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심정적 교감이지요. 맑은 날 자전거를 타고 강바람을 쐬며 다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찾고 싶다. 가까운 곳에 있는 잔아문학박물관도 둘러봐야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5.파주 블루메미술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는 개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는 아름드리 굴참나무를 품고 있는 특별한 건축물이 있다. 블루메미술관(Blume Museum of Contemporary Art, BMOCA)의 건물 벽에 뚫린 구멍으로 뻗어나간 가지에 푸른 잎들이 유월의 햇살에 반짝인다. 굴참나무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쏟은 수고와 비용은 상상을 넘어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꽃과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난다. 신선한 상상력과 우아한 풍경을 연출하는 블루메미술관은 건축가 우경국이 디자인한 작품으로 2006년 대한민국 건축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블루메는 미술관의 상징인 굴참나무의 학명(Quercus variabilis Blume) 마지막 단어에서 딴 것인데 독일어로 꽃을 뜻한다. 특별한 사연과 이야기를 간직한 블루메미술관(관장 백순실)은 나무와 건물이 어울리듯 미술관과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지향하는 주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블루메미술관은 특성화된 주제를 가진 전시로 현대미술의 현장을 해석하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나고 있다. 살아 있는 나무와 정원을 품고 있는 건축의 모습대로 블루메미술관은 생명과 소통, 만남과 관계를 만들어내는 현대미술의 방식에 주목한다. 2013년 봄에 개관한 이후 지금까지 22개의 현대미술전시를 기획해왔다. 나무와 만나다, 정원사의 시간, 정원놀이, 재료의 의지-정원에서의 대화전(展) 등 주제에서 짐작하듯 기획전은 정원과 자연을 테마로 한 것들이 많다. 아이들이 정원에 누워서 꽃을 올려보며 상상력을 펼치는 곳 헤이리 예술마을에 산 지 17년이 된다는 백순실 관장이 이곳에 미술관을 설립한 까닭을 들려준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만 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들, 특히 난해한 현대미술을 전공한 젊은 작가들이 전시할 공간을 빌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같은 길을 걷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펼치는 장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또 하나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 다음 세대를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이 부재하고 혼란한 세태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열려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느끼도록 돕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창문 너머는 화초가 무성한 정원이 있다.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이 또한 작품, 설치미술인 셈이다. 정원 이름이 피어나는 초원이다. 우리는 평소 꽃들을 내려다보지 않나? 여기서는 아이들에게 누워서 정원을 바라보게 한다.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자연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블루메미술관은 전시관 못지않게 정원 가꾸기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미술관 안팎에 마련한 정원에는 무려 2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손수 정원을 가꾼다는 백 관장의 말이 인상적이다. 과수원집 딸로 태어난 덕분에 유년 시절부터 풀과 나무와 친숙했다. 그림을 그리고, 클래식을 듣는 것만큼이나 정원을 가꾸는 일이 즐겁다. ■다향과 선율의 화폭에 담다 서양화가인 백 관장은 90년대에 동다송 연작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일찍이 다도에 입문한 인연으로 그가 차의 정신을 노래한 초의선사(1786~1866)의 동다송을 연작으로 제작했던 것이 현대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당시 그는 차를 마시듯 날마다 차를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차의 향기와 빛깔, 다도의 정신이 담긴 그의 그림은 향기로운 차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블루메미술관의 독특한 외벽 장식은 바로 백 관장의 동다송을 형상화한 것이다. 차를 사랑하듯 클래식을 사랑했다는 백 관장이 사무실 벽에 걸린 추상화를 가리킨다. 제목이 모차르트 제39번이다.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교향곡을 형상화한 것이다. 음악은 선율이 중요하다. 선율만 잘 타도 그림이 된다. 선율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선율을 표현하려니 추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의 영혼까지 실린 음악 그림이길 바라며 작업했다.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제작 비법을 자분자분 들려준다. 그가 클래식 선율을 회화로 옮기는 작업을 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시인 이인혜의 권유로 음악전문 잡지 월간 피아노에 연재하던 작품을 엮은 책이 시인이 읽고 화가가 그리는 영혼의 클래식 100(한길사)과 랩소디 인 블루(한길사)라는 두 권의 단행본으로 탄생한다. 앞의 책을 소개하는 첫 구절이 40년간 쉬지 않고 도락(道樂)의 길을 형용해 온 서양화가 백순실이다. 백 관장의 설명을 들으면 현대미술의 높은 벽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 해답은 그냥 보는 수밖에 없다.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떠오르는 느낌을 따라가며 그냥 즐기면 된다. 내 마음에 드는 색감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집 밖의 미술관에서 집을 돌아보는 전시 집에서 집으로 김은영 학예연구실장의 안내로 기획전 집에서 집으로를 둘러본다. 5월1일에 개관한 이 기획전은 2021년 포스트 펜데믹 시리즈 두 번째 전시로 기획한 것으로 8월29일까지 이어진다. 민성홍, 박관택, 이창훈, 조재영, 황문정 다섯 명의 현대미술작가와 EUS+ 건축가와 함께 8점의 설치작품을 통해 집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획이다. 코로나19 이후 모든 것이 집으로 모이고 있다. 자연과의 관계망 안에서 집의 본질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를 기획한 김 학예실장의 안내에 귀를 기울인다. 민성홍 작가에게 집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라면, 이창훈 작가에게 집은 고요함 속에 드러나는 기억과 이야기이고, 황문정 작가에게 집은 계속 진동할 수 있는 활기와 움직임이다. 미술관의 다락 공간에는 세운상가에서 심야책방으로 유명한 독립서점 커넥티드 북스토어와 어린이 놀이문화 콘텐츠 기관인 키즈캔이 함께 전시내용을 해석한 책들로 다양한 전시경험을 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집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 키즈캔의 그림책과 매일 반복되며 매일이 다른 집에서의 요리조리 달걀요리 조리법 같은 개성 있는 책을 소개하는 전시도 재미있다.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 꿈꾸는 집과 가족 교육 프로그램 집으로 가는 길에도 참여할 수 있다. ■가족들, 큰 나무 밑에서 놀다 블루메박물관은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수상했다. 경기도지사 표창 우수미술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박물관 미술관 업무추진 유공 정부포상을 받은 것이다. 지난해에는 치유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이라는 주제의 국립중앙박물관 교육 심포지엄에 사립미술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사례를 발표한 미술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문화계 안에서도 전문성과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미술관은 3개의 전시실, 교육실, 야외 정원, 사무실 등 연면적 200평 규모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굴참나무가 훤히 보이는 통유리창과 계단으로 이어진 공간이 시원하다. 다락방 같은 전시실은 아이들 놀이터 같다. 건물 곳곳을 장식한 정원에는 백 관장이 손수 가꾼 200여종의 꽃들이 피고 진다. 매년 봄, 가을에 진행하는 미술관 정원탐사는 아이들이 식물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려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물놀이와 미술체험을 엮은 미술관 속 여름사냥, 작품이 탄생해 전시장에 설치되는 과정을 체험하는 빅트리 어린이 워크숍, 예술 전문가 부모들이 직접 진행하는 공동 육아 프로그램 예술 육아의 날 등 특화된 프로그램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연말에는 아이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와 함께 해설이 있는 어린이 음악회가 열린다. 역량 있는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중진작가를 새롭게 조명하는 사업을 꾸준하게 벌이고 있는 블루메미술관은 다양한 기획과 프로그램으로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여 관객이나 참여자들의 재방문율이 높은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4. 파주 '벽봉한국장신구박물관'

작지만 충실하네요. 벽봉한국장신구박물관을 함께 둘러 본 지인의 소감이다. 파주 헤이리에 자리 잡고 있는 벽봉 한국장신구박물관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궁중유물박물관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박물관에서 옛사람들도 몸치장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신라와 고려는 물론 유학을 신봉한 조선의 왕과 양반사대부들까지 장신구를 애용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읽는다. 옥은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의 주재료였다. 옛사람들이 옥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려주는 유물이 있다. 경주 황남동과 노서동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은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구성미를 갖춘 유물로 꼽힌다. 출(出)자 모양의 세움장식과 사슴뿔 모양을 뒤에 덧붙인 금관을 장식하는 것은 바로 굽은 청옥과 비취옥, 옥구슬이다. ■옥공예와 매듭에서 한국미를 발견하다 옛사람들이 돌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옥을 꼽았을 뿐 아니라 옥을 몸에 지니면 좋은 기운을 받고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7할이 옥 종류의 구슬이다. 옛사람들은 옥의 은은한 광택을 인(仁), 투명하고 맑은 빛깔을 의(義), 두드리면 나는 맑은 소리를 지(智), 깨져도 굽히지 않는 성질을 용(勇), 예리하지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엄(嚴)이라며 옥의 오덕(五德)을 찬양했다. 오덕을 갖춘 황옥(黃玉)으로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옥새를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관념을 확인한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자리한 벽봉한국장신구박물관(관장 김영희 신옥순)은 옥을 갈고 다듬어 유물을 되살려내고 전시를 통해 우리 옥공예의 우수성을 알리는 곳이다. 박물관에서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이어지는 옥공예 장인들의 예리한 눈길과 섬세한 손놀림, 그리고 사명감과 자부심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설립자 벽봉 김영희 선생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18호 옥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매듭 전수자인 부인 신옥순관장은 김 옥장의 옥공예 작품을 소재로 매듭을 연구하며 지도하고 있다. 부부가 합심해서 운영하는 박물관답게 전시물도 옥공예와 매듭이 중심이다. 유물 재현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작업이 철저한 고증인데, 안지원 학예연구사는 먼지 쌓인 문헌을 뒤져 관련기록을 찾아내고 분석하여 옥장이 재현하는 작품에 힘을 싣고 있다. 신라 금관에서 보듯 한국은 물론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옥을 가공해 장신구로 활용해왔다. 대만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대만국립고궁박물관에서 취옥배추를 보며 장인의 솜씨에 감탄했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처럼 옥으로 배추의 빛깔과 모양을 생생하게 표현해 낸 유물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한국의 옥공예도 중국에 못지않았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 옥공예의 수준과 품격이 얼마나 높은 지를 한국장신구박물관을 둘러보면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옥공예의 특징은 무엇일까? 천연재료 자체의 자연스러움과 여백을 살리는 한국적 미가 담겨 있지요. 안 학예연구사는 옥공예에서 발견되는 한국의 미를 여백과 자연스러움이라 풀이한다.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다 2014년에 문을 연 벽봉한국장신구박물관은 속이 꽉 찬 배추 같다. 1층 전시관에 들어서면 창가에 진열된 보석 원석들에 눈길이 쏠리기 마련이다. 원석의 표면을 다듬은 것들이다. 박물관에 있는 대부분의 원석들은 일반 관람객들의 눈에는 평범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나네라는 학도가의 가사처럼 옥은 갈고 다듬어야 비로소 빛나는 보석이다. 지하1, 2층에 있는 상설진시실과 기획전시실을 둘러본다. 조선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어보와 옥책, 대한제국 왕실에서 사용된 궁중 장신구와 패물에서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1991년 4월 한ㆍ일 간에 체결된 영왕가에 유래하는 복식 등 양도에 관한 협정에 의해 반환 받은 유물들이다. 영왕과 영왕비의 옥대, 규(圭), 대삼작노리개[佩], 동자삼작노리개, 대봉잠(大鳳簪) 등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영친왕 일가의 유물을 김영희 옥장이 복원ㆍ복재한 것이지만 왕실의 품격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름도 생소한 규는 옥으로 만든 홀을 말한다. 관복을 갖춘 신하가 손에 드는 홀은 임금께 여쭐 말씀이나 이르시는 말씀을 붓으로 기록했다가 지울 수 있게 만든 필기도구라는 사실은 알 것이다. 옥으로 만든 규와 상아나 나무로 만든 홀의 차이는 무엇일까? 규는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제왕과 제후의 표상으로 홀과 달리 끝이 모가 나 있다. 이처럼 규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기획전시실도 상설전시실 못지 않게 볼거리가 풍부하다. 박물관에서는 선비, 미와 예를 말하다(2016)를 시작으로 경기도와 파주시에서 시행하는 지역문화예술 플랫폼사업을 통하여 매년 한두 차례의 기획전을 열고 있다. 왕실혼례, 장신구로 꽃피다(2017), 금자동아 옥자동아?어린이한복과 장신구(2018 봄), 왕실 옥공예 파주에 머물다-경기도 무형문화재 옥장(장신구) 제18호 벽봉 김영희전(2018 가을), 영롱하게?레트로 장신구 전시회(2019), 女人, 허리에 차다?조선시대 여성장신구(2020 봄), 남자, 허리에 차다?조선시대 남성장식류(2020 가을)를 통해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어진(御眞), 초상화, 풍속화, 사진 등에 나타나는 조선시대 왕실의 옥대, 어도, 장도와 같은 장식류와 사대부의 각대, 사대 등의 허리띠와 안경집, 장도, 주머니와 같은 장식류를 재현하여 전시했다. 왕실의 남성들은 백옥, 비취 같은 옥을 즐겨 사용했고 사대부들은 물소뿔, 호박, 상아 같은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왕실과 문무백관의 품계를 장식류로 나타내며 멋과 풍류를 즐겼던 조선의 남성 문화를 조명한 자리였다. 전통장신구에 대한 연구와 무형문화재의 기술을 융합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전시하는 것이 우리 박물관의 자랑입니다. 안 학예사와 함께 안내를 돕던 김소미 교육사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문방제구, 무형문화재와 함께 하다 2021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으로 기획된 문방제구文房諸具, 무형문화재와 함께하다전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벗이라 불리는 문방제구를 현대의 무형문화재의 손길로 재탄생된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4인의 무형문화재가 뜻을 모아 실용성에 아름다움을 더해 문방제구의 공예적 가치와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 11월28일까지 진행된다. 사기장(백자,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1-1호) 서광수, 두석장(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박문열, 옻칠장(서울시무형문화재 제1호) 손대현, 옥장(경기도무형문화재 제18호) 김영희 4인이 참여했다. 옥석, 두석, 백자, 나전칠기로 만들어진 공예품에 선비의 기개와 아취가 담겨있다. 문방사우로 선비들의 곁을 지켰던 붓, 벼루, 먹, 종이를 비롯해 연적, 필세, 문진, 필통 같은 소형 기물에서 꼿꼿하고 단아한 조선 선비들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문방구를 벗[友]이라 부르며 가까이 했던 선비들의 맑은 정신까지 느낀다면 금상첨화이겠다. 전시에 대한 문의는 박물관(031-949-0848)으로 연락하면 된다. 박물관 1층에서 진행되는 교육프로그램도 인기가 많다. 천연원석과 간단한 매듭을 이용하여 팔찌, 반지, 목걸이 팬던트 등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상설 체험프로그램은 누구나 참여 할 수 있지요. 박물관 관계자는 기획전과 연계한 전시연계 프로그램과 교육 사업을 통한 단체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여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고 알려준다. 옥과 매듭은 한국인의 섬세한 손길과 여백의 미의식을 드러내기에 좋은 소재임에 틀림없다. 한국장신구박물관이 있는 파주 헤이리에는 한향림옹기박물관이나 블루메미술관처럼 흥미로운 박물관과 멋진 미술관이 가득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3. 용인 '예아리박물관'

