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지만 요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 정치에 관심 없는 다른 교수들도 딱히 정당에 소속하지 않은 다음에야 비슷할 것이다. 그래도 생활 속 언론을 접하니 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가지만 만일 내가 지금 정치인이 됐다 해도 대충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거친 말로 상대방을 공격해야 하니 엄두가 나지 않지만 없는 말도 만들어 선동해야 한다는 점은 내가 생각하는 원칙과는 맞지 않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혼란이 깊어지고 나라를 걱정하는 민심이 벌써 커지는 중이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좌충우돌 중이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역시 뚜렷한 비전 없이 정치적 손익만 계산하고 있다. 벌써 소금과 건어물은 금값이다. 수산물 판매는 30% 넘게 줄었다고 한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정당의 현수막과 포스터들도 새삼스럽지 않다. 어릴 때 봤던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식의 방화 표어와는 다르다. 간결하고 명확한 브랜딩이 아니고 형용사와 부사가 대폭 추가된 ‘수식어 홍수’로서의 슬로건이다. 관점에 따라 서로의 입장을 악으로 몰아가는 ‘제로섬 싸움’을 보는 듯 우려된다. 정치가 해답이 아니라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역사를 복기해 보자. 2천년 전,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는 선동가들의 천국이었다, 그래서 플라톤 과 소크라테스는 ‘국가론’에서 당시의 정치를 다수의 폭민에 의해 좌우되는 ‘중우 정치’라고 규정했다. 민주제가 효과적 리더십을 결여했을 때 나타나는 정치 현상으로 선동과 군중심리가 대중의 선택을 오도하고 정치적 결정은 비합리적이고 현명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정치 현실과도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는 정책의 합리성보다는 일시적 감정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평범한 다수 역시 일상의 퍽퍽한 삶이 정치와 어느 정도 상관하는지 무심하지만 선동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번 오염수 방류 논쟁과 관련한 국민의 불안을 모두 괴담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괴담의 원인은 ‘증거의 모호성’이 가장 큰 기반이기 때문이다. 마치 환한 낮엔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밤이 되면 무서움이 오는 것은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인 이치와 같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 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는 전략은 나치 독일 괴벨스의 세뇌의 제1법칙이다. 거짓은 끝까지 참이 될 수 없지만 거짓도 자꾸 들으면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염수 방류가 틀린 문제라면 증거는 과학이 입증해야 한다.
오염수 방류를 찬성하자는 것은 전혀 아니고 정당 간의 정치적 논쟁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국민들의 우려를 최대한 공정하게 판단하게 하기 위해서 다층적, 다면적 검증을 시도해야 하는 점이 원칙적으로 옳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양한 우려를 검증하기 위해 준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과 정부의 노력 자체가 현실에서 너무 성급하게 오해와 괴담으로 재생산되고 있으며, 이렇게 재단화된 여론이 ‘공정’으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정치적 확증편향은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덫이다. 공포를 키우는 것이 정치의 본류는 아니지만 ‘흑백논리’로 날을 세운 채 싸우는 ‘제로섬의 역사’에선 결코 나라 발전은 힘들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유발된 최근의 분열이 더 이상 불신의 국면으로 바뀌지 않는 지혜를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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