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無有定法(무유정법)’을 노래한다. 무유정법이란 세상에는 미리 정해진 법도는 없으며 조건과 인연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불교 철학은 도가 철학의 ‘무위자연’, ‘상선약수’와 유사성이 있다.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제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라도 시대성이 떨어지거나 실천하기 힘들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목표를 정해 놓고 살다가도 세상이 변하면 목표를 수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유정법이며 상선약수다.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를 연구한다. 우주의 최소 구성 요소는 원자라고 한다. 원자는 원자핵의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 형상이다. 우주의 태양계의 모형과 닮았다. 원자핵과 전자의 중간은 모두 비어 있다. 돌고 있는 전자의 움직임은 규칙적이지 않다. ‘양자 도약’으로 유명한 이 학설은 전자는 궤도가 정해지지 않고 조건에 따라 궤도가 수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공 사상과 닮았다.
좀 더 어려운 이야기로 넘어가면 '소립자는 관찰자가 관찰하면 입자로 존재하고 관찰을 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인슈타인은 ‘저 달이 저기 있어서 내가 보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냐’라는 의문을 던졌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는 ‘양자 중첩’을 증명했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죽어 있는 확률과 살아 있는 확률이 중첩돼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무유정법하고 닮지 않았는가.
물(H2O)은 수소 2개와 산소 하나로 구성돼 있다. 원소기호의 주기율표는 그동안 발견된 원소만 나열된 것이다. 우주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가 많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원소들이 조건과 환경에 따라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다. 세상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란 없다. 오직 서로 연기돼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12 연기론’이다.
우주는 미립자인 소립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한다. 또 에너지가 진동하는 끈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소립자는 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다가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소립자가 서로 모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립자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세상은 변해야만 한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공 사상이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은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사상이다. 즉, 모든 것은 변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낮과 밤은 수시로 변하며, 계절도 변하지 않으면 지구는 존재할 수 없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 ‘生者必滅(생자필멸)’. 또한 만나면 언젠가는 이별을 하게 된다, ‘會者定離(회자정리)’. 이렇게 우주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아니, 변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진리다.
세상은 불교의 철학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변하지 않고는 지구는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고 수증기는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가 돼 온 대지에 비를 뿌려준다. 변하기 때문에 지구가 유지된다. 전통을 고집하고 옛것을 좋아한 나머지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멸망한다. 변할 것이냐 마느냐는 이제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시대에 맞게, 상황에 맞게 변하는 종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복진세 칼럼니스트•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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