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에도 소낙비가 내렸다. 어른들은 비가 내리면 과일들이 여물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그래도 개구쟁이들은 빗줄기 속에서 마냥 즐거웠다. 철 없던 시절의 추억이다.
▶뭐가 그리 좋은지 비를 맞으며 뛰놀다 출출해지면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꼬락서니 하고는”이라며 타박했다. 빨래 거리를 만들어 온다는 이유에서다. 장독대 옆에서 그렇게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노라면 함초롬히 웃어주는 식물이 있었다. 맨드라미였다. “괜찮아”라고 속삭여 주는 누님 같았다.
▶여름 끝 무렵이었지만 후텁지근했다. 맨드라미는 그럴 즈음 장독대 옆에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장독대 옆은 어머니의 화단이었다. 어머니는 매년 봄 장독대 옆에 맨드라미를 심었다. 소년의 눈에는 닭볏처럼 생긴 모습이 꽃으로 보이진 않았다. 어머니는 맨드라미를 액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식물로 믿었다. 지네가 맨드라미 때문에 장독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녀석, 아니 그녀의 키는 다 자라면 90㎝ 정도다. 어긋나게 달리는 잎은 난상 피침형으로 끝은 뾰족하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8월 원줄기 끝에 닭볏처럼 생긴 꽃이 흰색, 홍색, 황색 등의 색깔로 핀다. 대개는 붉은색으로 피지만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 색과 모양 등이 있다. 꽃받침은 다섯갈래로 갈라지고 갈래 조각은 피침형으로 끝이 뾰족하다.
▶화단에 직접 심기 전에 파종상자에 뿌려 잎이 2~3장 될 때 한번 작은 분에 옮겨 심었다 꽃이 핀 상태로 화단에 30㎝ 간격으로 심었다. 기온이 떨어지면 꽃색은 더욱 화려해진다. 20도 이하 14시간 이내 햇볕을 받아야 꽃눈의 분화가 촉진되고 아담한 형태의 꽃이 핀다. 14시간 이상이 되면 개화도 늦어지고 키도 커진다.
▶꽃 모양이 닭볏을 닮았다고 한자로는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그녀의 친정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인도라는 사실이다. ‘뜨거운 사랑’이란 꽃말까지 있다.
▶우리 꽃으로 알고 누님처럼 대했던 맨드라미가 먼 나라에서 한반도로 시집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오래 되지 않았다. 하긴 원래부터 우리 것들인 식물들이 얼마나 될까. 아침저녁으로 풋내기 감성에 푹 빠지고 있다. 얼떨결에 가을이 여름을 밀어내고 있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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