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게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잘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정말로 나와 내 가족이 잘 사는 것에 가까이 가고 있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우리는 어떤 인간형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옛날에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양반과 상민의 구분 없이 자신이 설정하는 방법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내가 어떤 사람들 틈에 끼여 살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인간형이 만들어진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통해선 내가 가진 사랑과 소설에 담긴 사랑 이야기를 비교해 어떻게 해야 사랑다운 사랑을 찾아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얼굴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고생의 깊이도 다르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삶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나와 내 가족이 살아보고 싶은 나만의 삶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나 생각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만약 나의 정치철학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못사는 사람 잘살게 하고, 잘사는 사람 더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잘사는 사람 대패질해서 못사는 사람을 메우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그래야 이상이 있고 지향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잘사는 사람을 벗겨 먹는 일에서 시작할 때가 많이 있다. 못사는 편에 든다고 민주를 외칠 수 있는 풍토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잘살고 못살고와 관계없이 정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남처럼 살아보자는 것은 물질적 비교밖에 할 수 없는 것이고 비교되는 자기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평생 죽을 때까지 나보다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만 바라보는 갈등 속에서 불행의 씨앗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성취해 가는 하나하나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과 내 것의 비교를 통해 늘 쫓기듯 살아가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남들은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것을 ‘산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가치의 기본은 의미 부여의 능력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땀에 전 작업복을 자기 자신이 바르게 산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직업에 왜 종사하는가. 회사에 돈만 벌러 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싫어한다.
정직하고 깨끗한 아이로 나를 이 세상에 남겨줬던 아버지처럼 내 자식도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는 영예로움 속에서 삶의 연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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