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백자는 알아도 ‘흑자’는 처음이네…
평일인데도 곤지암도자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광주 곤지암도자공원은 ‘문화와 역사’, ‘놀이와 체험’, ‘자연과 예술’로 구성돼 한나절 즐겁게 보내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곤지암도자공원은 ‘문턱 없는 길’ 즉 보행도움을 받지 않고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도 자랑이다. 공원 중앙에 윗부분만 보면 청자 차병의 뚜껑 같은데 전체를 보면 챙이 넓은 모자 같은 독특한 모양의 흰색 건물이 경기도자박물관이다. 경기도자박물관(관장 강명호)은 한국도자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문박물관이다. 박물관 주변에 전통작가공방과 전시장, 왕실 도자 판매관, 도자 체험교실, 곤지암열린마당 같은 여러 시설이 가마 모양의 돔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자박물관을 개관할 때부터 일하고 있는 강명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 탐방에 나선다. “경기도자박물관은 도자기 축제를 위한 전시용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라 전시 공간이 아주 넉넉합니다” 경기도자박물관은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하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프레스코 1세대 작가 진영선이 협업한 작품이라고 한다.
현재 1층에는 ‘흑자: 익숙하고도 낯선, 오(烏)’라는 흥미로운 기획전 열리고 있다.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알지만 흑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검은 도자기는 이미 백자가 유행할 때부터 만들어졌으나 아주 소수에 그쳤기에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흑자는 흑자만의 특별한 매력을 가진 도자기이다. 흑자를 알리는 이번 기획전은 분명 기대 이상의 즐거움과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 아름다운 도자기로 배우는 우리 역사
경기도자박물관이 광주에 위치한 까닭은 무엇일까? “경기도 광주는 면적의 약 80%가 산지여서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땔감이 풍부한데다가 한강을 따라 서울과 가까워 1467년 조선왕조의 왕실그릇제작소인 사옹원 분원이 설치됐습니다. 광주는 조선시대 500년간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했던 고장이지요” 강 관장이 지은 ‘청소년을 위한 경기도자 이야기’를 보면, 도자기를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서 새로운 성질의 물건으로 만든 것”이라 소개하고 있다. 광주는 흙과 물과 나무, 도공까지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고장이었다.
1층 도자문화실은 도자의 개념과 역사, 제작기법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다양한 전시물을 비롯해 영상과 모형으로 도자기를 쉽게 알려준다. 현미경도 설치하여 도자기의 표면과 속까지 살필 수 있도록 꼼꼼하게 배려한 점도 돋보인다. 그릇처럼 원형으로 이루어진 도자문화실을 차분히 둘러보면 도자기는 과학기술의 집적임을 확인하게 된다. 1250도에서 1300도의 고온에 구워야하는 백자는 16세기까지 명나라와 조선만이 간직한 첨단의 기술이었다. 도자기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가져야 전시 유물과 제대로, 새롭게 만날 수 있다. 계단으로 2층으로 이동하다가 천장을 올려다보니 벽화가 나타난다. 한국 프레스코 1세대 작가 진영선 교수의 작품이다.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손이 마치 천지를 창조하는 신의 손처럼 거룩하게 느껴진다.
상설전시실은 한국 도자기의 멋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공간이다. “이것은 찻잔으로 짐작되는 ‘백자양각 연판문 잔’입니다. 고려청자의 탄생과 발전은 한국 차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지요.” 한국에서 차 문화가 가장 발전한 시대가 고려라는 오래된 사실을 부끄럽게도 이제야 깨닫는다.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도자기와 차의 만남은 행복한 결과를 낳았다. 청아한 빛깔을 창조한 고려청자에서 선비들의 정신을 담은 조선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에 나타난 분청사기도 매우 아름답다. 시원시원한 문양과 따스한 질감을 가진 분청사기에서 한국인의 멋과 여유를 발견한다.