용인 예아리박물관(관장 임호영)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삼백로 785에 위치한다. 예아리는 행정구역상의 마을 이름이 아니라 예(禮)가 있는 아름다운 울타리라는 의미이다. 박물관은 큰 길과 약간 떨어진 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 바깥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 산기슭을 돌아서면 매우 이국적인 모양의 적갈색 건물과 마주한다. 마치 어느 낯선 나라의 마법의 성 같은 느낌이다. 2013년 4월 정식으로 개관한 박물관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드시 거치게 되는 통과의례를 전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 머리에 관을 쓰고 성년 의식을 거행하는 관례(冠禮), 성년이 된 남녀가 결혼하는 혼례(婚禮), 인간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는 상례(喪禮),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제례(祭禮) 등 관혼상제(冠婚喪祭) 관련 유물들을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다양한 체험과 교육 그리고 특별전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자 건립된 공간으로 세계 유일의 통과의례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카페가 있는 건물 1층은 특별전시공간이고 2층은 도서관이다. 교육관은 아프리카 어느 왕궁을 본떠서 지었는데 예와 효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상설전시실은 고구려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인 장군총과 멕시코 마야 피라미드를 혼합한 퓨전식 건물이다. 교육관과 상설전시실 두 건물 모두 색깔도 적황색이어서 매우 이채롭다. 고인돌과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는 너른 정원은 또 하나의 야외 전시공간이다. 특별전시공간과 교육관 사이에는 장독대 항아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정겨운데 장독대 위에 아프리카 소년 동상이 서 있어 다소 낯설다. 마당을 가로질러 야트막한 산에 오르면 덤바위가 자리한다. 수정이 많아 일명 수정산이라고 부르는데 산 정상에 올라가 소원을 비는 기원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별전시공간에서는 경기도와 용인시가 후원하는 2021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예(禮)-를 잇다 프로그램이 한참 진행 중이다. 5월4일부터 9월30일까지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는 누에의 삶을 관찰하면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체험이 마련되어 있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이 명주실이고 명주실로 짠 옷감이 비단이다.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가정에서 베모시명주무명으로 직물을 짜는 일, 즉 길쌈을 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물레와 물레질하는 곱디고운 아낙네의 인형, 명주, 무명, 삼베 등의 옷감을 짜는 베틀과 베틀질하는 아낙네의 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물레 바로 옆에는 회색 빛깔의 누에들이 금새 한 잎 뚝딱할 것처럼 앙증맞게 꿈틀거리며 뽕잎을 갉아먹는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누에의 일생을 통해 인생의 삶과 죽음도 깨닫게 한다. 누에는 아주 작은 알로 태어난다. 거의 한 점에 불과한 알이지만 알은 세계다. 애벌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의 죽음은 곧 애벌레의 탄생이다. 개미를 닮은 한 살배기 개미누에는 털이 북실북실하다. 한잠자고 일어난 두 살배기는 애기누에라 부른다. 석잠자기, 넉잠자기를 마치고 난 뒤 누에는 누에고치에서 번데기로 변신하며 인고의 시련을 거친 후 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마침내 번데기는 누에나방이 되어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간다. 누에의 삶은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방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단계마다 전혀 다른 삶의 차원으로 완전 탈바꿈 하는 과정이다. 특별전시공간에서는 예(禮)-를 잇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역민과 함께하는 음악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다. 예(禮)가 밝아진 다음에 악(樂)이 갖추어진다(홍재전서 제51권)고 했듯이, 공연은 5월29일 토요일을 시작으로 9월까지 5개월 동안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열린다. 상설전시실 1층 세계문화관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 가나는 고인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관이 다르다. 고인이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하면 비행기관을 준비하고, 동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면 동물 모양의 관을 마련하는 등 고인의 소원에 따라 다양한 관을 만들어 매장하는 풍습이 눈에 띈다. 가나의 장례문화는 장례식 때 관을 메고 춤을 추는 등 매우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집트 투탕카멘의 왕의 목관과 악령을 쫓아내는 각양각색의 아프리카 가면도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조장(鳥葬)은 티베트의 장례문화인데 죽은 자를 데리고 하늘로 승천하는 신령한 새라는 의미의 샤르거, 즉 하늘의 장의사 독수리를 실감나게 재현해 놓았다. 한국의 작은 가마와 비슷한 일본의 좌식상여와 혼배(魂船) 등 일본의 장례풍습도 볼만하다. 사람이 죽으면 300일 동안 집에 모시며 영혼은 하늘에 도착했다는 의미의 싸사까린이라는 글귀를 새기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중국 백족의 특이한 장례문화도 만나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미국, 일본, 스위스 등 7개국에서 사망자의 유골을 담은 캡슐을 로켓에 실어 우주로 보내는 우주장(宇宙葬)도 소개한다. 2층은 한국문화관으로 한국의 상고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상례문화를 시대와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하는 공간이다. 전시실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 임시로 거처하는 집으로 생각했던 꽃상여를 비롯해 15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상여에 장식된 인형들이 꼭두이다. 꼭두는 죽은 자를 저승까지 인도하는 동행자이자 호위무사, 광대 등 수많은 모습과 역할을 함축한다. 1998년 안동시 택지지구 개발과정에서 발굴된 400년 전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원이 아빠에게 꿈에서라도 나타나 말해주라는 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는 눈물겹다.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박물관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송대 성리학자인 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주희(朱熹) 등의 예설을 모아 관혼상제와 잡례(雜禮)라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분류하여 가정의례와 국가의 전례를 통합하는 예학체계의 가능성을 보여준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중 신주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신주(神主)와 함께 진열해 놓았다. 조선의 제22대 정조대왕이 승하했을 때의 장례 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한 국장행렬은 예아리박물관의 야심작이다. 정조국장도감의궤에 수록된 반차도(班次圖)에는 수원화성의 왕릉으로 가는 국장행렬이 총 40면의 채색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국장도감의궤는 국장에 관한 모든 의식과 절차를 기록해서 후일에 참고하도록 만든 책이다. 박물관에서는 국장도감 반차도에 의거해 국장행렬에 참가한 인물들과 말의 미니어처를 2년여에 걸쳐 진흙을 직접 손으로 빚어 가마에 구웠다. 등장인물은 국장도감을 총괄한 총호사(摠護使)를 필두로 문무백관 등 1천348명에 이르고, 말 341필, 가마 20채, 국장행렬의 길이 또한 100여m나 되다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왕궁의 바깥문에서 왕릉까지 재궁(梓宮: 왕의 관)을 운반하는 큰 상여는 무려 190명이나 맸다. 국장행렬에 등장하는 인형들의 얼굴도 제각기 다른 표정들이고, 인형의 옷 또한 형형색색 다르다. 예로써 구성원 각자의 역할과 색깔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규정을 두고 목숨 걸고 예송(禮訟) 논쟁까지 벌였다. 정조대왕 국장행렬은 장엄하다. 조선왕조 예법의 장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국장에는 곡을 하기 위해 궁녀들도 20명이나 동원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국장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때 그 자리에서 수많은 백성 중 한 사람이 되어 애도하며 함께 참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현장감이 넘친다. 예아리박물관에 가면 누에는 실을 토하고 사람은 예를 잇는다. 수많은 유물들은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을 한다. 관혼상제는 인류 보편의 몸짓이자 문화이다. 권행완(정치학박사,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2. 남양주 '프라움악기박물관'

오월의 햇살처럼 맑고 투명한 선율이 프라움악기박물관 콘서트홀을 가득 채우고 있다. 5월19일 한낮, 어린 아이들과 동행한 젊은 부부와 80대의 노신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람객들이 클래식을 감상하고 있다. 2011년 개관부터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수요 브런치 콘서트가 229회를 맞았다. 피아니스트 김도영, 플루티스트 조아라, 바이올리니스트 허은혜, 첼리스트 박민혜가 협연한 정기연주회는 앙코르로 아리랑을 연주하며 마무리되었다. 프라움악기박물관(관장 김정실)은 국내 최초로 서양악기를 테마로 개관한 전문박물관이다. 프라움(PRAUM)은 자부심을 뜻하는 프라이드와 공간을 뜻하는 독일어 라움을 결합한 이름으로 설립자의 철학이 들어 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친했다는 김정실 관장은 런던, 파리, 빈 같은 유럽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경매장을 돌며 진귀한 서양 고전 악기를 수집하고 전 세계의 이름난 박물관을 두루 탐방하며 박물관을 구상하다가 2011년 남양주시 경강로 한강변에 악기박물관을 세웠다. 고전 음악을 사랑하는 경영인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빚어낸 것이다. 4천679㎡(1,415평)부지에 연면적 2천226㎡(675평)에 중세유럽 건축양식의 박물관은 출입문부터 중후하다. 금장을 한 문에는 2016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우수박물관이라 새긴 패가 붙어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악기를 보다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서양 음악가들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다. 남한강의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전시실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만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하프의 이름은 콘서트 그랜드 더블 액션 페달 하프이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하프 등 현악기군과 오보에 클라리넷 색소폰 등 관악기군이 전시되어 있다. 족히 100년은 넘었을 것 같은 낡은 악보와 유명 음악가들의 흉상도 전시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수요 브런치 콘서트에 참석했던 관람객들이 전시된 악기들을 둘러보고 있다. 중요한 유물은 중앙을 차지하는 법이다. 파리의 명기 제작자로 유명한 장 밥티스트 비욤(1788~1875)의 메시아가 전시된 곳에 한 가족이 모여 있다. 1873년에 메시아 1716을 복제한 이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완벽한 재현품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걸작 메시아는 최고의 명기(名器)라는 의미로 제작자 비욤의 사위가 붙인 칭호인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작업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절대적 기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요. 음악회 사회를 맡았던 박춘석 학예실장의 설명이다. 박 학예실장은 박물관 개관전부터 함께 한 주역으로 악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이런 명품을 현대의 연주자들이 탐내는 까닭은 악기의 성능이 여전히 좋기 때문입니다. 진품 악기들 사이사이로 악기와 관련된 예쁜 조각과 도자기를 배치해 두어 눈을 즐겁게 한다. 아이들에게는 수억 원 하는 명기보다 이런 소품들에 눈길이 먼저 갈 것이다. 곳곳에서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1층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공간이 여러 곳이다. 인형으로 아이들에게 음악과 악기를 소개하는 공간이 특별하게 들어온다. 화려한 색과 그림으로 단장한 피아노가 가득하다. 기증을 받은 피아노에 그림을 그린 것들이다. 미술과 음악의 어울림이다. 첼로들이 걸려 있는 방도 있다. 유명 화가들이 첼로 연주를 반복해 들으며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음악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파격적인 실험도 진행하고 있다. ■악기가 진화한 현장을 보다 포르테피아노는 18~19세기 초에 사용되었던 초기의 피아노인데 모양은 하프시코드와 비슷하지만 소리는 사뭇 다르다. 피아노의 전신으로 알려진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는 이름도 처음 듣는 것이다. 현재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보존이 잘 된 악기들이다. 위대한 옛 피아노 제작가 존 브로드우드(1732~1812)의 이름을 새겨본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브로드우드사의 포르테피아노를 즐겨 사용했다니 그의 명성과 실력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명품 악기는 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외관도 최고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박 실장이 전시된 피아노를 비교하며 악기의 진화 과정을 알려준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나 운명 교향곡 같은 작품은 피아노 프르테의 발전과 관련이 깊습니다. 작은 망치로 줄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피아노 포르테는 약하게(피아노) 또는 강하게(포르테) 연주할 수 있지요. 이전의 쳄발로는 건반으로 강약을 조절할 수 없었기에 피아노 포르테가 등장하면서 밀려나게 됩니다.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은 이해할 것 같다. 박 실장의 설명처럼 악기의 진화는 음악의 진보로 이어진다. 피아노가 진화하면서 음들을 부드럽게 늘이듯 연주하는 레카토와 음들을 톡톡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처럼 새로운 연주기법이 개발된다. 피아노의 완성에 베토벤의 열정이 더해져 서양음악은 고전기를 벗어나 낭만기로 들어선다. 영국의 유명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에드워드 벤자민 브리튼(1913~1976)이 1961년까지 소유했던 그랜드 포르테 피아노는 1808년에 제작된 것이다.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브리튼은 심플 심포니와 오페라 빌리버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작품을 남겼다. 1897년에 스타인웨이사에서 만든 6피트 그랜드피아노는 상감으로 장식된 화려한 꽃무늬가 일품이다. 100년도 더 된 이런 악기들이 지금도 연주하기에 좋은 소리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전시장 한쪽, 유리벽 너머는 악기를 직접 연주하고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체험 공간으로 관람객들에게 개방돼 있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한 여자아이가 조립한 바이올린에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고 또래의 남자아이는 옆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1층에는 봄이오면 바위고개를 작곡한 이흥렬(1909~1980) 선생의 음악사 및 친필 악보와 기증 피아노를 볼 수 있는 특별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시민에게 다가가는 박물관 매주 열리는 수요브런치 콘서트는 230회를 맞게 된다. 수요일에 찾아 전시관을 둘러보고 음악회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110회를 맞이하는 프라움 토요콘서트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저녁 8시에 진행된다고 한다. 2021년 프로그램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은 회복과 문화예술을 테마로 전문 강사와 연주자를 초청하여 7월 1일 11월 30일까지 매주 목요일 11시부터 13시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소주제는 문화와 박물관 미술관 문화와 음악 문화와 실학 문화와 클래식 음악 문화와 대중 음악 북유럽 문화와 휘게이다. 경기도 문화의 날, 경기도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사업인 특별 기획전도 준비 중이다. 프라움 악기박물관의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니 방문 전에 전화로 문의하는 것이 안전하다. 박춘석 실장은 대화 속에서 정성과 감동 그리고 감사라는 단어를 자주 반복한다. 실재 콘서트를 진행하고 인형극을 진행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의자까지 정리하는 1인 5역을 감당하고 있지만 표정이 무척 밝다. 좋아하는 음악, 악기를 알리기 위해 정성을 쏟는 모습이 아름답다. 남양주에는 수준 높은 박물관이 여럿이다. 프라움악기박물관 가까이에도 남양주시립박물관과 실학박물관, 미호박물관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우석헌자연사박물관, 서호미술관이 있다. 박물관을 나와 강변을 산책하다가 담헌 홍대용(1731~1783)을 떠올렸다. 담헌이 공부한 석실서원 터가 박물관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석실마을에 있다. 북경 천주당을 찾은 담헌은 즉석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서양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던 실학자이다. 담헌은 바흐, 하이든과 동시대 인물이다. 이처럼 동서양은 음악으로 이미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배를 채웠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강변을 달려보는 것도 좋겠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1. 화성시역사박물관

