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1대 왕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했다. 붕당정치로 인해 사분오열된 조정의 기능을 회복하고, 효과적인 정국 운영을 꾀하기 위해 영조는 칼을 빼 든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심각한 패거리 정치로 인해 조선 사회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영조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했다. 파벌 간의 자존심을 건 당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조정의 권위를 지켜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탕평책을 이어 나갔다. 노론, 소론 등 출신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으며 남인과 북인들도 영의정, 좌의정에 앉히는 등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실시해 큰 효과를 거뒀다. 당파 간의 정치 세력에 균형을 꾀한 불편부당의 정책으로 정국은 안정돼 갔다. 정조 시대를 일컬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조선의 르네상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순조 때부터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왕의 측근에서 비롯된 ‘비선 실세’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그들은 관직을 사고팔았고, 관직을 돈으로 산 관료들은 원금을 회수하기 위해 무리한 세금 징수를 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억지로 빼앗은 가렴주구로 백성을 괴롭혔다.
민심은 더욱더 흉흉해지고, 그들의 횡포는 점점 심해졌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군적(軍籍)에 올려놓고 강제로 세금을 거둬들인 백골징포가 있었고, 생후 불과 3일의 갓난아기까지 군적에 등록시켜 놓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이를 황구첨정이라 한다. 그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산속을 떠돌다가 산적이 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편 1894년 2월10일 전라도 고부군수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위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민족운동으로 저항한 것이다.
오늘날의 정당정치는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와 흡사하다. 국민 걱정과 나라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당의 이익만 좇는 이율배반적인 정치가 판을 친다.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는 개인 감정과 정치적·학문적 갈등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패거리 정치가 시작됐다. 이제부터는 지역 중심으로 뭉치는 것을 지양하고 뚜렷한 정치 목적과 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을 섬기는 정당이 돼야 한다.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당쟁만 일삼는 정당은 없어져야 한다.
맹자는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으로 유명하다. 민심을 얻어야만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 모든 정치의 기본은 민본에 두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민심(民心)을 얻으려면 민본(民本)을 기본으로 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판도 변해야 한다. 소신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오직 공천을 받기 위해 정당의 눈치를 보면서 거수기 노릇이나 하는 정치인들은 사라져야 한다. 정치철학이나 주체성도 없이 정당에 적당히 기대 국민과 나라의 안위보다는 당리당략적인 정치를 일삼는 정치인들과 정당은 다음 총선에서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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