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정치권에 소환된 ‘엄석대’

한 소년이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왔다. 소년의 아버지는 좌천된 말단 공무원이었다.

 

소년의 눈에 비친 급장(반장)은 담임교사보다 훨씬 무서웠다. 담임교사도 반장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반장은 폭력과 회유를 적절하게 섞으면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소년은 이처럼 이상한 학급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항했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그 뒤부터는 되레 반장의 권력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반장의 이름은 엄석대였다. 소년은 담임교사가 새로 부임하자 엄석대에게 등을 돌렸다. 비겁한 반전이었다.

 

이문열 작가의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얼개는 제법 서사적이었다. 시대적 배경은 자유당 말기인 1950년대 후반이었다. 작가는 당시의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경상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의 한 학급을 통해 빗대 우화로 엮어냈다.

 

느닷없이 엄석대가 여당 전당대회에 소환됐다. 이준석 전 대표와 홍준표 대구시장이 설전을 벌이면서다. 이 전 대표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을 엄석대에 비유했다. 이 전 대표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저는 책 이야기만 썼는데 홍 시장은 엄석대에게서 누군가를 연상했다”고 적었다.

 

앞서 이 전 대표는 여당 전당대회 상황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비유하면서 윤 대통령을 비판하고 친(親)이준석계 후보 지지를 호소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홍 시장이 “이문열 선생을 모독해도 분수가 있지, 어찌 우리 당 대통령을 무뢰배 엄석대에 비유하나. 착각에 휩싸인 어린애의 치기에는 대꾸 안 한다”라고 맞받았다.

 

문학은 가능한 장르 안에서 나름 예의를 갖춘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는 언제부턴가 이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먼저 예를 갖추고 문학을 소환하는 게 순리다. 정치에 문학이 언급되는 현실이 못마땅해서 터져 나오는 넋두리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