하늘 같은 큰 길이 서울에 이어져/ 별처럼 늘어놓은 400개의 고을에/ 온갖 것들 무성하게 모두 다 모여 있네. 1831에 펴낸 화성지에 실린 한시를 통해 화성(華城)을 풍요의 고을로 만들어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실현하겠다는 정조(1752~1800)의 꿈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다와 내륙을 아우르는 풍요의 땅 화성은 삼국통일기와 남북국시대에는 국제 무역항 당성을 통해 선진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봉림사 등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바다와 삼남의 길목에 위치하여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였던 화성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역사까지 성장과 번영, 효와 애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화성시의 문화유산과 역사를 알리기 위해 2011년에 문을 연 화성시 향토박물관은 개관 10년을 맞은 2020년 3월에 화성시 역사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화성시의 성장과 보조를 맞추며 진화하고 있는 화성시역사박물관은 볼거리와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다. ■시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는 박물관 박물관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이정일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본다. 상설전시실은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화성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역사문화실과 농촌과 어촌의 다양한 민속자료로 보여주는 생활문화실, 기록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해보는 기록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 화성의 역사를 훑어본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던 화성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당성과 매홀로, 고려시대에는 당성군과 수주라는 이름을 갖는다. 조선 초에 남양도호부, 수원도호부 설치했던 이곳은 정조 17년(1793)에 화성유수부로 승격된다. 조선말에 남양군, 수원군으로 개편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으로 통합되고, 1949년에 화성군으로 개편되고 수원읍은 시로 승격되면서 분리한다. 화성군은 2001년에 시로 승격되었는데 2021년 현재 인구 86만의 대도회로 성장했다. 2017년부터 4년 연속 전국 226개 시군구 중 종합경쟁력 1위를 달리고 있는 화성시는 평균 연령이 37.4세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젊고 출산율과 인구증가율도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화성시의 얼굴은 여럿이다. 어촌마을과 농촌마을은 물론 첨단산업시설과 동탄 신도시까지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실에서 낯선 풍경과 만난다. 책상 너비만 한 작은 공간에 여러면석기(구석기)와 가락바퀴(신석기), 반달돌칼(청동기), 간돌검(초기 철기), 철화청자모란무늬병(고려), 청화백자대접과 유리주전자(일제강점기)가 모여 있다! 이 학예사가 웃으며 이 독특한 공간을 꾸미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화성의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실 화성은 마한을 비롯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유물이 다 나오는 특별한 지역이다. 생활문화로 봤을 때는 바다와 내륙과 산지를 아우르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 문화적 특징을 드러내는 상징하는 것으로 구성했다. 저 유리주전자는 매송면 들목조씨 문중에서 제사 때 사용하던 것인데 근현대시기 유리재질의 생활용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요즘 보기 드문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온돌문화를 발안리 유적을 바탕으로 주거모형(한성백제시기, 원삼국시대)과 토기시루편(삼국시대), 무문토기(청동기시대)를 모형으로 전시한 방식이 신선하다. 기안동의 제철유적과 중국과 교류했던 당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통해 1500년 전 번영했던 화성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것도 참신하다.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뱃속에 들어 있던 복장유물을 입체적으로 전시한 방식은 더욱 눈길을 끈다. 불상 안에 작은 불경을 넣었던 옛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장안면 독정리에서 발굴되었다는 명기(明器)를 살펴본다. 살아생전에 사용했을 거울과 구슬, 묘지석과 함께 묻혀 있다 출토된 갖가지 동물 모형의 토우들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 화성시 안녕동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융릉과 건릉이 있지만 현재 유감스럽게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없다. 이런 안타까움을 풀어주려는 뜻인지 모형으로 만든 융릉과 건릉의 석물을 세워두었다. 책이나 문서가 가득한 기록문화실은 어른들에게도 별 재미가 없는 공간이다. 스쳐 지나치면 낡은 책과 종이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초계문신들의 시험답안지 시권에서 안경을 쓴 학자 군주 정조의 모습이 겹쳐진다. 1790년(정조14) 장용대장이 훈련원정을 지낸 김의를 장용영 초관으로 임명하는 차접(差帖:사령장)도 흥미로운 문서다. 장용영은 한양의 내영과 화성 유수부의 외영으로 운영되었는데, 정조는 내영보다 외영을 강화한다. 이때 정조는 외영의 핵심 지휘관인 초관을 김의를 비롯해 화성 출신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화성 축성에도 참여했던 김의는 정조 20년(1796)에 장용외영 친군위별장으로 진급했을 정도로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794년(정조18) 차도항에게 어진봉안각 위장으로 임명하는 고신(告身:사령장)도 눈여겨볼 유물이다. 천하명당 화산에 아버지를 모신 정조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현륭원 정자각에 걸어두었다. 초상으로나마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섬기고자 하는 정조의 효심이 담긴 유물이다. 미완성의 초상화의 주인공은 신이복(1698~1786)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참관을 역임하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던 문인이다. 초상을 그릴 때 밑그림으로 사용한 유지초본을 살펴보면 초상화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생활문화실에 들어서면 화성이 풍요로운 고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서쪽의 해안과 동쪽의 내륙으로 이어진 화성시는 바다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어촌과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농촌이 공존하는 고장이기에 다양하고 흥미로운 생활유물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 솔뿌리로 정교하게 만든 바구니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아주 특별한 유물이다. 동탄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사라진 왕배산 산신제에 사용된 제기와 현장을 기록한 사진에서 민간에서 전승된 무속신앙이 불과 20~30년 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도 뜻밖이다. ■화성시 역사박물관 어린이체험실 도시가 젊기 때문에 아이들도 많다. 어린이체험실은 우리 아이들이 유물을 보고 만지면서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역사를 익히는 공간이다. 당성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 조각을 만져보고, 한성 백제 토기와 민무늬 토기 조각을 맞춰보며 천연 색실로 실을 꼬아볼 수 있다. 백제 사람들처럼 반달돌칼과 갈돌로 곡물을 수확하는 체험도 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랑이를 잡았던 고려시대의 효자 최루백과 정조임금을 어린이체험실에서 다시 만난다. 능화문 문양 찍기, 기와 쌓기, 융릉 석물 찾기, 옛 집 이야기가 있고, 조선시대에 24번이나 포도대장을 지낸 김영처럼 활쏘기를 연습할 수도 있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현재 기획전시실에서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시 요리 금동관 다시 깨어나다가 열리고 있다. 경기도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깊은 주목을 받은 요리 금동관은 경주나 공주에서 발견된 금관 못지않게 우아하고 아름답다. 전시는 세상에 나오다(1부), 시간의 때를 벗기다(2부), 다시 깨어나다(3부), 비밀을 풀다(4부)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관이 화성에서 왜 발견되었는지 비밀을 풀 수 있는 역사 정보와 금동신발, 허리띠꾸미개 등 백제의 화려하고 정교한 금속공예품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달 23일까지 열리니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잊지 말고 찾아보자. 어린이 체험프로그램이 풍성한 화성시역사박물관은 어른들에게도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곳이다. 이경석 연구원(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10.남양주시립박물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와부읍 팔당로 121번지에 남양주시립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경의중앙선 팔당역 바로 옆이다. 예봉산을 등진 박물관은 강 너머 검단산을 마주하고 있다. 두 산 사이로 한강이 흐른다. 박물관 1층 상설전시실 바닥에 고지도가 펼쳐져 있다. 지도의 중앙에 두미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맞습니다. 다산 선생이 한양으로 가는 배 안에서 서학에 대해 처음 들었다고 한 곳이지요. 여기가 바로 우리 박물관이 있는 곳입니다. 김형섭 학예연구사는 지도에서 박물관의 위치를 짚어준다. 남양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남양주에 건설한 신도시 이름도 다산이 아닌가! 정약용 자신은 열수(洌水)라는 호를 즐겨 썼는데, 열수는 정약용의 고향 능내리(두릉) 앞을 흐르는 한강을 가리킨다. 정약용과 쌍벽을 이루는 실학자 풍석 서유구(1764~1845)도 능내리에서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동국세시기를 지은 홍석모는 두 선배 학자를 이렇게 칭송했다. 다산이 꿈꾼 사업은 책상자에 남았는데/ 풍석의 빼어난 문장은 경제 연구로 깊어 가네./오늘날 두릉 강변은 명사들의 세상/문성(文星)이 모여 있다 다투어 말하네. ■남양주시, 학문의 전통을 잇다 실학의 고장 남양주의 학문적 전통은 그 뿌리 깊다. 박물관에는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겸제 정선이 1741년에 그린 경교명승첩 4폭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장이 석실서원을 그린 것이다. 병자호란 때 가노라 삼각산아라는 시조로 유명한 척화파의 우두머리 청음 김상헌을 배향한 석실서원은 진경문화의 산실이자 북학파를 이끌었던 담헌 홍대용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개혁으로 꼽히는 대동법을 확산시킨 잠곡 김육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남양주시는 개혁과 실학, 진경산수화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곳이다. 한국 최고의 한학자를 배출한 지곡서당이 남양주에 있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헌신한 인물들을 만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박물관을 찾아 홍대용, 정약용, 서유구의 정신을 배우면 좋겠다. 남양주시립박물관은 남양주시가 학문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남양주시의 시정목표도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사 오는 도시를 건설할 것이다. 좋은 교육 환경을 조성하고 성인들에게도 평생교육사업 등 인생2모작 프로그램을 맞춤으로 제공한다는 시정 방침은 남양주의 교육 전통과 잘 어울리는 정책이다. ■왕실문화와 서민문화가 어우러지다 1층은 역사문화실이 있고, 금석문실이 있는 2층은 현재 새롭게 단장 중이다. 남양주의 역사와 생활상을 재구성한 역사문화실은 상설전시실이다. 주제를 남양주의 길을 묻다, 남양주에 들어서서, 남양주 역사 한눈에 보기, 선사시대 이야기, 왕실과 학문의 고장, 생활이야기로 구성하여 남양주를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남양주에서 선사시대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까만 돌조각이 눈길을 주자 안내하던 김 학예연구사가 손가락보다 작은 돌조각 속에 담긴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들려준다. 용암이 굳어진 흑요석 좀돌날입니다. 주변에 화산이 없는데 저런 흑요석이 이곳에서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한반도에 정착한 인류는 석기시대에 이미 백두산을 비롯한 먼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것이지요. 조안면 능내리를 비롯해 남양주시 전역에서 발굴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다양한 유물이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남양주에도 조선시대의 역사가 가장 풍성하다. 네모난 백자에 청색 글씨가 가득 새겨진 지석 한 개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김상헌의 지석이다. 설명문에 김상헌이 억강부약(抑强扶弱: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사람은 도와주는 것)의 선비상을 확립했다는 설명문이 눈길을 끈다. 봉선사, 흥국사,봉영사 같은 왕실사찰이 있었던 남양주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릉도 여러 기가 있다. 특히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가 잠들어 있는 광릉(光陵)과 대한제국을 연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묻힌 홍릉(洪陵)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광릉과 홍릉의 모형을 비교해보니 그 차이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전시관 한 켠에 두 사람이 얼음을 깨고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는 모형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두미협관어란 시를 바탕으로 한강에서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남양주에는 곳곳에 다산의 숨결이 살아 있다. 남양주에 퇴계원산대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산대놀이의 흥겨운 풍경이 연상되는 모형을 보며 왕실과 사대부에 가려진 남양주의 서민문화를 생각해 본다. 금류동천이란 커다란 글씨가 한 벽을 채우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수락산 금류폭포 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을 같은 크기로 재현한 것인데 남양주에 풍부한 금석문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고, 왕들의 무덤이 많은 까닭에 남양주시 곳곳에서 조선 최고의 글씨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석물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은 조선의 선비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금석문을 알리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금석문 배우기, 시간 여행, 남양주의 금석문을 찾아서, 금석문 체험하기 등이다.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을 위한 상설 프로그램으로 우리 고장 지도 만들기, 건식탁본체험, 남양주 문양찍기, 전통문양 모래그림 액자만들기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남양주 역사문화 아카데미도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남양주 역사학교는 특히 호응이 좋다. 