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쫓다가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나 많다. 올해도 반환점을 돈다. 가파른 세월을 힘겹게 오르다 어느새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길로 들었다. 억울하지만 이미 저 아래 바닥이 바라보인다. 여름은 추억 숲이다. 경포해변의 푸른 바다와 여름밤의 텐트 속. 반딧불이 날던 마당에 멍석 깔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던 틴에이저 시절, 라디오는 낭랑하고 또렷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 뮤직이 아직 귓가에 있다. 직장 생활 땐 등산팀을 만들어 리드가 되기도 했다. 그 시절 그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많이 보고 싶다. 인생의 가장 왕성한 시절이 여름이었다.
오늘은 행궁동 현대미술팀과 수채화를 그린다. 스펀지 붓이 흠뻑 물을 머금고, 수채화지 하얀 가슴에 깊이 스며든다. 청춘의 수액 같다. 언젠가 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하던 후배의 미술실을 찾아간 적이 있다. 복도의 창 위로 수업 중인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후배의 등 뒤에 걸린 급훈을 바라보고 미소가 전율처럼 흘렀다. 급훈은 ‘수채화처럼’이었다. 근면, 성실, 봉사가 아닌 ‘수채화처럼’이라니. 젊음의 패기가 무기인 아름다운 형용사로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고 총각 선생인 그와 함께 맑고 투명한 이슬을 오래도록 축였다. 참이슬이 수채화처럼 번졌다.
후배의 보름달 같은 웃음이 그립다. 초록 물감으로 싱그럽고 명료한 옛꿈을 다시 그린다. 그대의 빛나는 눈동자에 맺힌 영롱한 추억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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