■ 경기도 광주, 조선백자의 고장이 되다
“1467년, 조선 조정이 광주에 국영백자가마인 사옹원 분원을 설치하면서 광주는 조선 백자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맑고 깨끗한 빛깔과 단아한 모양의 ‘백자 음각大명 접시’는 초보자의 눈에도 명품으로 보인다. 그 옆에 놓인 백자의 이름은 ‘백자음각 현(玄)명발’이다.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양질의 백자 굽 안에 ‘천자문’의 순서대로 ‘천, 지, 현, 황’을 음각으로 새긴 것입니다” 역시 ‘분원’에서 만들어낸 백자답게 모양과 빛깔이 빼어나다.
도자기기 표면에 그려진 그림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강 관장은 ‘백자철화 매죽문 편병’을 주목한다. 자세히 보니 깨진 것을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하다. 그럼에도 이 유물을 특히 주목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 편병은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지요. 같은 작품이 두 점 더 있습니다.” 온전한 작품 두 점이 있기 때문에 이 유물에 담긴 이야기와 가치가 살아난 것이란다. 유물을 소개하는 글을 보니 제작년도를 ‘1640~1648년’이라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광주의 관요는 대략 10년마다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10년이면 주변의 땔나무가 떨어져 옮길 수밖에 없었지요. 분원 도자기에는 간지가 적혀 있어 년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푸른 빛깔을 내는 철화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아주 비싼 재료였다. 수입품이었기에 고급 제품에만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도자기에 철화로 그려진 그림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도화서 화원을 분원에 파견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달항아리도 조선인의 여유로운 마음을 닮았다. 완벽한 원형보다 약간 균형이 어그러진 것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짐승이다. 백자에 그려진 용의 발가락 개수가 다섯인지 넷인지를 살펴본다. 다섯은 황제, 넷은 왕이 사용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왕만이 사용했던 용 그림도 세월이 흘러 조선후기가 되면 민간에서도 사용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백자를 비교하며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문화도 왕실에서 양반을 거쳐 평민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음식을 담는 작은 백자접시 뒷면에 단정한 한글 서체로 씌어 있다. 조선의 도공들도 한글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도자기에 새겨진 길상문도 사연을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다. “목숨 수(壽)자와 십장생과 복숭아는 무병장수를, 포도와 석류와 물고기는 다산과 풍요를, 모란과 박쥐는 부귀와 다복을, 잉어와 매미와 두꺼비와 매난국죽 사군자는 학업과 출세를, 용과 호랑이와 수탉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전통가구와 함께 백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고려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도편 1,110여점을 연대기적으로 전시하는 공간도 있다. 경기도의 도자의 역사와 특질을 속살까지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도자와 조각이 어우러진 ‘예술의 숲’
경기도자박물관은 개관 이후 현재까지 기획전과 특별전을 꾸준하게 열어 한국도자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세상에 알려왔다. ‘다향다색-차문화 속 청자 이야기’(2020), ‘코발트 블루 : 조선후기 문방풍경’(2021), ‘복, 간절한 염원의 장식’전(2013),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2014), 경기 정도 600년 기념 특별기획전 ‘백자, 달을 품다’展(2014), ‘빗살무늬-6,000년 경기도자의 첫걸음’展(2015), ‘광주백자: 발굴로 다시 쓰는 분원이야기’(2017), ‘옛 가마터 답사기행’(2016), ‘남북도자 하나되어’(2019),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2019), ‘근대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2020)도 주목되는 기획전이다.
경기도자박물관은 66만7천91㎡의 드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도 좋지만 야외전시실도 훌륭하다. 찬바람이 부는 한겨울이 왔다. 들려오는 소식도 답답하고 우울한 것들뿐이다. 이러한 때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도자기를 앞에 두고 예술을 논하고,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는 ‘이야기마당’을 거쳐 130여 점의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숲속오솔길’(스페인조각공원)을 걸으며 인생을 논하는 여유를 가져야 하리라.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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