스스로 탐구하고 해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남양주역사를 알리고, 교육에 참가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린이 학예연구사로 활동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료한 학생 중 희망자에게 전시 해설, 박물관교육 진행 지원 등 어린이 학예연구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는 특별한 선물이다. 남양주는 한강을 경계로 백제와 인접하고 있었기에 백제의 선진문화를 일찍 누렸던 곳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왕실과 양반사대부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남양주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상업이 발달한 교통의 요충으로 1908년에는 연합의병부대였던 전국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격을 계획했을 때 집결지였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아우 이회영, 이시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길러낸 이석영(1855~1934) 선생은 남양주의 자랑이다. 남양주시립박물관은 남양주의 역사적 인물 발굴과 선양에 정성을 쏟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남양주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이 교육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야외 마당에는 남양주의 다양한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남양주시립박물관이 2017년도에 이어 2019년에도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제 우수인증기관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은 박물관의 기획력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남양주의 풍부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잘 정리하고 시민들에게 제공하려면 정책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40년 남짓한 남양주시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빠른 성장과 변동으로 지역의 소중한 유산들이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처럼 늦은 것이 때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시가 나서서 지역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유물을 적극 구입하고 시민들로부터 기증을 권장하는 사업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김형섭 학예연구사는 전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꼭 과거의 유물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도 훗날에는 소중한 역사가 될 것이니까요. 시민들과 역사를 만들어 가는 박물관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9. 용인시박물관

용인시박물관은 110만의 인구를 가진 용인시의 유일한 시립박물관이다. 용인시박물관의 역사가 겨우 10년 남짓하다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장 용인시박물관을 찾아보라. 특례시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용인시가 문화유산이 풍부한 역사도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96년에 시로 승격되고 겨우 10년이 지난 2005년에 처인, 기흥, 수지 3개의 구청이 동시에 들어설 만큼 용인은 수도권 남부의 핵심도시로 급성장한다. 용인시박물관은 용인시의 급성장과 맞물려 있다. 용인동백지구를 개발하면서 구석기문화유적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용인문화유적전시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09년 12월에 용인문화유적전시관을 개관한 것이다. 이때 연 기획전이 사진으로 본 동백의 시간과 공간(2019)이다. 개발시대를 증언하는 것으로 사진만한 것이 달리 있을까. 문화유적전시관은 개관 10주년이 되는 2018년 2월에 용인시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단장한다. 용인시박물관이란 이름을 가진 세월이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박물관 곳곳에서 시립박물관이란 이름값을 다하려 고민한 관계자들의 역력한 흔적을 발견한다. ■충절과 개혁, 실학정신이 깃든 용인의 선비문화 재개관에 맞추어 기획한 돌에 새긴 사대부의 정신은 사대부들의 삶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시이다.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은 흑백의 탁본으로 사방이 채워져 있다. 용인이씨, 연안이씨, 한양조씨, 해주오씨, 우봉이씨 등 용인과 인연을 맺은 주요 가문의 묘비 탁본과 40여 점의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먹 자국이 선명한 이숭인의 묘비를 살피다가 그가 정몽주와 이색을 길어낸 대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여태 그를 몰랐다니! 용인시 향토문화제 제3호 대낭장비의 주인공은 삼학사로 유명한 오달제이다. 청나라 황제와 맞서다 죽임을 당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까닭에 오달제의 무덤에는 평소 허리에 찼던 띠[대]와 주머니[낭장]만 묻혀있다. 대제학을 지내고 말년에 용인 한천동에 살았던 도암 이재의 묘갈도 눈여겨볼 일이다. 수백 명의 쟁쟁한 제자를 거느렸던 그를 임금인 영조가 질투했다는 재미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주말에 박물관을 찾아 아이들과 종이와 색연필을 이용한 건식탁본을 체험해 보면 좋을 것이다.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란 말이 있듯이 용인은 옛날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다. 고려의 대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 유교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정암 조광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은 명재상 약천 남구만을 비롯한 명사들의 묘소가 즐비하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용인이 실학 정신이 깃든 고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계수록을 지은 실학의 비조 유형원의 묘소가 있고, 한글 연구서 언문지의 저자 유희와 태교신기를 지은 그의 어머니 이사주당을 비롯한 유명 실학자들이 살았다.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의 대장 살리타이를 사살한 김윤휴와 처인성이 있는 고장이다. 처인성에서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와와 그릇 등 다양한 생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을 박물관에서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학예사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용인에서 발굴된 문화재의 대부분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공주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속히 찾아와야 할 것이다. 유물은 제자리에 놓일 때 더욱 빛나는 법이다. ■용인의 과거와 현재, 장래를 꿈꾸다 용인시는 시 승격 25년 만에 110만 인구를 가진 특례시가 되었다. 용인시박물관이 짊어지고 풀어가야 할 사명과 역할이 크게 늘어났다. 용인시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잘 갈무리하여 용인을 역사문화의 도시로 가꾸어 나갈 책임을 박물관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 길이 멀고 급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지난 시간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장래를 설계해야 한다. 용인문화유적전시관을 개관하며 연 기획전이 포은 정몽주-이념과 실천의 합일(2010)이다. 이어 박물관은 용인서리상반-고려백자전(2011)과 기증 받은 유물을 중심으로 고려도기전(2015)을 열었다. 용인과 고려백자의 조합은 어쩐지 낯설다. 그러나 박물관 전시관을 둘러보며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니 이내 의문이 풀린다. 수준급의 다양한 도자기를 전시실에서 만나고 용인 곳곳에 가마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용인과 도자기는 여전히 잘 연결되지 않는다. 김경희 박물관운영팀장이나 소지현 학예연구사도 이런 사실이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다. 용인이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를 생산한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요.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일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120조가 투입되는 용인반도체클러스터가 올 하반기에 첫 삽을 뜨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용인이 전통시대의 첨단산업인 도자기의 주요 산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뉴스이다. 2012년에 장시의 발달 2013년에 전통시장, 용인에 서다를 잇달아 기획한 데서 짐작하듯이 용인시는 무려 여덟 개의 도시에 둘러싸인 지리적 요충지이다. 동쪽은 이천시, 남쪽은 안성시, 남서쪽은 평택시, 서쪽은 수원시와 화성시, 북서쪽은 성남시와 시흥시, 북쪽은 광주시가 맞닿아 있다. 상설전시실은 용인시가 첨단과 전통이 조화를 이룬 도시라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 그렇다면 용인이란 지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2014년의 기획전 조선 태종14년, 용인이 되다는 지명에 얽힌 역사를 조명하면서 용인시의 정체성을 짚어본 기획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1413년에 용구현과 처인현이 서로 합쳐져서 용인현이 되었다는 사실을 도표로 확인한다. 박물관은 용인의 인물 발굴에 정성을 들였다. 특히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용인의 독립운동(2017), 전통을 잇는 사람들(2018), 100년 전 용인, 그날의 함성(2019)을 통해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인물을 발굴하여 뜻을 기리는 사업을 펼쳐왔다. 상설전시실은 선사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1전시실),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2전시실) 용인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할미산성, 고려백자요지, 서봉사지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롯해 용인의 주요 세거성씨 가문의 자료와 일제강점기 사진, 대도시로 성장한 용인의 현대까지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마당에 조성된 야외전시물도 빠트리지 말고 살펴봐야할 것이다. 수백 수천 년 긴 세월을 땅속에 간직했던 용인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은 초등학생들에게 문화도시 용인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21년 용인시박물관 학교연계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프로그램은 박물관의 전시자료를 활용해 지도로 떠나는 용인 역사탐험과 구석구석 용인 옛 고을이다. 온라인과 학교를 직접 찾아가는 오프라인을 병행해 10월까지 운영하는데, 사전에 모집된 초등 3~6학년 49개 학급 1천3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100년 뒤를 내다보며 큰 밑그림을 그려야 할 때 박물관 곳곳에서 용인시의 정체성을 담고 역사와 문화를 전달하기 위한 수고와 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도시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문화유산을 살뜰하게 챙길 여유와 시간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정책적 뒷받침이 부족해 보인다.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의 스승 도선국사(827~898)가 용인 땅을 가리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알을 깨고 부활할 병아리는 금계(金鷄)로 성장할 것인데, 용인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가 금계를 키우는 둥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이는 지금 용인시가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특례시로 성장한 110만의 도시에 걸맞은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그 중심에 용인시박물관을 두어야 할 것이다. 100년 앞을 내다보며 큰 밑그림을 그리는 정책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8. 수원박물관

선정비로 즐비한 언덕을 오르다가 1892년에 세워진 김홍집(1842~1896)의 선정비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했던 김홍집은 이후 개혁의 중심에 선다. 관찰사를 역임하고 수원유수로 재직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전주류씨 효자정문은 1812년에 제작된 것으로 수원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곁에 애국지사 필동 임면수 선생의 묘비석이 서 있다. 수원출신인 선생은 인재 육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삼일학교를 설립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한 지사였다. 고인돌과 장독대가 조성되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원박물관은 전망도 좋고 야외전시물이 풍부하다. ■ 수원박물관, 인문학의 숲을 가꾸다 수원박물관을 둘러보면서 푸른 잎이 무성하고 줄기가 우람한 버드나무를 떠올렸다. 수원시는 인문학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마다 도서관이 있고, 박물관도 셋이나 된다. 고인돌부터 문이 달린 삼성 TV를 볼 수 있는 수원박물관, 정조의 개혁정신을 알려주는 화성박물관, 신도시에 세워진 광교박물관을 통해 수원이 역사와 문화적 자산이 풍부한 도시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 120만의 시민들에게 인문학의 맛을 즐기게 하려는 정책이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도서관을 인문학의 가지와 잎에 비유한다면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 해당하는 기관이 박물관이다. 수원박물관은 2008년 개관했을 때부터 시민밀착형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관람객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 전시하고 있는 서풍만리(書風萬里)는 우리 박물관의 자랑이에요. 순순하게 우리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만으로 조선 500년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는 기획전을 연 것입니다. 우리 박물관의 저력이 이 전시회로 증명이 된 것이지요. 지난해 코로나19로 힘들었을 때 우리 박물관이 야심 차게 기획한 집콕박물관이 히트를 쳤습니다. 박물관 홈페이지와 수원시 홈페이지를 구독한 횟수가 1만회 이상입니다. 하하, 또 있습니다. 수원박물관이 2017~2018년 발굴하여 2019년 신청한 독립유공자 아홉 분이 2020년 광복 75주년을 맞아 정부 포상을 받았습니다. 모두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분들입니다. 우리 박물관은 항일운동을 펼쳤으나 잊힌 유공자들을 발굴하는 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습니다. 이민식 학예팀장과 이동근 학예연구사를 통해 수원박물관이 거둔 성과와 근황을 들으면서 수원 천변을 묵묵히 지키는 버드나무를 떠올렸다. 수원박물관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큰 상을 받았다. 2019년 공립박물관 평가인증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것이다. 특히 전시 개최교육 프로그램 실시 실적은 전국 227개 공립박물관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인증평가가 처음 실시된 2017년도에 전시 기획력과 유물 관리 부분 등에서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은 높은 평가를 받아 2회 연속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수원박물관은 수원역사관과 한국서예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원의 역사와 문화를 수원의 자연환경, 선사역사시대의 변천사, 수원로의 개설, 60년대 수원만나기, 근대 수원의 문화로 구분하여 역동적인 도시 수원의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한국서예관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최초로 건립한 서예전문박물관이다. 2003년에 저명한 서예가 근당 양택동 선생으로부터 기증받은 유물을 계기로 건립되었다. 수원의 변화상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근현대의 역사가 재미있다. 수원시 승격 6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어제가 꿈꾸는 내일, 나는 나혜석이다, 사운 이종학 특별기획전-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옛 수원 사진전(1900~1960)-렌즈 속, 엇갈린 시선들, 옛 수원 사진전(1970~1980년대) 약진수원, 갑신정변 130주년 기념-새로운 세상을 꿈꾼 젊은 그들, 수원,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 다양한 삶의 교차점, 수원역, 3.1운동 100주년 기념 테마전-수원 여성의 독립운동, 수원시 승격 7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사람중심 더 큰 수원 역시 수원의 근현대사를 주제로 한 것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수원의 근현대를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1980년까지 30만에 불과했던 인구는 불과 40년 만에 120만 거대도시로 성장한다. 