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 통일 미래도시 경기] 한강 철책선, 주민 품으로

분단의 상징 걷어내고… 평화의 터전으로

고양시와 김포시에 거쳐 설치돼 있는 ‘한강 철책선’은 남북 분단의 상징이자, 남북 화해ㆍ평화의 상징이란 이중성을 담고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북한의 대남도발이 지속되고 한강을 도강해 무장공비나 간첩 등을 내려 보내면서 1970년 한강 철책선은 북한을 저지하는 최첨병 방어선으로 설치됐다.

이 같이 남북간의 냉전의 산물로 남아있던 한강 철책선이 42년만인 지난 2012년부터 일부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제거되기 시작했다.

당연 질곡의 한강 철책선 역사를 현장에 지켜보며, 묵묵히 통일을 기원하던 인근 주민들의 삶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안보’라는 철저한 이념에서 벗어나 삶의 공간으로 한강 철책선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 남북간의 질곡의 역사, 한강 철책선

故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을 근거로 ‘한강은 남북 민간인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곳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강하구의 수역으로 그 한쪽 강기슭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한강하구의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는 정전협정 제1조 제5항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다시 말해 정전협정 당시 휴전선, 즉 육상 군사분계선은 규정했으나, 해상 군사분계선을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정전협정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지만, 그중 하나는 민간선박의 소통이 가능한 한강이 남북을 하나로 묶는 주춧돌을 놓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전협정 이후 북한이 한강으로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면서 이 조항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졌고, 문서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철책이 설치되기 전인 1962년 한강하구 순찰선박 총격, 1967년 한강 하구 순찰대 피습, 1968년 임진강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해 안보 경각심을 고조됐다. 정부는 이들 사건을 계기로 암묵적인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1970년 고양시와 김포시 등 한강 하류에 철책선을 설치했다. 이때부터 철책선은 DMZ 철책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상징이 됐다.

■ 현지인들의 삶의 변화

철책선이 설치되자 이곳에서 생활했던 토착민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어업과 농업에 종사했던 이들은 철책선 너머로 일을 가려면 안보교육과 출입증을 받아 군의 통제하에 출입이 허가됐다. 철책은 이곳 사람들에게 ‘자유’을 억압하는 ‘통제’로 여겨졌다.

이런 가운데 1990년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엄청난 수해로 한강 하류와 임진강변의 제방이 유실됐고, 이를 복구하기 위한 준설선과 예인선이 남북 경계를 뛰어넘었다.

1996년에는 집중호우로 북에서 떠내려와 중립지역에 있던 송아지 한 마리를 해병대 제2사단 병력 24명이 들어가 구조했다. 이 송아지는 제주산 암소와 혼인해 7마리 새끼를 낳았는데 당시 이 새끼들은 ‘통일소’로 불리기도 했다.

이같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철책선이 설치된 지 40여 년이 흐르자 철책이 굳이 필요하냐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철책으로 금단의 땅이 된 지역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급기야 철책이 설치된 고양시와 김포시가 군부대와의 협력을 통해 2009년 철책 제거에 합의해 2012년 역사적인 첫 제거 작업이 시작됐다.

고양시는 2012년 4월 20일 행주대교에서 김포대교까지 약 3.6㎞ 구간 철책을 제거한 뒤, 이곳을 시민 휴식 공간으로 조성했다. 나머지 구간은 현재 김포시와 보조를 맞춰 철거할 예정이다.

김포시는 고촌면 신곡리∼일산대교 남단 9.7㎞에 설치한 철책을 제거할 계획이다. 철책이 제거된 곳에 고양시는 ‘평화 생태산업 사업지’로 김포시는 ‘한강시네폴리스’ 사업을 계획 중에 있다. 제거 사업이 완료되면 철책은 ‘남북 분단’이란 꼬리표를 버리고, 올곧이 ‘남북 화해ㆍ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고양=김현수기자

인터뷰 14대째 한강과 함께 한 이흥련씨

“안보가 최우선인 시대… 반대는 상상도 못해”

“그때는 반대에 ‘ㅂ’자도 꺼내지 못한 시절이었어. 안보가 최우선시되는 정국이었지”

한강 철책선이 설치된 지역에서 14대째 살아가는 이흥련씨(70)가 갖고 있는 철책에 대한 첫 기억은 ‘안보’였다. 이씨는 16세 때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지금의 행주대교 인근으로 첫 조업을 나갔다.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갔던 ‘행주웅어’로 만선이 되는 날이면 온 집안의 축제였다.

그런데 북한의 무장공비가 한강으로 침투하자 군부대가 한강에 철책선을 설치하면서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설치 후에 이씨를 비롯한 행주어촌계 어민들과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군부대에서 안보교육과 출입허가증을 받아야만 철책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이흥련씨가 철책 제거 작업이 완료된 구간의 군 출입통제소를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철색선이 설치된 후 어민들은 ‘100-1호 통문’과 ‘85호 통문’을 통해 왕래했다. 행주대교 인근에 있던 ‘100-1호 통문’은 사라졌지만, 장항습지에 있는 ‘85호 통문’는 현재도 존재해 어민들은 아직도 군부대 허락을 받고 어업을 하고 있다.

이씨는 “철책이 설치될 당시 반대는 상상도 못했다”며 “그 당시 내 주변에서도 간첩을 본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안보가 최우선인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철책선이 설치된 후 군부대 통제를 받아 불편했지만, 어민들만 출입이 허가돼 조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94년과 95년에는 4, 5월 두 달 동안 실뱀장어로 1억7천만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행주어촌계의 최대 호황기였다고 설명했다.

현재 일부분 철거된 철책선은 행주어촌계 어민들에게 희망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철책이 제거됨에 따라 국민이 갖는 불안 이미지가 사라져 많이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이에 대한 반대급부가 나타낸 것이다. 낚시꾼들이 몰려오면서 이들이 사용한 뒤 버리고 간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고양=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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