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전 세계에 무명의병을 알리다
한국사 교과서나 각종 매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의병 사진을 찍은 매켄지는 한국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의 ‘데일리메일’이 파견한 종군기자로 입국했다. 1906년 재입국한 그는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대한제국 의병을 취재해 1908년 ‘대한제국의 비극’으로 출판했고, 1920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써서 일제 식민통치의 야만성과 한국 독립운동을 서양에 소개했다.
특히 1922년 미국의 ‘시카고데일리뉴스’에 ‘경성일보’ 사장 후쿠시마 백작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해 일본이 주장하던 조선인 열등설과 자치능력 결여론을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을 영국의 각 신문사에 무료 배포해 각 신문에서 이 책을 소개하게 해 영국 내에서 조선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조선 독립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됐다.
그 결과 영국 자유당과 노동당의 하원의원들을 중심으로 영국조선동정자협회가 조직돼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와 독립운동에 대한 조사를 결정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한제국의 비극’ 속의 한 장면이다. 한국사 교과서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전국민적으로 알려진 의병 사진을 찍은 사람이 매켄지이며, 그 사진의 원출처가 ‘대한제국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양인이 의병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최초의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 책이 한국인에게 유명한 것은 이 책에 수록된 <사진 1>과 미스터 션샤인이 흥행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사진 1>이 유일한 의병 사진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매켄지는 같은 책에 <사진 3>도 수록해 그가 다수의 의병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상상이 시작된다. 이 사진 속의 의병들은 누구이며,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일까. 그리고 이 사진의 의병들을 매켄지는 어떻게 만날 수 있었고, 매켄지를 의병과 연결해 준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의병 사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끊임없는 추적을 받고 활동하던 의병이 외국인을 만나 인터뷰에 응하거나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매켄지는 자신이 백인 중 유일하게 의병전장을 돌아봤으며, 이 책의 기록은 여러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도움을 준 사람들 중에 매켄지와 의병을 연결해준 사람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켄지는 자신이 의병을 만난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라고 썼다. 양근에 이르렀을 때 18~26세 청년 의병 6명 스스로 찾아와 자신에게 인사했으며, 다음 날 이동 중 20여명의 의병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서양사람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의병 사진인 것이다.
이는 곧 한말 의병이 지향했던 생각이나 사상에 변화가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즉, 위정척사 사상에 기반해 활동한 한말 의병은 서양 역시 외세이므로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기존의 인식에 반하기 때문이다.
의병 역시 변화된 환경을 수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매켄지는 군대 해산 이후 각 지방에서 의병이 발생했고 곳곳에서 의병의 항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면서 이천 방면에서 겪은 사실을 “의병들은 저쪽에 있었지요. 그들은 거기서 전신주를 뽑아 버렸습니다. (중략) 얼마간의 전투가 있은 다음 의병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런 뒤 일본군은 우리 마을을 지나 7개 부락을 거쳐 지나갔습니다. 저쪽을 보십시오. 모두 폐허가 됐습니다”라며 일본군이 민간인에게까지 야만적인 행위를 했음을 확인했다. 나아가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의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의병의 무장과 훈련에 대해 구형의 격발총, 방아쇠는 길이 8인치의 놋쇠, 대부분은 어깨에 총을 걸고 쏘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에 늘어뜨리고 쏘았지만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고 하면서 “1회 공격에 1발밖에 총을 쏠 수 없어 호랑이에게 바짝 다가가 쏘아 죽이는 법을 배운다”고 기록해 의병이 열악한 무장 수준을 극복하기 위해 훈련을 했음을 기록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의병들이 누구인지, 어느 부대인지는 물론이고 이들이 이후 어떻게 활동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경기도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의병의 수가 얼마인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의병들이 일제의 총칼에 숨졌고, 부상 당하였으며, 주변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는 이들에 대한 ‘기억과 계승의 공간’이 변변한 것이 없다. 특히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신 의병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들의 활동과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공간이 시급히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조성운 역사아카이브연구소장
이 기사는 2022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후원: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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