기획전에서 열린 도시 수원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고민을 느낄 수 있다. ■ 전통첨단이 공존하는 세계 속의 문화도시인 수원시 수원지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박물관 앞에서 선사시대의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수원은 고려시대부터 효원의 도시로 인식된다. 오륜행실도에는 아버지를 물고 간 호랑이를 찾아내 죽이고 부친의 시신을 장사지낸 효자 최루백의 일화가 실려 있다. 고려사열전에 이름이 실린 최루백은 애처가이기도 했다. 믿음으로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는 못하리라.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일 애통하고 또 애통하도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염경애를 그리며 지은 묘지명의 한 부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으로 화성을 건설한 정조와 최루백은 수원을 효원의 도시로 알려낸 주인공이다. 기와 한 조각에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읽어내는 것이 역사의 묘미다. 창성사지에서 발굴된 수키와 한 점이 그것이다.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팔달문동종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1080년에 제작된 이 고려시대의 동종은 처음에는 만의사에서 불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다가 화성이 건설되면서 절을 나와 종로에 설치되어 소리로 하루의 시작과 마감을 알려주다가 소임을 다하고 팔달문에서 보관하다가 2008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수원의 토박이 성씨로 탐진최씨, 여주이씨, 남원윤씨, 온양정씨, 상주박씨 등의 여러 종중에서 기증한 유물도 전시되고 있다. 관속에 넣었던 청동수저와 조선통보, 명기라 불리는 작은 그릇들이 눈길을 끈다. 가족들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박유명 초상화도 눈여겨볼 유물이다. 범을 수놓은 흉배를 보니 무관 당하관에 불과하지만 표정이 당당하고 눈매가 범상치 않다. 수원은 농업도시였다. 200년 전 수원에서 국영농장인 둔전을 경영했다. 선진농업의 전통은 현대로 이어져 서둔동에 권업모범장과 농업학교가 설치되고, 해방 후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들어선다. 박물관은 식량난을 해결한 통일벼가 수원에서 개발되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려준다. 1960년대 수원 시가를 재현한 공간에 들어서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아이들이 신기해하고 중년 관람객은 추억에 잠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상영되는 중앙극장을 비롯해 재봉틀과 정장이 걸려 있는 예쁘다 양장점, 인간 저울로 불리던 천덕구가 쌀가마니를 옮기고 있는 미곡상이 등장한다. 다방에서는 대한뉴스에 소개된 수원 풍경과 수원과 관련 있는 노래를 들려준다. 중앙에 설치된 공중전화의 힘을 빌리면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상점들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잠시 사진관에 들러 그때 그 시절의 옷을 입고 옛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좋다. 손님을 부르고 가격을 흥정하는 상인의 목소리가 활달하다. 닭 우는소리로 시작되는 장터의 하루를 새벽부터 낮, 밤의 느낌까지 연출하여 그 시절로 빠져들게 한다. 수원박물관은 오래전부터 독립운동가 발굴과 선양에 정성을 쏟았다.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2009년 대통령표창)와 열아홉의 나이에 비밀결사운동을 주도하다가 순국한 이선경(2010년 애국장), 이선경과 함께 구국민단에서 비밀결사운동을 벌인 최문순(2018년 대통령표창)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발굴하여 표창을 이끌어낸 일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오는 30일에 개관하는 수원 산누리의 독립영웅들도 이 사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신록이 눈부신 계절이다. 수원박물관 마당에서 봄의 기운을 한껏 들이킨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7.과천 ‘아해박물관’

아이들은 추운 겨울에도 집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동무들과 어울려 제기를 차고, 팽이를 돌리고 언덕에 올라 연을 날렸다. 햇볕 좋은 봄날이면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골목에서 벽돌치기를 하고 사방치기를 하며 뛰어노느라 해가 저무는 줄 몰랐다. 요즘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실려 가고, 쉬는 시간이면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놀이가 사라지고 골목을 가득 채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코로나19로 뛰노는 아이를 만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아이들의 웃음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 아이들은 놀면서 자란다 놀이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곳이 있다. 과천시 주암동에 위치한 아해박물관(아해한국전통문화어린이박물관, 관장 문미옥)이 그곳이다. 아해박물관은 PC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아이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놀았는지 알려주고 옛날처럼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여대 아동학과 교수인 문 관장이 사재를 털어 세운 이 박물관은 조상들의 슬기를 엿보고 체험할 수 있는 전통 놀잇감 유물들로 가득하다. 피아제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문 교수가 선진교육 이론을 배우기 위해 국제행사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전통놀이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깨달은 것은 외국이론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종주국의 학자들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과 전통놀이가 아동교육에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외국의 유명 아동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들에게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장난감을 보여주지 못해 자존심이 상했던 그는 이때부터 전통 놀잇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88올림픽이 열리던 그해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전통 놀잇감은 연구실을 채우고 집안에도 쌓여갔다. 아이들에게 놀이의 즐거움과 낭만을 돌려주고 싶었던 문 교수는 부친이 물려주신 땅에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제대로 된 놀이는 창의성과 과학성, 예술성을 기르는 높은 수준의 공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박물관은 전시관(997㎡)과 어린이 체험장으로 사용하는 임야(1만2천여㎡)로 구성돼 있다. 아이의 옛말인 아해는 세종대왕이 1449년에 한글로 펴낸 석보상절에 처음 기록되었다고 하니 이 말은 훨씬 오래전부터 쓰였을 것이다. 박물관 건물에도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사람과 자연의 합일과 소통을 강조하는 한국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한국적 조형미를 살린 박물관의 너른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싱그러운 숲의 기운이 실려 있다. ■ 놀잇감에서 발견하는 옛사람들의 지혜 1층 상설전시관에는 우리나라 전통놀이감과 어린이 공부를 위해 사용되었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태교 관련 서적과 태항아리 같은 유물을 비롯하여 다양한 옛날의 놀잇감을 계절, 연령, 소재별로 전시하고 있다. 놀잇감도 방안놀이, 마당놀이, 하늘놀이, 흙놀이, 물놀이, 불놀이, 들판놀이, 지혜놀이, 셈놀이, 서당놀이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중앙에 있는 작은 서당은 선비들이 익혔던 육예(六禮)를 거문고와 활, 등자, 책 같은 소품을 순서대로 놓아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절(禮), 음악(樂), 활쏘기(射), 수레몰기(御), 책읽기(書), 셈하기(數)를 말하는 육예를 통해 전인교육을 추구했던 옛사람들의 교육정신을 엿볼 수 있다. 숫자가 적혀진 삼각형 팽이는 어디에 쓰이는 물건일까. 팽이를 돌려나온 수와 규칙에 따라 관직에 입문해 영의정에 먼저 도달하는 겨루기는 승경도, 금강산이나 박연폭포 등 조선 팔도의 명승지 돌아보면 놀았던 승람도가 있다. 승경도와 승람도에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이 장래를 꿈꾸고, 팔도지리를 익혔던 옛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아이의 허리통만한 장기알도 있고, 이순신 장군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전선의 우리 군사들만 알아보도록 문양으로 명령을 전달했던 연이 있고, 연을 날릴 때 사용했던 여러 가지의 얼레도 있다. 전시실 맨 끝에는 근대 놀이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37년에 펴낸 잡지 어린이가 있다. 표지가 헤진 낡은 이 잡지를 보면서 어린이를 한울님 같이 생각하라고 가르친 해월 최시형 선생의 고귀한 가르침을 떠올린 것은 아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상이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상이라는 사실이다. 출구 앞에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이 아이들을 위해 지은 격몽요결이 적혀 있다. 볼 때는 반드시 바르고 밝게 보며, 들을 때는 반드시 귀를 열어 정확하게 듣고, 용모는 반드시 공손하게 하며, 의심나는 것은 반드시 물어볼 것을 생각해 보자. 2층과 3층에는 아늑한 교육실과 널찍한 체험실이 있다. 숲에 가면 이보다 더 큰 전시관이 또 있다. 오픈수장고형 전시관인 한라백두 놀이마당과 콩쥐네 집에는 옛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희귀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매년 특별전시도 열고 있다. 꼰, 꼬니, 고누-삶을 놀이하다(2016) 공룡시대 도토리 팽이에서 자이로 팽이까지(2017) 그림 속 우리 놀이 미래를 열다(2018) 옛날 옛적 우리놀이, 미래를 여는 녹색놀이(2019) 나무흙돌풀로 하는 우리 놀이와 생활展(2020)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2021년 길 위의 인문학 사업으로 전통놀이 속 인문학 산책을 진행하는데 다섯 가지의 소주제부터 살펴보자. 팽이, 도토리에서 자이로까지!, 제기, 손으로 발로! 공기, 던지고 잡고!, 아해승람도, 조선을 담다!, 아해승경도, 미래를 열다! ■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아해숲을 살리자 박물관이 머리라면 아해숲은 몸통과 손발인 셈이다. 이곳에서 고구마 감자 구워먹기, 칡공 만들기 같은 놀이를 벌인다. 참나무와 소나무 아래로 진달래와 철쭉이 꽃을 피운다. 가끔 꿩이 날아오르는 숲에는 방울꽃과 제비꽃도 꽃을 피우고, 하늘소와 풍뎅이가 어울려 살고 있다. 숲에 난 길 이름도 예쁘다. 소나무길, 밤나무길, 상수리길, 왕벚나무 꼬부랑길, 살금슬금 길이다. 아이들이 이 길을 따라 나무와 풀꽃들을 살피며 산책을 한다. 황토길, 낙엽길, 나무다리길, 굽은 길도 있다. 계절에 따라 놀이를 하고 풀과 곤충을 관찰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치는 길이다. 계단마당, 언덕마당, 다람쥐마당, 하늘길 마당까지 4개의 놀이마당에서 투호놀이, 칡 공 만들기, 팽이치기처럼 전시장에서 보았던 전통놀이를 체험하기도 한다. 숲 곳곳에는 놀잇감 유물을 배치하여 어린이들이 그 놀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이런 정성을 쏟은 덕분에 2012년에는 창의체험 프로그램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매년 6만여명이 찾는 아해숲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016년 박물관과 숲 체험장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주암동 일대 92만9천여㎡에 공공주택 5천249세대를 건립하는 뉴스데이 개발사업에 박물관 부지를 강제 수용하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문 관장과 박물관 관계자들은 이 결정을 철회하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LH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보상비를 받아 다른 장소에 박물관을 세우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전통 놀이문화를 체험토록 하여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보다 더 큰 공익사업이 또 있을까. 정부가 세금으로 조성해야 할 체험숲을 지원은 못할망정 오히려 없애려 한다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LH가 박물관 임야에 근린공원을 조성할 계획을 밝혔다는 사실이다. 일은 순리대로 풀어야 한다. 공공사업을 수행한다면서 공공정신에 반하는 관료들의 행정편의주의와 강압적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부 당국은 전통놀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과 꿈을 찾아주는 문 관장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전통놀이를 통해 공익사업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숲을 갈아엎고 주택 단지를 짓겠다고 강변하니 기가 막힙니다. 숲체험장과 박물관은 유기적으로 기능 하는데 숲을 없애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반드시 숲을 살려야 합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6. 부천활박물관

부천에 활박물관이 세워진 까닭이 궁금하시죠? 부천은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활을 만드는 기술이 전수되었던 고장입니다. 장인을 홀대했던 한국의 풍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지요. 최선희 문화해설사의 이야기가 귀에 솔깃하다. 박물관 운영의 실무를 책임지는 최유리 학예사도 동행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시실 입구에 커다란 사진 앞에 멈춰 섰다. 부천활박물관 설립의 주역 세 분이 활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담긴 기록사진입니다. 왼편에 있는 분이 1971년에 초대 궁시장 보유자로 지정되신 김장환(1909~1984) 선생님이고, 가운데 있는 분은 아드님인 김기흥 선생님, 오른편에 있는 분이 제자 김박영(1933~2011) 선생님인데,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활박물관 명예관장을 지내셨지요 흑백사진 속의 세 사람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한국 활의 자존심을 지키며 전통을 계승한 이들의 공로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 할아버지로부터 손자로 이어진 경기 활의 전통을 예천 사람이 잇다 할아버지가 활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활과 인연을 맺었던 김장환은 집안 대대로 한 사람씩 반드시 활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도록 하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70평생 가업을 이으며 당대 최고의 궁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대한궁도협회 사범과 이사를 지내며 국궁을 대중화하는 데 힘을 쏟았고, 대한궁술연구원을 열어 우리 활의 역사를 연구하기도 했다. 2004년에 그의 차남 고 김기흥이 시에 선친의 유품 240여점을 기증하여 부천활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연면적 531㎡의 박물관은 전시실과 영상실, 시연 공간, 김장환 선생 기증 전시실, 수장고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인 활은 고 김박영 궁시장이 직접 만든 것이다. 활의 고장으로 명성이 높은 경북 예천 출신인 그가 고향 예천보다 부천 활이 더 마음에 들어 배우러 왔다가 부천에 눌러 살면서 경기 활의 전통을 이었다. 궁시장 전수조교인 그의 아들 김윤경은 활박물관에서 시연회를 열고, 활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부천을 활의 도시로 알리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부천활박물관은 국궁에 담긴 선조의 얼과 기술을 보존 전승하고 시민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노력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 동이, 강하고 아름다운 활을 만든 민족 중국이 우리 겨레를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夷)라는 글자는 사람[大]이 활[弓]을 메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활이 이웃나라까지 이름을 떨치게 된 비결은 특별한 재료에서 찾을 수 있다. 국궁의 주재료가 우리나라에는 자라지 않는 물소의 뿔이다. 외교 분쟁으로 중국이 무소뿔 반출을 금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조선 초기에는 살아 있는 물소를 중국에서 수입해 날씨가 따뜻한 남쪽 섬에서 기르게 했던 적도 있다. 쇠뿔과 대나무, 농사를 짓는 소의 질긴 심줄을 넣고 자작나무 껍질을 부레풀로 붙여 탄성의 강도를 최대한 높였던 것이 비결인 셈이다. 사정거리가 긴 강력한 활과 정교한 화살을 만드는 기술은 나라의 흥망을 좌우했던 첨단기술이다. 활 한 자루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나라를 지켜낸 무사들의 혼이 담겨 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명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한국 활쏘기의 유구한 전통은 올림픽 종목인 양궁으로 이어졌다. 