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명예 얻는 것 하나 없어요. 그저 마을이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죠”
과거 조선시대 정조대왕 능행로에 자리 잡은 시간이 멈춘 마을, 화성시 황계동에서 만난 문문한 화기치상 황계 주민협의체 대표(72)의 소회다.
이곳 마을회관 2층에 오르니 족히 100여권은 돼 보이는 책들마다 제목을 손수 적어놓은 게 눈에 띈다. 그간 도시재생 성과를 직접 기록해놓은 것들이란다.
문 대표는 그 중 3권을 꺼내 자리에 앉는다. 기자가 입을 떼기도 전에 분주히 열정을 토해낸다. 배경은 이랬다.
수원 군공항과 인접해 있는 이 마을은 사방이 군사보호구역이자 개발제한구역이다. 수십 년간 갖가지 규제를 받아 왔다. 발전은 꿈도 못 꾸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젊은 마을구성원이 교통과 교육 등의 문제로 하나둘씩 떠났다. 남은 주민들마저도 불법 건축물로 개개인의 삶만 영위, 정체성을 잃어갔다.
그렇게 마을은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현재는 주민 200여명 중 대부분이 노인에 속하는 이른바 ‘회색마을’로 전락한 상태이다.
그러던 지난 2016년 문 대표가 통장을 맡으면서 마을은 이윽고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평화만 도모하면 되겠지’라는 가벼운 포부였다. 그러나 천성은 어쩔 도리가 없던 그였다.
문 대표는 “통장을 맡고나니 우리 마을이 버려진 것과 다름없다는 걸 느꼈다”며 “제 삶의 터전이자, 정조대왕의 정신이 깃든 이곳을 되살려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그는 우선 마을 슬로건부터 바꿨다. 화기치상(和氣致祥). 음(陰)과 양(陽)이 서로 화합하면 그 기운으로 경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나아가 시에 마을의 존재를 알렸다. 텅 빈 마을에 도로와 공원을 조성해달라는 건의를 통해서였다. 1인 시위도 불사했고, 끝내 이뤄냈다.
지난 2017년에도 시장을 마을로 불러 간담회를 주도했다. 그러면서 정조대왕 능행차로 조성과 군공항 소음 피해보상 차원의 복지관 설립을 요구했다. 이마저도 수용시켰다.
이 기세를 몰아 지난 2018년 4월에는 주민 45명과 함께 도시재생 협의체도 구성했다. 주민의 공감을 최대한 이끌어내 마을 활성화에 힘을 불어넣겠다는 구상이었다.
그 직후 시에 건의해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에 참가, 이듬해 화성시 마을 중 유일하게 선정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에 마을은 170여억원(국비+시비)을 지원받아 마을 대개발에 돌입하게 됐다. 올해까지 10만8천여㎡에 ▲도시재생 어울림센터 건립 ▲수변공원 조성 ▲안전마을 조성사업 등이 추진된다.
여기에 문 대표는 지난해 4월 주민 9명과 함께 ‘정조마을 황계동 마을관리 사회적 협동조합’도 설립했다. 하드웨어에 이은 소프트웨어 구축으로 도시재생의 완결성을 높이자는 취지이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성과들이 그의 ‘자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스스로 부도, 명예도 뒤따르지 않는 고단한 길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문 대표는 “처음엔 마을만 살리자는 목적이었는데, 어느덧 여기까지 와버렸다”며 “얻는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저는 현재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정조의 올곧은 사상처럼 공치사하지 않고, 주변인들에게 그저 행복만 주고 싶다”며 “정조의 정신이 깃든 이 마을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덧붙였다.
화성=박수철·김기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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