특히 여자 양궁은 1970년 이래 세계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국인의 DNA 속에 활을 잘 쏘는 유전자가 들어 있다는 주장이 사실인 모양이다. 전국 어느 시나 군에도 국궁장이 있다. 하지만 국궁을 쏘아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활터가 접근성이 낮은 곳에 있는데다 입장도 제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부천활박물관은 우리 국궁을 제대로 이해하고 체험해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박물관과 국궁장이 붙어 있어 활 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고, 직접 체험도 할 수 있다. ■ 활쏘기는 세계에 내 놓을 고품격 전통문화다 세종의 아들 문종이 발명한 신기전화차는 이야기가 많다. 일찍 나약한 왕처럼 기억되지만 사실 아주 뛰어났던 왕이다. 학교에서 배우지는 못했지만 문종이 신기전이라는 첨단의 무기를 개발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방아쇠를 당겨 쏘는 노와 석궁도 있다. 활은 오랜 숙련이 필요하지만 노는 겨누는 법만 배우면 쏠 수가 있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인들도 사용했던 무기다. 신라에서 화살이 1천보(1천200m)가 나가는 노(弩)를 만들어 쓰는 것을 보고 당나라 왕이 이를 가르쳐주기를 요구했을 때 불려간 장인이 끝내 그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선의 비밀병기로 알려진 편전이 보인다. 일반 화살의 절반 크기라 애기살로도 불리는 편전은 어떻게 쏘았을까? 학예사가 휴대폰을 꺼내 앱을 실행하자 편전을 쏘는 동영상이 나타났다. 편전을 어떻게 쏘는지 아시겠죠? 관람객들이 좋아할 것은 또 있다. 야외에 활을 쏠 수 있는 체험학습장이다. 활쏘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어 어른도 좋아합니다. 활쏘기는 공자도. 정조를 비롯한 조선의 임금들도 즐겼던 운동이다. 활쏘기와 관련해 기억할 말이 있다. 발이부중, 반구제기 즉 활을 쏘아서 과녁에 적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을 살피라는 말이다.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살피며 잘못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면 한국인의 품격이 분명 높아질 것이다. 깍지는 손가락을 보호하며 시위를 세게 당길 수 있는 도구로 동양 활의 특징을 보여준다. 검지와 중지를 사용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더 멀리 쏘기 위해 엄지손가락 하나로 시위를 당겼다. 검지와 중지 대신 엄지를 사용하면 시위를 5~6㎝ 더 뒤로 당길 수 있어 수십 미터 더 멀리 쏠 수 있다. 활의 사거리는 역사를 바꾸었다. 이번에는 마루로 된 널찍한 공간이다.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단다. 활을 당겨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활쏘기를 체험해 보았을 텐데, 아쉽다! 활을 보고 직접 쏘아보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것이 활물관의 매력이다. 이번엔 화살이다. 궁시장은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과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을 아우르는 말이다. 과녁과의 거리가 145m. 그 먼 곳의 과녁을 적중하려면 화살 제작 기술 역시 정교할 수밖에. 전시된 화살의 종류가 엄청 다양하다. 새가 입을 벌린 것 같은 화살은 물론 도끼처럼 생긴 촉도 있다. 명적은 쏘면 소리를 내는 화살이다. 뼈나 뿔에 구멍을 뚫어 공기 마찰을 받으면 소리를 내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일의 시작, 혹은 처음을 나타내는 효시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어요. 시위를 당기는 엄지손가락을 보호하는 암깍지와 숫깍지, 화살의 촉을 끼우거나 빼는 촉도리, 과녁에 박힌 화살을 빼내는 노루발, 소매를 감싸는 팔찌, 화살을 담고 보관하는 전통 같은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대사례를 시작한 영조의 어진과 49발을 쏘아 49발을 적중시킨 정조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도 볼 수 있다. 정조는 작은 과녁을 쏘아 맞히기를 잘했다. 정조는 정신을 통일시키는데 가장 좋다면서 활쏘기를 권장했던 왕이다. 전시물의 쓰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설명문을 읽거나 해설을 들으며 관람하면 훨씬 재미있다. 박물관에서는 우리 활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다. 매년 텍스트로 접하는 우리 생활 속의 활전(展)과 같은 특별 전시를 열고 있다. 통합 표를 구입하면 부천시립박물관, 유럽자기박물관, 수석박물관, 부천펄벅기념관을 함께 관람할 수 있으니 기억해 두자. 박물관 주변 풍경이 참 아름답다. 사회적 거리를 지키며 박물관과 이어진 진달래 동산을 느릿하게 산책하면서 초록빛 나뭇잎들이 뿜어내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5. 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향토사박물관은 안산시 상록구 석호로 144번지에 자리한다. 건물에 다가서면 출입구 위쪽에는 안산문화원 간판이 보이고 건물 오른쪽으로 거의 땅에 닿을만한 위치에 안산향토사박물관 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안산향토사박물관은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소멸되어 가는 향토유물사료를 보존하고 안산향토문화를 창달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1984년에 창립된 안산문화원에서 1991년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2천600여점의 유물들을 기반으로 해서 보다 체계적으로 안산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알리고자 2008년 설립되었다. 이처럼 안산향토사박물관의 탄생 배경이 안산문화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안산향토사박물관은 안산문화원의 부속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안산의 인구가 70만 명(외국인 5만여명 포함)에 이르고 임진왜란 시 행주대첩의 숨은 공신 조경(趙儆, 1541~1609),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류(金, 1571~1648), 실학의 태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4),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미상),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崔容信, 1909~1935) 등과 같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고향이자 주요 활동지역인 점과 소장 유물 등이 풍부한 점을 고려할 때 안산문화원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안산향토사박물관을 분리 독립시킬 필요가 충분한데도 아직까지 독립기관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5대째 안산에서 거주하며 31세에 마을 이장을 했고 반월농협협동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안산향토사박물관 운영을 주관하고 있는 안산 토박이 이한진(李漢震, 79) 안산문화원장은 인터뷰에서 저희 안산향토사박물관은 성호 이익과 같은 역사적 인물 이외에도 민속, 역사, 지명유래 등 지역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안산향토사박물관에서 해야 하는 지역사 연구는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중이다. 박물관의 교육도 문화원의 교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계획이 없지만, 박물관의 규모를 확장하고 전시와 교육을 확대 시행하여 시민들에게 지역사를 함께 공유하는 공간을 구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한진 원장은 코로나 사태로 학생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대책에 대해서도 안산역사문화탐방 아카데미는 지역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원래는 지역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교육프로그램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작년부터는 학교로 출강수업을 대신하고 있다며 지역내 전 학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단 인근이나, 외국인 학생들이 많은 지역의 학교도 함께 진행한다. 학교 교육의 경우, 지역의 문화를 좀 더 쉽고 재밌게 배울 수 있도록 동영상 자료를 이용하거나 놀이수업을 더 첨가하여 지역사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공간은 1층 박물관과 야외 전시공간으로 구분된다. 먼저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성호 이익이 안산 첨성촌에 거주하면서 실학자답게 푸른 바다(碧海)를 뽕밭(桑田)으로 만드는 간척 사업을 꿈꾸며 쓴 시 화포잡영(花浦雜詠: 성호전집 제4권 17수)이 있는데 자세히 보아야 눈에 띈다. 도랑 내고 밭 옮겨서 방조제를 쌓으면 / 穿渠移圃築防潮 소금기 줄어들어 벼가 자라 풍성하리 / 鹹減禾生盡沃饒 (중약). 푸른 바다 뽕밭으로 쉬 바꿀 수 있나니 / 碧海桑田容易變 백성에게 좋은 계책 말해 주려 하노라 / 良謀輸與訪芻 실학자 성호가 시를 통해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간척 사업이 이루어졌으니 놀랍기만 하다. 안산이 바닷가여서 어업과 농업이 발달하였음을 간파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성호의 시를 맨 앞에 배치한 듯하다. 안산은 실학의 탄생지다. 행정구역변천도에는 안산의 역사가 보인다. 안산(安山)이란 지명의 역사부터 확인할 수 있다. 940년(고려 태조 23) 처음 안산이라고 명명한 이후 1천 년 넘게 사용하며 지켜오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1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안산이란 이름이 사라져버리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역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1986년 다시 안산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안산의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구역에서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과 그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 서민들의 생활상을 농익은 필치로 한국적 풍속화를 그려 조선의 화단(壇)을 대표한 제자 단원 김홍도의 그림도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산행길, 서당, 길쌈, 주막과 같은 풍속화 밑에 갓, 엽전꾸러미, 큰 주걱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실물을 비치해 두었다. 더해서 일제강점기 때 안산 샘골에서 식민지 수탈에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최용신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마련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 1548~1592) 장군의 애국 충정과, 김여물의 손자이자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방어의 총 책임자였던 김경징의 아내 박씨가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은 이 집안 여인들의 열녀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호)을 세웠다. 그러나 역사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김경징의 아내 박씨의 말처럼 국가가 힘이 없어서 국토가 유린당하고 사내들이 백성을 지켜주지 못해서 힘없고 약한 여인들이 몸을 던져 죽은 것이다. 이 문을 지나면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데 쓰는 용두레, 겨우내 방구석에 두고 오줌을 누었던 놋요강, 무늬를 새겨 모양을 내는 떡살, 참빗과 얼레빗, 조선시대 신분증인 호패 등 안산 사람들의 다양한 의식주 생활문화를 접할 수 있다. 우리민속 체험장 한가운데 나무를 둘러싸고 포개져 있는 맷돌이 정겹기만 한데, 마루 위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어울려 내는 또닥또닥 똑딱똑딱 귓전에 들리는 그 소리에는 힘들게 살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시름이 짙게 묻어 있다. 바로 앞방은 어린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하하호호 체험공간이다. 야외전시장에는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세조가 즉위 3년(1457)째에 파헤쳐 버린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1418~1441) 권씨의 소릉지(昭陵址)에서 발굴된 석양(石羊)과 난간석주(欄干石柱)는 피맺힌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방앗간은 농촌 마을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 물을 이용해 물레를 돌려 방아를 찧는 물레방아, 말이나 소가 빙빙 돌며 맷돌을 돌려 곡식을 찧는 연자방아가 그것이다. 동네 처녀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네도 빈 채로 흔들거린다. 누런 초가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ㄱ자 형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부엌과 가장 먼 거리에 변소를 설치하는 지혜가 돋보인다. 특히 외양간에는 말이나 소에게 먹이를 주던 여물통이 아직도 걸려 있다. 넓은 잔디 마당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전통혼례식에 신부가 연지 곤지를 찍고 가마꾼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오는 4일에도 전통혼례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안산향토사박물관은 안산의 걸출한 인물과 천년 고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안산은 실학의 탄생지다. 실학은 실질을 숭상하고 지금 여기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으로 일구려 시무(時務)에 열중한다. 그 첫 번째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안산향토사박물관이 그곳이다. 주변에 있는 성호 이익의 성호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단원미술관, 최용신기념관도 함께 둘러보자. 권행완(정치학박사,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시흥 '창조자연사박물관'

시흥시 신천동 신천공원 옆 언덕에 창조자연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마당에 여러 가지의 공룡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인간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진 공룡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45억년의 지구의 역사에 겨우 1만년의 역사를 가진 인간이란 종은 생명체 중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임에 분명하다. 과학기술로 무장하여 생명과 우주까지 넘보면서도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조차 정복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창조자연사박물관(관장 박승식)을 소개하면서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는 것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심하지만, 유럽의 환경운동가들은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구 환경은 더 이상 인간의 생존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22세기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자연사박물관은 지구와 인간의 역사는 물론 인간의 오만과 탐욕을 돌아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벌써 느꼈겠지만 자연의 역사와 창조는 어울리기 힘든 개념이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창조라는 말이 어떻게 자연사박물관 앞에 붙게 되었을까. 사립박물관은 설립자의 생각,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이 분명하다. 신앙의 용어인 창조와 진화론을 떠올리게 되는 자연사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통해 결합했을까. 종교와 과학의 화학적 만남을 결행한 주인공이 어떤 사람일지 강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바다나리 화석을 보다 휴관일인 월요일에 박물관을 찾았지만, 박승식 관장은 이날도 특별 강의로 시간에 쫓기고 있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 최고위 과정에서 성경 속에 나타난 과학-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란 논문으로 우수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박 관장은 성경이 과학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목사이기도 하다. 박 관장의 안내를 받아 1시간 동안 박물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흥미로웠다. 박물관 출입구에서 열을 체크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건물 정면에 거대한 화석이 나타난다. 가로4m 세로4.5m에 이르는 커다란 화석은 얼핏 조각 작품으로 보일만큼 특별하다. 해백합 화석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화석에 속하지요. 백합(百合)은 나리를 말하는 것이니, 우리말로는 바다나리다. 바다나리(Sea lilly)는 바다나리강(학명: Crinoidea)에 속하는 극피동물을 부르는 이름인데, 학명은 백합꽃을 뜻하는 그리스어 krinon과 형태를 뜻하는 eidos를 결합한 것이다. 극피동물 중 가장 원시적인 바다나리는 얕은 바다와 9천m 깊이의 심해에도 존재한다. 몸이 꽃모양이며 자루를 가지고 해저의 모래진흙에 붙어 사는 이 특별한 동물은 입과 항문이 위쪽에 있다. 다섯 개의 굴곡성이 있는 팔이 잔 모양의 몸에서 뻗어 나와 있으며, 자루가 나와 바닥의 물체에 붙거나 감겨 있다. 현재 약 7천개 이상의 종이 존재하며, 약 1만3천개 이상의 종은 멸종되었다고 한다. 화석 속에는 수억 년 전부터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의 화석도 볼 수 있어 가치가 더욱 높다. 1층 공룡랜드에는 움직이는 공룡 모형 20여 점을 전시한 쥬라기공원과 공룡의 뼈 화석을 재현해 놓은 골격공룡관이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우주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블랙홀체험관과 지구의 역사를 상상하도록 만드는 180여 점의 화석이 전시된 광물관이 있다. 종류동굴로 꾸며 놓은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자 해양생태관이 나타난다. 진귀하게 생긴 200종 6천100여점의 조개와 180여 점에 이르는 물고기, 수백 종의 예쁜 나비들과 장수하늘소를 비롯한 262종의 곤충들도 만날 수 있다. ■우주의 신비와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다 우주와 생명체에는 현대 천단의 과학 지식으로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사실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화성탐사선이 화성 표면에서 물이 흘렀던 흔적을 발견했다는 뉴스를 기억할 것이다. 물이 생명체와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은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다 아는 기본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정말 물이 있으면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는가. 세포 속의 주요 성분인 RNA나 DNA나 단백질들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의 첨단과학도 생명의 신비를 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광활한 우주로 눈을 돌리면 인간의 존재는 더욱 작아진다. 허블망원경으로 촬영한 우주 사진을 보면서 과연 우주 속에 지구처럼 아름다운 별이 또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누구나 가졌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과 인간에 대해 신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학기술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거나 초월적 차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끌고 있다. 과학기술만능주의는 무신론을 확장시키고 있다.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생물학 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은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사회생물학을 주창했고, 이러한 영향을 받은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적 무신론을 강화시켰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근거와 기준은 오직 현대의 자연과학적 방법론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우주의 자체적 생성을 주장하며 무신론을 주장했다. 현대 교회는 신의 권능에 의한 세상과 인간의 창조를 가르치면서도 진화론을 전적으로 배척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창조자연사박물관은 아주 특별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단세포 동물인 아베마가 가진 생명의 질서조차 과학은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별을 연구하다가 그 신비로운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천문학자들도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존재다. 코로나19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꾸짖는 듯하다. 지질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은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한 가톨릭 신부이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지질학과 고생물학, 고고인류학 분야를 계속 연구하여 소르본대학에서 자연과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929년 북경 원인을 발굴 했다. 샤르댕 서거 50주년인 2005년에 유엔(UN) 본부가 인류의 미래-테이야르의 현대적 의의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을 정도로 그의 업적은 현재에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신앙과 과학의 간극을 좁히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우주의 발전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점진적 진보를 강조했던 샤르댕의 주장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다. 화석과 광물을 통해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느꼈다면 이제 밖으로 나가자. 박물원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생태공원에서 풀과 나무들이 뿜어내는 싱싱한 기운을 느껴보자. 생명의 봄이 무르익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안성맞춤박물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수저와 젓가락 한 쌍을 바라본다. 밤늦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문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는 아들의 찬 손을 잡고 꾸중 대신 배고프지?라며 아랫목 이불 밑에 묻어두었던 밥그릇을 꺼내셨다. 복(福)자가 새겨진 밥뚜껑을 열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따뜻한 밥은 사랑이다. 놋그릇으로 불렀던 유기그릇은 보온성이 뛰어나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1970년대부터 스텐 그릇에 밀려나면서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다. 유년의 행복한 추억을 소환해 준 곳은 안성맞춤박물관이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대학 부설 박물관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안성시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시립박물관이다. 2002년에 개관했으니 올해가 20주년이 된다. 시립박물관으로는 이른 시기에 문을 연 박물관이다. ■안성장은 서울장보다 두세 가지 더 난다 안성시가 2040년에 인구 40만의 자족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인구가 줄어 고민인데 안성은 인구가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실 안성은 조선시대부터 부유한 고을이었다. 서울로 이르는 관문이었던 안성으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의 물건들이 모여들었고, 팔도의 장사꾼들이 몰려들었다. 천자문에서 벌 열(列)자를 이틀 이레 안성장에 팔도 화물 벌 열이라 뜻풀이했다 하며, 안성장은 서울장보다 두세 가지 더 난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안성에서 유통되는 물건이 다양하고 품질도 우수했다고 한다. 2일과 7일 닷새마다 열리던 안성장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구장, 전주장과 함께 조선 3대 장으로 손꼽혔다. 우리에게 익숙한 안성맞춤이란 말의 유래를 안성기략安城記略이란 책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안성은 고래(古來)로 유기가 명산이요 안성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제조하므로 전국에 환영을 받아왔나니안성마침이라 하여 전국에 통용되나니라. 안성맞춤박물관은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안성유기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문박물관이다. 물론 박물관은 안성의 포도, 안성농악 같은 향토문화나 안성의 근대역사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 홍원의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아 전시실을 둘러본다. 유기 제품들이 가득하기 때문일까 20년 된 전시실이 환한듯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비슷한 형태의 전시물들이 가득하다. 학예사의 설명을 듣고 걸음을 멈추자 전시물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릇 밑바닥에 새겨진 글자를 살펴보세요. 안성맛침 안성맞침 안성맛춤 안성이라 새겨진 게 보이시죠? 안성유기의 명성을 흉내 낸 짝퉁도 있으니 어디 있는지 찾아보세요. 안성유기에 대한 기록은 1600년대 초부터 등장한다. 한문사대가로 알려진 택당 이식(1584~1647)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 안성 유점(鍮店)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유점은 유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장인들이 수공업촌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면 1600년대 이전에 이미 안성에서 유기가 널리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조선시대 안성은 동서와 남북으로 교통로가 발달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수공업이 성행하였다. 풍석 서유구(1764~1845)가 지은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안성장에서 갓?삿갓, 도롱이, 가죽신 같은 각종 수공업품이 장에서 활발히 거래되었다. 전시실에서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도 만날 수 있다. 장사꾼으로 나선 허생이 안성장에서 제사상에 올릴 과일과 갓과 망건을 만드는 데 쓰이는 말총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는 이야기를 기억하면 조선시대 안성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혼례나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장례 같은 국가의식에서도 안성유기장이 등장한다. 안성유기장은 선수장인(善手匠人)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국가 의례에 불려다녔던 것이다. 선수장인은 오늘날의 용어로 명장(名匠)이라는 말과 같다. 여기서 유기제작법은 세 가지를 살펴보자. 가장 쉬운 주물제작법은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을 78:22의 비율로 혼합한 쇳물을 녹여 형태를 만든 틀에다 부어 넣어 식힌 다음 다듬고 광을 내어 완성하는 기법이다. 쇳물을 녹여 바대기라 불리는 바둑알처럼 둥글납작한 쇳덩이를 만들어, 11인이 한 조가 되어 불에 달구어가면서 두들겨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방짜제작법이 가장 고급기술이다. 반방짜라고 부르는 기법은 그릇의 절반쯤은 주물식으로 만들어 집게로 집어가면서 오목하게 두드리거나 짓눌러 마무리하는 것으로 현재 고급제품은 대부분 이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명성이 자자하던 안성유기도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난을 면치 못했다. 1930년대 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인의 밥상에 오르던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가 무기로 만들었다. 해방되면서 잠시 부흥을 맞이했던 유기 제품은 625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 다시 밀려나게 된다. 유기는 연탄가스에 변질되기 쉬운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청이 생겨 부녀자들이 애를 먹었다.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것은 여인들의 일과이자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기와를 곱게 빻아 가루를 수세미에 묻혀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닦는 인형을 보며 유년시절을 떠올리는 관람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옛말이다. 현재의 유기 제품은 성능이 크게 좋아져 박물관이 개관할 때 전시된 20년 된 유기작품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우아한 나비촛대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생동감 넘치는 물고기 형상의 자물쇠 같은 생활용품에서 유기의 격(格)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안성에 스무 곳 이상의 제작소와 판매점을 갖춘 거리를 조성하면 안성이 유기의 명소로 알려질 것이고, 상업화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홍 학예사의 바람이 머잖아 이루어질 것 같다. 40만 도시 안성의 장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유기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안성 도기동산성, 백제와 고구려의 만남 2층 기획전시실에는 안성 도기동산성-백제와 고구려의 만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2015년 9월 도기동에서 건축을 위해 발굴조사를 하다가 방어용 목책을 쌓기 위해 구덩이를 판 흔적을 발견했다. 도기동산성은 우리 역사학계에 큰 주목을 끌었다. 4~6세기에 백제가 쌓았던 도기동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밀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가 수개축하여 사용한 산성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경기 남부에서 확인된 것은 이것이 처음인데,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남진 경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아 사적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1500년 전, 백제와 고구려 전사들이 사용했을 고리자루 큰 칼과 쇠도끼와 쇠창 같은 무기류와 옥으로 만든 장신구 같은 출토 유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손잡이가 달린 검은 잔은 디자인이 무척 세련되었다. 고구려인들이 검은색을 좋아했다는 관계자의 해설을 들으니 흥미가 더해진다. 백제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였던 도기동산성은 668년 신라가 통일한 후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이 사라졌다. 대신 사람들의 삶터로 변모한 이곳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남겨놓았다. 전시물 중에서 청동 발, 청동 숟가락, 청동 젓가락 같은 파란 녹이 낀 청동유물에 시선을 쏠린다. 이런 유물들이 안성유기로 발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성맞춤박물관 개관 때부터 안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 학예연구사의 유기 사랑이 각별하다. 유기는 상품성이 충분합니다. 유기 제작자를 육성하여 유기 제품을 파는 공방거리가 조성되면 안성의 명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박물관 앞 목련꽃봉우리가 부풀어 있다. 안성유기도 목련꽃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빌어본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 광주 ‘만해기념관'

이순신 사공삼고 을지문덕 마부삼아/파사검(破邪劍)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하여볼까/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만해의 시를 한 편 들려 달라고 부탁하자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께서 선택하신 시조다. 육사에서 만해 한용운의 정신에 대해 강의를 하다가 이 시조를 외워 수백 명의 생도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지요.라며 껄껄 웃는다. 학창시절에 만해 한용운의 시를 접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님의 침묵이나 나룻배와 행인 같이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만해의 진면목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만해가 31운동을 기획하고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를 조직했던 사실이야 잘 알려져 있다. 유교도 참여시키려고 경상도 거창 다전에 살고 있던 유학자 면우 곽종석을 찾았을 정도였다.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기 위해서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 독립의 서를 통해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투쟁의 방향까지 제시했던 사상가였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니 만해정신은 현대 한국인의 의식에 흐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유신과 군부독재를 비판하다 해직되었던 언론인 송건호는 한국현대인물사론에서 만해 한용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의 식민치하에서 적 일본에 철저하게 비타협으로 일관하다가 비극적인 그러나 자랑스럽게 생을 마친 항일애국지사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국외에서 단재 신채호를, 국내에선 만해 한용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만해와 같은 지사를 그 암담한 적 치하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한없는 자랑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송건호에게 만해 한용운 관련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이다. 중학생 시절에 님의 침묵을 읽고 불경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1981년,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기념관을 설립하여 만해정신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공대 출신의 그가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만해 때문이다. ■ 만해와 남한산성의 행복한 만남 서울 성북동 심우장(국가사적 제550호)은 만해가 1944년까지 말년을 살았던 집이다. 조선총독부 쪽을 보지 않으려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에 전 관장이 세를 얻어 만해기념관을 시작한 것이 1981년이다. 10년이 지난 1990년에 그는 기념관을 광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심우장은 너무 외진 곳이라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걱정, 너무 좁은 탓에 사람들이 대여섯만 찾아와도 앉을 곳이 없어 걱정이었던 곳이라 어디로 옮길까 궁리하다가 도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남한산성을 선택하게 된 것이지요. 만해기념관이 남한산성에 터를 잡은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역사 속의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적에게 빼앗겨 본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그럼에도 일제는 남한산성이 마치 굴욕의 현장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다. 구국의 성지 남한산성은 일제에 저항하며 시와 소설과 논설로 민족혼을 일깨운 만해의 정신을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기념관을 이전하면서 전 관장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만해의 가르침대로 남한산성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고 그 역사문화적 가치를 전파하다가 임창열 경기도지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남한산성에 대한 전 관장의 사랑과 열정에 감동한 임 지사가 산성 복원을 위한 재정지원을 약속하면서 복원사업은 탄력을 받게 되어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형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자유를 향한 만해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 전시실 곳곳에서 매화꽃 향기처럼 은은한 만해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누렇게 바랜 자그마한 신문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독립선언식의 광경-깃부다! 더욱 힘쓰라!하는 한용운 연설 끝에 독립만세!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현장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단신이다. 또박또박 자필로 쓴 한글 시조 이순신을 사공삼고를 다시 음미해 본다. 서당을 다녔으나 만해는 한글의 위대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1914년에 펴낸 두툼한 책 불교대전에서도 불교의 지혜를 대중에게 전파하려는 만해의 평등정신을 느낄 수 있다. 기념관 중앙에는 님의 침묵 초간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코리아는 동방의 등불이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집 키탄질리가 전시되어 만해가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던 귀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님의 침묵은 현재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시실을 안내하던 전 관장께서 외국어로 번역한 책을 전시하는 곳 앞에서 재미난 사연을 들려주신다. 한동안 님을 Love로 번역했으나 현재는 Nim으로 표기하고 있지요. 청년시절 만해는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여행을 떠났다. 조선 팔도는 물론 압록강을 넘어 만주와 시베리아를 여행했으며. 현해탄을 건너 일본을 여행했다. 만해가 세계정세에 밝았던 것은 독서와 여행에서 얻은 것이다. 조지훈, 신석초, 김동리 등 만해를 따르던 유명한 문인들의 시집과 소설책도 전시되어 있다. 그동안 출판된 200여종의 님의 침묵이 빼곡하게 전시된 곳에서 표지 디자인과 서체의 변천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일송(一松) 김동삼 장군의 사진에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김동삼 장군과 친밀하게 지내던 만해는 장군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형무소로 달려가 시신을 거두어 심우장에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기념관은 매년 3~4회의 특별 기획전을 통해 만해 한용운을 재조명하고 있으며, 지역민과 관람객을 대상으로 전시연계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에 진행한 특별전의 주제만 살펴봐도 기념관이 추구하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만해와 석주-스승과 제자(2010), 또 다른 님의 얼굴, 달마(2011), 설중매, 만해 한용운(2012), 만해 한용운, 무궁화로 피다(2013), 남한산성 역사 문화(2014),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심우장(2015),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사람들(2016), 만해와 효동 임환경, 효당 최범술(2017), 31운동과 만해 한용운(2018), 만해 한용운과 애국지사들(2019), 우당 유창환과 일차 유치웅 부자(2020) 등이다. 이처럼 만해기념관은 만해 한용운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별전을 꾸준히 열어 한번 찾은 관람객이 다시 찾아오도록 변신하고 있다. 자료를 바꿔 끼울 수 있는 특별한 액자를 제작한 것도 이런 노력을 하면 얻은 기념관만의 아이디어이다. 지난해에 연속 기획한 남한산성의 사계와 강희갑 작가 일출 사진전처럼 남한산성을 알리는 기획전도 자주 열고 있다. ■ 이 봄에 만해를 만나자 만해의 오도송(悟道頌)은 만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정사년(1917) 12월3일 밤 10시 무렵 좌선 중, 바람이 불어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홀연히 듣고 그동안의 의심스런 생각들이 환하게 풀렸다. 이에 시 한 수를 얻었다. 남아란 어디나 고향인 것을(男兒到處是故鄕)/그 몇 사람 나그네 근심 잦단 말을 일렀는가(幾人長在客愁中)/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 대천 세계 뒤흔드니(一聲喝破三千界)/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흩날리네(雪裏桃花片片飛). 1년 넘도록 이어지는 코로나19도 힘겨운 데 청렴해야 할 공직자들의 만연한 일탈에 청춘들이 가야 할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 어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오는 주말에는 남한산성을 찾아보자. 솔향기를 가득 풍기는 산성을 걸으며 가슴에 가득한 먼지를 털어낸 다음 만해기념관을 찾아보자. 해방의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믿음의 불씨를 품고 흔들림 없이 살았던 만해를 만나면 어떤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봄이 오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 사진=윤원규기자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경기도박물관

개인이든 조직이든 변화해야 사는 시대다. 코로나19는 시대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변화는 무엇보다 그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역사의 흐름을 읽는 혜안과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을 간파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형식과 내용까지 새로워지는 질적 변화로 나아가려면 어떤 조직이든 인식의 전환과 용기가 필요하다. 박물관도 예외일 수 없다. 경기도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속도에 비해 인문학적 뒷받침이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재 경기도의 정체성은 이전보다 또렷해졌다. 1996년에 문을 연 경기도박물관은 개관 25년을 맞아 1년여 동안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가 재개관한 2020년 8월까지의 여정은 변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339일간의 대장정 끝에 환골탈태라는 표현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대변신이 이루어졌다. 변신의 내용과 방향은 경기의 정체성을 보다 선명하게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박물관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경기도박물관(관장 김성환)도 꽃샘추위를 견디며 새봄을 맞고 있다.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향나무 가지에도 푸른 기운이 감도는듯하다. 화성 사대문 옹성처럼 둥근 부채꼴의 광장 게시판에서 경기별곡이란 친숙한 이름과 마주한다. 2020년 8월 재개관을 기념한 특별전시의 주제가 민화(民畵), 경기를 노래하다이다. 민화의 화사한 빛깔과 선명한 구도가 봄맞이에 제격이다. 박물관 홍보를 담당하는 이지희 학예사의 안내를 받아 박물관에 들어서니 막힘없이 탁 트인 실내구조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 국가 근본의 땅, 경기 국가 근본의 땅, 경기 2층 전시실에 새긴 경기도박물관의 선언이다. 꼭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감탄하자 유물을 소개하던 김성환 관장이 빙긋 웃으며 화답한다. 우리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1년을 숙의한 끝에 도달한 결론입니다. 경기도의 정체성을 이처럼 명쾌하게 표현한 말을 달리 찾을 수 있을까. 설명문에 붙어 있듯 사실 이 말은 조선 11대 국왕 중종이 경기관찰사를 임명하면서 했던 말이지요. 성종은 이렇게 덧붙였지요. 나라에 경기가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샘이 있는 것과 같다. 경기의 정치가 잘 되고 못됨은 나라 전체의 무게와 관계가 있다.고 말입니다. 천 년에 걸쳐 이룩된 경기의 역사와 문화는 고유문화와 외국문물이 다듬어져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양하고 개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이처럼 경기문화는 우리 역사문화의 원형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코리아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고려시대에 경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018년부터 경기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지난 2018년이 천 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경기도박물관도 경기천년 특별전을 열었다. 고려청자 앞에서 천 년의 긴 세월에도 변함없이 뿜어내는 오묘한 푸른빛을 감상하는 일은 박물관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일이다. 천자의 나라로 자부한 고려의 당당함과 빼어난 예술성이 조화를 이룬 청자를 비롯한 고품격의 유물은 물론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물이자 경기도박물관의 자랑인 초상화를 두루 살피며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벽을 걷어내고 공간을 툭 틔운 전시실은 시원하다. 쭉 뻗은 벽면으로 전시된 유물들이 관람객을 유혹한다. 효종의 명을 받아 북벌의 임무를 수행했던 이완 장군의 투구와 창을 비롯한 몇몇 특별한 유물을 유리관에 담아 양쪽에서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한 방식도 신선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유물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관람객들이 유물을 만져 깨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염려하자 김 관장의 대답이 놀랍다. 관람객을 믿었습니다. 말이야 쉽지 박물관의 관리 책임자로서 특별한 용기가 없으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이처럼 과감한 전시 형식과 섬세한 배려가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의 공공박물관들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점이다. 소중한 유물이 손에 닿는 거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관람객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것이기에 감동으로 연결된다. 이제까지 관람객들이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 관람객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박물관 문화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 고려조선 대표 유물로 보는 경기도 천 년의 역사 초상화로 둘러싸인 전시실 한가운데 검은 빛깔의 의자와 손잡이에 새가 조각된 지팡이가 시선을 끈다. 설명을 들으니 이 의자와 지팡이는 현종이 1668년에 백헌 이경석(1595~1671)에게 하사한 것이란다. 이경석은 인조부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국난극복과 국가재건에 헌신한 명신이다. 조선의 초상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터럭 한 올도 틀리지 않게 그릴 뿐 아니라 검버섯이나 마마자국까지 그대로 세밀하게 그리는 기법으로 정신까지 담는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초상화를 통해 조선 양반사대부들의 정신세계가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과 포은 정몽주의 초상 사이에 민화풍의 초상이 있다. 이 초상은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이다. 김 관장의 설명을 들으니 그 기이한 배치가 바로 이해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역사적 사실을 세 점의 초상화 배치로 전달하는 방식이 신선하다. 초상화 옆으로는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광주, 여주, 이천을 비롯하여 경기도 곳곳에 도자기의 명산지가 널려 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통해 경기도 장인들의 미적인 감각과 예술적 취향을 엿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볼거리가 많다고 평택농악, 양주별산대놀이, 안성남사당패 같은 경기도의 무형문화재를 소개하는 공간을 둘러보는 일도 빠트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2층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면 여기가 경기!라는 박물관의 선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 민화, 경기를 노래하다 2020년 8월 재개관 기념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실은 입구부터 밝고 화사하다. 민화라는 전통예술이 작가들의 세련된 감각과 첨단의 기술로 새롭게 선보이는 창조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민화 작가 30인과 참신한 감각과 기법으로 무장한 미디어아트 및 설치 작가 4인이 참여하여 경기도의 역사와 전통과 관련된 주제를 친숙한 민화로 표현해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전시는 제1부 경기 문화유산을 품다, 제2부 경기 역사 인물을 그리다, 제3부 정조와 책가도, 제4부 역사의 장면을 담다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민화가 현대에는 어떻게 진화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전시된 책가도가 정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역린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정조는 민화의 한 갈래인 책가도를 유행시킨 주역이다. 이처럼 정조는 어좌 뒤에 세우는 병풍인 일월오봉병 대신에 책가도를 설치할 정도로 새로운 예술을 사랑한 왕이기도 하다. 책가도를 입체적으로 만든 설치 작품도 눈길을 끈다. ■ 지극한 정성으로 감동을 선물하다 기증문화재는 경기도박물관 설립의 모체가 되었다. 전체 소장품 중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기증문화재라는 사실을 통해 경기도박물관이 그동안 지역과 소통에 얼마나 힘써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문중에서 보관하던 유물들이 박물관에 기증되면서 전문 인력의 손길을 거쳐 모두의 보물이 되었던 것이다. 박물관은 경기명가 기증유물 특별전 조선시대 사대부(2010), 천년의 뿌리 용인이씨(2013)를 비롯하여 모두의 보물이 되다(2020)까지 거의 매년 기증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김 관장은 기증유물이 꾸준하게 늘어나는 비결을 꾸준한 관심과 지극한 정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찾아내어 이를 조사하고 환수하는 사업도 적극 벌일 계획이란다. 올해 박물관에서 벌일 특별전시 중에서 관심이 쏠리는 것은 경기사대부로의 초대; 초상화 특별전이다. 앞에서 잠시 소개했듯이 경기도박물관은 조선시대 회화의 정수라 할 초상화 12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정몽주 초상(보물 제1110-2호)이나 심환지 초상(보물 제1480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초상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정성을 다해 관람객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 경기도박물관이 박물관의 문화를 선도하며 성장해가는 비결이다. 과감하게 장식을 걷어내고 건물의 골조를 드러내는 파격을 연출한 것이나 관람객들이 눈앞에 유물을 배치하여 자세히 살필 수 있도록 한 것도 정성을 다해 사람의 마음을 열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성을 다하는데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눈도 많이 내리고 추위도 유난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정성으로 감동을 선사하는 경기도박물관을 찾아 새봄을 맞이하면 어떨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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